대문호 코맥 매카시가 쓰고 거장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카운슬러>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리들리 스콧이 연출하고, 마이클 패스벤더와 카메론 디아즈, 하비에르 바르뎀, 브래드 피트, 페넬로페 크루즈가 출연하는 영화가 있다니,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카운슬러>라는 영화를 기대한 건 살아있는 현대문학의 거장 코맥 매카시가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집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는 대단히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구사하며 황량한 풍경에 황폐한 정서를 담아내는데 능하면서도 대단히 비정한 여운을 남기는 작가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대부분을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 미국 서부시대의 야만을 관통한 <핏빛 자오선>이다.
단언컨대 <카운슬러>만큼 비정한 작품을 보기도 힘들 거다. 이 영화는 당신이 ‘설마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하는, 혹은 이상의 결말로 나아간다. 일말의 자비심도 없다. 그것이 이 영화를 비범하다고 여길 수 있게 만드는 핵심이기도 하지만 <카운슬러>는 날카롭지만 핵심을 찌르는 영화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 영화엔 대단히 중후하고 의미심장한 대사들이 등장하는데 궁극적으론 설계돼 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예를 들자면, 이 영화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카메론 디아즈가 연기하는 말키나의 대사. “정확한 사실엔 온도 따윈 없는 거야.” 이 대사에 빗대어 말하자면 <카운슬러>는 온도가 없는 영화 같다. 영화 자체가 어떤 감정을 품도록 유도하지 않는다는 말. 물론 강렬한 서스펜스와 스릴이 예감되는 스토리의 복선과 파괴적인 이미지들이 존재하는 영화다. 덕분에 영화적이라기 보단 문학적인 비범함이 느껴지는 대목이 많다. 감정의 발화점이 존재하지만 끊는 점이 없다.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가열되는 열기가 느껴지지만 서서히 끓어오르기 보단 순간적으로 증발해버리는 듯한, 액화가 아닌 기화되는 느낌의 영화랄까. 영화는 파괴적인 이미지를 묘사하지만 그 이상으로 참담한 심정으로 가닿는 건 단지 그 이미지 때문이 아니다. 한치의 자비심이 느껴지지 않는 비정함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와닿는 순간들이 너무나 평범한 낯빛으로 칼을 찌르듯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비정함 자체가 일상 같아서 그 세계에서 두 발 딛고 살아남는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두려움이 <카운슬러>에 있다.
그리고 이 비정한 세계관을 굴려나가는 배우들은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좁혀서 관객의 목을 쥐는 듯한 박력과 긴장을 주입하는데 특히 감정이란 것을 온전히 추출해낸 듯한 말키나를 연기하는 카메론 디아즈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다만 <카운슬러>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라기 보단 코맥 매카시의 영화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영화보단 문학으로서 보다 인상적인 순간들이 엿보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풍광들은 영화의 직접적으로 묘사로 소품화되기 보단 소설의 구술을 통해서 상상할 때 보다 인상적일 것도 같다는 감상이 남는다. 덕분에 코맥 매카시의 원작 시나리오가 굉장히 보고 싶어진다. 리들리 스콧보단 코맥 매카시의 인장이 강해 보이는 작품이랄까. 어쨌든 <카운슬러>를 보고 나면 멕시코라는 나라의 근처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완벽하게 휘발될지도 모른다. 길을 가던 남자와 툭 부딪혔더니 목을 죄어 들어오는 올가미가 걸려들어와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한숨이 절로 나와서 땅이 꺼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전편인 <슈렉 3>는 <슈렉>시리즈의 명성을 죄다 깎아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시리즈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강박과 캐릭터의 인기에 온전히 기대버린 듯한 성의 없는 완성도는 지난 두 편의 전작이 일궈낸 성과의 발목을 잡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슈렉 포에버>는 어딘가 의심스러운 작품이다. 단지 <슈렉 3>의 속편이란 점만으로도 <슈렉 포에버>는 시리즈의 배수의 진이나 다름없다. 전편의 실패를 만회할 것이냐. 하지만 <슈렉 포에버>는 다른 의미의 승부수를 던졌다. 시리즈의 피날레, <슈렉 포에버>는 시리즈의 마지막을 공언한 작품이다. 이는 비장한 결의의 일종이거나 모종의 비겁한 변명이다. 물론 판단은 작품의 완성도에 달렸다.
<슈렉 포에버>는 더 이상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시용 괴물이 되어버린 듯한 슈렉의 불만스런 일상을 비춘다. 자신을 빼닮은 세 아이와 사랑하는 아내 피오나,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곁을 지키는 친구 동키와 장화 신은 고양이, 슈렉은 이들과 함께 매일 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아니, 적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 행복하게 보일 것 같은 일상을 버틴다. 결코 변하지 않는 매일은 쳇바퀴 돌듯 찾아오고, 안락한 삶은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된다. 그러니까 슈렉이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의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점차 프리하고 와일드한 지난 날의 일상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그에게 단 하루나마 그 일상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다시 한번 냉정하게 말하자면 <슈렉 포에버>는 더 이상 이 시리즈가 원래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처럼 보인다. 그리고 스스로 시리즈의 마지막을 선언한 지금의 입장에서는 마치 고백처럼 이해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리즈 안에서 성공적인 결과물이었다 평할 만한 <슈렉>과 <슈렉 2>는 기존의 디즈니 월드로 대변되는 착하고 순수한 동화적 패러다임을 전복시키는 패러디 세계관이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의 위트나 유머와 연동됨으로서 시리즈만의 확실한 가치를 어필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슈렉 3>를 비롯해 <슈렉 포에버>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그 세계관의 온전한 상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선 두 편과 달리 그 뒤를 잇는 두 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특징은 애초에 <슈렉>이 패러디하던 세계관이 온전히 껍데기만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자신이 패러디했던 세계관에 대한 독설은 사라지고, 그 알맹이가 사라진 껍데기들이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이며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물론 <슈렉 포에버>에서도 여전한 건 활기 넘치는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 그 자체다. 슈렉은 여전히 슈렉이다. 하지만 <슈렉>은 여전히 <슈렉>이 아니다.
물론 서사적으로 <슈렉 포에버>는 극명한 실패의 사례라고 해도 좋을 <슈렉 3>보다 나은 완성도를 품고 있다. 시리즈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작점과 연결된 에피소드를 착안하며 나름의 전개적 논리를 마련한 것도 발전적이다. 하지만 이는 애초에 <슈렉>이라는 시리즈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할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닌, 혹은 그럴 가능성조차 희박해보이는 기획이다. 동화적 세계관의 껍데기를 엮어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함으로서 스스로 동화가 되려는 것처럼 보이는 <슈렉>을 본다는 건 자신의 앞선 전력을 온전히 망각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슈렉은 그렇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따위가 <슈렉>이 할 수 있는 해피엔딩이었던 것일까. 그나마 다행인 건 <슈렉 포에버>가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제 슈렉이 돌아왔다, 는 변명 따위로 끌려나온 슈렉의 어색한 모습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인 게다.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배회하는 남자는 평범한 행색과 달리 눈초리가 심상찮다. 곧 한 여자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던 남자는 곧 접근을 시도한다. 두 번에 걸친 부딪힘은 남녀를 동상이몽의 비행으로 유도하고, 두 사람의 우연적인 혹은 필연적인 인연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 안에서 범상치 않은 관계로 발전을 거듭해나간다.
<나잇 & 데이>는 스파이물과 액션, 로맨틱 코미디 등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클리셰들로 총공세를 펼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오락물이다. 그만큼 <나잇 & 데이>는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결핍을 고스란히 떠안은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실수라기 보단 고의적인 의도에 가깝다. 공항 한가운데서 두서 없이 출발하는 오프닝 이후로 급행열차처럼 달려나가는 <나잇 & 데이>의 서사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쾌감을 상승시키기 위해 마련됐던 수많은 오락영화들의 전략들을 밀고 나가기 위한 레일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나잇 & 데이>는 지능이 떨어지는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야심에 갇힌 영화가 아니라 그 야심들로부터 형성된 어떤 전형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영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스파이물에서 시작해 로맨틱 코미디로 매듭을 짓는 <나잇 & 데이>는 시종일관 액션과 유머로 범벅이 된 혼합장르물로서 스케일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오락적 묘미를 극대화시키는 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가운데 대단한 물량공세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나잇 & 데이>가 오락이라는 핵심적인 목표를 겨냥할 수 있는 건 영화의 모든 풍경을 배회하는 두 인물로부터 비롯된다. <나잇 & 데이>의 스케일이 영화의 충분조건에 해당된다면 로이 밀러(톰 크루즈)와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이 영화의 가능성을 책임지는 필요조건 그 자체다.
<나잇 & 데이>의 로이 밀러(톰 크루즈)는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과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로부터 고독함과 진지함을 온전히 삭제한 뒤, 그 빈 공간에 낙관과 긍정을 채워넣은 듯한 캐릭터다. 그리고 그 상대역인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마치 기억 상실에 걸려 자신의 능력을 잊어버린 <미녀 삼총사>의 나탈리 쿡처럼 보인다. 두 캐릭터는 <나잇 & 데이>의 쾌감을 발생시키는 원천이자 기폭제다. 음모의 중심에 놓인 스파이와 이에 휘말려 동행하게 된 여인은 생명을 위협하는 적들과 긴박한 추격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감정적 교감을 이뤄나간다. 두 캐릭터가 이뤄내는 사연의 형태보다도 두 캐릭터가 사연의 형태 속에 어떻게 놓여있는가가 먼저 발견된다. 두 캐릭터는 영화의 단점을 가리는 위장막이자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점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나잇 & 데이>를 이루는 대부분의 요소란 과거로의 회귀에 가까우며 이는 흔히 말하는 복고의 의미에 가까운 가치를 품고 있다. 사실 두 캐릭터의 만남으로부토 얻어지는 사연들의 대부분은 낭비적이거나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잇 & 데이>는 좀 더 천연덕스럽고 뻔뻔한 방식으로서 그 낭비적인 신들을 제 입맛에 맞게 버무린다. 중간중간 몽타주신을 이용해서 긴 설득이 필요할 만한 서사를 일거에 압축해버린다거나 세계 각지를 도는 로케이션은 어떤 액션들을 연출하기 좋은 병풍처럼 나열된다. 백치스럽지만 명확하고, 단순하지만 간단하다. <나잇 & 데이>는 명확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오락영화다. 빈 구석이 눈에 띄지만 그 빈 공간마저도 하나의 전략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영악한 작품인 셈이다. 백치와 백치미가 다르듯, 멍청한 척하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다.
불과 2살의 나이에 백혈병에 걸린 케이트(소피아 바실리바)를 위해 엄마 사라(카메론 디아즈)와 아빠 브라이언(제이슨 패트릭)은 맞춤형 아기를 낳는다. 안나(아비게일 프레슬린)는 케이트를 위해 생을 얻은 아이다. 당연히 케이트를 위해 골수를 채취하고 신장 하나를 넘겨줄 운명이다. 그러나 안나는 유명 변호사인 알렉산더 켐벨(알렉 볼드윈)을 찾아가 자신의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소송장을 받아 든 사라는 안나의 태도에 격분하지만 브라이언은 안나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며 안나를 인정하고 오빠인 제시(에반 엘링슨)는 말은 아낀다. 그리고 병세가 심각해지는 케이트로 인해 가족의 시름은 깊어져 간다.
완벽한 가족계획을 통해 태어난 아이. 언니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필연적인 운명을 타고난 동생. 유전자 조작에 의해 인간의 맞춤형 생산이 가능해진 현대에서 만물의 창조에 관여하는 건 단지 신만이 아니다.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시대에서 생명을 잉태한다는 건 단순히 콘돔의 유무에 따라 가늠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유전자 과학의 발달과 함께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를 가족의 갈등과 충돌로 치환한 뒤 화해적 드라마로 뻗어나간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딸의 치료를 위해 맞춤용 아기를 계획한 부모와 이런 태생적 운명을 뒤늦게 거부하는 딸의 충돌,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나머지 가족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문제작에 가까운 소재를 통해 논란을 발생시키지만 그 논란은 가족이란 범위 내의 갈등과 충돌로서 발휘되며 궁극적으로 그 갈등은 가족들의 상흔과 고민을 드러내는 매개로서 작동된다.
<쌍둥이별>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출간되어 인기를 얻었던 조디 피콜트의 원작소설을 스크린에 이양한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가족이라는 운명적 테두리에 귀속된 구성원 개개인의 속내를 들추고 이를 통해 그 테두리의 형태 너머의 본질을 들춘다. 집안에 소송을 거는 막내딸 안나의 독백을 통해 출발하던 1인칭 시점의 플롯은 다른 가족들의 시점으로 중심을 이동하며 가족이란 테두리 내에 갇혀놓았던 개개인의 심리를 스크린에 나열한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단단하게 여며져 있다고 믿었던 구성원들의 마음이 실은 조각처럼 나눠지고 저마다의 결핍과 고독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는 은연 중의 진실이 스크린 위로 조심스럽게 펼쳐진다. 투병 중인 케이트를 위한 온 가족의 헌신은 그 선택의 의미를 벗어나 때때로 가족 간의 상처를 방치하고 저마다의 불합리를 무시하게 만드는 계기로서 작동한다.
소재만으로 문제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과학 발전에서 비롯된 인간적 윤리를 가족의 안방으로 끌고 들어와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궁극적으로 가족에 대한 성찰과 드라마틱한 감동을 거두는 작품이다. 원작의 명료한 문체를 감각적인 영상과 배경음악으로 치환하고 저마다의 1인칭 독백을 통해 수집된 개개인의 심리를 플롯으로 이어나가며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그 바탕이 되는 건 배우들의 열연이며 삭발 연기로 화제가 된 카메론 디아즈의 헌신적 연기만큼이나 아역들의 열연이 대단하다. 특히 소피아 바실리바와 아비게일 프레슬린의 연기는 훌륭하다. 투병 중인 케이트의 고통과 함께 성숙한 내면을 드러내는 소피아 바실리바의 연기는 의외적 결말을 선사하는 영화적 선택을 위한 설득력을 보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아비게일 프레슬린의 똑 부러진 연기 역시 영화의 본심을 감추기 위한 중요한 태도였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성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어린 배우들의 영특한 연기는 문제적 시선을 폭넓게 확장하는 동시에 영화적 흥미를 돋운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류의 삶은 진보하지만 윤리적 가치판단은 나날이 어려워진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그 윤리적 논쟁을 실생활로 이끌고 들어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건드려 깨우치게 만든다. 삶이란 그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산 자가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과 명확히 달라진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결말은 원작의 형태보다도 설득력 있는 형태로서 변주됐다. 그리고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죽음이 무엇을 남기는가라는 질문에 이성적으로 답변하는 동시에 감동마저 선사하는 작품이다. 가족은 결국 살아간다. 누군가의 빈 자리는 영원히 추억된다. 산 자는 살아야 한다. 대신 죽은 자의 꿈을 먹고 새로운 삶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