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폴 버호벤 감독이 연출한 <로보캅>(1987)은 단순한 영웅물이 아니었다. 요즘 흔히 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슈퍼 히어로 무비와도 지극히 거리가 있는 SF 액션물이었고, 그 이전에 피철갑이 된 신체 훼손 이미지가 거리낌 없이 등장하는 B급 영화 특유의 폭력성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했다. 근미래에 무법천지로 변해버린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둔 이 작품은 인간과 로봇의 경계에 선 로보캅을 통해서 자본주의 시대의 횡포와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대한 불안을 해학적인 풍자로 반영한 당대의 SF 컬트작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 폴 버호벤의 손을 떠난 속편들은 오락적인 액션물로 완벽하게 변질됐지만.
할리우드에서 <로보캅>을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일단 원작에 비해서 폭력을 묘사하는 수위가 낮아질 것은 자명했다. 대자본이 투여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위용을 갖춘 리메이크작이 컬트적인 모험을 할 리 없는 노릇이니까. <엘리트 스쿼트> 시리즈로 액션 연출에 일가견이 있음을 증명한 호세 파딜라가 메가폰을 잡은 리메이크작의 운명도 어느 정도 뚜렷해 보였다. 그래서 한편으론 슈퍼히어로 무비뿐만 아니라 변신 로봇의 스펙터클까지 체험한 관객들 사이에서 휴머노이드 형태의 인간형 로봇이 깡통 취급 받을 만한 구시대적 유물로 전락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호세 파딜라는 새로운 <로보캅>을 단순한 액션 롤러코스터로 만들지 않았다. 물론 장기에 가까운 특유의 핸드헬드와 스테디캠 촬영으로 긴박한 현장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로봇의 시점을 고려한, 1인칭 슈팅 게임을 연상시키는 시점을 활용하며 오락적인 쾌감을 삽입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액션신보다도 흥미롭게 여겨지는 건 로보캅이라는 존재의 출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적 혼란과 과학적인 윤리에 관한 갈등에 있다.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로보캅의 육체로 재탄생한 머피(조엘 킨나만)가 겪게 되는 정신적인 붕괴와 충돌은 인간의 편의를 위한 기술의 발달이 인간성의 보존과 충돌하는 현대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질만하다. 경찰의 로봇화를 추진하려는 대기업의 욕망과 결부되어 인간으로서의 사고가 억제된 로보캅이 하나의 선전 도구로 전락하며 공무를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 스스로의 정체성이 몰락하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에 대한 심각한 환기도 가능하다. 특히 오프닝 시퀀스의 레바논 신에서 로봇 군대를 위시한 미군의 질서 유지를 보여주는 광경은 대단히 아찔한 긴장감을 품게 만든다. 위압적인 형태의 로봇들이 사람들을 스캔하며 위협 유무를 판단하는 광경은 역설적인 공포 자체다.
물론 이 모든 건 원작이 품었던 가능성을 보다 얕고 넓게 펼쳐낸 결과다. 리메이크된 작품은 확실히 원작보다 흐릿한 정체성을 품고 있지만 어떤 면에선 보다 명확한 목소리를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성을 도구화하는 현대 자본주의를 비롯해서 제국적인 팍스 아메리카나를 표방하는 미국 스스로에 대한 비판 의식 속에서 첨단 기술의 발달과 인간 본연의 가치가 대립하는 물질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달한다. 원작에 비해서 발달된 영상 기술을 등에 업은 세련된 이미지들은 원작과 또 다른 리메이크작만의 볼거리를 형성한다. 물론 폴 버호벤의 원작에 비견될만한 고전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 말하긴 어렵겠지만 속도감과 박진감을 전달하는 액션신의 설계와 동시대의 문제의식을 수긍할만한 수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선 존중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