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매틱은 확실히 편하다. 하지만 스틱 한번 제대로 잡아보면 그 ‘손맛’을 잊기 힘들다. 물론 기어보다도 중요한 건 타고 싶은 차 그 자체다.
친구에게 물었다. “수동적인 여자와 능동적인 여자 중 누가 좋아?” 류현진의 직구처럼 답이 날아왔다. “낮에는 수동적이고 밤에는 능동적인 여자!” 그야말로 능동적이다.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든, 수컷들은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운 여자’를 원한다. 이왕이면 침대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능동적인 여자를 원한다고 말하는 건 한번 어떻게든 ‘해볼라꼬’ 노력했던 기억의 산실일 것이다. 그러니 능동적인 여자가 좋다. 혹시 능동적인 여자 이상의 자동적인 여자라면, 주님께 영광.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라. ‘너무 수동적인 여자친구 때문에 고민입니다.’ ‘관계시 수동적인 여자는 어떻게 적극적이게 만들까요?’ ‘연애를 할 때 수동적인 여자 아닌 능동적인 여자 되라?’ ‘능동적인 여자의 섹스.’ ‘남자는 능동적인 여자를 좋아한다.’ 등등. 세상 수컷들의 관심은 로마가 아니라 섹스로 통한다.
‘수동적’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란 이렇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의 작용을 받아 움직이는. 또는 그런 것.’ 반대로 ‘자동적’은 이렇게 정의된다. ‘다른 힘을 빌리지 아니하고 저절로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또는 그런 것.’ 그러니까 수동적인 여자란 달과 같은 존재다. 자신을 비춰줄 남자가 필요하다. 상대의 액션에 따라서 리액션도 제각각이다. 흥미롭지만 속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다. 자동적인 여자란 자연히 태양과 같다. 주변에 빛과 온기를 전한다. 누리고 싶은 존재다. 에너지가 넘친다. 하지만 때론 견딜 수 없게 뜨겁다. 지나치게 주장이 강해서 지칠 때도 많다. 고로 섹스를 기준으로 여성의 수동성과 자동성을 판단한다는 건 다분히 수컷의 본능일 뿐이다. 게다가 남녀가 만나서 발정기의 개처럼 섹스만 하는 건 아니다.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도 ‘밤이 오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사나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이순재 선생님의 특별한 제안에 귀가 솔깃해질 나이가 온다. 인생은 길고, 섹스는 짧다. 수동적인가, 자동적인가라는 이분법적인 구별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얼마나 매력적인가라는 기준이다.
페로몬 향수보다도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지 몰라도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일지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물론 니체는 ‘두 사람이 있는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니체는 평생 혼자 살았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말은 자웅동체가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전략이 필요하다. 수동적인 여자와 자동적인 여자를 구별하는 건 남자일지 몰라도 기준은 분명 대상이 되는 여성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성격을 자신의 매력으로 승화시키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필요하다.
“아니, 1년을 사귀었는데 한번을 안 해주는 거야. 내가 무슨 스님이냐? 그래서 1년 되는 기념일에 해외로 여행을 가기로 했어. 같이 해외까지 나가서도 설마! 그리고 역시 드디어! 했지. 했어. 그리고는 한국으로 돌아왔어. 아, 이젠 좀 쉽겠지. 아놔, 그런데 이게 뭐야. 또 안 해주는 거야. 내가 걔랑 한 3년 사귀었는데 1년에 한 두 번했나? 그런데 진짜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지금도 종종 걔가 생각난다니까? 헤어진 지가 언젠데.” 정말 아이러니한 사연이다. 쉬운 여자가 아니었기에 미련이 남는다. 자동적인 여자가 보다 좋다고 느낀다는 건 감정적 판단이 아니라 경험적 믿음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를 리드해야 한다고 믿는다. 침대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녀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말이 없다. “그냥 너 편한 대로 해”라는 말을 믿었다가 맘 상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차라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거나 아예 상황을 리드해주는 자동적인 여자가 수동적인 여자보다 상대적으로 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연상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의 심리도 어쩌면 이런 것이다. 그녀들은 남자를 자신을 위한 지갑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댈 수 있는 편안한 파트너십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남녀란 섹슈얼한 긴장감이 필요한 관계다. 연인이 아니라 모자지간이 돼선 곤란하다. 당신이 원하는 건 연애이지 육아가 아니니까. ‘나는 솔직하고 털털한 여성이야. 그게 매력이지’라고 믿는다면 당신이 구애하는 그 남자에게도 그런 동성 친구 몇 명쯤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남자의 ‘베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정신 차려야 한다.
“클럽에서 만난 두 명의 여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해봐. 한 명은 정말 화끈하게 잘 놀아. 그런데 그 옆에 좀처럼 말도 없고 새침한 여자가 앉아있어. 둘 다 예뻐. 섹시해. 일단 그날은 화끈한 여자랑 자겠지. 그런데 아마 그 다음 날엔 그 옆에 있는 여자에게 연락할걸.” 좀 놀아본 지인의 말이다. 모든 남자의 심리가 꼭 이렇진 않다. 하지만 참고할 필요는 있다. 물론 내숭 떠는 여자는 매력이 없다. 정확하게는 내숭만 떠는 여자는 별로다. 물론 적당한 애교에 녹지 않는 남자는 드물다. 하지만 꼭 콧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그저 상냥하게 한번 거절해보시라. “미안하지만 안돼.” 당신의 자동적인 여자의 유전자를 억누르고 수동적인 여자의 탈을 써보라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먹기 쉬운 떡은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먹기 힘들어지면 애써 손을 뻗는다. 남자의 마음도 간사하다. 쉬운 여자가 되느니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마음을 얻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체질을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적당히 조절하라는 말이지. 지나치게 수동적인, 의존성이 심한 여자는 피곤하다. 누구라도 쉽게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적절한 수동적 태도는 이성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매력이 될 수 있다. 채찍질을 한번 했으면 당근을 하나 물려줘야 하는 법이다. 긴장과 이완의 균형처럼 수동과 자동의 균형을 맞추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남자를 리드하는 건 좋다. 처음부터 모든 패를 보여줘선 곤란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을 아낄 필요가 있다. 좋아한다면 모든 것을 줄 필요가 있다. 다만 일방적이거나 쉽게 줘선 곤란하다는 말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에피소드에서 캐리는 상담사에게 하소연한다. 연애도 잘 안 풀리고, 인생도 꼬여간다며, 자신이 만난 남자들이 왜 다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그때 상담사가 말했다. “당신이 만난 이상한 남자들의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죠.” 모든 이유는 당신의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자동적인 여자이건, 수동적인 여자이건, 남자의 선택을 기다리지 마라. 스스로를 뽑기 인형이라 여기지 않는다면. 선택을 이끄는 여자가 돼야 한다. 매력 있는 여자가 돼야 한다. 남자가 원하는 것도 그런 여자이니까.
언제나 인형 놀이를 하듯이 영화를 만들어왔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놀랍도록 비범한 걸작이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거듭해서 보면 볼수록 그가 대단히 고집스러운 감독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게 됩니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상하좌우로 정갈하게 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여지없이 딱 떨어지는 좌우대칭의공간 구도, 카메라가 비추는 공간 곳곳을 채운 소품들 하나하나가 모여 이루는 인위적인 완결성, 그 인위적인 풍경 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캐릭터들의 도드라진 설정과 과장된 연극적인 연기를 펼치며캐릭터 역시 하나의 무대 장치처럼 자리잡게 만드는 배우들, 유아적인 낙천성을 끌어안은 동화적인 세계관.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지닌 이 모든 일관성은 그의 영화들을 특별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특수한 개성이라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귀여운 소품 이상의 무언가로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영화 자체가 지닌 특이한 개성에 동감하면서도 사적인 취향으로 점철된 소유물 취급을 당하기 쉽다는 말이죠. 대중적인 공감대를 얻기 쉬운 영화는 아닐 거라는 말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동원되는 모든 요소들 또한 감독의 취향과 의도에 완벽하게 복무하고 있고, 철저히통제되고 있습니다. 물론웨스 앤더슨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그의 인형 놀이에 동참하면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그 놀이를 즐길 것임에 분명합니다. 배우들 입장에선 이런 방식의 기회가 많지 않을뿐더러 믿을만한 감독이 쥐어준 일탈과도 같은 연기적 경험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세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놀라운 캐스팅입니다. 개중 몇몇은 정말 두 신 안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영화에 출연하는 건 그만큼 이 놀이를 즐기고 싶어한다는 방증이겠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란 감독에 대한 배우들의 선호도를 대변하는 척도가 될만한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영화는 동유럽에 위치한 가상의 국가 주브로스카의 산 꼭대기에 위치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시작됩니다. 한때 세계 최고급 호텔로 꼽히던 이 호텔의 흥망에 대해서 간략하게 브리핑하며 그 간극의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던 영화는 직접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 사연에 대해서 상세하게 구술, 정확하게는 재현하기 시작합니다. 궁극적으로<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야기꾼의 영화입니다. 웨스 앤더슨이 지어낸 허구의 세계를 영화 속 화자의 입을 빌어서 사실적 재현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셈이죠. 언제나 그렇듯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역시 웨스 앤더슨의 전작들처럼 허무맹랑하지만 귀엽고 순진한 어드벤처의 형식을 통해서 이야기를 밀고 나갑니다.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다양한 공간들이 등장하고 그 공간과 공간의 연계는 세트를 부순 자리에 새로운 세트를 바로 지어세우듯이 동선의 연계성을 의심한다는 것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손쉽고 간편하게 이뤄집니다. 그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임에 틀림없으며 그 공간의 변화와 함께 등장하고 퇴장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수집하는 것 역시 특별한 재미를 주는 작품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처럼천진난만한 낙관성으로 점철되는 영화가 아닙니다. 인물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통해서 형성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어드벤처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 안에선 이례적인 폭력성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치고 냉소적인 유머와 개성 있는 캐릭터의 향연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대단히 동적이며 과장돼 있고,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말부에 다다르면 기존의 웨스 앤더슨표 영화들과다른, 놀라울 정도로 생소한 감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비극성을 감정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리듯 환기시키는데 생각 이상으로 큰 울림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론 웨스 앤더슨의 데뷔작인 <바틀 로켓>부터 최근작이었던 <문라이즈 킹덤>까지 단 한번도 체감해보지 못했던 상심과 애수에 가깝습니다.
기존의 웨스 앤더슨 영화들이 외부의 사건을 감독 개인의내적인 세계관에 집약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의 모티프가 됐을 법한 외부적인 사건을 내적인 세계관에 반영해서 인테리어했을 뿐, 그 외적인 모티프의 너비를 보존한 가운데서 보다 폭넓게 외부적인 영역으로 확장해 낸듯한 인상입니다. 영화는 여러 모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부른 살풍경들을 연상시키는데 이런 비극성의 요소들을 극적인 소품으로 활용하지 않고정면으로 마주보며 그 의미 안으로돌진해버립니다. 결국 그 비극성을 우회하지 않고 돌파해버리는 것이죠. 결국 객석의 관객들 역시 영화와 함께 그 비극성의 통증을 고스란히 관통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드러낸 최초의 비범함이자 거장으로서의 면모라고도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부연할 필요도 없는 걸작입니다. 게다가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가운데서도 이런 감정적인 여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웨스 앤더슨이란 창작자가품고 있었던 새로운 너비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 웨스 앤더슨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회자될 작품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론 영화의 결말부를 지나며 가슴 속에서 종이 울리는 기분마저 느꼈습니다끼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울림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 상영관을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멍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분이었죠.
웨스 앤더슨의 영화답게 음악의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명 음악감독인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와 랜달 포스터가 함께 완성한 이번 OST는 러시안 포크를 비롯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유럽의 악기들을 최대한 활용한 음악들로 채워져 있는데 덕분에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선율에도 영화의 특이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것이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리는 세계관의 특이성을 보다 도드라지게 반영하고 있다는 감상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화면 비율이 거듭 바뀌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에 유행했던 2.35:1의 와이드 스크린 비율을 비롯해서 1930년대에 유행했던 1.37:1, 그리고 오늘날에 자주 활용되는 1.85:1의 비율로 화면이 변하는데 이는 각각 그 시대에 유행했던 화면비를 적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화면비의 적용이란 곧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엄격한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 시대의 시선을 대변하겠다는 야심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적극적으로 반영한 최초의 현실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과적인 상심이나 애수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 웨스 앤더슨과 같은 창작자 역시도 간과할 수 없는 폭력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사실 아닐까요. 영화의 배경이 된 동유럽에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슈퍼스타 K> 시즌5의 실패 앞에서 혹자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위기라고 떠들었다. <K팝 스타 3>는 이를 비웃듯이 흥하고 있다.
요즘 <K팝 스타 3>는 지난 두 시즌과 또 다른 궤도에 올라선 것만 같다. 게다가 그 이전까지 오디션 프로그램의 최강자로 꼽혔던 <슈퍼 스타 K> 시즌5의 몰락 이후에 거둔 성공이기에 더욱 그 성과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같다. 잘 알다시피 <K팝 스타 3>의 변화란 양현석, 박진영과 함께 심사위원석에 앉게 된 유희열의 등장이다. 사실 기우가 없지 않았다. 지난 두 번의 시즌 동안 심사위원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이가 바로 그 자리의 주인공이었던 보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희열은 <K팝 스타>에 완벽하게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장본인이 됐다.
사실 유희열의 가세로 인한 가장 큰 수혜주는 심사위원 박진영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2도에서 6도 사이를 오가는 화음 지적과 ‘공기 반 소리 반’이란 명언까지 남기며 온갖 비아냥을 들어왔던 박진영은 유희열의 등장으로 인해서 오히려 어떤 전문성을 인정받게 된 것만 같다. 지난 시즌까지 심사위원을 맡았던 세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음악적인 전문가로서의 심사 견해를 표현한 건 박진영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진영이 비아냥을 듣게 되는 건 그가 음악 전문가의 입장에서 심사하기 때문이 아니다. 박진영 혼자서 전문가로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던 양현석과 보아는 음악적인 전문가라기 보단 자신이 몸담은 제작사의 대표자로서 위치하는 경향이 강했다. 기본적으로 옥석을 가리는 눈이 존재할지 몰라도 음악적인 견해를 판단할 수 있는 정확한 귀를 갖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덕분에 심사위원석에 앉은 그 누구도 박진영이 구사하는 단어나 화법에 대해서 놀릴 수는 있어도 그 견해에 대해서 명확하게 지지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인상은 아니었다. 마치 심사위원석의 외딴 섬 같았다.
유희열은 작곡과 제작 능력을 지닌 전문 뮤지션이다. 그만큼 음악적인 전문성에 신뢰가 간다. 가끔씩 박진영이 외계어처럼 화음과 발성에 관한 지적을 하거나 칭찬을 할 때, 유희열은 그 반대편에서 적당한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고, 그 의견에 동참하기도 한다. 보다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때론 냉철하고 과감하다. 어떤 식으로든 박진영이라는 심사위원으로서의 면모보다도 음악가로서의 역할을 납득시키는데 한 몫을 한다. 전반적으로 심사위원석에서 긴장된 분위기가 누그러진 반면 웃음의 빈도가 늘었고 활력이 더해진 것도적절하게 치고 들어오는 유희열 특유의짖굿은 입담 덕분때문이다. 게다가 때때로 진행자 역할을 해낸다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K팝 스타 3>는 유희열의 영입을 통해서 덕분에 오디션 프로그램으로서의, 포괄적으론 음악 프로그램으로서의 전문성을 보다 확실하게 구축하는 동시에 예능으로서의 재미까지 확보했다. 유희열이 세 심사위원의 균형에 있어서 무게 중심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덕분이다. 보아가 없어서가 아니다. 유희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K팝 스타>는 오디션 프로그램이기 전에 음악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이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시청자에게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물론 말로 설명하는 게 아니다. 가수를 뽑는 프로그램이니 노래로서 설명하는 거다. <슈퍼스타 K> 시즌5가 간과한 것이 여기에 있다. <슈퍼스타 K> 시즌5는 가수를 뽑는다고 했지만 예선을 진행하는 동안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별로 없었다. 예선을 보는 내내 끝까지 편집만 했다. 노래는 뭉텅뭉텅 잘리고, 오디션 참여자들의 사연 팔기에 연연하고, 다음 장면에 대한 호기심만 배가시키는데 눈이 멀었다. 노래도 제대로 들려주지 않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들은 날이 갈수록 엄격하기만 했다. 이유를 알 길이 없는 셈이다. 그만큼 경연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경연 참여자의 매력은 사연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대가 제대로 보일 때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응원하고 싶은 사람을 찾고 싶어한다. 누가 몇 점을 받았는가에 대한 흥미는 그 다음이다. 게다가 이상한 건 심사위원들 또한 매너리즘에 빠진 것처럼 굴었다는 것이다. 특히 생방송에 들어간 이후부턴 평점 자체가 들쑥날쑥했다. 오디션 참가자들도 심사위원들도 하나 같이 매력을 어필하지 못했다. 흥미가 없으니 긴장도 되지 않는다. 볼 맛이 안 난다. 2%도 미치지 못한 결승전 시청률은 결과적으로 그리 됐다는 수치상의 결과를 벗어나서 그 과정을 보건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엄하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위기를 진단하는 글들이 쏟아졌지만 그건 그저 <슈퍼스타 K>만의 자만에서 비롯된 실패였다.
<K팝 스타 3>는 <슈퍼스타 K> 시즌5가 간과한 것들에 제대로 집중하는 인상이다. 기본에 철저하다. <K팝 스타 3>를 보면서 단 한번도 노래에 지나친 편집을 가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경연에 참여한 이의 실력을 시청자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시청자 역시 오디션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시청자가 팬이 되는 건 이런 과정을 통해서다. 덕분에 볼 맛도, 들을 맛도 난다. 누가 어떤 목소리를 지녔는지, 무대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겠다. 그만큼 심사위원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프로그램 내내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이 <K팝 스타 3>를 궤도에 올려놓고 있다. 반대로 <슈퍼스타 K> 시즌5가 팬을 만들기는커녕 죄다 밀어낸 건 바로 이런 과정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 자체가 어린 참가자들을 경쟁으로 밀어 넣는다는 점에서 가혹한 면이 있다. 그만큼 땀과 눈물을 딛고 그 무대에 선 이들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그 무대에서 찬사를 받든, 지적을 받든, 그 무대에 서있는 순간만큼은 그 무대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존중이란 간단하다. 경쟁을 통한 당락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는 것보다도 중요한 건 바로 무대이고 노래다. 노래하는 이에겐 최상의 무대를, 지켜보는 이에겐 관람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환경을 제공해주면 된다. <K팝 스타 3>가 그렇다. 그래서 흥행하는 것이다.
생방송 무대에 진출한 톱 10 가운데 두 팀의 탈락자가 가려진 지난 3월 9일 방송은 시청률 10.5%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성공적이다. 지금까지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관철해나가고 있다고 평할만하다. 게다가 앞으로의 생방송 무대를 채울 8명의 경쟁자들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는 인상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언제나처럼 기대 반 응원 반으로 지켜보겠다. 그러니까 권진아 파이팅.(…응?)
올해에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작품마다 명암이 엇갈렸다. 보고 싶은 작품은 여전히 넘쳤다.
사실 생중계를 보진 못했다. 그저 결과만 실시간으로 체크했을 뿐이다. 그래서 U2의 라이브 무대를 생방송으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쉬웠다. 게다가 사회를 맡은 엘렌 드제너러스가 꽤 진행을 잘했던 것 같다. 미국의 유명한 TV쇼 프로그램인 <엘렌 쇼>의 진행자답게 유연한 진행 실력을 뽐내면서도 시상식의 품위에 어울리는 유머를 구사한다. 시상식이 열리는 할리우드의 코닥 극장으로 피자를 배달시켜서 브래드 피트가 손수 서빙을 하게 만든 건 정말 훗날에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일 거다. 그녀가 할리우드의 대단한 배우들과 찍은 셀카가 트위터상에서 무한하게 리트윗되는 과정은 오스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의 배우들이 모인 현장에서 권위보다도 대단히 소소한 동료애를 목격한다는 건 할리우드가 지닌 저력을 체감한다는 것과 같다. 영화를 통해서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료 의식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인상이 오랜 할리우드의 역사와 함께 해온 86년 전통의 아카데미 시상식만의 저력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상 결과를 놓고 보자면 이번 아카데미는 <그래비티>를 위한 무대였던 것 같다. 10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고,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시각효과 부문을 비롯해서 촬영, 음향효과 등 기술 부문을 거의 독식한 건 익히 예상한 결과였다. 지난 해에 발표된 영화 중 <그래비티>만한 기술적인 성취도를 보여준 영화를 언급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다만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주요부문에서 <그래비티>가 호명될 수 있을 지가 관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편집상과 감독상 부분 수상은 할리우드가 보기 드물게 SF영화를 인정한 결과라는 점에서 이례적이지만 한편으론 <그래비티>가 구현해낸 영상 기술이 특정한 장르적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인 영화적 감동을 전달하는데 혁혁한 매개체가 됐기 때문임을 아카데미 위원회 역시 인정한 것이 아닐까. 사실 <아메리칸 허슬>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편집상을 <그래비티>가 차지한 것도 기술적인 효과를 넘어서 영화라는 결과물로서의 완성도를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만약 <그래비티>가 작품상을 수상했다면 어땠을까? 반대로 <노예 12년>의 감독 스티브 맥퀸이 작품상 대신 감독상을 쥘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랬다면 제86회 아카데미는 역사상 꼽힐만한 오스카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기술적인 진보를 인정하는 의미는 더해지고 흑인 감독의 능력을 인정한 오스카로 기억됐을 테니까. 어쨌든 스티브 맥퀸은 처음으로 작품상을 수상한 흑인 감독으로 기록되며 역사에 남게 됐다. 덕분에 브래드 피트 또한 피자를 서빙했던 특별한 경험을 넘어서 배우로서 오른 적 없었던 아카데미의 단상을 제작자로서 오르게 됐다. <노예 12년>은 흑인 감독이 연출한 흑인 노예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보다 주목을 받을만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흑인 감독이 이토록 중립적인 시각과 건조한 감정 묘사를 통해서 그 시대성을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었다. 걸작의 면모가 충분한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앞서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한편으로 대중적인 호감을 얻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건 되레 이 영화가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화가 묘사하는 시대성의 비극을 생생하고도 건조하게 전달하는, 그만큼 무겁고 엄중한 시대적 목격이 될만한 영화다. 작품상 수상은 이 영화에게 어울리는 대우처럼 보인다. 그리고 <노예 12년>은 <헝거>와 <셰임>을 통해서 자신의 재능을 줄곧 증명해왔던 스티브 맥퀸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난 거장의 면모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환영할만한 결과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매튜 맥커너히와자레드 레토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정확하게는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 출연한 이후부터 배우 경력의 전후를 나눠버리 듯 눈부신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매튜 맥커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완벽하게 메소드 배우로 진화해 버린다. 에이즈에 걸린 텍사스의 마초 역을 맡은그는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미국 내에서 금지된 해외 제약사의 약품을 들여오고 이를 판매하는 사업을 벌이며 불합리한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맞서는 동시에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속에 갇혀 살던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인물을 온 몸으로 연기한다. 단순히 체중을 얼마를 줄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이 영화 속에서 살았던 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장담하건대 아마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이후로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된 어떤 배우도 이만한 연기를 보여줬던 적이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의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영화엔 자레드 레토도 있다. 아무래도 국내 인지도가 낮은 배우이지만 <레퀴엠>과 같은 작품에서 혹은 지난해에 개봉된 <미스터 노바디>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이 배우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보다 확실하게자신의존재감을 발산한다. 매튜 맥커너히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란 영화를 가득 채우는 면과 같다면, 자레드 레토는 이 영화의 결을 만드는 선과 같다. 일찍이 <영 빅토리아>와 같은 실화 바탕의 영화를 연출한바 있는 장 마크 발레를 통해서 재현되는 시대적 풍경 또한 인상적이며 두 배우의 훌륭한 연기를 위해 마련된 완벽한 무대 노릇을 한다.
한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이 아카데미를 수상한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시종일관 모순된 일상을 전전하는 신경질적인 여인을 연기하며 풍자적인 웃음을 유발하다 결말부에 다다라 놀랍도록 처연한 심연의 민낯을 드러내며 영화 자체의 감정적인온도를 바꿔버린 그녀의 표정은 애초에 <블루 재스민>이란 영화가 품고 있었던 완벽한 결정과도 같았다. 물론 한편으론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에겐 조금 아쉬운 오스카가 아니었을까. 지난 2010년 <블라인드 사이드>로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거머쥐긴 했지만 <그래비티>는 그녀에게 대단히 특별한 작품이었을 거다. 한편으론 이번 아카데미 최대의 이변으로 꼽힐만한 루피타 니옹고의 여우조연상 수상은 지난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프레셔스>의 모니카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겼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 놀라운 결과다. 납득할 수 없는 결과는 아니지만 미친 듯한 연기력을 선보인 <아메리칸 허슬>의 제니퍼 로렌스나 탁월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 <블루 재스민>의 샐리 호킨스를 생각한다면 두고두고 이례적인 선택으로 회자될 것만 같다.
<슈퍼배드 2>를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린 <겨울왕국>이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건 역시 익히 예상한 바이지만 픽사가 아닌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건 최초란 점에서 특별한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은 2002년에 처음 신설됐다. 게다가 전통적인 주제가의 명가였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상 수상은 2000년 제72회 오스카에서 <타잔>으로 수상한 필 콜린스 이후로 무려 14년만이기도 하다. 한편 <겨울왕국> 상영 전에 짧게 소개된 단편 애니메이션 <말을 잡아라!>가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이 유력하다고 생각했지만 <미스터 허블롯>이란 작품에게 밀린 건 꽤나 놀라웠다.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변천사를 디즈니의 전통적인 흑백 캐릭터들을 통해서 유머러스한 연출과 테크니컬한 구현에 성공한 수작을 밀어낸 작품의 정체가 실로 궁금하다. 한편 미술상과 의상상을 수상하며 2관왕에 오른 <위대한 개츠비>는 영화가 지닌 야심에 비해서 아쉬웠던 결과물을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씁쓸한 결과처럼 보인다. 올해만큼은 내심 오스카 트로피를 노렸을지도 모를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또 다른 주연작이었다는 사실에선묘한 연민이 드는 것도 같다. SNS상에서 떠도는 레오의 아카데미 수상 실패에 관한 '짤방'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수상 실패가 인류 대화합에 기여하고 있는 것도 같다. 게다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매튜 맥커너히가 그와 함께 잠시 호흡을 맞춘신을 복기한다면동정심이 더해지는 효과가 유발되는것 같다.
물론 이번 아카데미에서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던 건 <그래비티>와 함께 10개 부문 후보로 오른 <아메리칸 허슬>이었다. 이 작품이 단 한 개 부문도 수상하지 못한 건 역시 이례적이다. 사실 <아메리칸 허슬>은 영화를 만드는 기능적인 면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으로 보이는 반면 결과적으로 정서적인 울림이 얕은 작품처럼 느껴지긴 했다. 마치 캐릭터들의 전장처럼 보일 정도로 배우들 저마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지는이 영화는 시대를 조망하는 시야와 능수능란한 연출과 빠른 편집이 돋보이는 코미디물이지만 그 실화의 재현이 끝내특별한 감흥까지 가 닿는다는 인상을 느끼진 못했다. 뛰어난 범작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것이 아마도 골든글로브에 비해서 영화적으로 보수적인 아카데미 위원회의 호응을 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을지도. 어쨌든 축제는 끝났고, <아메리칸 허슬>은 놀랍게도 무관의 제왕으로 남겨졌다.
한편 각본상을 수상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허>와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파올로 소렌티노의 연출작 <그레이트 뷰티>가 궁금하다. 해외 평에 따르면 <허>에서 호아퀸 피닉스가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존 말코비치 되기>와 <어댑테이션>,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같이 범상치 않는 작품들을 연출해온 스파이크 존즈의 작품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또한 전작 <아버지를 위한 노래>로 한국에서도 알려진바 있었던 파올로 소렌티노의 <그레이트 뷰티> 역시 눈길을 끈다. 참고로 <그레이트 뷰티>는 6월에 개봉된다고 한다. 아직 <허>는 개봉 여부가 불투명한 인상인데 아카데미의 힘을 빌어서 개봉에 탄력을 받았으면 좋겠다. 또한 수상엔 실패했지만 스타 캐스팅 하나 없는 흑백 영화로서 주요 부문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네브라스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디센던트>와 <사이드웨이>, <어바웃 슈미트>와 같은 작품을 연이어 내놓은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신작이라니 어찌 기대하지 아니할 수가. 이미 해외에선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아카데미 특수를 마저 누릴 순 없을까. 우리가 아카데미를 주목하는 것도 그곳에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가 있기 때문이니까.
지난 2월 23일에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았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Invisible People>이란 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유엔난민협회와 제일기획이 공동으로 기획한 전시로서 개최된 지 2주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사람들’이란 전세계의 난민들을 의미한다. 난민들은 고국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전쟁으로 인해서,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서, 인종 학대로 인해서 자신의 나라를 잃었거나 등져야만 했던 이들을 우린 난민이라고 부른다. 지난해 UN의 통계 발표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난민의 수가 약 4천5백2십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4.1초당 1명의 난민이 발생한다고 한다.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3층에 있는 전시장에 들어서서 볼 수 있는 건 전시장 벽을 둘러싼 영상이다. 벽에 걸린 한 LCD 모니터에선 난민들에 대한 사연과 난민에 대한 시민들의 생각을 담은 짤막한 영상을 재차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모니터에선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시킨 영상이 중계되고 있었다. 미술관 안팎에 놓인 카메라를 통해서 중계되는 실시간 영상이 공통적으로 비추는 건 난민들이었다. 물론 실제 난민이 아니다. 전시를 기획한 제일기획의 김홍탁 마스터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미니어처는 아프리카의 난민촌에서 만난 난민들을 3D 스캔한 뒤 3D 프린터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 난민의 미니어처는 전시장 곳곳을 비롯해서 미술관 안팎의 사소한 풍경 속에 자리하고 있다. 모니터 너머에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머무는 풍경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시장 곳곳엔 미니어처들이 배치돼있고, 전시 카탈로그엔 전시장 지도로 이 미니어처들이 자리하는 공간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니어처들의 주변엔 모델이 된 난민의 이름과 QR코드가 있는데 이 QR코드를 통해서 스마트폰으로 그들에 대한 직접적인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다. 전시장 중앙에 자리한 기둥의 터치스크린 모니터를 통해서 응원의 메세지도 전달할 수 있다. 인터랙티브한 아이디어와 의미 있는 메시지를 결합한 기획으로서 흥미를 제시한다. 다만 인터뷰 영상에 좀 더 심도 있는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면 보다 진한 의미를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김홍탁 마스터는 실질적으로 미니어처를 접근성이 좋은 공간에 배치하고 싶기도 했지만 개당 30만원 상당인 미니어처의 훼손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이런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전시장의 좁은 면적 또한 관객의 흥미를 휘발시킬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좋은 아이디어를 통해서 좋은 시도를 해본다는 점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가치 있는 전시라고 생각한다. 예산이라던가, 여러 가지 현실적인 한계를 아이디어로서 돌파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최소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여지라도 열어줄 수 있다면 성공적인 전시가 아닐까. 원래 3월 2일에 종료될 예정이었던 전시는 3월 30일까지 계속된다. 참고로 관람료는 무료다. 그저 찾아가기만 하면 보인다.
<미 앤 유>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말년작이 될 것임을 제외한다면 큰 특이점이 없는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거나 비범한 걸작으로 분류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노장만이 지닐 수 있는 사려 깊은 시선을 명징하게 증명하는 작품이다. <몽상가들> 이후로 무려 10년 만에 발표한 베르톨루치의 <미 앤 유>는 소소한 성장 영화에 가깝다. 물론 영화 속의 상황이란 그리 평범하지 않다. 지하실에 마련한 자신만의 아지트에서 은신을 즐기려던 소년이 이복 누나와 우연히 동거하게 되며 벌어지는 7일 간의 사연이란 그 공간성과 행위 설정의 의도로부터 어떤 지적인 메타포를 읽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미 앤 유>는 한 시대를 풍미한 노장이 새로운 어린 세대에게 내미는 따뜻한 손길에 가깝다. 부모 세대로부터 얻은 상처를 통해서 고립의 장벽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혹은 자신을 망가뜨릴 탐닉과 환각으로 도피하려는 동세대간의 소통을 통해서 삶에 대한 회복과 치유를 일깨울 수 있다는 조언이자 충고 혹은 그러한 믿음의 전달에 가깝다. 혁명과 자유를 꿈꾸던 20대의 유아기적 낭만을 아름다운 미장센 안에 담아낸 <몽상가들>이 역설적으로 텅빈 도구 같은 영화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미 앤 유>는 본질적인 질문에 집중하는 인상이라 결과적으로 꽉 찬 인상이기도. ‘Space Oddity’와 함께 맞이한 엔딩 시퀀스에서 소년의 얼굴을 줌인하는 엔딩 컷은 사실 보기 드물게 낡은 방식이라 생경하기도 했는데 베르톨루치라는 감독의 시대를 반추했을 땐 묘하게 다가오는 것도 같았다. 지나갈 시대를 미리 보고 있다는 기분. 그래서 어쩌면 <미 앤 유>는 베르톨루치의 유언 같은 작품일지도 모르겠다고, 내심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