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육체를 대신하는 첨단 로봇의 시대. <써로게이트 Surrogate>는 본래 단어의 의미처럼 ‘대리자’로서 기능하는 로봇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인간을 대신한 로봇의 육체가 주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집에 누운 채 두뇌활동만으로 로봇을 조종한다. 덕분에 인간이 자취를 감춘 거리엔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한 인공피부를 두른 로봇들로 가득하다. 성형수술을 하지 않아도 얼짱이 될 수 있고, 다이어트와 운동에 신경 쓰지 않아도 몸짱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단순히 대리적 행위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정적 교감마저 주인과 공유할 수 있는 써로게이트는 자신을 조종하는 주체의 삶을 완벽하게 대신하는 대리인이다.
취재와 인터뷰 영상을 거칠게 편집해 서사적으로 배열한 도입부는 <써로게이트>가 주창한 세계관에 대한 객관성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과 같다. 써로게이트를 혁신이라 일컫는 생산자와 몇몇 과학자, 그리고 써로게이트의 반대편에 놓인 세력들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는 영상은 <써로게이트>에 내포된 문제의식을 심각하게 부각시킨다. 써로게이트가 개발되어 인류의 범죄율이 완벽히 사라졌다는 17년 간의 서사를 간략히 정리하는 도입부를 넘어 현재에 다다르며 본격적인 서사를 밀고 나가는 <써로게이트>는 정체불명의 살인사건을 묘사하며 의문스럽게 본론으로 들어선다.
주인과 교감하되 피로나 충격을 전달하지 않는 로봇의 형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만약 이 기술이 현존한다면 인류의 삶은 질적으로 풍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사상 가능성이 높은 고난이도 작업에 인간 대신 써로게이트를 조종시킨다면 일의 정밀도는 높아지고 인간이 위험에 노출될 확률도 현저히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써로게이트>에서의 써로게이트는 특정한 기능적 작동을 위해 마련된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는다. 온전히 인간의 삶을 대신하다 못해 장악해버린 로봇의 도시에서 집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일상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써로게이트>는 고의적으로 비관적인 감상을 도모하는 작품이다.
자신의 행동범위를 온전히 기계에게 양도해버린 인간들의 삶은 편리라기 보단 일종의 포기처럼 보일 정도로 기계에 예속된 삶을 산다. 그건 어쩌면 기계라는 숙주에게 육체를 강탈당한 채 에너지 공급원으로 사육되는 인간들의 비관적 미래를 그린 <매트릭스>를 응용한 버전처럼 보일 정도다. 궁극적으로 써로게이트는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문명에 의해 점령당한 인간들의 미래를 그리는 SF묵시록과 궤가 다르다. 타의적으로 삶을 빼앗긴 인류의 양상과 달리 자의적으로 삶을 양도한 인간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대리적 삶을 향유한다. 이는 직접적인 육체적 행위를 배제한 채 온전히 정신적 활동에 기댄 인간의 삶이 과연 완전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낳는다.
‘써로게이트’는 그 상상력에 제기되는 현실성의 의문을 집요하게 따져 묻지만 않는다면 흥미로운 문제제기를 이루는 소재라 할만하다. 혈색 없는 표정으로 인간의 움직임과 감정마저 대신하는 기계적 육체는 그로테스크한 감상을 도모하는 동시에 그 존재적 형태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긴다. 인간의 뇌파를 통해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로 작동하는 써로게이트가 인간의 모든 대리적 행위를 가능케 한다는 <써로게이트>의 설정은 개인적 범위와 사회적 범위에서의 접촉과 고립을 통해 다양한 감정적 양상을 발전시켜나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 만한 것이다. 다만 그 자질을 <써로게이트>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건널 수 있다면 말이다.
인간의 일상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써로게이트에 대한 기술적 가능성에 품을 만한 의심을 묵과한다 해도 그 기술이 완벽하게 보편화된 인류의 풍경은 지나친 허풍에 가깝다. 현실적 여건에 대한 물음도 그렇거니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유행적 풍토가 현상을 넘어 보편적인 삶의 풍경으로 뿌리를 내렸다는 영화적 설명에 수긍하기란 쉽지 않다. 설정에 대한 의문은 스토리의 진전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될만한 것이다. 범죄수사물의 형태에서 음모론의 양상으로 발전해나가는 스토리는 적절한 설득력을 등에 업고 진전된다. 결국 기이하게 통용돼버린 기이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개인, 그리어(브루스 윌리스)의 감정적 자각과 충동은 정착된 세계관의 질서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건한 것이라지만 실상 그 감정을 세계관의 전복으로 활용하는 영화적 태도가 지나치게 안이한 탓에 특별한 의미 자체를 무마시킨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부서 버리는 광경을 설득력 있는 것처럼 관람하길 강요하는 느낌이다.
<써로게이트>는 세계관에 대한 디자인에 심취해 그럴듯한 이미지를 구사할 뿐, 그 구동방식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아이디어에 숨결을 불어넣는 건 표면적인 설정에 대한 강요만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기본적인 설정에 적절한 설득력을 내장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껍데기를 만끽하는 권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인류와 대비되는 대리 로봇의 존재를 통해 휴머니즘적 성찰까지 경유하고 액션영화로서의 묘미까지 내달리곤 하는 <써로게이트>의 재원적 야심은 부실한 설계도 덕분에 일거에 무마된다. 설득력이 부족한 세계관 덕분에 기초적인 아이디어로부터 얻어지는 흥미는 손쉽게 휘발된다. 특히나 상투적인 결말은 <써로게이트>가 지극히 안일한 영화임을 인증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주름이 선명한 브루스 윌리스의 얼굴만이 추억을 자극할 뿐이다.
중국의 시성 두보의 오언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에서 제목을 빌린 <호우시절>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라는 의미를 지닌다. <호우시절>은 곧 ‘호애(愛)시절’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재회한 과거의 연인은 시간 속에서 낡아가던 기억을 현재에서 되새김질하며 다시 한번 로맨스적 예감을 꿈꾼다. ‘때를 알고 내린 좋은 비’처럼 ‘때를 알고 만난 좋은 인연’을 그린 <호우시절>은 낭만적인 로맨스 멜로다.
건설중장비회사 팀장으로 근무하는 박동하(정우성)는 중국 사천의 청두로 출장을 가게 되고 현지 지사장(김상호)을 만나 ‘두보초당’으로 안내를 받는다. 두보초당을 구경하던 박동하의 시선이 초당을 안내하는 여자 가이드에게 머무른다. 그 시선을 느낀 가이드의 눈빛에 놀라움이 선연하다. 과거 중국유학시절 연인이었던 박동하와 메이(고원원)는 그렇게 우연히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회포를 푼다. 우연한 만남 속에 지난 이별의 아쉬움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이 감돈다. 엇갈림이 빚어낸 안타까움이 번져 그리움이 되어 앙금과도 같은 추억으로 침전한다. <호우시절>은 그 앙금과도 같은 로맨스적 추억이 현실에서 재생된다는, 판타지적 로맨스다.
수채화처럼 투명한 역광 톤으로 포착된 이국적 풍경 속에서 자리한 선남선녀의 이미지는 <호우시절>을 순정만화처럼 특별하게 치장한다. 특히 우월한 기럭지로 매장면을 특별하게 수놓는 정우성과 싱그러움과 우아함을 동시에 갖춘 고원원의 미소는 <호우시절>을 좀처럼 평범한 러브스토리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특별한 매력을 부여한다. 사실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우연히 재회해서 묵은 감정에 생기를 불어넣게 된다는 사연은 보편적이라기보단 특별하다 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호우시절>은 그 특별한 사연에 담긴 감정의 보편성에 적절한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먼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내고 빛 바랜 감정을 다시 숙성시켜나가는 며칠 간의 로맨스를 풋풋하고 아련하게 묘사하며 그 말미에 긍정적 여운을 남기며 극적 낭만을 성숙시킨다.
본래 <호우시절>은 쓰촨성 지진을 추모하기 위해 세 개의 단편 옴니버스로 기획된 <청두, 사랑해>에 참여한 허진호 감독의 작품을 장편으로 리폼된 작품이다. 중국 청두를 배경으로 두 남녀의 짧은 재회와 이별을 그리는 <호우시절>의 단편적인 서사도 어쩌면 그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상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유일하게 풋풋한 기운이 산들거리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한 <호우시절>은 사실상 작가적 욕심보다도 기획적 태도가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도 좋은 형태로 완성된 결과물이다. 그만큼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소품에 가깝게 이해해도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쓰촨성 대지진과 개인의 사연을 연동시키는 방식이나 그 현장을 예감하게 만드는 몇몇 이미지는 본래 <호우시절>의 기획의도를 재확인시키는 증거나 다름없다.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로 낭만의 존속을 아련하면서도 첨예하게 그려내는 허진호 감독은 <호우시절>을 전작들보다 무던한 멜로로 완성했다. 새로운 로맨스를 맞이하기 위해 남녀는 환절기 감기와 같은 진통을 건너고 삶의 면역력을 높인 뒤 성숙한 계절에 들어선다. <호우시절>은 느낌표라기 보단 쉼표에 가까운 작품이다. 허진호 감독의 한 계절을 이루는 작품이라기 보단적절한 이음새에 가까운, 간절기 멜로다.
일명 FPS(First-Person Shooter)게임이라고 불리는 1인칭 슈팅 게임을 즐기는 당신의 시점을 대변하는 버추얼 캐릭터가 만약 당신과 동일한 현실상의 인간이라면 과연 그 게임을 즐길 수 있을까? <게이머>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시뮬레이션되어 오락적 쾌감을 발생시키는 게임의 반윤리적 속성을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연동한 액션영화다. 가상이 아닌 현실 안에서, 캐릭터가 아닌 인간이 서바이벌 게임을 벌여나간다는 설정은 비현실적 공간에서 체감되는 폭력적 오락성의 쾌감을 현실의 도마 위로 올린 문제제기적 속성을 발생시킨다.
비현실의 공간에서 구사되는 폭력성을 통해 본래 폭력이 지닌 잔혹한 속성을 망각시키고 오히려 오락적 쾌감을 구현하는 게임이 리얼리티한 세계관 안에서 생존을 위한 실제적 살육이 돼버린 세상,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 <게이머>는 이성이 마비된 듯 가상현실의 대리적 환각과 환락에 도취된 인간들의 비이성적 세계를 단순하게 일반화시킨 세계를 통해 게임이라는 속성의 기본적 태도를 윤리적 문제로 치환한다. 사실상 <게이머>가 디자인한 세계관은 비범한 척하지만 실은 단순하고 얄팍하다.
가상의 디스플레이가 미래지향적인 테크놀로지의 극단성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미래의 세상은 지극히 평범한 현재적 풍경을 두르고 있다. 인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나노셀 칩을 머리에 이식한 죄수들은 1인칭 슈팅게임의 캐릭터가 되어 그들을 직접 컨트롤하는 플레이어들의 손을 통해 생존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 가늠할 수 없는 기술적 발전을 드러내는 미래적 테크놀로지 세계관에서 빌딩 숲으로 이뤄진 도시의 평범한 현재성은 <게이머>가 지닌 설정의 얄팍함을 감출 수 없는 지점이다.
<게이머>는 디스토피아의 껍데기를 두른 액션영화에 불과하다. 단지 비관적인 세계관의 껍데기를 수단처럼 두르고 오락적 쾌감을 장착한 액션영화에 불과하다. 현란한 비주얼과 과감한 물량공세로 이뤄진 <게이머>의 액션 시퀀스는 그런 욕망 자체를 대변한다. 그러나 <게이머>가 전시하는 액션신은 기이하게 지겹다. 창의적인 동선을 직조하기 보단 시종일관 화면만 흔들어대는 통에 시각적 피로감만 축적되고 지나치게 안일한 캐릭터들을 줄곧 내세우며 결과에 대한 기대감을 상실시킨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게이머>는 지극히 전형적인 용두사미 영화다. 안일하게 진전시키는 이야기는 결국 플롯의 공백을 낳고 스스로 벌려놓은 이야기를 정리해낼 엄두도 내지 못하다 나태한 감동으로 모든 상황을 종식시킨다. 94분 간의 러닝타임 동안 게임을 즐겼다면 차라리 이보다 나았을까, 기회비용을 생각하게 만든다.
중국의 시성 두보의 오언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에서 따온 <호우시절>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란 본래 의미를 ‘때를 알고 만난 좋은 인연’이란 의미로 변용한다. <호우시절>은 곧 ‘호애(愛)시절’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재회한 옛 연인이 다시 로맨스에 빠져든다. 엇갈림과 그리움을 매개로 운명적 러브스토리를 연출하고 앙금처럼 내려앉은 추억 속 감정을 현재로 소환한다.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재회해 먼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내고 묵은 감정을 다시 숙성시켜나가는 며칠 간의 로맨스를 풋풋하면서도 아련하게 묘사해나간 말미에 발전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긍정적 여운이 아련하게 깃든다. 수채화처럼 투명한 역광 톤으로 포착된 이국적 풍경 속에 놓인 선남선녀의 자태가 마치 순정만화의 한 장면처럼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만 순정적인 로맨스의 보편적 감정을 설득력 있게 진전시켜나간다. 우월한 기럭지로 매장면을 화보처럼 수놓는 정우성과 싱그러운 미소 가운데서도 우아한 깊이가 묻어나는 고원원의 조화도 인상적이다.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로 낭만의 존속을 아련하면서도 첨예하게 그려내는 허진호 감독은 <호우시절>을 보다 무던한 멜로로 완성했다.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한 계절을 이루는 작품이라기 보단 적절한 이음새에 가까운 간절기 멜로다.
1인칭 슈팅 게임, 일명 FPS게임을 즐기는 당신이 모니터 너머로 몰입하고 있는 캐릭터가 가상의 이미지가 아닌 실제 사람이라면 그건 과연 게임이라 말할 수 있을까. 버츄얼 캐릭터가 아닌 현실의 인간을 조종해서 서바이벌 게임을 펼쳐나가는 미래를 배경으로 삼은 <게이머>는 디스토피아의 껍데기를 두른 액션 영화다. 잔혹성을 망각시키는 게임의 폐해를 시뮬레이션되는 가상적 환각에 중독된 인간들이 넘실거리는 미래적 세계관과 연동한다. 현란한 액션신은 기이하게 지겹다. 창의적인 동선을 직조하기 보단 화면만 흔들어대는 통에 되레 시각적 피로감만 축적되는 느낌이다. 동시에 세계관의 디자인 역시 딱히 인상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가상의 디스플레이는 미래적인데 어째 세상은 현재의 수준을 유지하는 걸까. 액션은 진부하고 감동은 고리타분하다. 특히나 전형적인 용두사미적 한계를 여지 없이 드러내는 결말부까지 확인하고 나면 차라리 게임을 즐기기 위해 로그인하는 게 극장을 찾는 것 보다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란 확신을 클리어하게 되는 기분이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띄운 건 김명민이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백업이 조화를 이룬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공헌도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대사의 함량 미달이다.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자꾸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김명민)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지나친 오용이다. 합의되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진전되는 로맨스를 깎아지른 절벽마냥 드러내며 출발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을 진전시키기보단 변이하듯 전시한다. 쉽게 웃고 쉽게 울다가도 곧잘 정색한다. 마치 신파지만 신파로서 기능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듯 비극적 감수성에 발을 담그다 이내 달아난다. 사랑과 죽음을 무게중심으로 둔 플롯을 평행선처럼 대치시키며 멜로적 감수성을 확보해나간다. 일종의 평행선처럼 대치한 두 플롯이 각자 감정의 영역을 확보하며 이야기의 영역을 확대해나가지만 좀처럼 접목되지 못한 채 별개의 영역을 맴도는 두 플롯은 <내 사랑 내 곁에>의 감정을 분열시켜나간다.
루게릭병에 걸려 사지가 굳어가는 남자와 시체 닦는 여자의 로맨스. 죽음과 밀접한 두 사람의 연애는 끝내 눈물을 부르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사랑 내 곁에>가 자아내는 멜로적 감수성의 출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사랑의 언약과 운명적 파기보다도 인상적이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남자는 죽을 것이고, 여자는 망자가 된 연인 생각에 눈물지을 것이 빤하다. 결국 그 눈물을 얼마나 식상하지 않게 포장하고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가 <내 사랑 내 곁에>의 관건인 셈. (궁극적으로 비극을 연출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 할만한) 로맨스를 도입부에서부터 급작스럽게 밀어붙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쉽게 웃고 쉽게 울면서도 곧잘 정색하는 영화다. 좀 더 농익을만한 감정들이 인위적인 수순에 의해 절제되고 감정적 고양을 차단당하며 인색할 정도로 얕은 수위의 감정을 허락 받는다.
모친상을 당한 종우(김명민)와 장례대행사에서 일하는 지수(하지원)가 만나 곧 연인이 되는 과정은 감정선의 설득력을 배려하지 않은 것마냥 급작스럽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의 무르익음을 설명하며 감정선의 설득력을 획득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마냥 멜로의 시작을 무뚝뚝한 단면처럼 잘라내듯 내보인다. 그 이후로 농밀하게 진전되는 로맨스는 비극적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환경을 외면하듯 생기 있게 그려진다. 전후반부의 감정적 격차를 통해 신파적 깊이를 우려내는 <너는 내 운명>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 내 곁에> 역시 전후반의 감정적 격차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며 감정선을 조절한다.
감정이란 것이 매번 설득력 있는 서사를 담보로 서서히 우러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급작스런 감정적 변화를 선보이는 서사적 흐름에 설득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랑 내 곁에>가 선택한, 본질적으로 박진표 감독이 선택한 감정의 급변이 그 방식의 활용면에서 효율적인가를 의심해볼 여지는 있다. 그것이 박진표식 멜로라는 이름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그런 감정적 절제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직접적인 대사와 나레이션 독백까지 동원하며 감정을 직접 실어 나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스크린 밖에 놓인 관객의 감정이 무르익기를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는 영화다. 관객 스스로가 그 감정선에 들어서기 전에 스크린은 감정을 뚝뚝 떨어뜨리다 일거에 방류한 뒤 곧잘 표정을 바꿔버리고 지난 감정을 탈색시킨다.
최루성 신파를 지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어느 정도 인정할만한 방식이지만 그 의도 내에서도 거둬내야 할 감정적 수긍이 있었다면 그 방면에서는 실패한 형식이다. 멜로적 감수성을 통해 승부수를 띄우는 <내 사랑 내 곁에>가 눈물을 자아내는 멜로의 상투성을 포기한 건 도전적이나 그 의도 안에서 숙성시켜야 할 감정적 키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건 역시나 식상한 일이다. 동시에 로맨스와 죽음에서 비롯되는 멜로적 감수성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기보단 별개적으로 괴리되는 인상이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감정처럼 서로 마주선 두 형태의 멜로적 플롯을 끝내 이어 붙이지 못한 <내 사랑 내 곁에>가 죽음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맥락을 접목시키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말해도 될 것이다.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인상적이라 할만한 지점은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설득력 있게 그려나가는 과정에 있다. 현실적인 좌절감을 외면하기 위해 비극을 외면하고 희망을 연기하던 인물들이 비극의 무게에 무기력하게 짓눌리는 희망의 실체를 발견하는 순간, 삶은 좌절로 급격하게 내려앉는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부각시키는 건 김명민의 헌신이겠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적절한 백업이 조화를 이루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연기적 공헌과 별개로 그들이 던지는 대사에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전적으로 대사의 함량 때문이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종종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명백한 오용이다. 신파로서 지나친 감정적 고양을 자제하려 한 의도는 존중할만하나 그 의도 안에서도 실패의 흔적이 역력하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하지만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치열한 경쟁과 끝없는 노력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무대에서 이를 입증한 이만이 명성을 얻고 성공이란 단어를 거머쥔다. 80년대 동명작품을 리메이크한 <페임>은 성공을 꿈꾸는 청춘남녀의 스토리를 담보로 춤과 음악적 묘미를 발산하는 뮤지컬 영화다. 무엇보다도 80년대의 <페임>과 2009년의 <페임>은 대중문화의 시대적 변화를 통해 큰 차별점을 둔다.
알란 파커의 80년대 원작에서 들려진 타이틀 넘버 ‘페임(fame)’을 변주한 동명타이틀곡만으로도 새로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페임>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대중문화적 패러다임을 적극 반영한 작품이다. 엠비언트 뮤직이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 힙합 등 현대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을 비롯해 현대무용까지 포괄한 대중문화의 변이를 대거 활용한 <페임>은 80년대 원작과 전혀 다른 포장지를 활용함으로써 리메이크물로서의 차별화를 이룬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페임>은 뉴욕의 유명 예술고 입학 오디션에 무수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기까지의 진급과정을 서사적 줄기로 밀어간다. 오디션과 매학년 시기, 그리고 졸업까지, 이 모든 과정을 서사적 챕터로 구분한 <페임>은 학생들의 성장과 관계적 진전을 주요한 사건으로 다룬다. 그만큼 청춘의 감수성을 밑천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인물 관계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묘미가 마련된다.
다양한 학생들의 단계적 성장을 지켜보는 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까닭에 집중력 있는 성장담을 그려내지 못한다는 건 <페임>이 성장드라마로서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분절된 챕터로 구성된 입학과 진급, 졸업까지의 과정이 드라마의 진전을 방해하고,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이 서사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는 건 일면 아쉬운 측면이다. 그럼에도 <페임>은 분명 뮤지컬 영화로서 즐길만한 순간들이 자리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빠른 컷으로 시선을 잡아 끄는 초반부 오디션 장면부터 즉흥적인 연주로 다양한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식당 시퀀스, 그 밖에도 무도회를 비롯한 다양한 가무의 향연이 곳곳에 배치되어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든다. 특히 피날레를 장식하는 졸업공연은 분명한 볼거리다.
혈기왕성한 도전과 낭만이 깃든 예술고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생기발랄한 청춘의 일상을 그려나가며 에너지를 확보한다. 무엇보다도 <페임>의 덕목은 성취만큼이나 좌절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단지 성장하는 학생의 사연에 집중하기보다도 어린 학생들의 재능을 다스리고 바른 길로 이끄는 교사들의 진실된 표정과 솔직한 조언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프로 댄서가 되길 원하는 제자의 실력이 부족함을 냉정하게 조언함과 동시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주는 교사의 얼굴은 경쟁의 본질이란 단지 누군가를 이겨내는 것이 아닌 자신에 대한 끝없는 극복임을 일깨운다. 단지 타인보다 위에 서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바로 경쟁의 본질임을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도 <페임>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엄격한 교육문화와 자발적이고 여유로운 경쟁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타인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경쟁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결국 그 체제에서의 낙오는 좌절보단 새로운 도전을 낳는다. 줄세우기를 통해 성공하는 자와 낙오하는 자 사이에 선명한 금을 그어버리는 사회에서는 결코 꿈꿀 수 없는 낭만이 실로 부럽다.
조선말기, 질곡의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허구의 로맨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실존인물을 밑그림으로 허구적 로맨스를 채색한 작품이다. 기록적 역사에 근거를 둔 재현이 아닌, 실존인물을 통해 뻗어나간 상상을 스크린에 입힌다. 비극적 역사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을 비극적 멜로의 주인공으로 재생산한다. 이런 사연이 있었다면 어떨까, 정도의 가벼운 거짓말을 실제적 삶에 덧칠한다. 논픽션의 캐릭터에 픽션의 삶을 입힌다는 건 나름대로 쓸만한 설정이다. 그런데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추구하는 픽션의 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명(조승우)의 순애보에 동화되기엔 그 얕은 사연에 감정을 담그기 망설여지고, 대원군(천호진)과 명성황후 민자영(수애)이 벌이는 심리전까지 어지럽게 날뛰는 통에 감정이 산만하다. 그 가운데서 판타지에 가깝게 연출된 CG액션신이 종종 스크린을 채운다. 분명 멜로적 플롯이 주가 되는 것 같은데 멜로에 집중하자니 손발이 오그라들고, 역사적 플롯에 눈을 돌리자니 영화를 볼 이유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이건 멜로드라마도, 역사스페셜도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명성황후를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치환해서 얻어낸 값어치가 고작 이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고작 이걸 해보자고 92억이나 되는 제작비를 썼단 말이다. 덕분에 미술은 꽤나 볼만하다만, 스크린을 전시관 윈도우로 착각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 이걸 어쩐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 그것이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말이기도 하다. 다수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때때로 전체적인 관습처럼 오용되어 개인의 특수한 취향을 제한하고 보편적 권리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강압으로 작동한다. <날아라 펭귄>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폭력들을 드라마투르기로 엮어낸 작품이다. 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4번째 영화 <날아라 펭귄>은 다양한 감독들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시선 시리즈들과 달리 임순례 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한 첫 번째 장편 인권위 영화이기도 하다.
교육열이 대단한 엄마(문소리)덕분에 과도한 스케줄에 시달리는 아들 승윤이(안도규)는 자상한 아빠(박원상)를 통해 종종 출구를 찾는다. 구청에서 일하는 엄마의 직장에선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못 마시는 신입사원 이주훈(최규환)이 들어와 상사들의 공분을 산다. 그런 부하직원들을 아래에 둔 권과장(손병호)은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난 자식들과 이를 돌보기 위해 함께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기러기 아빠다. 그리고 황혼에 접어든 권과장의 아버지 권선생(박인환)은 뒤늦게 제 삶을 찾겠다는 아내 송여사(정혜선)의 선언에 분개한다.
<날아라 펭귄>은 가정에서 사회까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 내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가치관의 불협화음을 전시하는 동시에 개인적 범위의 삶을 옥죄면서도 무분별하게 방치된 부조리를 들춘다. 영어교육열풍 속에서 지나친 학습량을 요구당하는 초등학생 아이와 이를 강요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고단함, 자녀의 교육 때문에 아내마저 외국에 보내고 홀로 국내에 남아 뒷바라지를 하는 아빠의 고독은 이 땅에서 무분별하게 방치되는 개인들의 비극이나 다름없다. 삼겹살과 소주 회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신입사원의 식성을 다수의 취향에 반한다며 비정상적 존재라 치부하거나 반평생을 순종하는 아내로서 살아오길 강요했던 남편이 뒤늦게 제 삶을 즐기겠다는 아내의 변화에 발끈하는 풍경 역시 부조리한 관습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했던 이들의 폭력적 관성이다.
<날아라 펭귄>은 에피소드로 분절된 시선 시리즈와 달리 장편으로 제작됐지만 사실상 4개의 단편 에피소드를 유기적으로 이어 붙이듯 구성됐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유사한 형태를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일관된 관점을 유지시키며 에피소드를 나열함으로써 주제의식을 진전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조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관행들을 열거하고 문제의식을 축적해나간다. 하지만 <날아라 펭귄>은 날을 세운 주장보단 유연한 드라마로서 문제의식을 아우른다.
가정과 직장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 영화의 풍경은 일차원적인 실생활의 단면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분히 현실적이다. 동시에 그 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사건들은 평면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문제의식을 관통하되 유연한 드라마로 극적 흥미를 돋운다. 다만 지나치게 현실성을 반영한 플롯을 나열하는 <날아라 펭귄>이 기존의 시선 시리즈에 비해 창의성이 떨어지는 평면적 기획이라 이해된다는 점은 아쉬움을 부르는 측면이다. 하지만 보다 선명한 현실적 문제의식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날아라 펭귄>의 성과는 분명하다.
사실 <날아라 펭귄>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문제들은 사회가 개인들의 불행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엄마가 아들의 영어교육에 고단할 정도로 관심을 쏟아야 하고 자식들과 아내를 외국으로 보내며 홀로 고독한 생활을 감당하는 아빠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개인들에게 그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영어교육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입장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빠의 반목은 개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적 불행이라기 보단 사회적 시스템이 이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해주지 않고 개인의 몫으로 방치하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암묵적인 규율처럼 굳어진 집단적 논리는 개인의 권리와 취향을 손쉽게 무시하고 억압한다. 이런 부조리한 조직적 풍토는 사회 전반적인 조직 문화를 장악하고 개개인의 스트레스를 축적한다. 전체라는 이름으로 의무화된 조직적 강압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발언권을 축소시킨다. 소주 한잔 못하거나 2차 회식에 동참하지 않는 이를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몰락시킨다. 개인의 선택권을 전체라는 이름 아래 무시하는 풍토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하위 일방적인 명령체계로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업무적인 창의성마저 떨어뜨린다. 결국 이는 잠재적인 충돌과 갈등 자체를 무마시키고 조직의 부조리를 더욱 강권하게 다져나간다는 점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인 스트레스를 심화시키면서 개개인의 행복을 억압한다.
비극으로부터 개개인을 구출하는 방법이란 개개인들의 성찰과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개별적인 숙성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작은 변화들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적 풍토의 변화를 통해 큰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날아라 펭귄>은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불행이 무엇에서 야기되는가를 드러내는 영화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의 형태들은 문제의식을 떨어뜨리지 않는 동시에 그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는 끈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날아라 펭귄>은 분명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개개인을 불행한 일상에 방치하는 사회적 부조리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보다 나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아주 작은 변화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날아라 펭귄>은 그 작은 행복을 위해 가능한 변화들을 말하는 영화다. 지금 우리가 꼭 인지해야 할 가능한 변화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