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문> 단평

cinemania 2009. 12. 1. 14:36

누군가는 오그라들어 등마저 굽어버릴 판에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대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의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문제가 아니다. 극장을 나와서 난 못 보겠네, 난 보겠네, 38선을 긋고 총뿌리를 겨눠본들 부질없고 하찮은 짓이다. <트와일라잇>을 보고 그 때 오그라든 손가락이 여전히 펴지질 않아, 라는 관객이라면 <뉴 문>은 꿈도 꾸지 말고 머리맡의 달이나 봐라. 하지만 태양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리는 스와브로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를 보고 마음이 두근거렸다면 티켓을 사라. 결국 취향의 문제다. 결국은 그 오그라듦을 감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의 문제다. 귀여니 소설을 보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맞는 것과 같은 개념적 충격을 느꼈다면 <뉴 문> 130분 간 자기 성찰을 거듭하다 득도하는 시간이 될 게다. 만약 <뉴 문>이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피 튀기는 사투 즈음으로 알고 극장을 찾았다면 팔자를 탓해라. 물론 거기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취향의 신세계를 발견하고 커밍아웃을 외치게 될진 모를 일이다만 그것이 장담하기 어려운 도박의 확률임을 깨닫는 게 보다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를 일이라는데 내 전재산과 오른손을 건다, 는 훼이크고, 그러니까 그렇단 말이다. <뉴 문>을 보고 할 수 있는 건 이런 말 장난에 불과하다. 그냥 그런 영화일 뿐이란 말이지. 그러니 그냥 웃지요. 화내면 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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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 사무엘상 17 48-51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블라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진 엘라 계곡에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블라셋의 거인전사 골리앗을 물매(새총)로 물리쳤다는 이스라엘의 청년영웅 다윗을 그린다. 성서를 통해 전승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그 이후로 현세까지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며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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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과거부터 인간들은 달을 통해 미래를 읽고, 현재를 파악했다. 영원을 누릴 듯 이글거리는 태양과 달리 순간을 견디지 못할 듯 위태롭게 이지러지다 차오름을 반복하는 달은 그만큼 신비롭되 불길한 것이었다. 1969,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디딘 이후로도 그곳은 여전히 낯선 영역이다. 환형의 굴레를 끊임없이 돌고 도는 달을 향한 인류적 호기심이 신비에서 실리로 변모했을 뿐, 그 구체는 여전히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큼 미지수의 창작적 자원량을 보유한 미지의 영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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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의 신화, 아니메의 전설, 오타쿠의 복음. 신도적인 팬덤에 둘러 쌓여 끊임없이 복기되고 해석되는 묵시록 <에반게리온>은 그 이름에 얽힌 수많은 언어만으로도 반열에 오를만한 작품이다. 단순히 작품의 개별적 가치를 넘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신드롬으로서 이미 하나의 거대한 세계임을 증명했다. <에반게리온>의 매력은 그 세계관의 너비를 짐작할 수 없는 비정형성에 있다. 메카닉 애니메이션의 형태 안에 잠재된 성장담, 그리고 오타쿠 문화의 총아적 이미지까지, 그 모든 요소가 그것을 해석하고 독해하는 이들의 세계관 안에서 거듭 확장되고 이를 통해 다양한 의미를 재생산시킨다는 점에서 <에반게리온>은 진화하는 유기체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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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단평

cinemania 2009. 11. 20. 15:31

아내가 살인했다. 아니, 살인한 것 같다. 형사인 남편이 살인현장에서 발견한 물증들은 정확하게 아내를 진범으로 겨냥하고 있다. 대학동기인 동료형사에 대한 불리한 증언마저 고지식하게 해낼 수 밖에 없었던 원칙주의자 형사는 남편으로서 기로에 선다. 남몰래 물증의 은폐와 훼손을 감행한다. 그러나 수사가 거듭될수록 은폐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증거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그리고 도무지 돌아설 수 없는 일이다. <세븐 데이즈>의 각본을 쓴 윤재구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시크릿>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공공적인 윤리에 발붙여야 할 이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얹어놓은 뒤 벌어지는 개인적 갈등을 다룬다. 윤리적 죄의식에 등돌린 채 개인적 불행에서 헤어나기 위해 내달릴 수록 상황은 진창으로 떨어진다. 가치관의 갈등을 느끼는 인물의 심리는 <시크릿>에서 전반적인 긴장감을 직조해내기 위한 궁극적 핵심과 같다. 동시에 빠르게 나열되는 컷과 숏을 통해 정보량을 증가하는 <시크릿>은 단서들의 교차와 충돌을 통해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스릴러다. 일단은 그렇다.

 

<시크릿>은 인공적인 영화이자 그것을 애써 가리지 않는 작품이다. 말끔한 슈트를 차려 입은 형사의 옷 매무새부터 시작해서 끝없이 단서를 벌려나가는 내러티브의 형태까지, 영화는 좀처럼 현실을 끌어안을 생각이 없다는 듯 모든 것들을 연출적 시공간으로서 치장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스릴러로서 단서를 벌려나가는 이야기가 딱히 인상적이지 않을 때, 이 모든 건 허세가 된다. <시크릿>은 기본적인 비밀의 깊이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그 수면 위에 단서를 마구 흩뿌린다. 사연의 단초는 쓸만했다. 도입부의 몽타주도 꽤나 인상적이다. 문제는 그 사연의 설계다. 비장한 표정으로 자꾸 패를 던지는데 그 결과가 초라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밀은 여간 해서 모른 체하기 어렵고,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가 제 입으로 설명하는 비밀의 정체란 구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끝에 매달린 사족은 명백한 낭비다. 허물처럼 벗겨지는 단서들 사이에 감춰진 비밀의 정체란 정작 허망하다. 감춰야 할 것은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것들만 드러낸다. 비범한 척 패를 돌리지만 결과적으로 뻥카 같은 반전 앞에 허세로 몰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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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것까진 알 수 없지만 이거 하난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3D디지털 이미지에 심취한 저메키스는 이제 더 이상 실사적 세상을 뷰파인더로 관찰하지 않는다. 북유럽 영웅 서사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양각의 세계로 구현한 저메키스는 이제 디지털 세계의 조물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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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의 셀프메이드(self-made) 작가가 된 감독. 그 전업엔 사연이 있다. 감독은 눈이 멀었고, 빛이 없는 세상에서 연출이란 불가능의 영역이기에 눈이 보이지 않아도 가능한 이야기꾼으로 삶을 전가했다. 감독은 어쩌다 눈이 멀었을까. 그게 다 이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부서진 포옹이라는 의미처럼 어긋난 단추를 채우듯 균열적인 만남을 거듭하며 사랑을 나누던 남녀의 삶이 파편처럼 부서져 내리던 시절을 수집해 다시 삶을 복원해나가는 작업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잔잔한 심해에서 거친 수면으로 나아가듯 로맨스의 파국을 심상찮게 묘사해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전작들과 궤를 달리하지 않지만 특유의 멜로적 파토스에서 새어 나오는 긴장감과 성격이 다른 스릴러적 서스펜스가 별도로 구성된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풍부한 정서적 감흥을 자아내는 유려한 영상은 여전히 대단한 감상을 부여하면서도 서사적 흥미를 자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전작들에 비해 두드러진다. 덕분에 기존의 알모도바르 영화로부터 감지되던 자극적 심상의 깊이가 얕아진 듯한 인상이 들지만 텍스트적인 재미는 좀 더 보충된 느낌이다. 동시에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98)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마치 자전적 고백이 담긴 것만 같은 입체적 감상마저 도모한다. 무엇보다도 알모도바르는 <브로큰 임브레이스>를 통해서 자신의 영화적 경력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선언하는 것만 같다. <귀향>이나 <그녀에게>만큼의 감정적 진동에 다다르진 못하더라도 페드로 알모도바르라는 이름 안에서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페넬로페 크루즈를 선택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안목은 이번에도 또 한번 여실히 증명된다.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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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악보가 없는 연주와 같다. 저마다의 일상으로 마디를 채우고, 삶의 악절을 이룬 뒤, 종래엔 하나의 악보로서 인생을 거둔다. 소나타처럼 단정하게 저마다의 멜로디를 보존하는 개인의 삶은 콘체르토(concerto)와 같은 긴장과 이완의 협주적 관계로서 세계의 하모니를 이루기도 하며 어느 누군가는 거대한 심포니처럼 웅장한 울림을 전하고 영원을 산다. 저마다의 인생은 이 세계의 악장을 이루는 크고 작은 악절이다. 멜로디이며, 리듬이고, 하모니다. 그 삶에 준비된 악보는 없다. 누구나 텅 빈 오선지와 같은 시간을 제 삶으로 채워나간다. 누구나 <솔로이스트 The Soloist>로서 삶을 연주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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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스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사건에 연루된 소년과 소녀. 용의자의 자살로 수사는 종결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18년 후,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사사가키가 성인으로 성장한 소년과 소녀, 료지와 유키호의 행방을 쫓는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야행(白夜行)은 밀폐된 인물의 심리와 퍼즐 같은 서사적 진행을 통해 추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미스터리한 장르적 구조 속에 내재된 멜로적 감수성은 백야행의 특이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은밀하게 감지되는 두 남녀의 감정적 교류가 평행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조각처럼 나열된다. 칠흑의 아스팔트를 얇게 가린 흰 눈처럼 멜로적 감수성을 가린 장르적 연막, 백야행은 추리극의 베일로 감싼 멜로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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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함은 힘을 필요로 하고, 배신은 피를 부른다.” 닌자를 양성하는 비밀 집단 ‘오즈누’의 수장 오즈누(쇼 코스기)의 대사처럼 그곳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그리고 라이조(정지훈/)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자 체제에 대한 반역자다. 일종의 신고식이라 할만한 첫 번째 살인 임무 이후, 조직에 등을 돌리게 되는 라이조는 자신의 삶이 있는 곳이라 믿었던 ‘오즈누’를 떠나 진짜 자신의 삶을 찾아 달아나고 조직에 맞선다. <닌자 어쌔신>은 폭력적 강압을 강령처럼 받아들이며 유지되던 조직 체제에 저항하는 개인의 투쟁을 선혈이 낭자한 살육적 이미지로 담아낸 B급 취향의 액션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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