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사부일체>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색즉시공>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1번가의 기적>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이 질문에 수렴할만한 정답은 <해운대>. 단지 제목은 변경돼야 한다. 또한 바다가 인접한 지역이었을 때 가능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쓰나미를 연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다른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테헤란 거리 한복판에서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을 구덩이로 빠뜨리면 그 영화 제목은 <테헤란>이 될 지도 모른다. 농담이냐고? 글쎄.
적어도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쓰나미를 기대하고 <해운대>를 찾은 관객이라면 1시간 30여분의 드라마를 견뎌야 한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파괴적 장관을 목격할 수 있는 건 분명 그 이후에나 가능하니 말이다. 그 1시간 30여분을 채우는 건 옴니버스적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드라마다. 서사의 시작은 이렇다. 내륙에서 먼 바다까지 어업을 나섰던 배 한 척이 거센 폭풍우에 휘말렸고 그 배에 탑선해 있던 연희(하지원)의 아버지가 무거운 철망에 깔려 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동료들이 안간힘을 쓰지만 무거운 철망은 꿈쩍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해 구조헬기에 탑승하게 된 만식(설경구)은 죽음을 방조했다는(, 그리고 그와 함께 병행되는 본질적) 죄책감과 연희를 향한 모종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연민으로 연희의 삶을 돌본다.
<해운대>는 서사적 할당량에서 우위를 점한 만식과 연희의 사연 외에도 평행 나열되는 둘 이상의 관계를 확보하며 드라마의 너비를 벌린다. 쓰나미를 경고하는 지질학자 김휘(박중훈)와 그의 전부인 유진(엄정화), 만식의 동생인 해양구조대원 형식(이민기)과 서울에서 내려온 삼수생 희미(강예원), 그리고 연희의 동창이자 동네 백수건달인 동춘(김인권) 등, 다양한 인물의 서사가 평행적인 시선으로 나열된다. 다양한 인물들이 제 각각의 사연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드라마의 너비는 확장된다. <해운대>는 다분히 전략적으로 사연을 확장해 나간다.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쌓여 올린 드라마가 일거에 초토화되는 순간, 신파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우호와 갈등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쌓아나가던 캐릭터들이 쓰나미 한방에 서로의 손을 잡고 뛰거나 부둥켜안으며 끝을 예감하거나 죽음을 각오한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해운대>가 의도한 궁극의 드라마다.
쓰나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파괴를 위해 축조된 건물이나 다름없다. 진전되는 인물의 관계 속에서 한발씩 전진하는 사연이 거대한 재난 앞에서 일거에 전복되는 비극적 참상은 감정을 고양시키는데 분명 효과적이다. 서사의 층위를 쌓아 올리고, 관계의 너비를 확장하던 드라마가 파괴적 재난 앞에서 일순간 무너지는 광경은 참담한 심경을 부른다. 특히 ‘부산’과 ‘해운대’라는 지정학적 입지는 국내 관객에게 이색적인 기시감을 부를 만하다.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를 통해 이국적 풍경을 바탕으로 둔 재난 스펙터클을 감상해온 국내 관객들에게 <해운대>가 선사하는 국내 입지의 재난 광경은 보다 생동적인 감정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파괴적 이미지가 클라이맥스로서 효과적인 스펙터클을 발생시킨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분명한 장점이 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혹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위용처럼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투자한 대작이다. 거대한 쓰나미를 구현한 CG는 분명 할리우드의 수준과 비교하자면 보다 떨어지는 결과물임에 틀림없지만 비용 대비 효과를 감안한다면 배려가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들여 만든 드라마다. <해운대>에서 쓰나미의 역할이란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를 전복시키기 위한 용도로서 기능한다. 생각해보자면 그 전까지의 서사는 너비를 벌릴 뿐, 어떤 갈무리가 없다. 그저 한방의 이미지를 통해 서사적 구조가 일거에 무산되는 형식이다. 그 의도는 불순하지 않다. 다만 그 형태를 따져볼 필요는 있다. 거대한 자본을 투영해서 만들어놓은 인위적 이미지가 사실상 드라마를 파괴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됐다는 건 어딘가 괴상하다.
<해운대>는 일상적 풍경의 파괴를 통해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이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쓰나미로 인해 초토화되는 해운대의 모습 속엔 거센 물살에 밀려나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비극적 파토스로 가득하다. 일상적 공간이거나 특별한 휴양지로서 ‘해운대’가 지닌 보편성의 특성 안에서 펼쳐지던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침몰되고 수장된다. 가학적인 유머와 서민적 풍경으로 가득했던 1시간 30여분의 서사가 침몰된 이후로 몰아치는 비극적 신파는 지난 서사의 광경들을 모조리 추억으로 치장해버린다. 엄밀히 말해서 쓰나미 이전까지의 서사가 지닌 단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건 엄연히 반칙이다. 후반부를 위해 직조된 것에 틀림없는 재난 이전까의 드라마는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조직됐다기 보단 너비를 벌리기 위해 이어 붙인 형태적 사연으로서 종종 선명한 틈새를 드러낸다. 평행적인 비중으로 나열되는 캐릭터 역시 각자 부여 받은 사연의 완성도 안에서 매력의 편차를 발생시킨다.
사실상 <해운대>의 드라마가 뛰어난 밀도를 자랑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모든 (오락)영화가 뛰어난 밀도의 드라마로서 오락적 가치를 평가받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의 형태를 통해 평가를 얻기 마련이다. <해운대>는 자신이 설계한 드라마를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그 평가로부터 한 발 달아난다. 만약 <해운대>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이름으로서 자부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건 오산이다. <해운대>는 단지 파괴적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이미지를 통해 드라마의 약점을 눈속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례를 드러낼 뿐이다. 사실상 한국적 환경을 제외하면 <해운대>가 ‘한국형’이라고 불려야 할만한 이유도 막연하다. 단지 그것이 할리우드 대비 저예산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감안해야 결과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해운대>는 할리우드 재난영화들, 혹은 블록버스터들이 곧잘 발휘하는 장점과 곧잘 범하는 단점마저도 하나의 상투성으로 끌어들인 기성품처럼 보인다. 때때로 전시적 욕망을 위해 소모되는 시퀀스가 눈에 띄고, 상황에 걸맞지 않은 유머들이 껑충거린다.
새로운 시도와 모험은 중요하다. 다만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 환경에서 빚어질 결과물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그 방식을 모방하고야 마는 욕망은 도전일까, 허세일까.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과연 실제적 가치인가?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쌓아온 데이터 안에서 장단점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모조리 모방해버린 결과물은 과연 한국적인가. 파괴적인 후반부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위한 볼모로서 쌓아올린 1시간 30여 분의 서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미명을 위한 제물인가? 드라마를 덮쳐버리는 스펙터클의 쓰나미가 결국 '한국형' 방식인가? 자본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만들어낸 결과물의 목적은 무엇인가. 매년 여름마다 국내 극장을 독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서지 못할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면 과연 그 용도는 무엇에 있나. 그렇다면 과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닌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봐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드라마를 파괴하는 스펙터클, <해운대>는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1시간 30여 분짜리 임시방편 드라마의 제단이다. 그게 '한국형 재난영화'라 불릴 만한 결과물이라고? 글쎄.
깜깜한 건물로부터 달아나 빛을 향해 뛰쳐나오는 소녀. 상처투성이 얼굴로 영문을 모르는 겁에 질린 채 폐허 같은 건물로부터 뛰쳐나오는 소녀의 모습에서 이유 모를 두려움이 전이된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이하, <마터스>)은 박차고 튀어나온 호기심 속에서 자리잡은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정체가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시각적인 자극을 넘어선 심리적 중압감이 수혈된다. ‘순교자(Martyrs)’라는 의미의 <마터스>는 신앙이라는 전위적 형태를 파헤쳐 전복시킴으로써 본질을 자각하게 만든다. 피의 전시보다도 피의 목적이 각인된다. 끔찍한 건 이미지가 아니라 이를 둘러싼 세계관이다. 전작 <천상의 목소리>(2005)를 통해 이미 한 차례 신성 모독(?)적 관점을 견지한 전력이 있는 파스칼 로지에는 <마터스>를 통해 그 비관적인 세계관을 불순한 영험적 체험 수준으로 한차례 끌어올린다. 살갗을 벗겨내는 스너프 필름의 생생한 가학의 살 떨림보다 냉소적 극단이 진하게 섞인 선혈의 진심에 마음이 시리다. 이미지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잠재된 진심의 농도가 진한 충격을 선사한다. 제41회 시체스영화제 2관왕에 오른 <마터스>는 할리우드 제작사와 리메이크 판권 계약까지 체결했다. 영화제 상영 이후 국내 정식개봉이 결정됐다. 순도 100%의 순수악, 나쁜 피가 흐른다. 피가 차오른다. 가자.
손발이 오그라든다. 3류 뮤직비디오마냥 유치하기 짝이 없는 가무의 향연 속에서 인도 훈남의 눈동자가 느끼하게 이글거린다. <유브라즈>는 전형적인 발리우드의 인장을 찍는 착한 영화다. 호화로운 대저택을 누비며 ‘로미오와 줄리엣’낙천적 버전을 노래하는 그네들의 사치스런 로맨스는 백치스럽다. 그러나 중요한 건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단지 로맨스는 거들 뿐, <유브라즈>는 <레인맨>의 발리우드식 재활용이다. 부잣집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정신적 장애가 있는 배다른 동생 앞으로 집중된 유산을 제 몫으로 돌리기 위한 형제의 계략은 막장드라마에 길들여진 감수성을 배반하듯 천진난만하다. 애절하기보단 간지럽고, 진지하기보단 닭살스러운, 그렇지만 끝내 뿌리깊은 낙천과 긍정을 통해 마음을 표백시키고야 마는 우유빛깔 발리우드의 마력이 호화롭게 펼쳐진다. 오그라드는 손발을 펴주는 건 신나는 가무의 판타지다. 모두 다 ‘참 잘했어요’로 마무리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피날레마저도 용서하게 만드는 긍정적 리듬은 단연 백미다. 만약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고 느낀다면, 혹시 들어는 봤나, ‘A.R.라만’?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알겠지. 그렇다. 바로 이 경쾌하고 활기찬 리듬이 바로 A,R,라만의 물건이다. 이쯤 되면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괜찮아.
바야흐로 6번째 시리즈, 해리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배우며 모험을 거듭하다 호그와트 6학년 상급생이 된 해리포터는 이제 시리즈의 졸업 관문까지 나아간다.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이하, <혼혈왕자>)는 결전을 향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다. ‘트리위저드’ 대회라는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던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비극적 엔딩 이후로 급격하게 다크 판타지로 선회하기 시작하던 시리즈는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과 <혼혈왕자>에 이르러 더욱 어둡고 예민해진 낯빛을 드리운다.
사실 <해리포터>시리즈를 영화화한다는 건 까다로운 일이다. 150여분의 긴 러닝타임을 투자한다 해도 따라잡기 어려운 스토리의 절대량을 줄여나가면서도 긴밀한 흐름을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해리포터>가 큰 사건의 맥락 외에도 아기자기한 소품적 에피소드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시리즈란 점에서도 서사의 여백 자체가 영화적 손실이 될 수 있다는 건 영화화 작업의 난관 중 하나에 가깝다.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짧은(!) 137분의 러닝타임을 투여했던 <불사조기사단>이 원작의 하이라이트 영상 편집본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을 얻었던 전례를 떠올린다면 전작에 이어 다시 한번 <혼혈왕자>의 연출자로 낙점된 데이빗 예이츠가 메가폰이 아닌 마법 지팡이라도 쥐고 있기를 바라는 심정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불사조기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혼혈왕자>에도 150여분 이상의 러닝타임이 할애됐지만 분명 원작이 지닌 미니멀한 장점들은 텍스트를 이미지로 선별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인 희생양이 된 것임에 틀림없다. <혼혈왕자> 역시 <해리포터>의 영화화 작업의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선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혼혈왕자>는 서사의 선별이란 측면에서 좀 더 과감한 선택이 뚜렷한 작품이다. 부분 3D로 제작된 <혼혈왕자>는 도입부부터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선사하며 원작의 서사를 의식하지 않은 듯 호기롭게 출발한다. 물론 <혼혈왕자>은 온전히 원작소설을 밑그림으로 두고 완성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단지 원작의 서사를 따라가며 작은 맥락들을 절제하는 단순 작업방식에서 벗어나 필요에 따라 서사의 생략과 도치, 혹은 접합을 통한 재구성의 방식으로서 영화를 원작의 동의어가 아닌 유의어 수준으로 격상시킨다. 지금까지 시리즈가 소모해왔던 마법적 세계관의 눈요기가 더 이상 <혼혈왕자>의 장기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듯 이미지의 과장을 절제하고 세계관의 진전에 주력한다.
8년 동안 여섯 번의 시리즈를 거듭한 만큼 <해리포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몰라보게 성장한 아이들이다. 성숙하고 농밀한 로맨스까지 연출이 가능해졌을 정도로 <해리포터>는 아동들의 모험담에서 2차 성징 판타지로 무르익었다. 더 이상 풋풋한 성장판타지가 아닌, 다크 판타지의 색채를 자랑한다. 그만큼 채도가 낮아진 <혼혈왕자>는 (지금까지 영화화된)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불길하고 암담한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상 마지막 관문으로 가기 위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는 <혼혈왕자>는 궁극적으로 서사적 연결고리의 기능적 목적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를 테면 어느 정도 전작들을 복습하고,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염두에 둔 감상자로서 상영관을 찾을 때 만족도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란 의미다. 그만큼 원작의 흐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감상적 호의를 베풀 공산이 크다. 원작의 흐름을 잘 이해한 이들에게 <혼혈왕자>는 이유 있는 여운이 되겠지만 그와 동떨어진 관객에겐 어지러운 미로가 될 것 같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와 맞서야 하는 해리포터의 운명은 현재진행형에서 완료형으로 달린다. 해리포터도, 론(루퍼트 그린트)도, 헤르미온느(엠마 왓슨)도 자랐다. <혼혈왕자>는 성숙한 아이들의 2차 성징을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혼혈왕자>의 볼거리는 속도감을 자랑하는 ‘퀴디치’경기도, 번쩍거리는 신비한 마법지팡이도, 기억을 재생하는 ‘펜시브’도, 심지어 ‘어둠을 먹는 자’들과의 긴박한 결투도 아니다. 마법부의 기억상실 주문에 걸리는 ‘머글’이 아닌 <해리포터>의 충직한 관객들에게 <해리포터>의 세계는 더 이상 낯선 볼거리가 아니다. 이는 분명 <해리포터>가 선사하는 이미지가 그만큼 놀라운 볼거리로서 위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혼혈왕자>의 관건은 로맨스다. 더 이상 애들이 아닌 호그와트의 상급생들은 마음껏 키스하고 부둥켜 안으며 연애를 즐긴다. <혼혈왕자>에서 스펙터클의 공백을 대체하는 건 농밀한 로맨스의 예감이다. 성장한 아이들은 암울해지는 세계 속에서도 성징(性徵)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며 나름의 생기를 확보한다.
책 한 권 분량의 절반 가량을 덜어내며 비극적 의미를 강화한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질풍노도의 운명론은 더욱 비장해질 가능성이 크다. 2편으로 나눠질 마지막 스크린 시리즈는 사실상 <혼혈왕자>를 포함한 트릴로지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혈왕자>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서사의 서막으로서 제 기능에 충실한 작품이다. 적절한 변주를 통해 서사를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 나름대로의 몫을 해낸다. 다만 시각적 묘미의 감소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에게 2시간 30분은 지루한 여정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 결국 감상의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대한 문제는 애정과 관심의 무게를 얼마나 얹어놓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이제 <해리포터>가 애들이 보기엔 어둡고 무거운 시리즈가 됐다는 것. 더 이상 어리다고 놀릴 수 있는 성장 판타지가 아니란 말씀.
사람 잡는 식인멧돼지를 쫓는 사람들의 분투. <차우>는 명확히 답이 나오는 영화(처럼 보인)다. 괴수도 나오고, 살육신도 등장하고, 추격도 펼쳐지고, 사투가 벌어진다. 누구라도 예상하기 좋은 형태의 장르적 자질을 품고 있는, 괴수영화에서 재난영화를 포괄할만한 이미지가 선연해지기 쉬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물론 명확한 예감처럼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내달리는 추격전과 액션신은 등장한다. 하지만 8할이 코미디로 채워진, 그것도 평범한 방식의 코미디로 이해되기 쉽지 않을 취향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차우>는 ‘괴수 어드벤처’라는 카피에 이끌려 상영관으로 향한 관객들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덫에 걸렸다는 평을 얻기 좋은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시골로 전향된 김순경(엄태웅)을 비롯해 교수 임용을 위해 멧돼지에 관한 거창한 논문을 기획하는 변수련(정유미), 손녀의 복수를 위해 식인멧돼지 사냥에 나서는 천일만(장항선), 최고의 포수로 가오가 대단한 백만배(윤제문),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신형사(박혁권)까지, <차우>는 각자 캐릭터의 축을 이루는 다섯 인물을 통해 서사의 밑그림을 그린다. 한강괴물을 연상시키기 좋은 거대식인멧돼지와 함께 그 뒤를 쫓는 캐릭터 머릿수까지 <괴물>의 가족과 엇비슷하게 이뤄진 <차우>는 분명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중력에 놓인 작품처럼 보인다. 괴수영화로서 <괴물>과 비교될만한 소재를 취하고 있으며 시골이라는 환경을 무대로 둔 서스펜스와 블랙코미디의 활용에서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킬만한 자질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는 유사한 소재와 환경적 구조를 선점한 두 작품의 후발주자로서 비교 대상의 운명에 놓였을 뿐, 봉준호의 두 작품이 <차우>를 포괄하는 영역으로서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지 그 기시감이 명백할 따름이다.
소박한 표정 너머로 흉악한 인상이 감지되는 시골성의 전복적 기운과 거대 괴물의 출몰과 함께 그려지는 아수라장의 이미지까지, 한국의 토착성을 부조리하게 수식하는 사건들이 열악한 지방성의 감춰진 욕망과 함께 뒤엉켜 구른다.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소굴이자 기형적인 욕망으로 비뚤어진 인간들의 늪처럼 쇠락한 도시인이 모여들고 상승의 욕구로 팽배한 지방인들이 자리한 삼매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의 풍자를 위해 가공된 부조리의 공간이다. 인간의 잔혹한 본성과 포악한 기질을 응축한 다큐적 질감의 오프닝 시퀀스는 <차우>가 본질적으로 휴머니즘과 반대적 목적성에 사로잡혀 있음을 노골적으로 증명한다. <차우>는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낳은 괴물에 대한 이야기이자 되레 그 괴물을 포획하는 인간의 잔혹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안티-휴머니즘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예측불허의 슬랩스틱부터 엉뚱한 경로에서 끼어드는 캐릭터들의 난동극까지, B급 취향에 근접한 마이너 코드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차우>는 식인멧돼지가 등장하는 괴수영화의 기대감을 철저하게 배반하는 영화다. 순수제작비 60억 대의 메이저 상업영화로서는 무모하고도 과감한 유머가 도처에 널려있다. 이는 <차우>를 불순하게 수식하는 동시에 특수하게 치장하는 배반적 장기로서 활용된다. 종종 위태로운 이음새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플롯의 공백과 무뚝뚝하고 성긴 액션신의 연출이 매끄럽지 못한 장르적 자질을 인식하게 만들고, 연출력의 공백을 감지하게 만들지만 예측불허의 지점에서 난입하듯 발생하는 유머가 상황을 불식시킨다. 엉뚱하지만 때때로 기발하며 종종 효과적이다.
괴수영화로서 영화적 기대감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해하자면 <차우>는 분명 배반적인 결과물에 가깝다. 멧돼지와의 추격신과 액션신이 후반부에 집중된 건 CG예산과 관련된 집중력 문제에 있겠지만 ‘리얼 괴수 어드벤처’라는 카피의 기대감을 양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건 분명 불만을 얻을만한 지점이다. 그럼에도 분명 <차우>는 쏠쏠한 묘미가 있는 작품이다. 괴수물로서의 위용과 B급 유희가 맞물리는 조합은 컬트적인 호응에 다다를만한 근사값을 이룬다. 대자본을 활용한 메이저 상업영화로서의 중압감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마이너 코드의 결과물은 무모함과 과감함의 너비를 확보한다. 위태롭지만 흥미롭다. 대중적인 반응이 심히 궁금해질 정도로.
관능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노출뿐이라 생각한다면 빈곤한 상상력을 탓할 필요가 있다. 직관적인 이미지는 자극의 잠재적 성과를 되레 반감시킨다. 선명한 이미지의 관찰보다도 불투명한 실루엣이 발생시키는 상상력이 감상적 욕구를 자극하곤 한다. 이미지가 발생시키는 자극의 충만보다도 잠재적인 욕구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보다 매혹적이다. 여인의 나신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관능적인 티저포스터가 눈길을 사로잡는 <오감도>는 분명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에로티시즘의 상상을 예상케 한다.
변혁의 <his concern>, 허진호의 <나 여기 있어요>, 유영식의 <33번째 남자>, 민규동의 <시작과 끝>, 오기환의 <순간을 믿어요>까지, 에로스라는 주제에 차례로 내걸린 다섯 개의 시선을 내건 옴니버스 <오감도>는 분명 적확한 기대감을 부르는 기획영화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한 여인에게 이끌린 남자, 섹스리스의 일상 속에서 비극적 예감을 참아내는 부부, 서투른 신인배우와 관록 있는 중견배우의 충돌과 이를 조율하는 명감독의 기이한 삼각관계, 남편의 부음과 외도 사실을 함께 알아버린 아내의 미스터리한 동거, 발랄한 10대들의 속을 알 수 없는 파트너 체인지. 다섯 편의 작품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장르적 탈을 쓰고 에로스의 수위를 오르고 내린다.
로맨틱코미디, 멜로, B급호러, 미스터리, 하이틴로맨스, 각기 다른 장르의 탈을 쓴 <오감도>는 저마다 야심적인 방식으로 개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오감도>는 작품을 거쳐나갈수록 방식의 차이에 따른 자극적 성취를 선보이기보다 권태를 축적해나간다. 옴니버스라는 형식으로 내걸린 다섯 편의 작품은 분명 에로스라는 관능을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공유하고 있으나 다섯 편의 작품은 어느 하나도 이를 관통하지 못한다. 차분한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캐릭터의 심리적 흐름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에피타이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저마다 다양한 장르적 욕망을 선보일 뿐, 결과적으로 권태를 쌓아나간다. 저마다 좀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각인시키지 못하는 결과물이 연속적으로 전시된다.
옴니버스는 다양한 시선을 통해 하나의 주제를 발견한다는 귀납적 묘미와 하나의 주제로 다채로운 해석을 만끽할 수 있다는 연역적 묘미가 가능할 때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해진다. <오감도>는 옴니버스의 다양성을 악재로 몰고 나가는 두서 없는 기획이다.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지 못하는 동시에 저마다 하나같이 피곤한 감상적 결과를 부른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기대감은 파격이란 단어를 낯설게 만드는 이미지와 창의적 해석과 무관하게 장르적 과욕에 사로잡힌 스토리텔링의 거듭된 난국 속에서 빠른 속도로 낡아간다. 도전적이라기 보단 과욕적이며 창의적이라기 보단 자만에 가깝다. 짧은 단편들이 마치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암담해진다. <오감도>는 에로티시즘이 증발된 에로스의 만찬이다.차린 건 많아 보여도 좀처럼 잡히는 게 없다. 그저 티끌처럼 쌓여나가는 권태가 끝내 태산처럼 쌓여 식욕을 감퇴시킬 따름이다.
식인멧돼지가 등장하는 괴수영화.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적확하지 않다. 예측불허의 코미디 괴작이랄까. 예상하지 못했던 유머의 코드가 강하다. 유머의 속성도 예측범위 바깥에 있다. <차우>는 괴수영화로서의 장르적 특성을 덧붙인 토착적 코미디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기시감은 선점된 이미지로서의 영향력이 크다. 부조리한 풍경 속에서 발췌되는 유머 코드도 형태적으로 유사할 뿐 성격이 판이하다. (적어도 한국에선) 대작이라 불릴 만한 60억 예산의 괴수영화라는 메이저 상업영화로서의 중압감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마이너 정서의 유머 코드가 과감할 만큼 도처에 널려있다. 엉뚱하지만 기발하며 종종 효과적이다. 다만 취향에 따라 몹쓸 시도나 배반적 결과로 구분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스토리 흐름의 이음새가 눈에 띄게 덜컹거리는 것도 단지 영화적 기운의 특이성을 넘어 연출적 공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도 유효하다. 결과적으로 괴수영화로서의 위용이 기괴한 유머와 맞물리는 조합은 가히 컬트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장르적 기대감을 품은 어떤 관객에겐 배반적인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분명 쏠쏠한 묘미가 있다. 상업영화로서 대중적인 반응이 심히 궁금해진다.
에로스에 대한 다섯 개의 시선. 과감하고도 감각적인 누드 이미지를 내건 티저포스터는 <오감도>가 구사할 에로티시즘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긴다. 그러나 기대는 거기까지, 영화는 포스터가 주는 모종의 기대감과 동떨어진 결과물에 불과하다. <오감도>는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지 못하는 옴니버스이자 기획에 따른 기대감을 배반하는 결과물이다. 창의적인 해석력도, 과감한 묘사력도 선보이지 못한다. 도전적이라기 보단 과욕에 가깝고, 창의적이라기 보단 자만에 가깝다. 에피소드를 통과할수록 티끌과 같은 권태가 쌓여나간다. 또한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축적된 권태의 무게를 견디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고행이다.
호수 위를 우아하게 유영 중인 백조는 부지런히 발을 젓는다. 겉으로 드러난 우아함은 실상 부단한 노력의 산물에 가깝다. 외모의 화려함에 가려진 내면의 절실함을 알아채기란 어렵다. 화려한 프로페셔널의 외양에 반해 그 자리를 동경하던 대부분의 초짜들은 가시밭길의 첫걸음을 체감하곤 한 바가지의 눈물과 한 대야의 땀을 흘리고서야 그 우아함의 정체를 파악하기 마련이다. 눈물과 땀을 먹고 자란 경험과 관록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진정한 프로로서의 신고식을 통과한다. 미운 오리새끼는 비로소 백조로 탈바꿈하는 노하우를 익히고 첫 번째 비행을 준비한다. <해피 플라이트>를 시작한다.
발랄한 소년, 소녀들의 도전을 담백하고 유쾌하게 담아낸 청춘물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야구치 시노부는 근작인 <해피 플라이트>를 통해 청년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선다. 싱크로나이즈를 위해 물장구치는 소년들과 유쾌한 박자에 몸을 흔드는 소녀들의 긍정적인 도전기는 유년 시절의 추억담처럼 밝고 투명하며 보는 이에게 관대한 감동을 선사한다.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만큼이나 긍정적인 기운이 넘치는 <해피 플라이트>는 두 전작보다 좀 더 전문직드라마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첫 비행이자 마지막 실전심사를 앞둔 가상 비행 테스트에서 바다에 추락해 진땀을 흘리는 부기장 스즈키(다나베 세이치)와 첫 승무원 비행의 설렘을 앞두고 지각과 실수를 반복하다 상사로부터 질책을 얻고 눈물까지 흘리는 에츠코(아야세 하루카)는 마치 미운 오리새끼와 같은 존재다. 성취보다도 실패를 먼저 체험하고 좌절을 경험하기 전에 학습을 먼저 거친다. 폼 나는 이미지 속의 만만치 않은 실체를 체감한다. 그러나 만회를 위한 기회는 다시 한번 찾아온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미운 오리새끼들은 실패를 딛고 다시 한번 우아한 날갯짓을 시도한다.
비행기 내부부터 관제탑, 통제실, 정비장, 활주로까지, 공항 대부분의 공간을 누비는 카메라는 모든 현장을 스케치하고 그 공간에 위치한 캐릭터들을 인상적으로 수집한다. 승무원과 관제사를 비롯해 비행기 한대를 띄우기 위해 자기 업무에 종사하는 공항의 모든 구성원들의 역할을 두루 살피고 개개인의 캐릭터까지 세심하게 돌본다. 공간마다 개별적인 에피소드가 쏟아지고 이를 통해 분야의 전문성을 독립적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그 다양한 에피소드를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조합하는 방식은 <해피 플라이트>의 가장 훌륭한 장기 중 하나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사건의 기승전결이 유연하며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산만하지 않게 제 매력을 보존한다. 그 중간중간 명확하게 끼어드는 코미디와 드라마의 연출력도 탁월하다.
<해피 플라이트>는 낙관과 긍정을 연료로 채우고 이륙하는 유쾌한 코미디다. 디테일한 취재를 바탕으로 완성된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현장감과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자랑하는 다채로운 캐릭터의 매력으로 고도를 유지하고 균형을 잡으며 예정된 좌표를 향해 이야기를 순탄하게 비행시킨다. 물론 <해피 플라이트>는 기승전결의 과정을 지녔음에도 오차범위를 예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해피엔딩으로 착륙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그 해피엔딩이 선보이는 훌륭한 착지는 명확한 감동을 부른다. 우아한 백조의 활공을 꿈꾸는 미운 오리새끼들의 발버둥은 때때로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실패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성공의 한 걸음을 내딛는 용감한 성장담을 지켜본다는 건 분명한 매력을 선사한다. 결국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가 되어 난다. 누구나 알지만 순수한 감동을 전하던 그 동화처럼 <해피 플라이트>도 날아오른다. 실로 즐겁고 아름다운 비행이다.
풍요로운 부로 치장한 베이클랜드 가문의 부부 바바라(줄리안 무어)와 브룩스(스테픈 딜런)는 겉으로 드러낸 평온 속에 잠재된 예민으로 끊임없이 충돌한다. 지독한 권태는 점차 부부의 삶을 괴리시키고 일상을 침전시킨다. 은밀하게 경멸과 적대로 서로를 희롱하듯 살아가는 베이클랜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토니(에디 레드메인)는 온전하지 못한 질환적인 부부관계로부터 잉태된 후유증의 존재처럼 결핍에 시달린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중적 나선처럼 얽힌 듯한 토니의 독백을 통해 진전되는 서사는 결국 결말의 파국까지 나아가며 충격적인 이미지를 연출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세비지 그레이스>의 베이클랜드 가문의 인물들은 마치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미국인 중산층들의 권태를 닮았다. 영혼이 없는 껍데기의 삶을 부로 치장한 채 살아가는 가족의 일상을 멸시의 대상이 되기 좋은 형태로 그려낸다. 실상 그 이미지 너머로 어떤 성찰이나 교훈이 감지되지 않는다. 마치 현대사 박물관에 전시된 밀랍인형들과 같은 인물들이 그리스적 비극의 현대적 역할극을 재현하지만 실상 그 재현의 방식엔 실체가 없다. 껍데기 같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엔 충격이 엄습할 뿐, 어떤 감정적 결과물이 채워지지 않는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분명 충격적인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 충격은 어떤 감정도 잉태하지 못한다. 욕망조차 상실한 텅빈 삶처럼 영화적 욕망을 좀처럼 감지하기 힘들다. 줄리안 무어의 가공할만한 연기를 지켜보는 것조차도 결국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인 양식과 별개로 기이하게 권태롭다. 빼어난 수사로 치장했지만 진심이 배제된 문장을 읽고 있는 것마냥 영혼이 새어나간 스크린을 맥없이 바라보는 기분이다. 마치 그 공허함이 영화적 의도인 것처럼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