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사부일체>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색즉시공>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1번가의 기적>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이 질문에 수렴할만한 정답은 <해운대>. 단지 제목은 변경돼야 한다. 또한 바다가 인접한 지역이었을 때 가능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쓰나미를 연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다른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테헤란 거리 한복판에서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을 구덩이로 빠뜨리면 그 영화 제목은 <테헤란>이 될 지도 모른다. 농담이냐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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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건물로부터 달아나 빛을 향해 뛰쳐나오는 소녀. 상처투성이 얼굴로 영문을 모르는 겁에 질린 채 폐허 같은 건물로부터 뛰쳐나오는 소녀의 모습에서 이유 모를 두려움이 전이된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이하, <마터스>)은 박차고 튀어나온 호기심 속에서 자리잡은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정체가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시각적인 자극을 넘어선 심리적 중압감이 수혈된다. 순교자(Martyrs)라는 의미의 <마터스>는 신앙이라는 전위적 형태를 파헤쳐 전복시킴으로써 본질을 자각하게 만든다. 피의 전시보다도 피의 목적이 각인된다. 끔찍한 건 이미지가 아니라 이를 둘러싼 세계관이다. 전작 <천상의 목소리>(2005)를 통해 이미 한 차례 신성 모독(?)적 관점을 견지한 전력이 있는 파스칼 로지에는 <마터스>를 통해 그 비관적인 세계관을 불순한 영험적 체험 수준으로 한차례 끌어올린다. 살갗을 벗겨내는 스너프 필름의 생생한 가학의 살 떨림보다 냉소적 극단이 진하게 섞인 선혈의 진심에 마음이 시리다. 이미지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잠재된 진심의 농도가 진한 충격을 선사한다. 41회 시체스영화제 2관왕에 오른 <마터스>는 할리우드 제작사와 리메이크 판권 계약까지 체결했다. 영화제 상영 이후 국내 정식개봉이 결정됐다. 순도 100%의 순수악, 나쁜 피가 흐른다. 피가 차오른다. 가자.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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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발이 오그라든다. 3류 뮤직비디오마냥 유치하기 짝이 없는 가무의 향연 속에서 인도 훈남의 눈동자가 느끼하게 이글거린다. <유브라즈>는 전형적인 발리우드의 인장을 찍는 착한 영화다. 호화로운 대저택을 누비며 로미오와 줄리엣 낙천적 버전을 노래하는 그네들의 사치스런 로맨스는 백치스럽다. 그러나 중요한 건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단지 로맨스는 거들 뿐, <유브라즈> <레인맨>의 발리우드식 재활용이다. 부잣집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정신적 장애가 있는 배다른 동생 앞으로 집중된 유산을 제 몫으로 돌리기 위한 형제의 계략은 막장드라마에 길들여진 감수성을 배반하듯 천진난만하다. 애절하기보단 간지럽고, 진지하기보단 닭살스러운, 그렇지만 끝내 뿌리깊은 낙천과 긍정을 통해 마음을 표백시키고야 마는 우유빛깔 발리우드의 마력이 호화롭게 펼쳐진다. 오그라드는 손발을 펴주는 건 신나는 가무의 판타지다. 모두 다 참 잘했어요로 마무리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피날레마저도 용서하게 만드는 긍정적 리듬은 단연 백미다. 만약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고 느낀다면, 혹시 들어는 봤나, A.R.라만?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알겠지. 그렇다. 바로 이 경쾌하고 활기찬 리듬이 바로 A,R,라만의 물건이다. 이쯤 되면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괜찮아.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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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6번째 시리즈, 해리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배우며 모험을 거듭하다 호그와트 6학년 상급생이 된 해리포터는 이제 시리즈의 졸업 관문까지 나아간다.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이하, <혼혈왕자>)는 결전을 향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다. ‘트리위저드’ 대회라는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던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비극적 엔딩 이후로 급격하게 다크 판타지로 선회하기 시작하던 시리즈는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과 <혼혈왕자>에 이르러 더욱 어둡고 예민해진 낯빛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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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잡는 식인멧돼지를 쫓는 사람들의 분투. <차우>는 명확히 답이 나오는 영화(처럼 보인). 괴수도 나오고, 살육신도 등장하고, 추격도 펼쳐지고, 사투가 벌어진다. 누구라도 예상하기 좋은 형태의 장르적 자질을 품고 있는, 괴수영화에서 재난영화를 포괄할만한 이미지가 선연해지기 쉬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물론 명확한 예감처럼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내달리는 추격전과 액션신은 등장한다. 하지만 8할이 코미디로 채워진, 그것도 평범한 방식의 코미디로 이해되기 쉽지 않을 취향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차우>괴수 어드벤처라는 카피에 이끌려 상영관으로 향한 관객들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덫에 걸렸다는 평을 얻기 좋은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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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노출뿐이라 생각한다면 빈곤한 상상력을 탓할 필요가 있다. 직관적인 이미지는 자극의 잠재적 성과를 되레 반감시킨다. 선명한 이미지의 관찰보다도 불투명한 실루엣이 발생시키는 상상력이 감상적 욕구를 자극하곤 한다. 이미지가 발생시키는 자극의 충만보다도 잠재적인 욕구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보다 매혹적이다. 여인의 나신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관능적인 티저포스터가 눈길을 사로잡는 <오감도>는 분명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에로티시즘의 상상을 예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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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 단평

cinemania 2009. 7. 8. 18:07

식인멧돼지가 등장하는 괴수영화.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적확하지 않다. 예측불허의 코미디 괴작이랄까. 예상하지 못했던 유머의 코드가 강하다. 유머의 속성도 예측범위 바깥에 있다. <차우>는 괴수영화로서의 장르적 특성을 덧붙인 토착적 코미디다. <살인의 추억> <괴물>의 기시감은 선점된 이미지로서의 영향력이 크다. 부조리한 풍경 속에서 발췌되는 유머 코드도 형태적으로 유사할 뿐 성격이 판이하다. (적어도 한국에선) 대작이라 불릴 만한 60억 예산의 괴수영화라는 메이저 상업영화로서의 중압감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마이너 정서의 유머 코드가 과감할 만큼 도처에 널려있다. 엉뚱하지만 기발하며 종종 효과적이다. 다만 취향에 따라 몹쓸 시도나 배반적 결과로 구분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스토리 흐름의 이음새가 눈에 띄게 덜컹거리는 것도 단지 영화적 기운의 특이성을 넘어 연출적 공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도 유효하다. 결과적으로 괴수영화로서의 위용이 기괴한 유머와 맞물리는 조합은 가히 컬트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장르적 기대감을 품은 어떤 관객에겐 배반적인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분명 쏠쏠한 묘미가 있다. 상업영화로서 대중적인 반응이 심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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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도> 단평

cinemania 2009. 7. 7. 12:00

에로스에 대한 다섯 개의 시선. 과감하고도 감각적인 누드 이미지를 내건 티저포스터는 <오감도>가 구사할 에로티시즘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긴다. 그러나 기대는 거기까지, 영화는 포스터가 주는 모종의 기대감과 동떨어진 결과물에 불과하다. <오감도>는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지 못하는 옴니버스이자 기획에 따른 기대감을 배반하는 결과물이다. 창의적인 해석력도, 과감한 묘사력도 선보이지 못한다. 도전적이라기 보단 과욕에 가깝고, 창의적이라기 보단 자만에 가깝다. 에피소드를 통과할수록 티끌과 같은 권태가 쌓여나간다. 또한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축적된 권태의 무게를 견디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고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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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위를 우아하게 유영 중인 백조는 부지런히 발을 젓는다. 겉으로 드러난 우아함은 실상 부단한 노력의 산물에 가깝다. 외모의 화려함에 가려진 내면의 절실함을 알아채기란 어렵다. 화려한 프로페셔널의 외양에 반해 그 자리를 동경하던 대부분의 초짜들은 가시밭길의 첫걸음을 체감하곤 한 바가지의 눈물과 한 대야의 땀을 흘리고서야 그 우아함의 정체를 파악하기 마련이다. 눈물과 땀을 먹고 자란 경험과 관록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진정한 프로로서의 신고식을 통과한다. 미운 오리새끼는 비로소 백조로 탈바꿈하는 노하우를 익히고 첫 번째 비행을 준비한다. <해피 플라이트>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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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을 들다>촌스러운 대한민국이 먹여 살리는 신파  (0) 200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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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부로 치장한 베이클랜드 가문의 부부 바바라(줄리안 무어)와 브룩스(스테픈 딜런)는 겉으로 드러낸 평온 속에 잠재된 예민으로 끊임없이 충돌한다. 지독한 권태는 점차 부부의 삶을 괴리시키고 일상을 침전시킨다. 은밀하게 경멸과 적대로 서로를 희롱하듯 살아가는 베이클랜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토니(에디 레드메인)는 온전하지 못한 질환적인 부부관계로부터 잉태된 후유증의 존재처럼 결핍에 시달린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중적 나선처럼 얽힌 듯한 토니의 독백을 통해 진전되는 서사는 결국 결말의 파국까지 나아가며 충격적인 이미지를 연출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세비지 그레이스>의 베이클랜드 가문의 인물들은 마치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미국인 중산층들의 권태를 닮았다. 영혼이 없는 껍데기의 삶을 부로 치장한 채 살아가는 가족의 일상을 멸시의 대상이 되기 좋은 형태로 그려낸다. 실상 그 이미지 너머로 어떤 성찰이나 교훈이 감지되지 않는다. 마치 현대사 박물관에 전시된 밀랍인형들과 같은 인물들이 그리스적 비극의 현대적 역할극을 재현하지만 실상 그 재현의 방식엔 실체가 없다. 껍데기 같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엔 충격이 엄습할 뿐, 어떤 감정적 결과물이 채워지지 않는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분명 충격적인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 충격은 어떤 감정도 잉태하지 못한다. 욕망조차 상실한 텅빈 삶처럼 영화적 욕망을 좀처럼 감지하기 힘들다. 줄리안 무어의 가공할만한 연기를 지켜보는 것조차도 결국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인 양식과 별개로 기이하게 권태롭다. 빼어난 수사로 치장했지만 진심이 배제된 문장을 읽고 있는 것마냥 영혼이 새어나간 스크린을 맥없이 바라보는 기분이다. 마치 그 공허함이 영화적 의도인 것처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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