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올림픽에서 10개 이상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순위권을 자랑하는 스포츠 강국 대한민국의 현실은 실상 생존 레이스 위에서 착취당하는 열악한 비인기종목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킹콩을 들다>는 대한민국이라는 좀스러운 현실을 담보로 둔 신파 기획물이다. 주연은 스포츠, 조연은 대한민국. 소박한 시골 소녀들의 표정을 통해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로서의 구색이 명확하기도 하지만 촌스러운 한국적 배경을 활용하는 능력이 그만큼 효과적이라 말할 수 밖에 없다.
88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사냥에 실패한 역도 동메달리스트 이지봉(이범수)에게 동메달은 애증에 가깝다. 결과가 과정을 무색하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이지봉은 역기를 잡을 수 없는 몸으로 방황하다 보성의 역도부 선생으로 정착하곤 영자(조안)를 비롯한 소녀들을 만나 역도를 가르친다. 타인에게 멸시당하거나 자신감을 상실해버린 존재들이 만나 이루는 신파의 앙상블은 그것이 지독하게 닳고 닳은 스토리건 플롯이건 따져 묻는 입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효율적인 웃음과 눈물의 재료가 된다. <킹콩을 들다>는 눈물과 웃음을 다져 넣고 팔팔 끓인 뒤 비극을 첨가하고 희망이란 그릇에 담아 관객 앞에 내놓는, 먹히는 신파다. 신파는 나쁜 게 아니다. 다만 신파를 불순하게 만드는 환경이 나쁘다. 시대착오적인 건 영화가 아니라 여전한 세상이다. <킹콩을 들다>는 그 열악한 환경을 영화적 감정으로 치환했을 뿐이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한, 그 현실을 담보로 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팔리고 또 팔릴 만한 신파의 재료로서 유효할 따름이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이 길을 선택하는 순간, 너희는 많은 것을 잃게 돼.”각오와 경고가 한 몸에 담긴 언어가 필사적인 절박함을 드러낸다. 영광보단 고난을 명확히 관통하는 스승의 언질 앞에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피땀 흘린 노력의 과정이란 성공이란 방파제를 쌓지 않고서야 쉽게 허물어질 모래성 같은 영예나 다름없다. <킹콩을 들다>는 역도선수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과 금메달에 도전했다 동메달에 머무르고 부상까지 얻은 비운의 역도선수의 삶을 사제라는 관계에 뒤엉켜 넣은 신파다.
금메달에 도전했다 실패한 동메달리스트 이지봉(이범수)은 심각한 부상과 잠재적 질병까지 진단받은 후, 역기를 놓고 은퇴한다. 그에게 동메달이란 애증의 영광이며 무관의 짐이나 다름없다. 1등을 놓친 3등은 예선탈락보다도 더욱 비참한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런 어느 날, 매일 노역을 통해 밥벌이를 하던 그에게 전직 국가대표 감독이자 옛 스승(기주봉)이 찾아와 제안을 던진다. 보성의 여자중학교에서 역도를 교육시킬 것을 권한다. 마지 못해 보성으로 내려간 이지봉은 한적하게 낚시나 하며 시간을 죽이려던 중 역도에 관심을 보이는 모종의 소녀들을 만나고 점차 그네들에게 마음을 연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제 때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영자(조안)가 눈에 밟힌다. 점차 새로운 결심이 생긴다.
<킹콩을 들다>는 스포츠 영화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한없이 여리디 여린 신파의 마음을 품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킹콩을 들다>는 단지 스포츠 도전기라는 페어플레이 정신만으로 몸통을 이룰 수 없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다시 한번 들추는 스포츠 신파다. 가난하거나 촌스러운 시골의 고학생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채 구타와 욕지거리를 견디며 세워 올린 스포츠 강국의 ‘7전8기’적인 전설적 외피의 속살에 담긴 피와 땀의 잔인한 내면이 공분을 부르고 그 안에서 학대 받는 학생들의 눈물과 신음을 페이소스로 건져 올리는 공식적인 신파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처우가 열악한 대한민국의 속성을 극복한 여성들의 연대기란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상시키는 바도 없지 않다. 최고가 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현실이 금메달에 대한 집착과 영광에 대한 속박으로 드라마를 이끈다.
열악한 환경을 무시하듯 엘리트 체육의 금메달 지상주의가 득세하는 국내 체육계의 현실은 스포츠 신파를 위한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다. 연금을 보장하는 금메달에 목숨 걸지 않고선 버틸 재간이 없는 비인기종목 스포츠 선수들의 현실은 스포츠강국 대한민국의 얄팍한 신화를 지탱하는 열악한 기자재다. 아이러니하지만 21세기가 지나도 이런 기자재가 꽤나 쓸만한 소품이 된다. 먹히는 신파를 만드는 도구가 된다. 이건 시대착오적인 영화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영화의 현실이다. <킹콩을 들다>는 이 열악한 시대에 담긴 근본적 자질이 노골적으로 활용된 현실적 신파다. 가녀린 소녀들의 몸에 구타의 이미지를 새겨넣고 가난한 루저의 슬픔을 묘사하면서도 중간중간 소박한 웃음을 매복하는 <킹콩을 들다>는 정직하다기 보단 적확한 기획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허구를 채워 넣은 드라마의 완성도가 빼어난 건 아니지만 분노가 자각되고 슬픔이 인정되는 수순을 거칠 때 <킹콩을 들다>는 효과적인 신파의 탈을 쓰고 객석을 공략한다. 배우들의 열연도 볼만하지만 가장 큰 볼거리는 여전히 촌스러운 대한민국이다. <킹콩을 들다>는 그 촌스러운 현실의 열악함을 영화적 감정으로 치환하는, 얄팍하지만 효과적인 신파인 셈이다.
화장실에 갇힌 호준(김재록)은 자신이 박대하던 계상(강지환)으로부터 구출된다. 아는 게 많은 호준은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하는 계상을 박대하지만 정작 계상으로 인해 구원받는다. <방문자>는 결코 맞물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어떤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을 묘사하는 버디무비이며 코미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될 때, 우스꽝스러운 사연이 발생하고 그 안에서 인물은 변화한다. 사람을 둘러싼 정치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람을 본다.
계상을 멸시하던 호준이 계상에게 마음을 열고 영향을 받는 것처럼, 카림(마붑 알엄)과 ‘3m’떨어져 걷던 민서(백진희)도 어느 새 카림과 손을 맞잡고 걷는다.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인 <방문자>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영화다. 카림은 계상을 닮았고, 민서는 호준을 닮았다.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똑부러지는 민서의 염세적인 표정은 지식인을 자처하지만 정작 냉소와 비관밖에 거듭하지 못하는 호준의 무력한 표정을 연상시킨다. 그런 민서에게 카림은 ‘방문자’다. 계상과 호준이 그랬던 것처럼, 민서와 카림도 ‘반두비’가 된다. <반두비>는 별개의 세상에 놓여있던 두 사람이 하나의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다는 점에서 <방문자>를 연상시킨다.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반두비>는 한국이라는 지정학에 나열된 정치적 부조리를 스토리텔링의 근간으로 둔다. 고액의 영어학원비를 벌기 위해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민서의 모습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주차 공간을 찾아 헤매는 재문(박희순)과 상사로부터 야간 출근을 통고 받은 예준(장현성)이 결국 아이의 죽음을 방조하게 된다는 과정만큼이나 부조리한 것이다. 신동일 감독은 영화적 허구라고 말하기엔 현실적 리얼리즘이 지독하게 녹아 들어간 살풍경을 곧잘 묘사한다. <반두비>도 마찬가지다.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떼먹고 부도를 낸 사장은 부유한 삶을 누리고 영어에 목맨 여고생들은 자신들을 희롱하는 백인 영어선생님 앞에서 방긋 웃는다. 비상식이 평온히 내려앉은 기이한 부조리는 정치적 메타포를 노골적으로 함유한 영화적 소재에 가깝다.
사실 현정권과 특정인물을 겨냥한 직설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전작들보다 정치적 색채가 보다 민감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물론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역시 정치적 메시지가 노골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전작들에서 의도한 정치적 발언이 스토리텔링에 녹아 든 메타포의 양식으로 밑그림처럼 삽입되던 것과 달리 <반두비>는 좀 더 직설적인 강변에 가까운 양식으로 정치적 발언을 던진다. 간접적인 매체와 사건을 통한 은유가 직접적인 행위나 대사를 통해 보다 쉽고 강하게 어필된다. 사실 <반두비>는 실상 징집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신도를 통해 파시즘에 가까운 보수적 강제성에 대한 저항적 신념을 직설적인 이미지에 담아낸 <방문자>와 비슷한 양식의 저항적 변화를 꿈꾸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문자>가 제도적 부조리에 대항하는 개인의 소신을 정당하게 담아내는 것과 달리 <반두비>는 비난과 조롱의 수순에서 멈추는 느낌을 부여한다. 그것은 그 이미지 자체가 주는 쾌감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일면 퇴보적이다. 또한 여고생인 민서와 이주노동자인 카림의 신분은 <방문자>의 두 남자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상징성을 끌어안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어쩌면 <반두비>의 정치성이 전작들보다 민감하게 느껴지는 건 단지 동시간대의 현실을 인식시킬만한 소품들을 영화적으로 이양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런 현실적 리얼리티가 강렬한 탓에 때때로 영화적 리얼리즘이 훼손하는 듯한 감상이 부여된다.
신동일 감독의 작품에서 발생하는 본질적 매력은 정치적 주제가 이야기를 잠식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마치 피자빵에 얹혀진 모짜렐라 치즈처럼 정치적 컨텍스트와 스토리텔링이 자신의 영역을 보존하면서 서로에게 녹아 내리듯 밀착한 채 함께 진전된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만남이 버디무비의 속성을 발생시키는 동시에 정치적 상징을 연상시킬 때, 텍스트와 이미지에 입체적 풍요가 부여된다. 버디무비의 구도 안에서 로맨틱코미디의 자질까지 내포하는 <반두비>는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만큼이나 이야기적 재능이 뛰어난 영화다. <반두비>의 직설은 현실적 통쾌함이 보장되지만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잠식하고 있는 듯한 비효율적인 불편함이 감지된다. 이는 어쩌면 작가의 창작력을 침해할 만큼 현실의 정치적 공정성이 심각한 부조리의 수순으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반두비>가 훌륭한 자질을 지닌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여전히 그 이야기가 매력적인 탓이다. 직설적인 정치적 언어가 강하게 인식되는 탓에 허구적 자질이 때때로 잠식되곤 할 뿐, 스토리텔러로서 신동일 감독의 재능은 <반두비>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방문자>와 마찬가지로 단독 컷처럼 분리된 세계관에서 살아갈만한 두 인물을 투샷의 세계관으로 이끌어내는 이야기의 설득력은 <반두비>에서도 탁월하며 이는 신동일 감독의 정치적 뜨거움보다도 대단한 성과다. 하이틴 무비의 경쾌함을 밑천으로 버디무비의 유쾌함과 로맨틱코미디의 순수한 자질을 흡수하고 블랙코미디의 감수성으로 아우르는 <반두비>는 작지만 다부진 민서의 눈빛만큼이나 강단이 뚜렷한 영화다. 연기 경험이 전무하다고 할만한 백진희와 마붑 알엄의 기묘한 조합 역시 효과적인 앙상블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이 작품을 ‘반두비’라고 쓰고 ‘친구’라고 읽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두비’라고 읽고 ‘친구’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상 <반두비>라는 제목은 <친구>라는 제목으로 바꿔 넣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친구’가 아닌 ‘반두비’인 이유는 ‘반두비’는 ‘반두비’이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를 ‘인간’이라고 해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반두비’는 영원히 ‘친구’로 해석해야 할 과제인 셈이다. 단지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반두비>를 불순하게 인식하는 이라면 자신이 과연 ‘이주노동자’를 ‘인간’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불순하게 만드는 건 세상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이런 것만 보니까 그 따위로’사는 거다. 때론 현실의 편견을 부수고 불편함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다. 개인의 변화는 세상의 변화를 위한 밑천이 된다. 그리고 <반두비>는 그 가능한 변화들을 위한, 작지만 당찬 목소리다.
<블룸형제 사기단>은 범죄물에 순수한 동화적 판타지를 결합한 또 다른 장르적 이종교배다. 백치미스러운 하이틴무비에 느와르적 서스펜스의 양각을 새겨 넣은 <브릭>과 전혀 다른 방식의 장르적 접합을 선보인다. <스팅>에 영감을 받아 기획됐다는 <블룸형제 사기단>은 버디무비 사기범죄물이라는 그릇을 고스란히 차용하되, 우정을 형제애로 변주한다. 스토리텔러와 액터, 마치 허구적 창작자와 유사한 사기꾼 형제의 역할분담을 통해 진전되는 사기행각은 한편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완전하다기보단 엉뚱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스토리텔링은 제각각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의 다채로운 동선을 이어나가며 영화적 매력을 더해나간다. 궁극적으로 <블룸형제 사기단>은 장르적 그릇보다도 그 안에 담긴 로맨스와 형제애라는 정서적 감흥이 중요해지는 영화다. 그만큼 결말에 다다라 이야기로서의 묘미가 손실되는 인상을 부르지만 장르적 쾌감을 대신할만한 감동적 자질은 폄하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다. <블룸형제 사기단>을 통해 소포모어 징크스를 유쾌하게 넘겨버린 라이언 존슨의 재능은 분명 현재진행형의 기대감을 얻기에 유효한 것이다.
피로 맺은 계약. 자살을 약속하는 소녀들. <여고괴담5: 동반자살>(이하, <여고괴담5>)은 부제처럼 동반자살을 약속한 동급생 여고 소녀들의 의식을 비추는 가운데 시작된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가운데 촛불을 어스름하게 밝힌 엄숙한 성당에서 각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내고 피를 떨어뜨린 계약서에 손을 얹는 의식은 비장하다. 침묵의 제의를 지배하는 건 정적으로 대변되는 의문이다. 동반자살을 도모하는 소녀들의 사연에 물음표가 새겨진다. 그리고 의문에 휩싸인 정적을 부수는 커다란 울림을 통해 괴담은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여고괴담5>는 사춘기의 트라우마를 호러의 자질로 연동시키는 기존의 시리즈와 동력은 비슷하다. ‘여고’라는 환경이 머금은 ‘괴담’이라는 소재는 어딘가 설득력 있는 시너지를 발생시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고괴담5>는 그 설정의 유효함을 소진하는 또 한번의 기획이다. <여고괴담5>는 정서적으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여기서 발생하는 기시감은 작품의 자질까지 평가된 결과가 아니다. 모호한 형태로 침잠된 정서적 분위기를 유지하는 태도가 그렇다. 아이러니하지만 공포스럽지 않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여고괴담>이라는 시리즈가 표방한 장르적 의도는 명백하다. 그만큼 그 의도를 기준으로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다. <여고괴담5>는 무섭지 않기로 따진다면 시리즈의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다. 몇 번 정도의 깜짝쇼가 때때로 움찔하게 만드는 요량은 있어도 근본적으로 공포의 수위까지 나아간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르적 특징이 열악하다. 스테레오 타입의 사연으로 치장된 캐릭터들도 아쉬운 대목이다. 개별적인 캐릭터 각자를 두르는 인과관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개개인의 갈등엔 적당한 당위가 존재한다. 그 갈등을 유발하는 사연의 깊이가 지극히 얕다.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그리고 그 평면적인 사연이 입체적인 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두꺼운 평면의 형태로 포개져 나열되는 느낌이다. 그만큼 충돌하는 사연들로부터 파생되는 감흥이 지극히 단조로움을 벗어나지 못한다. 긴장감의 결여도 이 지점에서 비롯되는 느낌이다.
어둡고 흐릿한 인상을 유지하지만 그것이 싸늘하거나 으시시한 감정을 담보하지 못한다. 물론 귀신보다도 사람이 더욱 무섭다라고 이해되는 결과는 흥미롭다. 여고생이라는 예민한 시절의 풍경을 바탕으로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엇갈리는 관계의 침몰을 지켜본다는 건 나쁘지 않은 구석이 있다. 하지만 진짜 사람이 귀신보다 무섭다는 건 장르적으로 끔찍한 패착이다. 나약한 장르적 해석과 빈곤한 상상력이 동원된 스토리는 <여고괴담5>이 기본적인 자산 관리가 불성실한 작품임을 인지하게 만든다. 신예 배우들의 연기엔 일장일단이 있다. 다만 그 연기를 온전히 평가하기엔 캐릭터의 설계가 안이하다. 이는 분명 캐릭터가 배려해야 할 기본적 요구가 불충분한 탓이다. 이런 결과가 경력이 짧은 어린 배우들의 자신감을 훼손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다. 10주년 기념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시리즈의 가장 큰 고비를 맞이하는 인상마저 든다.
<트랜스포머>가 이룬 시각적 성취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로봇의 철판을 CG로 구현하는 건 크리쳐나 생물의 피부를 재현하는 것보단 손쉬운 작업이다. <트랜스포머>의 성취는 사실상 이미지의 구현 자체에 있다기 보단 그 이미지가 정신적 편견에 가까운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지점에 있다. 테크놀로지의 혁명이라는 흔해빠진 수사보다도 중요한 건 거대변신로봇들이 실사적인 캐릭터로서 존재하는 오락영화가 시장성을 얻었다는 사실 자체다. 그러니까, ‘아마, 우린 안될 거야’를 ‘꿈은 이루어진다’로 변화시킨 저력이랄까. 이는 디스토피아적 예감을 등에 업고 스릴러적 감각을 바탕으로 두른 액션 시퀀스를 선사하던 <터미네이터>의 인간형 로봇과 전혀 다른 재질의 쾌감을 두른 본격 로봇 블록버스터의 출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하, <트랜스포머2>)은 전작의 성공에 힘입은 속편이다. <트랜스포머2>도 상업적인 성공을 밑천으로 컨텐츠의 자가증식을 거듭 반복하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을 고스란히 차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트랜스포머2>가 선택한 세일즈 포인트는 양적 팽창이다. 어느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속편들이 그렇듯 <트랜스포머2>에서도 물량공세적 팽창이 단연 눈에 띈다. 일단 로봇의 개체수가 현저히 늘었다. 그리고 액션 스펙터클의 규모도 전작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너비를 확장했다. 심지어 2시간 30여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은 <트랜스포머2>의 덩치를 가늠하기 좋은 요건이다. 러닝타임의 확대는 서사보단 묘사에 대한 팽배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LA도심을 비롯해 미국을 무대로 벌어지던 로봇들의 활약상은 속편에 이르러 상하이와 이집트 등 전세계적인 랜드마크를 점령하듯 펼쳐지고 나열된다.
로봇의 개체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작보다 눈에 들어오는 로봇 캐릭터는 현저히 줄었다. ‘옵티머스 프라임’과 ‘범블비’를 제외한 나머지 로봇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소모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매력이 없다. 물론 ‘스타스크림’이나 ‘메가트론’과 같이 악의 축에 선 로봇들도 비등한 자태로 그 맞은 편에 온전히 존재감을 알리지만 무채색의 디자인으로 통일성이 두드러진 ‘디셉티콘’로봇들은 하나같이 몰개성적이다. 심지어 컬러풀한 색채감으로 개성을 자아내는 ‘오토봇’로봇들도 딱히 명확한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새롭게 가미된 트윈스 로봇, ‘스키즈&머드플랩’은 인상적이라기 보단 눈에 밟히다 마는 수준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구닥다리 로봇 ‘제트파이어’정도를 제외하면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매력을 전달하는 로봇 캐릭터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개체수가 증가했을 뿐, 하나같이 일회용에 가깝다. 물론 그만큼 질적으로 풍성한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만큼 소모적인 감상을 부추긴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물론 후반부에 등장하는 초대형 합체로봇 ‘디베스테이터’나 ‘옵티머스 프라임’의 합체버전은 새롭게 ‘득템’했다 할만한 볼거리를 추가한다. 게다가 중반부에 다다를 즈음엔 <터미네이터>를 직설적으로 겨냥한 듯한 인간형 로봇조차 등장한다. <그렘린>을 모방한 듯 방정맞게 움직이는 소형 로봇들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캐릭터로서의 활용도가 낮아보인다. 늘어난 숫자만큼 출연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는 로봇이 많아 보인다.
빠른 속도감을 자랑하는 컷의 흐름은 전작만큼이나, 혹은 전작보다 더 현란하다. <트랜스포머2>는 마치 눈에서 뇌로 시각적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와 경쟁하듯 컷을 구겨 넣은 이미지의 속도감이 대단하다. 그 와중에 고속촬영을 모방한 슬로모션으로 거대한 속도감 사이에 작은 심호흡을 마련하기도 한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밀고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는 두뇌적 판단을 흐린다. 정신 없음 자체를 만족의 요건으로 유도하는 양상이다. 사실상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은 활유적이며 의인화된 강철피부의 유기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의 인정할만한 성과는 스크린에 구현된 로봇의 육중한 자태에도 있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로봇의 육체에 인간적 감수성을 투영했다는 지점에 있다. <트랜스포머2>는 이런 감수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부각시킨다. 로봇간의 격돌 과정에서 파편이 떨어져나가고 윤활유를 내뿜는 옵티머스 프라임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마치 인간의 피부조직과 피로 대입해도 좋을 것 같다는 인상마저 든다. 로봇의 파괴가 아닌 살해처럼 인식된다. 그것은 엄연히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 따위와 무관한 별나라 생명체들이다. 인간이 창조한 유사 생체가 아닌 인간과 동등한 하나의 종족인 셈이다. 인간 캐릭터, 즉 샘 윗위키(샤이아 라보프)나 미카엘라(메간 폭스)의 매력이 전작에 비해 반감됐음에도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로봇 캐릭터들이 그 공백을 대신할만한 자질을 지닌 덕분이다. 엄밀히 말해서 <트랜스포머2>의 주인공은 로봇이다. 오히려 인간이 조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CG로 구현된 가상의 존재가 인간의 연기를 압도한다. 이는 호불호의 영향력을 떠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중량감이 늘어난 액션신은 시각적 정보가 층위를 형성할수록 지독한 기시감을 부른다. 변신과 난투의 동어반복 속에서 그 특별한 매력이 점차 반감되는 느낌이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서 로봇의 육박전이 차지하는 비율은 드라마의 밀도보다도 광활하다. 항공모함을 부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파괴하고, 로봇들이 몸을 던진 주변이 쑥대밭으로 변하는 사이, 한낱 손바닥만한 인간들은 발에 땀나게 뛰고 달릴 뿐이다. 명확히 의미를 전달하자면 늘어난 부피에 비해 질량은 축소된 느낌이다. 오락적 밀도가 감소됐다. 로봇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적극 활용했던 전작의 유머는 좀처럼 활용되지 않는 반면 입담도 느슨해졌다. 전작보다도 비범한 역할을 자처하지만 오히려 전작에 비해 활용도가 낮아 보인다. 그만큼 캐릭터의 대비를 통한 시너지가 약해진 느낌이다. 인간과 로봇의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활성화되어야 할 입체적 구조가 헐겁다. 그만큼 감흥의 유효시간도 짧아진다. <트랜스포머2>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현란한 영상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블록버스터다. 이는 분명 유효하다. 하지만 그 유효함이 끝없이 지속되지 않는다. 동어반복적인 액션신, 몰개성적인 캐릭터로 구축된 장시간의 러닝타임은 결말에 임박할수록 과감한 물량공세를 아끼지 않음에도 지켜보는 이를 지치게 만든다. 단순한 시각적 감흥에 기댄 너비의 확장만을 앞세워 2시간 30여분을 채우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인다. 물론 전작에 비해 좀 더 암담해진 분위기는 비범한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완구로봇 엔터테인먼트의 수준에 가깝던 <트랜스포머>를 성인 취향의 오락물로 끌어올렸다 할만한 변화다. 때때로 그것은 만화적 취향의 로봇 대전이 아니라 장르적 서스펜스가 가미된 잔인한 혈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옵티머스 프라임과 디셉티콘 3종 로봇이 펼치는 중반부의 전투신은 <트랜스포머2>의 액션신 가운데 백미라 꼽을 수 있는 장면이다.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것마냥 생생한 질감으로 스크린에 투사된 로봇의 현란한 움직임을 지켜본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엔터테인먼트다. 망막을 피로하게 만드는 컷의 속도감을 따라잡는다는 건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마냥 포기할 수 없는 유흥일지도 모른다. 말초신경이 마비될 것 같은 시각적 압도감을 감상한다는 건 분명 흔한 기회는 아니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각적 욕망에 비해 느슨한 농담과 육중한 액션의 동어반복 가운데 사족이 남발되는 스토리를 긴 시간 동안 감내할 수 있다는 것도 그것을 충만 시켜줄 것이라 믿어지는 시각적 자극이 존재한다는 전제 덕분일지 모를 일이다. 어지럽고 산만하게 돌아가는 과잉적 이미지 가운데 로봇이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이 선명하게 판별되진 않아도 변신을 거듭한다는 것에 현혹된다면 <트랜스포머2>는 충분히 만족할만한 오락영화라 추켜세울만한 요건을 갖춘 셈이다. 빈 깡통임에 틀림없지만 깡통 디자인이 압도적인 건 사실이므로, 그 디자인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결코 무시하기 힘든 결과물이다. 하지만 <트랜스포머2>는 분명 적정수준의 역치를 넘어선 과잉의 자극을 내보내는 중독적 엔터테인먼트다. 즐기고 있다기 보단 홀리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과다한 자극적 세기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실은 긴축되고 자극은 증폭됐다. <트랜스포머2>의 장기적인 흥행성패도 그 지점에 대한 호불호를 통해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시에 그 결과는 어쩌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자극적 세기를 조율할만한 새로운 지표로서 참고될 가능성도 농후해 보인다. 물론 테스트베드 대한민국의 이상기후적인 열광이 보편적인 기초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회사 직원들이 최(최민식)를 보더니 멈칫하고 돌아선다. 최는 막 책상을 비우고 회사를 떠나는 참이다. 처량한 실직자의 몰골로 돌아온 집에서도 그는 혼자인 기러기 아빠다. 최가 동생의 공장에서 일하다 교통사고로 숨진 티벳의 이주노동자 도르지의 유골을 안고 히말라야로 향하게 된 건 그런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외로움조차 방치해버린 적막한 삶에 있어서 현실은 어떤 애착도 발생시키지 못한다. 그의 히말라야행은 일종의 현실도피에 가깝다. 다만 결코 한적한 휴양이 되지 못하리란 예감을 짊어지고 오르는 고행의 도피가 될 것임을 짐작할 따름이다.
도입부를 비롯한 초반부 서울의 몇 장면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분은 험준한 히말라야의 경관으로 채워지는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이하, <히말라야>)은 극영화적인 연출이라기 보단 다큐멘터리적인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고 이해될만한 작품이다. 고산지대의 희박한 공기가 감지되듯 무겁게 옮겨지는 최의 산행과 이를 무심히 비추는 카메라의 롱테이크는 인물보다도 인물이 한 점처럼 끼어든 장관의 풍경에 관심이 많다. 시간이 멈춘 듯 세월이 보존된 자연적 풍광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사람과 바람뿐이다. 그 바람은 마치 인간의 업을 실어 나르듯 부단히 오가며 히말라야로 향하는 카트만두를 오르는 최에게 고행의 무게를 얹어놓듯 시종일관 거세다. 바람에 흔들리는 카메라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이내 고산병으로 쓰러져버린 최의 모습을 지켜보는 광경은 연출된 장면이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실제적이다. 실제로 최민식은 고산병에 시달리면서 촬영을 강행했다고 한다.
사실 <히말라야>에서 최민식의 모습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라기 보단 카메라 너머에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 인식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최라는 이름도 사실상 최민식의 성을 가져다 붙인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히말라야 고지대에 놓인 자르코트의 티벳인들 사이에 놓인 최민식은 마치 자연 가운데 놓인 인간의 한 점처럼 이질적이며 그만큼 그 환경에서 동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 자체가 <히말라야>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차지한다. 탈문명의 인간이 친자연적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깨달아가는 성찰이란 지극히 뻔한 것임에도 <히말라야>가 전시하는 광경을 지켜본다는 건 지극히 뻔할 수 없는 감정을 도모한다. 그건 <히말라야>가 연출된 양식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움과 다른 비연출적 양식의 자연스러움을 상당 부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영화인 까닭이다.
현지인으로 구성된 비전문연기자들의 모습은 자연주의적인 풍광을 전시하는 카메라와 함께 <히말라야>가 극영화라기보단 다큐멘터리적인 접근법에 따르고 있다는 증명을 더한다. <히말라야>는 문명에서 탈출한 현대도시인의 황폐해진 정서가 자연주의적 풍경과 인간들 사이에서 평온한 치유를 얻어가는 과정을 찬찬히 살핀다. 문명에서 달아나듯 히말라야로 온 최가 통과의례를 겪듯 고산병을 앓고 이내 도르지의 가족으로부터 병간호를 받은 뒤 자르코트의 티벳인들 사이에 어울린 채 일상을 보내는 모습은 그 자체를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다스리게 만든다. 그 자연주의적 풍경을 목도할 도시의 누군가는 분명 그 광경에 매혹되거나 자신의 현실을 작게나마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결코 현실을 망각하거나 온전히 그로부터 탈피하기란 어렵다. <히말라야>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그 결과에 있다. 도르지의 유골을 은폐했던 최의 의도가 발각되는 순간, 최의 여정도 함께 끝이 난다. 선의에서 비롯된 의도라 해도 결과적으로 최가 얻은 성찰은 본래의 의미를 망각한 착취적 형태로 잔존하기 때문이다.
결론의 형태까지도 평온을 유지하지만 <히말라야>는 모든 과정을 지나쳐 결말에 다다랐을 때 묵묵한 카메라의 시선이 시니컬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사실상 그 중립적인 카메라의 태도는 단지 자연을 비추기 위한 롱테이크의 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황을 무감정의 시선으로 장악하고 있는 관찰자의 위치를 점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이질적인 방문자는 은폐하다 이내 망각해버린 제 목적을 뒤늦게 이루고, 떠밀리듯 황급히 자르코트를 떠나간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카메라는 역시나 비판적인 태도와 무관하다. 지친 듯 무기력한 모습의 최가 고산병으로 쓰러져 자르코트에 올랐던 것과 달리 그는 스스로 걸어 내려가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방인으로서의 휴가를 마치고 다시 제 세계로 나아간다. 최는 평온하고 자연주의적인 타인의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대자연의 장관 앞에서 황폐해진 마음을 정화시킨 최는 다시 한번 도시에서 제가 얻을 억겁을 짊어지고 살아갈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이 희망이다. 제 자리에서 살아가는, 그리고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서로 다른 것이 다시 제 모습에 걸맞은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순리에 가까운 행위다. 그것이 무기력이든, 의지든, 산을 내려가 다시 살 수 밖에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을 결국 희망이라 인식할 수 밖에 없다. 다만 묵묵히 제 자리에 선 히말라야의 풍경에 황폐한 마음의 먼지가 걷힌다. <히말라야>는 현대인을 위한 치유의 풍경을 선사함으로써 일말의 희망을 온전히 부지하게 만든다.
충남 예산면 운곡리의 조필성(김윤석)은 한적한 시골에서 치안 유지보다도 집안의 경제난 해소가 더 고민스러운 한량 형사다. 만화방을 운영하며 남편의 쥐꼬리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아내(견미리)의 바가지는 득달같고, 두 딸에겐 매일같이 면목이 없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행운이 찾아온다. 소싸움 대회를 주관하던 중, 불현듯 찾아온 예감에 아내의 통장을 훔쳐다 판돈을 걸자 열 배의 배당금이 쏟아진다. 하지만 행운은 곧 불운으로 돌변한다. 친구에게 맡긴 배당금을 찾으러 가던 중, 희대의 탈주범 송기태(정경호)를 만나고, 돈도, 자존심도 모두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리고 추격이 시작된다. 거북이 달린다.
<살인의 추억>은 시골이란 정체된 정서의 공간에 스펙터클한 서스펜스를 채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추격자>는 추격의 대상을 숨기지 않고도 긴박한 추격전을 만들 수 있음을 (한국의 영화적 토양에서) 증명했다. 신분을 감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격자>와 유사한 구도를 보유한 <공공의 적>은 형사로서의 제도적 처벌보다도 개인적인 복수심에 근간에 둔 주먹질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결말을 그린다. 앞서 나열한 세 영화의 공통분모는 무능한 경찰력이다. 과학수사를 운운하거나, 직감을 따라가거나, 혹은 불법을 자행하거나, 범인들은 항상 형사들을 제치고 능수능란하게 빠져나간다. 이는 <거북이 달린다>도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서 ‘거북이’는 형사를 겨냥한 단어가 아니다. 구체적인 언어를 동원해 설명하자면 ‘시골’의 ‘서민’‘가장’형사다.
향토적 풍경을 바탕으로 축조된 수사물이란 점에서 <거북이 달린다>는 <살인의 추억>과 <추격자>를 연상케 하는 장르적 환경과 구조를 지닌다. 동시에 그 추격의 주체와 객체가 형사와 범인이라는 공적 신분을 벗어나 개인과 개인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는 피날레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공공의 적>이 떠오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거북이 달린다>는 앞선 세 영화와 활성화된 에너지의 유형이 다르다. 앞선 세 영화가 고체처럼 단단하게 응축된 서스펜스를 기본적인 영화적 질량으로 삼은 장르물이라면 <거북이 달린다>는 액체처럼 유연하게 출렁이면서 종종 넘쳐흐르는 방식의 코미디에 가깝다. 눈에 띄는 건 스토리보다도 캐릭터이며 전반적인 분위기보다도 순발력 있는 리듬이 관건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날렵한 탈주범과 그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시골의 느슨한 형사 사이엔 좀처럼 메울 수 없는 빈틈이 보인다. 공권력을 농락할 정도로 두뇌가 비상하고 운동신경 또한 발군인 송기태에게 조필성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적수다. 이는 ‘토끼와 거북이’의 토끼처럼 방심하기 좋은 상대인 셈이다. (동화의 관계를 염두에 둔 제목처럼) <거북이 달린다>는 방심하는 토끼를 쫓아 달리는 거북이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다. 그리고 그 거북이는 시골에 사는 서민이자, 가장이며, 아버지다. 형사의 추격전이라기 보단 촌놈의 사투에 가깝다. 촌스럽고 느슨한 루저의 승리를 연출하기 위한 서사를 그린다. 이성적으로 직조된 것이라기 보단 감정적인 결과물에 가깝다. 그만큼 선악의 관계는 배제되고 개인적인 사연이 중시된다. 형사도, 범인도, 제 나름의 사연이 있다. 다만 그 사연의 비중이 다르고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편애가 형성된다.
드라마틱한 감정을 주조하는 코미디로서 좀 더 효율성이 뚜렷한 <거북이 달린다>는 장르적 동선을 밟아나가는 덕분에 장르적 기시감을 부르지만 종종 느슨하게 풀리는 속도감을 활용해 유머를 발생시키고 드라마틱한 감정을 주조하는데 좀 더 효율성이 뚜렷한 작품이다. 장르적 비범함보단 평이한 드라마로서의 야심이 짙다. 추격전의 구도에 곁가지를 치는 가족주의의 감성으로 이뤄진 <거북이 달린다>는 지극히 단순한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지만 종종 명확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함으로써 일관성 있는 리듬감에서 벗어나곤 한다. 하지만 연주력의 공백을 메우는 건 배우라는 악기다. 주연과 조연 가릴 것 없이 <거북이 달린다>의 캐릭터를 이루는 배우들은 제 역할에 충실하다. 특히 김윤석은 마치 악센트와 같은 강세를 찍으며 단조로운 이야기에 특별한 음색을 새긴다. 다만 대비를 이루는 캐릭터의 세기가 좋은 형태를 이루지 못해 종종 사연의 중심이 흐트러지는 인상이 감지되고 그만큼 결말부를 장식하는 쾌감이 약해진다.
그럼에도 <거북이 달린다>는 환경을 잘 응용한 코미디이자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오락영화다. 과하거나 부족한 지점이 눈에 띄지만 마이너스와 플러스의 총합의 균형이 적절하다. 무엇보다도 캐릭터가 얻는 마지막 성취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촌놈을 위해 배려된 작위적 송가라지만 그 소박한 에너지가 온전히 전달되는 기분이다. 그 순박한 자질이 밉지 않다.
<여고괴담2: 메멘토 모리>가 떠올랐다. 정서적인 기시감이 그렇다. 물론 그 정도로 비범한 감상을 부여한다는 게 아니다. 침잠된 정서만 그렇다. 무섭지 않기로 따진다면 시리즈 가운데 가장 밑바닥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두어 번 정도 움찔할 정도의 깜짝쇼를 제외하면 놀랄만한 구석도 보이지 않는다. 가장 안타까운 건 평면적인 사연이다. 개별적인 캐릭터들이 만들어낸 갈등엔 적절한 당위가 있다. 다만 그 개별적 사연들이 지극히 스테레오 타입이다. 거기까지도 좋다. 그 개별적 사연이 충돌하는 양식이 어떤 입체적인 감흥을 발생시키지 못한다.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불필요한 사족이 동원된다. 평면을 구조로 쌓아가는 느낌이 아니라 평면이 계속 포개져서 두껍게 평범해지는 느낌이랄까. 점차 심심함이 더해지는 기분이다. 어둡고 흐릿할 뿐, 으시시하거나 싸늘하지 않다. 귀신보다도 무서운 사람의 내면을, 그것도 여고생이라는 예민한 시절의 풍경에 담아놓고자 한 의도는 나름 야심적이다. 다만 진짜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건 장르적으로 끔찍한 패착이다. 해석력이 연약하고, 상상력이 빈곤하다. 가톨릭 미션 스쿨이라는 배경은 그저 고딕적 환경을 병풍처럼 두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고 잔혹하다는 수사가 민망할 정도로 핏빛의 농도에 비해 압박이 약하다. 애초에 경력이 짧은 배우들의 연기를 논한다는 건 사족이다. 연기적 어색함을 찍어내는 것보다도 캐릭터를 치장시켜주기 힘든 작품의 자질이 문제다. 10주년 기념작이라는데, 이 시리즈의 종지부를 찍게 될 기념작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경력이 짧은 어린 배우들의 마음에 상처가 되진 않을까, 내심 안타까운 심정마저 든다.
짧지만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는 <드래그 미 투 헬>을 탐색하기 좋은 밑그림이다. 강력한 저주와 지옥의 이미지가 연동되는 오컬트 소재의 강림은 <드래그 미 투 헬>의 장르적 밑그림이 낡은 시절의 이미지에서 비롯됐음을 알리는 것과 같다. 마치 쌍팔년도 호러 영화의 기시감이 느껴진다. 다만 여기서 쌍팔년도의 어감은 ‘촌스럽다’가 아닌 ‘고전적이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드래그 미 투 헬>은 요즘 보기 드물게 강렬하고 압도적인 정통 호러 영화다.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효과음과 이미지를 동원하는 <링>과 <주온>과 같은 일본산 스몰볼 호러영화들과 비교할 수 없게 손이 크고 담대한 정통호러다.
1949년, 멕시코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40년 후로 점프컷된 영화는 미국의 한 은행에서 본격적인 서사를 다시 전진시킨다. 대출 업무를 상담하는 크리스틴(알리슨 로먼)에게 대출연장신청을 부탁하는 노파 가누시 부인(로나 가버)의 불결한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비추는 카메라는 <드래그 미 투 헬>이 전면에 내세운 공포의 근간이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잔혹한 이미지를 통해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기 보단 불결한 이미지를 통해 혐오를 자극하는 <드래그 미 투 헬>은 공포라는 감정을 두려움에 가두지 않고 우스꽝스러움으로 진전시킨다. 전형적인 B급 정서로 무장한 악취미의 이미지 속에서 공포와 유머가 절묘한 궁합을 자랑하듯 맞물려 굴러간다.
대출연장을 거절한 크리스틴에게 노파가 저주를 퍼붓는 광경은 현실적 리얼리티에 초자연적 공포가 주입되는 시작점과 같다. 노파가 크리스틴에게 내린 저주는 염소의 형상을 한 악마 라미아의 저주이며 이는 크리스틴의 일상을 점차 무시무시한 수렁으로 밀고 내려간다. 오컬트적 신비가 가미된 악마주의적 공포가 리얼리티의 풍경 안에서 고스란히 보존되는 광경은 단연 복고적이며 때때로 참신하다. 낡고 낡은 장르의 관습을 고스란히 차용하는 동시에 B급 유희의 이종교배를 통해 관습적인 리듬감에 새로운 활력을 형성한다. 신체훼손과 피칠갑의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이고 압도적인 긴장감을 전달한다.
동시에 압도적인 전율의 긴장감 사이로 순발력 있게 끼어드는 유머는 농담처럼 가볍지만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한다. 호러라는 장르적 특성을 전형적인 B급 정서의 악취미와 연동시키는 방식은 오히려 장르적 전형성을 탈피하는 동시에 장르적 자질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효과적인 방식이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이블 데드>시리즈로 대변되는 샘 레이미의 근본적 재능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예감했거나 혹은 예감하지 못했거나, 어느 쪽의 입장에 놓여있다 해도 <드래그 미 투 헬>이 만들어내는 난장질의 풍경을 온전히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특히나 정치적으로 공정하며 압도적인 감상을 부르는 결말부는 오르가슴에 가까운 쾌감을 선사한다. <드래그 미 투 헬>은 공포가 극대화시킬 수 있는 쾌감의 극단적 너비를 실감하게 만드는 문제작이자 <스파이더맨>이 아닌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를 새삼 재확인하게 만드는 걸작이다. 21세기의 기념비적인 호러영화라 불려도 단연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