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쌍팔년도 시절의 호러 영화의 기시감이 든다. 여기서 쌍팔년도의 의미는 ‘촌스럽다’보단 ‘고전적이다’란 의미에 가깝다. <드래그 미 투 헬>은 신경만 긁다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근래의 유사 호러물 따위와 종자가 다른 진짜 호러영화다. 악랄하고 장난끼 가득한 B급 유희의 난장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피칠갑과 신체절단이라는 잔인한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압도적인 악랄함을 통해 공포적 전율을 선사하는 동시에 어느 코미디 영화보다도 강력한 웃음을 동반한다. 저주와 주문이라는 오컬트적 신비가 가미된 악마적 공포 가운데서 농담처럼 끼어드는 B급 유희가 단연 발군이다. 분명 ‘으악’과 ‘으하하’를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드래그 미 투 헬>은 분명 21세기의 기념비적인 호러영화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마스터피스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이 아닌,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는 여전히 건재하다.
16일 자정까지 엠바고가 걸려서 자세한 말은 할 수 없고, 어쨌든 확실히 전작보다 늘어난 제작비만큼 물량공세적 규모가 커졌다. 로봇 개체수도 현저히 늘었고, 액션 신의 중량감도 불었다. 심지어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는 로봇도 등장하고, 전반적으로 전작에 비해 좀 더 잔인하다 느껴질 만한 측면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디셉티콘의 선조 로봇이 등장하는데 이건 마치 프로토스 질럿 같기도 하고. 시각적인 압도감은 분명 대단하지만 말초신경이 마비되는 느낌이라 이게 딱히 적정수준의 오락적 만족감을 준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지럽고 산만한 기분에 가깝다. 러닝타임이 생각보다 길다. 2시간 30분에 다다르는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육중한 액션과 느슨한 농담이 반복된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각적 욕망에 비해 스토리는 사족이 남발되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향력이 확고히 느껴진다. 그는 확실히 외계문명의 인류기원설에 흥미가 많아 보인다. 하긴 <인디아나 존스>에서도 UFO를 날린 마당에 외계로봇의 스토리만큼 좋은 그릇도 없겠다만. 어쨌든 <트랜스포머>의 가장 큰 매력이 변신로봇들의 육중한 난투극이라 믿었던 이라면 더더욱 만족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겠다. 다만 전작에 비해 분위기는 확실히 좀 더 암울하다. 비범한 척 하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은 아니고. 애들 입장에서는 좀 암담해질지도 모를 일. 범블비는 여전히 귀엽다. 애교가 넘쳐, 그냥. 누나들이 좋아하겠다. 메간 폭스는 더 예뻐진 느낌. 남자들은 하악거리겠지. 어쨌든 <트랜스포머>는 <트랜스포머>다. 빈 깡통인 건 알겠는데, 그 깡통 디자인이 볼만한 건 사실이니까. 물론 그냥 한번 보고 싹 잊어버리면 되는 영화라고 말하기엔 그 자질의 미덕이 그렇게 명쾌하게 정리될만한 수준인지 모르겠다.
전지현의 할리우드 진출작 논란 따위를 접어두고라도 단적으로 말하자면, <블러드>는 현재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이 부여하는 묘미의 절반도 따라잡지 못하는 작품이다. 초중반에 등장하는 집단 학살신은 심심하지 않은 구경거리처럼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딱히 인상적인 액션 수준을 유지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때때로 게임 동영상을 삽입한 것마냥 조악하기 짝이 없는 CG가 심심찮게 눈에 띄고, 비전문액션배우의 지친 몸놀림을 커버하기 위해 시종일관 흔들어대는 카메라 워크도 무색하기 짝이 없다. 결론은 <블러드>가 딱히 미덕을 설명하기 어려운 오락영화란 말이다. 혹시나 만약 <공각기동대> 오시이 마모루의 동명 원작 스크린판이란 문구 따위로 그 이상의 기대감을 충만한 관객이 있다면 모든 기대감을 접는 게 낫다. <블러드>는 전공투 시절의 역사적 의식을 투영한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 소설도, 그 이후로 뱀파이어 팬픽 수준의 양질을 유지하며 분화해나간 ‘블러드 프로젝트’의 애니메이션과 코믹스와도 다른 작품이다. 특히나 증축된 서사는 <블러드>를 부실한 스토리텔링으로 흔드는 과욕 같다. 모든 이들의 관심사라 할만한 전지현은 고생한 흔적이 역력할 뿐, 안타깝지만 액션을 구사하기엔 지치는 몸놀림을 선보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3부작을 생각한다지만 이미 시리즈로서의 가능성은 끝난 느낌이다.
오후 1시 23분에 뉴욕 펠햄 역에서 출발해서 ‘펠햄123(one-two-three)’이라 불리는 지하철이 갑자기 구간 가운데서 정차하더니 차체마저 분리된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지하철 배차원 가버(덴젤 워싱턴)는 접속을 시도해보지만 좀처럼 응답이 없다가 곧 낯선 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신원미상의 목소리는 지하철 납치를 알리며 인질과 거액의 교환을 요구한다. 협상이 시작된다. <서브웨이 하이재킹: 펠햄 123>(이하, <펠햄123>)은 이와 같이 지하철 납치를 소재로 한 범죄극이다. 하지만 하이재킹 액션물의 이미지를 기대한다면 배반감을 느낄 가능성이 농후하다. <펠햄123>은 뉴욕에서 벌어지는 납치범죄극이며 이는 명백하게 ‘9.11’을 연상시킨다. 사실 문제의 그날 이후 할리우드의 멘탈을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포스트 9.11’ 작품들은 벌써부터 낡았다고 인식될 만큼 지겹게 회자되고, 해석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펠햄123>의 포스트 9.11 탑승을 눈여겨볼만한 지점은 테러에 대한 공적 공포보다도 테러리즘을 대처하는 뉴욕 시민들의 심리적 이해와 행정적 대응의 현상태를 묘사한다는 점이다.
지하철을 납치한 라이더(존 트라볼타)는 국가를 상대로 테러의 대가를 요구하면서도 민간인을 협상의 중계자로 지정한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테러가 단지 공적인 정치로 해결되기 전에 개인의 공포를 거쳐 환기된다는 직설적인 심리가 더욱 적나라하다. 그것이 어떤 정치적 협상과 연동되는 위기이기 전에 인간적 생존과 직결되는 개인과 개인의 알레고리 안에 놓여있음에 접근한다. 거대한 재난을 공유했던 뉴요커, 더 넓게는 미국인들이 관계를 인식하는 심리적 변화를 예상케 한다. 개인의 희생과 양심적 고백을 요구하는 범인의 태도에 몸소 응답함으로써 무차별적인 희생을 방지하려는 시민의 태도를 묘사한다는 점이나 뉴욕 시민의 안위를 정치적 훼손의 분기점으로 이해하고 반응하는 공적 대응도 흥미롭다. 동시에 <펠햄 123>은 캐릭터의 심리적 대립구도를 통해 밀고 나가는 스토리의 결과가 궁금해지는 영화다. 토니 스콧의 오랜 동반자인 덴젤 워싱턴은 언제나 그렇듯 빼어난 연기를 보이고 존 트라볼타 역시 매력적인 악당이라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카리스마를 선사한다. 특유의 핸드헬드와 컷 편집을 동원하는 토니 스콧의 현란한 이미지는 <펠햄123>에서도 눈길을 끄는데 유효하지만 때때로 스타일리쉬의 강박을 인식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과정에서 증폭되는 흥미에 비해 허탈함이 선명한 결말은 분명 가장 큰 아쉬움이라 이해된다.
불법체류자 신분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동네 주민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 단면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의 무능력한 마초이즘은 때때로 자신의 영토를 침입한 이방인들에 대한 공격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로니를 찾아서>는 어느 치졸한 마초의 체험을 통해 적나라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극적 재미를 진전시키는 영화다. 인호(유준상)가 뚜힌(로빈 쉐이크)과 함께 로니(마붑 알엄 펄럽)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린 영화는 버디무비와 로드무비의 조합을 이룬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사회적 시선을 견지한 극적 연출이 인상적이다. 다만 문제의식을 발견할 뿐 어떤 결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남자의 변화를 관찰할 뿐이다. 인호의 변화는 결국 한국남자들, 더 넓게는 한국사람들의 가능한 변화를 설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정치적 주장보다도 설득력 있는 사연이 귀엽고 즐겁게 전달된다. 물론 인호가 로니를 찾아가는 여정은 일면 무모한 희망처럼 보이고 목적성도 흐릿하다. 하지만 그 여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무모한 희망에 동참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로니를 찾아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동시에 한국어에 유창한 불법체류자 외국인들의 모습은 기이한 구경거리처럼 보인다.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세라핀 루이는 천재라고 명명되기 좋은 재능을 소유했던 프랑스의 여류화가다. 그녀를 발굴한 건 독일 출신의 미술평론가 빌헬름 우데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계기가 된 건 세라핀이 우데의 가정부였기 때문이다. 삶의 여유란 찾아보기 힘든 빈민 여성노동자가 재능을 꽃피운다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빈센트 반 고흐만큼이나 강렬하고 치열한 색채와 날카롭고 예민한 붓터치를 지닌 세라핀 루이의 작품은 우데의 말처럼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다’. 놀라운 재능은 때때로 비극이다. 생애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헐값에 팔았다는 고흐가 현실적 가난과 정신적 광기에 시달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라핀 루이 역시 비슷한 서사 속에서 단명했다. 물론 그녀의 광기를 잉태한 건 유년 시절을 지배하는 비롯된 종교적 집착이었다지만 현실적 부조리가 그녀를 파국으로 몰고 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세라핀>은 제목 그대로 세라핀 루이의 삶을 조명하는 전기적 역할에 충실한 드라마다. 극적인 울림이 최대한 절제된 담담한 시선은 그녀의 생을 객관화시킴으로써 그 삶 자체를 온전히 부각시킨다. 물론 클라이맥스가 결여된 채 페이드 아웃을 반복하며 서사를 진전시키는 영화로부터 심심한 인상을 얻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동시에 세라핀 루이의 생 자체가 그리 극적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여인의 초상 뒤에 담긴 은밀한 생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세라핀>은 전기 영화로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특히 순수와 광기를 차분히 넘나드는 세라핀을 연기한 욜랭드 모로의 연기는 단연 일품이다.
로나(아르타 도브로시)와 클루디(제레미 레니에)는 한 집에서 살아가는 부부다. 하지만 충만한 애정의 발로에서 시작해 제도적 합의로 나아간 부부가 아닌 그저 제도적으로 계약된 부부 관계에 불과하다. 벨기에 시민권을 얻기 위해 알바니아에서 국경을 넘어 클루디와 위장 결혼한 로나는 자신의 약물중독을 끊고자 도움을 요청하는 클루디를 번번히 외면한다. 정작 사랑하는 연인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전화통화로서 애정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로나는 이혼과 재혼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다. 역시나 벨기에 시민권을 얻으려는 러시아 남자와의 혼인을 통해 거액을 지불 받을 예정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애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며 정착하리란 기대에 부풀어 있다.
모든 사건의 출발점은 개인의 욕망이다. 개인의 욕망은 때때로 어느 개인의 의지로 돌파구를 만들거나 그렇지 못하면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이 제도적 결함을 이용한 조직적 대응과 결합할 때 윤리는 심각하게 훼손된다. 알바니아에서 벗어나 벨기에에서 새로운 삶을 정착하려는 로나의 욕망은 위장결혼을 알선하는 전문조직에 의해 성사되고 또 다른 위장결혼을 준비하는 절차로 나아간다. 약물중독자인 클루디는 그 과정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그는 제거하기 쉬운 수단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욕망은 양심과 충돌하며 여기서 발생하는 죄의식은 윤리적 양심에 의해 죄의 발생을 억누른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이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닐 때, 타자와의 협의를 통한 공통분모의 잠재적 자산이 될 때, 개인의 양심은 공모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건조하고 서늘한 카메라는 인물에 대한 어떠한 감정을 발생시키지도, 주입하지도, 포착하지도 않는다. 온전히 감정이 결여된 관찰자의 시점에서 사건 속에 놓인 인물을 관찰할 뿐이다. 물론 대부분 로나를 향해있는 카메라는 희미하게 감지되는 그녀의 심리적 변화를 간접적으로 포착하며 극적인 변화를 가늘게 끌어당긴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최대한 인물의 심리에 관여할 가능성은 없다. 단지 객관적인 판단과 관찰의 합의를 통해 상황이 발생시키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분석하거나 판별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객관성의 눈높이가 <로나의 침묵>을 숭고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숨죽이듯 정적인 카메라의 고정적 시야를 통해 대상을 관찰하는 일차원적인 시선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인물의 심리를 관통한다. 마치 다큐적인 화법으로 인물에 대한 관찰을 도모하고 스크린과 객석의 너비를 인식시킬 만큼 감정과 거리를 둔 시선을 통해 적극적인 감정적 몰입을 배제한다.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환경의 테두리를 점차 확보해나간다. 인물에 대한 관찰을 도모하는 건조한 스크린은 관객의 시야를 그 인물들의 심리를 결정짓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도달하게끔 만드는 수단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로나의 침묵>은 그 절제된 화법을 통해 종종 서스펜스를 발생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느와르에 가까운 범죄적 소재를 차용한 결과값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와 함께 과장을 배제하고 현실적인 초점에 가까운 카메라의 시선과 연출이 영화의 현실감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음향 등의 효과를 배제한 채 무감정한 시선으로 사건의 과정을 응시하는 담담한 태도가 사건의 흐름 자체에 대한 예상이나 암시의 가능성을 가로막음으로써 연이어질 상황에 대한 충격을 무방비 상태로 체감하게 만든다.
<로나의 침묵>은 벨기에를 배경으로 두고 있으며 카메라의 이동이 지극히 제한적인, 분명 다르덴 형제의 인장을 찍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전작들이 현실성을 등에 업은 인간적 가치, 즉 용서라는 테마로 마주한 인간의 화해를 담았던 것과 달리 <로나의 침묵>은 종교적 신비에 다다르는 구원의 경지로 나아간다. 자신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던 클루디를 가엾게 여기다 끝내 애정으로 품게 된 로나가 결국 그의 못다한 삶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결말은 실로 비범하다. 비인간적인 욕망을 낙태시키고 인간적인 사랑과 윤리적인 신념을 새롭게 잉태하는 우아하고 매혹적인 감상적 깊이를 선사한다. 연약한 육체로 강인한 생명을 잉태하는 여인의 몸처럼 정적이고 차분한 응시 속에서 발견되는 강인한 의지는 역설적이라 더욱 강렬하다. 그 차가운 시선이 피어내는 의지가 놀랍도록 따스하고 아름답다.
밤이 되면 박물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다. 뼈대만 남은 공룡이건, 모형 사람이건, 크기나 재질에 관계없이 살아나거나 작동된다. 신묘한 힘을 지닌 이집트 아크라 석판의 힘 덕분이건 뭐건 간에 그렇다. 따지고 들수록 스스로에게 연민을 품어야 할 정도로 엉터리 같은 법칙이지만 그 세계가 만들어내는 소동극의 이미지는 분명 오락을 발생시킨다. 연대가 다르고, 종이 다르고, 생사가 다름에도 다들 그냥 어울려서 일으키는 소란이 장관이다. 엉터리처럼 구겨 넣은 레시피가 맛깔스런 잡탕으로 거듭난 형국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엉터리 같은 재료들을 긁어 모아 우려낸 국물이었지만 마시기 편하고 입맛에 너그러운 묘미가 있었다. 그야말로 킬링타임용 엔터테인먼트였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온전히 전작의 성공에 편승한 기획이다. 컨셉은 같다. 밤만 되면 오만 잡것들이 살아나는 박물관의 야간 소동극을 재현하는 것. 하지만 그건 딱히 장기적인 유효기간을 지닌 것이 아니다.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란 간단하다. 내려갈 깊이 따윈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드니 너비를 넓힐 것. <박물관이 살아있다 2>를 다른 제목으로 대체한다면 ‘박물관이 넓어졌다’즈음 된다. 넓어진 만큼 채워 넣을 것도 많아졌다. 그만큼 더욱 두서가 없어지고 난장판의 범위는 제어가 되지 않는 지경에 다다랐다. 엉터리 같은 기획상품이 다시 한번 더 많은 엉터리를 끌어 모아서 대박을 노린다.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특성을 아이디어로 승화시킨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어드벤처와 판타지의 장점을 두루 갖춘 효과적인 영화가 됐다. 박물관이라는 실내 공간은 적절하게 상황을 통제할만한 너비의 한계를 지님으로서 미니멀한 장르적 수용을 가능케 한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너비를 넓힌 속편이다. 넓어진 박물관은 플러스같지만 되레 마이너스다. 자신의 부실한 단점을 가리기 좋은 규모를 간과하고 오히려 곳곳에 한계를 명확하게 전시한다. 연대나 지표 따위와 무관하게 소통하는 캐릭터들은 더 이상 귀엽다기 보단 유치하다. 전작의 매력이 어디서 발생했는가를 심각하게 놓치고 있다. 최소한 전작은 그 열악함을 눈감아 줄 정도의 아량을 발생시킬 정도로 적당한 매력을 구사할 만한 아담한 규모 속에서 소동극을 연출했다. 하지만 속편은 자신의 밑천을 깡그리 부수고 새집을 짓더니 자신의 어리석음을 곳곳에 전시한다.
열악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캐릭터의 매력도 전혀 계승하지 못한다. 전작에서 매력을 발생시키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별 쓸모가 없다. 개체 수를 늘린 새로운 캐릭터들 역시 별반 흥미를 끌지 못한다. 래리(벤 스틸러)의 변화를 설명할만한 단서 따위를 기대할 요량도 없지만 그의 성찰을 도모하는 진지함 자체가 지독하게 작위적이라 감동 대신 조소가 발생한다. 그나마 에이미 아담스의 귀여운 매력이 유일한 숨통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전형적인 속편의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소한 볼거리와 위트를 구사하는 킬링타임 무비로서 미덕이 유일한 장기였던 전작의 성과가 계산된 결과가 아닌 우연한 취득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플러스 된 모든 것이 하나 같이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역시 머리가 커졌다고 똑똑해지는 건 아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메종 드 히미코> 등,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유명 각본가 와타나베 아야의 각본과 <내 청춘에게 고함>을 통해 장편 데뷔했던 김영남 감독의 조합으로 이뤄진 한일합작영화 <보트>는 좌충우돌 에피소드에 담긴 청춘의 연대를 그린다. 국경과 언어가 다른 양국의 청년은 정서적 거리감을 초월할만한 동병상련의 연민을 각자로부터 발견하며 연대의 발판을 마련한다.
혈기왕성한 청춘은 축복이라지만 가진 것 없어 비참한 시절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하는 형구(하정우)와 가족 부양의 의무를 떠안고 살아가는 토오루(츠마부키 사토시)는 현해탄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한 삶을 떠도는 청춘이다. <보트>는 머무를 곳 없이 처량하게 떠도는 청춘의 방황하는 감수성을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동극으로 버무리며 희망을 역설한다. 하지만 결국 청춘을 쓸쓸한 뒤안길로 내모는 현실의 기운을 포착하고 이내 비극으로 내던지는 느와르필름이다.
보트 위에서 나른하게 망중한의 낮잠을 자는 형구는 매번 현해탄을 건너 자신의 은인이자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보경 아저씨(이대연)에게 다양한 물품과 김치를 배달한다. 그렇게 매번 보물처럼 김치를 전달하던 형구는 바다에서 묘연한 기습을 당해 김치를 망가뜨리고 중간에서 형구와 보경 아저씨를 중계하던 토오루로 인해 자신이 옮기던 김치의 실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후, 형구는 결박된 채 정신을 잃은 묘령의 여인 지수(차수연)를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결국 후에 정신을 차린 그녀의 도주로 인해 형구와 토오루는 예상치 못한 기회이자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형구는 유년 시절 자신을 버리고 남동생과 함께 사라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 기억엔 의문이 섞여있다. 왜 자신은 버리고 남동생을 택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어머니에 대한 부정과 향수라는 배반적 감정과 함께 뒤엉켜 나아간다. 자식을 버린 혈육에 대한 희미한 애증이 식물적인 삶 사이로 무심히 새어나간다. 반대로 토오루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에 짓눌려 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미혼모로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여동생, 그리고 어린 조카들까지, 자신의 현실을 비관으로 덧칠하는 가족이란 존재에 대한 회한을 무표정에 감춘 채 뒤로 조소하며 살아간다. 상반된 상황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두 청년은 지수의 돌발적인 제안을 통해 연대를 이룬다.
<보트>는 엉뚱한 사건의 연속적인 에피소드를 밟아나가며 예측불가의 방식으로 전진하는 이야기다. 참신하고 신선한 발상이 때때로 돋보이며 그 사이에서 튕겨져 나오는 유머도 제법 쏠쏠하다. 특히 하정우의 연기는 새삼 대단하다. 특유의 넉살과 야생적 기질의 혈기가 어우러진 하정우의 표정과 대사는 <보트>의 생동감을 발생시키는 원천과 같다. 또한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 눈에 띄는 츠마부키 사토시의 어울림도 나쁘지 않다. 두 배우는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견제하듯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적절하게 뒤엉키고 구르며 효과적인 시너지를 이룬다. 동일한 목표를 합의한 관계가 진심 어린 우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소통이 불가한 캐릭터의 부조화를 극복할만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다만 두 남자와 함께 부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지수의 캐릭터는 때때로 감정 과잉의 상태를 자제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남기며 특별한 매력을 남기지 못하는 느낌이다.
느와르적인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영화적 과정은 때때로 배반적이다. <보트>는 일본청춘드라마의 골자에 장르적 유머와 구성을 결합시킨 형태의 영화다.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심심찮게 발생하는 엇박자 상황의 유머로서 동력을 끌어올린다. 두 캐릭터의 연대는 중심맥락을 차지하며 인물에 대한 흥미를 돋운다. <보트>는 사실 캐릭터영화라 해도 좋을 만큼 인물이 가장 눈에 들어오는 영화다. 다만 구조적으로 평등하게 설계된 듯한 캐릭터가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과정은 종종 편애적이다. 동시에 느와르적인 결말은 영화가 지속시키던 정서와 무관하게 단독적인 느낌을 준다. 스토리의 흐름으로서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온도차가 발생한다. 관객의 입장에선 강한 허무를 인식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청춘의 표류 가운데 허구적 희망을 감지했던 이라면 활기 가득한 무용담 너머로 내려앉은 절망적인 결말 앞에 당황할 가능성이 녹록하다. 물론 포스터나 전단지를 통해 해양액션영화 따위를 기대하고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지독한 저주를 퍼부으며 상영관을 박차고 나갈 확률이 더 크겠지만.
경쾌한 멜로디가 선명한 음악과 절묘하게 연동되는 김혜자의 춤사위를 담은 오프닝 시퀀스는 단연 압도적이다. 절망과 안도가 체증처럼 내려앉은 얼굴에선 공유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의 극단적 너비가 고스란히 발견된다. 휘청거리듯 흐느적거리다 살풀이하듯 리듬을 타며 몸을 들썩이는 팔은 축 져진 듯 늘어지면서도 강약을 맞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과 심정을 유추할 수 없게 중의적인 동작으로 절묘하게 음악과 어울리며 몸을 흔드는 김혜자의 모습은 당혹스럽지만 고요하다. 마치 작은 파문이 일어나기 전의 잔잔한 수면처럼 쨍하고 깨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이 위태롭게 감정을 동요시킨다. 강렬하면서도 모호한 오프닝 시퀀스는 정서적인 진동을 도모함으로써 뒤따를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긴장과 평온의 중의적 상태 가운데서 몰입을 도모한다.
살인마로 몰린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어머니를 비추는 이야기. 누구라도 분명 모정이 끓어 넘치는 신파를 예감하기 좋은 문장이다. 하지만 애초에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 신에서조차 괴담을 통해 교묘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켰던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경험한 이라면 절절한 신파로 무장한 작품을 기대할 리 만무하다. 모두가 살인마라고 낙인을 찍은 아들 도준(원빈)에 대해 어머니 혜자(김혜자)는 말한다. “우리 애가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어미에게 모성은 숙명이다. 이성적 믿음을 판별하는 의식을 거치기 이전에 직관적인 보호본능이 둘러쳐진다. 어미의 본능이란 이성을 통해 가늠하기 어려운 본능의 영역이다. 동물적으로 유전된 습성이다. 숭고한 사명이기 이전에 무거운 십자가다. 그리고 <마더>는 살인사건의 진실과 진범을 추적하는 스릴러이기 전에 어미의 심정을 따라잡는 심리극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여잡고 울기 보단 타이르고, 진범을 뒤쫓거나, 집요하게 캐묻는다. 아들의 결백을 향해 전진해나간다. 누구도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모든 수순을 동원한다. 조금 모자라지만 순박한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모습엔 헌신적인 페이소스보다 광기에 가까운 컴플렉스가 서려있다. 모성이란 본능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마더>는 서사적으로 나아가나 서정적이며 심리적 밑바닥까지 헤집는 표정으로 감정의 옆모습까지 그려낸다. 암전된 공간과 배경에서 밀려난 여백은 때때로 서스펜스의 은신처가 되며 배우들은 수집된 감정의 개체 수를 가늠할 수 없게 너른 표정을 드러낸다. 특히 김혜자는 <마더>가 김혜자의 얼굴에서 시작됐다는 봉준호 감독의 고백을 온전히 증명한다. 순수한 광기는 맹신으로 나아가 착란에 도달하고 이내 잔인한 절망의 수순으로 돌입한다. 그 모든 과정의 합리가 김혜자의 얼굴을 통해 이뤄진다. 김혜자의 얼굴은 <마더>를 위해 마련된 최적의 자질이자 유일무이한 시작이고 끝이다.
수없이 흩어진 별개의 지점처럼 인식되는 스토리가 결국 단계적인 복선으로서 재차 의미를 발생시키며 하나의 맥락을 구성하고 이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물론 발화점의 온도를 붙이기까지의 시간이 길게 요구된다는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온도가 상승한 이후로 이야기는 급격하게 가속을 시작하고 이내 극한까지 내달린다. 전혀 무관할 것 같은 개별적인 지점의 사건들을 하나의 맥락에 놓인 복선으로 꿰어가는 이야기 구조가 탁월하다. 동시에 <마더>는 사실 후더닛(whodunit) 구조의 스릴러에 가까운 형태로 직조된 이야기지만 실질적으론 ‘누구’보단 ‘무엇’에 의문의 무게가 실리는 영화다. 어머니는 진범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따라 걷지만 관객은 끊임없이 아들이 무엇을 보았는가를 주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예상과 동떨어진 모자의 전사가 드러나기도 하고,-박카스- 그 관계에 대한 불순한 관점이 동원될만한 중의적 언어가 동원되기도 한다.-잔다- 궁극적으로 (스토리텔러의) 비범한 결단에 가까운 결말의 태도를 확정 짓게 만드는 계기 역시 그 목격에서 비롯된다. 지독한 어미의 본능이 궁극적으로 어떤 자기 파괴의 행위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과정을 이끄는 믿음의 기반이 어떤 진실에 맞닿았고 이를 통해 어머니가 무엇을 결심했는가를 지켜보게 된다는 의미와 같다. 그 결심은 객석에 충격을 전하지만 관객이 비명 지르기 보단 숨을 멎게 만든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 이례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영화다. 로케이션 비중을 극대화시킨 <마더>의 광활한 풍경은 풍요롭기에 더욱 예민하다. 때때로 혜자의 걸음을 수평선의 구도로 원경으로 찍어낸 광경은 애환적이며 인물을 측면에 밀어 넣은 채 온전히 배경을 삼킨 카메라의 구도는 거대한 배경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소외를 전달한다. 그럼에도 이에 곧잘 상반되게 인물의 얼굴을 스크린에 가득 메워 넣곤 하는 클로즈업은 인물의 역동적인 표정을 포착함으로써 보다 깊고 너른 감정의 영역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특히 인물과의 거리감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구도적 변화는 개별적인 영역에서 좀 더 세심한 관찰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객의 극적인 몰입을 가중시킨다. 처음으로 2.35:1 와이드 비율의 화면 비를 선사하는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했다는 <마더>는 그만큼 풍요롭고 섬세한 풍경을 포착함으로써 그 안에 자리한 인물의 예민한 심리를 더욱 모나게 드러낸다. 특히 대비적인 움직임으로 시작과 끝을 알리는 도입부와 결말부는 <마더>의 입구와 출구로서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음악의 기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오프닝 신을 비롯해 음악과 시퀀스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기시감을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답습이라 지적될만한 결과라기 보단 참신한 복기에 가깝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작품은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사건이 얼마만이냐.”라는 대사처럼 한적한 도회지의 형사들은 <살인의 추억>만큼이나 뻔뻔하진 않아도 여전히 직감에 의존해 사건을 마무리 짓는데 급급하며 졸속적인 수사방식으로 무능을 전시한다. 동네 바보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강압적 회유는 되풀이되고 용의자의 바지를 벗기는 지하실은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범인의 현장검증은 여전히 난장판이다. 그 모든 상황의 총합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반대말의 의미로 해석될만한 상황이다. <살인의 추억>의 경찰이 암묵적 합의를 통해 무능을 가리려는 시도를 보인다면 <마더>의 경찰들은 무지의 소산으로 밀어붙인 불확실성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무능력을 또 한차례 노출한다. 결국 그 반대말의 끝은 <살인의 추억> 못지 않게 무게가 엇비슷한 정서적 허탈감으로 도달한다는 점에서 동일해진다.
<마더>가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체적인 정황을 지니고 있다면 인물이 공간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심리적 중압감은 간접적으로 <괴물>에 맞닿아있다. 현서를 찾아 괴물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가족과 진범을 찾기 위해 의심스러운 단서의 현장을 몰래 탐색하는 어머니는 각자 자신의 혈육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가족이 어머니 개인으로 축소됐다는 점에서 입체적인 동선이 단선적으로 뚜렷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잠입한 어머니의 은폐가 어떤 목격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괴물의 본거지인 하수구에 끌려온 현서가 괴물을 피해 하수구 구멍에 은둔하며 괴물을 관찰하는 상황과 비슷한 긴장감을 이룬다. 또한 어두운 음영을 통해 도진이 바라본 것을 관객으로부터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 단서의 은폐를 확보함으로써 의문의 지속을 유지하고 사각지대의 음산한 서스펜스를 확보한다는 점에서도 출몰의 위협을 물리적으로 구사하던 <괴물>의 기시감을 느끼게 만든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란 점에서 동일하다. 잃어버린 애완견을 찾고,(<플란다스의 개>) 살인마를 수사하고,(<살인의 추억>)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괴물>) 진범을 추적한다.(<마더>)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애완견과 보지 못한 살인마, 그리고 구할 수 없었던 딸을 맞이했던 것과 달리 <마더>는 유일하게 자신이 쫓는 상대를 목격하게 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 동네에서 혈혈단신으로 진범을 찾아 나서는 어머니의 본능적 결의는 결국 결실을 이룬다. 어미의 본능만이 유일하게 제 목적을 이룬다. 뒤늦게 자신이 짊어진 어미라는 십자가가 자신을 골고타 언덕으로 이끌어 채찍질하고 못박히게 만들었음을 뒤늦게 체감한다 해도 만신창이가 된 제 심정을 억누르고 제 새끼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이 본디 그 어미의 본능에 걸맞은 숙명이라는 것을 육체적 행위로 증명한다. 동시에 사건의 주변부에 놓인 이미지를 통해 시대와 정치적 풍자를 거두던 야심도 <마더>에선 최대한 배제됐다. 무능한 경찰의 이미지는 <살인의 추억>처럼 시대적 열악함과 정치적 불공정을 겨냥하는 수단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위트의 수단이 되고 사건의 전개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될 뿐이다. 지난 세 편의 전작이 동맥과 정맥 주변부의 모세혈관의 흐름까지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면 <마더>는 오로지 정맥과 동맥의 흐름을 그린 이야기다. 정맥의 판막을 거쳐 멈춰서면서도 서서히 전진하던 이야기가 비로소 심장을 거쳐 동맥으로 뻗어나가듯 가속적이다.
창문은 <마더>에서 종종 관객과 인물의 거리감을 형성하는 중계 창처럼 활용된다. 관객은 그 창을 통해 영화적 상황으로부터 때때로 분리되어 그 상황의 목격자로서 자리잡아야 한다. 창 너머엔 함께 식사하는 모자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사건을 비추는 저편의 진실이 걸어나가는 풍경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두 광경은 모두가 진실이다. 백숙을 찢어 아들에게 먹이려는 어머니의 모습도, 창을 따라 걷는 살인자의 얼굴도 거짓이 아니다. 관객은 두 번의 식사광경을 양 끝에 두고 그 가운데 살인의 목격자가 된다. 양 끝의 이미지는 동일하다. 구도까지 일치한다. 하지만 그 풍경은 대비적이다. 더 이상 온전히 같은 풍경으로서 인식되지 않는 생소한 광경이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창 너머의 모자는 같은 방식으로 삶을 연장해나간다. 모든 것을 감당한 어머니는 구태의연하게 아들을 위해 어미로서의 본능으로 제 부서진 삶을 가다듬고 일상을 반복한다. 아들을 위해 흐르는 오줌을 지우는 것도, 피를 닦아내는 것도 그 어미의 몫이다.
여기서 모성애는 숭고하다거나 찬사를 얻을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평생을 짊어져야 할 어미의 업(業)처럼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형(刑)과도 같다. 어미는 결국 괴물이 되어 제 자식을 구하고, 평생 살인의 추억을 한처럼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한다. ‘새끼 잃은 어미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을 한다.’하지만 정작 어미는 제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 그저 제 새끼의 체취를 따라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감히 그 삶이 어떠하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건 우리가 모두 다 제 어미의 삶을 밟고 살아온 그 새끼들이기 때문이다. <마더>는 모성애라는 숭고함을 벗겨낸 어미들의 상처와 같은 삶에 바치는 지독하게 순수한 헌사다. 무엇보다도 국민엄마라는 박제 같은 타이틀로 치장된 이미지를 부수고 김혜자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지닌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환기시킨다는 것만으로도 <마더>는 이미 훌륭한 성과로 시작된 작품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