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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우리가 지배한다(We own the night).’ 명암이 뚜렷한 도시의 뒷골목에서 발생하는 알력을 지배하는 자와 이를 제압하려는 자들이 지향할만한 중후한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제목으로 내건 <더 나잇>은 그 먹이사슬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그 사이에 끼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자의 운명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더 나잇>의 관심사에 가깝다.

미국의 뒷골목을 지배하던 갱과 이들을 소탕하려는-혹은 그들을 장악하려는- 경찰들의 관계의 간극에서 비롯된 사연은 미국범죄영화들의 오랜 소재기반으로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범인을 검거하는 경찰들, 하얀 마약가루와 바늘 달린 주사기들. 무덤덤한 회상처럼 사건기록사진처럼 보이는 흑백의 스틸컷이 차례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도입부는 <위 오운 더 나잇>(이하, <더 나잇>)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공표하는 것과 같다. <더 나잇>은 1980년대 뉴욕에서 상반되는 지점에 선 형제의 관계 변화를 통해 시대적 공간에 담긴 세태의 모습을 묵직하고도 담담한 시선으로 스크린에 담아낸다.

디스코 음악과 현란한 조명 아래 음주가무에 들뜬 인파들, 매일같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뉴욕의 유명클럽에서 매니저를 맡고 있는 바비 그린(호아킨 피닉스)은 도시의 밤이 잉태한 향락을 기반으로 엔조이한 삶을 계획한다. 하지만 그의 부푼 꿈은 뉴욕 경찰서장인 아버지(로버트 듀발)와, 역시 촉망 받는 경찰인 형 조셉(마크 윌버그)이 주도하는 마약수사로 인해 혼선을 빚고 그로 인해 형제는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뒤늦게 안 바비 그린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숙명을 깨닫고 그로 인해 그는 예측범위를 벗어난 삶의 진로에 놓이게 된다. 나이트 클럽의 매니저로서 자신의 사업만을 골똘히 구상하던 바비 그린이 경찰 배지를 달기까지의 과정을 진지하게 보여주는 <더 나잇>은 어떤 의문을 품게 한다. 소시민적 행복을 추구하던 거리의 탕아는 왜 제도적 질서에 편입돼야 했을까? ‘네가 조만간 우리 편에 서지 않는다면 마약꾼 편에 서게 된다’는 아버지의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비 그린이 경찰이 되기로 결심한 건 그가 질서유지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기 보단 가문을 수성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희생은 바비 그린을 각성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한번의 선택으로 인해 삶의 수평이 흔들린 바비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한 방향으로 기울일만한 선택을 다짐하는 건 적을 완벽하게 제거함으로써 가문을 수성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애초에 자신의 계획과 가장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 바비는 자신이 양부처럼 모셨던 클럽의 회장과 반대편에 서게 된다. 결국 그는 가족을 위해 꿈을 상납하고 기꺼이 국가 질서의 수하로서 국경 밖에서 유입된 악의 세력을 처단한다. 선택을 종용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갈등하고 변화를 고민하는 바비 그린을 묵묵히 묘사하는 <더 나잇>은 국경의 외부에서 유입되는 위험에 노출된 미국인이 제도로서 자신을 재무장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다양한 인종의 유입으로 이뤄진 미합중국의 힘은 때로 무분별하게 유입된 외부의 불순분자들로 인해 거리의 질서를 훼손당하고, 결국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동원된 공권력은 종종 되려 그들의 역습으로 명예를 훼손당한다. 동시에 뉴욕의 밤거리에서 거래되는 마약은 미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한 외부 유입물이다. <더 나잇>에서 바비 그린의 경찰되기는 결국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한 미국인의 결속과도 같다. 그 과정에서 거리의 질서는 회복되고 가족의 평안은 유지되지만 결국 개인의 주체적 삶은 제도적 강건함을 위해 소모된다. 경찰제복을 입고 형과 나란히 단상 위에 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바비 그린의 모습은 거듭난 미국인의 초상과 같다.

<더 나잇>은 다양성을 통해 존립의 기반을 마련한 미국사회가 스스로 야기시킨 자기모순의 희생자는 누구인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미국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과 싸워왔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적을 단결시킨다.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과 맞서며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각성해왔다. 그것이 아메리카 드림의 양면성이자 그라운드 제로를 품은 미국적 현실이다. <더 나잇>은 중후한 80년대 범죄드라마의 형식을 통해 과거를 되짚고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세련된 자성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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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으로 포화 속에 갇힌 동심을 위로하기 위해 C.S.루이스는 아이들에게 판타지의 대륙을 선사하고자 했다. 전쟁을 피해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간 네 아이들이 옷장을 넘어 나니아 대륙이란 신세계로 들어서게 된 건 그런 연유에서다. 그리고 C.S 루이스의 ‘나니아연대기’가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시리즈를 상기시키지만 본심은 <판의 미로>에 보다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이 점에 있다.

‘나니아 연대기’가 성인들에게 유치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건, 그것이 애초에 아동들을 위해 집필된 동화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는데 큰 영향을 얻었다는 J.R.R. 톨킨의 고백처럼 ‘나니아 연대기’는 ‘중간계’를 잉태한 판타지의 원전으로서 명백한 가치를 지닌다. 대자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종적 구성원(<반지의 제왕>)들로 이뤄진 현실 이면의 판타지적 세계관(<해리포터>)은 <나니아 연대기>가 판타지라는 대륙을 안착시킨 원형임을 입증하는 것과 같다. <나니아 연대기: 사자, 옷장, 그리고 마녀>에 이어 제작된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이하, <캐스피언 왕자>)는 4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의 두 번째 시리즈이자 7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된 원작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분기점이기도 하다.

전작에 이어 모험을 주도하는 아이들, 피터(윌리엄 모슬리), 수잔(안나 포플웰), 에드먼드(스캔더 킨즈), 루시(조지 헨리)가 전작과의 서사적 간격을 증명하듯 과거에 비해 훌쩍 자란 모습으로 등장하는 <캐스피언 왕자>는 확실히 유아적 취향에 머물렀던 전작에 비해 성인을 고려했다고 할만한 것으로 성숙했다. 이는 동물의 왕국을 방불케 하는 전작의 전투씬에 비해 <캐스피언 왕자>의 전투씬이 체계가 잡힌 인위적 전투의 양상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캐스피언 왕자>가 성장기에 접어든 캐릭터의 고뇌와 숙명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니아 왕국의 수장이 된 피터와 대대로 이어온 왕위를 복원해야 하는 캐스피언 왕자는 각각 강박에 시달리듯 자신의 숙명 앞에 고뇌한다.

피터가 성장통을 겪는 사이, 그들 중 가장 어린 루시는 아슬란을 봤다고 유일하게 말한다. 성인이라 부를만한 연령에서 가장 동떨어진 루시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다. 이는 아동의 순수한 믿음이야말로 성스러운 것에 가깝다고 믿는 C.S.루이스의 신념을 대변하는 것과 같다. 의무감에 빠진 피터가 무리수가 예상되는 작전을 강행하다 실패를 맛보고, 모사의 간계에 이끌린 캐스피언 왕자가 마녀의 부활에 이용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 것과 달리 구원의 가능성을 본다. 이는 C.S.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집필하던 폭력의 시대에서 아동들에게 주고자 했던 구원의 메시지이자 성인들을 향한 일말의 훈계였을 것이다. 동화를 원형으로 했지만 ‘나니아 연대기’는 분명 성인의 발상으로 이뤄진 함축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캐스피언 왕자>는 전작이 지니지 못했던-실상 원작으로 인해 지닐 수 없었던- 비범함을 가미하며 단순한 구조의 권선징악 스토리를 원전의 위엄에 한발자국 접근시켰다. 아이들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시리즈도 성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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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60주년 기념작.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하, <영화관>)의 목표는 이처럼 자명하다. 거장이라 명명된 35명의 감독들이 모인 것도, 그들이 3분으로 국한된 러닝타임의 과제를 받아들인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영화관>은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준 영화 그 자체에게 바치는 오마주이자 자신의 일상을 무덤덤하게 발췌하는 수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영화를 존재케 하는 관객을 위한 헌사에 가깝다.

제목에서 발견되는 ‘그들’이란 단어의 의미는 영화를 만든 거장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화를 보는 관객이다. 원제의 ‘그들’이 ‘their’가 아닌, 성별이 불분명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his’로 표기된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왜냐면 ‘그들’이 감독 자신이라면 제인 캠피온과 같은 여류 감독이 포함된 자신들을 결코 ‘his’로 묶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와 같이, <영화관>은 말 그대로 영화를 보는 우리들, 즉 관객을 바라보는 감독들의 자발적인 주객전도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3분이라는 폐쇄적인 러닝타임을 통해 무려 32작품을 나열하는 <영화관>은 각각의 작품을 매만진 주인들의 이름만큼이나 매혹적인 것들로 채워졌다. 32구간의 여정은 프랑스 다큐멘터리의 거장 레이몽 드파르동의 <야외 상영관>에서 출발해 켄 로치의 <해피 엔딩>에서 멈춘다. 3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보여지는 제 각각의 사연들은 무덤덤하게 현실을 응시하거나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상황으로 연출되며, 우연처럼 보이는 상황극을 그려내거나 감각적인 영상을 통해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일맥상통한 건 하나같이 스크린이 걸린 영화관-실내가 됐든, 실외가 됐든, 절대명사적 공간 의미가 아닌 영화를 트는 장소로서 명명되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장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한 이들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각기 다르며 그들이 모두 다 하나같이 영화에 매혹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것도 아니다. 단적으로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가 상영되는 극장의 텅 비었다시피 한 상영관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영화에 몰입한 늙은 매표원과 그 뒤에서 격정적인 애무를 즐기는 연인이 등장하는 안드레이 콘잘로브스키의 <어둠 속의 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화는 애무를 즐기는 연인을 조롱하지도 혹은 늙은 매표원의 진지한 관람 행위를 미화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본다. 그들의 상영관은 각자에게 개별적인 의미가 있을 뿐, 그 자체로서 규정된 가치로 이해되지 않는 공간이다. 감상의 다양성과 영화에 접근하는 태도의 차이는 상영관에 다양한 풍경을 연출한다.

<상영관>은 3분이란 데드라인으로 나열되는 다양한 진풍경을 나열한다. 거장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감독들은 각자의 양식으로 자신만의 상상을 스크린에 담아낸다. 그 안에는 심오한 의미적 해석도, 혹은 가치 부여에 대한 동기 유발도 하나같이 무의미하게 만드는 순수한 영화가 있을 뿐이다. 영화를 기다리는 시골 아이들의 눈동자도,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흘리는 감동의 눈물은 영화를 위대하게 만드는 가치이자 영화를 존재케 하는 이유다. <상영관>은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혹은 영화란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에 대해서 한번쯤 되묻고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란 지나친 예술적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자본의 수단으로 몰락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우리는 이를 통해 한번쯤 재고할 필요가 한다. 지나치게 경도된 취향을 계급주의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포식자의 식성처럼 유희적 탐욕을 남발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모두 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을 찾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꿈을 꾼다. 어떤 이는 팝콘을 씹어대며 낄낄거리고, 어떤 이는 눈가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려 보낸다. 어떤 이는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 이는 결벽하게 오로지 스크린만을 응시한다. 각자의 취향대로, 혹은 관람의 목적대로, 그들은 상영관을 찾음으로써 영화를 존재하게 만든다. 거장들이 그들에게 바치는 경배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화를 사랑하듯 자신들의 영화를 사랑해주는 관객들에게 진심 어린 헌사를 보내고 있다. <상영관>은 바로 관객이라는 지지자를 위한 영화의 애정 어린 편지와도 같으며 관객화된 영화의 객석관람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것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들은 왜 굳이 큰 걸 하려는 걸까.’ 영화가 인용하는 짐 해리슨(Jim Harrison)의 말은 32편의 짧은 영화들의 태도를 함축한다.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때로 영화를 통해 꿈을 꾼다. 그건 우리가 어리석은 인간이라서 만은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현실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기에, 그 현실을 완전하게 이루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다. 영화가 존재하는 건 우리가 꿈을 꾸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꿈을 꾸는 한, 극장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며 언제나처럼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꿈을 확인하고 되새길 것이다. 그건 평범한 거장이나, 위대한 관객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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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를 위협하는 리얼리티와 풍만한 색채가 보편화된 동시대 애니메이션들을 떠올린다면 이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극의 대부분이 흑백 컬러로 채색되고 앙상한 선이 그대로 드러난 드로잉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띄운 셀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가 말이다. 하지만 2000년에 출간된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인 유명 그래픽 노블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페르세폴리스>는 상상력의 유희와 드라마틱한 구성, 그리고 의미심장한 시대적 단상을 통해 기술이 충만할 수 없는 감수성의 깊이를 보여준다.

독재정권인 팔레비 왕조의 오랜 탄압에 반발한 이란 국민들의 대대적인 항거는 무력진압을 맞이하고 이는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페르세폴리스>는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혁명이 발발한 1970년대 이란에서 시작된다. 마르잔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로운 집안에서 자라 활발한 아이다. 이소룡을 좋아하는 소녀는 혁명의 기운이 증폭되는 테헤란에서 지인들과 자유를 논하는 부모님들의 성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스스럼없이 혁명을 외친다. 결국 혁명은 이뤄지고 독재왕권은 몰락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세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마호메니 정권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토대로 한 새로운 정권의 기치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이로 인해 국민들은 혁명 이전의 정권보다도 더욱 극심한 탄압에 시달린다.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던 여성들에게 챠도르를 씌우며 극심한 보수로 들어서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마르잔은 펑크락을 듣고, 강압에 저항한다.

혁명과 독재, 그리고 전쟁까지, 강압의 알레고리들이 넘실대는 굴곡이 심한 시대적 상황을 견디기에 마르잔은 너무나도 자유분방하다. 결국 마르잔의 부모는 딸의 왕성한 혈기가 지독하게 폐쇄적인 이란의 현실을 인내하기엔 역부족임을 깨닫고 마르잔을 프랑스로 유학 보내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타국에서 삶을 꾸려야 하는 소녀는 끝없이 방황하다 결국 피폐해지고 나서야 다시 이란의 부모곁으로 돌아온다. 물론 여전히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강압적 폐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란의 정치적 현실을 단순하지만 명쾌한 이미지로 그려낸 <페르세폴리스>는 간단히 말하자면 마르잔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녀가 격변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육체라는 점이 간과될 수 없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쾌하고 활기차게 세상을 바라보던 소녀가 자조적이고 망연자실한 눈빛의 여인으로 자라나기까지, 그 순탄치 않은 삶이 이란의 격동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했던 민중의 외침이 또 다른 견고한 형태의 억압을 이루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는 소녀의 성장기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개인의 정체성에 의문을 부여한다. 국가적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듯 파리로 출국한 마르잔이 그곳에서 느끼는 생경함은 결국 자기 정체성의 자각기회를 박탈당한 인간의 고독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체제적 오류는 끝내 수정되지 않으며 결국 그 안에서 개인은 고통을 인내해야 할 따름이다. 마르잔은 오류적 믿음을 강압하는 폭력적 체제 속에서 방황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문득 깨닫는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심플한 영상은 때론 재기발랄한 웃음을 유도하며 때때로 뭉크의 ‘절규’와 같은 표정으로 경악을 표출한다. 단순하지만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캐릭터들의 명확한 표정만큼이나 뚜렷한 가치관을 지닌 <페르세폴리스>는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를 통해 올곧은 정치적 자의식을 강건하고도 유연하게 전달한다. 대부분 흑백컬러의 영상으로 이뤄진 <페르세폴리스>는 (8만장의 드로잉 작업 덕분인지 몰라도) 아날로그적인 호감을 부여하며 때론 기록처럼 읽히는 이미지에 설득력을 더한다. 긴 고난의 여정 속에서 어느 새 성숙해버린 마르잔은 다시 한번 파리에 홀로 서지만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은 이성을 잃게 하고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는 할머니의 충고처럼 마르잔은 ‘항상 정직하게 살라’는 의미를 드디어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이란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소망한다. 그렇게 소녀는 거대한 비겁한 체제의 폭력에 대항하는 건강한 방식을 터득하며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그리고 우리는 소망(해야) 한다. 그녀에게 금지된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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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정연하게 정사각형의 대오를 갖춘 원색들로 알록달록하게 채워진 스크린이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돈다. 서로의 경계로 스며들 듯 가늘게 늘어지면서도 제 영역을 교묘히 유지하는 원색들의 회전. 정의할 수 없는 황홀경은 제 이름을 지닌 원색들로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스피드 레이서>는 그 황홀경을 선사하는 도입부처럼 실체가 존재하나 실로 환상에 가까운 것이다. 만화의 색상으로 구현한 실사의 세계, <스피드 레이서>는 새로운 물감을 통한 모사가 아닌 새로운 터치로 창조해낸 유례없는 가상이다.

1967년에 제작된 TV애니메이션 <마하 고고고>는 자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뒤, 미국에서도 <스피드 레이서>란 제목으로 방영되어 센세이션에 가까운 반향을 불렀다.-국내에선 <달려라 번개호>라는 제목으로 방영됨.- (어린 시절 이에 열광했다는) 워쇼스키 형제를 통해 스크린에 재현된 <스피드 레이서>는 영화화된 원작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답습했지만 그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완성했다. <스피드 레이서>는 만화에서나 가능할법한 비현실적 세계관을 영화로 재현한다. 롤러코스터의 노선처럼 아찔하게 높고 가파른 레이싱 트랙 위를 고속 주행하는 레이싱카의 드리프트는 차마 현실적이라 할 수 없는 비정상의 속도를 체감하게 만들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쾌감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카(car)와 쿵푸를 조합해 만들었다는 ‘카-푸(car-fu)’라는 생소한 용어로 명명된 레이싱카의 움직임은 <스피드 레이서>가 선보이는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다. 마치 운전자의 수족처럼 활용되는 자동차 바퀴의 쓰임새와 재주넘기하듯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차체의 날렵한 움직임은 동물적인 반사신경을 느끼게 한다. 육중한 무게감을 발생시키는 차체의 충돌, 스피디한 질주 속에서 뒤엉켜 회전하는 차량간의 맞물림, 그에 때론 공중으로 붕 떠올라 ‘플라잉 킥’처럼 상대차를 가격하는 움직임은 실로 흥미롭다. ‘이건 그냥 쇠 덩어리가 아니’라는 대사는 <스피드 레이서>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본보기와 같다. 순진무구한 유아적 믿음을 정의로 승화시키는 만화적 가치관을 <스피드 레이서>는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 솔직함은 유치할 만큼 단순한 것이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이를 명쾌하고 정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유채색이 만연한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는 무채색으로 그늘진 <매트릭스>와 이미지를 그려내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인간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스템의 함정은 존재한다. 시스템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개인의 운명은 <매트릭스>에 이어, (워쇼스키 형제가 제작한) <브이 포 벤데타>에 이어, <스피드 레이서>로 계승된다. 다만 두꺼운 서적과도 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일관했던 전자들에 비해 <스피드 레이서>는 막대사탕처럼 달고 가볍다. 팝 아트(pop art)의 색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원색적인 나열이 이루는 <스피드 레이서>의 이미지들은 자극적이라기보단 신선하다. 스피드 레이서(에밀 허쉬)라는 직설적인 이름은 더더욱 그렇다. 가치관의 윤리를 이름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들이 <스피드 레이서>에는 유치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존재한다. 직설적인 상징들이 자기 존재를 스스로 명명하는 원색의 세계에서 선악의 대비는 더욱 분명하고 간결한 신념은 한층 명확해진다.

기계문명에 의해 능동적 삶을 말살 당한 인간들이 환각과도 같은 가상체험의 주입 속에서 사육되거나(<매트릭스>), 일원화된 권력 구조의 수호를 위해 개인의 자각을 철저하게 거세하는 전체주의적 강압의 공포에 굴복해야 하는(<브이 포 벤데타>) 현실들에 비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 주체로서 개인이 보존된 온전한 현실이란 점에서 <스피드 레이서>는 전자들에 비해 한층 여유롭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거대한 구조적 억압은 소수자아의 정당성을 착취하고 짓누른다. 재능과 노력을 통해 승리가 부여되는 경쟁윤리는 자본의 음모로 훼손되고 정당성으로 위장된 굴절된 가치관의 편법이 사회를 조종한다. 질서를 유린하는 시스템의 은밀한 거래 속에서 개인은 선택을 강요 받는다. 그곳에서 재능의 가치란 탐욕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에 불과하다.

레이서 모터스는 가내수공업으로 모든 것이 수급되는 가족기업이다. ‘레이싱은 우리 가족에게 종교와도 같은 것’이란 스피드의 말처럼 그들에게 레이싱은 삶에 있어 가장 숭고한 가치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레이싱에서 중요한 건 선수와 경기가 아니라 돈과 권력’이라고 말하는 로열튼 기업의 대표 아놀드 로열튼(로저 앨럼)에게 레이싱은 그저 돈벌이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를 지배하는 건 스피드가 아닌 로열튼이다. 그는 자본력으로 매수한 권력을 통해 레이싱의 배후를 조종하고 이윤을 창출하며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다진다. 그에게 뛰어난 실력만으로 우승을 거머쥐는 스피드는 위협적 상대이자 포섭의 대상이다. 매트릭스(matrix)의 환각 속에서 진짜가 아닌 안위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그를 벗어나 고난을 견디고 진짜 삶을 되찾을 것인가. 스피드는 네오와 마찬가지로 빨간 약과 파란 약의 갈래에 선다.

정신과 육체의 대비. 형형색색한 원색들이 형광빛을 내는 <스피드 레이서>의 트랙은 환상과 실재의 영역 구분이 없을 뿐, 그 현실은 또 다른 매트릭스로 작동한다. 결승지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본질적 목표를 잊은 채, 오로지 그를 저지하기 위해 트랙 위에 올라선 수많은 상대에게 둘러싸인 스피드는 그 트랙 위에서 홀로 유일하게 결승선을 바라보고 달린다. 그는 네오처럼 홀로 유일하게 숙명을 짊어졌다. 거대한 기업의 담합은 레이싱을 허상으로 조작한다. 그에 열광하는 관객들도, 그 트랙 위를 달리는 선수들도 하나같이 거짓을 향유하고 영위할 뿐이다. 스피드는 그 안에서 진실을 본다. 매트릭스의 태연한 삶이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정당한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트랙 위에서의 승리가 결코 누릴만한 호사가 아님을 안다. 단순히 결승트로피의 명예를 탐욕하는 것이 레이싱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스피드는 그 트랙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며 이는 끝내 기술의 영역을 뛰어넘은 예술적 경지로 거듭난다.

<스피드 레이서>는 기술적 향연의 범주에 속하는 블록버스터의 체험을 넘어서 예술적 성취를 드러낸다. 자본력의 동원을 통한 CG기술의 진화는 영화의 구현을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오늘날의 영화들은 제각각 거대한 현실을 스크린에 부지런히 전시한다. 관객은 블록버스터를 통해 비현실적인 현실을 대리적으로 체감하고 이를 통해 불가능한 현실을 탐닉한다. 하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기술을 통한 예술의 창조력이 무엇인가를 증명한다. 단지 변신로봇과 거대괴물이란 허구적 산물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것만이 기술의 본질이 아님을 입증한다. 비현실의 색채를 통해 창조된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는 예술적이라고 명명되는 가치를 지녔다. 만화적 상상력을 단순히 영화적 형식을 빌려 재현한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개별적인 작품을 완성시켰다.

자본의 수하로 고용 당하길 거부하는 자신과 가족을 위협하는 거대한 실체에 대항하고자 하는 본능은 분명 숙연한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가 추궁하는 승리의 실체는 그 모든 부조리의 극복에 있다. 장애물 같은 적을 넘어 결승선을 향해 내달리는 스피드의 질주가 육체적 쾌감을 뛰어넘은 숭고함으로 거듭나는 건 그 때문이다. 우승을 가로막으려는 무리들의 비열한 공작을 이겨내고 결승선을 향해 집념의 페달을 밟는 스피드는 그 상대를 뛰어넘고 결국 속도의 경지마저 뛰어넘고 인간의 한계마저 극복한다. 이는 본질을 수단으로 삼는 이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선요한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가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 뛰어난 경지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경지에 오르는 이의 숭고한 정신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리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된 경쟁을 믿는 자만이 이룰 수 있는 미학적 가치가 <스피드 레이서>에 존재한다. 예술을 간과하고 상업을 중시하는 이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재능과 열정이 스크린에서 황홀하게 빛을 발한다. <스피드 레이서>는 그렇게 블록버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영화의 신기원은 이렇게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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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잃어버린 서울의 밤거리. 유흥의 자본으로 세워진 네온사인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고 그 아래엔 밤을 잊은 호스티스들이 향흥의 환락가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살아간다. <비스티 보이즈>는 도시의 밤이 만들어낸 빛의 허상을 좇아 거리로 내몰린 불나방 같은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다.

전작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군대라는 남성적 특이집단을 들춘 윤종빈 감독은 <비스티 보이즈>를 통해 남성 호스티스라는 또 다른 특이집단을 들춘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비스티 보이즈>는 남성성에서 뻗어나간 양극단의 환경을 배경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척점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은 진배없다는 점에서 동일한 속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체제적 복종을 완수하기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군대와 수익적 복종을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남성 호스티스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닮았다. 다만 그것이 남성성이란 지점의 양극단이란 점에서 명확한 거리감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호스트가 자신의 손님을 물주로 삼는다는 ‘공사’, 자신이 일하는 업소에 돈을 끌어서 쓴다는 의미의 ‘마이킹’, 실적에 따른 성과급수당을 지칭하는 ‘티씨(T/C)’ 등, 그 세계만의 전문용어가 소통되는 <비스티 보이즈>의 세계는 분명 특화된 구역이다. <비스티 보이즈>는 호스트바라고 불리는 특수한 세계를 스크린에 호기롭게 재현하며 리얼리티의 흥미를 유발한다. 하지만 <비스티 보이즈>가 작동시키는 리얼리티는 단순히 영화가 두른 병풍에 불과하지 않다. 강남 일대의 풍경을 담아낸 네거티브 질감의 영상은 그 거리에 팽만한 욕망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들춘다. 때때로 페이크 다큐나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같은 현실감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철저한 현장조사를 거쳐 만들어낸 영화의 리얼리티가 탁월한 까닭이며 동시에 연기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실제 자신을 캐릭터에 이입시켰다고 생각될 정도로 캐릭터에 잘 스며든 배우들의 연기가 누구 하나 손색없는 덕분일 것이다.

몰락한 강남 2세인 승우(윤계상)는 잠시 호스트의 삶에 기대고 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면서도 자신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괴리감을 때론 감당하지 못한다. 업소의 에이스로 추대될 만큼 호스트로서의 자질이 충분하지만 그 위장된 얼굴로 가린 내면의 자격지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 삶에 저항하듯 다혈질의 성격을 토해내곤 한다. 그 와중에 지원(윤진서)을 만나 그녀를 통해 삶의 통로를 찾아나가지만 진심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닥에 내몰린 승우는 끝없이 의심을 헤매다 결국 치정의 미궁으로 스스로 빠져든다. 도박의 늪에 빠져 큰 빚에 억눌린 재현(하정우) 역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으로부터 도피하려다 극단에 내몰린 경우다. 하지만 재현은 현실에 타협하며 끝없이 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비굴하게 내몰리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약삭빠른 근성은 천덕꾸러기처럼 그를 괄시하게 만드는 반면, 그가 호스트로서 천연덕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생존력의 기반이 된다.

강남의 밤거리에 불을 밝힌 호스트바는 물질적 욕망이 넘실거리는 향락의 무대와 같다. 청춘을 볼모로 한 청년들은 그곳에서 몸바쳐 주머니를 채운다. 청년들은 저마다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손님의 시중을 들지만 꿈은 결코 그 자리에 있지 않다. 그곳으로 흘러 들게 된 사정이야 어찌됐건 재현이나 승우에게 호스트바는 자신의 삶을 꿈꾸게 할 기회의 땅임과 동시에 언젠간 박차고 나가야 할 바닥이자 나락의 비상구로 통하는 길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어 희망도 없는 청년들은 암담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강남의 네온사인 아래 모여든다. 꿈을 쫓기 보단 돈을 쫓는 법을 먼저 배운 청춘들은 어떤 가치도 깨닫지 못한 채 돈을 향해 뛰어간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란 말처럼 승우나 재현이 소비하는 호화로운 삶은 그들의 현실에서 껍데기로 소화되는 것에 불과하다. 고급 차를 몰고 명품 옷을 입고 비싼 임대료를 내고 강남에서 살아도 그들은 결코 부유한 강남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자본이 꾸며놓은 진풍경 아래 살아가지만 그들의 호사는 그 거리의 주인의 모습이 아니라 향락을 서비스하는 거리의 노예에 불과하다. 에이스가 되고, 텐프로(10%)가 된다 한들, 수입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로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자본의 저변에 불과하다. 그건 어머니의 가게에서 이름은 같으나 얼굴이 다른 지원(윤진서)에게 목걸이를 사주지 못하는 승우의 꿈과 같다. 마치 자신의 것처럼 모든 것을 누리지만 결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변두리의 주체. 끝없이 물욕이 샘솟는 그 거리에서 그들은 자본의 주인이 되길 원하지만 소모품으로 전락할 따름이다.

이는 88만원 세대의 절망감과 무관하지 않다. 원대한 꿈보다 자본의 속박을 먼저 체감하는 청춘은 그 수하로 무기력하게 편입되어 덧없는 물욕을 꿈꾸지만 쳇바퀴 도는 제자리의 삶은 꿈을 아득하게 밀어내고 현실의 무게는 더더욱 삶을 짓누른다. 끝없는 경쟁을 고수하는 교육과정을 체득하고 사회로 나와 취업난에 허덕이며 자본에 의한 패배주의를 체감한 젊은 세대의 무기력함은 막연한 미래를 꿈꾸며 현실을 소모하는 호스트의 삶과 진배없다. 경쟁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고달픈 삶을 자연스럽게 익힌 청년들은 자본의 첨탑에 기어오르기 위해 스스로를 탕진할 따름이다. 손님들과 잔을 주고받으며 진심을 연기하는 호스트들이 메말라가는 자신의 영혼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자신이 내몰린 구석에서 처량함조차 잊으며 피폐한 삶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결국 반짝거리는 조명처럼 환락이 넘실거리는 서울의 밤을 뜨겁게 누비던 승우는 갈 곳을 잃고 나서야 스스로가 어두운 곳에 내몰렸음을 깨닫고 좌절한다. 한편, 현실로부터 달아나듯 사라진 재현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조차 진심을 가장한 호스트의 얼굴로 살아간다. 그건 압구정의 밤처럼, 신주쿠의 밤도 자본으로 세워진 네온사인 불빛에 불나방들이 몰려드는 덕분이다. 그리고 지금도 영혼을 저당 잡은 청춘들은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공사상대를 찾아 술을 따른다. 어지러운 세상, 파이팅 하면서. 그렇게 밤조차 밀어낸 도시의 허영심에 미혹된 불나방 같은 청춘들은 그것을 희망이라 믿고 그쪽으로 날개를 퍼덕이다 제 몸을 태우고 스스로 소진되거나 끝없이 몸을 부딪히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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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홍상수 감독은, 혹은 그의 영화는 항상 그 고민을 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답다라는 말이 현실적이다라는 말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결부되어 있는지, 그의 영화는 항상 그걸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사실 나는 생각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스크린은 가끔 (혹은 대부분) 현실을 향해 젖혀놓은 창처럼 보인다. 실제로 촬영 순간에 임박해서야 배우에게 대본이 주어진다는 그의 영화작업을 생각해보자면 영화라는 작업이 현실이라는 중력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밀착해갈 수 있다는 믿음의 소산물 같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물론 이것이 숭고하다라는 식의 작위적 수식어로 의미 부여되지 않길 바란다.- 홍상수 감독의 8번째 작품 <밤과 낮>을 보고나니 마치 그의 영화가 너무나 현실 같아서 낯설다는 느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동시에 그것이 영화라는 기교적 장막을 모두 다 걷어내고 나서야 온전한 감상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취색을 띠는 창호지 재질(같아 보이는) 종이 위에 붓 펜으로 쓰인 듯한 궁서체 프롤로그가 무언(無言)으로 말하듯 <밤과 낮>은 대마초를 피웠다가 들켜 파리로 도피한 국선화가 김영남(김영호)의 34일 간의 수기(手記)다. 3인칭 관찰자 시점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프롤로그가 지나가고 나면 파리 공항에 도착한 김영남의 모습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그의 34일간의 고백담이 펼쳐진다. 서사의 영역을 구분하는 날짜가 프롤로그와 마찬가지 형식으로 잠깐 동안 화면을 정적으로 메우고 나면 그의 일기체 내레이션 혹은 그의 일상적 행위들이 그 간격 사이를 채운다. 간격에는 일정한 룰이 없으며 그 간격의 단위도 일정치 않다. 그건 때로 하루가 되기도 하고 이틀이 되기도 한다. 김영남의 독백은 일기체 형식으로 이뤄지지만 그건 왠지 기록된 것이 아닌 것 같다. 마치 기억의 단편을 끄집어 내듯 자신의 기억 속에 담긴 선명한 것들을 차례대로 끄집어 나열한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이 추억하고 싶어하거나 잊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선명하고 구체적이지만 자신의 무의식 중에 기억났거나 기억나지 않은 것들은 어떤 내레이션을 동반하지도 않거나 그냥 가볍게 뛰어넘어버린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밤과 낮>이 엄연히 김영호의 기억에서 끌어들인 수기이며 그의 시점으로 이뤄진 단상들의 조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은 대부분 그의 시점을 통해 그녀들을 대하거나 감상하고 세상을 관조하거나 살아갔다. 하지만 이를 남성중심적인 태도라고 말하기 석연찮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들 앞에서 속물이었을 뿐이니까. 남성을 위한 합리화는 없었다.-물론 그들을 향한 질시가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밤과 낮>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밤과 낮>의 시점은 전작들과 미묘하게 다르다. 그건 <밤과 낮>의 일기체 형식의 서사와 관련이 있다. 일기란 지나간 일을 기록하는 행위이며 그 형식을 따르는 <밤과 낮> 역시 지나가버린 과거와 대면하는 회상이란 의미다. 전작들이 현재형의 이야기를 했던 것과 달리 <밤과 낮>은 과거형의 이야기를 하며 이는 전작들과 <밤과 낮>의 형식이 달라진, 혹은 달라져야 했을 근간적 연유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일기체 형식의 서사는 상당히 어울리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일상에 대한 퇴고처럼 삶을 대구로 반복하곤 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은 일상의 흐름의 지속 그 자체를 드러낸다. 그 반복적인 일상이 대구로 느껴지는 건 그 일상을 부유하는 인간의 심리가 변모되기 때문이다. 변화는 삶을 채우는 인간의 내부에서 비롯된다. <밤과 낮>은 그 일정한 흐름 안에 담긴 인간의 미묘한 대구적 삶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밤과 낮>의 대구를 이루는 건 시간과 공간의 진리적 변화일 뿐, 행위가 아니다. 이야기 흐름의 양면성을 이루던 주체적 행위는 서사 위를 흐르는 시간의 범주 위에서 흘러가고 그 주변의 영역이 대구를 이룬다. 파리와 서울, 그리고 꿈과 현실. 파리로 도피한 영남의 좌절감이 유정(박은혜)을 만나 기묘한 설렘으로 변모하기까지, 그리고 유정과 사랑에 빠진 뒤 갑작스럽게 서울로 돌아와 성인(황수정)과 재회하기까지, 균등하지 않은 서사의 흐름을 따르는 <밤과 낮>은 일상을 더듬어가는 편린의 기억을 통해 영화의 재현성을 갖춤과 동시에 현실을 반추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현실소통의 언어로 재생된다.

파리라는 지정학은 이질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한국적 소통을 부각시키는 보색적 환경성을 띠고 있다. 이는 시시콜콜한 한국적 풍경을 가득 내포하고 있음에도 타향의 감수성-구체적으로 프랑스-을 연상하게 만들던 전작들을 떠올렸을 때 역설적이다. 이는 홍상수 감독이 에릭 로메르나 장 으스타슈와 같은 누벨바그 양식을 따르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들의 행위는 비현실적이라기 보다 비(현대상업)영화적이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대사나 명확하지 않은 동선은 결벽한 연출력과 거리를 두며 영화적 현실에서 그들은 타자화되어 공간의 기운을 변질시킨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의 기운은 공간을 생소하게 만든다. –이는 현실의 모순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적인 것과 맥락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밤과 낮>은 (본래 홍상수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단순히 국적의 관계에 상정되지 않고 지정학적 중력에서 이탈하던 홍상수식 영화들의 근본적 까닭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밤과 낮>은 홍상수 감독의 변처럼 밤과 낮의 서사가 다른 지구 반대편을 가로지르는 통화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이야기다. 대구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도 공유되는 동 시간대의 삶. 결국 보편적인 삶은 인간의 중력들이 끌어당긴 관계로 이뤄지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기억으로 채워진 서사가 된다. 그 보편적인 삶 속에는 기억나는 서사와 기억나지 않는 서사가 부유한다. 결국 인간의 삶은 특수한 기억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보편적인 서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밤과 낮>은 삶이라는 특이한 서사 위를 흐르는 고유의 시간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한계영역이다. 그 삶 안에는 현실이 있고 동시에 꿈이 있다. 꿈과 현실은 각각 우리의 밤과 낮을 지배하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며 그 영역 위에 존재하는 우리는 꿈을 꾸거나 현실을 살아가며 그렇게 밤과 낮을 지나 자신만의 기억으로 채워진 특별한 삶을 꾸려나간다. 마치 하늘을 채우는 구름이 매일같이 그 너비를 달리하듯 인간의 삶은 보편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채워나갈 따름이다. 미묘한 기법의 변화도 눈에 띠지만 <밤과 낮>은 통찰과 직관을 아우르는 화폭의 순수한 역량을 먼저 느끼게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바로 영화라는 고민에 대한 홍상수 감독의 진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의 음부를 ‘세상의 기원’이라 했던 쿠르베처럼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진솔한 풍경을 영화의 기원이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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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팔, 무쇠다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쇠를 두른 팔, 무쇠를 두른 다리. 무쇠로 만든 인조인간 로봇이 아닌 티타늄 고합금 갑옷을 입은 인간. ‘맨’자 돌림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아이언맨>은 코믹스 출신 히어로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스크린의 새로운 아이콘이다.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언맨>은 세상을 구원하는 ‘맨’으로서의 의무를 스크린에서 성실히 이행한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초인이라기보단 유능한 개발자에 가까우며 안티히어로의 고독을 벗어 던진 외향적 히어로다.

선친의 대를 이어 무기회사 스타크 기업(Stark Industry)의 CEO 자리에 오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재벌2세로서의 부(富)뿐만 아니라 유전자적 자질까지 물려받았다. 미국의 핵미사일 개발에 공헌했다는 부친의 유능함은 어린 나이에 엔진을 만드는 아들의 재능으로 이어졌고 MIT공대를 졸업한 천재적인 과학자로서의 명성은 CEO로서의 사업적 재능과 결탁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매력에서 비롯된 여성편력을 가십으로 제공하며 셀레브리티 못지 않은 대중적 영향력을 뽐내기도 한다. 하지만 평화란 적보다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는 아버지의 말을 신조처럼 여기는 그의 신념이야말로 토니 스타크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다.

<아이언맨>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이 그러했듯, 거대한 스케일에 가득 채운 영상 테크놀로지를 전시하는 블록버스터의 체험을 전시하기 이전에 서사적 설득력을 구성한다.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형제 히어로들과 다른 타입의 캐릭터 구상도를 그린다. 자신의 회사가 개발한 새로운 신무기를 시연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미군기지로 날아간 스타크는 테러범들의 습격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힌다. 생명유지장치를 통해 가까스로 생을 유지한 그는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던 무기가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것임을 알게 된다. <아이언맨>은 냉전 이후, 세계를 장악한 서구와 중동의 분쟁지역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는 <아이언맨>의 정체성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될만한 것이다.

스타크는 피터 파커(<스파이더맨>)나 브루스 웨인(<배트맨>)보단 (<본>시리즈의) 제이슨 본이나 (<매트릭스>의) 네오를 닮았다. 산업적으로, 혹은 국방적으로나 국가적 수호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진실을 목도한 뒤에서야 완전히 전복된다. 이는 초현실적 능력을 지닌 히어로들의 사적 고뇌와 맥락이 다른 사례다. 뉴욕 타임스퀘어를 나는 영웅의 현실적 딜레마(<스파이더맨>)나 돌연변이 유전자를 초인적 능력으로 전시하는 특이성(<엑스맨>), 유년시절에 비롯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정의구현(<배트맨>) 등 기존의 히어로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자신의 능력이 되려 세상과 반동되는 형질의 것임에 고뇌하는 것과 다른 맥락이다. 마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의 언덕에 오르는 것처럼 인내하던 기존의 영웅담과 달리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의 오류를 깨닫고 원점으로 돌아가,(<본>시리즈) 자신을 함몰시킨 세계에 대항하고 맞서 싸운다.(<매트릭스>)

물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아이언맨>은 고도화된 이미지 기술을 전시할만한 그릇의 너비를 넓히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는 애초에 <아이언맨>이 <본>시리즈나 <매트릭스>와 같은 성찰보단 <트랜스포머>와 비견될만한 스펙타클을 지향한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됐다’는 토니 스타크의 신념은 자신이 만들어낸 폭력의 구심을 척결하겠노라는 결심을 부르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행위는 결국 더 강한 힘을 통한 합리적 수단의 공격력을 갖추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강한 힘을 구사하는 캐릭터의 폭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캐릭터의 성숙을 끼워 맞추는 수준에 머무른다. –이는 후에 <아이언맨>이 시리즈로 발전한다면 개인적 딜레마로 작용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그것은 단지 영화적인 한계라기 이전에 영화가 인식하는 현실주의적 자괴감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현실적 자포자기, 혹은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가는 현세태의 공격성-

거대한 스케일로 관객의 말초신경을 압도하던 블록버스터의 관성적 변화-진화가 아닌-가 무감각해진 시대에서 <트랜스포머>는 육중한 외형을 전시하는 것만큼이나 세밀한 구조변화를 조작하는 것도 유용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됐다. <아이언맨>은 이를 응용한 포스트<트랜스포머>다. <트랜스포머>에서 변신로봇의 디테일한 변신과정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아이언맨>에서 초합금 갑주가 장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흥미롭다. 마치 유년시절 변신로봇을 조작하던 재미만큼이나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던 것처럼. 또한 인간의 연약한 피부를 금속슈트로 감싼 아이언맨의 대결은 육중한 변신로봇들이 불꽃을 튀며 금속재질의 몸체를 부딪히던 <트랜스포머>와 유사한 이미지를 그린다.

다만 <트랜스포머>가 별나라에서 날아온 외계 우주인이라는 캐릭터의 서사적 공백을 스펙터클로 대체했던 것과 달리 <아이언맨>은 중반부가 넘어서는 순간까지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캐릭터에 대한 서사에 집중한다. <트랜스포머>에 비해 진지한 접근을 꾀하는 <아이언맨>은 전자에 비해 좀 더 성인적 취향의 스토리텔링을 고수한다. 게다가 포토제닉한 동시에 섹스 어필한 토니 스타크 역시도 성인 취향의 캐릭터에 가깝다는 점에서 <아이언맨>은 <트랜스포머>보다 성인을 배려한 장난감이라 할 수 있다. 스타크가 자신이 개발한 슈트를 장착한 뒤, 고공을 활주하며 내지르는 탄성은 마치 바이크나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하는 것과 비견해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의 슈트가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은 바이크나 스포츠카에 옵션을 달거나 혹은 이를 튜닝 했을 때의 흡족함과 유사해 보인다.

물론 의문의 여지는 있다. <아이언맨>에서 첫 번째로 적대화되는 대상은 아프가니스탄의 무장단체로서 이는 유사 ‘알 카에다’의 이미지즘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메카닉 슈트를 입은 토니 스타크에 비해서, 혹은 자신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어떤 이보다도 무지하고 열악해 보인다. 서구와 중동의 대립구도 안에서 이뤄지는 이미지의 단순한 대비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되, 그것이 선악의 대립과 맞물리는 동시에 우열의 이미지로 인식될만한 사안이란 점은 다소 문제가 있다. 물론 <아이언맨>은 그들의 테러행위를 뒤로 돕는 무기회사의 중역 오베디아(제프 브리지스)를 본질적인 악의 축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굴과 천막에서 생활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세력을 처단하고 그 이전에 그들의 살육행위를 전시하는 영화의 태도가 합리적인 폭력을 전시하기 위한 소모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란 혐의를 부른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천명하며 끝을 낸 <아이언맨>이 (장차 시리즈로 진행된다면) 해결하지 못한 미성숙의 과제로 고민할만한 것이다.

스타크가 두른 갑옷의 상용화 여부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고 (난해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이론적 근거들에 적절히 수긍할 수 있는 이에게 <아이언맨>은 충분히 유희할만한 오락물로서 기능할만하다. 게다가 하이퍼 테크놀러지 공학기술을 자아의 갑옷으로 두른 인공 초인의 면모는 수준 이상은 아니더라도 함량미달은 아니다. 개과천선한 영웅의 면모가 가볍게 그려지긴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직설적인 태도를 애써 심각하게 포장하기보단 확고하게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도 명쾌하다. 현실이 야기시키는 문제의식을 간과하지 않으며 이를 오락적 물량공세로 치환하는 의도는 참신하면서도 정치적으로도 무리가 없다. 이는 여름용 블록버스터가 유지할만한 적절한 평형감각이란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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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기서 중 하나로 꼽히는 오승은의 ‘서유기’를 모티브로 한 <포비든 킹덤>이 원작으로부터 취한 것은 영화적 각색의 동기부여에 불과하다. ‘서유기’의 연유가 되는 손오공이 오행산에 갇히게 된 연유에 변주를 가하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포비든 킹덤>은 원작의 허구를 밑천으로 영화적 허구를 재생산한다. 전설적인 고전은 <포비든 킹덤>을 위한 모티브이자 허구 속에 또 다른 전설이 됐다.

원작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는 대비적 설정으로서 원작을 다시 비춘다. 서역으로 향하는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 삼장법사는 <포비든 킹덤>에서 오행산으로 향하는 4인조, LA뒷골목에서 손오공 전설로 소환된 소년 제이슨(마이클 안가리노)을 비롯해 그를 오행산으로 이끄는 루얀(성룡)과 란(이연걸), 스패로우(유역비)로 대비되고 서역의 천축국(인도)을 향한 원작의 여정은 <포비든 킹덤>에서 본래 여정이 시작되던 오행산을 향한 여정으로 착안됐지만 원작의 일행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는 것처럼 영화 속 그들도 사막을 건넌다. 손오공이 오행산에 갇히게 된 연유에 변주를 가함으로써 원작과 판이한 영화적 허구를 창작했으나 기본적인 설정의 큰 틀을 원작에서 고스란히 따온 <포비든 킹덤>은 영화의 모티브가 된 원작의 소스를 고스란히 영화에 재활용하는 효율적인 창의력을 구사한다.

쿵푸를 동경하는 서양소년이 차이나타운의 골동품 가게에서 여의봉을 발견한 뒤, 전설 속 왕국으로 소환된다는 유약한 설정은 <포비든 킹덤>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가리키는 바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포비든 킹덤>이 <라이온 킹>과 <스튜어트 리틀>을 만든 롭 민코프 감독의 작품이란 점을 안다면 그 의도는 더욱 자명해진다. 어드벤처와 판타지, 거기에 무협 액션을 두른 <포비든 킹덤>의 다양한 초식이 내뻗는 궁극적인 한 수는 소년의 성장드라마다. 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부터 <트랜스포머>와 같은 버라이어티한 오락영화들이 지향하는 가족적 관람의 묘미이기도 하다. 특히 ‘서유기’를 모태로 한 동양적 세계관은 서양인들에겐 둘도 없는 판타지로 비춰지기 적당하고 현란한 쿵푸의 몸놀림은 단연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포비든 킹덤>이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제작될 수 있었던 수지타산의 근거는 이처럼 분명하다.

하지만 <포비든 킹덤>의 성장드라마는 큰 감흥을 줄만한 거리는 못 된다. 그것은 우격다짐에 가까운 도입부의 설정만큼이나 제이슨의 성장드라마가 성인을 만족시킬만한 풍만한 수준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포비든 킹덤>이 가장 큰 밑천은 영화포스터가 말해주듯 마이클 안가라노가 아니라 성룡과 이연걸이다. 마치 성룡과 이연걸의 풍모를 고스란히 캐릭터로 반영한 듯한 <포비든 킹덤>의 루얀과 란은 그들의 동시출격만으로도 단연 흥미를 부른다. 어드벤처와 판타지, 그리고 성장드라마의 모든 장르적 기교가 동원됐음에도 무협고수들의 현란한 몸놀림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어 보인다. 특히 중반부에서 (원화평의 합에 맞춰) 이연걸과 성룡이 자웅을 겨루는 대결씬은 근래 보기 드문 무협영화로서의 현란한 재미를 선사한다. 게다가 <포비든 킹덤>은 무협에 열광하는 미국소년의 특별한 취향처럼 할리우드 자본이 무협영화에 바치는 이색적인 오마주처럼 보인다. <포비든 킹덤>에 구미를 당길만한 관객이 누구인지를 가늠하는 척도도 그것이다. 그건 마이클 안가라노에게 눈길이 가지 않아도 성룡과 이연걸을 바라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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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happiness), 기쁨(pleasure), 슬픔(sorrow), 사랑(love). <내가 숨쉬는 공기>에서의 공기(air)란 기화된 원소의 질량을 가늠하기 위한 명명이라기 보단 부피로서 상정되는 공간성에 대한 공유를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가늠할 수 없는 동선의 접촉으로 이뤄지는 타인간의 관계 맺기. 일정한 시공간의 공유로 인해 교차되는 동선의 필연적인 접촉은 활성화된 원소들의 충돌이 이루는 개인의 삶이 지닌 질량을 재기 위한 것과도 같다.

네 가지 감정의 문구들로 경계를 정한 뒤, 제 각각의 동선을 배회하는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은밀한 접점을 이루는 옴니버스 형식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의 결과를 도출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시작에서 명명되는 테마에 맞는 이야기를 수행하는데 그에 따라 이야기의 중심 인물도 각각 달라진다. 미묘하게 맞닥뜨리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인물들의 개연성은 적당한 이해심을 동반한다면 그만큼의 설득력을 지닐 만큼은 된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스토리텔링으로 보자면 옴니버스라는 분절된 형식에서 일관된 맥락을 놓치지 않는 어리석은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역량이 충분한 배우들이 포진한 만큼 그들을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감상을 부를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각각의 사연이 담고 있는 테마는 이야기의 내면에 비해 과잉의 인상을 부른다. 말 그대로 행복이라 부르기 애매한 것을 행복처럼 위장하는 전술처럼 <내가 숨쉬는 공기>는 자신이 내건 테마에 이야기의 구색을 맞추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게끔 유도한다. 구체적인 주제 의식에 비해서 모호한 의미로 여운을 남기는 각각의 이야기는 결론에 이르러 명확한 상을 남기지만 그만큼이나 전자의 주제들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 애매하게 만든다. 그건 아무래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겉멋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이지호 감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만든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걸출한 배우들을 총동원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시나리오가 궁금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을 가장한 우연을 통해 개연성을 확보하는 이야기를 특정한 주제의식으로 엮어 넣으려는 의도는 다분히 무리수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녹록하지 않은 연기를 지켜보는 것으로 상쇄되지 않는 싱거운 뒷맛은 아무래도 이 때문이다.

(씨네서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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