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인 선율과 함께 우주의 황홀경을 비추던 스크린이 중력에 이끌리듯 인공위성들의 잔해를 헤치고 지구상으로 돌입한다. 빈 깡통이 된 빌딩 사이사이를 메우는 각종 폐기물. 생명이 말소된 듯 인적이 사라진 그 거리의 쓸쓸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황량하게 물들일 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낭만적인 멜로디가 그 쓸쓸한 적막을 밀어낸다. 캐터필러(caterpillar)로 전진하는 작은 로봇 ‘월ㆍE(WallㆍE: Waste Allocation Load Lifter-Earth-class)’는 트랜지스터 오디오 기능을 겸비한 자신의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도처에 널린 폐기물을 압축해 차곡차곡 쌓는다. 그 모든 것은 <나는 전설이다>에 버금갈만한 썰렁한 대도시의 적막함을 명랑하고 낭만적으로 밀어내는 월ㆍE로부터 그렇게 시작된다.
강아지의 눈망울처럼 호기심이 충만한 두 개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월ㆍE는 유일하게 정을 붙이며 키우는 바퀴벌레 한 마리와 매일같이 아기자기한 일상을 지속해나간다. 그것은 종종 대부분의 사람이 나이가 듦에 따라 상실해버린다는 맑고 순수한 눈빛을 닮은 두 렌즈로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로봇 주제에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낡은 테이프로 재생되는 오래된 영화를 감상하던 월ㆍE가 ‘사랑이란 그런 것(to be loved a whole life long)’이란 로맨틱한 가사를 품은 감미로운 멜로디 앞에서 납작한 두 손을 모은 채 동그란 렌즈를 글썽거릴 때,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겐 실로 사랑스럽고 가련한 외로움이 전해진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존재 ‘이브’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월ㆍE에게 깃드는 어떤 간절함이 허망해 보이지 않는 건 그 덕분이다. 감정을 품은 로봇, 그것은 흡사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우화적 답변처럼 순진무구하지만 설득력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변변찮은 언어가 발견되지 않는 <월ㆍE>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를 빽빽하게 채운 웬만한 극영화보다도 풍부하고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건 이 말 못하는 로봇, 월ㆍE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풍부한 감정이 형성되는 까닭이다. 그저 두 개의 커다란 렌즈로 이뤄진 얼굴과 네모난 몸통, 가늘고 납작한 팔, 다리를 대신한 두 개의 캐터필러, 이토록 단순한 형태를 지닌 월ㆍE가 세심하면서도 완전한 감정을 전달하는 건 그 행동에 대한 진심이 온몸으로 발견되는 덕택이다. 구시대적 아날로그 기능성을 겸비한 로봇 월ㆍE는 그 인공적인 형태를 통해 되려 역설적으로 순수한 낭만을 극대화시킨다.
디스토피아를 정화하는 태생적 임무를 (700여 년간) 홀로 수행한 월ㆍE는 인간이 혐오하는 쓰레기를 자신의 몸에 주워담아 압축한 뒤, 정교하게 쌓아 올린다. 또한 월ㆍE는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긴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것들을 발견해내는 재활용의 수집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작은 로봇은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겨 버려진 것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셈이다. 향유에 길들여진 인간들의 무분별한 소비 의식과 반대로 인간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소비되는 인공지능의 로봇이 버려진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형태로 쌓아 올린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만하다. 그건 단지 명령의 수행에 불과한 행위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월ㆍE가 정사각형 형태로 압축한 폐기물들은 하나의 구조물로서 재탄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건축적 기능성을 지니지 못한다. 결국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행위에 가깝다. 가히 모방적인 창조 행위다. 월ㆍE는 인간과 유사하다. 최대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지만 감정을 지닌 것처럼 행동하며 인공지능의 산술적 결과로 부여되는 명령어적 단위의 2차적 행위이기 이전에 1차적인 본능의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월ㆍE>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로봇들이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은 명백히 인간의 행위와 닮았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초라해진다. 월ㆍE를 비롯한 로봇들은 인간 스스로가 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의 반대편에서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액시엄(Axiom) 호에 탑승한 인간들은 감정조차 망각하고 판단력마저 상실한 채, 가상 윈도우에 시선을 고정하며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기계적 인공지능이 부여하는 삶의 패턴에 수동적 형태로 사육되듯 살아간다. 심지어 책을 넘기는 것조차 잊어버린 선장의 모습은 아날로그 기능성을 상실한 디지털 인간의 퇴보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들이 살아가던 지구를 버리고 우주 한복판에 노아의 방주처럼 떠있는 액시엄 호에서 인간들은 비만적 퇴보를 거듭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의 명령(directive)에 철저히 따르는 기계들은 그들의 편의를 위해 그들을 사육하는 통제관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한다. 아날로그 시스템의 명령어가 유명무실해진 디지털 오토매틱 시대의 인간들은 철저한 편의 속에서 자생적 능동 의지를 망각한다. 가스충전소도, 거대한 마트도, 심지어 고속터미널까지도 ‘BnL(Buy N Large)’이라는 통일된 브랜드가 지배하는 획일적인 미래세계의 풍경은 몰락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인간의 소비성만이 극대화된 세계는 결국 자생을 위한 비판적 의식마저 망각한 인간의 영토로부터 인간을 몰아낸다.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변을 작동시키는 건 작고 볼품없는 로봇의 진실된 연정, 즉 로맨스의 태동이다. 미지와의 조우 앞에서 온몸을 덜덜거리고 떨면서도 외로움에서 비롯된 깊은 호기심으로 강아지처럼 ‘이브’의 뒤를 졸졸 쫓던 월ㆍE가 그 뒤를 쫓아 지구를 벗어난 먼 우주로 나아갈 때, 이 여정은 실로 우주적인 감동을 부른다. 기능이 정지된 이브에게 헌신적이던 월ㆍE가 이브를 소환하는 우주선을 쫓아 우주로 나아가게 되고 그 덕분에 월ㆍE는 지구를 벗어나 거대한 우주와 대면한다. 자신을 부여잡던 중력권의 세계를 벗어나 거대한 무중력의 세계를 체감하는 월ㆍE의 탐험은 우주의 황홀경에 감탄하는 월ㆍE의 모험 자체만으로도 진귀한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월ㆍE가 토성의 고리를 손으로 스치며 지나가고, 후에 소화기의 출력을 이용해 이브와 함께 우주공간 위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경은 한 폭의 회화처럼 실로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월ㆍE>가 감성을 자극하는 건 그 모든 여정이 월ㆍE의 헌신적인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점일 것이다. 아이의 눈처럼 맑고 투명하며 순수한 눈(?)을 지닌 월ㆍE가 이브를 구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지구에서 우주로 나아가 종래엔 액시엄 호를 지구로 이끌어오는 과정이 실로 감동적인 건 그것이 애초에 의도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헌신적인 배려가 이룩한 거대한 결과였기 때문에 순수한 감동의 진폭과 여진이 더불어 거대해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기 위해서였을 따름이다. 이는 실로 거대한 범우주적인 스케일의 감동을 야기시킨다. 결국 월ㆍE의 로맨스는 공존을 이룬다. 구시대적인 아날로그 형태의 청소로봇과 신세기적인 첨단 로봇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종래엔 그 모든 것이 지구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다시금 합리적인 질서를 되찾고 새로운 인류의 기원을 이룰 것이다. 영화의 에필로그적인 엔딩과 같이.
순수한 창조력을 바탕으로 항상 수준 이상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픽사(Pixar)는 <월ㆍE>만큼은 수준 이상을 넘어 감히 걸작을 완성시켰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월ㆍE>는 진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로맨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중력의 신비같이 황홀하면서도 태양처럼 따스하고 우주만큼 거대한, 형용할 수 없는 진경의 감동을 아로새긴다.
아이맥스 카메라의 앵글에 비춰진 광대한 도시의 밤 풍경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거대한 고담시의 어두운 밤거리, 고층빌딩 위에서 그 거대한 진풍경을 내려다보는 배트맨은 실로 고단하다. 짙게 드리운 고담시의 어둠 속에서 배트맨은 홀로 악당들과 맞서 싸운다. 광대한 고담시에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은 배트맨이 짊어진 고단함의 무게를 대변한다. 도시를 지배하는 암묵적 질서가 부패한 정경유착의 뿌리를 내리고 악의 편의를 손쉽게 도모할 때, 배트맨이 홀로 일으키려는 정의는 과연 그 도시에서 어디까지 유효한 것인가.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도시의 밤을 고층 빌딩 위에 홀로 서서 관조하는 배트맨은 고민이 깊다. 그래서 그의 형상은 실로 고독하다.
범죄로 얼룩졌던 고담시의 거리는 밤마다 거리를 누비는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의 청결한 의지로 미화되고, 고담시의 밤을 지배하던 갱들은 죄악이 행해지는 곳에 어디든 나타나는 배트맨의 서치라이트 아래 몸을 사린다. 하지만 배트맨은 여전히 고민이 많다. 그는 악의 행동반경을 좁혀놓을 뿐, 박멸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적 공포로 고담시의 밤거리를 지배했을 뿐, 그가 홀로 악을 몰락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배적인 억누름만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그에게 희망은 제도적 질서의 복원이다. 배트맨이 청렴하고 정의로운 검사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를 도시의 구원자라고 지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한 살충제를 뿌릴수록 강한 해충이 나타나는 것처럼, 고담시의 악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고 믿는 배트맨의 앞에 무시무시한 상대가 등장한다. 자본에 연연하지 않고 혼돈에서 비롯된 순수한 공포를 신봉하는 조커(히스 레저)는 순수한 악으로써 배트맨의 뒷면을 차지한다. -넌 날 완전하게 만들어.- 배트맨은 조커에게 존재의 목적을 부여한다. 조커는 배트맨의 기반을 전복시키며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배트맨이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무고한 시민을 죽이겠다는 조커의 경고에 시민들은 경찰 앞에서 외친다. ‘무법자가 무고한 시민의 목숨보다 중요한 거요?’ 가면을 벗은 브루스 웨인은 가면을 쓴 배트맨 앞에서 갈등한다. 어둠을 지배한 배트맨은 악당을 지배하는 과시적 존재인가. 그의 영웅놀이가 되려 시민을 위험으로 내모는 것일까.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되는 거지.
<다크 나이트>에서 중심포석은 당연히 배트맨이다. 하지만 수를 던지는 건 조커(히스 레저)다. <다크 나이트>는 조커를 제압하는 배트맨의 영웅수기가 아니다. 되려 반대로 배트맨의 존재적 가치를 시험하는 조커의 광기를 더욱 중요하게 다룬다. <다크 나이트>는 조커를 통해 배트맨의 가치적 양면성을 조명한다. 그것은 이 세계의 불완전성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조커는 배트맨을 비추는 거울이자 배트맨에 대한 불완전 연소를 돕는 촉매이며 그의 드러나지 않은 뒷면의 표정이다. 밤마다 가면을 쓰고 블랙슈트를 착용한채 악을 소탕하는 배트맨의 형상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체제의 오류를 증명하는 바나 다름없다. 악이 지배하는 도시의 질서를 암묵적으로 수긍한 채 무기력하게 형태만 갖춘 권위 없는 제복의 사회. 도시를 피폐하게 만드는 부패와 강탈이 암묵적인 질서로 사회 밑바닥을 제압해버린 살풍경. 배트맨은 더 이상 제 기능을 이루지 못하는 사회제도의 부실한 팀워크를 돌파하는 단독드리블 주자다. 배트맨의 존재 자체가 고담시의 오류이며 사회적 시스템의 악순환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배트맨의 아이러니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고자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배트맨의 존재는 결국 사회적 시스템의 한계가 구현하지 못하는 정의의 지표를 떠받드는 주춧돌에 가깝다. 배트맨의 월등한 기능성과 신속한 가동성은 악당들을 제압하는데 심리적으로, 활동적으로도 효과적으로 작용하며 결국 그의 존재 자체가 고담시의 평화를 유지하는 하나의 상징성으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배트맨은 제도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조커가 배트맨의 위기를 부각시키는 건 그 지점이다. 배트맨은 제도적 구속을 탈피한 개인의 능력으로써 제도의 지지를 견인하지만 이는 결국 제도적 허점의 정곡을 찌르는 행위에 가깝다. 조커는 배트맨의 딜레마를 공격한다. 가면을 쓰고 폭력을 통제하는 이의 폭력이 실은 제도적 질서를 유린하는 것임을, 폭력을 제압하는 필요악의 존재로써 배트맨을 규정하고 그의 결백한 정의를 자극한다. 자신의 폭력성과 배트맨의 폭력성이 양면의 동전처럼 맞닿아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것임을 부각시킨다. 그 와중에 시민들은 배트맨으로 인해 얻었던 평화의 기저에 억눌려 있던 폭력의 잠재성을 더욱 강하게 경험하고 인식한다. 정의를 구현하던 영웅 배트맨은 고담시를 조커의 표적으로 내모는 악의 소환자로 몰락한다. 그 과정에서 배트맨은, 그리고 브루스 웨인은 갈등하고 고민한다. 선을 넘어버린 영웅은 더 이상 돌아갈 수도, 돌아갈 곳도 없다.
조커는 일종의 사회학적 행위실험자에 가깝다. <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의도가 개입되는 건 조커일 것이다. 제도적인 모순을 공격하는 행위자, 조커는 결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양식으로써 작동되는 현대의 질서가 과연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를 되묻는 발의에 가깝다. 조커의 존재는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오류조차도 다스리지 못해 제도 밖의 능력을 빌어오는 현시대의 질서가 과연 보존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되묻는 상징적 부호이기도 하다. 그건 마치 조커의 끔찍한 기억을 잉태하고 보존하는 입가의 흉터가 그에게 미소의 형상을 부여한다는 아이러니와도 결합된다. 배트맨이 구축한 고담시의 평화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것이다. 그는 힘으로써 힘을 봉인했지만 결국 그건 방편적 행위에 불과하다. 결국 그가 정리한 쓰레기들을 정화하는 건 고담시의 법적 질서여야 하지만 제도는 더디고 무력한 검증은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조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 고담시는 혼란에 빠진다.
배트맨이 억눌렀던 폭력은 되려 조커의 광기를 입고 예전보다 거대하게 되돌아왔다. 하지만 배트맨은 가면을 벗을 수 없다. 배트맨의 가면은 제도의 한계가 만들어낸 기형적 마지노선이다. 부정을 잠재우기 위한 정의의 예외적 방편으로써 배트맨은 존재한다. 결국 배트맨의 가면은 보존된다. 하지만 그 보존을 위해 많은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희생된다. 그와 함께 스스로가 증명하고자 했던 정의의 구원자마저 타락한다. 배트맨은 더더욱 고립되어 간다. 블랙슈트의 아우라가 감추던 인간적인 나약함이 <다크 나이트>에서 넘쳐흐른다. <다크 나이트>는 이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처연한 응답과도 같다.
강렬한 액션 시퀀스조차 널뛰기적인 흥분을 발생시키지 않는 건 <다크 나이트>를 철저히 통제하는 어떤 지배력 덕분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나 그리스 신화에서 튀어나온듯한 캐릭터들의 깊은 트라우마가 연동되어 <다크 나이트>의 내러티브에 거대한 감정의 바다를 형성한다. 강렬한 씬의 이미지가 아니라 지속적인 내러티브의 심리가 영화의 형태를 장악한다. 박쥐를 두려워하는 브루스 웨인이 박쥐형상을 한 배트맨으로 내면적인 공포를 외부로 방출하는 것처럼 자신의 찢어진 입을 광대와 같은 유희적 화장으로 가리는 조커는 (불분명한) 외부적 충격으로 학습한 경험적 공포를 외부로 확산시켜 나간다. 두 인물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공포로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 맞닿아 있다. 유사한 통과의례를 거쳤으나 이질적인 내면을 지니게 된 두 인물의 심리적 격돌은 격랑처럼 거칠지만 심해처럼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감정을 압도한다.
조커가 형성한 공황장애적 공포는 영화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하지만 그 정점을 찍는 건 투페이스다. 조커가 <다크 나이트>의 키워드라면 투페이스는 키홀더다. 궁극적으로 투페이스의 존재는 <다크 나이트>가 증명하고자 했던 역설의 종착역과도 같다. 인간의 나약한 심리는 때론 강건한 의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덧없이 몰락한다. 자신이 믿던 정의로부터 배반당했다고 믿는 투페이스의 잔혹한 얼굴은 인간의 나약한 심리가 빚어내는 비극적 양상을 연출한다. 그건 정의를 위해서 이중생활을 도모해야 하는 배트맨의 고단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좋은 답변이기도 하다. 인간의 불완전성은 결국 체제적 오류를 발생시킨다. 모든 선악의 기제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작동된다. 끊임없이 제도는 인간의 변동적 심리로부터 도전을 얻는다. 결국 인간의 불완전성은 제도적 결함을 발생시킨다. 결국 그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건 일부 개인의 희생과 헌신이다.
무력한 질서를 유린하는 조커의 시험은 결국 정의로운 질서의 구축을 희망하던 배트맨을 패배자로 내몰지만 그는 자신의 패배를 통한 질서의 전진을 선택한다.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들은 하나같이 희생양으로 몰락하거나 그 비극적 기제 안에서 더욱 지독하게 타락한다. 자신을 비난하는 시민의 손가락보다도 배트맨을 절망하게 만드는 건 자신이 희망으로 삼았던 정의적 선봉장의 타락이다. 분노로 인해 투페이스가 된 하비 덴트는 결국 배트맨의 영웅적 권위를 상실시킨다. 제도의 타락적 패배를 지우기 위해 배트맨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웅으로써의 명예를 스스로 반납한다. 배트맨은 스스로 악당임을 자처한다. 세계를 구원하려던 개인적 헌신은 몰락해도 체제적 정의의 숭고함은 강건해진다. 무력하게 흐르던 체제의 몰락은 비범한 영웅의 희생을 볼모로 갱생한다. 영웅을 갈망하면서도 결국 영웅을 몰락시키는 모순적 체제는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된다.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해묵은 슈퍼히어로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낸 크리스토퍼 놀란의 의도는 <다크 나이트>에 이르러 명확해졌다. 배트맨의 기원을 다룬 <배트맨 비긴즈>는 단순히 시리즈의 부록이 되기 위한 프리퀄의 기능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배트맨의 기원뿐만 아니라 배트맨 슈트의 기술적 가능성까지 설득해버린 이 영화의 반도체적 세심함은 <다크 나이트>의 양식이 어떤 설득력을 포용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만드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배트맨 비긴즈>의 말미에 고든(게리 올드만)이 배트맨에게 내미는 조커 카드를 내미는 순간, 묻혀 있던 야심이 강렬하게 드러났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팀 버튼이 유아적인 악몽처럼 채색한 <배트맨>시리즈의 세계관과 평행한 지점에서 자신만의 치밀한 소묘를 채워 넣는다. 만화적인 양식을 배제하지 않되 완벽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재창조해냈다. 어쩌면 좀 더 논리정연하고 개연성이 확고한 반도체적인 히어로 무비를 완성시키고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배트맨 비긴즈>가 그러했듯 <다크 나이트>는 그가 슈퍼히어로 만들기의 야심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는 초현실적 비범함으로 무장한 영웅의 슈트 안에 웅크린 인간의 내면심리를 탐구한다. 시선은 점점 정치로, 사회로, 세상으로 확대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인간에게 달렸다. 인간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배트맨의 뒷모습처럼 영웅은 점점 외롭고 고단해진다. 배트맨은 과연 그 고단함을 견딜 수 있을까. 브루스 웨인은 잠들 수 있는 밤을 맞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고 이 세계는 영웅을 보존할 수 있을만한 그릇이 되는가. 이는 과연 촛불이 어둠을 밀어낼 수 있는가라는 고민처럼 힘겹지만 현실에 발붙인 이들이 지녀야 할 절박한 물음이다.
일렬로 늘어선 폰(pawn)을 전진시킨다.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동선이 확보된다. 그 사이를 비숍(bishop)과 나이트(knight), 룩(rook)이 파고들어 적진을 유린한다. 결정적인 순간, 순식간에 퀸(queen)이 적의 폐부로 돌진한다. 상대말을 하나씩 쓰러뜨리고 때론 자신의 말을 미끼로 던져 허를 찌른다. 멀리 선 킹(king)을 향해 포위망을 형성하고 동선을 조인다. 더 이상 오갈 때 없는 적진의 킹을 쓰러뜨리며 외친다. 체크메이트(checkmate).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하, <눈눈이이>)는 일종의 체스판을 구상하듯 만들어진 영화다. 말을 움직여서 공간을 만들고, 그렇게 마련된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전략적 동선을 그려 넣는다. 마지막 한 수에 다다르기까지의 밀고 나가는 전략은 그 와중에 발생하는 빈 공간의 변수까지도 철저하게 배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판을 읽는 지능적인 두뇌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상황을 전진시키는 두둑한 배짱이다. 지능적인 복마전을 팽팽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을 움직이는 이의 배짱도 두둑해야만 한다. 손실조차도 차익으로 역전시키는 탁월한 전술과 냉정한 판단력은 게임을 지배하는 법칙과 다름없다. 결국 중요한 건 게임을 구사하는 유저의 능력이다.
카체이싱의 박진감과 스피디한 전개로 현금수송차량 탈취과정의 흥미를 돋우며 시작되는 <눈눈이이>는 시작부터 범인들의 몽타주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는 사건의 양 축이 되는 범인과 형사의 구도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그들의 대결양상을 한껏 살리겠다는 의도를 지닌다. 결국 그 구도는 과연 이 양상이 어떻게 끝맺음을 낼 것인가에 관심의 무게를 얻는 방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 와중에 물음표가 하나 얹혀진다. 판을 구성하고 패를 돌리는 안현민(차승원)은 그 게임에 의도적으로 백반장(한석규)을 개입시키며 판을 키운다. <눈눈이이>는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결을 다룬 게임의 묘미를 살리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두 캐릭터의 비중은 사실 한쪽으로 이미 치우쳐 있는 것과 다름없다. 안현민의 의도는 <눈눈이이>에서 중요한 키워드다. 결국 두 캐릭터의 격돌양상이 캐릭터에서 발산되는 에너지의 세기와 달리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건 애초에 캐릭터에게 주어진 능력치의 양상이 불공정했기 때문이다.
게임을 설계한 안현민이 체크메이트를 외치고자 하는 대상은 그의 감춰진 사연을 통해 형태를 드러낸다. 결국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결구도는 <눈눈이이>의 맥거핀과 다름없다. 문제는 그것이 동등한 캐릭터의 대비를 갖추지 못한 탓에 맥거핀의 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굳이 동등해야 할 의무는 없다. 차라리 <눈눈이이>가 안현민을 위해 백반장을 소모시키는 영화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의도한 게임의 묘미는 캐릭터의 대비가 느슨해진 덕분에 긴장감을 서서히 상실한다. 이는 결국 영화가 의도한 목적성에 이도 저도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활력적인 범죄스릴러의 구조를 지닌 전반부가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느와르적 감수성을 머금으며 느릿느릿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형태의 변질과 함께 클라이막스도 손상된다.
애초에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립구도가 선악의 구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란 점은 <눈눈이이>의 특별한 묘미를 발생시키는 지점이었다. 형사와 범인이라는 공식과도 같은 구조관계에서 벗어나 두 캐릭터가 서로를 의식하고 상대의 우위에 서려는 사소한 욕망의 대결구도가 <눈눈이이>의 성패를 가늠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눈눈이이>는 스스로가 내세운 게임의 법칙에 충실하지 못한 채 일방적인 체크메이트를 위한 구색만을 차린다. 다만 외모만으로도 인상적인 두 캐릭터가 펼치는 신경전의 양상과 초반부 현금차량탈취씬을 비롯해 주요한 사건이 발생되는 굵직한 시퀀스의 연출력은 <눈눈이이>가 지닌 절반의 성취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위장된 게임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흥미를 반감시킨다. 일방적인 게임은 아무래도 재미없는 법이다. 게다가 그 게임조차도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의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위장전술에 불과하다. 그 말미에 다다라서야 이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가 주는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단 그것이 배신감의 형태로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나마 영화가 마지막까지 일정한 동력을 발생시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두 배우의 힘있는 표정덕분이다.
시어머니는 말한다. ‘남편 군대 보내놓고 노래가 나오나?’ 친아버지도 말한다. ‘한 번 시집갔으면 죽어도 그 집 귀신이다.’ 순이(수애)는 그저 묵묵히 듣는다. 남녀의 관계질서가 군대의 위계질서만큼이나 일방적이던 시대상이 순이를 둘러싼 언어들만으로도 뼈저리게 감지된다. 사랑하지 않는 남녀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맺어지는 것이 대수롭지 않던 시절, 순이는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를 즐겨 부르곤 한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순이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절절한 가사는 순이의 현실과 지극히 동떨어진 낭만이라 기이하다. 베트남으로 향하는 순이의 ‘남편 찾아 삼만리’ <님은 먼곳에>는 순이가 즐겨 부르는 ‘님은 먼 곳에’가 대변하는 그녀의 본심을 찾아가는 로드무비다. 결말부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궁극적 야심을 엄폐한 채 서사를 전진시키는 <님은 먼곳에>는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제가 사회와 가정의 기저를 완벽하게 억누르던 대한민국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베트남에서 남근 지배적 체제의 졸렬함을 착실하게 구현함으로써 그것의 정곡을 찌른다.
밴드가 꾸려지고 공연이 펼쳐진다는 공통분모덕분에 <님은 먼곳에>는 일찌감치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의 계보를 잇는 이준익 감독의 음악3부작이란 꼬리표를 달았다. 물론 굳이 그 수식어를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원래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서 유희는 행위로써 작동하는 궁극적인 주제의식이나 다를 바가 없으며 <님은 먼곳에>에서도 그 기능성은 중시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유희적 행위, 즉 연주와 무대의 기능성이 내포하는 방향성을 염두에 둔다면 <님은 먼곳에>는 마땅히 전자들과 다른 지점에 서 있는 작품으로 구분돼야 온당하다. <님은 먼곳에>의 무대는 <라디오 스타>나 <즐거운 인생>이 꿈꾸는 것과 상반된 지점에 놓여있다. 다만 동전의 양면처럼 동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에서 무대가 이루는 정서적 효과란 비루한 현실로부터 남성들을 차단함으로써 그들을 위무하는 속성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현실에 선을 긋는 것일 뿐, 현실은 고스란히 그네들의 삶에 다시 적용된다. <님은 먼곳에>의 무대 역시 남성들을 위한 것이다. 남성성으로 무장된, 혹은 남성성이 강제된 군인 신분의 남자들 앞에서 홍일점의 밴드가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무대가 남성들을 위한 여성성의 소비에 주력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무대는 지난한 현실에 갇힌 남성들을 도피시키는 환각제로서 기능하기보단 그들을 둘러싼 현실을 환기시키는 각성제로서 작동한다. 도처에 깔린 죽음의 부호들에 짓눌리거나 혹은 때로 그것에 무감각해진 남성들에게 그 무대는 일시적으로 위안을 주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얼마나 참혹한 현실로 끌려왔는가라는 대명제를 각성시키는 계기로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 무대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남성들 스스로가 채워 넣을 수 없는 유희의 결핍성을 충족시키는 외부자들의 자리다.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 혹은 <왕의 남자>와 <황산벌>에서 발견되는 유희의 작용방향이 그것을 작동하는 주체를 위한 위무적 기능으로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면 <님은 먼곳에>에서 그 기능성은 외부를 향한 것이며 그 주체는 오로지 무대의 홍일점인 순이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다. <님은 먼곳에>에서 이뤄지는 무대의 유희는 남성들에게 철저히 결핍된 것이며 그들이 이룰 수 없는 궁극의 판타지다. <님은 먼곳에>에서 베트남에 상주하는 한국남성들은 무대의 주체가 될 자격을 상실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음을 잘 안다. 그들이 베트남에 도착하는 순간, 그들에겐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는 속죄양이 발생한다. 폭력을 안고 개입한 외부자의 참전행위는 결과적으로 그 대열에 들어선 (한국)남성들에게 죄의식을 부여한다. 스스로를 척박하게 밀어 넣는 환경에 대항하는 유희는 그 땅에서 결코 이뤄질 수 없다. 그들의 목적은 베트콩 대장의 말처럼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전의 가치와 양심을 교환한 남성들의 졸렬한 역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남성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의식의 수렁에 내몬 셈이다.
결국 남성들이 상실한 유희의 영토를 수복하는 건 여성, 즉 써니로 이름을 바꾸고 무대에 오른 순이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들에서 비루한 남성의 뒷바라지를 하거나 암묵적으로 그들을 보살피던 모성적 배후는 <님은 먼곳에>에 이르러 자신들을 보호할 유희적 마지노선마저 상실한 남성들을 구원하는 여신으로서 유희마저 구현한다. <님은 먼곳에>는 결국 남성이 어떻게 여성으로부터 구원받아왔는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이준익 감독의) 신파적 지침이다. 베트남에 고립되어 스스로에게 도피처가 될 유희적 행위조차 박탈당한 남성들을 위문하는 순이는 매번 써니로써 무대에 올라 여신으로서 강림하고 그들에게 위안을 안긴다. 하지만 그 유희를 발생시키는 홍일점의 기능성은 때로 그 세계의 폭력성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시선으로서 작동하기도 한다. 눈 앞에서 사살당하는 베트콩 소녀 테러리스트를 바라보면서, 위문공연 중인 부대를 습격한 폭격 현장의 목격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들을 생포한 베트콩들이 미군으로부터 사살당하는 상황을 바라보며 순이는 베트남전의 폭력적 상황을 지켜보는 유일한 (대한민국) 여성의 시선으로써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순이는 위문공연을 통해 한국군의 죄의식을 덜어내고, 정만(정진영)을 비롯한 밴드의 일행을 노래로서 죽음의 수렁으로부터 건져낸다.
살육의 전장에 끌려오거나 스스로 걸어 들어간 남성들은 스스로를 폭력으로부터 방어할 유희적 자격을 상실한 채 끝없는 소모적 일상 속에서 죄의식에 노출될 뿐이다. 순이는 왜 베트남에 갔을까, 라는 질문의 답은 그 지점에 있다. 유일하게 베트남에 한국여성으로서 존재하는 순이는 단순히 그 전쟁을 관찰하는 시점으로써 뿐만 아니라 그 전쟁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 순이가 상길을 만나러 가는 여정은 순이를 변모시키고 그녀를 남성의 반려자로 간택된 여성에서 탈피시킨다. 동시에 그녀를 이용해 돈벌이에 나서려던 정만은 그 여정 속에서 목표를 상실하고 점차 자신의 비루한 욕망이 순이의 순수한 갈망과 대비됨을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유희를 수단으로 삼아 재물을 탐하는 남성의 졸렬한 욕망은 유희를 통해 남성들의 죄의식을 한 꺼풀 벗겨내는 여성의 순수한 진심에 감화되어간다. 비루한 남성들은 자신들의 욕망에 심취되어 스스로의 환경을 파괴하고 권리로부터 이탈하지만 결국 스스로 삭막해진 삶의 테두리를 여성의 풍만한 자비로부터 발견하고 자신의 내적 상처를 감내한다.
궁극적으로 <님은 먼곳에>의 엔딩은 그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자 도발적인 훈계에 가깝다. 그 돼먹지 않은 상황을 잉태한 남성의 같잖은 체제적 무력감을 여성의 작은 손길로 후려치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용서하고 구원한다. 순이의 손바닥은 과거로부터 계승된 남성권위에 종속 당한 채 무력하게 이끌린 비루한 남성성에 대한 질타이자 그 시대에 맞서지 못한 연민을 공유한 동병상련의 반려자를 향한 배려의 손길이다. 치열하게 베트콩과 대치한 군인들의 전장에서 순이는 무릎 꿇은 상길을 내려다보며 구세대의 가치관에 함께 맞서 연대적 미래를 구축하자는 무언의 격려로 그를 감싸안고 있다. 결국 유희가 거세된 남성들의 비루한 욕망의 터전에서 여성은 그들이 스스로 내친 유희를 복원하고 종래엔 구원하고 포용한다. 좀처럼 감정의 형태를 쉽게 드러내지 않아 되려 감정의 깊이를 구현하는 수애의 모호한 표정은 남성들의 적나라한 욕망의 터전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골고타 언덕의 예수처럼 성스러운 포용적 깊이를 드러낸다. 결국 모든 것을 착취함으로써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던 오만한 남성의 욕망은 여인의 작은 손바닥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남성 우위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자신의 앙상한 욕망을 합리화시키는데 급급했던 남성들은 결국 깊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유순하지만 강건한 여인의 자비심 앞에 스스로 용서를 빌고 구원을 얻는다. 그건 마치 자궁처럼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처럼 청명하여 고요하고 아름답다. <님은 먼곳에>는 한 여인의 풍요로운 자비심을 통해 전쟁터에 놓인 비루한 남성성의 군상을 대비시킨다. 이준익 감독의 새로운 전환점도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해묵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장수한 고금의 스테디셀러 '삼국지(연의)'는 아직도 여전히 인상적인 캐릭터와 박진감 넘치는 전장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연대적 사실에 허구를 기워낸 텍스트 사이마다 지략가들의 심리전과 호걸들의 무용담이 즐비하게 이어지는 ‘삼국지’는 이미 영화 제작자나 감독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매력적인 소스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서야 ‘삼국지’의 스크린 판본이 등장한 건 의지와 노력만으로 넘을 수 없는 현실적 제약-기술적인 한계와 연출적인 부담감-이 '삼국지'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치환하는 무리수의 장벽처럼 존재했던 까닭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선명한 환상을 덧씌우는 텍스트의 방대한 가능성을 포용할만한 이미지를 구현해내야 한다라는 것, 그건 잘해도 본전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웅장하고 비범한 이미지에 대한 상상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문장의 방만한 가능성을 실사로 증명하고 방대한 서사의 영역을 적절히 활용할만한 전략적 자질을 갖추기엔 시도적 선례가 부족했다. 그런 점에서 <적벽대전>은 최근 거대한 몸집을 위세등등하게 전시하는 중국 영화들의 고무된 자발적 시도에서 비롯된 기획에 가깝다.-그것이 외국자본의 투자를 통해 이뤄졌다 할지라도 그 형태적 성립을 야기시킨 근원이 엄연히 중국발 정체성을 두르고 있다는 점에서-
<적벽대전>은 광활한 서사 중 주요한 일부를 발췌하는 방식으로 ‘삼국지’의 세계를 스크린에 조명한다. ‘삼국지’의 3대 대전이라 불리기도 하는 ‘관도대전’과 ‘적벽대전’ 그리고 ‘이릉대전’ 중 골자 그대로 ‘적벽대전’이 발췌된 건, 그 사연과 동떨어진 이국에서도 ‘적벽가’라는 판소리로 그 사연이 변주되어 유행했을 정도로 뚜렷한 유명세와 무관하지 않다. ‘적벽대전’은 ‘삼국지’라는 실체적 환상의 대표격으로 내세울만한 가치가 확실한 부위이자 개별적인 사연 자체로 독자적인 자립성을 확보할만한 너비가 충분한 사례다. 또한 그것이 ‘삼국지’에서 삼국의 구도를 형성하는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작동시키는 전환점이 되는 전쟁이란 점에서도 적절한 시작이다. 물론 조자룡이라는 인물을 통해 삼국지의 세계관을 스크린에 그려낸 <삼국지: 용의 부활>(이하, <용의 부활>)이란 전례가 있었지만 그것이 또 한번의 허구를 가미한 삼국지 팬픽에 가까운 작품임을 염두에 둔다면 <적벽대전>이야말로 ‘삼국지’가 지닌 본래적 기운을 스크린에 온전히 투영하고자 하는 실제적 구현의 욕망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라 ‘삼국지’의 영화화로서 출발의 의미를 오롯이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후한제를 등에 업고 백만대군을 움직여 강남정벌에 나서는 조조군과 그에 쫓겨 신야성에서 도주하는 유비군이 맞닥뜨리게 된 장판파 전투를 상세히 다루며 <적벽대전>은 서서히 시동을 건다. <용의 부활>에서도 등장했던 이 장면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아두를 구출하는 조자룡의 전과를 묘사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전투로서의 양상을 묘사하는데 더욱 치중하려는 듯하다. 거울과도 같은 방패를 반사시켜 적의 기마대를 무력화시키는 전략과 함께 관우, 장비와 같은 용맹한 장수의 활약이 설득력 있게 묘사되며 전투의 양상을 세심히 다룬다. 게다가 수전으로 시작됐다 전해지는 ‘적벽대전’의 본래 전투적 상황과 달리 지상전을 끼워 넣으며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기 전, 격돌의 형태를 잠시 전시하는 <적벽대전>은 조조군을 유인한 유비, 손권 연합군이 지휘하는 후궁팔괘진의 거대한 형상을 스크린에 가득 채우며 영화적 스펙터클을 과감히 전시(하고 다가올 속편의 위세를 예고)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도 일당백 무예 실력을 지닌 맹장들의 괴력적인 육박전을 덧씌우며 전투적 쾌감을 활성화시킨다.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생동감 있게 묘사되는 후궁팔괘진의 위용은 본격적인 전쟁국면에 돌입하지 않아 전투씬의 비중이 떨어지는 <적벽대전>에서 단연 백미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별개로 전례 없는 이미지를 구현했다고 평가할만하다.
‘거대한 전쟁의 시작’이라는 부제처럼 <적벽대전>은 아직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지 않은 탓에-혹은 속편을 위해 최대한 몸을 사린 탓에- 전장에서의 육박전보단 전쟁의 구도를 완성시키려는 인물들의 심리전에 집중하는 양상을 보인다. 제갈량(금성무)과 주유(양조위)의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서 고전 원작에 비해 온화한 관계로 묘사되고 있다는 특이성이 발견되긴 하지만 캐릭터의 고유한 매력을 살리는데 최대한 충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특히 ‘곡조가 잘못 나오면 주량(주유)이 돌아다본다’라는 가사의 곡이 있을 정도로 음악에 정통한 풍류가였던 주유가 거문고를 타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또한 호걸로 이름을 떨친 선친-손견, 손책-의 뒤를 이었지만 그에 비견될만한 군주의 위엄을 증명하지 못한 탓에 갈등하는 손권(장첸)의 심리를 상세히 묘사한 건 <적벽대전>의 인물 해석이 단순히 묘사의 일환에 멈추지 않고 해석의 수위를 밟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캐릭터를 묘사함에 있어서 단순히 외모적인 환상을 배우의 얼굴로 치환한 수준에 머물지 않고 그 인물의 특성을 배려한 세심한 세공력이 돋보인다. 이는 다양한 인물들의 일장일단으로 메워진 ‘삼국지’의 매력을 <적벽대전>이 간과하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활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다만 절세미인이자 주유의 부인인 소교(린즈링)와 그녀의 누이 대교를 탐해 강동을 넘본다는 조조(장풍의)에 대한 거짓소문을 천연덕스럽게 발설하며 주유를 도발함으로써 오와의 연합을 성사시킨 제갈량의 간계를 <적벽대전>은 실제 조조가 소교에 대한 여색을 지니고 있음으로 묘사하며, 이것이 전쟁을 촉발시킨 계기의 원동력이라는 뉘앙스마저 남긴다. 이는 단순히 여색을 탐하고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서 조조를 한정 짓는다는 점에서 인물의 매력을 비좁게 만들고, 선악 구조로서 인물의 대비를 구축시키는 단순성의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오우삼 감독이 지닌 인물에 대한 편애가 캐릭터의 구현에 반영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할리우드에서 쌓은 짬밥의 결과가 <트로이>에 ‘삼국지’를 접합시키는 발상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벽대전>은 ‘삼국지’의 텍스트에서 비롯되는 이미지에 대한 환상을 최대한 반영한다. 외모 자체만으로 ‘삼국지’의 판본에 충실한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와 조조를 비롯해 <적벽대전>에서 주요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제갈량과 주유, 손권은 그 배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만으로도 호사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물론 주윤발의 주유 역이 무산된 건 통탄할 일이지만- 또한 전투씬의 묘사에 있어서도 거대한 너비와 세밀한 양상, 그 어느 쪽도 놓치지 않으려는 배려가 돋보인다. 물론 박진감 넘치는 전투로 러닝타임이 꽉 채워지길 기대한 관객이라면 본격적인 전쟁이 돌입하기까지의 서사에 충실한 ‘적벽대전’ 전반전에 해당하는 <적벽대전>이 다소 지루해질 여지가 있다. 하지만 거대한 위용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후반전에 대한 기대를 도모하기엔 손색이 없다. 게다가 캐릭터에 대한 환상에 충실하게 응답한 <적벽대전>은 그 나열된 이미지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먹고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게다가 본격적인 ‘적벽대전’의 묘미는 이제야 시작이다. 인물들의 심리전을 통해 전쟁이 이뤄지는 과정을 연환계처럼 단단하게 묶어가는 <적벽대전>은 그 본격적인 양상을 보기 위해 시간을 인내해야 한다는 고육지계를 감수하게 만들지만 이는 분명 기대감의 일환이라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전쟁을 부르는 동남풍은 마침내 불어올 것이고, ‘삼국지’의 골수팬이라면 분명 그 뜨거운 순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비스트)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를 (의도적으로) 연상시키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The good the bad the weird>(이하, <놈놈놈>)은 전자의 명성에 무임승차하고자 조합된 문자 나열의 결과물 따위에 불과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놈놈놈>을 마카로니 웨스턴(스파게티 웨스턴)의 동양적(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적) 변주라고 섣불리 규정해버리는 것도 탐탁치 않다. 일단 <놈놈놈>의 부분을 채우는 다양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듯한, 그리 낯설게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 낯익은 이미지들이 조합된 전체적 형태는 낯설게 입력된다. 이는 그 이미지들이 조합된 결과물이 하나같이 과도기적인 형태로 혼재된 채 무질서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까닭이다. 이런 시각적 이해는 그 당시 주인이 불분명했던 만주벌판의 지정학적 요건과도 맞물려 교묘하게 시대상과 연관되어 작동한다.
스스로 ‘만주 웨스턴’이라고 (홍보문구를 통해) 자처하는 <놈놈놈>은 서부극의 건조하고 황량한 정서를 만주벌판에 대입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만하다. 본래 조선의 국토였지만 일제강점기와 함께 반허공에 떠버린 만주벌판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은 독립군이거나 일제앞잡이,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아나키스트적 개인으로 생존한다. 마적단 두목으로 무리를 이끄는 박창이(이병헌)나 독고다이 도적질로 살아가는 윤태구(송강호), 그리고 현상금 사냥꾼으로써 그들의 뒤를 쫓는 박도원(정우성)도 돌아갈 곳을 잃은 채 그 자리를 떠도는 아나키스트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덕분에 역사적인 의식 따위도 그곳엔 부재하다. 그들에겐 잃어버린 국가에 대한 사명감보단 생이 붙어있는 현실의 돌파구를 찾아내는 게 더욱 큰 관심사다. ‘나라가 없어도 돈은 있어야지’라는 박도원의 대사는 그들의 욕망 너머에 담긴 허무적 정서를 관통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웨스턴 무비란 장르적 명칭을 허한 지정학적 배후에 무의식적으로 녹아있던 무질서의 개념을 역전시키는 설정이다. 웨스턴은 본래 정복자들로부터 시작된 사연이다. 초창기 웨스턴은 서부 개척이란 역사에 토착민이었던 인디언들의 야만성을 부각시키며 그들에 대한 공격적 행위를 개척정신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장르의 폭력성을 설득했다. 그 후, 웨스턴은 점차 인디언을 몰아내며 서부를 점령한 총잡이들의 이익 쟁탈전으로 심화되고 폭력성의 연출과 비열함을 가미하는 마카로니 웨스턴과 정복자들의 자기 성찰을 덧씌운 수정주의 웨스턴으로 진화해 나간다. 주인 없는-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입장에서 없다고 판단된- 땅에서 펼쳐지는 총잡이들의 물고 물리는 대결의 양상은 무질서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그 맥락이 발생한 지점은 결과적으로 외부에서 유입된 정복자들의 오만한 정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웨스턴의 정서적 기운을 함축한 <놈놈놈>의 만주는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놈놈놈>에서 정서적 굴곡을 형성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망국의 자손들, 조선인이다. 만주는 일본 제국주의의 정복자들에게 국가를 빼앗긴 조선인의 망향지정이 서린 공간이다. 물론 그곳이 다양한 군락을 이룬 만주족들의 터이기도 하겠지만 <놈놈놈>의 주요맥락이 조선인 신분의 캐릭터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사안은 논외의 사안으로 간과될만하다. 사실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지니고 있었던, 혹은 그것이 응당 그러한 것이라 믿어지던 일련의 고정관념은 사실 그것을 잉태한 이들의 무의식에 정복의 역사를 합당하게 바라보는 관점이 개입된 까닭이다. 스스로 웨스턴을 표방한 <놈놈놈>은 그것을 의식했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웨스턴의 세계관이 지니고 있던 어떤 고정관념을 타파한 꼴이 됐다. 이는 <데어 윌 비 블러드>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이 공간성의 테두리로 잔존하거나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처럼 완전한 시대적 공간성으로 확보되는, 혹은 <3:10 투 유마>와 같이 활극의 요소를 가미한 자기 복제의 양상과는 확연히 판이한 꼴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놈놈놈>은 장르의 중심지대를 이양함으로써 장르의 한계를 이탈할 수 있다는 역설적 가능성을 시사한다. 애초에 영웅주의적 공식을 탈피한 마카로니 웨스턴의 시작이 미국 서부의 입지조건을 벗어나면서 형성됐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제목에서 명명된 세 명의 ‘놈’은 트라이앵글을 이루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구도를 형성한다. 캐릭터 삼각편대 구도 안에서 발생하는 빈번한 충돌은 활극의 스펙터클로 구사되며 이에 일제강점기 만주의 시대상과 신구가 맞물린 과도기의 이미지가 중첩되며 <놈놈놈>을 도가니탕의 신세계로 내몬다. 물론 노골적인 결말부의 삼자구도까지 확인하고 나면 전체적인 영화적 설정은 분명 세르지오 레오네의 그것과 접점을 이루는 면모가 다분함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놈놈놈>에서 실제를 구현하는 골격의 이미지가 아니라 가상적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한 기본적인 소스의 출처에 가깝다. 중국 대륙과 러시아 연해주, 제국주의 일본, 그리고 조선의 유랑민까지 다국적의 인간들이 혼재해있으며 말과 오토바이가 공존하는 신구 문명의 발전적 과도기가 혼탁하게 얽힌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한 <놈놈놈>은 일제강점기 만주의 과도기적 이미지를 적극 차용한 시대극에 근접해 있다. 물론 그것 역시 사실적인 시대적 모사(模寫)로서가 아닌 전반적인 영화적 디테일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산재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놈놈놈>은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활극적 모험담으로 규정될만한 것이다. 시대상과 지역성을 기초로 융합되어 가공된 영화만의 특수한 이미지들은 실제 연대를 가늠하되 현실적 시공간을 망각하게 만든다. 동시에 탁월하게 세공된 스타일을 자랑하는 캐릭터들이 펼쳐 보이는 활극의 동선은 제각각 오락적 반경을 확장해나간다. 대립적 갈등의 심리 묘사보단 외부적 충돌의 파괴력을 묘사하는 것에 중점을 둔 대결양상의 화려함도 이를 보탠다. 박창이와 윤태구, 박도원이 처음으로 접점을 이루는 기차 탈취 씬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발생하는 박진감은 윤태구와 박도원이 손을 잡고 박창이의 무리와 대결하는 시가지 총격씬을 비롯해 크고 작은 액션 시퀀스를 점층적으로 나열한 뒤, 후반부 평원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추격전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현란한 동선을 쫓는 필사적인 트래킹 샷과 거대한 평원을 스펙터클하게 펼쳐 넣는 부감 숏 등 장면을 효과적으로 비추는 구도적 능숙함과 고난이도의 액션에 만화적인 연속성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카메라 워크의 민첩한 노력은 <놈놈놈>의 세련된 이미지를 완성하는 가장 큰 공신이자 탁월한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쟁글거리는 기타 선율과 리드미컬한 퍼거션으로 채워진 남미 계열 멜로디와 일렉기타와 신디사이져음을 대거 차용하며 현대적 감각으로 복기된 웨스턴 풍의 음악으로 채워진 사운드트랙도 장면과 결착한 순간마다 절묘한 시너지를 발산한다.
물론 드라마상의 맥락이 드물게 느슨해지는 경향은 존재한다. 세 명의 주요 캐릭터가 격돌하고 다시 흩어지는 반복적 이야기 구조는 방대한 스케일만큼이나 산재한 조연들과 함께 개별적인 동선에서 빚어지는 각자의 사연을 크고 작게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종종 팽팽하던 실이 느슨해지듯 풀려나가는 경우가 발견된다. 크고 작게 강약의 강세를 반복하듯 진행되는 내러티브의 흐름에서 강약의 간극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발생하는 경우에 종종 발견되는 면이라 할 수 있다. 전후 구조에서 전반부의 세기가 강했을 때, 상대적으로 후반부의 세기가 약할 경우 격차가 크게 느껴지는 이치다. 게다가 <석양의 무법자>를 완전히 본뜬 듯한 결말부의 설정은 그 의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아챌 경험의 기반이 없는 관객에게는 지독한 허무주의로 인식될 위험성도 분명 존재한다.
전반적으로 캐릭터의 역할 배분은 배우의 능력(?)마저도 고려한 듯 적절하게 안배됐다. 특히 입담을 자랑하는 송강호는 언제나 그렇듯 발군이며 가장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캐릭터 박창이를 연기한 이병헌은 자신의 역량과 노력을 보태며 철저히 캐릭터에 몰입한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세 캐릭터 중 가장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박도원 역을 맡은 정우성의 이미지를 능숙하게 활용한다. 영화 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화려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박도원은 심리적 내면을 깊게 드러내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놈놈놈>의 세련미를 구축하는 전반적인 포석으로써 날고 뛰며 겨눈다. 물론 캐릭터의 갈등 지점이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한다. 중반부부터 형태를 드러내는 윤태구를 향한 박창이의 집착은 후반부에서 의문을 명확히 해소하지만 박도원이 다소 의아하게 박창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이유는 마지막까지 명확하지 않다.-단지 좋은 놈이라서?- (등장 자체만으로도 인상적인 감상을 부르는 배우들로 이뤄진) 캐릭터의 삼각관계가 역할에 맞아떨어지는 이미지의 구도를 형성하며 일정한 상승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은 확실한 묘미를 부여하지만 그 구도의 결속력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은 지적될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놈놈놈>은 단연 즐길만한 여지가 풍부한 오락영화이자 일정한 수확을 얻었다고 여겨도 좋을법한 장르적 시도의 결과물이라 평가할만하다. 동시에 김지운 감독 특유의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전체적인 미장센과 적절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연출력, 확실한 몰입도를 선사하는 인상적인 액션의 응집력은 분명 수훈이다. 과거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고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기대를 모았던 몇몇 대작들의 초라한 결과물과 비교했을 때 <놈놈놈>의 성과는 더욱 뚜렷해진다. 새로운 소재에 도전하는 과감성과 함께 탄탄한 연출을 통해 정석적인 성취를 거둘 줄 아는 방식은 분명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놈놈놈>은 김지운 감독 본인의 말대로 ‘걸작'이나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만큼은 분명 간과할 수 없는 흥미로운 영화임에 분명하다.
단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에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카운터페이터>는 분명 그 질문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저 물음표를 흡수하는 답변이라기보단 튕겨내는 반문에 가깝다. 인간은 살아남는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여기에 의미를 좀 더 보태보자. 인간이라는 존엄성이 완전히 짓이겨지고 삶이 형태로써의 껍데기만으로 남겨진 순간조차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이토록 많은 질문을 얻었지만 여전히 대답을 얻을 수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 나열된 질문들은 영화가 유도하는 것들이다. 영화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생존의 도구로 몰락한 인간의 삶을 통해 그 존재적 가치에 대한 물음을 끌어낸다.
해변가에 앉아 있는 사내가 보는 프랑스어 신문엔 종전을 알리는 기사가 1면을 장식하고 있다. -La Guerre est fine.(The War is over.)- 과묵한 사내의 눈엔 사연이 서려있고, 말 대신 내뿜어지는 담배연기는 흐릿한 잔상처럼 흩어져나간다. 1936년, 베를린의 술집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사연은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위조지폐 제조 실력을 지닌 살로몬 소로비치(카알 마르코빅스)가 유태인이란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 뒤, 그 곳에서 어떻게 생을 연명했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처럼 담고 있다. 동시에 이는 파운드화와 달러의 위조지폐를 제조하고 적국인 영국과 미국에 유통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려 했던 나치의 ‘베른하트 작전’이란 실화의 재구성이기 하다. 세계 최대의 위조지폐 사건이라 꼽히기도 하는 ‘베른하트 작전’은 유태인 수용소에 수감된 유태인을 대거 인력으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위조지폐범으로 잡혀 유태인 신분이 탄로나 수용소로 끌려온 뒤 노역에 시달리던 살로몬은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삽과 곡괭이 대신 붓과 팔레트를 들게 된다. 그러던 중 악명 높은 작센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돼 절망에 빠진 그는 자신을 체포한 헤르조그 소령(데비드 스트리쏘우)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나치의 공작수행을 위한 위조전담반의 책임자로 복무하게 된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돈 안 되는 예술보단 돈 되는 불법행위에 골몰했던 살로몬에게 재능은 그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통용되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생존 그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두던 살로몬은 수용소에서도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서 그림 실력을 드러냈고, 자신의 장기인 위조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삶을 연명하는 유용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지스탕스 출신이자 인쇄 기술자인 그의 동료인 브루거(오거스트 디엘)는 그들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에 불복함으로써 그들에게 저항하려 한다. 결국 그 사이에 놓인 살로몬은 갈등과 함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머무는 위조전담반의 수용공간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수용소에서 유일한 안식처다. 하지만 그곳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위배(圍排)됐을 뿐,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다. 수단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질 때, 그들에게 삶의 여지는 없다. 위협에 굴복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찰나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저항이 종전에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브루거의 주장은 옳은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그 선택이 전체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깊은 고민과 갈등을 부른다. 죽음과 직면한 이들은 오히려 죽음에 맞서는 것이 만만찮다. 생존과 가장 동떨어져 죽음과 대치한 순간, 생의 욕구는 더욱 강렬해진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도 살고 죽음의 문제가 더욱 가깝다. 나치의 체제하에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감했던 유태인들에게 그 당시 삶이란 매일같이 아득해지는 것이었을까. ‘오늘 총살되느니 차라리 내일 가스실에 가겠어’라는 살로몬의 말처럼 그들에게 삶이란 단 하루의 연장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최소한의 단위적 연장을 통해서 삶에 대한 의지도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카운터페이터>는 최소한의 단위개념으로 몰락한 삶이 어떤 방식으로 생존의 의지를 되새기는지, 그리고 그 국지화된 삶이 어떤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되짚어나가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파괴되고 삶의 의미가 유린당하는 순간 속에서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건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욕구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가스에 대한 공포에 예민해지고, 결핵을 앓는 동료를 위해 가까스로 약을 마련한 찰나 총에 맞아 죽는 동료를 목격하는 그들의 삶에 인간의 고결한 가치관 따위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공산주의 체제의 동독을 배경으로 한 <타인의 삶>과 나치 유태인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카운터페이터>는 강압적 체제 안에서 연명하는 인간의 삶을 들춘다는 점에서 교집합을 이룬다. 하지만 전자가 짓눌린 삶을 온전히 펼쳐 원형의 가치를 복원하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짓눌린 채 납작해진 삶의 처참한 몰골 안에 잔존한 일말의 가치를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그 차이는 선택의 불가피성을 통해 발생한다. <타인의 삶>이 체제를 구성하는 가해자의 깨달음으로부터 의미를 채취한다면, <카운터페이터>는 체제에 수용 당한 피해자의 행위 그 자체가 의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자신의 삶을 이루는 공간에 은닉하는 지배자 계층인 반면, 후자는 주어진 공간 속에서 감시 당하는 피지배자 계층인 까닭이기도 하다.
자신들을 둘러싼 수용소의 벽이 무너지고 같은 유태인의 총부리에 위협당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같은 유태인 수용자임을 밝히기 위해서 또 한번 사력을 다한 뒤에야 온전한 평화를 체감한다. 죽음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 벽 너머 수용소의 모습은 그들의 삶이 어떤 공포로부터 협박당하고 있었는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벽 너머에서 문득 들려오는 총성과 절규로 굳어진 그들의 표정은 평화롭게 위장된 일상 속에 잠재된 공포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생에 대한 의지를 더욱 간절하게 끌어당긴다. 실존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고 그 가치가 희미해지는 찰나에도 생존에 대한 의지는 더욱 짙게 드리운다. <카운터페이터>는 죽음에 직면했던 자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비출 뿐, 그에 대한 가치를 되묻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도, 기쁨조차도, 그 너머에선 부재한다. 그저 삶이 지속될 뿐이다. 추억으로 남지 못할 상흔 같은 기억을 떠안은 채 지속될 그들의 삶은 그저 살아남았다는 위안을 통해 다시 오늘을 버티며 생존해나갔을 것이다. 동시에 생의 의미는 그렇게 살아남아야만 되물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 미국의 동시상영관에서나 줄창 틀어대던 싸구려 B급 영화를 현대에서 재현해보겠다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야심이 짙게 드리운 <그라인드 하우스>는 시종일관 농후한 장난끼가 가득하다. <데쓰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 그리고 4편의 페이크 예고편으로 이뤄진 종합세트는 시대를 역행하는 이미지와 내러티브로 채워져 있다. 흔히 말하는 오늘날의 웰메이드 영화는 상극에 가깝다. 맥락이 무성의한 서사 구조와 시종일관 필름의 훼손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미지, 게다가 중간부분을 날려먹었음을 당당하게 알리는 미싱 릴(missing reel)까지, 연출된 저속함과 위장된 열악함이 가득하다. 먼저 국내에서 개봉된 <데쓰 프루프>와 마찬가지로 <플래닛 테러> 역시 고의성이 다분하게 단연 후진 완성도를 자랑한다.
<데쓰 프루프>의 짝패답게 <플래닛 테러>는 적나라한 싸구려 유희를 있는 힘껏 발산한다. 다만 페달을 밟듯 체감속도를 높여나가는 <데쓰 프루프>와 달리 <플래닛 테러>는 부지런히 스텝을 밟는 움직임으로 스태미나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상황에 대한 논리적 유추를 조롱하듯 <플래닛 테러>는 그저 기저에 깔린 상황들을 두서없이 풀어놓고 마냥 떠들어댄다. 사건이 형성될 뿐, 그것이 어떤 원인에서 비롯됐으며 어떤 근거로 진행돼나가는가라는 상세한 논리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짐짓 모른 척 잡아다 놓고 시치미 딱 떼듯 진전시켜나갈 뿐이다. 왜 저것이 저 자리에 놓이게 된 건지, 대체 저 사람의 능력이 어디서 발생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적 관점을 지속한다면 스스로 자폭할 가능성이 크다. <플래닛 테러>는 그저 영화가 깔아놓은 난장판을 의식 없이 즐겨야만 합당한 이벤트에 가깝기 때문이다.
스스로 수준 이하를 표방하지만 엄밀히 살피자면 <플래닛 테러>는 영리한 셈법으로 다양한 감정적 체험을 유도하는 수준 이상의 오락물이다. 불현듯 뭔가 튀어나올 듯한 상황을 통해 가열된 긴장감은 강도 높은 고어적 잔혹함을 통해 폭발되기 일쑤지만 긴박해 보이는 상황과 정면으로 대치된 도전적인 유머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잔혹성을 바탕으로 한 긴장감과 그런 상황을 배반하듯 촌티 날리는 유치함을 빙자한 유머감각은 <플래닛 테러>를 이끄는 평형감각에 가깝다. 물량 공세를 아끼지 않는 총격씬과 함께 액션의 화력도 단연 화끈하다. 또한 <데쓰 프루프>를 통해 이미 한차례 체험한 관객도 있겠지만 스크래치가 난무하고 화질의 상태를 극악하게 조작함으로써 ‘그라인드 하우스’의 체험을 이색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플래닛 테러>의 싸구려 유희에서 화룡정점을 이루는 코스는 포스터부터 눈길을 끄는 체리 달링(로즈 맥고완)의 아크로바틱 액션이다. 인간형 범용결전병기까진 아니지만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포스를 뿜어내는 기관총 다리로 무장한 관능적인 그녀는 단연 <플래닛 테러>의 최종병기다. 단지 고고댄서였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화려한 몸놀림을 보일 수 있는가, 다리에 장착된 기관총이 어떻게 자유자재로 발사될 수 있는가, 란 의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 황당한 액션에 온몸으로 호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능청스럽게 멀둔 중위 역으로 등장해 흉물(?)로 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브루스 윌리스와 냉정한 의사지만 의처증이 심한 싸이코 근성을 지닌 윌리엄 박사 역의 조쉬 브롤린, 그리고 자신의 성기가 녹아 내리는 와중에도 혐오스럽게 섹스에 집착하는 광기어린 연기를 펼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특별한 출연까지, 배우들의 헌신적 열연은 <플래닛 테러>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특별한 카드로서 제각각 유효하다.
<플래닛 테러>는 지독하게 고의적이지만 명백히 순수한 의도를 담고 있다. 농염한 스트립 댄서의 전신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떨어지는 앵글과 찢겨지고 터져나가는 인간의 육체를 정면에서 과감하게 비추는 샷이 말해주듯 <플래닛 테러>는 지극히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을 거리낌없이 비추고 이를 통해 직설적인 유희적 욕망을 숨김없이 들춘다. 명품을 표방한 싸구려가 널린 판국에서 <플래닛 테러>는 싸구려 유희의 정체성을 과감히 드러내고 스스로 즐긴다. 당신은 그저 이 순수한 싸구려 유희 앞에 앉아 염치 따윈 잊고 낄낄거리다가 영화가 끝난 뒤, 점잖게 극장을 빠져나가면 그만일 뿐이다.
TIP_<그라인드 하우스>에는 4편의 페이크 예고편이 함께 담겨있다. 하지만 이 중, 로드리게즈 감독이 연출한 <마쉐티>만이 <플래닛 테러>의 인터내셔널 버전에 포함됐을 뿐이다. 현재 <데쓰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 인터내셔널 버전을 수입한 '스폰지'에서도 나머지 세 개의 예고편을 정식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결국 국내 관객에게 공개되지 못한 나머지 세편의 예고편은 미싱 릴(Missing Reel)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발빠른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머지 예고편을 이미 봤거나 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겠지만. (무비스트)
세상에 그를 제압할 상대는 없다. 총알조차도 그에겐 가벼운 쇳덩이에 불과하다. 그는 천하무적이다. 하지만 이 남자, 나태하다. 질서의식도 없다. 언제나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다니는 그는 도시의 필요악이다. 악당이 나타나도 그는 길가 벤치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잠을 자고 있다. 악당을 물리쳐야 한다는 꼬마에게 등 떠밀려 현장으로 출동하지만 그는 시민들의 안전이나 도시의 미관 따위를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그의 영웅놀이가 LA를 위협하고 있다고, 그가 차라리 뉴욕으로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시민들은 푸념과 질시를 보낸다. 그 남자 핸콕(윌 스미스)은 그래도 술병을 따고 있다.
<핸콕>은 기존의 히어로 무비들과는 개념이 다르다. 핸콕은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히지도 않으며 신분을 가리기 위해 평범남과 히어로의 이중생활을 고민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술병을 들고 다니는 고주망태가 되어 음주비행을 일삼고 기분 내키는 대로 도시의 기물을 파손하는 꼴통(asshole)일 뿐이다. 물론 그가 도로에서 총기를 난사하며 질주하는 자들을 제압하거나 철도 건널목에 멈춰선 차에 탑승하고 있는 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철도를 막아서는 등, 나름대로의 능력을 발휘하긴 하지만 그에 대한 기회비용이 너무나 막대한 실정이다. 핸콕은 악당들로부터도, 시민으로부터도 천대받는 유례없는 초인이자 사회적 필요악이다.
기존의 히어로 무비의 관습을 뒤엎는 설정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다. 제각각 슈트를 갖춰 입은 초인들은 자신의 이중생활에 번뇌하거나 마이너리티로써의 정체성에 고민하곤 했지만-최근 <아이언맨>이 이례적인 사례를 남기긴 했지만- 술병을 들고 날아다니는 핸콕에게 그들은 쫄쫄이 타이즈를 입은 호모에 불과하다. <핸콕>은 히어로 무비의 관성에 짓눌린 무게감보단 가십거리를 양산하는 셀레브리티의 가벼움에 가깝다.핸콕이 우연히 목숨을 구한 홍보전문가 레이(제이슨 베이트먼)가 핸콕에게 ‘당신은 사랑받아야 한다’며 이미지 메이킹 제의를 주고 핸콕이 결국 이를 수용하는 순간 <핸콕>이 지닌 설정의 가벼운 묘미는 확실한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꼴통으로 불리던 핸콕이 제멋대로 웃자란 버릇을 억제하며 자숙을 하던 중, 결정적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레이가 준 슈트를 입고 매너있게(?) 악당으로부터 도시를 구하는 순간 그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탈바꿈되고 인생역전에 성공한다. 찬사 받는 영웅의 탄생 과정은 흡사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는 듯한 묘한 뿌듯함을 남기는 동시에 아이러니한 위트를 형성시킨다. 동시에 이는 스타 기획 시스템 속에서 사고뭉치 셀레브리티가 국민스타로 거듭나는 이미지 메이킹 과정과도 흡사하다.
하지만 설정의 묘미가 정점에 달하는 순간, 약발도 떨어진다. 기막힌 설정을 통해 흥미를 유발하는 것에 성공했으나 그건 에너자이저처럼 오래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발성 이벤트에 가까운 소재 덕분에 <핸콕>은 러닝타임을 유지시킬 땔감이 더 필요했다. 그 대안으로 자리잡은 것은 간단한 발상전환만으로 상승세를 유지했던 영화적 묘미를 순간 역으로 눕히는 셈이 됐다. 물론 의외의 캐릭터를 전복시키는 깜짝쇼를 펼치며 (스포일러 따위를 접하지 않은 관객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의 효과를 일시적으로 작동시키긴 하지만 그 역시도 약발이 오래가는 것은 아니다. 재치 있는 입담과 설정의 파격을 통해 버라이어티의 묘미를 펼치던 <핸콕>은 드라마로 연결한다. 랩뮤직처럼 리드미컬하던 재미는 점차 오페라처럼 장중해진다.
전후로 양분할 수 있는 내러티브 전환의 무리수와 함께 영화는 전체적인 흐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창세기 아담과 이브처럼 연인의 운명을 타고난 불사의 남녀가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의 비범한 능력을 중화시키는 덕분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운명적 비극을 통해 간절한 로맨스의 기운마저 내포하는 후반부는 개별적인 설정으로써 흥미를 유발할만한 사안이지만 기존에 <핸콕>이 지니고 있던 주요한 매력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핸콕이 선량해지는 순간, <핸콕>은 일정한 묘미를 잃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핸콕>은 삐딱하고 불량한 초인의 망나니 짓을 지켜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작품이었기에 그 설정에 발전적인 양상을 덧씌우지 못하는 이상, 영화적 효력도 거기서 끝날 공산이 컸던 까닭이다.
러닝 타임의 절반 가량을 꼴통 영웅 만들기 프로젝트에 할애한 <핸콕>은 나머지 러닝타임을 메우기 위한 대책마련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100분이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 안에서 그 설정을 효과적으로 지속시킬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실패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애초에 <핸콕>의 시나리오는 현재 완성본에 비해 조금 어두운 내용으로 전개됐다 한다.- 기존의 이미지를 포기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용두사미로 전락한 듯한 <핸콕>은 여러모로 아쉬운 기획물임에 틀림없다.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선전하는 윌 스미스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용두사미의 진수를 보여준 <나는 전설이다>의 뒤를 이어 <핸콕>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맞이한 셈이 됐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근원보다는 현상에 시선을 둔다. 사막을 헤매는 두 청년이 애초에 무엇을 향했는지(<게리>), 끔찍하게 총알을 난사한 소년들은 무엇을 겨눈 것인지(<엘리펀트>), 죽음에 대한 깊은 갈증을 느끼는 청년이 본래 지녔을 생의 의지는 어디로 증발한 것인지(<라스트 데이즈>), 그 모든 것은 중요치 않다. 그는 현실 뒤편의 어떤 근원 지점에 대해서 무신경하게 고개를 한번 돌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바라볼 뿐이다. 잠시 일그러지거나 부서지고, 사멸했던 존재의 형상들이 그 예감을 털어놓기가 무색하게 다시 형체를 안온하게 회복하는 순간의 형형한 찰나를 재생시킨다. 그 과정 속을 걸어가는 젊은 육체들은 그 심약한 영혼에 죽음을 새겨 넣는다.
구스 반 산트는 그렇게 사(死)의 영역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한다. 그것은 카메라의 동선을 따라 걷는 현실적인 족적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대기 속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구체음악(具體音樂)의 초현실적인 혼돈으로 울려퍼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청춘은 죽음의 기억을 새겨 넣는 미완성 형태의 오브제(objet)로 영역화된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구스 반 산트의 전진을 위한 탐미적 공간이자 재생의 연결고리다.
파라노이드 파크(paranois park)는 청년들의 육체적 기운이 넘실거림과 동시에 무질서한 폭력성이 잠재된 공간이다. 동시에 그곳은 젊은 시절의 규정될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처럼 자리를 찾지 못하고 흔들리듯 활강과 하강을 거듭하는, 중력에 저항하지만 속박될 수 밖에 없는 대지다. 그곳은 저항할 수 없는 성장의 인과 관계를 거부하려는 역동적인 몸짓들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스케이드 보드에 실린 움직임은 지정된 시간의 흐름 안에서 가속화된 편입의 상일 뿐이다.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짊어져야 할 성장의 고민은 <파라노이드 파크>의 벗어날 수 없는 이면의 진실이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성장의 서사처럼 소년들의 움직임은 가속화될수록 시간의 중력 앞에 무력할 뿐이다.
파라노이드 파크에 가자는 자레드(제이크 밀러)의 말에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알렉스(게이브 네빈스)에게 파라노이드 파크는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는 이상 낙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누구도 그곳에 갈 준비가 된 사람은 없다는 자레드의 대답은 표면적으로 파라노이드 파크는 어떤 자격을 요구하지 않은 평등한 땅이란 의미를 뜻하는 것 같지만 이는 거부할 수 없는 통과의례적 관례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파라노이드 파크는 알렉스의 삶을 장악하게 될 끔찍한 기억에 도달하기 위해 피할 수 없이 밟고 지나야 하는 운명의 문턱인 셈이다.
곡선 위를 미끄러지듯 구르는 스케이드 보드의 뒤를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슈퍼8mm카메라의 열악한 화면을 통해 이질적인 현실감을 부여 받는다. 현실에 불결한 잔상을 새기듯 얼룩진 화질을 선사하는 8mm카메라는 곡선의 역동적 동선을 쫓아갈 수 있는 유일한 카메라라는 점에서 되려 사실적이다. 이는 동시에 그 비현실적인 사실감이 그 영역의 허구적인 생동감을 표현하고자 하는 기교적 순수함으로서 활용된다. 공간적 정서를 끌어내기 위해 활용된 기술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역시나 완전히 성숙되지 못한 자의식의 흐름이 역동적 기운으로 표출되는 공간적 활기를 담아내기에 적절한 그릇이 된다. 또한 소년기의 충동적 본능과 욕구가 육체적인 움직임으로 소비되는 공간적 기운을 거칠게 담아낸 비쥬얼은 몽환적인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덧씌워져 비현실적 자의식으로 확장된다. 또한 소년의 사소한 움직임과 시선을 구현하는 슬로 모션에 음향 효과처럼 덧입혀지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은 잊혀지지 않는 소년의 경험에서 비롯된 심리적 혼란을 외부적으로 투영한 내면적 현상으로 관객을 유인한다. 관객이 바라보는 그 영화적 현상들은 결국 소년의 심리적 공황이 만들어내는 무의식적인 기질이자 자의식을 속박하는 고민을 통해 형성된 외부적 무관심이기도 하다. 소년의 세계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기억에 의해 외부적인 현상에 결계를 쳐놓듯 무신경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의 풍경은 소년의 자의식 속에서 몽환적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자질구레한 소음에 노출되기도 한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그렇게 현실과 비현실에서 방황하는 자아의 상을 오가며 비춘다. 알렉스는 그곳에서 소년기의 현실적 기운을 탐미하고 관찰하지만 그 현실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는 파라노이드 파크에 넘치는 젊음의 기운에 쉽게 동참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관망하고 현실의 상을 잠시 뒤로 밀어낼 뿐이다. 그 까닭은 소년의 작문, 즉 소년이 글로서 고백하는 어떤 사적인 기억을 거슬러 쫓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 기억은 영화적으로 관객에게 공개된다는 점에서 이미 열려있으나 영화 내부적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소년 스스로가 기억 속에 소진시켜버리는 닫힌 공간이기도 하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결국 소년에게 밀폐된 기억을 보관하고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불침범의 공간이자 관객을 방관의 영역으로 밀어넣어 공범으로서 동참하게 만드는 비선택적 동참의 영역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 기억은 죽음과 관련되어버린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자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탈의 경계선을 딛고 나아가려는 상흔의 반환점이다. 그 위에서 자가 분열되는 자기 위안의 변명처럼 소년의 혼란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순수했던 기질로부터 비롯된 혼돈과 이별을 고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그 순수했던 시절과 이별을 고하는 소년들의 끊임없는 저항적 몸부림이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어제가 될 오늘의 운명 위로 기억을 채워 넣는 분주한 발자취다. 그래서 파라노이드 파크를 비롯한 소년의 동선은 두 번에 걸쳐 각각 재현되고 재생되며 현실적 행동과 기록적 묘사로서 행위에 깃든 동선의 기억을 되짚어간다.
붕괴되는 가정의 기반 안에서 잠재된 슬픔을 떠안고, 성적 충만감을 갈구하는 이성과의 교제 속에서 덧없는 관계 지속의 의미를 되새기는 알렉스의 삶은 소년의 여린 감수성에 도피의 출구를 꿈꾸게 한다. 평등한 삶 밖에는 뭔가 있지 않을까? 내 사소한 고민과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지 않을까? 파라노이드 파크에 다다른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현실로부터 도피한다. 동시에 그 출구로 발을 디딘 소년은 평상시 부딪히던 일상적 고민을 과거로 밀어넣고 차원이 다른 끔찍한 죽음이 도사린 현실에 직면한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자 동시에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특별한 계기의 굴곡이다. 일상의 사소한 고민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소년의 출구는 동시에 만만하지 않은 또 다른 차원의 삶의 무게를 떠안아야 한다. 그래서 기억을 떠안은 공간의 반복적 재생은 같은 상황에 다른 중압감을 껴안고 되풀이된다.
물론 소년은 그 후에도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거듭되는 기억으로부터 달아나듯 현실을 전전해야 할 것이다. 고뇌의 무게감은 줄어들지라도 소년은 그렇게 기억의 공명 안에서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것은 후회라는 단어로는 충족될 수 없는 삶의 무게감. 결국 소년이 꿈꾸던 파라노이드 파크의 이상은 현실의 무게감을 덧씌운 채 소년의 세계를 상실시킨다. 기억을 태워버리고 현실의 무게감에서 달아났지만 그 순간, 더 이상 소년은 자신의 현실이 예전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소년은 자라나고 삶의 기억은 오늘에서 어제로 서서히 흘러간다.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우리는 어떤 시절로부터 서서히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 파라노이드 파크로부터 우리 삶은 그렇게 멀어져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