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버트(콜린 퍼스)는 어려서부터 심각한 말더듬이였다. 문제는 그가 사회지도층 혈통을 타고난 영국의 로얄패밀리였기에 종종 영국 왕실을 대표해서 국민들을 고무시킬 연설을 행해야 했다는 것. 부친이자 전왕인 조지 5세(마이클 갬본)는 이런 아들이 못마땅해 득달 같은 성화를 내곤 했지만 이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고쳐질 수 있는 버릇이 아니었다. 그의 자상한 부인 엘리자베스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 역시 남편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수소문을 해보지만 좀처럼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어느 날, 엘리자베스는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라는 언어치료사를 소개받고 그를 찾아간다.
<킹스 스피치>는 엘리자베스 2세의 부친으로도 잘 알려진 조지 6세의 자전적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영국 왕실의 전기적 사연을 다룬 <더 퀸>과 같이 근현대사의 사회적 격변 속에서 앙상한 전통적 상징성만으로 부지하고 있는 왕가의 딜레마가 반영된 드라마다. 그렇지만 <킹스 스피치>가 단순히 왕실의 궁 안에 카메라를 밀어 넣는, 일종의 르포적인 간접 체험으로서의 흥미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작품이라는 말은 아니다. <킹스 스피치>는 라이오넬 로그의 손자 마크 로그가 보관하고 있던 라이오넬의 일기와 서신에 담긴 조지6세와의 사연을 바탕으로 집필된 전기적 저서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말더듬이로서 연설을 두려워했던 조지6세, 즉 알버트의 고뇌에 주목하지만 그 고뇌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그의 곁을 지켰던 언어치료사 라이오넬과의 관계에 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는 작품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왕실의 권력은 무상한 옛말이 된 오늘날의 영국왕실에 남겨진 마지막 위엄이란 바로 역사적 정통성 자체다. “광대나 다름없어 졌다”는 조지5세의 말은 현대 영국사회에서 왕실의 자손들이 겪어내야 할 책임과 의무의 무게를 대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왕실의 갈등 속에서 연설을 하지 못하는 왕가의 자손이 느낄 강박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킹스 스피치>는 그런 현실 속에 자리한 왕가의 긴장과 그 속에 자리한 왕의 또 다른 긴장을 비추며 보다 입체적인 감정의 양상을 전달한다. 동시에 그 곁에 자리한 라이오넬의 개인적인 사연과 그를 두르고 있는 내외적인 환경을 세심하게 조명함으로써 영화가 품은 감정의 너비를 보다 풍요롭게 확장해낸다.
왕가의 권위 속에서 살아가는 알버트와 평범한 환경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라이오넬의 계급적인 차이는 두 인물의 관계에 갈등을 야기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계급적 차이를 뛰어넘어 끝내 서로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동료로서 관계적 발전을 이룬다. 왕실의 권위를 대변해야 한다는 의무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견뎌내는 알버트와 아마추어 배우로서 연기적 꿈을 포기하지 않던 라이오넬이 언어치료사로서 왕의 한계를 돕고 끝내 자신의 삶에서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 과정은 그 사연만으로도 흥미롭다. 이 유려한 사연은 고풍적인 영상과 유려한 문체, 안정적인 연출력으로 대변되는 영국 드라마의 전통 속에 녹아 든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왕위 계승의 격변을 겪은 조지6세가 그 모든 위기 속에서도 왕으로서 첫 번째 연설을 행하는 라스트 신은 서사적 흐름 속에서 서서히 피어 오르던 영화의 감정이 명료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계급의 장벽을 극복하고 친밀한 우정을 쌓아나가는 두 인물의 신뢰적 관계는 연설을 행하는 왕 앞에 서서 연설의 리듬을 조율하는 언어치료사의 모습을 비추는 우아한 이미지만으로도 명확하고 깊게 마음에 와 닿는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모든 출연진들은 훌륭한 악보를 탁월한 화음으로 소화해내는 명연주자들이다.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콜린 퍼스는 말더듬이라는 기능적인 연기를 완벽하게 완수해내는 동시에 캐릭터의 내면적 갈등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며 연주를 리드하는 솔리스트에 가깝다. 또한 범상치 않은 캐릭터를 거듭 연기해오던 제프리 러쉬와 헬레나 본햄 카터는 안정적인 연기적 리듬을 바탕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원숙하게 조율하는 앙상블을 선보인다. 가이 피어스와 마이클 갬본을 비롯한, 조단역 캐릭터들 역시 명확하게 제 음을 내며 연주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한다. 훌륭한 악보가 준비된 명연주자들의 공연. <킹스 스피치>는 저마다 좋은 소리를 내며 탁월한 화음을 이루는, 그런 영화다.
재앙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처럼 인간은 자신이 쌓아온 문명의 풍요로부터 추방당했다. 과거를 대변하는 앙상한 풍경들이 주검처럼 나뒹굴며 문명의 단절을 증명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재앙 아래, 삽시간에 스러져간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피폐한 삶을 연명하며 죽음을 향해 정처 없는 걸음을 옮긴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삶이란 무력하다. 그들에게 허락된 건 단지 남아있는 생명을 부지하는 본능뿐이다. 살아남았다는 말 자체가 비극이다. 희망은 완전히 증발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짐승들이 비틀거리며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곳은 이미 끝장난 세계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될 수 없는 곳이다. 그 세상에 남겨진 인간들은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 생엔 어떠한 의미도 없다. 단지 살아남았고 죽을 수 없어서, 혹은 죽을 용기가 없어서, 유효하지 않은 생이 하루하루 연장될 뿐이다. 마치 짐승과도 같이 그 삶엔 인간적이라 부를 만한 어떤 근거가 없다. 이미 인간적으로 살아가겠다는 노력 자체에 의미가 없다. 폐허로 내려앉은 문명의 지난 흔적들은 인간이 쌓아 올렸던 모든 역사를 거짓말처럼 되돌린다. 거대한 재의 기둥이 된 나무들은 하나씩 쓰러져가고 바다마저 잿빛으로 물든 세상엔 한기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돈다.
남자(비고 모텐슨)와 그의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그 끝장난 세계의 풍경에 에워싸인 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다. 세상은 끝났고, 그 끝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더 이상 공존을 꿈꾸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건축한 문명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약육강식이 도래한 묵시록의 밀림을 황폐하게 치장한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오래 전 사별한 부인(샤를리즈 테론)을 꿈꾼다. 이토록 피폐한 현실이 도래하게 된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건 오로지 꿈의 환각이다. 꿈에서 과거를 보는 남자는 현실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악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세상에서 선한 이가 되겠다고 남자는 아들에게 다짐한다. 스스로를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설명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말의 빛을 부여한다.
아이는 묻는다. “우린 착한 사람인가요?” 아버지는 답한다. “그렇단다.” 선악에 어떤 의미를 둘 수 없는 세상에서 아이는 선을 묻고 아버지는 선을 답한다. 희망을 꿈꾼다는 것이 불순한 세상에서 부자(父子)는 선을 꿈꾼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일말의 희망이다. 단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켜야 할 아들이 그 빌어먹을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발 남은 총알을 장전하기 망설이는 건 그 두 발의 총알이 자신과 아들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그 총알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 전에 자신의 아들부터. 그리고 그 전까진 살아남아야 한다. 불을 옮기는 사람으로써, 선의 방향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그 너머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럼에도 그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건, 불행히도 그 부자가 인간으로 태어난 덕분이다.
<더 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종말을 지나쳐버린 인간들의 껍데기만 남은 일상을 살핀다. 그리고 그 얇은 껍데기만으로 지탱할 수 없는 인간적인 무언가를 지켜나가는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단지 살아남았고,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선 누군가를 해쳐야 하고, 해치지 않기 위해선 굶주리고 죽어가야 한다. 스스로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말하는 부자는 남쪽을 향해 전진한다. 그 발걸음엔 어떤 의욕이나 야심이 없다. 그저 살아야 한다. 걸어도 걸어도 희망 없는 내일을 향해 살아나가서 전진할 뿐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살아간다는 의미를 환기시키고야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참혹한 풍경에서 몇 발치 벗어나 스크린을 응시할 누군가가 마음의 정화를 느끼게 된다면 그건 결코 우연이나 착각이 아니다. 하늘과 바다, 대지 구석까지 잿빛으로 가득한 세계는 되레 보는 이의 현재를 환기시키고 그 세계 속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부자의 전진을 통해 제 삶을 살필 것이다. 그 황폐한 세계 한가운데서 스스로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말하며 전진하는 부자는 볕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음습한 세상에서 입김을 내면서도 종래까지 인간적인 양심의 체온을 잉태시키고 유지해나간다.
그 참혹한 세계에서 진짜 생을 얻기 위해 생을 저버린 부인과 달리 아버지는 유령과 같은 생을 선택한다. <더 로드>는 생이 아닌 사(死)를 향한 로드무비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현세의 관념 따윈 온전히 증발해버린 곳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죽음을 고민한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생을 부지해야 할 덧없는 희망이다. 어쩌면 그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세계는 끝날 것이었다. 그건 부성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까운 생의 본능이자 속박이다. <더 로드>는 시작이 그렇듯, 끝에서도 어떤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아들은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세상은 여전히 잿빛으로 가득하고 그 잿빛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방향도 모르고 떠돈다. 그럼에도 <더 로드>는 그 참혹한 이미지 끝에 숭고한 감정을 전하고 마는 작품이다. 아이는 희망이고, 그 희망은 결국 세계를 떠돌지언정 그 희망을 이어나가려는 인간들의 선의는 작은 불씨를 살린다.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결국 그 모든 것을 목도한 이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원작에 나열된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풍경으로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묵시록의 장관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더 로드>가 구축한 이미지는 원작으로부터 연상되는 풍경의 자취를 따라 그려지고 나열된다. 사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에서 읽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생시키고 싶다는 매혹은 당연한 것이다. 유려한 비유가 간결한 문체를 따라 가볍게 걸어 나간다. 건조한 정서적 수면 아래 침전한 풍만한 감성이 떠오른다. 덕분에 그 매혹은 넘기에 만만치 않은 함정이다. 기능적으로 그 풍경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풍경 안에 담긴 내면의 심상마저 포착해내야 한다. 텍스트가 품은 방대한 심상의 너비를 구체화시킨다는 건 영토의 한계가 없는 상상력을 경계가 명확한 이미지에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걸작의 아우라를 풍기는 원작을 다른 방식의 장르적 대지로 치환한다는 건 위험한 도전이다. <더 로드>는 이미 반열에 오른 원작의 유려한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긴다는 점에서 폄하의 가능성을 품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더 로드>의 스크린은 마치 원작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한 도구와 같다. 영상에 앞서 활자가 묘사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단상을 품었던 관객이라면 분명 그 탁월한 재현 능력에 압도적인 감상을 얻을 수밖에 없다. 만약 원작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하여 <더 로드>에 좋은 평을 내릴 수 없다는 지적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이 있고, <더 로드>가 있었다. <더 로드>를 추켜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원작에 예속돼버린 것들이다. 그 황폐한 세계관의 디자인은 작가의 손으로서 이미 기록된 것의 증명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더 로드>는 원작과 비교해 낮은 평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더 로드>는 원작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작품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원작에 대한 존경심을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작으로부터 주어지던 막연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더 로드>는 분명 집요한 노력의 성과를 설득하고 있다. 원작을 뛰어넘는 성과를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라 할지라도 원작과 평행할 만한 장르적 변이로서 유용하다. 원작의 그늘 아래 매몰된 영화라기 보단, 변주보단 재현을 선택한, 야심의 영역이 다른 작품인 셈이다. 단지 원작에 대한 세밀한 재현에 그친 것이 아닌, 그 이미지가 둘러싼 세계관과 그 세계를 차지한 인물들의 정서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다. 묵시록의 장관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은 죽음의 대지 속에서 생을 찾아 떠돈다. 그러한 영화의 결과물을 보고 그 방식에 창의력이 없다고 불평만 늘어놓는다는 건 영화의 입장에서 분명 억울한 일이 될게다.
<더 로드>는 분명 비범한 작품이다. 걸작이라 불리는 원작의 유려한 활자를 장엄한 영상으로 치환한 <더 로드>는 비범한 텍스트의 위엄을 훼손하지 않는 이미지들의 나열만으로도 일단 성공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그 재현성이 어떤 진심을 담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보다 높은 평가가 가능하다. 원작의 비범한 양태를 훼손하지 않음과 동시에 그것이 품은 감정적 내면을 원작과 다른 판본의 틀 안에서도 온전히 전달해낸다. 텍스트를 통해 막연하게 짐작하거나 연상했던 이미지들이 구체적인 자리를 잡고 시선을 압도해낸다. 플래쉬백을 동원해 현재와 과거의 서사를 섞어나가며 원작의 서사를 미약하게 비트는 영화는 최대한 원작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되 그 영역의 자질을 훼손하지 않고자 창의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더 로드>는 절묘한 캐스팅이 영화의 팔할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뛰어난 묘사가 정서적으로 훌륭한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의 극한적 의지를 통해 진짜 산 사람을 치유하는 힐링 시네마다. 원작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가치를 폄하하는데 동원된다는 건 섭섭한 일임에 틀림없다. <더 로드>는 단순히 뛰어난 재현에 그친 영화가 아니라 그 재현적 이미지에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 고민한 작품으로서 성과를 전한다. 단순한 전시적 야심이 아닌 진심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풍경엔 원작에 대한 경의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이 서려있다.
남자(비고 모텐슨)와 그의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황량한 풍경에 둘러싸인 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다. 세상은 끝났고, 그 끝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더 이상 공존을 꿈꾸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건축한 문명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약육강식이 도래한 묵시록의 밀림을 황폐하게 치장한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오래 전 사별한 부인(샤를리즈 테론)을 꿈꾼다. 이토록 피폐한 현실이 도래하게 된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건 오로지 꿈의 환각이다. 꿈에서 과거를 보는 남자는 현실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악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세상에서 선한 이가 되겠다고 남자는 아들에게 다짐한다. 스스로를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설명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말의 빛을 부여한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원작에 나열된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풍경으로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묵시록의 장관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더 로드>가 구축한 이미지는 원작으로부터 연상되는 풍경의 자취를 따라 그려지고 나열된다. 사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에서 읽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생시키고 싶다는 매혹은 당연한 것이다. 유려한 비유가 간결한 문체를 따라 가볍게 걸어 나간다. 건조한 정서적 수면 아래 침전한 풍만한 감성이 떠오른다. 덕분에 그 매혹은 넘기에 만만치 않은 함정이다. 기능적으로 그 풍경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풍경 안에 담긴 내면의 심상마저 포착해내야 한다. 텍스트가 품은 방대한 심상의 너비를 구체화시킨다는 건 영토의 한계가 없는 상상력을 경계가 명확한 이미지에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걸작의 아우라를 풍기는 원작을 다른 방식의 장르적 대지로 치환한다는 건 위험한 도전이다. <더 로드>는 이미 반열에 오른 원작의 유려한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긴다는 점에서 폄하의 가능성을 품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더 로드>의 스크린은 마치 원작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한 도구와 같다. 영상에 앞서 활자가 묘사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단상을 품었던 관객이라면 분명 그 탁월한 재현 능력에 압도적인 감상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더 로드>는 원작을 통해 연상했던 막연한 이미지의 극단적 구체화를 이룬 작품이라 평할만하다. 플래쉬백을 동원해 현재와 과거의 서사를 섞어나가며 원작의 서사를 미약하게 비트는 영화는 최대한 원작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되 그 영역의 자질을 훼손하지 않고자 창의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더 로드>는 절묘한 캐스팅이 영화의 팔할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뛰어난 묘사가 정서적으로 훌륭한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더 로드>는 원작과 비교해 낮은 평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더 로드>는 온전히 원작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방식에 창의력이 없다고 말한다는 건 어딘가 억울한 일이 될게다. 원작으로부터 주어지던 막연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더 로드>는 분명 집요한 노력의 성과를 설득하고 있다. 물론 <더 로드>는 원작을 뛰어넘는 성과를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원작과 평행할 만한 장르적 변이로서 유용하다. 원작의 그늘아래 갇힌 영화라기 보단 변주보단 재현을 선택한, 야심의 영역이 다른 작품인 셈이다. 동시에 그것이 단지 원작에 대한 세밀한 재현에 그친 것이 아닌, 그 이미지가 둘러싼 세계관과 그 세계를 차지한 인물들의 정서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다. 묵시록의 장관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은 죽음의 대지 속에서 생을 찾아 떠돈다.
그 참혹한 세계에서 진짜 생을 얻기 위해 생을 저버린 부인과 달리 아버지는 유령과 같은 생을 선택한다. <더 로드>는 생이 아닌 사(死)를 향한 로드무비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생을 부지해야 할 덧없는 희망이다. 어쩌면 그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세계는 끝날 것이었다. 그건 부성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까운 생의 본능이자 속박이다. <더 로드>는 시작이 그렇듯, 끝에서도 어떤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아들은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세상은 여전히 잿빛으로 가득하고 그 잿빛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방향도 모르고 떠돈다. 그럼에도 <더 로드>는 그 참혹한 이미지 끝에 숭고한 감정을 전하고 마는 작품이다. 아이는 희망이고, 그 희망은 결국 세계를 떠돌지언정 그 희망을 이어나가려는 인간들의 선의는 작은 불씨를 살린다.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결국 그 모든 것을 목도한 이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의 극한적 의지를 통해 진짜 산 사람을 치유하는 힐링 시네마다. 원작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가치를 폄하하는데 동원된다는 건 섭섭한 일임에 틀림없다. <더 로드>는 단순히 뛰어난 재현에 그친 영화가 아니라 그 재현적 이미지에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 고민한 작품으로서 성과를 전한다. 단순한 전시적 야심이 아닌 진심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풍경엔 원작에 대한 경의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이 서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