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지인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린다. 그럼 대부분 공식처럼 날짜를 묻는다. 나는 번번히 그 공식을 깨는 답변을 했다. “그런데 결혼식을 하지 않기로 했어.” 어떤 식으로든 놀라워하고, 두 가지 혐의를 추궁한다. 설마 속도 위반? 아니면 신부가 재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진 않았다. 혹자는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질책했다. “지금이라도 생각 바꾸고 결혼식해라. 신부가 평생 너 원망할걸.” 하지만 저는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 모든 과정을 수용했다. 결혼식 없는 결혼을 제안한 건 당시의 여자친구 그러니까 지금의 아내였고, 이를 수용한 건 당시의 여자친구 아버지 그러니까 장인 어른이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동의했고 부모님의 동의를 얻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을 뿐이었다. 때는 3월이었다.
어차피 형식이 중요해지지 않은 만큼 여행 경비를 아낄 수 있는 비성수기에 신혼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생각보다 빨리 신혼집을 계약했고, 신혼여행에 골몰하다가 하와이행 항공 티켓을 예약했다. 동행인도 생겼다. 현지 가이드이자 드라이버 역할에 지원한 지인에겐 신혼여행 술친구라는 옵션까지 있었다. 신혼여행에 가져갈 짐이 없어서 사람까지 가져가냐고 우려하는 이들이 8할이었지만 우리에겐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말 멋진 선물까지 받았다. 깜짝 이벤트로 현지의 신부님을 섭외해서 바다가 보이는 공원에서의 결혼식을 마련해준 것. 나는 한국에서부터 귀띔을 받고 작전에 동참했지만 아내는 전날까지도 까맣게 몰랐다. 나는 그저 장난 같은 이벤트일 거라 생각했다. 추억이나 만들자는 심산이었지. 맥가이버 가발을 쓴듯한 백인 신부님이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정복을 입고 나타난 신부는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으로 경건한 마음을 이끌어냈다. 웨딩드레스나 턱시도를 입지도 않았고, 결혼행진곡도 없었지만 사랑을 맹세하고, 영원을 약속했다.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 결혼은 장난이 아니니까. 애초에 장난이 아니어야 했다. 그걸 깨닫게 해준 지인에겐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혼여행을 다녀왔지만 결혼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원고는 썼는데 취재가 남은 것마냥 이상한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결혼식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누구나 아는 ‘결혼식’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제의는 내게 대단히 솔깃한 것이었다. 결혼식은 넥타이를 매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번거롭고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갖춰야 하는 격식이었다. 하객을 받는 쪽이나, 찾아오는 하객이나, 서로에게 피로한 일이리라. 그러니 서로의 고충을 덜어주는 이 결정이란 얼마나 합리적인 결정인가. 오산이었다. 소식을 전할 때마다 의외로 서운함을 전하는 벗과 지인들의 마음을 읽게 됐다. “뭔가 해주고 싶은데”라는 말을 듣게 될 때마다 지나치게 야박한 삶을 살아온 것인가 인생을 되돌아봤다. 남들 하듯 결혼식은 하지 않더라도 친척들과 지인 일부를 모시고 식사 자리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장인 어른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최종적인 결혼 일정은 결국 신혼여행을 다녀온지 한 달이 지나서야 완료됐다. 종로에 있는 한옥 레스토랑을 대관했고, 초대자 명단을 작성했다. 장소 여건상 초대 인원을 제한해야 했고 초대할 명단의 우선순위를 가린다는 건 생각보다 미안한 일이었다. 결혼식은 그저 필요악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결혼식’을 하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도 좋은 선택이었다. 다만 중요한 건 ‘결혼’이지 ‘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저 당사자들만의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 당사자들을 아끼는 사람들이 진심을 전달할 마땅한 기회를 얻지 못해서 섭섭해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야박함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내 삶을 채우는 수많은 존재들을 인식했다. 그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었다. 에너지를 선물 받았다. 아내는 그날 우리를 찾아온 이들에게 줄 꽃을 마련했다. 입구에서 한 송이씩 꽃을 쥐어줬다. 더 이상 내 삶이 아니었다. 우리 삶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많이 웃었고, 행복했다. 잘 살아보고 싶다고 기도했다. 용기를 얻었다. 진심으로 고맙다. 그 진심들을 잊지 않고 살겠다. 그리고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미괄식이다.
1.바쁘다. 워커홀릭이라도 된 것 같다. 하지만 이 상황은 즐겁다. 난 변태인가? 기로에 서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슬아슬한데 어딘가 모르게 의욕이 솟는다.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뭔가 해내야 한다는 강박도 없진 않다. 하지만 이건 분명 신선한 자극이다.
2.거처가 확실치 않다. 양다리를 걸치게 될 확률도 생길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내 역할이 중요하다. 일단 성실해야 한다. 발을 담그고 있는 곳에 우열관계를 따지지 말고 모두 다 충실해야 한다. 징징댈만한 사안이 아니다. 기회라면 기회다. 아니, 기회 맞다. 기회가 온다면 잡아야지. 더욱 중요한 건 이런 상황들이 내겐 정말 좋은 공부라는 것. 어려운 숙제를 마치고 나면 그만큼의 지혜가 남기 마련이다. 난 이 숙제를 해치우고 싶다.
3.지인의 결혼식이 연말부터 내년 초까지 3건이나 잡혀있다. 결혼이라. 다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고, 그런 만큼 내가 조급할 필요가 있겠나. 당연히 없다. 하지만 요즘 들어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난 결혼에 대해서는 모 아니면 도였다.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하는 거고. 결혼은 의무가 아니니까. 굳이 미친 짓이라고까지 생각진 않지만. 그런데 요즘은 아무래도 전자의 상황에 자꾸 손이 가요, 손이 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건 자연스러운 생각 맞지? 여하간 평생 옆에 두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 생긴 건 맞다. 그리고 그 아이라면 날 잘 이해해줄 거다. 다만 요즘 세상 꼴이 참 지랄 맞아 걱정이다. 적어도 명박이 임기 중엔 세상의 피곤이 풀릴 길은 없을 것 같은데, 어떡하나? 그냥 혼인 신고하고 끝나는 게 결혼도 아니고. 문제는 그 놈의 돈이라 그 말이지. 세상에 마음만 가지고 되지 않는 일들이 참 많다.
4.명박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병맛은 까야 제 맛이라니 나도 좀 까보자. 환율이 1200원대로 상승했을 때, 난 지갑에 있던 100불 지폐를 환전했다. 요즘 좀 후회하고 있다. 아, 시발. 1400원대로 뛸 줄 누가 알았겠니. 불과 작년, 아니 올해 초까지만 해도 천원도 안되던 환율이 1400원대, 그것도 1500원대를 넘보고 있다. 올해 초에 한가지 결심했던 것이 있다. 올해는 꼭 외국물 좀 먹어보자. 어쩔 거냐. 명박이 이 ㅅㅂㄹㅁ. 몇 년 내로 비행기 타긴 글렀나 보다. 암울하다. 아직 명박이 임기가 끝나려면 올림픽이 한차례는 더 열려야 한단 말이지. 아직 일년도 안 채웠는데 나라 꼴이 이 지랄. 적어도 영삼이는 말년에 발광했지. 맙소사. 그나저나 만수는 어째서 아직도 장관인 거냐?
5.요즘 들어서 내가 인복이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그리 싸가지가 좋고 성실한 놈은 아닌 거 같은데.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세상엔 착한 사람이 많다. 나 같은 놈도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보면 그렇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 열심히 살게요. 꾸벅.
6.주말에 남원에 내려간다. 써대야 할 글도 많은 놈이 남원에 단풍 구경이라도 하러 가는 거냐? 라고 묻는다면 비즈니스 때문에. 9월 말 즈음에 친구 녀석의 청탁을 받았다. 남원의 모 의대에 다니는 친구 녀석이 학교 축제 기간에 열리는 레크레이션 어쩌고 하는 것에 강연을 맡아달라고 했다. 내 주제에 무슨 강연이냐? 그런데 내려간다. 일단은 뭐 딱히 수업은 아니라서, 한 시간 뭔가 주저리 대는 거라는 마음에서 청탁했는데 은근히 압박이 있다. 그래도 일단 뭔가 보여줘야 하는 건 아니냐, 라는 마음이 생기니까 마음이 두근거린다. <미쓰 홍당무>에서처럼 ‘고도를 기다리며’공연이라도 할까 싶지만 파트너도 없고. 날아오는 페트병과 짱돌을 감당하기에 내 마음은 억세지 못하고. 어쨌든 주말에 여차저차해서 남원에 간다. 잘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너무 쉽게 덥석 물어버린 게 아닐까 염려된다. 참고로 강연의 주제는 ‘영화 맛있게 보기’로 정했다. 떡밥을 물고 들어오는 학생들의 표정이 추후에 얼마나 시니컬해질지 기대된다. 차라리 자는 게 나으려나. 여하간 살아서 올라오겠다. 신의 가호가 있길.
7.벌써 올해도 2달 가량밖에 남지 않았다. 2달이라, 난 올해 뭐했나. 아직은 뭔가 추슬러보기 힘들지만 참 많은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고. 중요한 건 과거를 추억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현실이 중요하다. 내가 현실에 발 딛고 사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8.날씨가 춥다. 내가 좋아하는 가을을 도둑맞은 기분이다. 여름보단 겨울을 좋아하지만 난 가을을 보다 좋아했다. 가을이 사라졌다. 누군가 반토막난 펀드를 바라보는 심정처럼 허망한 일일까. 그 가을은 어디로 갔나. 이것도 온난화인가. 우리는 가을을 잃어버려도 될 정도로 살만한 무언가를 찾은 건가. 모르겠다. 춥다. 쌀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