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듣고 깜짝 놀랐다. 당연히 외모만 보고 10대인 줄 알았거든. 대부분 이런 반응 아니던가?
(웃음) 다들 그렇게 얘길 하더라.
민증 검사도 자주 받을 거 같다.
난 담배를 피우진 않지만 친구들 심부름으로 편의점에서 담배를 살 때도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가끔씩 신분증 검사를 하더라. (웃음) 술자리에서도 신분증을 갖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은 신분증 없이 술집에 가면 부모님한테 전화를 한다. 그래서 신분확인을 한다고 부모님한테 전화를 한 적도 있다.
대세는 동안이라 기분 나쁜 일은 아니겠지만, (웃음) 나름대로 불편함이 있겠다.
그래도 일단 나는 좋다. 덕분에 교복도 계속 입혀주시고. (웃음)
조만간 부산에서 무용 공연을 한다고 들었다.
10월 22일, 23일 이틀간 부산 국악원에서 큰 공연에 참여한다. 그 이틀 공연을 위해서 3개월 동안 연습했다. 지금 선생님께서 부산에 계셔서 서울과 부산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9월까진 그래야 할 것 같다. <푸른 강은 흘러라>개봉할 때까진 서울에 있다가 내려가야 할 테니까. 아마 부산영화제 시작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한국무용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연기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전통예술원 한국무용과를 2007년도에 졸업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전통예술원은 영상원과 같은 건물을 사용했다. 그때는 배우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영상원에선 1~2학년 때는 다른 외부 작품을 못하게 돼있었다. 그래서 외부에서 연기자를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린과 아프리카>의 김민숙 감독님이 그때 <사과>라는 단편 뮤지컬 영화를 처음 만든다면서 춤이 필요하다 하셔서 내가 우연찮게 그 작품에 참여했고 그걸 인연으로 계속 영화를 하게 됐다.
처음엔 배우로서 영화에 참여한 게 아닌가 보다.
<사과>에선 연기를 한 게 아니라 춤을 췄다. 그러다 김민숙 감독님의 두 번째 영화인 <그림자>에서 배우들 안무랑 트레이닝을 맡았는데 거기서 김민숙 감독님께서 “네가 꼭 했으면 하는 역할이 있다”고 하시더라. 약간 정신상태가 좋지 않은 관기 역할을 맡았는데 그 역할도 대사는 거의 없었다. 그 역할을 하고 나니까 김민숙 감독님이 자기 졸업작품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그게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던 단편 <기린과 아프리카>였다. 그렇게 연기를 시작한 게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덕분에 큰 기회도 많이 생겼고.
<기린과 아프리카>로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았다.
정말 부담스러웠다. ‘이건 뭐지?’ 싶을 정도로. (웃음) 그때 상을 받고 나서 난 무용만 해야겠다 싶을 정도로 겁이 났다.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연기상을 받게 된 것도 그렇고, 잠깐 짧은 한때라도 나에게 많은 관심을 준다는 것만으로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갑작스럽게 상까지 받으니 얼떨떨했을 것 같다. (웃음) 그래도 한편으론 나름대로 좋은 계기가 됐다.
현장이 너무 재미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에 남고, 그 다양한 사람들이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한다는 것에 반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해왔기 때문에 내 분야에 대한 열정을 잊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영화를 하면서 그런 걸 다시 되새기는 계기기 됐던 게 아니었나 싶다. 내 춤을 형성하는 시기는 있었지만 내가 나를 스스로 형성하는 시기는 별로 없었던 거다. 김예리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나 스스로도 모호했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전혀 고민하지 않았는데 영화를 하면서 그런 고민을 하게 됐다.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영화를 계속 하고 싶어졌다.
연기는 영화라는 결과물을 통해 자신이 표현한 걸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확실하지만 무용은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무대 공연이라서 자신이 표현한 걸 직접 확인할 기회가 드물다. 그런 피드백의 차이에서 오는 감흥도 다르진 않던가?
사실 무용은 긴 시간을 연습하고 난 다음에 하루, 이틀 공연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그 무대에서 여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한번에 터트리는 거라 그 자리에선 어떤 수정도 불가능하다. 영화는 혼자서만 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끼리 조금씩 쌓아온 걸 여러 번 반복해서 좀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게끔 만드는 작업이다. 그래서 결과물이 중요한 건 무용보다 영화 같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결과물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른 분야라는 걸 느꼈고. 사실 무용은 무대공연이다 보니까 충분한 기록이 남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는 결과물이 너무 확실하고 기록적이다. 두 달 사이에 내 얼굴이 달라져서 다른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도 재미있었다. 무용을 할 땐 계속 나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드는 느낌이지만 영화는 자꾸 내 자신을 다른 모양으로 바꿔보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잠깐이나마 경험할 수 있는 거랄까? 일종의 축복이지.
무용은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
정식으로 시작한 건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던 4학년 때부터였지만 무용은 정말 어릴 때부터 했다. 두 살이 좀 넘었을 때였나? 그때 우리 집이 제천에 있었는데 그 당시 제천에 어린이집이 없었다. 어디 맡겨놓을 곳이 없다 보니까 무용학원에 맡겨졌다. (웃음) 그때부터 뛰어다니는 걸 좀 좋아했다.
영재교육을 받은 셈이네. (웃음)
그런 건 아니고. (웃음) 엄마가 아는 분이 무용을 하기도 했고, 무용학원엔 언니들도 많다 보니까 거기 가서 놀아라, 이런 식이었지.
결국 학창시절 내내 무용에 전념한 셈인데 어머니께서 돈독한 후원자가 되셨나 보다.
어머니께서 학구열이 높으시다. 내가 무용을 하고 싶다고 얘기하니까 그럼 좀 더 좋은 곳에서 좋은 선생님들한테 배워야 하니 서울로 가야 된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래서 국립국악중학교 시험을 봤고 운 좋게 붙었다. 그 뒤로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예종까지 부모님의 덕으로 순탄하게 갔다. (웃음)
아무래도 무용에 재미를 느꼈으니 무용을 해야겠다 마음먹었겠지만 종종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나?
아마 그 당시 내 주변의 또래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사실 무용 밖에 해본 게 없어서 뭔가에 도전해본다는 생각 자체가 큰 두려움이었을 거다. 해본 게 없어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거? ‘내가 이걸 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아마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많은 생각을 갖게 되고 변한 거 같다.
영화를 통해 교복을 입게 될 기회도 많았다. 오랜만에 교복을 입는 기분은 어땠나?
교복을 입을 때마다 기분도 좋았고 신기했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을 누리면서 살았던 거 같진 않다. 예민한 시기였지만 난 생각보다 무디게 지낸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예민한 상태로 순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막상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놓으면 또 그렇게 되더라. 그래서 교복은 입을 수 있는 한 계속 입어보고 싶다. (웃음)
계속 여고생 역할을 한다는 게 특별히 걸리진 않나 보다.
다른 사람들은 계속 여고생을 연기하는 게 위험하지 않냐는 질문들을 많이 하지만 나는 무리해서 내 이미지를 바꾸고 싶진 않다. 하는 데까지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그리고 그냥 학생 신분을 갖고 있을 뿐이지, 항상 같은 여고생 역할을 하는 건 아니다. 매번 다른 자아를 가진 여고생을 연기하는 거니까 나에겐 다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양복을 입은 비즈니스 맨도 똑같지 않을까? 여고생도 똑같이 보일 뿐이지, 다 다른 사람이다.
원우라는 여고생으로 출연한 <바다 쪽으로, 한 뼘 더>가 본인의 장편 출연작 중 첫 개봉작이 됐는데 아무래도 기면증을 앓는 여고생을 연기한다는 게 특별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기면증을 앓고 있다는 점보단 원우 자체를 많이 생각했다. 원우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아팠으니까 스스로에게 짜증이 많이 나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오랫동안 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본인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보니까 짜증도 많이 나고, 그 병을 계속 끌어안고 있다는 것 자체도 힘들 거다. 그렇지만 불치병이다 보니까 자꾸 잊어버릴 거 같았다. 자기가 아프다는 걸 잊고 있다가 그 병이 도지는 순간마다 스스로 자꾸 꺾이는 기분을 느낄 거라 생각했고 그런 부분에 중점을 두고 연기했다. 그런데 오히려 나에겐 <푸른 강은 흘러라>의 숙이가 조금 더 어려웠다. 왜냐면 원우는 서울에 사는 아이니까.
아무래도 원우는 환경적으로 익숙한 공간에서 연기하는 캐릭터라 숙이에 비해 그런 부분에서의 짐은 가벼웠을 것 같다.
원우를 준비하면서 지나가는 고등학생들을 많이 관찰했고 나는 고등학교 때 어땠었나 생각했다. 기면증에 대한 자료도 많이 봤고, 자전거를 타거나 넘어지는 연습도 많이 했다. 그러면서 구체화되는 것들이 조금씩 생기더라. 그런데 숙이는 국어교과서의 문학작품에서 나오는 영희나 철이 같은 애들이라 감이 잘 안 왔다. 그래서 처음엔 많이 힘들었지만 점점 단순하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감독님도 숙이는 참 단단하고 밝은 힘이 있는 아이라고 얘기하셨기 때문에 내가 지닌 어떤 에너지를 많이 끌어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연변말 외엔 특별히 참고하거나 준비할 수 있는 뭔가가 없어서 촬영이 들어가기 전까진 많이 불안했다. 그 상황 자체에 들어가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숙이는 전형적인 모범생처럼 보인다.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은 어땠을까?
나도 모범생이었던 것 같다. 자기 주장이 그렇게 강하지 못했고, 시키는 걸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학생이랄까. 다 같이 이걸 해야 된다 하면 그걸 꼭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애였다. 이걸 안 할 수도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은 별로 못했으니까. 사실 고등학교 땐 춤을 추는 게 너무 좋았고 그게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적은 친구들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으려면 열심히 춤을 추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고 그만큼 여유가 없었다.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내가 어떤 성격인지, 이런 게 중요하기보단 내 춤이 항상 먼저였다. 김예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김예리의 춤이 더 중요한 시기였다. 그런 게 지금 와서 약간 후회된다. 그런데 숙이는 그런 아이 같지 않더라.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것이 옳은지, 정확하고 분명하게 아는 아이였다. 같은 모범생이면서도 분명한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아이란 점에서 나완 분명히 다르다.
<푸른 강은 흘러라>는 <바다 속으로, 한 뼘 더>보다 먼저 촬영된 영화다. 첫 주연작을 맡은 장편영화이기도 했는데 연변까지 가서 영화를 찍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사실 <기린과 아프리카>를 하고 나서 아무 것도 한 게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한 해가 넘어간 다음에 단편 두 작품을 했고 그 뒤에 <푸른 강>을 하게 됐는데 그래서 부담스럽더라. 사실 뭘 해야 할지도 몰랐고, 그냥 시키는 거라도 잘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많아서 연변말이라도 잘 하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
연변 말이 처음엔 외국말처럼 들리더라. (웃음) 마찬가지로 본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말이라 애먹지 않았을까 싶더라. 나름대로 트레이닝 과정도 있었을 것 같고 적응을 위한 노력이 있었겠지.
연변 예술대학에 있는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다. 다 나와 또래였고, 그 중 동갑이었던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가 항상 옆에 붙어서 연습시켜줬고 그쪽에서 연변 말을 익숙하게 듣다 보니까 차이점도 알게 됐다. 우선 무슨 말이든 계속 해보는 게 중요했고, 그 친구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씩 알려준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배웠다.
한국, 그것도 서울에 사는 사람에게 연변은 낯선 곳이다. 교실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생소하더라.
사실 <푸른 강은 흘러라>는 그쪽 현실보다 좀 더 극적으로 꾸며진 이야기이긴 하다. 그런데 연변 사회에서 담배는 되게 일찍부터 배우는 거라 그런 것들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조금 놀랐다. 거기도 서울만큼 문화적 변화가 빠르다. 한국의 모든 물품들도 시장에 가면 다 있고, 한국 3사 방송을 텔레비전으로 바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도 많이 되더라. 그런데 다행히도 그 친구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중국인이라 얘기하고 그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혼란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경제적 여건은 따라오지 못하는 가운데 아이들의 이상은 빨리 변하고, 뭔가를 하고 싶지만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 놓여있어서 겪는 혼란이 많아 보였고 그런 것들이 안타깝더라. <푸른 강은 흘러라>와 또 다른 문화적 차이도 있고, 사회적인 문제도 있다. 그 전까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가 막상 그런 현실과 부딪히니까 오히려 내가 당혹스러워지는 것들도 많았다.
연변까지 가서 영화를 찍는다 하니 부모님 반응이 어땠을까 궁금하다.
사실 우리 부모님은 아직까지 당연히 내가 무용을 할 거라 생각하고, 그런 것에 대해선 잘 모르시는 편이다. <기린과 아프리카>로 상을 받았을 때도 그냥 웃으시면서, “이런 것도 있구나” 하시더라. 강미자 감독님은 학교에서 뵀던 분이고, “이런 일이 있어서 연변에 가게 됐다”하니까 잘 다녀오란 식으로 말씀하셨다. 해외로 공연을 가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리 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덕분에 부담스럽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푸른 강은 흘러라>에선 상당히 일차원적인 대사도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너는 나를 실망시킨다.”라던가, 직설적으로 감정을 전하는 대사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 대사의 정서가 좀 간지럽더라.
물론 익숙한 어투는 아니었다. (웃음) 물론 연변 사는 친구들도 그런 문학적인 어투를 사용하진 않는다. 다만 모든 친구들이 영화에 몰입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거기에 자연스럽게 따라서 대화했기 때문에 그런 어투가 어색하다는 생각을 못했다. 이미 철이도 철이였고, 숙이도 숙이였고, 미옥이도 미옥이였기 때문에 그게 힘들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다.
중반부에 당구장 외벽을 풀샷으로 잡은 우중 신에서 무용동작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니까 무용전공자라는 걸 확실히 알겠더라. (웃음) 어떤 요구가 있었나?
촬영과 프로듀서를 맡았던 이지상 감독님께서 촬영 당일에 얘기하시더라. 당구장 신을 이렇게 찍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그 얘길 듣고 잠깐 고민했다. 거기서 많은 움직임을 보여줄 수도 없는 거고, 큰 율동을 보여줄 필요도 없는 거니까 숙이의 어떤 감정만 잘 표현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한번 해봤다.
그 장면에서의 동작은 자신이 직접 연출한 것이겠지?
사실 직접 짰다고 하기도 뭐하다. 그냥 몇 번 손 들고 만 건데. (웃음)
아무래도 자신의 무용 동작을 직접 관람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가 아니었을까. (웃음) 예기치 않게 연기를 시작했지만 연기를 통해서 연기 외적으로 특별한 영향력을 얻은 바는 없나.
춤추는 것도 어렵지만 연기도 어려운 일 같다. 게다가 나는 연기를 많이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서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만큼 연기 잘 하는 분들을 보면 부럽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내겐 새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 걱정도 된다. 작품을 할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항상 똑같은 김예리처럼 보이니까. 내가 보기엔 쟤도 김예리고, 얘도 김예리고, 다 똑같은 사람 같아서 연기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비워야 되는지도 잘 모르겠고, 정말 한참 멀었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란 생각만 는다. (웃음)
<푸른 강>에서는 또래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는 점에서 편하지 않았을까.
<푸른 강> 촬영이 굉장히 지연됐었다. 그래서 감독님도 힘들어 했고 거기 있는 연변 친구들도 본인들의 일이 있는데 그걸 접고 영화에 참여한 것이었기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또래라서 단합이 잘 된 거 같다. 맨날 우리끼리 술을 마셨다. 양꼬치에 맥주를 마셨는데 또래끼리 있다 보니까 할 얘기도 많았고 재미있었다.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 편하더라. 그런 게 연기에도 많은 도움이 됐던 거 같다. 그 친구들과 허울 없이 지내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숙이가 됐다.
연변 맥주는 맛있나?
맛있다! 양꼬치도 맛있고. 그 친구들이 지역 내에서 맛있는 곳을 자주 데려가서 음식은 잘 먹었다. (웃음) 그래서 돌아와서도 많이 생각나더라. 종종 생각나서 다시 먹고 싶다고 그 친구들한테 연락도 한다. 우리학교 앞에 양꼬치 집이 하나 있는데 가끔 거기서 양꼬치에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웃음)
그래도 그 맛이 나진 않겠지.
그렇지. 그 맛이 아닌 거지. (웃음)
<바다 쪽으로, 한 뼘 더>와 같이 중견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건 어땠나?
박지영 선배님은 나를 처음 봤을 때 얘가 너무 낯가림 없이 대하니까 놀라셨나 보더라.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박지영 선배님을 TV에서 많이 봤기 때문인지 너무 친근했다. 그래서 편하게 접근하게 된 것뿐인데. (웃음) 서여사 님은 감독님 어머니였는데 이미 준비된 서여사나 다름없는 분이었다. (웃음) 박지영 선배님도 그렇고, 서여사 할머니도 마치 소녀처럼 나를 예뻐해 주셨다. 진짜 엄마나 할머니처럼 도란도란 앉아서 농담하고, 밥 먹고, 자고, 이런 기분이라 어려움은 없었다.
<푸른 강은 흘러라>외에도 아직 개봉을 기다리는 출연작이 있다. <귀향>이란 작품에도 출연했다고 들었는데.
<바다 쪽으로, 한 뼘 더>를 하기 전에 <귀향>을 먼저 찍었지만 <바다 쪽으로>가 찍자마자 바로 급하게 개봉을 해서 더 늦게 개봉을 하게 됐다. 내 입장에선 걱정이 좀 된다. 올해 <바다 쪽으로>가 먼저 나왔고 후반기에 <푸른 강>도 개봉하고 좀 더 있으면 <귀향>도 선보이게 될 텐데 이렇게 한꺼번에 출연작을 보여주면 내가 가진 걸 금방 다 드러내버리는 기분이라 걱정된다.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지? 이제 연기를 하면 그만 해야 되나? 이제 나를 불러주지도 않으면 어쩌나’라는 생각도 들고. 사실 배우는 누군가가 선택해주길 기다리는 직업인데 누군가로부터 선택 받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진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일년 동안 출연작이 겹치는 것도 마냥 좋아하기 힘든 일인 거 같다. 부담이 좀 된다.
오히려 연기에 대해 알아갈수록 감지되는 어려움이 커지는 게 아닐까 싶다.
차라리 생각이 없는 게 편했다. 잘 모르는 게 약이라고,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더라. 알면 알수록 무섭다. 처음엔 리딩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다는 생각을 안 했지만 요즘은 리딩이 너무 어렵다. 앉아서 대사를 한다는 것도 너무 어렵고 누군가에게 연기를 보여주는 것도 어려운 일 같다. 그만큼 점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느낀다.
사실 무대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 것 같은데.
무대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 무대를 섰을 땐 잘 모르고 섰지만 어느 순간 무대에 선다는 게 무섭더라. 그런데 그 순간을 잘 넘기면 그 안에서 즐거움도 많이 찾게 된다. 무대나 영화나 비슷한 시기가 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고비를 잘 넘겨야 될 텐데 싶어진다.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충실하게 작품에 임해야 될 것 같다.
<귀향>에서의 캐릭터는 기존의 밝은 이미지와 좀 상반되는 것 같더라.
좀 피폐한 고등학생 미혼모로 나온다. 스스로가 원하지 않게 어떤 상황에 계속 휩쓸려 가는 아이다. 사회나 어떤 현실 속에서 궁지에 내몰리는 캐릭터랄까. 나름대로 재미있게 찍었다. (웃음)
<파주>의 본예고편이 공개됐는데 짧게나마 등장하는 게 보이더라.
아마 잠깐 나올 거다. (웃음) 나도 아직 예고편조차 못 봐서 <파주>에 대해선 어떤 말을 하기가 어렵다. (웃음) <파주>는 나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게 만들고 연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다. 대화가 부족하면 힘들다는 걸 알았다. <바다 쪽으로>를 끝내고 거의 바로 <파주>에 들어가다시피 했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오만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거든. 감독님이나 서우 양과 친해지면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한 게 후회된다. 연기가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많이 배웠다.
확실한 건 지금까지 출연작 가운데 처음으로 본인 나이와 비슷한 연령 때의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게 아닐까.
그건 그렇다. 빗나가는 성격을 지닌 모난 역할도 해보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와서 좋았다. 26살이 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성인 역할을 할 기회가 조금씩 늘고 있다. 어쨌든 <파주>에선 좀 불량하다. (웃음)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주로 여자 감독들과 작업해왔다.
여복이 많다. (웃음) 나름대로 좋았던 점 중 하나였던 거 같다. 여자 감독님들 영화의 주인공 대부분은 여자고, 여자 캐릭터를 더 빛나게 해준다. 그래서 여자 감독님들이 주는 역할을 맡으면서 내가 더 돋보일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런 점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다. 여자감독님들은 나에게서 다양한 면을 많이 봐주는 거 같다. 물론 남자감독님들과도 작업해봤고 남자감독님들도 좋은 분들이 많다. 어떤 한 분은 농담처럼 말씀하시더라. “넌 남자 감독들이 좋아하는 얼굴이 아니야. 그래서 여자 감독님이 너한테 그렇게 콜을 하는 거야.” (웃음)
본인의 말처럼 연기를 한다는 건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혹은 살아볼 수 없는 다른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라 할 수도 있을 거다. 실생활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대리만족을 할 기회도 생길 테고.
분명히 그런 건 있다. 다만 얼만큼 내 자신을 없애고 난 다음에야 그 캐릭터를 형성해 넣어야 하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좀 더 그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하나같이 그저 다 내 안에서 나온 김예리 같기만 한 거다. 그런 점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이건 내가 할 수 있겠다, 할 수 없겠다, 이런 한계에 직접 부딪혀보고 싶다.
어쩌면 현재가 스스로의 연기에 동원되는 경험적인 밑천의 한계를 느낄 때일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경험이 쌓이다 보니 더 많은 욕심이 생길 것 같고.
어느 친구가 얘기한 게 있다. 배우는 소모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역할을 해서도 안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그 말이 정말 맞는 거 같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걱정이 많아졌다. 강미자 감독님도 말씀하시길, 예리가 할 수 없는 것도 해야 된다고, 그래야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아마 그 말인 거 같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돼서 정말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가 돼야 좋은 역할을 많이 할 수 있는 거란 말씀을 해주시더라.
종종 현장에서 캐릭터로 연기를 하다 다시 실생활의 김예리로 돌아올 때 특별한 기분을 느낀 적은 없나.
특별히 다른 건 없다. 그냥 그렇게 일하다가 집에 와서 쉬고, 또 일하고, 이럴 뿐이지. 물론 무용은 큰 공연을 해도 크게 이슈가 안되지만 좋은 영화는 작은 영화라 해도 많은 사람들이 봐주고 많은 일이 생기다 보니까 그런 부분에 대한 부담감은 좀 생긴다. 난 그냥 지금 이대로도 참 좋은데 생각하기도 하고, 잘 해나가는 게 참 어렵겠다는 생각도 자꾸 든다.
작품을 거치면서 두려움이 커지는 걸 느끼나?
무대에서는 한번 넘어지고 벌떡 일어나서 다시 잘하면 격려해주는 게 있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은 거 같다.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달라지고, 정말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서 많아졌다. 그 사람이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정말 잘해야 되는 거더라.
프로는 말 그대로 결과를 통해 평가를 얻게 되니까.
현장에서 못됐고 성격이 안 좋더라, 이런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연기 잘하잖아, 그 한마디가 중요한 거 같다고 느꼈다. 일단 이건 타협이 없구나, 영화는 정말 잘해야 되는 거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좀 냉혹하다고 해야 하나? 한번 딱 꺾이면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봐주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어쩌면 그런 것들을 깨닫는 과정 자체가 배우로서 욕심이 커지는 수순이란 생각이 든다. 한편으론 지금 배우와 무용가로서의 삶을 병행하기 때문에 느끼는 혼란도 있지 않을까 싶다.
다들 나에게 하나만 해야 되는 게 아니냔 이야길 많이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대로도 굉장히 좋다. 이렇게 연기할 수 있는 것도, 춤을 출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난 원래 크게 욕심내지 않는 편이다. 물론 내가 성공하고 싶어진다면 그게 욕심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지금 상태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두 가지 모두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래서 어떤 한 가지를 버려야 해서 후회하게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할 수 있는 만큼 두 가지를 충실히 잘 해나가고 싶다. 그런데 정말 만약에 어느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아마 춤을 추지 않을까.
아직까진 무용을 통해 얻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배우로서 욕심이 자라고 있고 후에 배우로서 더 많은 애착이 생길지 모를 일이다.
예전엔 그냥 거의 놀러 가는 수준으로 현장에 갔다. 욕심도 없었고 책임감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욕심이 난다. 내 스스로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건 그것을 위해 어떤 다른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돼있다는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영화는 기록이 남는 건데 내가 못하는 모습을 남긴다는 건 가슴이 아픈 일 같다. 보고 싶지 않아지니까. 그래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잘 하고 싶어진다.
그래도 지금까진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지 않나.
사실 못한다, 잘한다, 기준이 애매하니까. (웃음)
본인의 연기에 대한 기대감이나 관심이 깊게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적절하게 요구되는 기대감만큼의 몫을 해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에게 많은 기대를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그냥 내 욕심만 늘어가는 것 같다. 그냥 여기까진 잘 해온 거 같은데 지금 여기가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가 문제인 거 같기도 하고. 다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걱정하다 주저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해보고 나서 안되더라도 후회 없이 해보고 털고 잘 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연기와 무용을 병행하면서 생기는 시너지는 없나?
<귀향>때 신선한 경험을 했다. <귀향>촬영 때 무용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스케줄이 꼬였는데 정서적으로 무거운 상태의 아이를 연기하는 거라 역할 자체도 어려웠고 촬영을 하고 나면 진이 막 빠져서 힘들었다. 그런데 무용 연습을 하면서 그런 어려움을 누르고 잊으면 차차 잘 개어낼 수 있었다. 한쪽에선 피폐하고 힘들어도 반대쪽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내 안에 쌓인 걸 배설할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 생겨서 좋았다. 두 가지가 서로 완충이 되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같이 해야겠구나, 마음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재미있었다. 신기하기도 했고.
입구를 만들면 출구도 만들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두 가지를 병행한다는 것에 대해 걱정이 있으시진 않나.
어머니께서는 걱정하신다. 진로를 빨리 정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종종 말씀하신다. 다른 친구들은 무용 공부도 더 해나가면서 선생님이나 무용수로서 입지를 점점 다지는 시기에 너는 그러지 못하는 거 같은데 괜찮은 거냐고 걱정하신다. 그런데 나는 적어도 서른 전까진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하는 게 아니냔 생각이 든다. (웃음) 내가 이기적인 것일 수 있겠지만 다행히 부모님께서 그런 부분을 많이 봐주시고 계신 것 같다. 저러다 말겠지, 이런 생각으로. (웃음)
일단 지금은 한참 즐겨도 좋을 나이니까. (웃음)
연기 덕분에 무용하는 것도 즐거워졌다. 예전엔 동작 하나 안되면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내가 좁아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연기를 하고 난 뒤로 스스로 여유로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용도 즐겁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예전엔 그렇지 못했으니까. 입시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고. 내가 무용수로서 좋은 신체적 조건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한 스트레스도 컸지만 요즘은 좀 그런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힘든 연습을 하는 것도 즐겁다.
어쩌면 연기를 통해서 삶이 한 뼘 더 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실 지금은 무용이나 연기를 다 못하게 되더라도 뭔가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한다. “내가 뭐든 못하겠어? 뭐라도 하면서 풀칠은 할 수 있겠지?” 이런 몹쓸 생각을 하기도 한다. (웃음)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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