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은 더 이상 전화기가 아니다.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찍고, TV를 보거나 노래도 듣는다. 심지어 인터넷을 하기도 한다. 핸드폰으로 전화만 한다면 촌스런 사람이란 소리 듣기 십상이다. 더 이상 통화가 잘되는가 따위는 좋은 핸드폰의 기준이 아니다. ‘원 소스 멀티 유즈’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물건이다. 시대가 그만큼 좋아졌다. 그리고 그만큼 문제가 발생한다.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그만큼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아졌다. 때때로 그 안에 은밀한 개인정보라도 담겨 있다면 심각한 문제로 발전한다. <핸드폰>은 그 심각한 문제를 파고든다.
떠오르는 신인 연기자의 매니저 오승민(엄태웅)이 그 문제의 핸드폰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 핸드폰을 줍게 된 임자가 심각한 질환을 품은 자아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핸드폰>은 작은 해프닝이 아니라 심각한 스릴러가 된다. 분실한 사람과 습득한 사람 사이의 치열한 공방전은 다름 아닌 핸드폰의 기능 덕분이다. 그 좋은 기능들이 되려 핸드폰을 잃어버린 자의 심리를 옥죄고 누른다. 물론 영화의 본론은 그 핸드폰에 적중할 것 같지만 핸드폰은 <핸드폰>에서 그저 하나의 거대한 수단에 불과하다. 사회의 심리적 기저를 살피는 일종의 프리즘과 같다. 그 물건에 깃든 사회적 세태를 펼쳐내는 작은 수단이 된다.
핸드폰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는 관객의 맹점을 만드는 수단이다. 단지 핸드폰에 담긴 중요한 동영상에 발목을 잡혔다고 믿는 오승민에게 정이규(박용우)는 파렴치한 거래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더욱 심각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승민은 억세게 재수없는 사람이다. 차라리 그 표면적인 문제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라면 <핸드폰>은 단순한 구조의 해프닝에 얽힌 스릴러가 됐겠지만 실상 영화의 의도는 그보다 넓고 깊은 지점을 향하고 있다. 되찾으려는 자의 오해와 돌려주려는 자의 욕망이 기이하게 뒤엉키고 엇갈려 나갈 때 <핸드폰>은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사연으로 뻗어나간다. 단순히 어떤 물건을 둘러싼 거래가 아니라 사회의 병적인 문제들이 그 사소한 사연에 끼어들며 스토리를 예측 불가능한 궤도로 밀고 나간다.
서비스업에 대한 계급적 멸시가 횡행한 사회적 풍토와 함께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서민의 심리적 공황이 신경질적으로 결합해 스릴러의 심리를 완성한다. 동시에 이를 추적해나가는 오승민의 무례한 태도가 어지럽게 엉킨 상황을 연출하는데 일조하며 이야기의 흥미를 자아낸다.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지루할 틈이 없다. 다만 병렬 구조로 배치돼야 마땅할 것 같은 사연들이 차례차례 직렬로 이어지며 진행 과정의 온도차가 발생한다. 게임의 구조로 마주섰던 인물간의 대립이 본격적인 대결 구도로 이어질 때 즈음엔 일방적인 추격으로 변질되고 종래엔 드라마가 엉겨 붙어 불가피한 감정을 요구한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서 문제라기 보단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각자의 주체성을 고수하고 전체적인 맥락을 어지럽힌다. 조합을 이루지 못하고 순열처럼 늘어서있다. 흡사 여러 사람과의 통화가 혼선된 기분이다. 결말에 다다르면 전반부의 사연이 깡그리 잊혀진다. 핸드폰은 하나의 맥거핀에 불과하다. 물론 교훈 하나는 확실하다. 핸드폰 잃어버리지 말 것. 특히나 당신에게 핸드폰이 은밀한 비밀을 담는 도구라면 결코 잃어버려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뼈저리게 체감할 지 모르겠다.
신윤복은 기록이 묘연한 실체다. 그림은 전해지나 그에 대한 삶은 알 길이 없다. 고증이 불가능한 신윤복의 실체는 상상을 전전할 수 밖에 없다. 신윤복에 대한 관심은 그의 풍속화가 조선후기 양반들의 에로티시즘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신윤복의 화폭에 담긴 조선의 에로티시즘이 과연 남성적인 관점인가라는 의문이 발생했다.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는 TV시리즈 <바람의 화원>과 동명원작소설은 그 의문에 상상력을 동원한 바다. 불분명한 역사적 실체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전이됐다.
팩션(faction)은 테두리가 모호한 밑그림에 색감을 넣은 결과물이다. <바람의 화원>과 마찬가지로 신윤복에 여성성을 대입한 <미인도>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허구적 결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지만 이는 ‘만약’이라는 의심을 위한 반어적인 자기 방어에 가깝다. 여성으로 치환된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둔다는 점에서 <미인도>는 <바람의 화원>과 비교군이나 대조군의 영역을 차지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인물에 접근하는 양식이 비슷하다 해도 두 작품은 엄밀히 다른 태도로 인물에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신윤복의 여성성을 조명하는 두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만큼 두 작품의 연관성이 연동된다는 걸 애써 배제하긴 힘든 노릇이다.
<바람의 화원>과 <미인도>의 차이는 단적으로 신윤복이 ‘단오풍정’을 그리는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만으로도 여실하다. 도화서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머릿속으로 구상한 광경을 화폭으로 구현하는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문근영)과 실제로 눈 앞에서 마주한 현실을 화폭으로 옮겨 담아내는 <미인도>의 신윤복(김민선)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 그려내는 풍속화는 세상에 대해 열려 있던 인물이 그려내는 눈을 대변한다면 <미인도>의 신윤복이 그리는 풍속화는 세상에 대해 닫혀있던 인물이 만난 세상의 창과 같은 구실을 한다. 그만큼 <미인도>는 신윤복이라는 인물을 갇혀있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바람의 화원>보다 <미인도>가 두른 세계관의 스케일이 작게 느껴지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이는 물론 단점이 아니다. <미인도>가 <바람의 화원>과 다른 방식으로 인물에 접근하는 만큼 인물을 해석할만한 여지를 더욱 넓힌 바가 분명 존재한다. 허구의 텍스트가 어떤 상상을 걸치는가에 대한 호불호는 단지 취향의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미인도>는 신윤복이라는 소재의 특이성을 소비하는 내러티브가 실질적으로 평이하다. <미인도>는 특별한 인상으로 치장된 인물의 평범한 내면을 드러내겠다는 <황진이>와 비슷한 야심을 품고 있다. 하지만 <황진이>만큼이나 <미인도>의 성과도 미약하다. 조선의 에로티시즘을 조명하는 직설적인 표현양식들은 나름대로 파격적인 면모가 있지만 신윤복을 제물로 삼아 시대를 조명한 양상이다. 결국 신윤복이라는 컨텐츠 자체에 대한 기회비용을 고려하자면 수지 맞은 장사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강무(김남길)와 신윤복의 로맨스로 돌입하는 순간, <미인도>는 뻔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사제지간인 김홍도(김영호)와의 치정 관계 또한 불미스럽고 불필요하게 가지를 친다.
<미인도>는 신윤복을 전시할 뿐, 신윤복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다. 신윤복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라기 보단 굳이 왜 신윤복인가, 라는 의문에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산수화 같은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보다도 조선의 은밀한 에로티시즘 욕망보다도, <미인도>에 얹혀질 만한 기대감은 신윤복이란 캐릭터에 대한 관점이다. 갓 쓰고, 도포 자락 휘날리는 신윤복에게 보고 싶었던 건 단지 저고리를 풀어헤친 속살의 섹슈얼리티만은 아니었을 터. 결국 <미인도>는 무책임한 욕망을 덧씌운 무심한 자화상에 불과하다. 그 안에 신윤복은 없다. 그저 편애하기 쉬운 이야기와 소모되는 캐릭터들이 즐비할 따름이다. 그나마 설화를 연기한 추자현이 종종 눈에 띤다. 소재의 비범함은 지나치게 평범한 관점을 거듭 확인시킬 따름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대적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들며 저항하기 보단 생존의 가능성을 먼저 본능처럼 익힌다. 1930년대 일제 치하 경성에서 살아가는 패망한 나라의 후손들 역시 그 환경에 천착해 살아가는 이가 대다수였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과 무관해질 수 없는 이분법의 운명론에 밀착한 인물들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기록되지만 실상 대부분의 이름없는 민중은 옷을 갈아입듯 자연스레 그 시대적 변화에 편입됐을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 일제 치하의 권력에 밀착해 풍요로운 삶을 타전하는 이들이 존재했거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자 시대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두 부류의 극점 같은 존재들이 일부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모던보이>는 그 시대에 대한, 혹은 그 시대에 함몰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한 정지우 감독의 <모던보이>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되 인물에게 좀 더 복잡한 감정적 갈등을 부여함으로써 결말부를 철저하게 변주했다. 원작과는 판이한 양상으로 변주된 결말부를 위해 캐릭터도 재단됐다. 특히 원작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신스케(김남길)나 원작에 비해 내면적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조난실(김혜수)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패망한 조국의 역사에 심드렁하듯 조선총독부 1급서기의 직책을 수행하는 경성의 모던보이 이해명(박해일)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로맨스를 향해 사력을 다하지만 원작과 달리 마지막까지 적극적인 태도로 감정선을 고수한다. 오로지 낭만 그 자체를 추구하는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로맨스에 취해 인생 전반을 소모하는 열혈순정파로 묘사된다.
경성 최고의 미남이자 낭만의 화신이라 스스로 자처하는 이해명(박해일)과 그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 묘연의 여인 조난실(김혜수)은 1930년 경성이란 시대상 속에서 개인과 시대라는 대립각을 이루면서도 서로를 탐닉한다. 오로지 로맨스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이해명과 자신이 완수해야 할 시대적 과업을 위해 자신을 연모하는 남자의 순정마저 악용하는 조난실 사이엔 분명 시대라는 거대한 간극이 서로를 경계하듯 자리하고 있다. <모던보이>는 원작과 달리 냉소주의가 아닌 온정주의로서 개인을 조명한다. 조난실을 사모하던 이해명은 자신의 순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소모하려 하고 개인의 숨겨진 욕구를 은밀히 드러내는 조난실은 끝내 자신이 이뤄내야 할 대의를 위해 개인의 삶을 폭파시킨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던보이>는 이뤄지지 못한 로맨스에 대한 짙은 비애로 보호색을 띤 시대적 애도다. 단지 그것이 어느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두지 않고 상호적인 시선으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캐릭터를 변모시키거나 보완하기도 했지만 이 모든 건 스토리의 폭을 증축하기 위한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의 출발점을 원작에서 묘사되지 않는 과거에 두고 이해명과 조난실의 인연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를 명백하게 밝힌다. 이는 문장의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보다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가 독자의 상상력을 활용하기에 불리하단 점에서 어느 정도 수긍할만한 해법을 찾았다고 할만한 대목이다. 다만 그 이후 기본적으로 소설의 플롯을 골격으로 둔 사연의 전환 과정이 종종 불완전한 문장처럼 단절된 맥락의 어색함을 드러내 보이곤 한다. 이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잠재된 텍스트의 여백을 이미지가 갈무리하지 못한 까닭이다. 덕분에 <모던보이>는 전체적으로 원작이 그리는 굵직한 이미지를 연결하며 내러티브의 선을 이어가지만 종종 매끄럽지 못한 개연성을 드러낸다.
<모던보이>에서 크게 눈에 띠는 건 구시대적 바탕 위로 근대화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1930년대 경성의 기이한 풍경이다. 일제가 주도한 근대화 속에서 자주적인 풍속이 촌스러움으로 몰락하던 경성의 모더니티엔 이미지가 존재할 뿐 사상이 없다. 근대화로 위장한 제국주의적 정복의 야욕이 1930년대 경성을 기이한 풍경으로 재건한다. <모던보이>는 고증에 입각해 그 시대를 충실히 재현한다. 명동성당, 숭례문과 같은 1930년대 경성의 랜드마크를 전시함은 물론 CG와 세트를 동원해 스크린에 옮겨 담은 1930년대 경성의 아기자기한 풍경들은 그 자체만으로 괜찮은 볼거리다.
궁극적으로 <모던보이>의 야심은 그 변주된 결말에 자리잡고 있다. <모던보이>는 민족주의와 개인주의를 사이에 둔 줄타기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 소설의 비정치적인 냉소주의를 결단력 있게 비튼다. 어린 시절 일본인을 꿈이라 말했던 이해명은 결국 천황폐하신민이 될수 없는 꼭두각시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대에서이탈한다. 그 과정만으로도 유쾌함과 처연함이 공존한다. 누가 모던보이를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나. 그건 사랑마저도냉소하게 만드는시대라는 운명이다. 마지막까지 낭만에 목숨을 건 모던보이의 비정치적 태도는 마지막 로맨스의 가시는 길을 더욱 처연하게 물들인다. 실로 의미 있는 결말이다. 조센징이거나 친일파거나. 시대가 그랬다. 어찌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씨네서울)
사실 순차적으로 따지자면 <공공의 적 3>에 해당한다. 하지만 <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이 본래 타이틀 대신, ‘강철중’이란 캐릭터의 네임밸류를 앞세우고 ‘1-1’이란 번거로운 순번을 꼬리에 붙인 건 다름아닌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구시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틀로 전면에 내세운 ‘강철중’은 그 앞에 ‘원조’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1-1’이라는 순번이 붙은 부제는 전작인 <공공의 적 2>를 시리즈로부터 분가시키는 동시에 <공공의 적>으로 돌아가 가문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강철중>이 ‘공공의 적 1-1’이 된 사연은 이렇다. 결국 <강철중>은 <공공의 적>이란 브랜드를 재건하는 작업이다. 무리한 확장사업으로 인해 훼손된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강철중>은 동어반복의 함정에서 탈피해야 한다. 가문의 정통성을 계승하되, 개별적인 존재의미를 확보하는 것은 속편이 맞이해야 할 숙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강철중>에 주목할만한 점은 설경구의 출연, 강우석 감독의 연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장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강철중>에서는 장진 감독 특유의 촌철살인적인 대사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만큼은 아니지만 드물지 않게 눈에 띤다. 또한 강철중과 상대하는 이원술(정재영) 역시 전작에서 등장한 악인 캐릭터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조규환(이성재)과 한상우(정준호)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절대 악인으로써 강철중과 대척점에 놓였다면 이원술은 전자들에 비해 인간적인 냄새를 풍긴다. 물론 그는 고등학생에게 태연하게 칼을 쥐어주는 악인이긴 하지만 조직적 의리를 중시하고, 자가수성적 대범함을 갖추고 있으며, 가족적 자상함마저 갖추고 있다. 강철중을 주목하게 만들던 전작의 단선적인 악인들에 비해 이원술은 좀 더 입체적인 선을 지닌 캐릭터로 완성됐다.
동시에 <강철중>의 강철중은 <공공의 적>의 강철중에 비해 성장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양아치만큼 껄렁껄렁하고 애처럼 멋대로이며 손발이 자동 반사되는 폭력적 습관도 여전하다. 그러나 자신의 철없음을 타이를 수 있을 만큼 똑똑하게 성장한 딸이 있고, 15년 차 경찰 공무원 월급으로 좀처럼 해소되지 못하는 빈곤한 현실적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 게다가 세월에 장사 없듯, 나이를 먹어서인지도 모르지만 <강철중>에서 강철중은 철없이 막무가내이던 <공공의 적>시절에 비해 성숙한 인상을 준다. 문제는 그 지점에 있다. 위트가 감소한 강철중 앞에 인간적 매력을 갖춘 악인 이원술을 대립시키면서 캐릭터 구도가 종종 역전되는 뉘앙스를 준다는 것. 사실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이 조규환을-<공공의 적 2>는 논외로 치고- 미치도록 잡고 싶어한 건 강철중이 정의에 목숨 거는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조규환이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인면수심의 탈을 쓴 악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원술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악인이다. 특히 그가 사시미 하나를 쥐고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그 두목(문성근)과 담판을 짓고 나오는 장면은 인상적인 카리스마가 구사되고 인간적인 유머까지 겸비한다.
단선적이던 캐릭터 나열방식에 불분명한 혼선이 발생했다. 강철중은 강우석 감독의 것이지만 이원술은 분명 장진 감독의 것에 가깝다. 결국 두 감독의 조합은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쉽게 융합하지 못하고 겉도는 위트에 도취되기도 한다. 수위가 넘칠 것 같은 웃음의 타이밍에 좀처럼 쉽게 반응할 수 없는 건 융합될 수 없는 스타일의 간극 때문이다. 선이 굵고 묵직한 강우석 감독의 판을 지탱하기엔 장진 감독의 스타일은 가볍게 들뜬다. 동시에 캐릭터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공공의 적>의 단선적 관계는 공익적인 메시지를 얹으며 다소 번거로워졌다. 학교 폭력과 청소년 문제에 관여하는 조폭들의 실상을 그리는 <강철중>은 누가 봐도 공익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그 안에는 작게는 상도덕의 윤리부터, 크게는 기업의 경영 윤리가, 게다가 대한민국의 조직적 위계질서에 대한 풍자까지, 넓은 현실관념의 메시지가 펼쳐져 있다. 문제는 이런 측면들이 더더욱 <강철중>을 경직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장진 감독의 유머가 녹아 들지 못하는 것도 이 심각한 사안들이 주제의식과 무관하게 극적인 유연성을 방해하는데 있다.
결과적으로 <강철중>은 ‘<공공의 적> 혹은 강철중 리턴즈’라 명명돼도 상관없는 작품이다. 하는 꼴을 봐서는 깡패인지 형사인지 구분하기 힘들 것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던 강력계 형사 강철중에게 호감을 보였던 이라면, 게다가 양복 차려 입은 검사 강철중이 정의를 주창하던 경직된 모습에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던 이에겐 더더욱 반가운 사실일 수도 있다 게다가 오리지널 <공공의 적>을 계승하는 만큼 본래 <공공의 적>을 채우던 캐릭터들도 고스란히 돌아왔다. 삼류양아치였던 산수(이문식)는 강철중 덕분에 학교(!)에 다녀온 뒤, 유흥업으로 성공해 외제차를 몰고 다니고 칼잡이 용만(유해진)도 정육점을 운영하며 건실하게 살고 있다. 또한 강철중과 애증을 나누는 엄 반장(강신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공공의 적>의 중요한 관점포인트가 다양한 조연 캐릭터들을 통해 얻어지는 굵직한 재미였음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은 <강철중>의 장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강철중은 서민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한국형 안티히어로에 가깝다. 그가 상대하는 악인은 언제나 부자이며 그들은 하나같이 비열하다. 게다가 강철중은 가난하고, 심하게 강직하지 않다. 계급적 정체성에 대한 풍자가 막연한 단상처럼 녹아있는 강철중은 분명 대한민국 서민들을 통감시킬 만한 자의식을 걸치고 있다. 게다가 그의 공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기 보단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 ‘형이 돈이 없다 그래서 패고, 말 안 듣는다 그래서 패고, 어떤 새끼는 얼굴이 기분 나빠, 그래서 패고, 그렇게 형한테 맞은 애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다.’ 다소 길지만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내뱉는 강철중의 대사는 결코 선한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사회를 부패시키고, 이를 좀먹고 자라는 무리들을 향해 그는 주먹을 날리고 맞짱을 뜬다. <공공의 적> 그리고 <강철중>에 어떤 쾌감을 느낀다면 분명 이 때문이다. 게다가 권력친화적이고 부에 관대한 대한민국의 알량한 공권력과 달리 강철중은 공권력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허구적이지만 실존적인 심판을 몸소 실천한다. <강철중>에 호감을 부여할만한 요인은 영화 외적인 환경에서 기인하는 바도 (분명) 존재한다. 게다가 미국산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광우병’ 위협에 시달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시의 적절한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