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돌아온 감독 김지운이 드디어 한국에서 다시 메가폰을 잡는다. 그런데 제목부터 심상찮다. <사랑의 가위바위보>라니, 코오롱과 함께 하는 단편 프로젝트의 일환이라지만 두 눈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그래서 그를 찾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촬영 중간에 모니터를 보는 모습이 영락없이 감독이더라. 피사체가 되는 기분은?
별로다(웃음). 사실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숨어서 무언가를 응시하는 관음증의 속성이 있다. 그래서 거꾸로 객체가 돼버렸을 때의 당혹감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보듯이 나를 보겠구나, 싶은 어색함. 모니터를 보는 건 그저 감독으로서의 직업병이고(웃음).
연출에 매력을 느낀 계기는?
어릴 때 극 안에서 배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극의 청사진은 감독의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연출에 매력을 느꼈다.
배우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던데.
이번에 찍을 단편 <사랑의 가위바위보>(가제)에 관해서 말했다.
가제이지만 김지운의 영화 제목이 그렇다니 쇼킹하다(웃음).
2000년도 초반에 제작비 10만원을 받아서 영화를 찍는 ‘10만원 비디오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사랑의 가위바위보>가 그때 기획된 단편이었다. 남산에서 크랭크인하고자 모였는데 비가 억수 같이 왔다. 10만원 예산 영화의 날짜를 미룰 수 없으니 비가 오지 않는 경기도로 가서 <사랑의 힘>이란 단편을 찍었다. 문소리 주연에 카메오로 송강호도 나온다.
로맨스 장르는 처음인데.
그 동안 너무 남자 이야기만 해서 여자 중심의 영화를 찍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 장편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마침 코오롱에서 단편 제의를 했고 묵혀둔 소재를 풀어낼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로맨스물을 거의 보지 않은 편인데 내게 낯선 장르가 내 영화적 감수성이 충돌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사실 전면적으로 새로운 장르를 시도한다는 건 모험이라서 이런 단편 작업은 점검의 동기가 된다. 브리지나 인큐베이팅의 역할도 되고.
도시, 자연, 사람이라는 테마에 자신의 개성을 녹여야 한다는 고민이 있을 것 같다.
아직 흐릿한 상태지만, 아웃도어 룩이 도시적인 룩의 한 형태로 자리잡아간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도시도 자연의 큰 범주라고 본다면 아웃도어 룩을 입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담아낸다면 ‘Your Best Way to Nature’라는 코오롱의 슬로건과 내 주제가 자연스럽게 버무려질 거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연출작에서 공간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계단의 이미지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 연인끼리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계단을 올라가고 따라가는 과정엔 그 관계에 관한 상징성이 있다. 가위바위보라는 게임에 잠재된 승부욕이나 계단의 상승적인 이미지로 연상되는 실현욕구는 사랑과 유사한 감정이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 방랑자처럼 보일 정도로.
항상 지금의 모순이나 괴로움에 대한 반대급부가 차기작에 대한 욕망으로 연결된다. <달콤한 인생>은 내면으로 침전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외향적인 영화가 떠올라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처럼 호쾌한 영화를 만들었다. 시각적인 스펙터클은 좋았지만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밀도가 빽빽한 <악마를 보았다>를 쥐어짜듯이 만들었다. 그런데 괴롭고 우울해서 B급 코드의 유머를 펼칠 수 있는 <라스트 스탠드>에 닿게 됐다. 내 안에 잠재된 호기심이나 벗어나고 싶거나 바꿔보고 싶은 욕망들이 결합되어 차기작에 반영되는 것 같다.
명확한 설계도를 그리고 작업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다.
A부터 Z까지 딱 떨어지게 계획하면서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통해서 점점 명확해진다. 배우가 들어오고, 의상이 들어오고, 공간이 생기고, 이야기가 점점 맞춰진다. 하루키의 말처럼 나는 프로그래머인 동시에 게이머인 셈이다. 어떤 결과를 프로그래밍하지만 게이머로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주제로 굳어가는 과정을 즐긴다.
아직 싱글인데, 특별한 이유라도?
너무 바빴다. 나도 그렇지만 상대방도 나를 길게 봐야 되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그런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한편으론 이 두 가지를 잘할 자신이 없고, 아직까진 자유로운 게 좋다. 그런데 <놈놈놈> 때 3개월 이상 외국에 나가야 되니까 짐을 싸는데 정말 혼자 싸기 싫어서 10시간 정도 짐을 싸다가 풀다가 반복했다. 와이프가 있다면 전화 한 통으로 필요한 걸 받을 수 있을 텐데 싶어서 그때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했다(웃음). 이번에 뉴욕에서도 외롭더라.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1년 4개월씩 있으니까 외로워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더라. 한국에서의 외로움은 선택이었는데 외국에서의 외로움은 완전히 박탈인 거다(웃음). 한편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홍상수, 임상수, 이처럼 영화를 잘 만든다고 생각한 한국 감독들은 다 결혼했더라. 박찬욱 감독은 딸 얘기하고, 봉준호 감독은 아들 얘기, 류승완 감독은 분유 얘기하고(웃음). 난 사명감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데, 일종의 사명감 같다. 어쩌면 가족에게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닐까. 일을 열심히 하면 자연스럽게 가족들에게서 벗어나는 거니까(웃음)
할리우드에서의 촬영은 어땠나?
초반엔 약간 현실성이 없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 뿐만 아니라 흑인 배우 중에 몇 되지 않는 아카데미 수상자인 포레스트 휘태커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니까 되게 신기하더라(웃음). 처음엔 LA에서 미팅을 할 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사람이 어쩌다가 내 앞에 있지(웃음)? 게다가 자신이 직접 출연하고 싶다고 온 거라니.
이병헌에 관해 들은 바는 없나?
<지. 아이. 조 2> 촬영장에서 이병헌이 연기할 때 스태프들이 모니터에 모여서 구경한다더라. 브루스 윌리스가 나올 때도 그렇진 않다던데. 일단 뿌듯하다. 물론 내가 키운 배우는 아니지만(웃음), 나와 오래 작업한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인정받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니까. 심지어 <레드 2>에 나오는 명배우들도 다 이병헌을 좋아한다더라. 일하는 사람들은 일 잘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주지 않나.
할리우드에서의 경험이 특별한 모티프가 되진 않을까?
할리우드에 대한 동경이나 욕망도 없었고 특별히 할리우드에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놈놈놈>과 <악마를 보았다>를 찍고 나니까 내게 영화 찍는 일이 즐겁지 않더라. 사실 <장화, 홍련>때부터 계속 제의가 왔었는데 새로운 공기가 필요했고 나를 다시 최악의 상태로 던져보자고 생각했다. 결국 <라스트 스탠드>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고, 그 목적은 할리우드 진출이라기 보단 한국에서 느꼈던 현장의 즐거움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차기작은 한국에서 할 건데, 할리우드에서도 <라스트 스탠드> 이후의 제안이 들어오곤 있다.
한 여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실종된 여자가 발견됐다. 흐르는 강물 안에서 머리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국정원 경호실장이자 그녀의 약혼자인 수현(이병헌)은 결심한다. 그녀가 당한 모든 것을 그 놈에게 되돌려주겠노라고. 그리고 수현은 비로소 놈을 만난다. 연쇄살인마 경철(최민식) 앞에 수현이 나타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악마가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꿔가며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한 게임을 거듭해 나간다.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 즉 복수를 그리는 여타의 스릴러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악마를 보았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과율을 통해 구동되는 장르적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단순히 스릴러 영화의 컨벤션으로 규정될 수 없는 불균질한 기질들로 ‘치장’된 작품이다. 극의 시작부터 후더닛 구조에 대한 미스터리 자체를 포기해버린,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린 <악마를 보았다>는 그 관계를 이루는 두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두 배우의 표정과 가학적인 행위를 통해 장르적(이거나 말거나 애초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는) 스토리텔링의 동력을 밀고 나가(려)는 영화다.
개봉 전부터 제한상영가 판정 문제로 도마 위에 오른 <악마를 보았다>에서 가장 부각되는 건 아무래도 폭력성의 강도일 것이다. 일단 <악마를 보았다>가 묘사하는 폭력의 수위는 특정한 장르물에 단련되지 않은 관객들이 손쉽게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감상의 결과값은 단지 그 폭력의 물리적 전시만으로 얻어지는 결과적 감상은 아닌 것 같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대단한 물리적인 질량감을 자랑하지만 그 폭력성을 더욱 깊게 체감하게 만드는 건 그 물리적 폭력을 간접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관객을 구석으로 몰아 넣는 심리적 압력이며 그 압력의 여백을 채우는 허무가 보다 강한 절망을 체감하게 만든다.
폭력이라는 행위를 묘사하는 방식도 가혹하지만 그 폭력으로부터 유린당하는 대상이 느끼는 수치감과 모욕감,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무화시켜버릴 만큼의 거대한 폭력에 압사당한 개인의 무력감이 극렬하게 전이된다. 사실 이 폭력성의 체감을 극대화시키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짐승과 같이 동물적인 욕망과 본능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연쇄살인마를 연기하는 최민식과 살해당한 자신의 약혼녀에 대한 복수를 위해 역시 무자비한 폭력적 행위를 불사하는 냉혈한의 면모를 선보이는 이병헌의 연기는 영화에서 정서적 온도차의 극단적인 대비를 이룸으로써 폭력적 심도와 너비를 극대화시킨다. 짐승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인간성이 결여된 듯한 연쇄살인마 경철과 그 폭력성에 맞서서 보다 강한 폭력을 구사하며 상대를 구석에 몰아가는 수현은 양극단에서 영화의 폭력성을 극단적으로 증폭시켜 나간다.
<악마를 보았다>는 일종의 게임이다. 짐승 같은 인간을 대면하게 된 어느 사내는 스스로 악마가 되어 자신의 분노를 상대에게 완전히 방출해내려 하지만 좀처럼 비워지지 않는 분노는 되레 허기처럼 채워지고 그 끝에 남겨진 건 파괴적인 절망에 가깝다. <악마를 보았다>는 마치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의 하드보일드적인 복기이자 선문답처럼 보인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양태에서 시작되는 <악마를 보았다>는 극단적인 폭력을 전시하며 장르적인 긴장에서 발생하는 쾌감과 거리를 벌린다. 특히 <악마를 보았다>는 극의 진행과 함께 초현실적인 시퀀스로 캐릭터들을 몰아넣으며 장르적 리얼리티라는 인력을 철저하게 거부해 나간다. 이는 마치 폭력에 대한 거창한 철학으로 위장된 가학과 피학에 대한 실험극처럼 보인다. 단지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의 발생을 포착한다라는 인상을 벗어나 어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과감한 폭력들을 거듭해서 연출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력하게 부여한다.
이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양날의 검이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극단적인 폭력의 시각적 체감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말 그대로 어떤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폭력을 거듭해서 보고 있다라는 직감 때문일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가 전달하는 폭력의 위력은 가학자에 대한 공포보다도 피학자가 느끼는 모욕으로부터 깊게 체감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폭력이 체감되는 방향 이후로 무엇이 진전되고 있느냐는 것. <악마를 보았다>는 어느 개인의 복수를 빌미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동시에 제도적 체계에 대한 강렬한 불신을 던진다. 다만 그 포장이 지나치게 비범하다. 단적인 예로 중반부의 산장신은 온전히 리얼리티로부터 이탈해버린 듯한 부조리극의 무대 위에서 연출되고 있으며 이는 이 영화가 제기하는 모든 물음들을 선문답의 영역으로 띄워 보내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남는 건 단지 폭력을 치장하는 극단적 이미지뿐이다. 극단적인 폭력의 연출은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어쩌면 이 현실 어딘가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하게 벌어질 수 있거나 혹은 이미 벌어진, 끔찍한 예언이자 재현일 수 있다. 다만 그 이미지들이 뭔가 대단한 어떤 의미의 담보처럼 전시되고 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 결과치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그것을 지지할 수 있을까. <악마를 보았다>를 비범하게 포장하는 대사와 표정들은 그 결말에 다다라서 완벽하게 휘발되고 말 것들에 불과하다. 악의로 가득한 이 영화는 극단의 폭력을 구사하고 있지만 폭력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이러니를 전시할 뿐, 자신의 아이러니에 답하지 못한다. 그 지독한 폭력들을 버티게 만든 영화 뒤에 남는 게 고작 허세 가득한 선문답적인 허무라니, 이런 낭비적인 복수가 어디 있나.
소녀는 꿈을 꾼다. 그리고 꿈은 언제나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녀는 어머니의 사고가 있던 날의 기억을 잃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중이다. 하지만 비로소 퇴원했고, 자신을 데리러 온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엔 반가운 언니가 있지만 반갑지 않은 새엄마도 머물고 있다. <안나와 알렉스: 두자매 이야기>(이하, <안나와 알렉스>)는 그 자매와 새엄마 사이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다. 안나(에밀리 브라우닝)와 알렉스(아리엘 케벨)는 아버지(데이빗 스트라탄)의 새로운 연인 레이첼(엘리자베스 뱅크스)을 경계하고 그녀를 주시한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을 리메이크한 <안나와 알렉스>는 분명 모체의 유전인자를 무시할 수 없는 골격과 외양을 지닌 작품이다. 이는 분명 <장화, 홍련>을 환기시키기 좋은 자질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안나와 알렉스>는 서정적인 감수성과 원초적인 기운이 얽힌 호러적 연출로 분위기를 장악하던 <장화, 홍련>과 전혀 다른 결과물이다. 자신의 유전적 영향력을 어필하기 보단 독자적인 개성을 공고히 다지려는 산물에 가깝다. 폐쇄적인 공포가 동화적 순수와 결합돼 발생시키던 중의적인 심리적 의문을 미스터리의 중추로 밀고 나가던 <장화, 홍련>과 달리 틴에이저 스릴러의 이미지와 함께 병리학적 콤플렉스 증세를 설명하며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미스터리를 설득시키려 한다.
<안나와 알렉스>에서 중시되는 건 인과적 내러티브다. 나열된 정보는 위장을 통해 관객의 의문에 혼선을 더하고 호러적인 연출을 덧씌우며 그 근본지점에 대한 추리를 차단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 인과관계는 분명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영화의 반전은 시점의 착시를 통한 눈속임과 허위적인 정보 제공으로 이뤄진 결과물에 가깝다. 명확한 인과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설득시키지만 결과물이 주는 쾌감은 효과적이지 않다. 그 인과관계가 뛰어난 구조적 자질을 통해 구축된 것이 아니라 시야를 제한하고 엉뚱한 것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거짓 정보의 향연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발생시키는 다양한 정보들은 결국 안나의 심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착란에 불과하다. 결국 관객은 그 모든 진실과 무관한 풍경을 보는 셈이다. 결국 그 진실을 목도하게 되는 순간에 충격을 느끼기 보단 뒤늦게 진실을 대면할 뿐이다. 놀라운 반전이라기 보단 속임수에 가까운 잡기다.
연출적 야심은 평범하고 복선들은 쉽게 허무해진다. 설득력은 있지만 놀라운 구석을 찾기도 힘들다. 하지만 때때로 평범하다는 말은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안나와 알렉스>는 그런 케이스의 영화다. 때때로 연출되는 호러적 이미지들이 식상하긴 하지만 이야기를 쫓아가는 재미는 적절하게 보장된다. 최소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장화, 홍련>에 매혹된 관객에게 하대 받을 가능성은 크지만 독자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야심에 걸맞은 결과물이라 평할 만하다. 분위기보단 설득에 치중했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의 대비는 동서양의 정서적 차이로 읽힐만한 구석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안나와 알렉스>는 타당한 면이 있는 결과물이다. 다만 좀 더 확실한 건 <안나와 알렉스>가 <장화, 홍련>보다 괜찮은 작품이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전자와 전혀 다른 야심을 지녔다 해도 그 그릇의 자질엔 분명 차이가 있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을 리메이크한 <안나와 알렉스: 두자매 이야기>(이하, <안나와 알렉스>)는 모체의 유전적 영향력을 어필하기 보단 자신만의 개성을 공고히 다지려는 산물이다. 물론 유전인자를 무시할 수 없는 골격과 외양은 전자의 기억을 소환하기 좋은 자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안나와 알렉스>는 서정적이며 원초적인 호러로 분위기를 장악하던 <장화, 홍련>과 달리 물리적인 실체를 동원해 미스터리를 설득시킨다. 폐쇄적이고 음습한 기운이 동화적인 순수와 결합돼 중의적인 심리를 풍기던 전자와 달리 후자는 전형적인 틴에이저 형태의 이미지에 병리학적 컴플렉스 증세를 더하며 인과적 내러티브를 완성해나간다. <장화, 홍련>의 분위기 자체에 매혹된 관객이라면 <안나와 알렉스>를 그만큼 하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독자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야심에 걸맞은 결과물이라 평할 만하다. 다만 연출적 자질은 평범하고 관객의 혼선을 도모하려는 복선들은 쉽게 허무해진다. 설득력은 있지만 놀라운 구석을 찾기도 힘들다. 평범하다는 말은 때때로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안나와 알렉스>는 아무래도 그 중간 즈음에 머문 영화 같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를 (의도적으로) 연상시키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The good the bad the weird>(이하, <놈놈놈>)은 전자의 명성에 무임승차하고자 조합된 문자 나열의 결과물 따위에 불과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놈놈놈>을 마카로니 웨스턴(스파게티 웨스턴)의 동양적(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적) 변주라고 섣불리 규정해버리는 것도 탐탁치 않다. 일단 <놈놈놈>의 부분을 채우는 다양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듯한, 그리 낯설게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 낯익은 이미지들이 조합된 전체적 형태는 낯설게 입력된다. 이는 그 이미지들이 조합된 결과물이 하나같이 과도기적인 형태로 혼재된 채 무질서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까닭이다. 이런 시각적 이해는 그 당시 주인이 불분명했던 만주벌판의 지정학적 요건과도 맞물려 교묘하게 시대상과 연관되어 작동한다.
스스로 ‘만주 웨스턴’이라고 (홍보문구를 통해) 자처하는 <놈놈놈>은 서부극의 건조하고 황량한 정서를 만주벌판에 대입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만하다. 본래 조선의 국토였지만 일제강점기와 함께 반허공에 떠버린 만주벌판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은 독립군이거나 일제앞잡이,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아나키스트적 개인으로 생존한다. 마적단 두목으로 무리를 이끄는 박창이(이병헌)나 독고다이 도적질로 살아가는 윤태구(송강호), 그리고 현상금 사냥꾼으로써 그들의 뒤를 쫓는 박도원(정우성)도 돌아갈 곳을 잃은 채 그 자리를 떠도는 아나키스트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덕분에 역사적인 의식 따위도 그곳엔 부재하다. 그들에겐 잃어버린 국가에 대한 사명감보단 생이 붙어있는 현실의 돌파구를 찾아내는 게 더욱 큰 관심사다. ‘나라가 없어도 돈은 있어야지’라는 박도원의 대사는 그들의 욕망 너머에 담긴 허무적 정서를 관통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웨스턴 무비란 장르적 명칭을 허한 지정학적 배후에 무의식적으로 녹아있던 무질서의 개념을 역전시키는 설정이다. 웨스턴은 본래 정복자들로부터 시작된 사연이다. 초창기 웨스턴은 서부 개척이란 역사에 토착민이었던 인디언들의 야만성을 부각시키며 그들에 대한 공격적 행위를 개척정신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장르의 폭력성을 설득했다. 그 후, 웨스턴은 점차 인디언을 몰아내며 서부를 점령한 총잡이들의 이익 쟁탈전으로 심화되고 폭력성의 연출과 비열함을 가미하는 마카로니 웨스턴과 정복자들의 자기 성찰을 덧씌운 수정주의 웨스턴으로 진화해 나간다. 주인 없는-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입장에서 없다고 판단된- 땅에서 펼쳐지는 총잡이들의 물고 물리는 대결의 양상은 무질서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그 맥락이 발생한 지점은 결과적으로 외부에서 유입된 정복자들의 오만한 정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웨스턴의 정서적 기운을 함축한 <놈놈놈>의 만주는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놈놈놈>에서 정서적 굴곡을 형성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망국의 자손들, 조선인이다. 만주는 일본 제국주의의 정복자들에게 국가를 빼앗긴 조선인의 망향지정이 서린 공간이다. 물론 그곳이 다양한 군락을 이룬 만주족들의 터이기도 하겠지만 <놈놈놈>의 주요맥락이 조선인 신분의 캐릭터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사안은 논외의 사안으로 간과될만하다. 사실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지니고 있었던, 혹은 그것이 응당 그러한 것이라 믿어지던 일련의 고정관념은 사실 그것을 잉태한 이들의 무의식에 정복의 역사를 합당하게 바라보는 관점이 개입된 까닭이다. 스스로 웨스턴을 표방한 <놈놈놈>은 그것을 의식했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웨스턴의 세계관이 지니고 있던 어떤 고정관념을 타파한 꼴이 됐다. 이는 <데어 윌 비 블러드>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이 공간성의 테두리로 잔존하거나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처럼 완전한 시대적 공간성으로 확보되는, 혹은 <3:10 투 유마>와 같이 활극의 요소를 가미한 자기 복제의 양상과는 확연히 판이한 꼴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놈놈놈>은 장르의 중심지대를 이양함으로써 장르의 한계를 이탈할 수 있다는 역설적 가능성을 시사한다. 애초에 영웅주의적 공식을 탈피한 마카로니 웨스턴의 시작이 미국 서부의 입지조건을 벗어나면서 형성됐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제목에서 명명된 세 명의 ‘놈’은 트라이앵글을 이루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구도를 형성한다. 캐릭터 삼각편대 구도 안에서 발생하는 빈번한 충돌은 활극의 스펙터클로 구사되며 이에 일제강점기 만주의 시대상과 신구가 맞물린 과도기의 이미지가 중첩되며 <놈놈놈>을 도가니탕의 신세계로 내몬다. 물론 노골적인 결말부의 삼자구도까지 확인하고 나면 전체적인 영화적 설정은 분명 세르지오 레오네의 그것과 접점을 이루는 면모가 다분함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놈놈놈>에서 실제를 구현하는 골격의 이미지가 아니라 가상적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한 기본적인 소스의 출처에 가깝다. 중국 대륙과 러시아 연해주, 제국주의 일본, 그리고 조선의 유랑민까지 다국적의 인간들이 혼재해있으며 말과 오토바이가 공존하는 신구 문명의 발전적 과도기가 혼탁하게 얽힌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한 <놈놈놈>은 일제강점기 만주의 과도기적 이미지를 적극 차용한 시대극에 근접해 있다. 물론 그것 역시 사실적인 시대적 모사(模寫)로서가 아닌 전반적인 영화적 디테일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산재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놈놈놈>은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활극적 모험담으로 규정될만한 것이다. 시대상과 지역성을 기초로 융합되어 가공된 영화만의 특수한 이미지들은 실제 연대를 가늠하되 현실적 시공간을 망각하게 만든다. 동시에 탁월하게 세공된 스타일을 자랑하는 캐릭터들이 펼쳐 보이는 활극의 동선은 제각각 오락적 반경을 확장해나간다. 대립적 갈등의 심리 묘사보단 외부적 충돌의 파괴력을 묘사하는 것에 중점을 둔 대결양상의 화려함도 이를 보탠다. 박창이와 윤태구, 박도원이 처음으로 접점을 이루는 기차 탈취 씬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발생하는 박진감은 윤태구와 박도원이 손을 잡고 박창이의 무리와 대결하는 시가지 총격씬을 비롯해 크고 작은 액션 시퀀스를 점층적으로 나열한 뒤, 후반부 평원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추격전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현란한 동선을 쫓는 필사적인 트래킹 샷과 거대한 평원을 스펙터클하게 펼쳐 넣는 부감 숏 등 장면을 효과적으로 비추는 구도적 능숙함과 고난이도의 액션에 만화적인 연속성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카메라 워크의 민첩한 노력은 <놈놈놈>의 세련된 이미지를 완성하는 가장 큰 공신이자 탁월한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쟁글거리는 기타 선율과 리드미컬한 퍼거션으로 채워진 남미 계열 멜로디와 일렉기타와 신디사이져음을 대거 차용하며 현대적 감각으로 복기된 웨스턴 풍의 음악으로 채워진 사운드트랙도 장면과 결착한 순간마다 절묘한 시너지를 발산한다.
물론 드라마상의 맥락이 드물게 느슨해지는 경향은 존재한다. 세 명의 주요 캐릭터가 격돌하고 다시 흩어지는 반복적 이야기 구조는 방대한 스케일만큼이나 산재한 조연들과 함께 개별적인 동선에서 빚어지는 각자의 사연을 크고 작게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종종 팽팽하던 실이 느슨해지듯 풀려나가는 경우가 발견된다. 크고 작게 강약의 강세를 반복하듯 진행되는 내러티브의 흐름에서 강약의 간극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발생하는 경우에 종종 발견되는 면이라 할 수 있다. 전후 구조에서 전반부의 세기가 강했을 때, 상대적으로 후반부의 세기가 약할 경우 격차가 크게 느껴지는 이치다. 게다가 <석양의 무법자>를 완전히 본뜬 듯한 결말부의 설정은 그 의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아챌 경험의 기반이 없는 관객에게는 지독한 허무주의로 인식될 위험성도 분명 존재한다.
전반적으로 캐릭터의 역할 배분은 배우의 능력(?)마저도 고려한 듯 적절하게 안배됐다. 특히 입담을 자랑하는 송강호는 언제나 그렇듯 발군이며 가장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캐릭터 박창이를 연기한 이병헌은 자신의 역량과 노력을 보태며 철저히 캐릭터에 몰입한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세 캐릭터 중 가장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박도원 역을 맡은 정우성의 이미지를 능숙하게 활용한다. 영화 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화려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박도원은 심리적 내면을 깊게 드러내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놈놈놈>의 세련미를 구축하는 전반적인 포석으로써 날고 뛰며 겨눈다. 물론 캐릭터의 갈등 지점이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한다. 중반부부터 형태를 드러내는 윤태구를 향한 박창이의 집착은 후반부에서 의문을 명확히 해소하지만 박도원이 다소 의아하게 박창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이유는 마지막까지 명확하지 않다.-단지 좋은 놈이라서?- (등장 자체만으로도 인상적인 감상을 부르는 배우들로 이뤄진) 캐릭터의 삼각관계가 역할에 맞아떨어지는 이미지의 구도를 형성하며 일정한 상승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은 확실한 묘미를 부여하지만 그 구도의 결속력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은 지적될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놈놈놈>은 단연 즐길만한 여지가 풍부한 오락영화이자 일정한 수확을 얻었다고 여겨도 좋을법한 장르적 시도의 결과물이라 평가할만하다. 동시에 김지운 감독 특유의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전체적인 미장센과 적절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연출력, 확실한 몰입도를 선사하는 인상적인 액션의 응집력은 분명 수훈이다. 과거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고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기대를 모았던 몇몇 대작들의 초라한 결과물과 비교했을 때 <놈놈놈>의 성과는 더욱 뚜렷해진다. 새로운 소재에 도전하는 과감성과 함께 탄탄한 연출을 통해 정석적인 성취를 거둘 줄 아는 방식은 분명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놈놈놈>은 김지운 감독 본인의 말대로 ‘걸작'이나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만큼은 분명 간과할 수 없는 흥미로운 영화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