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전 11시 30분, 강남구 신사동의 에브리싱 노래연습장에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주재로 ‘음악산업 진흥중기 계획발표’가 개최됐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운영하는 멀티플렉스 공간이라고 했다. 대중음악산업에 관련된 다양한 인사들과 취재진을 수용하기에 장소는 비좁아 보였다. 이 자리에서 유인촌 장관은 “미국 빌보드차트와 견줄 만한 한국 대중음악(K-POP) 차트와 미국 그래미상 같은 대중음악 시상식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공신력 있는 음악산업 기본통계를 마련해 이를 바탕으로 보다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시스템이 구축된 대중음악시상식을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국내음악산업의 권위를 높이고 한류를 재점화하겠다고 천명했다.
비주류 음악산업 지원정책안 발표가 뒤따랐다. 우수신인을 발굴해 각종 방송과 음악 페스티벌에 연계시키고 후원하겠다는 내역이다. 상암동 콘텐츠홀을 리모델링해서 대중음악전문공연장을 구축하겠다는 계획도 공개됐다. 현재 리모델링이 진행되고 있는 올림픽홀은 차후 대형공연장으로서, 상암동 콘텐츠홀은 인디나 신인 뮤지션을 위한 공간으로 전용화시키겠다는 구상이다. “향후 5년간 국고 1275억을 투입해서 지난 해 8440억 원이었던 국내 음악시장을 1조 7천억 단위 규모로 성장시켜 세계 10권 음악시장으로 도약시킬 것”유인촌 장관은 당당한 포부를 밝혔다.
같은 날 오전 10시 30분, 한국언론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한국대중음악상 수상 후보와 개요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음악평론가와 전문기자, 교수 등 52명의 선정위원단의 심사로 선정된 수상후보작들이 공개됐다. 올해로 6회를 맞이하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은 26일 저녁 7시 건대 새천년홀 대공연장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이지선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장이 문광부 담당자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건 지난 18일이었다. 지원금이 축소되거나 지원 자체가 철회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19일, 문광부 담당자는 지원금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시상식 예정일을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소신주의
한국대중음악상은 문화연대와 문화일보의 공동주관으로 시작됐다. 당시 선정위원 중 한 명이었던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가 문화일보 사업부를 설득해 광고수익을 지원하는 형태로 한국대중음악상의 재정을 마련했다. 하지만 대안적인 시상식을 모토로 둔 대중음악시상식이 언론사의 산하에서 행사를 거듭한다는 것에 대한 내부적 이견이 발생했다. 대안적 취지가 중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독립된 단체를 설립해 행사를 진행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상업성과 타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정확보를 충당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가장 좋은 방식은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통로가 없었다. 문화예술위원의 문예진흥기금이나 서울문화재단의 시민활동공모사업은 시민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정책이다. 기획단체인 한국대중음악상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상시적이지 않은 시상식은 지원요건이 없다. 하지만 2회까지의 경력을 담보로 선정위원장을 비롯한 선정위원 몇 명이 문화산업부 국장을 찾아가 설득했다. 결국 3회부터 5회까지 3년에 걸쳐 문광부의 지원이 이뤄졌다. “교부신청서는 사전에 어느 정도 지원에 대한 약속이 이뤄지지 않고선 제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임의적인 요청이 아니라 사전 신청에 대한 합의에서 비롯된 행정상의 절차다. 3년 동안 그 과정을 거쳐 지원을 받았고 올해 역시 작년 12월부터 지속적으로 지원 규모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이지선 사무국장의 말이다.
문광부 담당자는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에 지원불가에 대한 이유로 핵심 사업 추진에 따른 예산 부족 때문이라 설명했다. 이 사안이 언론에 전해지자 기자들의 문의와 국회의원 질의가 문광부에 이어졌다.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 쪽에서 지원금 교부 신청이 늦었고 그에 따른 행정절차가 늦어져서 지원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문광부의 입장이 보도를 통해 전달됐다. “우리도 기사를 통해서 알게 됐다. 하지만 교부 절차는 예년과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올해는 예년보다 빠른 편이었다.”당초 사무국은 예년처럼 3천 만원 지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1월 중, 잘하면 5천 만원까지 지원이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문광부 담당자의 귀띔을 듣고 1월 말, 5천 만원으로 금액을 맞춰서 지원금 교부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다가 다시 5천 만원까진 어렵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래서 2주가 지난 2월 10일경에 3천 만원으로 금액을 낮춰서 재교부 신청을 했다. 하지만 19일까지 통장은 채워지지 않았다. 이지선 사무국장은 말한다. “나라 예산이 어떻게 기획되고 운영되는지 일일이 알진 못해도 작년 말부터 어느 정도 예산편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지난 3년간 지속됐던 지원이 이렇게 단 시일 만에 끝날 수 있나.”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말한다. “정책 방향을 떠나서 인간적인 기본 예의에 대한 문제 아닌가. 3년 전부터 지원이 이뤄진 만큼 우리 측도 그 예상에 맞춰 관례대로 준비해온 부분이 있고, 실무진 차원에서도 어떤 문제가 없을 거란 판단이 있었기에 느닷없는 통보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지 않겠나.”올해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은 문광부 지원금 3천 만원과 네이버의 후원금 2천 만원을 더한 5천 만원 가량의 시상식 비용을 예상했다. 그에 따라 시상식 행사로 예정된 건대 새천년홀 대공연장 대관 선금을 지불했고, 예산에 맞춰 트로피 재질을 결정해 제작이 이뤄졌으며 기념음반제작도 이미 마친 상태다. 이미 2천 만원 가량의 비용이 지출된 상태에서 문광부 지원금이 사라진 셈이다. 네이버의 지원은 후원 형태로 이뤄진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규모와 격식이 있는 시상식이 전개될 때’라는 전제가 붙는다. 음악전문방송사인 ‘엠넷(M.NET)’의 녹화중계도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건대 대공연장 대관이 물 건너간만큼 방송 여부도 불투명해졌다. 선금은 지불했지만 문광부 지원 철회로 잔여금의 지불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대관은 커녕 선금조차 눈먼 돈이 됐다. 네이버 후원금도 반토막이 났다. 없는 살림이 더욱 팍팍해졌다.
문광부의 최성훈 전략컨텐츠산업과 주무관은 이같이 말한다. “예산 수립 과정에서 3천 만원 정도의 단위까지 세세한 예산의 집행이 결정되는 건 아니다. 분야별로 덩어리 단위로 결정돼서 수립된 뒤 부서로 넘어오면 부서별로 집행 금액이 산정되기도 한다. 3천 만원 정도 단위는 과장 선에서 임의적으로 결제를 결정하는 수준이다. 한 마디로 매년마다 집행에 대한 여부가 결정되는 거지, 이미 예정된 바라는 건 없다. 한국대중음악상 역시 지원 결정 후 철회된 게 아니라 검토 중 최종적으로 불가하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뿐이다.”한국대중음악상 지원금액에 대한 결정은 문광부 전략컨텐츠산업과의 자율반사적인 정책이란 셈이다. 대뇌의 지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다. 하지만 대뇌의 변화는 신경계 전체에 영향을 준다. 한국대중음악상 지원이 약속된 건 이전 참여정부 정권이었다. 5회 시상식이 열렸던 작년 2월 역시 참여정부의 마지막 임기였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다. 정책의 변화가 있다는 의미다. 자율신경계에도 이상조짐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년과 같이 조건반사처럼 대응했던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은 뒤통수를 맞았다. 특별한 이상징후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공교롭게도 유인촌 장관의 ‘한국의 그래미’발언 역시 한국대중음악상 기자회견이 있던 4일에 이뤄졌다.
문광부는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골든디스크 시상식도 지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골든디스크와 한국대중음악상은 체급이 다른 행사다. “골든디스크는 일간 스포츠를 비롯해 기업들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다. 대중음악시상식은 민간단체가 주도하는 시상식이다. 법인도 아닌 단체다. 두 시상식의 지원 철회가 형평성 있는 정책으로 내세워진다는 건 재벌과 서민에 대한 복지 철회를 동등하게 여기는 것과 다를 게 뭔가.”대중음악평론가이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인 김작가의 말이다. 골든디스크 공식 홈페이지만 봐도 한국대중음악상과 차이가 확연하다. 스폰서 목록만 봐도 확실하다. 노는 물이 다르다. 두 시상식은 엄연히 목표가 다르다. “한국대중음악상은 기존 방송 매체의 대안적 성격을 지닌 시상식이니만큼 상대적으로 매체들은 방어적 자세가 강해질 수 밖에 없다. 기존 방송들의 지원은 어렵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김창남 교수의 말처럼 한국대중음악상은 기업들의 선전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는 행사가 아니다. 이지선 사무국장은 말한다. “스폰서기업을 적시해줘야 지원이 쉽다. 기업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기업명을 딴 xxx상이란 시상식이 거행되는 걸 바라지 않겠나.”한국대중음악상의 소신으로선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시장주의
지난해 말, 문광부에서 구성한 자문위원단의 ‘음악산업 진흥중기 계획’에 대한 정책적 자문이 있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중 한명인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대표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저 예산수립을 위한 자문일 뿐이다. 시간 소요도 2시간 가량에 불과하다. 예산이 깎일 수 있다는 전제하에 자문이 이뤄진다. 확정안이라기 보단 기획재정부로 들어가기 전 단계 내역에 불과한 셈이다. 어쨌든 그 당시 비주류 음악 지원 정책은 2가지로 명시됐다. 비주류 음악 시상식, 즉 한국대중음악상과 인디 음악에 대한 지원이다.”예산 편성을 위한 과정에서 한국대중음악상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는 말이다. 결제과정에서 배제됐다는 건 결국 상위 단계에서 정책적 고려가 배제됐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심케 한다. 문광부 전략컨텐츠산업과의 장치영 사무관은 말한다. “한 가정의 가족은 가장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법이다. 장관이 ‘선택과 집중’을 위해 정부의 통합 시상식을 지원한다고 했다.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나.”
선택과 집중의 방향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산업 중기진흥 계획발표’에서 눈에 띄는 핵심사업이 있다. 유인촌 장관이 발표한 정책의 골자는 크게 두 가지다. ‘한국의 그래미상 신설’과 ‘비주류 음악산업 지원정책안’, 하지만 후자보단 전자가 눈에 들어온다. 해외방송 연계 인디뮤직 홍보지원이나 우수신인 뮤지션 선정 및 지원, 대중음악 활성화 지원은 이미 지난 정부에서부터 이어져오던 것이다. “모 국회의원 보좌관을 통해 계획안을 전달받아서 원문을 봤다. 사실 인디 씬이 주목 받던 90년대부터 시행됐던 정책들과 큰 변화는 없는 내용이다. 인디 레이블 지원사업이 이미 아티스트 지원 형태로 변형된 것도 재작년이다. 우수 신인을 발굴해 방송이나 페스티벌 무대에 진출시킨다는 것도 예전 정책이다. 명칭만 변했을 뿐 개선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 사실상 인디 지원은 구색맞추기에 불과하고 시상식과 차트가 핵심사업처럼 보인다.”이지선 사무국장의 말이다. 새로운 정권에서 비주류 음악산업 지원정책은 큰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큰 변화는 시상식과 차트에 있다. 물론 인디 지원 정책 중 전문공연장 구축도 눈에 띄는 대목이긴 하다. 그러나 플럭서스 뮤직 김진석 이사는 말한다. “솔직히 댄스음악 일색의 아이돌 그룹에게 전문공연장은 절실하지 않다. MR틀어놓고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건 대형홀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아이돌 가수를 옆에 세워둔 채 그래미를 발언하고 대중음악인을 위한 전문공연장을 언급한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새로운 정권의 정책 추진력이 새로운 정책에 실릴 것이란 예측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의 그래미와 공인차트는 음악산업 진흥을 위한 MB정권의 핵심 탄환인 셈이다. 김진석 이사는 말한다. “일단 흥미롭긴 하다. 다만 중요한 건 지금 유인촌 장관 옆에 누가 있느냐가 아닐까. 그날 보도된 기사 사진을 보니 SM가수 몇 명이 함께 서 있더라.”김작가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장관이 발표한 장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SM 엔터테인먼트에서 운영하는 노래연습장에서 그런 발언이 나왔다.”장소 섭외에 관여했던 한국문화콘텐츠 진흥원의 관계자가 말했다. “호텔 연회장이나 문화부 5층 회견장, 상암동 문화콘텐츠센터, 멜론 악스홀 등 장소에 대한 다양한 고려가 있었다. 그러다 산업적 현장에서 행사를 진행하자는 중론이 있었다. 공연장도 좋지만 음원의 소비가 이뤄지는 사업장이 괜찮지 않을까라는데 의견이 모였다.”대중음악의 산업적 현장으로 채택된 장소가 노래연습장이라는 의미다. 현정부가 문화적 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이 도출된다. 창작보단 소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시장주의자의 눈이다.
“한국연예제작가협회와 한국음원제작가협회 주관 하에 정책이 기획된다는 말을 들었다. 음반산업관계자 가운데 메이져 기획사 위주로 참여도가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김작가의 말처럼 지난 달 4일, 유인촌 장관의 정책발표가 있었던 노래연습장에선 이덕요 한국음원제작자협회장, 지명길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 정광태 연예제작자협회 부회장 등과 같은 유관 단체장과 김영민 SM엔터테인먼트 대표, 양민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 정욱 JYP엔터테인먼트 대표 등과 같은 메이져 연예기획사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책발표의 맥락은 상하를 염두에 둔 것이나 실질적으로 적극적인 기대효과를 드러내는 건 상층부에 불과하다. 김작가는 말한다. “DJ정부나 참여정부 시절부터 문화산업에 대한 정부의 관점은 산업적 골자에 불과했다. 항상 수출산업의 기반으로 문화를 규정하니 그 끝에 역점을 두는 건 한류다. 이번 정권도 다를 게 없어 보인다.”장관의 계획 발표가 있었던 당일, KTF뮤직의 주가가 상승했다. 음원시장에 대한 수요를 전망한 투자 움직임이 관측된다. 시장주의자들이 기대심리가 탄력을 얻고 있는 셈이다.
정책주의
한국대중음악상은 당초 ‘엠넷’에서 중계 녹화가 예정돼 있었다. 후원의 형식으로 참여한 덕분에 중계권료는 지불하지 않는 형태로 사전협의가 이뤄졌다. 지금까지 ‘엠넷’은 무대 연출까지 참여했던 1회 시상식을 비롯해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을 중계를 3번 치른 전력이 있다. 이지선 사무국장은 말한다. “어차피 공중파 방송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시상식과 취지가 어울린다고 판단되는 EBS에 타전해본 적은 있다. 작년엔 OBS 주철환 사장이 의지를 표명해서 중계되기도 했다. 올해도 원래 ‘엠넷’에서 3월 방송 편성이 약속돼있었다. 하지만 시상식 규모가 축소되면서 일단 유보된 상태다.”한국대중음악상이 중계 형식의 후원을 ‘엠넷’에 요청했다. 그리고 ‘엠넷’은 이를 수용했다. “이 시상식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케이스다. 하지만 규모와 상관없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동네 강당에서 하더라도 녹화를 위해 나갈 의향이 있다. 우린 음악 전문 방송국이다. 우리마저 공중파처럼 편협하게 메인스트림을 지향한다면 음악적 다양성은 살아남을 수 없다.”홍수현PD의 말이다. “한국대중음악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판단도 있었다.”는 문광부 관계자의 의견과 대조적이다. 현장의 의견과 탁상의 의견이 배치된다. 그러나 결정권은 탁상공론을 통해 행사된다.
한국대중음악상은 대안적인 시상식인만큼 기존의 시상식들과 다르게 인디뮤직과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수상 내역에 포섭했다. 평론가들의 잔치라는 일부 비판도 있었지만 메인스트림과 인디펜던트의 가교 역할로서 역할을 다져나가고 있다는 중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조금씩 영향력이 발생하고 있다는 의미다. 문광부는 인디음악 지원사업에 대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그럼에도 한국대중음악상은 단지 민간단체의 시상식이기 때문에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반사업자들의 문화관련지원 문의가 매일같이 들어온다. 한국대중음악상만 배려하기 어려운 입장이다.”최성훈 주무관의 말이다. 현재 국내대중음악시상식 중 주요행사는 4가지로 꼽을 수 있다. ‘하이원 서울가요대상’과 ‘MKMF 뮤직 페스티벌’, ‘골든디스크 시상식’, 그리고 ‘한국대중음악상’이 이에 해당된다. 이중 상업적인 후원과 거리를 둔 시상식은 ‘한국대중음악상’이 유일하다. “상업성과 거리가 있는 의미 있는 행사일수록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 대중음악산업의 주류 업계와 접근성이 높아진다면 얼마나 공정하고 의미있는 시상식이 거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김창남 교수의 말처럼 ‘객관적인 음악적 성취를 평가하는 시상식’으로서의 가능성에 가장 근접한 것이다.
홍수현 PD는 말한다. “그래미나 한국 고유의 차트를 만드는 것도 좋지만 현재 우리나라 음반업계 현실을 좀 더 명확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차트가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선 집계방식의 공정성도 중요하지만 씬 전체의 활기가 중요하다. 단순히 몇몇 대형 레이블이 지배하는 형태로 음악계가 활성화된다면 결국 차트 집계방식의 공정성도 무색해질 수 밖에 없다. “사업자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기 때문에 공신력 있는 차트의 마련이 필요하다. 나라에서 공인차트를 지정할 순 없다. 단지 협의의 장을 마련할 뿐이다. 관보처럼 게재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지 않나. 사업자를 선정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저작권 신탁 단체 등과 같은 각종 단체들과의 입장 차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것이다. 해외 홍보 마케팅을 비롯해 국내 콘텐츠 품격의 상승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최성훈 주무관의 변이다. 그러나 엠넷 홍수현 PD는 말한다. “차트는 어떤 사람이 만들어도 공정하다고 평가하기 힘들다. 우리도 10년 동안 차트를 유지하고 있지만 4달 마다 차트 선정 방식에 변화를 준다. 음악산업의 변화가 그만큼 유동적이기 때문이다.”어느 사업자가 선정된다 해도 그 차트를 과연 공신력 있는 차트라고 인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관료제 조직의 하청 형태로 완성될 차트가 유동적인 시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게다가 현재 방송국이나 음반사와 같은 각 사업자마다 개별적으로 집계하는 차트와의 충돌을 감소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지난 2월 8일에 개최됐던 그래미 시상식은 올해로 51회를 맞이했다. 그래미의 역사는 미국 음악의 오랜 역사를 증명한다. 빌보드 차트 역시 마찬가지다. 영국의 UK차트, 일본의 오리콘 차트도 그 나라의 음악산업의 너비와 깊이를 증명하는 일종의 표지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래미와 빌보드는 행정적인 기획을 통해 이뤄진 결과물이 아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문화적 성취에서 출발한 자생적 성과다. 다양한 장르적 무브먼트가 태동하고 씬의 활성화가 적극적일 때 그 성취에 대한 명예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문광부의 지원을 얻지 못한 한국대중음악상은 오는 12일 학전그린소극장에서 시상식을 거행한다. 김창남 교수는 말한다. “시상식 자체를 최소화하거나 시상식 거행이 어려워지면 선정만이라도 유지하는 방식을 고수하려 한다.”한국의 그래미가 발표됨과 동시에 한국대중음악상이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문광부 관계자는 말했다. “그래미하려고 한국대중음악상에 지원한다는 건 오해다.”그저 오해다. 이에 대해 김진석 이사는 말한다. “유지되고 있던 시상식의 지원철회로 존속위기를 부른다는 게 말이 되나. 그래미를 만들기 전에 현재 씬에서 보존할 수 있는 모델을 찾는 게 낫다. 음악의 산업적 측면만 너무 부각하는 거 같다.”그래미는 선점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미의 시작이 지금의 그래미가 아니었듯이 한국대중음악상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 싹이 말라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MKMF 뮤직 페스티벌’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국내 시상식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제각각 시상식의 특성에 맞는 권위가 다양하게 자리잡고 발전할 수 있는데 그걸 굳이 인위적으로 통합하려는지 모르겠다.”홍수현 PD의 말이다. 이해관계가 다른 사업자 사이에서 인위적으로 통합적 사업을 모색하는 건 쉽지 않다. 개별적인 자생력을 채색해 나갈 수 있는 밑그림을 만들어주는 게 오히려 실용적인 방안에 가깝다.
장관의 정책발표 현장에 동석한 원로가수 정훈희가 질문을 던졌다. “대중문화에 기여한 대중음악인에 대한 군면제 혜택을 시행할 의향은 없나요?”이에 유인촌 장관이 답했다. “가수들도 군대는 반드시 가야 한다. 다만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에 연기가 가능하거나 연예 활동의 연장선에서 군 복무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객석에 앉아있던 관계자 모두가 박수를 쳤다. 샤이니와 태연이 등장해 공연을 펼친 건 그 뒤였다. 노래연습장 기기의 반주에 맞춰 라이브로 공연을 했다. 현장에 있었던 한 기자가 말했다. “정책발표를 취재한다기 보단 자축연을 구경하는 외부인 같았다.”문광부 관계자는 조만간 정책 실무자들이 음악산업선진국들의 해외실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했다. 그들이 과연 무엇을 보고 돌아올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이미 방향은 정해졌다. 51회 그래미를 동경하는 문광부는 5회 전통의 한국음악시상식엔 관심이 없다. 한국음악산업을 위해 소비될 1275억 원 가운데 한국대중음악상을 위해 할애될 3천만 원은 없는 셈이다. 실로 무심하고 시크한 선택과 집중이다.
1월 30일, 군포여대생 납치살해 용의자로 검거된 강 모씨가 입을 열었다. 경찰은 당일 오전 강 모씨가 경기 서남부 연쇄 실종자 여성 7명을 살해했음을 자백했다고 발표했다. 사건의 본질이 달라졌다. 더욱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사건의 체급이 오른 만큼 언론보도의 비중도 급격히 변했다. 30일을 기점으로 공중파 방송국 3사의 저녁 메인 뉴스는 더 이상 강호순의 실명을 가리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미 27일 첫 번째 현장검증 이후, 일간지에서는 강호순이란 이름 석자가 알게 모르게 활자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공중파 방송에서 강호순의 이름 석자가 고스란히 들려온 건 30일에서였다. 연쇄 살인범의 신원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송출됐다.
1월 31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지면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언론과 여론이 함께 술렁였다. 얼굴공개 논란이 얼굴공개로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1면에 얼굴공개 기사를 게재했다. 중앙일보는 4면이었다. 조선일보가 좀 더 대담했다. 당일 저녁 SBS 8시 뉴스에서도 강호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1시간 뒤, KBS 9시 뉴스에서도 강호순의 얼굴이 드러났다. MBC 뉴스데스크가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건 하루가 지난 2월 1일이었다. 역시 하루가 지난 2일엔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타 일간지에서 강호순의 얼굴을 나란히 게재했다. 반면 한겨레와 한국일보는 강호순의 얼굴 대신 얼굴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지면을 통해 독자에게 알렸다.
신문과 방송
얼굴 사진을 입수한 건 비단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뿐만이 아니었다. 일간지나 방송국이나 가릴 것 없이 이미 강호순의 얼굴공개에 대한 논의는 각기 내부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단지 시점이 문제였다. 과거 신정아의 누드 사진을 게재한 문화일보처럼 선정성의 뭇매를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사생활 침해에 대한 손가락질보다 극악무도한 흉악범에 대한 주홍글씨가 선명했다.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유력했다. 선봉에 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깃발을 꽂은 것도 그런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지난 1월 31일자 지면에서 강호순의 얼굴공개에 관한 입장을 게재했다. 중앙일보 유건하 기획전략팀장은, “일일이 제작과정을 이야기할 순 없지만 편집권에 대한 심사숙고 끝에 내부결론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SBS와 KBS의 저녁 메인 뉴스가 뒤를 따른 건 우연이 아니다. 필연적인 타이밍이었다. “보도국장, 팀장 선에서 간헐적인 논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단지 추이를 살피던 중이었다. 결국 31일 오전회의에서 갑론을박 논의 끝에 방송이 결정됐다.” KBS 정은천 사회부 팀장의 말이다. SBS의 입장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SBS 양철훈 편집부 부국장에 따르면, “애초에 편집부 차원의 고민이 있었다. 31일, 보도국 전체 편집 회의 차원에서 논의됐고, 부장 선 토론으로 결정됐다. 조선과 중앙에서 먼저 얼굴을 공개한 마당에 딱히 얼굴이 가려질 의미가 없어졌다는 판단이 우세했다.”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습적인 보도가 방송사를 움직이는데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허를 찔린 건 아니었다.
“조선과 중앙의 보도가 공개 논의의 단초가 된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방송과 신문은 신의의 잣대나 파장이 다르다. 이 부분의 고민이 있었다.” SBS 양철훈 편집부 부국장의 말이다. 누군가가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편해질 일이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물꼬를 텄다. 방송사의 고민을 어느 정도 덜어준 셈이다. 신문이 정보를 선점했다 해도 방송의 위력은 차원이 다르다. 조간신문의 보도 이후의 저녁 뉴스는 늦은 것이 아니다. SBS와 KBS가 차례로 강호순의 얼굴을 뉴스에 내보낸 시점은 주효했다. 이상한 건 MBC였다. 31일 당일에 침묵했던 MBC는 다음 날이 돼서야 MBC뉴스데스크를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익명을 요구한 타방송국의 인사가 의문스럽게 말했다. “타사보도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의아했다. 어째서 하루 늦게 방송을 했을까. MBC가 고민한 지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MBC 역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보도에 반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MBC 김성환 수도권 팀장은 말한다. “사진은 이미 강호순의 검거 당일에 입수됐다. 다만 이를 공개할 것인가, 라는 내부 논란이 계속됐다. 당일 편집회의에서 보도 시점은 결정된다. 얼굴공개까진 하지 말자는 의견이 우세했던 30일과 달리 31일엔 논의가 좀 더 깊어졌다. 그리고 2월 1일엔 논의가 무색해진 경향이 있었다. 타방송사에서 보도가 된 상황에서 우리가 얼굴을 가린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섰다.” MBC는 좀 더 신중했다.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방송의 공정성을 내세워 공영방송 사수라는 기치를 내거는 MBC가 앞장 설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방송에서마저 강호순의 얼굴이 알려진 마당에 MBC의 고민은 무의미하다는 내부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니고 있는 정보를 묵힐 수 없다는 의견이 점차 힘을 얻었다. 타방송국보다 하루가 늦은 시점에서의 보도는 무색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껍데기는 유효했다. 시의적 효력은 상실됐지만 정보 차원의 목적에서 접근할 필요가 없었다. 자체적인 의사표명이 중요한 사안이었다. MBC의 내부적 합의는 그렇게 이뤄졌다.
언론과 여론
강호순의 얼굴공개는 달리기가 아니라 꼬리잡기였다. 속도전보다도 탐색전에 가까웠다. 방송사는 두 일간지의 꼬리를 잡았다. 하지만 두 일간지도 머리는 아니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얼굴공개의 원칙으로 내세운 건 ‘국민의 알 권리’였다. 여론의 요구에 부응한 정보라는 점을 앞세웠다. “기사를 작성한 경위의 논리에 대해서는 이미 지면에서 충분한 입장을 밝힌 셈이라 본다.”김수혜 조선일보 기동팀장이 잘라 말한 것처럼 조선일보는 지난달 31일자 지면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자사 입장을 기사로 전했다. ‘반 인륜범죄자의 얼굴을 마땅히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눈에 띄는 대목이다. 중앙일보 역시 ‘공익을 위해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이름, 얼굴 공개’라는 헤드라인으로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즉흥적인 반응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이 발생한 끝에 여론의 요구가 높아진 끝에 응답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극악무도한 인면수심의 사건이 거듭되고 이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여론화되는 시점에서 언론이 방관할 순 없는 사안이다. 신문은 여론은 대면하는 매체 아닌가.”중앙일보 유건하 팀장의 말이다. 방송국의 입장표명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방송국 3사는 이번 얼굴공개가 ‘국민의 알 권리’와 ‘여죄의 제보’를 위한 것이라는 공통적 견해를 밝혔다. 국민을 위한 공익이 얼굴공개의 목적이란 이야기다.
지난 1일 오전, 강호순의 자백에 따른 추가 현장검증을 위해 군포경찰서를 떠나기 직전 기자들과의 질의 대면이 있었다. 첫 번째 질문이 나왔다. “어제 얼굴이 언론에 공개됐는데 심정이 어떠세요?”강호순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를 대신한 건 오후 5시경 경찰의 브리핑이었다. 군포경찰서 이명균 강력계장은 그 질문을 통해 강호순이 자신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강호순이 심경적인 충격을 느꼈다고 전했다. 경찰은 강호순에게 언론의 얼굴공개를 알리지 않았다. 대신 현장에서 변화가 있었다. 경찰은 당일 현장검증에서 강호순에게 마스크를 씌우지 않았다. 언론의 얼굴공개가 다음 날 이뤄진 특단의 조치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랬다. 현장검증 주변에서는 유족을 비롯한 구경꾼들의 고함이 빗발친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까지 눌러쓴 강호순을 향한 비난은 때론 주변의 경찰에게 향한다. “경찰 내부에서도 항상 논란이 있었다. 일선 형사들도 마스크를 벗기고 싶어한다. 피의자 인권도 중요하지만 여론 앞에서 피의자의 편에 서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을 리 있겠나.”이명균 강력계장의 말이다. 경찰 역시 여론을 의식하고 있었다.
강호순의 마스크가 벗겨진 뒤에도 현장검증은 여러 차례 거듭됐다. 경찰은 강호순이 자신의 얼굴공개에 충격을 느꼈다고 발표했다. 강호순의 현장검증을 일선에서 취재한 모 일간지의 기자는 전한다. “범인의 심경변화에 대한 경찰의 발표는 기자들이 확인한 사안은 아니다. 현장에선 실제적으로 얼마만큼의 심경 변화가 있는지 느끼기 어려웠다. 다만 마스크를 벗은 뒤로 고개를 더 파묻는 경향이 있다.”마스크를 벗겼지만 강호순의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니다. 눌러쓴 모자와 후드로 얼굴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얼굴을 파묻는 행위는 강호순이 마스크가 벗겨진 자신의 얼굴을 의식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큰 변화는 강호순이 아니라 다른 쪽에 있었다. “사진 기자의 카메라 앵글 각도가 변했다. 정면이 아니라 좀 더 아래로 내려간 거지.”한겨레 사회부 김기선 기자의 말이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한다. 마스크가 벗겨진 강호순의 얼굴을 찍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 김기선 기자의 말이 이어졌다. “얼굴공개 뒤로 점점 보도가 선정적으로 변하고 있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팩트를 찾기 위한 노력보단 이슈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늘고 있다.”
언론은 강호순의 얼굴공개가 사회적인 공익을 위한 결단이라고 소개해왔다. 그 뒤를 이어 강호순의 과거 행적들이 낱낱이 드러난다. 살인 수단과 살해 방법, 살인 행적까지 여과 없이 보도된다. 범죄 예방 차원에서 강호순의 범행을 보도하고 추적해 샅샅이 공개한다. 전국적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자가 줄었다는 뉴스가 뒤따른다. 그 가운데 싸이코패스 테스트가 유행한다.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 인터넷 매체까지 싸이코패스 진단법이라는 테스트를 기사화하고 유포한다. 이수정 경기대 심리범죄학 교수에 따르면, “최근 싸이코패스 진단법이라고 알려진 대부분의 테스트는 잘못된 정보다. 게다가 싸이코패스 테스트를 비범죄자에게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불특정 다수의 호기심은 일회적이다. 다만 그 호기심에 영합하는 배후는 지속적이다.
“현장의 기자들 중에서도 보도가 너무 선정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나온다.”어느 일선 기자의 말처럼 강호순을 둘러싼 언론의 보도방식에서 이상기류가 발견된다. 지난 2일, YTN에서 보도된 현장검증 관련뉴스는 단연 자극적이었다.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돌을 던져서 죽이고 그러는데 (강호순 역시) 그런 식으로라도 처참하게 죽여야죠.”강호순의 현장검증을 지켜보던 수원의 한 시민이 내뱉은 분노 섞인 언어가 여과 없이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언론의 보도가 여론의 흥분상태를 부추기고 있다고 할만한 사안이다.
원칙과 논란
흉악범 얼굴공개를 입법화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이를 반박한다. “흉악범에 대한 기준이 모호할뿐더러 법에 따른 얼굴 공개가 된 용의자가 후에 진범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2차, 3차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벌써 ‘강호순의 고향 특산물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지 않나.”강호순의 얼굴공개와 함께 우리 사회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인식이 드러났다. 죄질에 따라 인권존중이 분류돼야 한다는 주장과 범죄자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인권은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이를 빌미로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곳곳에서 설전이 벌어진다. 지난 2월 5일자 법률신문에서는 헌법학자 30명과의 전화 설문조사를 공개했다. 찬성 46.7%, 반대 53.3%. 반대가 앞섰지만 팽팽한 결과다. 법적인 합의 역시 쉽지 않다는 의미다. 찬성하는 쪽이 내세우는 논리의 기반은 알 권리에 있다. 반대하는 쪽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헌법 27조 4항에 기반을 둔다.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반면 알 권리는 헌법이나 실정법으로 규정된 권리가 아니다. 법무법인 드림 정영택 변호사의 자문에 따르면 이렇다. “헌법 21조 1항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돼있다. 여기서 언론, 출판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와 연관되고 이것이 알 권리의 바탕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하지만 두 사안이 흉악범 얼굴공개에 대한 찬반 논리를 완벽하게 보좌할 수 있는 근거가 못 된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알 권리가 얼굴공개와 직결된 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영택 변호사는 다양한 유권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헌법 10조 1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한 의무를 진다.’고 명시돼 있다. 또한 헌법 37조 1항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고 한다. 헌법 37조 1항을 근거로 국민 개개인은 헌법에 열거되지 않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헌법에 열거되지 않은 초상권 역시 개인의 보장받을 권리에 속한다. 이는 헌법 10조 1항에 따라 개인의 기본적 인권에 대한 국가적 의무와 연동된다. 강호순의 얼굴공개가 초상권의 문제로 발전될 수 있다는 의미다. 예외는 있다. 사회적인 공인에 한해서 초상권의 문제는 예외로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강호순을 공인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지점이다. 공인의 사전적 의미는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인물’이다. 연예인이 공인인가, 라는 논란이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호순 역시 마찬가지다. 유명세를 치렀다고 해서 공인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호순이 공인이 아니라면 얼굴공개는 초상권 침해에 해당한다. ‘고의 또한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민법 750조에 따른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 언론의 얼굴공개 보도는 초상권의 권리를 강호순의 동의 없이 신문에 게재했기 때문에 고의적인 위법행위로 해석이 가능하다. 동시에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17조에 따라 과거 행적이 담긴 사진의 게재까지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과거 신정아의 누드 사진을 게재해 패소한 문화일보의 판례도 여기에 해당된다. 얼굴공개에 대한 다양한 유권해석이 존재함에도 언론이 보도를 선점했다는 건 원칙에 대한 고민이 가벼웠거나 이를 간과했다는 의미다.
“언론입장에서는 위법성보다도 기사로서의 의미가 관건이 될 수 있다. 불법적인 보도가 면책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법률적 판단과 무관하게 언론 입장에서 기사적 가치를 판단하고 보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MBC 김성환 수도권 팀장의 말은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의 말과 연동된다. “언론의 보도는 자유다. 상업적이고 부적절한 일이라 해도 거기에 대해 간섭할 필요는 없다. 그 후 그만큼의 책임을 지면 된다.”언론은 뉴스로서의 가치를 먼저 선택한다. MBC가 PD수첩을 통해 광우병 관련 보도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표현의 자유에 따라 뉴스 선별과 보도 결정은 언론의 권리다. 문제는 세세한 원칙의 틈새를 파고 든 관행이 거대한 원칙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나워진 여론 위로 강호순의 얼굴을 내던져 대중에게 물어뜯게 한들 사건의 근본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기존에 고수하고 확립되던 원칙이 흔들린다. 언론을 통해 흉악범의 얼굴이 공개되고, 이를 통해 경찰은 피의자의 마스크를 벗겼다. 공익을 위한 것이라 했지만 실상 논란만 가중되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어려운 소모전이 계속된다. 상처의 치료를 위한 고심보단 당장의 고통을 잊을만한 마약을 처방한 셈이다.
“언론은 사회의 표정 중 하나다. 국민들이 강호순을 얼굴을 보고자 하는 건 국민의 분노가 반영된 것이다. 그 안엔 강호순의 얼굴 자체가 보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이 있을 수도 있는 반면 집단적인 광기도 분명 존재한다.”김성환 팀장의 말처럼 언론의 얼굴공개는 사회적 요구의 부응이다. 다만 그 사회적 요구가 현명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MBC가 타방송사에 비해 하루 늦게 얼굴공개를 결정한 건 이런 고민이 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MBC마저 확신할 수 없는 사회적 요구에 짓눌린 셈이다. 여론을 악용했다는 비난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공분하는 대중을 이성적 판단으로 이끌어야 하는 언론이 오히려 대중적 공분을 흡수해 여론을 선동하고 있다.”김기선 기자의 말에 무게가 실린다.
지난 2일 MBC 뉴스데스크의 클로징 멘트는 그 일부 언론을 향한 것이었다. “몇 년 전 경찰이 마스크를 씌우면서 내규로 슬그머니 시작했듯이, 이번에 일부 언론이 이를 벗기면서 어물쩍 결정했습니다.” KBS의 정은천 팀장은 이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 클로징 멘트가 KBS를 겨냥한 방아쇠란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MBC의 선정성을 지적했다. “우리는 MBC와 달리 강호순의 단독사진만 사용했다. 피의자 가족이 함께 찍힌 사진을 입수했지만 무관한 제3자의 피해를 고려했기 때문이다.”그러나 MBC의 클로징 멘트는 비단 KBS를 향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MBC 스스로를 향한 손가락이 될 수도 있다. 뒤늦은 합류라 해도 MBC가 그 대열에 들어선 건 마찬가지다. “절차의 실종의 생각의 실종이 될 수 있어서 더 우려스럽습니다.”클로징 멘트의 마무리는 이렇다. 언론의 강호순 얼굴공개 과정이야말로 절차의 실종이자 생각의 실종이었다.
절망과 희망
“어차피 이건 길게 갈 사안이 아니다. 알지 않나.”모 일간지의 팀장급 인사의 말처럼 강호순의 얼굴도 어느 다른 이들처럼 곧 잊혀질 것이다. 문제는 강호순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인가의 문제다. 강호순을 통해 유영철과 지존파를 다시 보게 된 것처럼 언젠가 우리는 새로운 흉악범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살인의 추억은 되풀이된다. 강호순의 얼굴공개를 범죄예방효과로 연결하는 논리는 미약하기 짝이 없다. 단지 강호순을 힐난하고 때려죽인다고 해서 범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흉악범만큼이나 끔찍한 증오만 양산될 뿐이다. 징벌이 아니라 예방이 필요하다. 강호순의 얼굴이 아니라 우리의 얼굴을 봐야 한다. 강호순의 얼굴은 우리 사회에 잠재된 악의 뿌리가 어디까지 내려앉아있는가의 지표다.
개개인의 절망이 모여 사회적 공분을 이룬다. 추악한 사회적 기저에 맞닥뜨린 당혹감이 거대한 분노로 몰아친다. 언론은 여론의 방파제다. 진짜 알아야 할 것과 단순히 알고 싶은 것을 구별해서 떠내려 보내거나 막아서야 하는 것을 가늠하는 것이 진정한 언론의 몫이다. 그저 살인자의 얼굴을 공개하고 여론의 돌팔매질을 부추기는 것이 언론의 역할은 아니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다 전문화된 형사정책과 효과적인 교정교화가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합니다.”이수정 교수는 지난 10년간 이에 대해 주장해 왔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강호순의 검거에서 프로파일링 수사가 큰 역할을 했다. 이수정 범죄심리학 교수는 그 프로파일링이 유영철 사건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한다. 불행을 통해 절망을 얻기는 쉽다. 하지만 희망을 가늠해야 한다. 강호순은 이 사회의 직설적인 절망이자 희망의 역설이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강호순의 얼굴엔 살인마에 대한 친절한 예시 따윈 없었다. 소박하고 온화한 미소에 가증스러움이 더해질 따름이다. 그 끝에 무력한 분노만 잔뜩 걸려들었다. 살인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에 동의합니까, 라는 질문에 적합한 답을 찾긴 어렵다. 하지만 살인자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살인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마주보지 않기 위해선 좀 더 현명해야 한다. 싸이코패스 테스트 따위를 클릭하거나 강호순을 향한 육두문자나 날리고 있을 사안이 아니다. 당신 앞에 드러난 강호순의 얼굴을 향해 물음표를 얻어야 한다. 어째서 우리는 강호순의 얼굴을 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한다. 여론을 위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는 언론에 되물어야 한다. 살인마의 얼굴을 본 당신이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분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구별해야 한다. 절망을 볼 것인가, 희망을 볼 것인가. 우린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살인마의 얼굴이 잘 생겼다는 것 따위를 알고자 했던 게 아니라는 걸 당신은 분명 알고 있다.
문자의 발전에 기여한 건 종이와 활자였다. 궁극적으로 종이와 활자의 발명은 책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책의 출판은 결국 문자의 보급을 의미한다. 언어가 기록되고 유통됐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는 대신 읽었다. 수많은 정보들이 귀가 아닌 눈을 통해 입력되고 입이 아닌 손을 통해 출력됐다. 기독교의 전세계적 확산이 가능했던 것도 문자의 보급 덕분이다.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성서가 출간되고 보급될 수 없었다면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언어와 달리 문자의 수명은 길다. 보존이 가능하다. 책은 언어를 축적하는 창고다. 종이로 구성된 칸마다 언어를 차곡차곡 쌓아 넣는다. 강산이 변하는 10년 동안 기록된 언어는 파기되지 않는 이상 변치 않는다. 역사와 문학, 종교, 과학, 모든 언어들이 종이를 타고 시대와 국경을 넘어 전파된다. 언어의 유람은 책을 통해 가능해졌다.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미국 경제학자의 전문서를 대한민국에 앉아서 볼 수 있다. 책은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다. 그 다리가 휘청거리고 있다. 불황의 그림자가 서점가에 드리운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 텍스트가 흔들린다.
출판
출판을 하기 위해선 저자가 필요하다. 출판사와 저자의 접촉은 쌍방향의 형태로 이뤄진다. 저자가 출판사에 접촉하기도 하고, 출판사가 작가에게 글을 의뢰하기도 한다. 작가의 이름값에 출판사가 움직이기도 있다. 기획되는 책의 방향에 따라 작가가 선정되기도 한다. 원고의 수급형태도 다르다. 일정금액을 저자에게 지급하고 원고의 판권을 출판사에서 사들이는 매절이 있고, 책값의 일정 퍼센트(%)를 판매실적만큼 챙겨가는 인세가 있다. 선택에 따른 대가가 다르다. 판매량이 어느 정도 기대되는 작가라면 후자가 유리하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면 돈방석에 앉게 된다.
편집자, 즉 에디터(editor)는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출판 배포하는 단계까지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 에디터는 출판사의 자산과 같다. 저자와 출판사를 연결하는 다리이자 책의 기획을 총괄하는 전략가다. 에디터의 역량이 책의 가능성에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텍스트로 채워진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는 창조적 기획자다. 저자, 즉 라이터(writer)가 1차 생산자라면 에디터는 2차 생산자다. 디자인과 교정과 같은 후반작업을 외주 프리랜서에게 맡겨도 편집자를 내부직원으로 채용하는 건 그런 중요성 때문이다. 에디터는 책의 프로듀서다. 기획부터 인쇄, 납본의 단계까지 에디터가 함께 한다.
불황
최근 한 메이저 출판사는 에디터 전직원을 비정규 계약직으로 전환했다. “다들 황당해 했지만 상황의 어려움을 알기 때문인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시장의 여건을 알기에 목소리를 낼만한 여력이 없었다.”이에 관계된 한 에디터의 말이 시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경제난에 따른 정리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으로 에디터를 고용하는 임프린트 방식은 대형출판사를 중심으로 업계 내의 추세가 되고 있다. 능력적 성과에 따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창의적인 기획의 경쟁을 통해 우월한 컨텐츠를 아웃소싱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착시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셈이다. 일종의 성과급 계약에 가깝다. 고용자라기 보단 하청업체에 가깝다. 갑과 을의 관계다. 에디터 군마다 제작비용을 책정하고, 기획 방향을 건의한다. 책이 출판되기 전에 이미 가격경쟁이 시작되고 시장 상황에 대한 예지력이 요구된다. 시장상황이 악화될수록 기획 경향도 보폭을 줄이기 마련이다. 창조적인 마인드보단 실리적인 시야확보가 요청된다. 가능성 있는 모험보단 안정적인 적응력이 우선시된다. 시장의 위축과 함께 문자의 가능성도 위축된다.
대한민국 서점 1번지라 할 수 있는 교보문고의 발표에 따르면 2003년부터 작년까지 해마다 평균 18%가량씩 증가했던 입고 도서 수가 올해에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전년대비 15.2%가 감소했다. 시중에 출판되는 도서의 수가 현격하게 줄었다. 출판사들은 경제위기와 함께 최대한 몸을 사리는 중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전세계적 경제위기가 심상찮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종이값이 50%가까이 올랐다. 인쇄와 제본에 들어가는 비용도 마찬가지다. 현정권의 고환율 정책이 금융위기를 뒤집어 쓰면서 이례적인 환율 폭등까지 맞이했다. 덕분에 외국작가들에 대한 로열티 부담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소비자 심리마저 위축됐다. 한국출판연구소에서 국내 출판사 188곳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올해 출판업계 매출액은 지난해보다 무려 73% 가까이 감소된 것으로 집계된다. 도서판매량의 감소는 신작의 출간기회를 저하시켰다. 최대한 상업적으로 검증된 컨텐츠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집중적인 마케팅을 펼친다. 극단적인 긴축정책을 펼치는 중이다. 심지어 책 한 권 내지 않는 출판사도 생겼다. 모험을 하기보단 상태유지라도 해야겠다는 심산이다. 책을 찍어내는 자금이라도 최대한 아껴서 시간을 벌고 있다. 집안의 가구를 뜯어다가 불을 때고 있다. 얼어붙은 시장엔 좀처럼 자금이 돌지 않았다. 총알이 부족하니 공격력이 저하될 수 밖에 없다. 자본의 위기가 출판의 위기를 부채질했다. 모회사가 미국에 있는 한 국내 메이저 출판사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지만 매매 의사가 전혀 없어 그냥 방치 중이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매년마다 돌림노래처럼 반복됐던 출판의 위기란 말이 더욱 실감난다. 회복될 기미 없이 돌고 돌던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2008년 도서시장은 병세가 최악이었다. 영세한 동네서점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음반 시장이 그랬듯 도서 시장도 다를 게 없다. 이젠 지방 군소 서점들의 차례다. IMF외환위기 당시, 보문당이나 종로서적과 같은 업계 최고를 다투던 거대 도매상과 서점이 도산을 맞이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양상의 차이는 있다. 외환위기 당시의 도산은 업계를 이끌던 거대 도매상의 몰락이 지방까지 확산된 것이라면 현재 경제위기 속에서 지방 도소매상이 어려움을 겪는 건 파이의 문제다. 전자가 도소매 시스템의 오류로 인한 과부하라면 후자는 파이의 상실에 따른 아사에 가깝다. 책이 팔리지 않는데 서점이 버틸 수 없는 노릇이다. 올해 부산의 대형서점 몇 곳이 문을 닫았다. 판매실적은 저하되고 이윤은 그만큼 낮아지는데 유지비는 나날이 오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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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은 오래 전부터 시장을 장악해왔다. 유형의 시장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무형의 시장이 파이를 확장해왔다. 특히 큰 폭의 할인율을 통한 공격적 방식으로 고객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매년마다 30~40%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출판계의 불황 가운데서도 승전을 거듭했다. 거대한 매장이 필요 없고, 그만큼 인건비의 부담이 덜한 인터넷 서점은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시장을 장악했다. 온라인 시장이 권력을 잡았다. 인터파크나 예스24와 같은 온라인 서점이 도서 마케팅의 새로운 고지가 됐다. 온라인 판매 순위 상위권을 쟁탈하기 위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마케팅 비용의 대부분이 온라인 서점 몇 곳에 책정됐다. 광고가 집중되고 판촉을 위한 이벤트가 동원됐다. 대형할인마트가 경쟁하듯 최저가가격을 통한 견제가 심화됐다.
단행본 판매 시장 규모는 대략 2조 5천억 원 규모로 추정된다. 온라인 서점 상위 5곳의 매출액은 1조원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손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판매성과를 무기로 출판사에 덤핑 요구를 해오기도 한다. 온라인 서점은 하나같이 최저가를 영업의 기치로 내건다. 오프라인에 대한 경쟁력을 상대적인 가격 정책에서 찾았다.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된다. 구입자들에게 추첨을 통해 고액의 경품을 제공한다. 도서의 단가가 내려가고, 이벤트가 활성화될수록 온라인 서점의 파이는 커진다. 하지만 단가의 하락은 출판사의 마진을 떨어뜨렸다. 온라인 소매상이 부유해지는 반면, 저작자와 출판자는 마이너스를 감수한다. 책값 상승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때로 서슴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해온다. 시장 상황이 아쉽기 때문에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 있다.”한 중견 출판사의 마케터가 말했다. 덫에 걸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서점은 오프라인의 불황을 견제할만한 대안이었다. 갑을 관계가 역전됐다.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이 책의 흥망을 좌우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시장의 형세가 완연히 달라졌다. 오프라인 시장이 몰락을 거듭하는 사이 온라인 시장은 새로운 대세로 한 축을 차지했다. 비단 온라인 서점뿐만이 아니다. 대형 포털사이트도 공룡이 됐다. 온라인 시장은 단지 판매와 선전을 위한 선택적 방편이 아니라 일차적 포석이 됐다. 마케팅의 포화가 온라인에 집중된다. 대형출판사들은 대규모 자본을 소모하며 책을 판다.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빈도가 많을수록 잘 팔리는 책이 된다. 온라인 서점의 초기화면에서 소개되는 책은 그렇지 못한 책에 비해 판매부수가 뛰었다. 특히 미디어에서 소개되는 책은 삽시간에 판매량이 급증했다. 방송에 출연한 몇몇 작가들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 상단을 차지했다. 물론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이외수나 황석영은 원래부터 유명한 작가였다. 이미 일정한 판매량이 기대되는 작가였다. 하지만 방송의 여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외수의 ‘하악하악’은 올해 도서판매량 2위에 올랐다. 이외수는 유명작가에서 완전한 스타로 거듭났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역시 방송 이후 베스트셀러 순위가 19위에서 1위로 수직 상승한 뒤 2주간 정상을 지켰다. 작가가 이슈의 중심에 서니 날개 돋친 듯 책이 팔려나갔다.
검증
올해 전체적인 도서 판매량이 감소하는 추세 속에서 한국문학을 위시한 소설의 판매가 늘었다. 지난 몇 년 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점령했던 자기계발서나 재테크 관련서적이 경제불황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빈자리를 메운 건 문학도서와 경제서적이었다. 몇 년간 침체됐던 문학의 선전이 눈에 띈다. 특히 몇몇 작가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넘어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책으로 출간되기 전 네이버를 통해 먼저 선보였다. 포털사이트에서 소설이 연재된다. 이미 작년 박범신의 ‘촐라체’를 연재하며 주목 받았던 네이버가 다시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을 예전과 같이 블로그 형식으로 연재했다. 블로그의 방문자 수는 200만 명이 넘었다. 네이버가 블로그 형태로 작가의 개인적인 공간을 마련했다면 다음은 좀 더 적극적인 포지셔닝을 구축했다. ‘문학 속 세상’이라는 섹션을 할애하며 공지영의 ‘도가니’와 이기호의 ‘사과는 잘해요’를 연재 중이다.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들과 협업까지 도모했다. 시인 함민복의 에세이가 준비 중이며 한국대표시인 70명의 시를 연재한다. 그 밖에 교보문고나 예스24같은 온라인 서점의 블로그를 통해 정이현과 박민규, 백영옥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연재되고 있다.
과거에도 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 PC통신에 글을 연재하며 인기를 끌던 작가들의 작품이 책으로 출판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전례는 있었다. 특히 이우혁의 ‘퇴마록’은 PC통신 연재 당시 클릭수가 무려 2억 3천만 번을 넘었을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후에 책으로 출간된 뒤에도 큰 인기가 지속됐다. 하이틴 소설로 10대들의 인기를 얻은 귀여니도 경우는 다르지만 비슷한 케이스다. 이름없는 신진작가들을 배출하고 장르문학과 같은 특수한 분야의 창작력이 빛을 보던 과거와 현재는 양상이 다르다. 최근 온라인 소설에는 기성 문단의 유명 작가들이 포진했다. 본격문학이 인터넷을 통해 연재되고 있다. 마치 과거 일간지 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것과 유사하다. 지면에서 상실된 소설의 영토가 웹에서 복구되고 있다. 소설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소설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젊은 세대에게 기성문단의 인터넷 연재는 신선한 자극이 됐다. 박범신의 ‘촐라체’나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연재된 후, 각각 출판을 거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온라인 연재를 통한 텍스트의 가능성이 검증됐다. 특히 온라인의 연재는 독자와 저자의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블로그에 연재되고 포털사이트 메인에 전시되면 하루에도 수 만개의 댓글이 달리곤 한다. 반응이 삽시간에 확인된다. ‘개밥바라기별’을 연재한 황석영의 블로그는 방문자수가 2백만 명을 넘겼다. 현재 ‘개밥바라기별’의 판매부수는 35만 부를 돌파했다. 온라인의 인기가 오프라인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랠리포인트가 생겼다. 다음이 발 빠르게 ‘문학 속 세상’이란 섹션을 신설해 작가를 섭외하고 소설을 연재했다. 시장이 검증된 만큼 지체할 이유가 없다. 출판의 위기도 이에 기여했다. 도서시장의 경직은 기성문단의 심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마추어를 위한 기회의 장이 됐던 과거와 달리 프로들의 새로운 영토가 개척됐다. 온라인은 그들에게 약속의 땅이다.
과거 온라인 소설이 검증되지 못한 작가들의 도전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현재 온라인 소설은 검증된 작가들을 모시기 좋은 공간이다. 소설보다도 먼저 작가가 보인다. 익명성에서 비롯된 새로운 얼굴이 발굴될 기회보단 익숙한 얼굴의 안정성이 추구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문학에 대한 관심을 유명작가들의 작품으로부터 발생시킬 수 있다는 긍정적 효과도 존재한다. 문학을 독자에게 소개시킬 수 있는 채널이 늘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대형 작가 몇 명의 성적을 토대로 거대한 성과를 자랑하기는 이르다.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가 가중된다. 일부 작가에게 기회가 편중될 가능성이 짙어진다. 불황 속에서 검증되지 못한 문장에 기회를 부여하기란 쉽지 않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불리하다. 한번이라도 얼굴이나 이름이 팔린 작가일수록 홍보도 쉽다. 문학이 자본과 밀접하게 연동된다. 자본에 의해 텍스트의 가치가 검열당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이 늘어나는 추세다. 2005년 국내 개정판을 출간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최근 다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한 덕분이다. 새로운 표지가 제작됐다. 영화 포스터가 책 표지에 옮겨졌다.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비롯해 최근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까지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된 작품들도 관심을 얻었다. 원작의 인기가 높을수록 각색된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상승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올해 개봉했던 영화 <모던보이>의 원작은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인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였다. 이 작품은 영화의 개봉과 함께 영화와 같은 ‘모던보이’란 제목을 달고 재 출간됐다. 영화를 통해 원작소설이 주목 받았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상호작용이 활발하다. 마케팅의 전술도 그에 발맞춰 나아간다. 최근엔 영화나 드라마를 위한 판권으로 팔기 위한 소설을 기획하는 형태도 많아졌다. 맞춤형 문장들이 기회를 노린다.
생존
관심을 얻지 못한 책들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반품되는 추세다. 시장의 악화와 함께 시장 맞춤형 기획이 도모된다. 팔릴만한 기획들만 살아남아 시장으로 나온다. 대형출판사로 자본이 몰리고 거액의 마케팅이 동원되어 베스트셀러가 이뤄진다. 마진이 오르는 만큼 판매부수에 간절해진다. 2008년, 온라인 서점의 성장률은 10%대에 그쳤다. 시장의 불황이 이만큼 극심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례일지도 모르지만 온라인 서점에 몰리던 과열이 누그러진 결과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입고되는 신간의 양이 줄면서 광고와 매출이 동반 감소했다. 그에 따라 베스트셀러와 함께 스테디셀러의 판매에 주력하고 있다. 새로운 활자의 공백을 묵은 활자로 대체하고 있다. 반값으로 세일을 해서라도 마진을 채우려 한다. 팔리지 못한 책들이 헐값에 넘어간다. 유효기간이 지난 물건처럼 텍스트들이 도매금으로 팔려간다.
유명 작가들은 온라인에 글을 게재한 뒤, 오프라인으로 활자를 옮긴다. 텍스트의 고유 공간이 사라진다. 종이가 아닌 모니터로 텍스트를 소비한다. 소설마저 온라인 시장으로 넘어온 마당에 더 이상 문자와 종이는 천생연분이 아니다. 문자는 새로운 동거인을 만났다. 신문과 잡지는 일찌감치 온라인에 주도를 뺏겼다. 실시간으로 정보가 넘쳐나는 온라인에서 활자는 찰나처럼 밀려오고 밀려나간다. 중요성과 상관없이 모든 정보가 천원샵의 물건처럼 동일하게 진열된다. 버라이어티 쇼의 자막들은 웃음을 활성화시킨다. 단순히 상황을 설명하는 첨언이 아니라 상황에 개입해 감정을 양성하는 시각적 효과를 거둔다. 텍스트를 브라운관에 디자인한다. 문자는 더 이상 가지런히 행과 열을 맞춘 문장처럼 차분히 머무르지 않는다. 웃음을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 덕지덕지 붙어서 나열된다.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다. 글을 쓰는 사람은 늘었지만 책의 소비는 줄었다. 문자를 만드는 사람은 많은데 문자를 읽는 사람은 드물다. 찰나를 위한 텍스트들이 쏟아지고 또 사라진다. 영원을 위한 텍스트들이 살아남지 못한다. 인터넷도 언어를 보관한다. 하지만 그 방대한 가상 공간 속엔 안정감이 없다. 언어를 음미할 시간이 부족하다.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다. 책을 읽지 않는 독자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세상이 책을 기피하게 만든다. 마음의 여유가 부족할 수록 책과 멀어진다. 초등학교부터 입시준비에 매달리는 아이들이나 과업과 철야에 시달리는 샐러리맨의 세상에서 텍스트의 간격을 음미하라 권하긴 힘든 노릇이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책을 권하기란 쉽지 않다. 세상이 각박하다. 사람들의 마음이 차가워진다. 문장의 감성은 다른 세상의 언어 같다. 인터넷 뉴스의 신랄한 악플이 차라리 이 시대의 솔직한 언어가 됐다. 텍스트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거를 시작했지만 정작 사람들은 한 손으로 텍스트를 소비한다. 클릭만 할 뿐,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살아남은 텍스트들이 앙상하게 말라간다. 알게 모르게 위기로 흘러간다.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에서 텍스트가 살아남기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