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부동산 중개업자 메릴 모건(사라 제시카 파커)과 변호사 폴 모건(휴 그랜트)은 별거 중인 부부다. 폴의 외도로 인해 부부 사이에 금이 가고 파편처럼 떨어진 채 지나던 부부의 별거도 어느새 3개월에 다다랐다. 벌어진 관계를 이어보려는 폴은 메릴에게 선물을 전하고 만남을 청하며 대화를 나눠보지만 메릴의 마음은 좀처럼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영화 같은 사건이 찾아온다. 저녁식사 후, 길을 걷던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날벼락 같은 빗방울보다도 더 날벼락 같은, 살인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 범인에게 온전히 노출된 두 사람은 증인보호 프로그램 아래, 짐을 싸 들고 시골로 내려가 한 지붕 아래서 다시 일상을 꾸리게 된다.
<들어는 봤니? 모건부부>(이하, <모건부부>)는 뭔가 대단한 사건을 연출할 것 같은 제목과 달리 <장미의 전쟁>의 해피엔딩 버전쯤 되는 부부 클리닉 영화다. 3주 뒤 다시 만날 법적 절차를 밟기 보단 3개월 간의 공백기를 두고 서로와 자신의 감정을 염탐하던 부부는 애꿎은 사건을 빌미로 부서진 관계의 회복을 도모하게 된다. 로맨틱코미디에 스릴러적 코드를 삽입하며 극의 전환적 구실을 마련하는 <모건부부>의 착상은 일면 참신하다. 사실 대부분 로맨틱코미디는 무에서 출발해 유를 창조하는 감정적 관계의 발전양상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하지만 <모건부부>는 이미 시작부터 일방적인 감정선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관계를 지켜본다는 점에서 그런 소소한 장르적 재미가 일정부분 포기된 것이나 다름없다.
애정전선에 위기를 맞이한 부부의 관계가 다시 봉합된다는 서사의 형태엔 어떠한 문제가 없다. 소품적인 위트가 동원되는 발랄한 로맨틱코미디보단 보다 진중한 형태의 교훈을 전달하는 멜로드라마로서의 가치가 발생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하지만 <모건부부>는 철없는 뉴요커들의 투정을 유머로 착각하는 영화다. 말 그대로 로맨틱코미디라는 속성 안에서 얕은 웃음을 발생시키고 좀처럼 설득 당할 수 없는 로맨틱을 구사한다. 달콤한 로맨틱코미디에 살벌한 스릴러적 코드를 삽입해 넣으며 극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일부 플롯의 창의력은 인정받을만하지만 전반적인 내러티브가 안이하며 스토리텔링 자체는 식상하다.
뉴요커의 투정을 개그로 치환하는 영화의 태도는 마치 우리가 먹는 스타벅스의 비싼 커피가 실상 미국의 싸구려 1달러 커피란 점을 환기시키는 것과 같다. ‘강남의 귤이 회수를 건너면 강북의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화려하고 세련된 뉴요커들의 삶을 시골로 이양시키며 얻는 시각적 차이가 특별한 묘미를 발생시키리란 착각 차체가 이미 수준 낮은 유머적 감각을 노출한다. 그러니까 그 맑은 공기와 아늑한 정경이 공해와 소음의 향수를 부르는 수단으로서 활용됐을 때, 이미 <모건부부>의 대사나 풍경은 관객을 향한 공해나 다름없다. 철없는 뉴요커의 철없는 동동 구름을 보며 그것이 뉴요커에 대한 오해라도 살까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그런 껍데기만으로도 로맨틱은 고사하고 코미디조차 기대할만한 여건이 안 된다는 건 이미 자명한 사실이다. 코미디가 내내 헛바퀴를 도는 사이, 로맨틱은 끝내 헛스윙으로 끝난다.
세상 어딘가엔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남자가 있을 거라 믿는 여자. 남자란 모름지기 여자와 침대에 올라갈 생각만 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남자.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여자와 그 믿음을 허구라며 깨부수는 남자의 만남. 남녀라는 함수관계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공식을 내세우며 반대의 이미지로 뻗어나가는 그래프로 대칭된다. <어글리 트루스>는 남녀라는 함수관계 속에서 정반대의 공식을 통해 대칭적 그래프처럼 거리감을 두던 남녀가 다시 한 점에서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로맨틱코미디다.
아침 뉴스쇼 PD 에비(캐서린 헤이글)는 품격 있는 방송을 추구하지만 나날이 바닥을 긁는 시청률에 임원진의 압박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야간 케이블 방송에서 ‘어글리 트루스(The ugly truth)’라는 성 카운셀러 방송을 우연히 보게 되고 직설적인 발언으로 순수한 사랑을 짓밟는 마이크(제라드 버틀러)를 보고 격분해서 전화연결까지 시도하지만 결국 모욕만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오전, 마이크를 아침 뉴스 쇼에 영입한다는 국장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지령을 받게 된 에비는 이에 질색하지만 결국 임원진의 압박에 그를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뉴스 쇼에 출연한 마이크는 직설적인 발언으로 방송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지만 시청률은 상승하고 에비는 더욱 발만 동동 굴린다.
갈등선이 뚜렷한 남녀가 반목을 거듭하다 우연히 서로의 진심을 들추는 기회를 얻게 되고 이를 통해 호감을 이루다 종국에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로맨틱코미디라 불리는 대부분 영화들이란 남녀의 관계변화를 줄기로 로맨스의 진전을 그려나가는 작품이다. 어쩌면 그만큼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는 신선도를 유지하기 어려운 관습적 영화란 말이기도 하다. 그건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특별하게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식상한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로맨틱코미디가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는 건 그 전형성이 갖춘 쏠쏠한 재미에 있다. 그리고 그 재미의 원천은 로맨틱의 배후에 놓인 코미디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어글리 트루스>는 스크루볼 코미디로서 탁월한 묘미를 자랑한다. 저마다의 생각과 속내를 거침없고 장난끼 가득한 수사에 담아 속도감 있게 주고 받는 캐릭터들의 입담은 <어글리 트루스>에서 오락적 재미를 자아내는 첫번째 묘미다. 또한 입담이 뛰어난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자랑하는 동시에 상황에 적절한 슬랩스틱을 구사하며 유머를 강화한다. 특히 캐서린 헤이글의 진동(?) 연기는 인상적인 웃음을 발생시킨다. 동시에 남녀 관계에 대한 적나라한 믿음을 표현하지만 연애 카운셀러로서 인상적인 조언을 던지는 마이크와 이를 통해 감정적 변화를 감지하는 에비의 관계 변화를 바라보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긴밀한 연인 관계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간다는 점에서 <어글리 트루스>는 성공한 로맨틱코미디라고 할만한 여지가 있다.
결말은 뻔하다. 누구나 예상하듯, 원수는 연인이 된다. –이건 스포일러도 아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결말을 확인하는 일이란 그만큼 식상하다. <어글리 트루스> 역시 그 식상함의 혐의에서 온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그 뻔한 결말을 연출하기 위한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분명하다. 마초남과 순진녀가 만나 애정관의 차이를 확인하지만 이성으로서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 감정에 이끌리게 되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섹스어필한 입담을 통해 사랑에 대한 순진한 감상을 날려버리고 실제적인 감정에 치중한다는 점도 현실적이다. 무엇보다도 근육만큼이나 입담도 탄탄한 제라드 버틀러와 우아하면서도 깜찍한 캐서린 헤이글의 앙상블이 <어글리 트루스>의 매력을 온전히 보장한다.
미운 정이 무섭다. 대립적 관계에 놓여있던 남녀가 필연적인 계기를 통해 운명적 공동체를 계약하고 이로 인해 끊임없이 부딪히고 갈등하다 이내 정들어 로맨스를 낳는다. 대부분 로맨틱코미디라고 불리는 영화들은 이토록 닳고 닳은 관계적 갈등을 기본적 골조로 삼아 로맨스를 축조한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닳아 없어지지 않고 끝없이 재생산되는 건 낡고 낡아서 앙상할 것만 같은 로맨스의 골조를 풍성하게 치장하는 코미디 덕분이다. 로맨스의 진심을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적절한 기능성을 갖춘 코미디는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를 풍요롭게 만드는 자질이다.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의 형식으로 대변되는 <프로포즈>도 마찬가지다.
마가렛(산드라 블록)은 사내에서 마녀라 불릴 만큼 악명이 자자하지만 업무적인 능력을 인정받는 뉴욕의 출판사 중역이다. 그녀의 손에 출판사의 주요 업무가 결정되거나 누락된다. 게다가 웬만한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 그녀 덕분에 보좌관 앤드류(라이언 레이놀즈)는 출근길부터 분주하다. 마녀는 스타벅스를 마신다. 마가렛이 출근하기 전까지 저지방 두유 라떼를 책상에 올려놔야 한다. 커피를 엎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자신의 커피도 같은 것으로 통일한다. 마가렛의 완벽주의에 앤드류의 회사생활은 엣지있게 돌아간다. 그런 어느 날, 마가렛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캐나다 출신인 마가렛의 비자 발급이 중지됐으며 이에 따라 출국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사장으로부터 통보된 것. 그러나 불통은 앤드류에게 튄다. 강제출국을 막기 위해 앤드류와의 혼인 사실을 밝힌 마가렛 덕분에 앤드류는 위장 약혼의 공모자가 된다.
<프로포즈>는 스토리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다. 급작스럽고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진전되는 사연엔 두서가 없다. 지나친 우연성에 기대어 직조된 스토리는 전형적인 로맨틱코미디의 방식이라기 전에 내러티브의 열악함에 가깝게 이해될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포즈>는 즐길만한 매력이 다분한 로맨틱코미디다. <프로포즈>를 휘청거리게 만들 구조적 결점을 단단하게 다지는 건 온전히 캐릭터의 매력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심캐릭터부터 주변부에 산재된 다양한 캐릭터들이 발생시키는 매력이 작위적인 우연을 연출하고 전형적인 공식에 기대는 스토리에 활력을 발생시킨다. 뛰어난 순발력으로 우연에 기대어 굴러가는 사연에 필연성의 생기를 불어넣는다.
생애 처음으로 누드를 선보였다는 사실까지 일례로 들 필요도 없이 산드라 블록은 <프로포즈>의 일등공신이나 다름없다 할만한 공헌도를 드러낸다. 과감한 슬랩스틱과 디테일한 제스처, 풍부한 표정을 통해 캐릭터의 감정변화를 설득시키는 산드라 블록은 매력적인 웃음을 밑천으로 로맨스의 자질을 구축한다. 상대역을 맡은 라이언 레이놀즈 역시 적절한 리액션으로 산드라 블록을 보좌하며 빼어난 앙상블을 이룬다. 두 남녀 캐릭터의 아기자기한 신경전은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이뤄진 <프로포즈>에서 단단한 이음새 역할을 하는 동시에 탁월한 웃음을 발생시키는 코미디의 속성에 어울린다. 암묵적 합의 속에서 혼인 빙자 사기 연극을 펼치는 두 남녀의 주변부에 자리한 다양한 조연들은 저마다 제 역할에 걸맞은 코미디적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웃음을 숙성시킨다.
마치 대각선에서 마주보듯 근접할 수 없을 것마냥 서로를 배척하던 캐릭터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사연을 공유하며 반목을 거듭하던 가운데 좀처럼 알 수 없었던 상대의 속내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전통적인 장르적 관습 안에서 묘사되는 캐릭터의 심정적 변화가 관계를 재구성하고 영화의 온도를 변모시킨다. 지속적인 활약을 펼쳐는 발군의 코미디 안에서 관성적으로 무르익어가는 로맨스는 적당한 설득력을 획득한다. <프로포즈>가 최소한 제 역할을 하는 로맨틱코미디라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뛰어난 장악력보단 능숙한 순발력이 인상적이다. 특히 장르적 공식에 기대어 안이하게 진전되는 스토리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열연은 <프로포즈>를 위한 특별한 수식어나 다름없다. 마흔을 넘어선 산드라 블록의 앙증맞은 슬랩스틱과 이를 보좌하는 라이언 레이놀즈의 든든한 지원은 어느 누구라도 분명 매력적이라 할만한 것이다.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 제프(소지섭)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은 뒤 시름에 빠져 있던 만화가 지망생 소피(장쯔이)는 복수를 다짐한다. 미모의 연기자 안나(판빙빙)와 눈이 맞아 자신을 차버린 제프의 관심을 다시 자신에게 이끌고 시원하게 뻥 차버리는 것. 게다가 안나와 모종의 과거를 지닌 사진 작가 고든(허룬동)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든든한 지원사격까지 약속을 얻어낸다. 이른바 ‘소피의 복수’를 담은 <소피의 연애매뉴얼>은 좌충우돌의 명랑한 로맨스를 묘사하는 순정만화적인 로맨틱 코미디다. 5단계의 챕터로 구성된 스토리와 알록달록한 풍선껌과 같은 미장센, 그리고 과잉된 감정을 표출하는 캐릭터, <소피의 연애매뉴얼>은 온전히 순정만화의 컨셉이 반영된 영화적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귀엽고 깜찍한 이미지를 연출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간지러운 장면이 여럿이며, 단순히 순정만화적인 느낌을 벗어나 유치한 스토리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게 만든다. 아무래도 남자보단 여자들을 배려한 취향의 영화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거나 각오해야 한다. 장쯔이의 과잉된 연기보다도 차분하게 슬랩스틱을 선사하는 소지섭의 간지 버린 표정이 더욱 인상적이다.
화장실에 갇힌 호준(김재록)은 자신이 박대하던 계상(강지환)으로부터 구출된다. 아는 게 많은 호준은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하는 계상을 박대하지만 정작 계상으로 인해 구원받는다. <방문자>는 결코 맞물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어떤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을 묘사하는 버디무비이며 코미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될 때, 우스꽝스러운 사연이 발생하고 그 안에서 인물은 변화한다. 사람을 둘러싼 정치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람을 본다.
계상을 멸시하던 호준이 계상에게 마음을 열고 영향을 받는 것처럼, 카림(마붑 알엄)과 ‘3m’떨어져 걷던 민서(백진희)도 어느 새 카림과 손을 맞잡고 걷는다.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인 <방문자>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영화다. 카림은 계상을 닮았고, 민서는 호준을 닮았다.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똑부러지는 민서의 염세적인 표정은 지식인을 자처하지만 정작 냉소와 비관밖에 거듭하지 못하는 호준의 무력한 표정을 연상시킨다. 그런 민서에게 카림은 ‘방문자’다. 계상과 호준이 그랬던 것처럼, 민서와 카림도 ‘반두비’가 된다. <반두비>는 별개의 세상에 놓여있던 두 사람이 하나의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다는 점에서 <방문자>를 연상시킨다.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반두비>는 한국이라는 지정학에 나열된 정치적 부조리를 스토리텔링의 근간으로 둔다. 고액의 영어학원비를 벌기 위해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민서의 모습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주차 공간을 찾아 헤매는 재문(박희순)과 상사로부터 야간 출근을 통고 받은 예준(장현성)이 결국 아이의 죽음을 방조하게 된다는 과정만큼이나 부조리한 것이다. 신동일 감독은 영화적 허구라고 말하기엔 현실적 리얼리즘이 지독하게 녹아 들어간 살풍경을 곧잘 묘사한다. <반두비>도 마찬가지다.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떼먹고 부도를 낸 사장은 부유한 삶을 누리고 영어에 목맨 여고생들은 자신들을 희롱하는 백인 영어선생님 앞에서 방긋 웃는다. 비상식이 평온히 내려앉은 기이한 부조리는 정치적 메타포를 노골적으로 함유한 영화적 소재에 가깝다.
사실 현정권과 특정인물을 겨냥한 직설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전작들보다 정치적 색채가 보다 민감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물론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역시 정치적 메시지가 노골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전작들에서 의도한 정치적 발언이 스토리텔링에 녹아 든 메타포의 양식으로 밑그림처럼 삽입되던 것과 달리 <반두비>는 좀 더 직설적인 강변에 가까운 양식으로 정치적 발언을 던진다. 간접적인 매체와 사건을 통한 은유가 직접적인 행위나 대사를 통해 보다 쉽고 강하게 어필된다. 사실 <반두비>는 실상 징집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신도를 통해 파시즘에 가까운 보수적 강제성에 대한 저항적 신념을 직설적인 이미지에 담아낸 <방문자>와 비슷한 양식의 저항적 변화를 꿈꾸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문자>가 제도적 부조리에 대항하는 개인의 소신을 정당하게 담아내는 것과 달리 <반두비>는 비난과 조롱의 수순에서 멈추는 느낌을 부여한다. 그것은 그 이미지 자체가 주는 쾌감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일면 퇴보적이다. 또한 여고생인 민서와 이주노동자인 카림의 신분은 <방문자>의 두 남자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상징성을 끌어안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어쩌면 <반두비>의 정치성이 전작들보다 민감하게 느껴지는 건 단지 동시간대의 현실을 인식시킬만한 소품들을 영화적으로 이양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런 현실적 리얼리티가 강렬한 탓에 때때로 영화적 리얼리즘이 훼손하는 듯한 감상이 부여된다.
신동일 감독의 작품에서 발생하는 본질적 매력은 정치적 주제가 이야기를 잠식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마치 피자빵에 얹혀진 모짜렐라 치즈처럼 정치적 컨텍스트와 스토리텔링이 자신의 영역을 보존하면서 서로에게 녹아 내리듯 밀착한 채 함께 진전된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만남이 버디무비의 속성을 발생시키는 동시에 정치적 상징을 연상시킬 때, 텍스트와 이미지에 입체적 풍요가 부여된다. 버디무비의 구도 안에서 로맨틱코미디의 자질까지 내포하는 <반두비>는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만큼이나 이야기적 재능이 뛰어난 영화다. <반두비>의 직설은 현실적 통쾌함이 보장되지만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잠식하고 있는 듯한 비효율적인 불편함이 감지된다. 이는 어쩌면 작가의 창작력을 침해할 만큼 현실의 정치적 공정성이 심각한 부조리의 수순으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반두비>가 훌륭한 자질을 지닌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여전히 그 이야기가 매력적인 탓이다. 직설적인 정치적 언어가 강하게 인식되는 탓에 허구적 자질이 때때로 잠식되곤 할 뿐, 스토리텔러로서 신동일 감독의 재능은 <반두비>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방문자>와 마찬가지로 단독 컷처럼 분리된 세계관에서 살아갈만한 두 인물을 투샷의 세계관으로 이끌어내는 이야기의 설득력은 <반두비>에서도 탁월하며 이는 신동일 감독의 정치적 뜨거움보다도 대단한 성과다. 하이틴 무비의 경쾌함을 밑천으로 버디무비의 유쾌함과 로맨틱코미디의 순수한 자질을 흡수하고 블랙코미디의 감수성으로 아우르는 <반두비>는 작지만 다부진 민서의 눈빛만큼이나 강단이 뚜렷한 영화다. 연기 경험이 전무하다고 할만한 백진희와 마붑 알엄의 기묘한 조합 역시 효과적인 앙상블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이 작품을 ‘반두비’라고 쓰고 ‘친구’라고 읽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두비’라고 읽고 ‘친구’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상 <반두비>라는 제목은 <친구>라는 제목으로 바꿔 넣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친구’가 아닌 ‘반두비’인 이유는 ‘반두비’는 ‘반두비’이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를 ‘인간’이라고 해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반두비’는 영원히 ‘친구’로 해석해야 할 과제인 셈이다. 단지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반두비>를 불순하게 인식하는 이라면 자신이 과연 ‘이주노동자’를 ‘인간’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불순하게 만드는 건 세상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이런 것만 보니까 그 따위로’사는 거다. 때론 현실의 편견을 부수고 불편함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다. 개인의 변화는 세상의 변화를 위한 밑천이 된다. 그리고 <반두비>는 그 가능한 변화들을 위한, 작지만 당찬 목소리다.
공무원 지상주의가 대한민국 20대를 고시라는 무덤에 매장해버린 세태 속에서 <7급 공무원>이란 제목은 의미심장한 예감을 부른다. 하지만 예감은 예감일 뿐, 오해하지 말자. 코미디, 그것이 진리다. 첨단 기기를 이용한 첩보행위 도중에도, 지상과 수상을 넘나드는 추격전 도중에도, 긴박한 육박전이 동원되는 액션 도중에도, 어김없이 다리에 힘 풀릴만한 엇박자가 연출된다. 진지한 상황 가운데서도 해프닝을 일삼는 캐릭터와 분위기 파악엔 안중 없는 대사의 합은 매번 웃음을 안겨주고야 만다.
안수아(김하늘)는 국가 비밀정보요원이다. 하지만 신분이 드러나선 안 되는 처지인 덕분에 스스로를 여행사 직원으로 위장한 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무(?)를 수행한다. 이런 까닭으로 애인인 이재준(강지환)의 오해를 사고 결국 이별 통보까지 받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여전히 공무를 수행 중이던 안수아는 이재준과 재회하고 구타로 회포를 푼다. <7급 공무원>은 액션물이나 형사물, 심지어 첩보물의 외피를 한쪽씩 걸치고 있지만 본질적으론 로맨틱코미디다. 그리고 그 로맨틱코미디 안에서도 로맨틱보단 코미디에 강세를 두고 있다. <7급 공무원>은 시작부터 끝까지 코미디를 위해 모든 요소를 복무시키는 영화다.
전체적인 맥락만 놓고 보자면 <7급 공무원>은 조악한 영화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충분히 설득할만한 내러티브는 종종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시퀀스 전체를 관통할만한 유기적인 맥락은 애초에 고려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그릇을 시야에서 가려버릴 정도로 뻔뻔하게 눈에 띄는 장기가 그 안에 담겨있다. 개성이 충만한 캐릭터들은 <7급 공무원>이란 작전을 수행하는 일급요원들이다. 새침하듯 억척스런 안수아와 소심하듯 열정적인 이재준을 연기하는 김하늘과 강지환은 나름대로 그 캐릭터에 충실한 연기를 펼친다. 또한 두 주연이 이루는 합의 빈틈을 메우거나 역할의 반사적 기능에 충실한 덕에 효과를 증폭시키는 조연들의 공헌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류승룡이 연기하는 재준의 상관 원석은 웃음의 자율신경이라 명명해도 좋을만큼 중요한 배후 인물이다.
국정원에 소속된 비밀요원들은 신분을 위장하고 국내에 잠입한 국제적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한다. 그들은 고성능 장비를 소지하거나 첨단 추적 기기를 통한 지원을 얻는다. 사실 영화 속 ‘7급 공무원’의 세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 과학수사대와 경찰특공대라는 절대명사까지 동원한다 해도 영화 속에서 ‘첩보’란 단어를 묘사하는 이미지 자체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의 범주를 통해 예상되는 스케일과 괴리감을 부른다. 드레스를 입은 채 수상제트스키를 타고 범인들을 쫓는 안수지의 추격전에서 시작되는 <7급 공무원>은 작게는 고화질 위장캠을 비롯한 첨단 첩보 장비로 무장한 국정원 비밀 요원들의 외형부터, 크게는 스파이물이라는 소재 자체의 성격까지, 모든 것들이 한국적이라고 부르기엔 괴리감을 형성할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 괴리감은 <7급 공무원>의 선택적 오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지향점이 그 영화적 현실을 관객에게 온전히 설득시킬 요량과 무관함을 입증하고 있다고 보는 쪽이 옳다. 만약 일련의 이미지로부터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면 그것이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첩보물 형태의 오락영화들과 무관하지 않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7급 공무원>은 분명 할리우드 오락영화에 대한 동경심이 읽히는 영화다. 반대로 그 동경심 자체를 역공으로 착취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스케일을 흉내 내고 있다. 할리우드가 묘사한 사례들을 대한민국에 적용시킨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7급 공무원>의 핵심은 시트콤에 가까운 에피소드를 순발력 있게 이어가며 강세를 유지하는 코미디다. 공격할만한 허점이 많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만큼 파괴력 있는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 철저하게 조직된 진영이라기 보단 마구잡이로 깔아놓은 지뢰밭처럼 예측할 수 없는 웃음들이 순간을 지배한다. 물론 객석에서 일어서게 될 즈음엔 영화의 첫 장면이 가물가물함을 느낄지 모른다. 어떤 관객은 뒤늦게 이를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결론을 두더라도 2시간 정도는 분명 낄낄거리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7급 공무원>은 욕설과 구타라는 가학적 폭력을 코미디라고 착각하는 어떤 코미디영화들과 궤를 달리한다. 유연한 캐릭터와 합이 적절한 대사를 통해 웃음을 전달하는 건전한 오락영화란 점에서 장르적 성취를 인정할만하다. 어쩌면 코미디라는 기능성 그 자체를 염두에 두고 <7급 공무원>을 선택할 관객에게 이런 긴 설명은 무의미한 일이 될지 모른다. 대사로 치자면, ‘장난 한번 치니까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랄까.
<Duplicity>라는 원제처럼 <더블 스파이>는 시종일관 ‘표리부동’한 정체를 유지하는 캐릭터들의 심리전이다. 각각 ‘MI6’와 ‘CIA’근무경력이 있는 전직 국가요원 레이(클라이브 오웬)와 클레이(줄리아 로버츠)는 현재 대기업 산업스파이로 활동 중이다. 2003년, 두바이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구면이지만 초면처럼 낯선 인사를 반복적으로 주고 받아오곤 했다. 마치 정해진 대사처럼 대화를 나누고, 정해진 배역처럼 마주치고 헤어졌다. 첫 만남을 묘사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바로 5년 뒤로 점프 컷, 그리고 그 중간중간의 서사를 플래쉬백하는 영화의 속내를 읽기란 마지막까지 쉽지 않다. 저 두 사람만큼이나.
2003년을 서사의 출발점으로 삼은 <더블 스파이>는 첩보물의 예감을 부르지만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동서진영의 이념적 대립과 무관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물론 ‘본’시리즈의 각본가이자 <마이클 클레이튼>의 감독인 토니 길로이의 이름을 인지할 수 있다면 그런 예감쯤은 애초에 지닐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아남은 첩보원이 자신을 폐기하려는 국가에 대항하던 스토리나 기업의 비윤리적 노폐물을 청소하던 로펌 변호사의 양심적 결심을 묘사한 이야기는 거대한 반윤리에 맞서는 개인 윤리의 승리를 그린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다만 <더블 스파이>는 앞선 사례들처럼 비범한 야심을 내세우는 영화가 아니다.
전자들과 달리 <더블 스파이>는 어떤 본질적 질문에 답하기 위한 캐릭터의 활약상을 전시하지 않는다. '제이슨 본'과 '마이클 클레이튼'이 개인의 본질을 복원하기 위해 삶을 역류했던 것과 달리 레이와 클레이는 개인의 욕망에 삶을 복무시킨다. 반윤리적 질서 속에서 몰락한 개인의 가치를 복권하기 위한 고행을 감내했던 전자들과 달리 <더블 스파이>의 남녀는 사유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껍데기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행한다. 상대를 속이는 동시에 상대의 진심을 의심해야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연출된 거짓처럼 인식시키며 철저하게 위장된 삶을 살아간다. 5년의 너비를 확보한 서사는 그 간격을 오가며 두 사람의 진심을 끊임없이 캐묻고 덮는다.
관객에게 있어서 <더블 스파이>는 두 사람의 진심을 추적하는 게임과 같다. 스파이를 소재로 두고 있지만 첩보물과 거리를 둔 <더블 스파이>는 경쾌한 범죄영화의 외형에 로맨틱코미디의 정서를 함양한다. 물론 그 모든 형태와 정서를 포괄하는 스토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을 부르는 미궁처럼 설계됐다. 하지만 ‘본’시리즈와 <마이클 클레이튼>이 그랬던 것처럼 좀처럼 해법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에 명확한 마침표를 찍듯 군더더기 없는 결말은 탁월하다. 줄충한 스토리 설계자로서 토니 길로이의 능력은 <더블 스파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다만 미로 같은 심리를 헤매는 과정이 온전히 매력적이라고 떠받들기엔 걸리는 구석이 없지 않다. <더블 스파이>는 제로섬 게임과 같다. 관객은 예측 불가능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영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끊임없이 그 진심을 의심하면서 반복적인 플래쉬백을 통해 서사를 수집하고 배열해나가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가 요구하는 수고와 노력에 비해 결말이 주는 보상은 충분한 위안이 될 만큼 비범한 것이 아니기에 허무에 시달리는 관객이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컷어웨이 방식의 장면 전환 역시 지나치게 반복적이라 권태로운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더블 스파이>는 분명 뛰어난 스토리 그 자체를 핵심에 두고 다양한 장점을 장착해나가는 영화다. 클라이브 오웬과 줄리아 로버츠의 앙상블은 진심을 가늠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의 모호한 관계를 이루는데 있어서 절묘한 호흡을 선사한다. 로맨스적 감수성과 대결 구도의 긴장감까지 아우르는 캐릭터 수행 능력은 이야기를 위한 훌륭한 보호색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또한 대사를 차단한 채 경쾌한 배경음과 슬로모션을 통해 연출한 오프닝 시퀀스의 난투극은 고조된 감정을 여과 없이 분출하면서도 한껏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연출한다. 마치 춤을 추듯 멱살을 잡고 팔을 휘두르다 이내 바닥에 뒤엉키는 톰 윌킨슨과 폴 지아매티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섬세하게 포착된다. 극의 결말에 다다라서야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 씬이지만 그 씬의 독자적인 형태만으로도 인상적이다.
한편으로 <더블 스파이>에 등장하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산업스파이들은 삶의 본질보단 물질적 수단으로서의 일상에 속박된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대인과 닮았다. 결국 모든 작전은 거대한 제로섬 게임으로 봉착하고 결과적으론 물질적 실리가 없는 승패가 구성된다. 물론 그 뒤에 커다랗게 존재하는 건 패자들의 실체 없는 허무다.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채 껍데기 같은 일상에 복무하는 현대인들의 삶은 한방을 계획하는 산업스파이들의 위장된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토니 길로이는 결국 게임의 윤리를 빌미로 막대한 이윤을 부과하지 않는다. 오락적 자질을 뽐내는 동시에 작가의 가치관을 배반하지 않는다. 토니 길로이의 양심은 결코 변질되지 않는다. 뿌린 만큼 거두리라. 완벽한 결말만큼 계산도 철저하다.
루시힐(르네 젤위거)은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다. 따뜻한 마이애미 해변에서 매일같이 조깅을 하고 대기업 회의에 참석하며 업무를 시작한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네소타 발령에 나선다. 낙후된 지방 공장의 손실을 절감하기 위해선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직원들의 정리해고 절차가 필요하다. 중책을 떠안았지만 그녀의 자신감은 팽배하다. 적어도 미네소타행 공항에 도착할 때까진 그랬다. 하지만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몰아치는 칼바람에 한번, 그리고 결코 만만찮은 공장 직원들의 텃세 속에서 또 한번 발을 구르고 치를 떤다. 따뜻한 마이애미에서 시크한 생활을 즐기던 루시힐에게 미네소타는 지방의 촌뜨기들이 모여 사는 열악한 구석에 불과하다.
교훈적인 인생지침서처럼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성찰적 스토리가 줄기를 이루고 말랑말랑한 로맨틱코미디의 무드가 가지를 친다. 따뜻한 마이애미에 익숙한 루시힐이 척박한 미네소타에서 적응해나가는 모습 그 자체가 <미쓰 루시힐>의 관건이나 다름없다. 개인주의적 편의에 길들여진 도시 여자가 지방의 관심을 번거로워하거나 텃세에 갈등을 빚다 결국 소박한 진심을 깨닫고 화해의 국면으로 들어가 그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맥락은 물론 뻔하다. 전형적이거나 도식적이다. 하지만 귀엽고 아기자기한 묘사들이 곳곳을 장식하며 소소한 매력들이 소박하게 진열된다. 뜨겁게 달아오를 만한 특별함은 없지만 그 진심에 담긴 온기가 서서히 전해질만큼의 자질은 있다.
무엇보다도 (비록 국내 국내개봉명에 불과하지만) <미쓰 루시힐>이라는 롤타이틀처럼 루시힐이란 캐릭터가 어필하는 매력은 중요한 관건이 된다. 루시힐은 르네 젤위거를 본떠 만든 캐릭터라고 해도 될 만큼 배우의 매력이 투과된 캐릭터다. <미쓰 루시힐>의 루시힐은 도도하고 고상한 척 하지만 르네 젤위거의 출세작이라 말할 수 있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브리짓 존스처럼 쉽게 망가지고 털털한 내면을 드러낸다. 때때로 과감한 슬랩스틱을 서슴지 않으며 웃음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이미지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어딘가 심심하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조연 캐릭터들에 더욱 정감이 간다. 그들은 하나같이 순진하고 소박한 얼굴로 영화의 표정을 대변하고 소소한 매력을 더한다.
<미쓰 루시힐>은 큰 맥락보다도 작은 소품들에 정이 가는 영화다. 뛰어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소소한 매력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소임은 충분하다. 물론 도시와 지방이라는 지정학적 대비는 단조롭고 한편으로 지방의 인심을 지나치게 우상화시키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지만 이를 통해 물질주의적 풍요와 개인주의적 이기에 젖은 현대도시인들의 삭막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효력도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하다. 상투적이고 투박하지만 때때로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 곧잘 발견된다. 예쁘지 않은 여자가 매력적일 수 있는 것처럼 <미쓰 루시힐>은 소박한 이미지에 아기자기한 매력을 숨겨둔 귀여운 영화다.
루시힐(르네 젤위거)은 훈훈한 마이애미 해변에서 매일같이 조깅을 하고 대기업 회의에 참석하며 하루를 보내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중책을 안고 지방발령에 나선다. 낙후된 지방 공장에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직원을 정리하라는 것. 팽배한 자신감으로 비행기에 탑승한 루시힐은 미네소타의 추운 기후에 한번, 만만찮은 공장 직원들의 텃세에 또 한번 발을 동동 구른다. 풍요롭고 안락한 도시 생활에 익숙하던 루시힐이 척박한 지방의 기후와 문화에 적응해가는 모습은 <미쓰 루시힐>의 큰 줄기다. 전형적인 로맨틱코미디의 정서와 함께 삶의 교훈적 변화를 보여주는 인생지침서 같은 스토리가 어우러진다. 도시의 개인주의적 편의에 길들여진 여자가 지방의 인심 속에서 갈등하다 끝내 화해하고 어울리게 된다는 맥락은 다소 뻔하지만 때때로 귀엽고 아기자기한 묘사가 발견된다. 큰 맥락보다도 작은 소품들에 정이 간다. 뛰어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소소한 매력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소임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