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재계의 큰 손으로 꼽히는 재벌의 뒷거래를 폭로한 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다니엘 크레이그)는 되레 곤경에 처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명예훼손의 역공을 당한 그에게는 이를 맞받아칠만한 여력이 없었다. 정보원의 증발로, 심증은 충분했지만 물증이 없었던 것. 덕분에 재판에서 패소하고 막대한 벌금형 구형으로 전재산을 날리게 된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스웨덴의 산업을 일으킨 기업으로 꼽히는 방예르 산업의 전직 회장 헨리크 방예르(스텔란 스카스가드)의 제안을 대신 전하는 변호사로부터였다.
펑크한 헤어스타일과 피어싱이 눈에 띄는 리스베트 살란데르(루니 마라)는 사실 유능한 정보원이며 천재적인 해킹 실력의 소유자다. 사회부적응자에 가까운 그녀의 외모는 모든 이들의 편견을 부르는 동시에 그녀의 공격적인 성향이 구체화된 결과에 가깝다. 문신과 피어싱으로 무장한 그녀는 한 남자에 관한 정보 수집을 의뢰 받게 되고 그로 인해 그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로 인해서 한 남자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 남자의 이름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바로 리스베트가 조사한 바로 그 남자였다.
고인이 된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스릴러 3부작 중 첫 작품을 두 번째로 영화화한 데이비드 핀처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스웨덴에서 제작된 <밀레니엄 제1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원작과 다른 각색이 발견되는 작품이지만 그 결과물에는 차별점이 있다. 각색물로서 두 작품의 차이는 인물 간의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서 그 내면의 감정까지 포용하느냐의 여부에 있다. 스웨덴 버전은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관계를 동료라는 이성적 대상의 범위 안에 가두며 원작과 다른 길을 걷는 반면, 핀처는 두 남녀 사이의 미묘한 감정적 화학 작용을 보다 세심하게 다룸으로써 소설에 내재된 멜로적인 여운을 영화로 끌어온다.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만남이 성사되는 과정이나 결말부를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 원작에 충실한 건 핀처의 결과물이다. 이는 단지 원작의 모사를 염두에 둔 것이라기 보단 그 결정적인 순간을 스크린에 세워 넣을 것인까라는 고민이 원작의 감정까지 영화가 포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맞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선택은 3부작으로 진전될 시리즈의 형태에도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란 예감을 부른다. 특히 원작이나 스웨덴 버전과 달리 결말부의 사건 해결 방식을 보다 독립적으로 각색해낸 측면은 이런 추측을 보다 강하게 대변한다.
스웨덴 버전이 남녀의 관계적 심리를 잔가지라 생각하고 쳐낸 결과물이라면 핀처의 작품은 캐릭터와 그 캐릭터가 이루는 관계에 보다 큰 흥미를 느낀 작가의 각색물이라는 차이로 보인다. 그만큼 스웨덴 버전이 사건의 추리와 해결에 공을 들인 작품이라면, 핀처의 작품은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인물의 심리와 현재의 관계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이 작품을 보다 개인적인 야심이 깃든 작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물론 핀처의 작품에서도 스웨덴 버전의 인용이라 이해할만한 아이디어가 발견되지만 이는 스웨덴 버전의 인용이라기보단 먼저 선점한 결과에 대한 차별적인 대안이 불필요했던 까닭처럼 보인다.
핀처의 작품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스웨덴 버전의 영화와 원작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다는 건 이 작품이 결국 원작과 스웨덴 버전을 섭렵한 관객에게 더 큰 발견의 재미를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원작을 먼저 숙지한 관객이 반대의 경우보다 영화를 보다 즐길 수 있는 확률이 크다. 사실 핀처의 영화는 두 인물이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할애하는 분량이 책 한 권을 훌쩍 넘기는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속도감 있는 사건의 진전을 바라는 관객의 입장에서 기다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미카엘이 헨리크를 만나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는 광경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는 복잡한 브리핑과 같아서 단숨에 들이키기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핀처의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건 스타일의 양식이다. 비주얼리스트로서 핀처의 장기는 이 작품에서도 녹록하잖게 드러난다. 특히 극 초반 영화의 줄기와 상관이 없는 오프닝 시퀀스의 비주얼은 CF감독 출신다운 핀처의 감각을 체험할 수 있는 부록과 같다. 동시에 핀처의 감각은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에 비해서 보다 정밀한 장르물의 형식에 가깝게 보인다. 특히 유령과 같은 시선으로 생물처럼 미끄러져나가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유려하게 공간을 포착하고 응시하는 방식은 필요에 따라서 극적인 서스펜스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원숙한 연기와 캐릭터 표현력이 두드러지는데 그 중에서도 리스베트를 연기한 루니 마라는 단연 인상적이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무난한 인상으로 출연했던 그녀는 펑크한 스타일로 무장한 리스베트를 연기해냈다는 이슈를 넘어서 완벽하게 자신의 스타일로 승화했다. 단연 올해의 발견이랄까.
1987년에 공개된 <천녀유혼>은 청나라 초기의 문인 포송령이 집필한 16권 분량의 기담집 <요재지이>에 수록된 단편 <섭소천>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당시 중화권 톱스타로 떠오른 장국영과 왕조현을 앞세운 이 작품은 무협과 느와르를 필두로 한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대변하는 흥행작이었으며 올드팬들에게는 여전히 향수를 부르는 고전적인 아이콘이다. 새롭게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은 이런 전설적인 인기에 영합한 기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품을 새롭게 단장한다는 기획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어떤 식으로든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이 전작과의 비교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메이크된 판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내러티브에 있다. 왕조현이 연기한 소천과 장국영이 연기한 영채신의 러브스토리가 주를 이룬 전작과 달리 새로운 <천녀유혼>은 유역비가 연기하는 소천과 여소군이 연기하는 영채신의 로맨스 이전에 고천락이 연기하는 퇴마사 연적하와 소천의 내밀한 사연을 프롤로그로 삽입한다. 이로 인해서 전반적인 캐릭터들의 비중이나 형태도 변모했다. 소천과 영채신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사연이 소천과 영채신, 연적하가 이루는 삼각구도의 관계로 변모한 것. 또한 과거 연적하와 동료였으나 그에게 실망을 느끼고 대립하게 된 하설풍뢰(번소황)와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도 새롭다. 이처럼 전작에 비해 보다 복잡해진 캐릭터 관계도는 내러티브의 전개에도 영향을 끼쳤다.
연적하와 소천의 관계가 두드러지는 리메이크작에서 영채신은 극을 주도하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극의 전개에 있어서 영채신은 여전히 주요한 캐릭터다. 다만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보장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단순히 캐릭터의 중요도가 변화했음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그런 변화가 리메이크작에서 일종의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리메이크 판본은 영채신과 소천의 로맨스보다도 소천과 연적하의 사연이 감정적 중추를 차지하는 형태로 발전된다. 이런 선택은 두 사람의 로맨스로 귀결되는 원판의 감정선을 보다 입체적으로 치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잉태한다. 하지만 역으로 리메이크 판본의 선택은 영채신과 소천의 감정선을 중화시키고, 소천과 연적하 사이의 감정선마저 소품처럼 몰락시킨다. 감정적인 구조를 확장시키고 있으나 그 감정에 긴밀함을 불어넣는 재주까지 마련하는데 실패한 느낌이다.
이는 캐릭터들의 매력, 더 나아가서 배우 스스로가 어필하는 매력의 결핍 덕분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리메이크 판본은 원전에 비해서 캐릭터들의 매력이 떨어지는 인상이다. 청순함과 요염함을 오가던 왕조현과 유약하면서도 섬세하고 순정적인 장국영에 비해서 유역비와 여소군은 평범하다. 이는 온전히 배우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에 관한 묘사력과 그들에게 주어진 행동 반경의 제약 탓이기도 하다. 캐릭터 관계가 확장됐다는 건 극의 중추를 이루던 캐릭터들이 자신의 활동반경을 그만큼 잃어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반경을 잃어버렸다는 건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롭게 자신의 공간을 확보한 캐릭터들이 그만큼의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맹점이다. 상황은 보다 분주해졌으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캐릭터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건 감상의 집중력도 약해짐을 의미한다.
1987년에 공개된 <천녀유혼>의 묘사력은 지금의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하지만 그 열악함이 발생시키던 재미가 있었다. 이를 테면 소품으로 제작된 시체들이 기어 다니는 광경은 그 자체가 지닌 원초적인 긴장감이 있었으며 영화는 이를 영리하게 이용하며 위트를 발생시킨다. 슬랩스틱의 요소와 함께 고전적인 무협물로서의 매력이 존재했다. 그 열악함이 B급 취향의 흥미를 부르기도 한다. 새로운 <천녀유혼>은 오늘날의 발전된 CG기술을 통해 보다 매끈하고 깔끔한 이미지를 구축했지만 되레 그것이 이 영화를 심심하게 만든다. 진보한 기술이 되레 원작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퇴화시킨 셈이다. 무협물로서 액션의 묘사는 보다 디테일해졌지만 날것처럼 등장하던 소품들의 귀기 어린 기운들은 사라졌으며 영계와 인간계 사이의 신비감도 되레 증발한 것 같다. 거친 단면들을 말끔하게 밀어냈지만 오히려 그것이 <천녀유혼>을 평범한 작품으로 인식시킨다. 깔끔할수록 보기는 좋지만 때때로 그것이 심심할 수 있다는 것,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이 증명하는 건 어쩌면 이런 아이러니가 아닐까. 장국영에 대한 향수는 덤이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영화에서 영상기술의 발전은 장르의 개척을 가능하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SF와 판타지 장르에서 거둔 성과들은 이런 전제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사례일 것이다. CG기술의 발전은 형이상학적인 상상력을 형이하학적인 표현력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의 표현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장르 개척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현실에서 가능해졌다. 1982년에 공개된 <트론>의 속편격인 <트론: 새로운 시작>(이하, <트론 2>) 역시 바로 이런 영상기술의 발전을 통해 얻어진 표현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조악한 이미지의 결과물처럼 보여지는 <트론>은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실험작이라 평가 받는 작품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미지화한 8비트 게임 영상 수준의 그래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당대에서는 보기 드문 실험적 작품으로서 평가 받았다. 이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둔 아이디어가 표현 기술의 발전 속도를 앞서 구현된 사례로서도 유용하다. 마치 10년 전에 <아바타>가 나온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이는 결과적으로 실험적인 도전으로서의 가치를 벗어나서 그 조악한 이미지가 이룬 결과적인 성과, 즉 도스 체계로 운용되는 8비트 컴퓨터의 베이직한 프로그램 원리를 비유적인 이미지로서 치환한, 가상의 평행우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컬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 조악한 영상이 되레 단순명확하게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원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트론>(이 제작된 시대)에 비해 진일보된 영상기술을 활용한 <트론 2>는 그런 장점을 통해 전작과 차별화된 감상의 묘미를 발생시킨다. 서사적으로 속편에 가까운 <트론 2>는 전편의 바탕을 이루던 컴퓨터 체계의 평행우주 세계관 ‘그리드’를 비롯해서 ‘광선 바이크’ 레이스나 ‘디스크 배틀’과 같은 볼거리의 이벤트를 동일하게 등장시키면서도 상대적으로 보다 화려해진 이미지의 미장을 통해 리메이크의 의미를 부여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완성했다. 어두운 무채색의 색상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조도가 높은 형광색 띠가 곳곳에 배치한 ‘그리드’의 이미지는 과장된 빛의 황홀경에 가까운 감상을 부여함으로써 가상세계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부추기며 언어 그대로 레이저쇼를 구경하는 듯한 관람의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트론 2>는 그 현란한 빛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심심한 영화다. 말 그대로 구경에 가까운 재미라는 건 <트론 2>의 장점이라기 보단 단점에 가깝다. <스피드 레이서>가 연출해낸 비현실적인 레이싱 경기와도 비교해봐도 좋을 <트론 2>의 광선 바이크 레이스는 바이크를 따라 흐르는 빛의 물결을 구경하게 만들면서도 레이스의 속도감이나 긴장감을 차단해버린다. 이는 곧 그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이 쾌감의 속성으로 연동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트론 2>를 두른 모든 이미지의 결과적 감상과 연결된다. <트론 2>는 <트론>의 시대보다도 진화된 컴퓨터 프로그래밍 체계를 포섭하며 보다 광활해진 전자신호 시스템의 세계를 보다 화려해진 영상으로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전작의 야심에서 보다 나아간 기획물이다. 보다 진일보된 영상은 이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트론 2>는 조악했던 전편이 얻어낸 컬트적인 의미로부터 차단된, 발전된 이미지를 과시하는 평범한 공산품으로서 퇴보된 작품처럼 보인다. 미학적으로 흥미로운 이미지의 세계관을 설계하고 구상했으나 그 모든 이미지마저도 결국 전작이 마련한 세계관의 발전적 차용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창의적인 결과물은 아닌 셈이다. 눈부신 이미지의 향연 속에는 감흥이 결여돼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의 세계관과도 비교할 만한 기계와 인간의 대립, 혹은 정보를 독점하는 시스템 속에서 발생하는 정보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같은 현실 체계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트론 2>는 전작과 일맥상통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하지만 딱히 탁월한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하기 힘든 전작만큼이나 속편의 기승전결 역시 세심하게 세공되지 못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극적 긴장감의 결여는 전시적 용도로서의 기능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미지로부터 기인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클라이맥스의 구심점을 마련하지 못한 무미건조한 이야기의 흐름이 이를 부채질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트론>의 속편으로서 ‘트론’이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롤타이틀 무비가 정작 ‘트론’이라는 제목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의아한 일일 것이다.
정의를 고수하며 싸움에 승리한 남자에게 남은 건 영광이라 부르기조차 넌더리나는 상처 뿐이었다. 가정은 무너졌고, 직장은 사라졌다. 만신창이처럼 너덜해진 삶 속에서 무기력을 체감한 남자는 덧없는 교훈 하나를 짊어진 채 관계를 단절시키듯 살아왔던 아버지의 시신이 놓인 지방의 마을로 떠난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굴 속으로’ 들어가듯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키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낀 남자는 ‘더러운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다시 마음에 지펴오르는 의심을 좇아 그 실체의 조각들을 수집하고 점차 완성돼 나가는 거대한 비밀과 마주서다 이에 맞서나가기 시작한다.
포털사이트에서 인기리에서 연재된 윤태호 작가의 <이끼>는 작은 실마리에서 출발해 거대한 담론으로 내달리는 작품이다. 마을을 둘러싼 비밀은 이 세계의 이면에 놓인 진실과 깊게 맞닿아 있으며 평온한 마을의 풍경은 부조리를 가린 위장의 합리로서 이뤄낸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류해국은 그 모든 위장된 합리로서 이룬 평온을 헤집어 내는 암적인 존재다. 애써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며 자신만의 공동체 속에서 평온을 유지해오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추적하는 류해국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밀어내거나 제거하려 들고 이는 결국 어느 한 쪽의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지난한 싸움으로 치열하게 발전돼 나간다.
영화화 단계부터 많은 관심을 얻어온 <이끼>의 연출자로 나선 강우석 감독은 분명 의외의 카드였다. <이끼>는 고요한 용광로와 같은 작품이다. 완벽하게 감정이 정제돼 버린 듯한 메마르고 거친 세계관은 극단의 대립 구도로 맞서는 캐릭터들의 갈등과 충돌로서 뜨겁게 달궈진다. 유머나 분노와 같은 인간의 평면적인 감정을 넘쳐 나듯 활용하는 강우석의 세계관은 분명 <이끼>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화된 <이끼>는 원작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품이란 점에서 그 세계관이 스크린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재현될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될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었다.
강우석의 <이끼>는 원작의 서사 일부를 재구성함으로서 극의 질량을 줄여냈다. 문제는 원작의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영화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작의 다양한 캐릭터들은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임과 동시에 그 세계관의 핵심이나 다름없다. 은밀하고도 긴밀하게 이뤄진 캐릭터들의 관계 구도는 <이끼>라는 세계가 품은 부조리를 완성하는 커다란 조각이며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이들과 대립 구도에 선 인물을 유인하는 지도나 다름없다. 캐릭터들의 사연은 그 세계관의 기원이자 그 세계를 이룬 부조리를 설명하기 위한 인과의 본체나 다름없다. 영화는 그 모든 사연을 묘사함에 있어서 힘을 배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문제는 그것이 그 캐릭터들이 극적으로 완수해야 할 목표를 훼손한다는 사실이다. <이끼>는 캐릭터들의 질량을 더해서 그 세계관의 무게감을 채우는 작품이다. 캐릭터의 사연은 바로 그 캐릭터들의 극적인 질량감을 표현하는 수단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개개인의 서사가 드러나고 축적되며 세계관의 본질이 완성되고 극이 진행된다. <이끼>는 원작이 묘사하는 세계관의 규모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서사에 빤한 편차를 둔다. 패착은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부피는 유지하되 질량이 줄어들었고, 전체적인 밀도는 낮아졌다. 변주의 시도 자체를 지적하는 게 아니다. 다만 원작을 수용하는 방식에서 그 본질을 이루는 구조를 간과하고 그 결과적인 형태만을 수용한 듯 보이는 결과물은 원작 자체에 대한 이해가 얕았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서사의 변주 역시 좋은 효과를 거둔 결과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색한 측면이 있다. 특히 서사적인 순열을 보다 손쉽게 매만지려는 의도처럼 보이는 오프닝은 궁극적으로 원작의 장점이 영화에서 희석된 이유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시나 다름없다. 인과를 감춤으로서 독자의 의문을 증폭시킨 원작의 서사는 단순히 구조적인 트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정체를 드러냄으로서 세계관의 너비에 서사적 질량을 늘려 나가며 극의 밀도를 채워나가는 작업과 같다. 서사의 변형은 그 구조의 자질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때때로 영화는 번뜩이는 긴장감이 담긴 시퀀스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전반적로 극의 흐름은 그 방향이 명확할 뿐, 강도의 편차가 크다. 동시에 어떤 전형적인 감정이 결여된 듯한 원작 캐릭터들과 달리 영화에서의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평면적이다. 배우들은 분명 열연을 펼치고 있지만 대부분 캐릭터로서 녹아들기 보단 배우가 지닌 스테레오 타입의 열연에 가깝다. 이는 배우들의 해석력 문제라기 보단 전체적인 디렉션의 방향성 문제로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이끼>는 리메이크라는 성과 안에서 온전히 실패한 작품이라 평할 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그것이 리메이크라는 의미를 지운 뒤의 성과 안에서도 딱히 특별하다 말할 것이 없는 평이한 범작에 가깝다. 때때로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우석 감독의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적인 냉소가 느껴진다는 건 흥미롭지만 그건 상대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특히 느닷없는 장광설로 변질된 결말부나 패착에 가까운 반전은 이 작품이 원작의 기질 자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변주라는 의미 안에서도 온전한 실패를 느끼게 만든다. 서스펜스가 증발해버린 듯한 <이끼>에서 때때로 예기치 못한 유머가 발견된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이는 고의적인 의도라기 보단 우발적인 발생에 가깝다. 결국 이마저도 연출적 실패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나 다름없다. 마치 변주가 아닌 변질처럼 느껴질 정도로.
부와 명예를 축적한 남성의 어긋난 욕망이 하녀의 표독스런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 평온한 중산층 가정에 불길한 전조가 감돈다. 치부처럼 드러난 욕망이 또 다른 욕망의 포로가 되어 불순한 관계의 늪을 허우적거린다. 자본주의가 걸음마를 시작할 1960년대 무렵을 배경으로 어느 중산층 가정의 파괴적인 몰락을 그려나가는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하녀>는 시대적 리얼리즘을 광기의 에너지로 승화시킨, 독보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다. 자본의 유무가 권력의 우열로서 확장되기 시작하던 자본주의의 요람적인 징후는 <하녀>를 이루는 무시무시한 광기의 원천이자 소스나 다름없다. 하녀의 얼굴은 곧 시대의 숨은 욕망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육체를 담보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하녀의 욕망은 부유한 중산층의 빈곤한 정서와 밀착하고 질환적인 병폐에 가까운 욕망이 괴물처럼 자라나 삶을 집어삼킨다.
걸작을 리메이크한다는 발상은 사실 위험하다. 원작의 아우라에 눌려 빛을 잃는 경우가 태반이거나 원작의 성과에 매몰되어 제 빛을 내기조차 어렵다. 김기영의 <하녀>를 리메이크한다는 건 히치콕의 그것들을 리메이크하고자 하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다. 일찍이 <싸이코>를 숏 바이 숏의 모작으로 재가공한 구스 반 산트의 그것이 증명했던 것처럼 애초에 원작의 형태를 고스란히 따라잡겠다는 야심 자체가 무리수에 가깝다. 새로운 시대의 <하녀>는 과거의 <하녀>와 조금 다른 판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단 지난 <하녀>에 출연했던 아역배우 안성기를 중년이 넘은 국민배우로 만든 50년의 세월이 두 작품 사이에 필연적인 간격을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시대적 공기의 변화가 반영될 때, 원작과 리메이크작에서 드러나는 차이가 묘한 이질감을 동반할 것임에도 틀림없다.
스크린의 입자 하나까지 시대적 공기를 채워넣는 임상수가 새로운 <하녀>의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1960년을 대체하는 2010년의 풍경은 새로운 시대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위해 마련된 미장센의 의상이다. 주요 배경이 되는 2층 집의 풍경은 보다 현대적인 감각의 인테리어로 채워졌고, 보다 젊은 세대로 구성된 인물들의 이름이 변한 것처럼 개개인의 성격과 성향도 과거와 다른 생활 양식 안에서 인물의 관계 구도도 온전히 새로운 것으로 재편된다. 보다 노골적인 물질주의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 세태에서 <하녀>는 보다 농밀하게 시대적 공기를 흡입하는 영화로 거듭날 가능성이 크다.
김기영의 <하녀>가 그러하듯이, 임상수의 <하녀>에서도 배우들의 역량은 절대적인 밑천이자 자질이다. 어쩌면 임상수의 <하녀>보다도 전도연의 <하녀>를 기대하는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원작에 비해 캐릭터의 연령층이 낮아졌다는 점도 관건이다. 최근 <파주>를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서우가 아내로 등장하고, 욕망의 근거지이자 주둔지나 다름없는 남편 역의 이정재,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늙은 하녀 역의 윤여정까지, 혈기와 관록이 뒤엉킨 캐스팅은 새로운 <하녀>에 짙은 의문을 새겨넣는다.
중요한 건 욕망이다. 임상수의 <하녀>와 김기영의 <하녀>가 서로 다른 시대적 텍스트를 품고 있음에도 하나의 본질로서 수렴될 수 있는 건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욕망 덕분일 것이다. 21세기에서도 인간은 욕망한다. 고로 <하녀>는 유효하다.
김수현vs 임상수
당초 <하녀>의 시나리오는 ‘드라마 히트 제조기’라 불리는 김수현 작가가 집필했다. 임상수는 김수현의 추천으로 <하녀>를 연출하게 됐다. 그러나 임상수의 손을 거친 시나리오를 되돌려 받은 김수현은 격분했다. 자신의 흔적이란 “초입의 한 장면 반토막과 나오는 사람들 이름 뿐”이라며 제작자에게 전화로 하차를 통보했다. 임상수의 사과가 담긴 이메일은 “용서할 수 없다”는 답변으로 일축됐다. 크랭크인 전부터 두 작가의 대립이 <하녀>를 뜨겁게 달궜다.
(PREMIERE Seasonbook 'KOREAN MOVIE PREVIEW' 4월호 No.66)
자신의 9번째 작품을 완성하려는 감독은 깊은 고민에 놓였다. 그의 초기작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서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근래에 그가 만든 작품들은 졸작이라는 오명 속을 헤맨다. 그에게 팬이라고 접근하는 이들도 그의 초기작을 칭송하면서 그의 근작에 대해서는 말문을 닫는다. 시나리오조차 탈고하지 못한 그는 영화 제작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조차 중간에 달아날 정도로 심각한 강박을 느끼고 있다. 이탈리아 영화계의 거장 귀도 콘티니(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자신의 새로운 영화를 갈망하지만 좀처럼 창작적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9살 유년 시절과 어른으로서 자라버린 현재 사이를 방황하며 자신의 주변에 자리한 여인들과 조우한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대표작 <8과 1/2>을 모티브로 삼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나인>을 다시 동명 그대로 스크린에 투영한 롭 마샬의 <나인>은 <8과 1/2>과 <나인>의 사이에 놓인 작품이다. 그러니까 <8과 1/2>과 <나인>이 각각 1/2처럼 더해진 결과물이랄까. 페데리코 펠리니가 완성한 자전적 고뇌가 다시 영화적으로 재현되는 동시에 뮤지컬 무대를 위해 마련된 퍼포먼스는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사실상 <나인>은 그 제목 자체만 보더라도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보다도 뮤지컬 <나인>의 영화화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다시 영화적 형태로 재현되는 영화 <나인>의 형상은 원작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나인>이 페데리코 펠리니를 염두에 둔 결과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두 작품에 대한 비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나인>은 단순히 그 캐스팅의 면면만으로도 이미 범상치 않은 외모를 지녔다. 귀도 역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비롯해 마리온 꼬띠아르, 페넬로페 크루즈, 니콜 키드먼, 케이트 허드슨, 주디 덴치, 소피아 로렌, (‘블랙 아이드 피스’의) 퍼기까지, <나인>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스펙터클을 전시해버린다. 마치 조명이 점멸하듯 귀도의 곁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여배우들은 그 자태만으로 <나인>의 매혹을 이룬다. 그 여배우들이 저마다의 음성과 몸짓으로 스크린을 수놓는 몇 장면은 <나인>을 기억하게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 된다. 배우들의 매력 그 자체를 캐릭터에 반영하고 여과 없이 스크린에 전시하는 <나인>은 그 이미지를 화려한 포장지처럼 두른 작품이다. 그 외형적인 화려함만으로도 <나인>은 분명 간과할 수 없는 풍요로운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뮤지컬 <나인>은 <8과 1/2>의 서사를 기본적인 골조로 삼되 뮤지컬 형식 자체를 통해 원작과 다른 차별화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영화 <나인>은 뮤지컬의 형태를 다시 스크린에 이양한다는 점에서 분명 원작의 궤도를 벗어난 차별성을 지닌 작품이다. 하지만 무대적인 연출 형식을 통해 스크린 원작과 온전히 다른 차원의 영역적 특성을 획득한 뮤지컬 <나인>과 달리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나인>은 영화적 형식으로 회귀했다는 점에서 원작의 형태가 환기될 가능성이 다분해졌다. <8과 1/2>의 서사가 축이 되는 뮤지컬의 영화화에서 <나인>은 그 서사적 형태를 연출하는 방식에서 온전히 <8과 1/2>의 자장 안에 놓여 있으며 뮤지컬 <나인>의 가무마저 차용한다.
<8과 1/2>과 뮤지컬 <나인>을 끌어안은 영화 <나인>은 두 영역을 탁월하게 봉합하지도, 어느 한 영역을 확실히 선택하지도 못한 채 배회한다. 시네마와 뮤지컬의 불편한 동거를 보는 것 같다. 뮤지컬 영화로서의 포만감은 부족하고, 원작에 대한 영화적 해석은 빈곤하다. <시카고>를 연출한 롭 마샬이라는 타이틀과 이를 수식하는 배우들의 이름은 그 자체로 반짝이는 외형을 이루지만 견실한 영화적 내면으로 잠입해 들어가지 못한다. 배우 고유의 개성만으로도 캐릭터들은 반짝거리지만 캐릭터 자체로서 태양처럼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로부터 비춰진 매력을 달처럼 반사시켜 빛을 발한다. 덕분에 <나인>은 때때로 캐릭터가 아닌 여배우들이 출연하는 콘서트를 보는 것 같다. 결국 그녀들이 만들어내는 인상적인 장면들은 순간적 전율로서 찰나를 지배할 뿐, 영화적 흐름을 만드는데 실패한다. 지속력이 약한 대신 압도적 순간이 틈틈이 나열된다. 결국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 시퀀스가 차례를 기다리듯 나열되고 이에 대한 기다림도 선망된다. 작품에 대한 지속적인 몰입이 쉽게 무산된다.
그럼에도 <나인>은 단지 그 인상적인 몇 장면의 우월함을 통해 온전히 가치가 폄하될 수 없는 영화다. 세트장에 들어선 귀도를 따라 빛을 떨어뜨리며 음영의 대비를 선명히 이루는 오프닝 시퀀스 이후의 광경은 무대적 연출 기법을 스크린에 반영하는 <나인>의 진가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기라성 같은 여배우들이 만들어내는 퍼포먼스는 단지 그것만으로 <나인>을 ‘it movie’로 만든다. 특히 마리온 꼬띠아르는 <나인>에서 재발견에 가까운 성과를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Be Italian’을 열창하며 정열적인 퍼포먼스를 선사하는 퍼기의 무대는 단지 그 신만을 떼어놓고 반복해서 되새김질하고 싶을 정도로 <나인>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로 만든다. 결국 <나인>은 감독의 재능보다도 이를 압도하는 뮤즈들의 향연으로서 보다 높은 가치를 전하는 무대인 셈이다.
둥근 챙이 앞뒤로 달린 디어스토커를 쓰고, 어깨를 덮은 긴 케이프가 인상적인 인버네스 코트 안에 단정한 라운드 슈트를 갖춰 입은 채 중후한 파이프 담배를 물고 한 손엔 지팡이를 쥔, 우리가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모습. 1887년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세기를 초월해 고전적인 추리문학의 아이콘이 된 셜록홈즈는 19세기와 20세기 사이 영국을 배경으로 활약하는 셜록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의 고전추리소설 ‘셜록홈즈’시리즈의 셜록홈즈란 분명 그런 남자다. 세련되고 지적인 이 영국탐정은 그가 등장하는 원작소설을 굳이 접하지 않은 이에게조차 그 이미지를 어필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어 장르적인 아이콘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다.
가이 리치가 연출한 <셜록홈즈>는 우리가 잘 알거나, 혹은 잘 알지 못해도 그럴 것이다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이미지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소설과 함께 리오넬 위그램의 코믹스북을 참고해 제작했다는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활발한 두뇌활동 못지 않게 근육을 움직이길 즐기는 사내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통해 이성적으로 사건의 꼬리를 좇는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와 달리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주먹질도 불사할 정도로 다혈질이며 호전적인 본능을 감추지 못하는 마초적 사내다. 물론 아서 도난 코일은 일찍이 그의 셜록홈즈 시리즈 초기작에서 그가 검도나 권투에 능하다고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는 분명 원작의 그것을 통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움직임을 선사한다.
궁극적으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탐정 아이콘을 고전적 세계관의 히어로 캐릭터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다. 이를 테면 고전 소설의 캐릭터 자체를 영화적으로 리메이크해버린다고 할까. 원작 팬이라면 그것이 불순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고전아이콘의 많은 부분을 새롭게 인식시킨다. 사실상 <셜록홈즈>는 셜록홈즈를 셜록홈즈라 쓰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 읽는다. 셜록홈즈의 이름을 빌렸을 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의 특성이 적극적으로 캐릭터의 기반을 이룬다. 심지어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는 기괴한 악당 블랙우드(마크 스트롱)를 등장시키는 것에서부터 원작의 재현이 아니라 원작의 영화적 차용이라 불려도 좋을 자질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셜록홈즈의 단짝인 왓슨(주드 로)과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서도 다를 바 없다.
<셜록홈즈>는 추리극이라기 보단 액션활극에 가까운 버디무비로 완성됐다. 셜록홈즈와 왓슨과의 관계를 그려나가는데 러닝타임의 절반 가량을 할애하는 <셜록홈즈>는 사건의 해결과정에 주목하는 추리적 묘미보다도 인물의 관계를 그려내는 드라마적 감정이 돋보이는 영화다. 동시에 셜록홈즈의 유일한 연인이라 추측되곤 했던 아이린 애들러(레이첼 맥아담스)를 등장시키며 그의 순애보적 감정마저 묘사하는 <셜록홈즈>는 간접적으로 유추되던 캐릭터의 감정적 단서마저도 적극적인 사건의 형태로서 구체화시킨다.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현장에 자리한 미세한 단서들을 통해 사건을 따라 걷는 영민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사건보다 앞서 달리는 행동파 탐정이다.
만약 셜록홈즈가 아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에 호감을 지닌 관객에게 <셜록홈즈>는 즐길만한 캐릭터적 묘미를 품은 오락영화로서 유용하다. 또한 <셜록홈즈>의 원작을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셜록홈즈의 원형은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셜록홈즈>는 가이 리치의 스타일보다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이 팔 할인 작품이다. 첨언하자면 왓슨을 연기하는 주드 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조합이 이루는 캐릭터적 재미가 큰 맥락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러나 <셜록홈즈>는 캐릭터의 매력을 보좌하는 내러티브의 묘미가 탁월하다 말하기 어려운 영화다. 특히 셜록홈즈가 상대하는 블랙우드는 <셜록홈즈>에서 마치 셜록홈즈의 탐정적 활약을 그리기 위해 단순하게 배치된 소비적 악당처럼 보인다. 동시에 사건의 해결방식에서도 셜록홈즈의 능력은 다소 과장돼있다. 이성적인 방식의 추리를 차분히 따라잡기 보단 본능적인 감각에 의지해 움직이는 셜록홈즈의 모습은 실로 파격적이라기 보단 안이하다. 만약 추리극의 형태로서 <셜록홈즈>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그 이전에 셜록홈즈라는 본래적 이미지에 호감을 느끼고 영화에 접근했을 관객이라면 배신감을 안고 상영관을 나서게 될 정도로 <셜록홈즈>는 분명 셜록홈즈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치 <배트맨 비긴즈>의 결말이 조커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나는 것처럼 <셜록홈즈>의 결말도 (셜록홈즈의 최대 숙적인) 모리아티 교수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난다. 히어로 캐릭터로 재생산된 셜록홈즈는 자신의 성공을 장담하듯 차기 시리즈의 제작마저도 가시화시킨 셈이다. 고전적인 탐정을 히어로로 탈바꿈한 시도 자체를 불순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가 가상의 캐릭터인 이상,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가 제시하는 새로운 가상성을 거부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그것이 그만큼 효과적인 가치를 품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캐릭터 시리즈를 위한 습작처럼 보이는 <셜록홈즈>가 딱히 성공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물론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 이를 만회할 수 있다면 <셜록홈즈>는 그 시리즈의 방아쇠로서 재평가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를 위한 가장 훌륭한 밑천이란 점에서도 이 가능성은 적지 않은 설득력을 품고 있다.
의문스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사건에 연루된 소년과 소녀. 용의자의 자살로 수사는 종결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18년 후,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사사가키가 성인으로 성장한 소년과 소녀, 료지와 유키호의 행방을 쫓는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야행(白夜行)’은 밀폐된 인물의 심리와 퍼즐 같은 서사적 진행을 통해 추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미스터리한 장르적 구조 속에 내재된 멜로적 감수성은 ‘백야행’의 특이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은밀하게 감지되는 두 남녀의 감정적 교류가 평행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조각처럼 나열된다. 칠흑의 아스팔트를 얇게 가린 흰 눈처럼 멜로적 감수성을 가린 장르적 연막, ‘백야행’은 추리극의 베일로 감싼 멜로나 다름없다.
원작소설과 동명의 제목을 지닌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이런 원작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리메이크에 반영했다. 무엇보다도 <백야행>의 관건은 각색의 완성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70페이지에 달하는 단행본 3권 분량의 서사를 2시간 여의 러닝타임으로 변환해낸 결과물은 원작을 접한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지점이다. 20여 년의 세월을 밀어내는 서사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두 남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다양한 인물들까지, ‘백야행’은 한 편의 영화로 변주하기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지닌 소설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도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는 ‘백야행’의 영화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건 소설의 원형을 온전히 영상으로 변환하기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제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원작과 달리 영화가 서사의 너비를 14년으로 압축한 것도 어쩌면 서사적 너비를 덜어내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추측할만한 단서로서 유효해 보인다.
일단 <백야행>은 인물과 서사를 적절히 생략하거나 도치시킴으로써 원작의 부피를 줄여나간다. 서사적 방아쇠가 되는 살인사건으로부터 격발되듯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원작의 순행적 서사와 달리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섞어가는 서사적 구성은 적절한 선택이라 할만하다. 섹스신과 살인신을 교차한 도입부의 영상도 나름의 흥미를 당긴다. 서사를 재배열하는 각색의 측면에서 <백야행>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선택을 이뤘다는 감상을 준다. 다만 서사적 변주와 함께 원작과 다른 뉘앙스가 발생한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원작이 차분하게 진전될 수 있는 건 긴 서사적 호흡 속에서 세밀한 묘사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의 제약을 염두에 두고 축약과 변주의 과정을 거친 <백야행>은 서사적 부피가 줄어든 반면 정서적 질량은 보다 넘친다. 그만큼 밀도가 높아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나열의 방식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감정을 넘쳐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성급하다. <백야행>이 원작과 명확히 달라지는 건 후반부의 감정적 표현에서 비롯된다. 결코 마주서지도, 마주치지도 않는 남녀의 거리감이 명확히 묘사되는 가운데서도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멜로적 감수성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멜로적 감정을 끝내 직설적으로 호소하고 만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마주침을 묘사하는 몇 번의 과정은 그 자체로 실패적이다. 얇은 비닐에 담긴 물처럼 쉽게 터져서 넘쳐흐를 것 같지만 좀처럼 새어나가지 않는 감정의 내밀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원작의 매력이라 한다면 <백야행>은 이를 거부하듯 정반대의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신파적 비극성을 과감히 전시한다. 마치 원작에서 가려진 단면을 발굴하듯 두 남녀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선택은 영화의 몫이다. 그리고 선택에 따른 효과적 책임 역시 영화의 몫이다. <백야행>은 후반부에 다다라 온전히 신파적 눈물을 강요하는 멜로로서 스스로를 가둔다. 감정이 차고 넘친다. 연막과 같은 신비감과 모호한 흥미는 온전히 휘발되고 증발된다. 원작과 다른 형태를 지닌다는 건 리메이크로서 가능한 선택이다. 하지만 원작과 차별화된 장점을 선사하지 못했을 때 그 선택은 오판이 된다.
전체적인 분량도 길다. 13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원작의 부피를 염두에 둔다면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백야행>은 사건의 개연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드라마다. 서사를 직조하는데 급급할 뿐, 인물의 심리를 매만지는데 소홀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덧씌워 감상의 사족을 벌려나간다. 사사가키의 대역이라 할만한 동수(한석규)는 원작에서 일종의 중계자 역할을 하던 캐릭터다. 원작으로 치자면 평행적인 거리감을 둔 묘연한 관계 속에 놓인 미호(손예진)와 요한(고수)의 접점을 설명하는 캐릭터다. 이와 달리 영화는 동수를 두 남녀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계자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감정적 이입의 대상으로서 극에 활용한다. 역시나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역시나 그 선택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동수가 자아내는 감정은 불필요한 확장이다. 딱히 그 확장된 쓰임새엔 설득력이 없다. 덕분에 감정적으로 집중돼야 할 두 남녀, 미호와 요한의 심리 묘사와 이를 보좌하는 배경적 묘사가 구체화될 너비를 상실하고 낭비적인 감정적 처리만 추가된다. 결말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일종의 강박처럼 보일 정도다. 앞서 해결하지 못한 감정적 충만을 뒤늦게나마 한방에 터트려야 한다는 강박이랄까. 결과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서로에 대한 연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두 남녀의 태도는 극적인 일관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형세에 가깝다.
<백야행>은 마치 전반과 후반이 다른 영화 같다. 이성적 형태로 나아가던 영화는 끝으로 다다를수록 눈물을 조장하는데 바빠 보인다. 결말부에 다다라 희미한 신파적 여운을 남기는 원작과 전혀 다른 감상을 부여한다. 원작과 유사한 형태적 결말을 선보이면서 전혀 상반된 감상적 차이를 남기는 건 이 때문이다. 시대적 분위기마저 적극 활용하는 텍스트의 방대한 부피를 이미지에 축약하기 위한 고민은 적당했지만 그 안에서 유지해야 할 감정의 질량적 보존에 무신경하다. 덕분에 전반적인 영화적 밀도마저 느슨해진다. 감정의 선이 불분명한 영화의 태도는 캐릭터들마저 그 감정 안에서 헤매게 만드는 것만 같다. 덕분에 배우들마저도 그 캐릭터의 늪에 빠진 것처럼 기능적인 묘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마냥 보인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선사하던 인물의 매력도 온데간데 없어진다.
백열등과 같이 미열한 밝기를 유지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형광등처럼 깜빡 거리다 이내 환해진다. 덕분에 감정은 숨을 곳을 잃은 채 지나치게 명확히 노출된다. 감정적 명암의 안배에 실패했다. 감춰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에 대한 변별력이 온전히 상실된 것만 같다. ‘블랙 앤 화이트’의 대비적 미장센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백야행>은 내밀하게 보존된 감정적 여운을 놓쳐버린 채 구질구질하게 감정적 호소에만 집착한다. 원작과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원작의 장점을 놓쳐버린 셈이다. 결국 감상적 명암만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명확한 감상이란 분명 긍정적인 쪽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소녀는 꿈을 꾼다. 그리고 꿈은 언제나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녀는 어머니의 사고가 있던 날의 기억을 잃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중이다. 하지만 비로소 퇴원했고, 자신을 데리러 온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엔 반가운 언니가 있지만 반갑지 않은 새엄마도 머물고 있다. <안나와 알렉스: 두자매 이야기>(이하, <안나와 알렉스>)는 그 자매와 새엄마 사이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다. 안나(에밀리 브라우닝)와 알렉스(아리엘 케벨)는 아버지(데이빗 스트라탄)의 새로운 연인 레이첼(엘리자베스 뱅크스)을 경계하고 그녀를 주시한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을 리메이크한 <안나와 알렉스>는 분명 모체의 유전인자를 무시할 수 없는 골격과 외양을 지닌 작품이다. 이는 분명 <장화, 홍련>을 환기시키기 좋은 자질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안나와 알렉스>는 서정적인 감수성과 원초적인 기운이 얽힌 호러적 연출로 분위기를 장악하던 <장화, 홍련>과 전혀 다른 결과물이다. 자신의 유전적 영향력을 어필하기 보단 독자적인 개성을 공고히 다지려는 산물에 가깝다. 폐쇄적인 공포가 동화적 순수와 결합돼 발생시키던 중의적인 심리적 의문을 미스터리의 중추로 밀고 나가던 <장화, 홍련>과 달리 틴에이저 스릴러의 이미지와 함께 병리학적 콤플렉스 증세를 설명하며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미스터리를 설득시키려 한다.
<안나와 알렉스>에서 중시되는 건 인과적 내러티브다. 나열된 정보는 위장을 통해 관객의 의문에 혼선을 더하고 호러적인 연출을 덧씌우며 그 근본지점에 대한 추리를 차단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 인과관계는 분명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영화의 반전은 시점의 착시를 통한 눈속임과 허위적인 정보 제공으로 이뤄진 결과물에 가깝다. 명확한 인과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설득시키지만 결과물이 주는 쾌감은 효과적이지 않다. 그 인과관계가 뛰어난 구조적 자질을 통해 구축된 것이 아니라 시야를 제한하고 엉뚱한 것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거짓 정보의 향연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발생시키는 다양한 정보들은 결국 안나의 심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착란에 불과하다. 결국 관객은 그 모든 진실과 무관한 풍경을 보는 셈이다. 결국 그 진실을 목도하게 되는 순간에 충격을 느끼기 보단 뒤늦게 진실을 대면할 뿐이다. 놀라운 반전이라기 보단 속임수에 가까운 잡기다.
연출적 야심은 평범하고 복선들은 쉽게 허무해진다. 설득력은 있지만 놀라운 구석을 찾기도 힘들다. 하지만 때때로 평범하다는 말은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안나와 알렉스>는 그런 케이스의 영화다. 때때로 연출되는 호러적 이미지들이 식상하긴 하지만 이야기를 쫓아가는 재미는 적절하게 보장된다. 최소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장화, 홍련>에 매혹된 관객에게 하대 받을 가능성은 크지만 독자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야심에 걸맞은 결과물이라 평할 만하다. 분위기보단 설득에 치중했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의 대비는 동서양의 정서적 차이로 읽힐만한 구석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안나와 알렉스>는 타당한 면이 있는 결과물이다. 다만 좀 더 확실한 건 <안나와 알렉스>가 <장화, 홍련>보다 괜찮은 작품이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전자와 전혀 다른 야심을 지녔다 해도 그 그릇의 자질엔 분명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