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시작과 달리 예정 없이 끝난다. 죽음이 슬픈 건 그래서일 게다. 죽은 자들의 빈 자리는 그 곁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들의 생 한복판을 공허하고 황량하게 비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히어애프터>는 바로 그 죽음을 소재로 둔 영화다.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기억 속에 놓인 망자들과 접속하는 조지(맷 데이먼)와 인도네시아를 휩쓴 쓰나미로 인해 죽음의 목전까지 다다랐던 프랑스의 유명 저널리스트 마리(세실 드 프랑스), 그리고 죽은 쌍둥이 형을 간절히 그리는 소년 마커스(조지 맥라렌)까지, 제각기 발 딛고 선 땅 위에서 직간접적으로 죽음과 사후를 경험한 이들의 뿔뿔이 흩어진 사연이 서로의 교감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경험의 진위와 무관하게, 죽음이란 결국 개인적인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묘사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그 초현실적 영역에 환상을 뒤집어씌운 결과물로 완성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히어애프터> 역시 사후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영화들이 취하던 관습을 크게 뒤집지 못한다. 빛으로 가득 채워진 무의 영역처럼 보이는, <히어애프터>의 사후 이미지는 죽음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설정된 결과물이라지만 결국 이 불분명한 사후의 상은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허구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말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히어애프터>를 관통하는 핵심이 아니다.
<히어애프터>는 죽음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담보로 영화를 신비로 치장하는 영화가 아니다. 사후라는 초현실적 영역을 실존적 경험으로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통증에 관한 드라마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각각 먼 곳에 떨어진 세 인물은 죽음에 속박된 삶을 살아간다. 무시무시한 쓰나미 이미지로 극초반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블록버스터의 재난 스펙터클 유희와 달리 <히어애프터>의 쓰나미 시퀀스가 관객에게 쥐어주는 건 극심한 통증이다. 압도적인 죽음의 물결은 빠르고 신속하게 평화로운 일상을 수장시키고 수많은 삶을 집어삼킨다. 이는 <히어애프터>가 주목하는 죽음이 단지 생 이후의 단계로서의 영역 찾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의 상실이 야기시키는 현실적 통증을 진단하기 위한 것임을 웅변하는 첫머리 말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작위적으로 설정된 상투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이유가 분명한 사연을 품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매개로 한 이 개별적인 사연들이 옴니버스적인 스토리 안에 상주하고 점차 그 흐름 속에서 맞물려나갈 때, 인위적인 의도의 위장에 실패하고 있다는 인상이 감지된다. 세 개의 줄기를 엮어 넣은 <히어애프터>의 옴니버스적 스토리에 종속되며 이런 인물들의 사연은 죽음이라는 경험의 단면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에 가깝다. 죽음에 근접한 경험을 해봤거나,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격했거나, 타인의 기억과 경험 속에 내재된 죽음을 끊임없이 감지하는 세 인물은 제각각 죽음에 대한 경험의 너비를 확장해내기 위한 요소에 가까운 캐릭터들이다. 이 영화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두른 말판과 같다면, 그 주제를 품은 이야기 속에 자리한 캐릭터들은 일종의 말인 셈이다. 어떤 주제의식을 관철시키기 위해 요소들을 조정하고 있다는 인위적인 양상이 발견되며 그로 인해 내러티브는 종종 불가피하게 산만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어애프터>는 분명 특별한 덕목을 지닌 영화다. 죽은 자와 접속하는 영매의 삶을 사는 조지의 능력은 타인에게 재능이라 여겨지지만 스스로에겐 둘도 없는 저주다.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죽음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품는 이중적인 심리를 연상시킨다. 누군가와의 접촉만으로 산 자에게 남겨진 망자의 기억을 목격하고, 망자의 전언을 전달해야 하는 자신의 삶에 진력이 난 조지는 타인을 위로하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삶을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한 마리는 삶의 기반을 상실하면서도 자신이 목격한 것들 것 대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전달하길 멈추지 않는다. 어린 쌍둥이 형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한 마커스 역시 그 죽음이 남긴 상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 모든 인물들의 삶은 누군가의 죽음이 그 주변에서 살아 숨쉬던 이들에게 남기는 영향력의 너비를 대변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의 죽음은 곁에 있던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거나 멈춰 서게 하거나 뽑아내 뒤흔든다.
영화에서 가장 명징한 순간은 마리가 겪는 쓰나미의 스펙터클을 한 차례 경험한 뒤에 등장하는 조지의 심령술 신이다. 살아 있는 이에게 죽은 이의 메시지를 전하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끝내 치유시킨다. <히어애프터>는 그 경직된 형식과 무관하게 보는 이의 영혼을 감화시키는 명료한 찰나들이 곳곳에 자리한 영화다. 이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관통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선이 단순히 이미지의 연출을 뛰어넘어 어떤 정서와 조응해낸 덕분일 것이다. <그랜 토리노>를 통해서 강직한 보수주의자의 현명한 죽음을 그려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제 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산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마련했다. 죽은 이들의 영역을 갈망하는 산 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히어애프터>는 결국 사자들을 위한 송가가 아니라, 그 망자들의 곁에 머물던 산 사람들을 위한 기도에 가깝다.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되레 이를 뛰어넘는 인정의 방식으로서 그 이전의 실제적인 삶을 위로하고 구원한다. 거대한 재난이든, 사소한 죽음이든, 생사는 언제나 갈대처럼 흔들린다. 죽음은 결국 삶 이후의 영역이다. 산 사람들은 그렇게 죽음을 위로하며 제 생을 구원하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일으키는 법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엄숙하지만 온화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멀지 않은 땅에서 삽시간에 휩쓸려 나간 수많은 생들에게 깊은 애도를. 그 곁에서 숨쉬던 모든 이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이 거대한 참사 앞에 상처 입은 세계의 영혼에 치유를.
전주시의 지휘 아래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4대 사고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이 계획된다. 전주시청 한지과로 발령을 받게 된 7급 공무원 한필용(박중훈)이 실록 복본화 프로젝트를 일임하게 된다. 그 가운데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 민지원(강수연)은 전주시청에 한지 다큐멘터리 제작 협조를 요청하고 전주시장은 그것이 복본화 작업에 시너지를 부여할 것이란 판단에서 이를 수락한다. 그것이 달갑지 않은 한필용은 이로 인해 그녀와 반목하게 되지만 점차 한지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처럼 그녀에게도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필용은 뛰어난 지공예가였으나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아내 이효경(예지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녀의 고향을 찾고자 노력을 기울인다.
<달빛 길어올리기>, 시적인 제목을 지닌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작품은 영화의 스토리와 같은 맥락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을 진행하는 전주시장 송하진은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민병록 교수에게 한지를 소재로 한 영화 제작을 의뢰했고, 이는 임권택 감독에게 전달됐다. 판소리와 민속화라는 <서편제>나 <취화선>, <천년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달빛 길어올리기> 역시 민족적인 정서를 발굴하는 극영화라는 점에서 임권택의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은 세계다. 다만 그 전례가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는 것과 달리 <달빛 길어올리기>가 관영적인 의뢰를 통해서 제작된 작품이란 점에서 출발점이 다르다. 물론 <달빛 길어올리기>가 관영적인 홍보에 충실한 기능적인 영화라는 지적이 아니다.
의외로 <달빛 길어올리기>는 작품의 제작 동기와 무관하게 임권택 감독의 개인적인 소망이 간절하게 투영된 한지 영화로 완성됐다. 특히 <달빛 길어올리기>는 그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보다 차별적인 형식의 시도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극영화의 형식을 표방하고 있지만 <달빛 길어올리기>는 다큐적인 면모가 보다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실상 전주시청의 실록 복본화 작업에 참여했던 7급 공무원의 실화가 바탕이 된 드라마투르기 속의 인물들은 한지라는 주인공을 수식하기 위한 장치처럼 삽입된 것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한필용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서사에 몰입하던 관객은 시점숏으로 관찰되던 한지 수공예품들이 갑작스럽게 정직한 인서트 숏으로 대체되는 광경 앞에서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극영화로서의 요소와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두 요소가 밀착하지 않고 분리된,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방식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형식성의 실패처럼 보이지만 다시 한번 되짚어보면 그 무리수를 감안하고 밀어붙인 창작자의 의도 안에서는 성공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에서 점차 그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가는 한지를 조명하고자 한 임권택 감독은 그 소재 자체를 조명하는 것이 극영화적인 형식성의 완성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임권택의 세계관에 익숙한 이들에게 굉장히 낯선 형식의 영화가 될 것이며 반대로 그런 형식성을 기대하지 않았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당혹스러운 감상을 부여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어쩌면 임권택 감독은 한지라는 전통적 가치가 현실 속에 놓인 처지를 자신의 입장으로 이해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추측을 배제하고 한지 자체의 소재를 조명하는 이 영화의 방식을 고려했을 때, <달빛 길어올리기>는 감독 자신이 한지라는 소재 자체의 조명에 자신의 세계관이 함몰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형식적인 실패를 밀어붙인, 의도적인 성공의 결과물에 가깝다.
그런 형식성의 차이와 무관하게 이 영화는 역시 임권택 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내공의 시선을 견지한 작품이다. 종종 임권택 감독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단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동적인 선경은 이 영화에서도 두루 발견된다. 한필용과 민지원이 오롯이 빛나는 달 아래서 차를 타고 가는 나이트신이 담긴 원경은 고요하고 그윽하다. 달밤 아래 깊은 계곡 속에서 전통적인 한지 제조에 전념하는 이들의 풍경으로 갈무리되는 결말 역시 숭고하고 애잔한 정서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모든 풍경들은 물리적인 기능성으로 대변될 수 없는, 장인의 내공을 통해 살아있는 풍경 속에서 길어 올린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임권택 감독이 <창>(1997)을 연출한 이후로 15년 만에 현대극을 완성했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이는 어쩌면 <천년학>에 걸린 100번째 영화라는 수식어의 무게를 뒤로 한 채, 자신 스스로도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다는 임권택 감독의 집념을 보다 강력하게 반영한 또 하나의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대외적 의미를 배제하고 단순히 이 영화가 지닌 현대극적인 완성도를 본다면 적절한 수준의 성과를 지니고 있다고 평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내러티브의 흐름과 달리 플롯과 플롯을 잇는 과정에서 기이한 단절이 발견된다. 인과적으로 플롯을 마무리지어야 할 대사들이 종종 삭제되거나 시퀀스를 정리할 마지막 숏이 증발된 느낌이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일종의 과업처럼 완성된 작품이지만 그 의무에 짓눌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존중받아도 좋을 작품이다. 하지만 그 의도에서 벗어나 냉정한 시선으로 이 영화를 정리한다면 임권택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전달을 넘어서는, 한 영화의 완전한 잉태에는 다다르지 못한 미완의 야심처럼 보인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길어 올린 한지와 같지만 그 정성스러운 낱장의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듯하여 일말의 아쉬움을 떨치기가 어렵다. 깊게 배어든 정성을 쉽게 펼쳐내기가 쉽지만은 않았던 것일까.
알버트(콜린 퍼스)는 어려서부터 심각한 말더듬이였다. 문제는 그가 사회지도층 혈통을 타고난 영국의 로얄패밀리였기에 종종 영국 왕실을 대표해서 국민들을 고무시킬 연설을 행해야 했다는 것. 부친이자 전왕인 조지 5세(마이클 갬본)는 이런 아들이 못마땅해 득달 같은 성화를 내곤 했지만 이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고쳐질 수 있는 버릇이 아니었다. 그의 자상한 부인 엘리자베스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 역시 남편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수소문을 해보지만 좀처럼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어느 날, 엘리자베스는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라는 언어치료사를 소개받고 그를 찾아간다.
<킹스 스피치>는 엘리자베스 2세의 부친으로도 잘 알려진 조지 6세의 자전적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영국 왕실의 전기적 사연을 다룬 <더 퀸>과 같이 근현대사의 사회적 격변 속에서 앙상한 전통적 상징성만으로 부지하고 있는 왕가의 딜레마가 반영된 드라마다. 그렇지만 <킹스 스피치>가 단순히 왕실의 궁 안에 카메라를 밀어 넣는, 일종의 르포적인 간접 체험으로서의 흥미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작품이라는 말은 아니다. <킹스 스피치>는 라이오넬 로그의 손자 마크 로그가 보관하고 있던 라이오넬의 일기와 서신에 담긴 조지6세와의 사연을 바탕으로 집필된 전기적 저서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말더듬이로서 연설을 두려워했던 조지6세, 즉 알버트의 고뇌에 주목하지만 그 고뇌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그의 곁을 지켰던 언어치료사 라이오넬과의 관계에 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는 작품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왕실의 권력은 무상한 옛말이 된 오늘날의 영국왕실에 남겨진 마지막 위엄이란 바로 역사적 정통성 자체다. “광대나 다름없어 졌다”는 조지5세의 말은 현대 영국사회에서 왕실의 자손들이 겪어내야 할 책임과 의무의 무게를 대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왕실의 갈등 속에서 연설을 하지 못하는 왕가의 자손이 느낄 강박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킹스 스피치>는 그런 현실 속에 자리한 왕가의 긴장과 그 속에 자리한 왕의 또 다른 긴장을 비추며 보다 입체적인 감정의 양상을 전달한다. 동시에 그 곁에 자리한 라이오넬의 개인적인 사연과 그를 두르고 있는 내외적인 환경을 세심하게 조명함으로써 영화가 품은 감정의 너비를 보다 풍요롭게 확장해낸다.
왕가의 권위 속에서 살아가는 알버트와 평범한 환경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라이오넬의 계급적인 차이는 두 인물의 관계에 갈등을 야기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계급적 차이를 뛰어넘어 끝내 서로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동료로서 관계적 발전을 이룬다. 왕실의 권위를 대변해야 한다는 의무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견뎌내는 알버트와 아마추어 배우로서 연기적 꿈을 포기하지 않던 라이오넬이 언어치료사로서 왕의 한계를 돕고 끝내 자신의 삶에서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 과정은 그 사연만으로도 흥미롭다. 이 유려한 사연은 고풍적인 영상과 유려한 문체, 안정적인 연출력으로 대변되는 영국 드라마의 전통 속에 녹아 든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왕위 계승의 격변을 겪은 조지6세가 그 모든 위기 속에서도 왕으로서 첫 번째 연설을 행하는 라스트 신은 서사적 흐름 속에서 서서히 피어 오르던 영화의 감정이 명료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계급의 장벽을 극복하고 친밀한 우정을 쌓아나가는 두 인물의 신뢰적 관계는 연설을 행하는 왕 앞에 서서 연설의 리듬을 조율하는 언어치료사의 모습을 비추는 우아한 이미지만으로도 명확하고 깊게 마음에 와 닿는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모든 출연진들은 훌륭한 악보를 탁월한 화음으로 소화해내는 명연주자들이다.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콜린 퍼스는 말더듬이라는 기능적인 연기를 완벽하게 완수해내는 동시에 캐릭터의 내면적 갈등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며 연주를 리드하는 솔리스트에 가깝다. 또한 범상치 않은 캐릭터를 거듭 연기해오던 제프리 러쉬와 헬레나 본햄 카터는 안정적인 연기적 리듬을 바탕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원숙하게 조율하는 앙상블을 선보인다. 가이 피어스와 마이클 갬본을 비롯한, 조단역 캐릭터들 역시 명확하게 제 음을 내며 연주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한다. 훌륭한 악보가 준비된 명연주자들의 공연. <킹스 스피치>는 저마다 좋은 소리를 내며 탁월한 화음을 이루는, 그런 영화다.
미키 워드는 WBU 웰터급 챔피언 경력을 지닌 미키 워드는 화끈한 난타전을 불사하는 인파이터로 정평이 난 복서였다. 하지만 그가 챔피언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메사추세스 로웰의 슬럼가에서 태어난 그는 배다른 형제와 누이들을 포함한 9남매 가운데 유일한 남자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재능 있는 프로복서였다지만 약물에 중독된 퇴물 복서에 가까운 형의 트레이닝은 언제나 아슬아슬했고, 푼돈에 가까운 파이트머니를 좇다 아들을 백업선수로 전락시킨 어머니의 매니지먼트는 참담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경기 스타일처럼 정신력으로 자신의 삶의 키를 놓지 않고 전진했다.
<파이터>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미키 워드(마크 월버그)에 관한 전기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파이터>는 단순히 미키의 고단했던 삶과 그 삶을 극복해낸 인간의 집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이터>는 주인공을 접대하지 않는 작품이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주인공을 아웃포커싱시키고 주변의 인물들에게 포커싱을 맞춘 작품이라 해도 될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미키 워드의 인간 승리적 드라마를 정직하게 연출해내는 빤한 방식보다도 그 주변부에 놓여 있는 이들의 부조리를 관찰하는 것이 보다 흥미로운 일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흥미로운 인물들은 바로 미키 워드의 형 디키 에클런드(크리스찬 베일)와 그의 어머니(멜리사 레오)를 포함한 9남매들, 그리고 그의 애인 샬린 플레밍(에이미 아담스)이다.
이런 측면은 <파이터>에 대한 장르적인 기대감을 바로 잡게 만(들도록 유도하고 싶게 만)든다. <록키>를 비롯한 아메리칸 드림의 복싱영화들이 주로 취하던 드라마틱한 스토리, 즉 가난한 복서가 지난한 삶 속에서 결국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은 <파이터>의 골자가 될만한 유력한 스토리 문법에 가깝다. 하지만 데이비드 O. 러셀은 이런 전형적인 문법에 따르는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의 영화를 원한 것 같다. 쉽게 정리하자면 <파이터>는 어떤 유망한 복서를 둘러싸고 있는 어느 지난한 가족에 관한 실화를 재현하는 가족드라마다. 이는 복싱영화라는 측면에서 얻어낼 수 있는 주인공의 성장통을 희석시키고 스포츠영화로서의 쾌감 역시 반감시키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의외적이다.
하지만 <파이터>는 그 의외적인 선택이 되레 전략적인 목표를 거뒀다고 말해도 좋을 결과물로 완성됐다. 이는 저마다의 인물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서로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자리하고 있는 덕분이다. 이로 인해 <파이터>는 캐릭터 영화와 같이 캐릭터 자체를 지켜보는 관찰적인 재미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결과를 보장하는 건 배우 개개인의 극대화된 역량이다. 마크 월버그가 ‘단단한 주먹’이라면 크리스찬 베일은 ‘현란한 스텝’에 가깝다. 체급을 바꾼 선수의 경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의외적인 면모를 선보이는 에이미 아담스도 돋보인다. 관록 있는 선수가 경기를 이끌어 나가듯 캐릭터를 운영하는 멜리사 레오는 영화의 흐름을 탁월하게 리드한다.
<파이터>가 진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둔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차범위를 활용할 자질의 여분이 부족하다. 이는 되레 이 영화의 연출력과 스토리 흐름의 선택을 보다 돋보이게 만든다. 복싱 시퀀스를 마치 중계적인 광경처럼 연출해내는 모습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완성된 영화라는 것을 스스로 감추지 않고 있다는 방증에 가깝다. 이는 <파이터>가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적 각색이라는 느슨한 우회론을 택하지 않고도 전형적인 이야기에서 탈피해냈다는 점에서 소재 자체가 지닌 가능성의 단면이 어디에 놓여있는가를 탁월하게 파악했다고 인정하게 만든다. 물론 하나 같이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없었다면 이런 장점들은 완전히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마치 큰 기대를 품게 만들지 않는 선수의 인상적인 경기 배후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력자들의 정체를 알게 되는 느낌과 같다.
보스턴의 찰스타운은 가족사업처럼 범죄가 대물림 되는 도시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더그 맥레이(벤 애플렉)도 은행 강도를 저지르다 검거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아버지와 같이 역시 범죄의 길로 발을 들인지 오래다. 선택의 여지 없이 은행강도의 길로 들어선 그는 자신의 삶이 인생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지만 발을 빼고 다른 길을 걷는 것 역시 덫과 같은 관계들 때문에 자칫하다 발목이 날아갈 판이라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순탄치 않은 삶에 특별한 인연이 찾아온다. 은행강도 중 현장에 있던 여자 부지점장 클레어(레베카 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 그 사랑이 맥레이에게 어떤 결심을 도모하게 만든다.
저명한 범죄소설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가라, 아이야, 가라>를 연출한 벤 애플렉의 감독 데뷔는 성공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해도 좋을 결과였다. 4살 소녀의 실종을 통해 격발되는 미스터리 범죄물인 이 작품은 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동시에 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던지는 원작의 세계관을 인상적으로 포착하며 배우 벤 애플렉의 연출력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집어 던지게 만든 수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다시 유명한 범죄소설작가 척 호건의 <PRINCE OF THIEVES>를 자신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선택한 벤 애플렉의 하이스트 무비 <타운>은 전작과 일관된 태도가 발견되는 동시에 또 다른 그의 연출적 시도가 동원된 작품이다.
보스턴 출신의 벤 애플렉이 보스턴을 주무대로 삼는 데니스 루헤인과 척 호건의 작품을 차례대로 선택한 건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단 두 편의 영화를 만든 벤 애플렉을 거장의 반열로 올리는 건 성급한 일이겠지만 그가 만든 두 작품은 마치 뉴욕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와 같은 길을 보스턴에서 걷겠다는 신념을 선언하는 야심처럼 보인다. 사회적인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동시에 그 부조리 속에 놓인 어느 개인의 본성을 끌어내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적 시선은 벤 애플렉이 연출한 두 편의 작품에서 엿보인다. 또한 이 모든 현실적 관점이 휴머니즘을 기초로 한 드라마로 유려하게 풀어낸다는 점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흔적을 의심하게 만든다.
전작과의 우열을 논하자면 <타운>은 <가라, 아이야, 가라>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꺼려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타운>은 전작에 비해 보다 생동감이 넘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영화의 초반과 후반부를 장악한 사실적인 총격신의 연출 덕분일 것이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총격신은 현장에 위치한 3자의 시선을 빌려 사건을 중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부여할 정도로 빼어난 연출력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사건의 중심에 놓인 갱단의 평범한 일상을 정적하게 비추던 카메라가 같은 방식으로 담담하게 범죄 현장을 중계할 때, 하나의 시선에 놓인 정보의 차이로 인해 파격적인 감상이 도모된다. 연속적인 삶의 일상 속에서 분리된 일상을 넘나드는 갱단의 이야기는 이런 연출 방식을 통해 보다 현실적인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타운>은 문제의식을 던지는 전작과 달리 보다 적극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다. 범죄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에 대한 연민을 강요하기 보단 그 인물의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 빚어내는 파국을 조명하고 아이러니한 심정을 고스란히 객석의 여운으로 승화시킨다. 스토리의 운용면에서 인위적인 장치적 설정들이 드러나긴 하지만 <타운>은 무리 없이 흐르는 인과를 설득시키는 작품이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스토리 라인 속에서 드라마틱한 감정적 여운과 공정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의식을 남긴다는 점에서 <타운>은 좋은 각색물의 수준을 넘어선 수작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에서 또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해낸 벤 애플렉은 자신이 연출한 전작이 결코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내는데 성공했다.
한때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꼽혔던 김상남(정재영)은 이제 구단 내에서도 손사래를 치는 사고뭉치 퇴물투수에 불과하다. 음주에 폭행시비까지 휘말린 그는 선수생명에 제동이 걸린 위기에 몰린 가운데, 학창시절 절친이자 매니저인 철수(조진웅)에게 떠밀려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충주 성심학교의 야구부 감독직을 맡게 된다. 야생마처럼 길들이기 어려운 퇴물 투수가 소리가 없는 세상 속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글러브를 쥔 소년들과 함께 다시 한번 그라운드에 나선다.
아마도 <글러브>에서 가장 뚜렷하게 주목되는 대상은 어느 배우들도 아닌 강우석 감독일 것이다. <글러브>는 전작 <이끼>와 함께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발견되는 변화적 흐름을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시사적인 이슈들에 밀착한 상업 영화들을 만들어내던 강우석 감독은 본격적인 장르물에 도전한 <이끼>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글러브>는 ‘착한’ 휴먼드라마로서의 감정에 무게를 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가장 무딘 날을 세우고 있다 평할만한 작품이며 강우석이라는 이름 안에서 또 한번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하게 만드는 결과물로서 이목을 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반박의 여지는 있다. <글러브>는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 학생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둔 각색물이란 점에서 역시 현실적인 이슈를 스크린 속에 녹인 강우석 감독의 전례들과 이어진 일관성이 유지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글러브>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시사적인 이슈들을 적절한 시기에 스크린에 수용해내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특유의 태도와는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글러브>는 실화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나 그것이 정치적인 가치평가를 염두에 두게 만드는 소재가 아닌, 드라마틱한 보편적 감동에 무게를 얹는 소재로서 수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강우석이라는 이름을 건 전례들과 차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뒤집어서 ‘강우석 감독의’ 라는 부연을 제하면 사실 <글러브>는 굉장히 빤하게 수가 읽히는 영화다. 청각장애를 지닌 소년들과 한때 프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망나니 투수가 만나 세상의 편견에 맞서고 함께 성장해나가는 눈물 겨운 감동스토리가 빤히 읽히는 <글러브>는 그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진짜 빤한 영화다.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지점이 있다면 140분이 넘는 러닝타임이라고 할까. 스스로 감동을 웅변하는 대사들이 숱하게 등장하는 이 영화는 ‘감동’드라마임을 스스로 주창하는 올드한 휴먼드라마다. 단도직입적으로 촌스럽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글러브>는 직구다. 포수의 미트 안으로 정직하게 뻗어 들어오는, 치기 쉬운 직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 투구되는 영화다. 장애를 극복하는 아이들과 덜 자란 어른의 뒤늦은 깨달음이 성장드라마라는 그라운드 안에서 차례대로 진루하다 어렵지 않게 홈까지 걸어 들어오는 양상이다. 치기 쉬운 볼을 받게 되는 타자의 입장과 같이 관객은 손쉽게 감동을 얻어내겠지만 동시에 큰 감흥에 다다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사들은 거창하고, 표정들은 비범하나, 감정이 얕다. 목청은 크지만 울림이 없다.
적당한 진루타는 쳐내지만 홈런 한 방이 부족한 휴먼드라마라는 점에서 <글러브>는 인상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동시에 야구 영화치고 경기 장면이 재미없다는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지닌 최대의 에러일 것이다. 그나마 정재영의 살아 있는 표정이 영화의 빤한 승부수 속에서 흥미진진한 역투 노릇을 한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인 한 행성에서 부모의 기지로 우주선에 탑승한 한 아이가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바로 옆 행성에서 탈출한 또 다른 아이와 평행선을 그리며 우주를 비행하다 함께 지구에 불시착한다.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두 아이는 판이한 외모만큼이나 대립적인 성장기를 보내고 결국 최고의 적수로 자라난다. 초능력을 통해 온갖 사랑을 독점하며 자란 ‘훈남’ 아이는 메트로시티의 영웅 ‘메트로맨’이 되고 ‘비호감’이었던 아이는 메트로시티의 악당 ‘메가마인드’가 되어 끊임없이 맞선다.
영웅질도 딴지를 거는 악당이 있어야 인정 받을 수 있듯, 악당질도 가로 막는 영웅이 있어야 할만한 법이다. <메가마인드>는 영웅이 사라진 도시에서 활개치다 스스로 심심해졌음을 깨닫게 된 악당의 딜레마를 그린다. 관심 받고 싶어서 악명을 떨쳤지만 그 관심을 부각시켜줄 영웅질이 없으니 악당은 자연스레 초조해진다는 것이 <메가마인드> 속 악당의 면모다. 분명 순진한 이야기다. 진짜 악당이 아닌, 관심을 얻기 위해 악당을 흉내 내는 법을 익힌 이의 사연이 결국 <메가마인드>의 본체인 것이다. 이는 교육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적 메시지로 연결된다. 칭찬 받고 자라지 못한 아이는 어떻게 비뚤어지는가에 관한, 장난끼 가득한 우화라고 할까.
물론 <메가마인드>는 그리 심각하지도, 진지해질 생각도 없는,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위트적인 작품이다. 다양한 히어로 무비의 메타포들을 잔뜩 끌어들인 뒤, 그 평면적인 이미지들을 전시하고 그 안에 담긴 패러다임들을 가볍게 조리한다. 또한 <슈퍼배드>와 같이, 영웅의 활약상을 묘사하고 숙명에 가까운 고독한 심리를 포착해내는데 초점을 맞춘 슈퍼히어로 무비의 최근 경향을 위트 있게 패러디하는, 안티-안티히어로물에 가깝다. ‘모태 영웅’ 슈퍼맨과 ‘스킨헤드’ 악당 렉스 루터를 연상시키는 <메가마인드>의 메트로맨과 메가마인드는 히어로 무비의 컨벤션이나 다름 없는 이미지를 입고서 히어로 무비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킨다.
천부적으로 영웅 기질을 타고난 아이와 반대로 강력한 비호감의 기운을 풍기는 아이는 영웅과 악당으로 자라나 각자 유명세를 떨친다. 셀리브리티와 같은 만인의 영웅 메트로맨의 인기와 자신이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인생 방향을 악당으로 전향한 메가마인드의 악명은 대조적인 동시에 협조적이다. 영웅과 악당이라는 이분법적 관계의 교묘한 공존 체제를 풍자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이를 유머로서 승화시키는데 주력한다는 점에서 유쾌하다. 동시에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몰라도 사랑 받고 태어난 아이가 세상의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교훈을 전달한다. 특유의 과장된 연출로 익살스러운 위트를 던지는 동시에 넘치지 않는 감동을 수확해내는 드림웍스의 방법론이 또 한번 통했다.
영어 유치원의 원장으로 일하는 연희(김윤진)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딸로 인해 걱정을 멈추기 어렵다. 딸이 희귀한 혈액을 지닌 탓에 좀처럼 이식이 가능한 심장을 찾기가 쉽지 않기에 그녀의 걱정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어느 날, 딸이 입원한 병원에 뇌사 상태에 가까운 중년의 여성이 실려 오고, 그녀의 혈액형이 딸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희는 심장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휘도(박해일)의 등장과 함께 기대는 불안으로 뒤바뀐다.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 사로잡힌 채 양아치 같은 삶을 살던 휘도(박해일)는 뒤늦게 어머니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녀를 살리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 한다. 그리고 연희는 이를 막고 딸을 살리기 위해 모종의 결심을 하기에 다다른다.
<심장이 뛴다>는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나는 연희와 휘도의 관계를 통해 스릴러 장르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영화로부터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이는 당연하다. <심장이 뛴다>는 모정이라는, 고전적으로 신파로서의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유용한 소재를 취하며 이야기의 근본을 이룬 작품이다. 그만큼 장르적인 쾌감보다는 드라마틱한 감정선이 보다 와 닿는 영화인 셈이다. <심장이 뛴다>의 특이점은 그 지점에서 나온다. 각자 딸과 어머니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은 결코 중첩될 필요 없었던 두 삶이 우연한 계기로 만나 필연적인 관계로 거듭난다는 과정을 다이나믹한 추격전과 심리전의 양상으로 그려나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심장이 뛴다>는 이런 특이점을 단점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본다는 건 분명 절박한 감정으로 발전해야 할 터인데 <심장이 뛴다>에서는 좀처럼 그런 어머니의 행위나 감정이 모성이라는 진심으로 와 닿지 못한다. 일찍이 <마더>에서 보여준 것처럼, 본능에 가까운 어미의 본능이란 결코 이성적인 범주 안에서 해석될 수 없는 것임에 틀림 없다. <심장이 뛴다> 역시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낸다. 문제는 모성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어미의 모성이 지독하다기 보단 지나치게 보인다는 것이다.
단지 타인의 심장을 훔쳐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면모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과정을 묘사해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면모라는 것이 때때로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승부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들의 감정 변화도 이해될 뿐, 깊게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어머니의 진심을 깨닫게 된 양아치가 뒤늦게나마 어머니를 위한 무언가를 하려 든다는 상황 자체는 온당하다. 문제는 그가 취하는 방법론이 딸의 심장을 구하려는 엄마만큼이나 비상식적이며 딱히 설득력 있는 과정 안에서 연출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물의 심리 상태에 대한 납득은 더디고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무디며 영화가 의도하는 모든 결과적 감상도 얕아진다.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처럼 착각한 듯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는 기분이란 불쾌함과 멀지 않은 것이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영화에서 영상기술의 발전은 장르의 개척을 가능하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SF와 판타지 장르에서 거둔 성과들은 이런 전제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사례일 것이다. CG기술의 발전은 형이상학적인 상상력을 형이하학적인 표현력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의 표현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장르 개척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현실에서 가능해졌다. 1982년에 공개된 <트론>의 속편격인 <트론: 새로운 시작>(이하, <트론 2>) 역시 바로 이런 영상기술의 발전을 통해 얻어진 표현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조악한 이미지의 결과물처럼 보여지는 <트론>은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실험작이라 평가 받는 작품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미지화한 8비트 게임 영상 수준의 그래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당대에서는 보기 드문 실험적 작품으로서 평가 받았다. 이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둔 아이디어가 표현 기술의 발전 속도를 앞서 구현된 사례로서도 유용하다. 마치 10년 전에 <아바타>가 나온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이는 결과적으로 실험적인 도전으로서의 가치를 벗어나서 그 조악한 이미지가 이룬 결과적인 성과, 즉 도스 체계로 운용되는 8비트 컴퓨터의 베이직한 프로그램 원리를 비유적인 이미지로서 치환한, 가상의 평행우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컬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 조악한 영상이 되레 단순명확하게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원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트론>(이 제작된 시대)에 비해 진일보된 영상기술을 활용한 <트론 2>는 그런 장점을 통해 전작과 차별화된 감상의 묘미를 발생시킨다. 서사적으로 속편에 가까운 <트론 2>는 전편의 바탕을 이루던 컴퓨터 체계의 평행우주 세계관 ‘그리드’를 비롯해서 ‘광선 바이크’ 레이스나 ‘디스크 배틀’과 같은 볼거리의 이벤트를 동일하게 등장시키면서도 상대적으로 보다 화려해진 이미지의 미장을 통해 리메이크의 의미를 부여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완성했다. 어두운 무채색의 색상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조도가 높은 형광색 띠가 곳곳에 배치한 ‘그리드’의 이미지는 과장된 빛의 황홀경에 가까운 감상을 부여함으로써 가상세계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부추기며 언어 그대로 레이저쇼를 구경하는 듯한 관람의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트론 2>는 그 현란한 빛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심심한 영화다. 말 그대로 구경에 가까운 재미라는 건 <트론 2>의 장점이라기 보단 단점에 가깝다. <스피드 레이서>가 연출해낸 비현실적인 레이싱 경기와도 비교해봐도 좋을 <트론 2>의 광선 바이크 레이스는 바이크를 따라 흐르는 빛의 물결을 구경하게 만들면서도 레이스의 속도감이나 긴장감을 차단해버린다. 이는 곧 그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이 쾌감의 속성으로 연동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트론 2>를 두른 모든 이미지의 결과적 감상과 연결된다. <트론 2>는 <트론>의 시대보다도 진화된 컴퓨터 프로그래밍 체계를 포섭하며 보다 광활해진 전자신호 시스템의 세계를 보다 화려해진 영상으로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전작의 야심에서 보다 나아간 기획물이다. 보다 진일보된 영상은 이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트론 2>는 조악했던 전편이 얻어낸 컬트적인 의미로부터 차단된, 발전된 이미지를 과시하는 평범한 공산품으로서 퇴보된 작품처럼 보인다. 미학적으로 흥미로운 이미지의 세계관을 설계하고 구상했으나 그 모든 이미지마저도 결국 전작이 마련한 세계관의 발전적 차용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창의적인 결과물은 아닌 셈이다. 눈부신 이미지의 향연 속에는 감흥이 결여돼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의 세계관과도 비교할 만한 기계와 인간의 대립, 혹은 정보를 독점하는 시스템 속에서 발생하는 정보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같은 현실 체계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트론 2>는 전작과 일맥상통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하지만 딱히 탁월한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하기 힘든 전작만큼이나 속편의 기승전결 역시 세심하게 세공되지 못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극적 긴장감의 결여는 전시적 용도로서의 기능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미지로부터 기인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클라이맥스의 구심점을 마련하지 못한 무미건조한 이야기의 흐름이 이를 부채질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트론>의 속편으로서 ‘트론’이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롤타이틀 무비가 정작 ‘트론’이라는 제목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의아한 일일 것이다.
물이 밀려오고 다시 밀려나간다. 상륙하듯 육지로 들이치던 바다는 잠자코 머물다 다시 수평선 너머로 끌려나간다. 대륙과 반도 사이를 메운 갇힌 바다는 해안선이 비좁다는 듯 육지를 넘보다 해수면 저편으로 사그라진다. 한반도의 서편, 중국의 동편에 자리한 황해는, 그래서 탁한 바다다. 끊임없이 육지를 꿈꾸듯 해수면을 밀고 올라오다 흙을 머금고 미끄러져 사라지는 바다는 탁하지만 아련하게 출렁거린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역할을 하는 입구와 출구를 제외하면 총 4개의 챕터로 구성된 <황해>는 마치 해수면으로 밀려들어오는 바닷물과 같이, 한국으로 밀항한 조선족 청년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게 전개되는 사건을 휘몰아치는 풍랑처럼 묘사하는 영화다. 탁한 해수면과 같은 현실을 묘사하는 영화의 끝에서 발견되는 건 그 밑바닥에 침전된 진한 농도의 드라마다.
연변에 사는 조선족 택시운전사 구남(하정우)은 한국으로 돈을 벌러 떠난 뒤 소식이 끊어진 아내로 인해 채무에 시달리며 마작까지 손을 댄다. 그런 그를 마작 업소에서 발견한 청부살인 브로커 면가(김윤석)는 그에게 한국에서 사람 하나만 죽이고 오면 모든 것을 해결해주겠노라 제안한다. 충무로의 신예 나홍진이 연출한 <추격자>에서 괄목할만한 연기적 호응을 이끌어냈던 하정우와 김윤석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황해>는 <추격자>와 마찬가지로 두 배우의 연기적 면모만으로도 대단히 주목할만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외적으로 연기적 사투를 펼쳤다고 해도 좋을 지난 사례와 마찬가지로 <황해>에서도 두 배우는 가히 지독하다는 말을 온전히 긍정적인 수식어로 얻어낼 수 있을 만큼 경이적인 연기적 성과를 만들어냈다.
<추격자>와 달리 <황해>에서 두 배우의 출연비중은 동등하지 않다. 하정우가 연기하는 구남이 <황해>라는 영화를 긴 선처럼 이어나가는 캐릭터라면 김윤석이 연기하는 면가는 그 선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인물이다. 모든 사건 위를 달리는 건 구남이지만 그 사건을 구상하는 건 면가의 몫이다. 물리적인 출연량의 차이는 딱히 두 배우의 중요성을 가늠하는데 주요한 단서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만큼 <황해>가 하정우라는 배우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리고 그의 가늠할 수 없는 여백의 내공을 상상케 만든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동시에 김윤석이 만들어낸 끔찍한 세계-이건 단순히 어느 캐릭터를 넘어선 공포적인 세계에 가깝다.-를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는 기억이 될 것이다. 마치 괴물처럼 연기하는 두 배우는 <황해>에서 가장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장점이 될 것이다.
물론 <황해>는 단지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 논할 수 없는 영화다. 나홍진은 탁월한 집을 지었고, 배우들은 그 위에서 좋은 포석이 되어 자리하고 있다. 156분에 다다르는 <황해>의 러닝타임이 길다고 느껴지지 않는 건 거친 이미지를 가득 품고 있는 이 영화가 감상을 지배할 만큼 가공할만한 리듬감 위에서 진행되는 까닭이다. 4개의 챕터로 구성된 <황해>의 내러티브는 문학적인 중후함을 지니고 있음에도 장르적인 흥미를 발동시키며 숨통을 죄는 서스펜스의 틈새로 종종 위악한 웃음의 틈새를 열어놓기도 한다. 살과 피가 튀는 잔혹한 이미지들을 더러 담고 있는 이 영화가 어느 장르영화들에 비해서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잔인함을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해>는 폭력성의 강도가 만만찮은 작품이다. 이는 정형화된 장르적 연출에 대한 기시감을 거세함으로써 관객에게 충분한 감상의 대비, 일종의 안전거리를 허락하지 않는 까닭이다. 연출적인 긴장감을 조성하고 찌르고 베어내는 살육의 이미지를 전시하는 여타의 장르영화들과 달리 <황해>는 그대로 으깨고 곧장 찢어낸다. 어떤 대비감도 없이 폭력들이 고스란히 객석으로 전이되고 관객의 심리에서 체감된다. 실로 무자비한 폭력성이다. 이 지점에 대한 호불호와 무관하게 영화는 온전히 폭력성의 체감이라는 선상에서 리얼리티라는 쾌감을 일궈낸다.
<황해>는 풍랑처럼 휘몰아치는 서사의 리듬감과 거칠게 밀고 올라오는 연출력을 통해 관객의 감상을 지배하는 영화다. 사실 영화의 호흡이 급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황해>의 서사로부터 압박을 느끼게 되는 건 그 서사를 구성하는 이미지와 캐릭터들의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거친 조선족 사내들과 조직폭력배들이 더러 등장하는 탓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한국적(인 현실이라고 믿어지는) 리얼리티를 온전히 믿게 만드는 사실적인 연출을 기반으로 영화가 만들어낸 모든 상들을 관객들에게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러닝타임의 너비를 심리적으로 압축해낸다. 물론 이 영화의 서사가 완벽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정적인 몇몇 단서를 전시하는 순간들은 우연에 천착하고 있으며 모든 인과 관계를 구성하는 캐릭터간의 심리가 명쾌하게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자신의 에너지를 완전하게 이용하게 있다. <황해>는 스크린에서 출렁이는 그 에너지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해내고 있는 영화일 게다. 이는 <추격자>의 연장선상에서 나홍진의 야심을 더욱 세차게 드러내는 측면이란 점에서도 흥미롭다.
거대한 컨테이너 차량이 곤두박질치는 장면만으로도 <황해>의 스케일은 고스란히 증명된다. 그리고 <황해>는 자신이 담보한 폭력성을 단순히 거칠게 밀어붙이는 영화이기 이전에 탁월하게 설계되고 정제되어 연출된 액션신들로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카체이싱은 한국영화에서 두고 두고 회자될만한 시퀀스라고 장담해도 좋다. 또한 살인을 준비하는 구남이 현장을 둘러보며 이를 준비하고 사건에 맞닥뜨려 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비롯해서 <황해>의 액션은 실제적인 체감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장르적인 긴장을 함께 전달한다는 점에서 탁월하게 위태롭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런 모든 이미지의 끝에 걸리는 감정적인 결과물은 실로 깊은 허무다. <황해>는 지금 우리가 발붙인 현실을 탁하게 바라보고 있는 어느 누군가의 시선에서 비롯된 결과물이 아닌, 실로 탁하게 어지럽혀진 현실을 스크린에 거대한 상으로 띄워 올린 것처럼 끔찍하다. 그 끔찍함이 <황해>의 본체다. 나홍진은 이제 서울의 골목에 드리운 피비린내를 넘어 한국이라는 세계를 채운 거대한 욕망이 내려앉은 암담한 밑바닥을 그려낸다. 그 밑바닥을 전전하는 이들에게 남는 건 지독한 느와르다. 현실은 탁하다. 그래서 슬프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아니면 체념하거나, 지독하고 또 지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