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무원 출신 아입니까!” 그렇다. 원래 그 남자, 최익현(최민식)은 밀수업자들에게 삥이나 뜯는 부산 세관이었다. 물론 혼자 해먹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팀원들의 비리 행위에 총대를 메고 옷을 벗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밀수업자들의 필로폰을 입수한 그는 건달과 손을 잡고 이를 일본에 유통해서 한몫 챙기길 시도한다. 그래서 만난 것이 바로 부산의 내로라는 주먹 최형배(하정우)다. 그리고 경주 최씨 충렬공파 최익현은 직감한다. 그가 자신보다 항렬이 낮은 집안 사람임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렇게 그는 세력을 자랑하는 건달 두목의 대부가 된다. 1980년대의 일이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노태우 전대통령이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범죄와의 전쟁’은 그저 영화의 시대상을 짐작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동원된 것에 가깝다. 부산을 배경으로 둔 건달들의 행태를 그린 작품이기는 하나 이 작품을 단순히 갱스터 무비,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조폭 영화라고 정의하긴 아쉽다. 1980년대, 한국의 근현대사를 헤쳐온 아버지들 가운데 오늘날 일가를 이룬 어느 아버지의 진창 같은 일대기를 조명하는 영화라는 쪽이 보다 유력하다. 족보가 인맥이 되던 시대, 요즘의 관점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시대의 틈새에 손과 발을 끼워 넣고 매달리며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르는 법을 배운 한 남자가 어떻게 한 시대를 관통해왔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세관에서 밀수업자 삥을 뜯었다가 조직에서 팽 당할 위기에서 밀수된 필로폰을 빼돌려 독립한 최익현은 최형배를 만나 그의 대부 노릇을 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든다. 최형배가 지닌 건달의 가오가 자신의 것이기도 한 것처럼 형님으로 군림하려 한다. 하지만 최익현의 가오는 곧잘 무너진다. 나름대로 곧잘 흉내를 낼 뿐, 흉내 이후에 보여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건달의 세계에 출입하지만 결국 건달의 세계를 겉도는 반달, 즉 일반인도 건달도 아닌 박쥐 같은 존재가 된다. 영화의 코미디 감각도 이 부근에서 살아난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의 종친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건달 두목의 대부를 자처하게 된 한 남자가 그 세계에 뛰어들어 벌이는 로비 행위는 오늘날 스크린 너머에서 이 행위를 지켜보게 될 관객에게는 좀처럼 진지해지기 힘든 우스꽝스러운 콩트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검사의 수사망을 압박하고자 동원하는 인맥이 종친회에서 만난 노인의 친척 검사이며 그것도 모자라서 빽이 될만한 종친들을 찾아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나가는 최익현의 모습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또한 당대의 시대에서 나름의 가오를 잡으며 살아가던 건달 최형배와 그 무리들에게 뒤섞인 최익현의 앙상블은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을 보는 것마냥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다 결국 피를 본다. 그들 사이에 어떤 선악의 관점은 필요하지 않다. 어울리지 않는 공생관계에서 빚어지는 어설픈 합리는 때때로 웃음을 야기하지만 덕분에 종종 살벌하게 얼어붙는다.
코미디가 감상의 리듬을 좌우하는 가운데, 노스텔지어로 가오를 잡다가도, 서슬 퍼런 서스펜스가 때때로 쑥 들어온다. 무엇보다도 이는 영화를 쥐고 흔드는 최민식의 위력적인 연기 덕분이다. 껍데기 같은 자신의 존재를 포장하고자 안간힘을 쓰던 사내가 한 순간 쫄아서 무너지는 광경, 희극과 비극을 아우르는 최민식의 연기는 가히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필요조건이다. 반대로 하정우는 최민식이 좌우로 흔드는 영화의 중간중간에 쐐기를 박아 넣으며 순간적인 긴장감을 불어넣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일종의 충분조건이랄까. 조진웅과 마동석을 비롯한 전체적인 캐스팅에는 어떠한 거품도 없다. 다들 자신의 위치에서 적절한 그림이 되어 무언가를 해낸다. 무엇보다도 조직의 2인자 박창우 역할을 맡은 김성균과 검사로 등장하는 곽도원은 각각 발굴이며 발견이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결국 한 남자가 구시대의 구멍난 체계를 혈연이라는 담합과 치열한 생존본능을 앞세워 유린하고 착복하며 끝내 생존하여 자신의 일가를 이루는 과정을 살피는 시대극에 가깝다. 가진 것 없이 가문의 이름으로 삶을 연명하던 껍데기 같은 사내는 그 껍데기를 통해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끝내 그렇게 키워낸 후손을 알맹이 삼아서 끝내 껍데기를 채운다. 이는 곧 현재 한국에서 중산층 이상의 일가를 이룬 오늘날의 아버지들이 자행한 가족사 세탁의 뿌리를 들추고 살피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두 전작을 통해서 리얼리즘적인 연출적 장기를 드러낸 윤종빈 감독은 탁월한 시대 묘사와 서사적 배열을 통해서 현실 같은 영화를 만들어냈고, 배우들은 또렷한 연기로 그 시대적 공기를 채워냈다. 우스꽝스럽게 처연하고, 신랄하게 저린, 그 마지막 인상은 여전히 우리 삶을 좌우하고 있는 어느 아버지들이 채운 알맹이를 감싼 껍데기를 추적한다.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르는 법을 배운 이는 미끄러지면서 버티는 재주를 용하게 터득한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한국의 근대사를 헤쳐오며 오늘날 일가를 이룬 한 아버지의 진창 같은 일생을 조명하는 영화다. 노스텔지어로 가오를 잡고, 블랙코미디의 리듬을 타면서도 서슬 퍼런 서스펜스가 때때로 쑥 들어온다. 두 전작을 통해서 리얼리즘의 연출적 장기를 드러낸 윤종빈 감독의 시대적 묘사가 탁월한 가운데, 배우들은 또렷한 연기로 그 시대적 공기를 채워낸다. 특히 영화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최민식의 가공할 연기가 돋보이는 가운데서도 종종 그 리듬을 중심축으로 세워 넣고 긴장을 불어넣는 하정우의 존재감도 근사하다.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연쇄아동살해사건이 발생한다. 대통령이 직접 경찰청을 방문해서 범인 검거를 독려할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덕분에 경찰 조직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총력을 기울이던 중,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 현장에서 경찰의 오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게 전전긍긍하던 수뇌부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한다.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범이라 위장시킬 만한 대체자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의 연출자로 낙점된 건 광역수사대 에이스로 꼽히는 최철기 반장(황정민)이다.
제목 그대로 경찰과 검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부당거래와 정경유착을 소재로 둔 범죄영화 <부당거래>는 먹이사슬처럼 얽힌 캐릭터들이 벌이는 첨탑 쟁탈전과 같은 영화다. 광역수사대의 에이스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침에도 경찰대 출신의 동기에게 밀려 번번이 승진 심사에서 탈락하는 최철기를 축으로 진전되는 <부당거래>의 서사는 최철기에게 빌붙어서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처벌을 면하는 사업가 장석구(유해진), 뇌물공여를 비롯한 정치적 공작까지 서슴지 않는 비리검사 주양(류승범)을 통해 극적 개연성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공생과 적대를 오가는, 겉과 속이 다른 제각각의 인물들은 저마다 몸담고 있는 조직의 직업윤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공적인 상징성을 환기시킨다.
<부당거래>는 기초적으로 시나리오 자체의 완성도가 예상되는 작품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원작자인 동시에 자신의 원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완성한 <혈투>의 연출자인 박훈정의 시나리오에 기초한 <부당거래>는 류승완의 연출력에 앞서서 주목해야 할 <부당거래>의 초석이었을 것이다. <부당거래>는 다층적인 캐릭터 구조와 다단한 플롯을 품고 있음에도 내러티브의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매듭을 묶고 풀어내듯 감정의 결자해지가 확실한 작품이다. 검찰과 경찰, 그리고 기업 스폰서와 언론의 공생관계를 엮어내는 <부당거래>는 그 불미스러운 관계의 이면을 탁월하게 살피며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높이는 동시에 사실적 폭로로서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액션 연출의 대가로 분류되던 류승완이 탄탄한 시나리오가 예상되는 <부당거래>를 통해 기승전결의 완곡을 조율해내는 연출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건 발견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한 사안일 것이다. <부당거래>는 액션이라는 장기에 묶여있는 것처럼 보이던 류승완의 입지를 새롭게 인식시켜줄 대전환과 같은 작품이다. 류승완 특유의 호쾌한 액션 시퀀스를 대체하는 건 우위를 점하려는 캐릭터들의 치열한 공방전이다. 또한 그 치열한 공방을 통해 각축을 거듭하는 관계의 우위는 대회전을 이루는 상황을 연속으로 이어지며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스토리텔링에 활기를 주입한다. 물론 주연과 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의 열연은 이 모든 결과물의 배후이자 근본적인 자질로서 유효하다.
무엇보다도 <부당거래>가 흥미로운 건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든 상황이 풍자로서의 기능성을 발휘하는 우화처럼 보이는 동시에 극대화된 리얼리즘의 산물처럼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흉악한 범죄가 벌어지는 사회 속에서 권력의 종용을 이기지 못한 채 진실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고 수사의 종결을 위해 사건을 위조하는 경찰, 사회적 정의를 위해 법을 집행하기 보단 법적 해석을 자신의 권력으로 삼아 자본에 결탁한 채 범법을 자행하는 검사, 그리고 이들과 결합해서 사회적 정의를 짓밟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기업가, 그리고 이 일그러진 구조에 기생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사건을 조장하는 언론까지, <부당거래>는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고 의심될 만)한 거대한 부조리를 통렬하게 겨냥한 폭로극과 같은 작품이다. 만약 <부당거래>를 보고 대한민국 사회 현실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데자뷰를 발견한다면 그건 착시일까. 하지만 당신의 데자뷰에는 죄가 없다. 단지 영화가 현실을 못 따라갈 뿐.
오랜 세월을 견딘 예술품은 보존적 가치를 발생시키고 개인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예술품에 물질적 단위의 가격을 매기게 된 건 그 소유욕 때문이다. 희귀성이 인정될수록 책정되는 화폐 단위가 올라간다. 본질적인 아름다움보다도 금전적인 저울질을 통한 소유욕이 예술을 장악한다. 예술이 금전적 가치로 규정될 때 예술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굴절된 욕망이 파생된다. 진품을 베낀 위작들이 눈먼 소유욕을 등에 업고 시장에 유통되고 진가를 해독할 수 있는 감정가의 판단이 예술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 변수는 그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의 속내가 투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붓도, 예술적 가치를 판명하는 혀도, 예술적 가치를 구입하는 돈도,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결국 사람이 변수가 된다.
<인사동 스캔들>은 예술을 거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붓을, 혀를, 돈을 재능처럼 부리는 자들이 각축전을 펼치는 판이다. 그 재능은 누군가를 찌르는 칼이거나 반대로 스스로를 찌르는 칼이 된다. 이는 도박처럼 위험하다. 그 재능을 걸고 ‘몰빵’하면 그 판 안에서 영생을 누리기도 하지만 무덤처럼 갇히기도 하는 탓이다. 그 성패는 자신의 재능이 상대를 압도할만한 그릇이 되는가에 달려있다. 자신이 들고 있는 패를 어떻게 던질 수 있는가의 배짱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패를 들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사동 스캔들>은 붓과, 혀와, 돈을 자신의 패로 들거나 감춘 이들이 벌이는 판세의 경과를 지켜보는 영화다.
미술품 경매 현장에서 위작 논란에 빠진 작품을 감정하는 이강준(김래원)은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미술복원가다. 좋은 실력과 두둑한 배짱을 지니고 있지만 과거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린 이후로 복원가로 활동하지 않은 그는 도벽으로 인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신세다. 미술계의 큰 손인 중개업자 배태진(엄정화)은 이강준의 특별한 처지를 이용해 안견의 ‘벽안도’복원작업에 끌어들이려 한다. 이강준은 ‘벽안도’에 흥미를 보이고 제안을 수락하지만 그에겐 다른 구상이 있다. <인사동 스캔들>은 ‘벽안도’복원이라는 사건의 기능적 관찰보다도 그 사안을 둘러싼 인물들의 각축전에 주력하는 영화다. ‘벽안도’복원에 착수하는 배태진과 이강준의 심리적 대립구도가 영화의 밑그림이 된다면 그 주변부에 산재한 다양한 캐릭터들은 채색을 돕는 다양한 염료와 같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대사와 이미지에 담긴 대용량의 정보들이 출력된다. ‘매치컷(match cut)’을 비롯한 다양한 장면전환 방식을 활용하며 극의 속도감을 높이고 사연의 줄기를 이루는 사건에 관련된 정보들을 끊임없이 출력하며 정보적 포만감을 발생시킨다. 복원과 복제가 의미를 달리하는 것처럼 합법적인 미술경매와 암거래 경매장이 교차하는 대비적 풍경은 <인사동 스캔들>의 장기에 가깝다. 미술품을 둘러싼 담합과 밀거래 등, 예술품이 유통되는 암투적 과정을 묘사하는 <인사동 스캔들>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사실성을 따지기 힘들 정도로 생소한 덕분에 특별한 풍경으로서 값어치가 있다. 특히 오래된 종이에 먹일 풀을 구하는 ‘세초’작업, ‘원접’과 ‘배접’을 나누는 ‘상박’, 선명한 색감을 재현하기 위한 ‘회음수’등, 동양미술을 복원하는 과정은 <타짜>의 ‘밑장빼기’만큼 이색적인 구경거리가 된다.
사실 <인사동 스캔들>은 <타짜>와 비교하기 좋은 영화다. 도박과 미술이란 소재는 세계관 자체만으로도 너비가 벌어지는 느낌이지만 복원가를 ‘떼쟁이’로, 중개업자를 ‘장물쟁이’로 지칭하는 은어가 소통되는 미술계의 뒷면은 도박판만큼이나 거칠고 험한 세계처럼 연출되며 이런 노선이 <타짜>의 기시감을 부른다. 타짜의 손기술은 복제가와 복원가의 그림 재현 솜씨와 대응한다. 복제와 암시장거래가 만연하는 미술품 거래장면은 치열한 기싸움과 암수가 오가는 도박판과 유사한 단상을 부른다. 현란한 전환 기술이 적극 활용되는 이미지와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입체적 구조를 이루는 이야기 형태도 낯이 익다. 캐릭터의 물량 공세가 대단하지만 인물관계의 기본적인 골격만으로 놓고 보자면 비슷한 선이 발견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타짜>가 활용하기 좋은 규격을 선점한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조건은 <인사동 스캔들>에 위작의 감정가를 매기고 싶게 만든다.
<인사동 스캔들>은 여러모로 공을 많이 들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욕적이다.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영화를 풍요롭게 장식하나 종종 자신의 그릇을 지키기 위해 과한 경쟁을 벌이는 캐릭터들이 발견되고, 현란하게 펼쳐지는 이미지와 대량적으로 생산되는 정보는 포만감을 넘어 폭식에 가까운 부담을 안긴다. 빠르게 돌아가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중요하게 요구되는 건 이해력에 가깝다. 이야기의 총합을 이루는 태도는 물리적인 기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끝내 결과를 이루는 모든 과정이 계산적인 계획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때때로 예언을 가장한 우연을 방치하고 묵인한다. 모든 것이 계획적인 필연 같지만 그것을 보좌하는 우연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방대한 대사량과 이미지로 이뤄진 스토리를 다 따라잡는다 해도 의식 속에 침전된 의문을 느낀다면 이런 까닭과 무관하지 않다.
동시에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얻어질 정서적 감흥이 기본적인 기대치의 수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는 캐릭터의 대립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강준과 배태진의 대립구도는 기세로서 동등하다. 배우가 고민할만한 캐릭터의 디테일은 충분히 완성된 느낌이다. 그러나 기능적인 역할을 묘사하는 데서 균등한 배분이 이뤄지지 않는다. 이는 역할의 보조자, 즉 감독의 배려가 부족하다 탓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강준이 기능적인 능력을 전시해나가는 동안, 배태진을 수식할만한 역할의 기능성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캐릭터의 외모와 대사를 통해 예측되는 잠재력만 발견될 뿐이다. 말미에 다다라서 두 인물은 단순한 선악으로 구분된다. 선의를 바탕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자와 악의를 품고 몰락하는 자로 나뉜다. 캐릭터에 접근하는 설정 자체가 상대적인 편애를 발생시키기 좋은 조건이다. 캐릭터의 경쟁을 부추기는 구조 안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건 선의의 승리라기 보단 불합리한 성취를 요구하는 굴절된 욕망의 파괴가 아니었을까. 그런 측면에서 그릇된 욕망을 대변하는 배태진의 배경은 어딘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결국 결말부에서 목적을 이룬 인물로부터 전해질 공감대가 깊게 자리잡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인사동 스캔들>은 분명 어떤 성과를 드러내는 영화다. <타짜>와 골격이 유사하지만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의 물량공세는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느낌이고 문화적 국수주의를 어필하는 말미 즈음엔 <식객>보다 세련된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종종 우연까지 계산된 계획처럼 모든 과정을 합리화한다는 게 걸리지만 스토리 자체의 전후관계는 맥락 자체로선 앞뒤가 맞는 형태라 말할 수 있다. 분명 단점만큼이나 장점도 눈에 띄는 영화다. 하지만 역시나 과욕이 문제다. 다양한 색을 입혔지만 저마다 색이 번지는 느낌이다. “서양화는 베끼는 게 어렵고, 동양화는 살리는 게 어렵다.”는 대사처럼, ‘자질은 살리는 게 어렵고, 과욕은 죽이는 게 어렵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를 (의도적으로) 연상시키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The good the bad the weird>(이하, <놈놈놈>)은 전자의 명성에 무임승차하고자 조합된 문자 나열의 결과물 따위에 불과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놈놈놈>을 마카로니 웨스턴(스파게티 웨스턴)의 동양적(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적) 변주라고 섣불리 규정해버리는 것도 탐탁치 않다. 일단 <놈놈놈>의 부분을 채우는 다양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듯한, 그리 낯설게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 낯익은 이미지들이 조합된 전체적 형태는 낯설게 입력된다. 이는 그 이미지들이 조합된 결과물이 하나같이 과도기적인 형태로 혼재된 채 무질서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까닭이다. 이런 시각적 이해는 그 당시 주인이 불분명했던 만주벌판의 지정학적 요건과도 맞물려 교묘하게 시대상과 연관되어 작동한다.
스스로 ‘만주 웨스턴’이라고 (홍보문구를 통해) 자처하는 <놈놈놈>은 서부극의 건조하고 황량한 정서를 만주벌판에 대입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만하다. 본래 조선의 국토였지만 일제강점기와 함께 반허공에 떠버린 만주벌판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은 독립군이거나 일제앞잡이,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아나키스트적 개인으로 생존한다. 마적단 두목으로 무리를 이끄는 박창이(이병헌)나 독고다이 도적질로 살아가는 윤태구(송강호), 그리고 현상금 사냥꾼으로써 그들의 뒤를 쫓는 박도원(정우성)도 돌아갈 곳을 잃은 채 그 자리를 떠도는 아나키스트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덕분에 역사적인 의식 따위도 그곳엔 부재하다. 그들에겐 잃어버린 국가에 대한 사명감보단 생이 붙어있는 현실의 돌파구를 찾아내는 게 더욱 큰 관심사다. ‘나라가 없어도 돈은 있어야지’라는 박도원의 대사는 그들의 욕망 너머에 담긴 허무적 정서를 관통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웨스턴 무비란 장르적 명칭을 허한 지정학적 배후에 무의식적으로 녹아있던 무질서의 개념을 역전시키는 설정이다. 웨스턴은 본래 정복자들로부터 시작된 사연이다. 초창기 웨스턴은 서부 개척이란 역사에 토착민이었던 인디언들의 야만성을 부각시키며 그들에 대한 공격적 행위를 개척정신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장르의 폭력성을 설득했다. 그 후, 웨스턴은 점차 인디언을 몰아내며 서부를 점령한 총잡이들의 이익 쟁탈전으로 심화되고 폭력성의 연출과 비열함을 가미하는 마카로니 웨스턴과 정복자들의 자기 성찰을 덧씌운 수정주의 웨스턴으로 진화해 나간다. 주인 없는-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입장에서 없다고 판단된- 땅에서 펼쳐지는 총잡이들의 물고 물리는 대결의 양상은 무질서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그 맥락이 발생한 지점은 결과적으로 외부에서 유입된 정복자들의 오만한 정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웨스턴의 정서적 기운을 함축한 <놈놈놈>의 만주는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놈놈놈>에서 정서적 굴곡을 형성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망국의 자손들, 조선인이다. 만주는 일본 제국주의의 정복자들에게 국가를 빼앗긴 조선인의 망향지정이 서린 공간이다. 물론 그곳이 다양한 군락을 이룬 만주족들의 터이기도 하겠지만 <놈놈놈>의 주요맥락이 조선인 신분의 캐릭터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사안은 논외의 사안으로 간과될만하다. 사실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지니고 있었던, 혹은 그것이 응당 그러한 것이라 믿어지던 일련의 고정관념은 사실 그것을 잉태한 이들의 무의식에 정복의 역사를 합당하게 바라보는 관점이 개입된 까닭이다. 스스로 웨스턴을 표방한 <놈놈놈>은 그것을 의식했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웨스턴의 세계관이 지니고 있던 어떤 고정관념을 타파한 꼴이 됐다. 이는 <데어 윌 비 블러드>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이 공간성의 테두리로 잔존하거나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처럼 완전한 시대적 공간성으로 확보되는, 혹은 <3:10 투 유마>와 같이 활극의 요소를 가미한 자기 복제의 양상과는 확연히 판이한 꼴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놈놈놈>은 장르의 중심지대를 이양함으로써 장르의 한계를 이탈할 수 있다는 역설적 가능성을 시사한다. 애초에 영웅주의적 공식을 탈피한 마카로니 웨스턴의 시작이 미국 서부의 입지조건을 벗어나면서 형성됐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제목에서 명명된 세 명의 ‘놈’은 트라이앵글을 이루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구도를 형성한다. 캐릭터 삼각편대 구도 안에서 발생하는 빈번한 충돌은 활극의 스펙터클로 구사되며 이에 일제강점기 만주의 시대상과 신구가 맞물린 과도기의 이미지가 중첩되며 <놈놈놈>을 도가니탕의 신세계로 내몬다. 물론 노골적인 결말부의 삼자구도까지 확인하고 나면 전체적인 영화적 설정은 분명 세르지오 레오네의 그것과 접점을 이루는 면모가 다분함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놈놈놈>에서 실제를 구현하는 골격의 이미지가 아니라 가상적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한 기본적인 소스의 출처에 가깝다. 중국 대륙과 러시아 연해주, 제국주의 일본, 그리고 조선의 유랑민까지 다국적의 인간들이 혼재해있으며 말과 오토바이가 공존하는 신구 문명의 발전적 과도기가 혼탁하게 얽힌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한 <놈놈놈>은 일제강점기 만주의 과도기적 이미지를 적극 차용한 시대극에 근접해 있다. 물론 그것 역시 사실적인 시대적 모사(模寫)로서가 아닌 전반적인 영화적 디테일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산재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놈놈놈>은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활극적 모험담으로 규정될만한 것이다. 시대상과 지역성을 기초로 융합되어 가공된 영화만의 특수한 이미지들은 실제 연대를 가늠하되 현실적 시공간을 망각하게 만든다. 동시에 탁월하게 세공된 스타일을 자랑하는 캐릭터들이 펼쳐 보이는 활극의 동선은 제각각 오락적 반경을 확장해나간다. 대립적 갈등의 심리 묘사보단 외부적 충돌의 파괴력을 묘사하는 것에 중점을 둔 대결양상의 화려함도 이를 보탠다. 박창이와 윤태구, 박도원이 처음으로 접점을 이루는 기차 탈취 씬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발생하는 박진감은 윤태구와 박도원이 손을 잡고 박창이의 무리와 대결하는 시가지 총격씬을 비롯해 크고 작은 액션 시퀀스를 점층적으로 나열한 뒤, 후반부 평원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추격전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현란한 동선을 쫓는 필사적인 트래킹 샷과 거대한 평원을 스펙터클하게 펼쳐 넣는 부감 숏 등 장면을 효과적으로 비추는 구도적 능숙함과 고난이도의 액션에 만화적인 연속성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카메라 워크의 민첩한 노력은 <놈놈놈>의 세련된 이미지를 완성하는 가장 큰 공신이자 탁월한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쟁글거리는 기타 선율과 리드미컬한 퍼거션으로 채워진 남미 계열 멜로디와 일렉기타와 신디사이져음을 대거 차용하며 현대적 감각으로 복기된 웨스턴 풍의 음악으로 채워진 사운드트랙도 장면과 결착한 순간마다 절묘한 시너지를 발산한다.
물론 드라마상의 맥락이 드물게 느슨해지는 경향은 존재한다. 세 명의 주요 캐릭터가 격돌하고 다시 흩어지는 반복적 이야기 구조는 방대한 스케일만큼이나 산재한 조연들과 함께 개별적인 동선에서 빚어지는 각자의 사연을 크고 작게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종종 팽팽하던 실이 느슨해지듯 풀려나가는 경우가 발견된다. 크고 작게 강약의 강세를 반복하듯 진행되는 내러티브의 흐름에서 강약의 간극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발생하는 경우에 종종 발견되는 면이라 할 수 있다. 전후 구조에서 전반부의 세기가 강했을 때, 상대적으로 후반부의 세기가 약할 경우 격차가 크게 느껴지는 이치다. 게다가 <석양의 무법자>를 완전히 본뜬 듯한 결말부의 설정은 그 의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아챌 경험의 기반이 없는 관객에게는 지독한 허무주의로 인식될 위험성도 분명 존재한다.
전반적으로 캐릭터의 역할 배분은 배우의 능력(?)마저도 고려한 듯 적절하게 안배됐다. 특히 입담을 자랑하는 송강호는 언제나 그렇듯 발군이며 가장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캐릭터 박창이를 연기한 이병헌은 자신의 역량과 노력을 보태며 철저히 캐릭터에 몰입한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세 캐릭터 중 가장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박도원 역을 맡은 정우성의 이미지를 능숙하게 활용한다. 영화 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화려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박도원은 심리적 내면을 깊게 드러내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놈놈놈>의 세련미를 구축하는 전반적인 포석으로써 날고 뛰며 겨눈다. 물론 캐릭터의 갈등 지점이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한다. 중반부부터 형태를 드러내는 윤태구를 향한 박창이의 집착은 후반부에서 의문을 명확히 해소하지만 박도원이 다소 의아하게 박창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이유는 마지막까지 명확하지 않다.-단지 좋은 놈이라서?- (등장 자체만으로도 인상적인 감상을 부르는 배우들로 이뤄진) 캐릭터의 삼각관계가 역할에 맞아떨어지는 이미지의 구도를 형성하며 일정한 상승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은 확실한 묘미를 부여하지만 그 구도의 결속력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은 지적될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놈놈놈>은 단연 즐길만한 여지가 풍부한 오락영화이자 일정한 수확을 얻었다고 여겨도 좋을법한 장르적 시도의 결과물이라 평가할만하다. 동시에 김지운 감독 특유의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전체적인 미장센과 적절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연출력, 확실한 몰입도를 선사하는 인상적인 액션의 응집력은 분명 수훈이다. 과거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고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기대를 모았던 몇몇 대작들의 초라한 결과물과 비교했을 때 <놈놈놈>의 성과는 더욱 뚜렷해진다. 새로운 소재에 도전하는 과감성과 함께 탄탄한 연출을 통해 정석적인 성취를 거둘 줄 아는 방식은 분명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놈놈놈>은 김지운 감독 본인의 말대로 ‘걸작'이나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만큼은 분명 간과할 수 없는 흥미로운 영화임에 분명하다.
어둠을 잃어버린 서울의 밤거리. 유흥의 자본으로 세워진 네온사인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고 그 아래엔 밤을 잊은 호스티스들이 향흥의 환락가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살아간다. <비스티 보이즈>는 도시의 밤이 만들어낸 빛의 허상을 좇아 거리로 내몰린 불나방 같은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다.
전작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군대라는 남성적 특이집단을 들춘 윤종빈 감독은 <비스티 보이즈>를 통해 남성 호스티스라는 또 다른 특이집단을 들춘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비스티 보이즈>는 남성성에서 뻗어나간 양극단의 환경을 배경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척점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은 진배없다는 점에서 동일한 속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체제적 복종을 완수하기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군대와 수익적 복종을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남성 호스티스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닮았다. 다만 그것이 남성성이란 지점의 양극단이란 점에서 명확한 거리감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호스트가 자신의 손님을 물주로 삼는다는 ‘공사’, 자신이 일하는 업소에 돈을 끌어서 쓴다는 의미의 ‘마이킹’, 실적에 따른 성과급수당을 지칭하는 ‘티씨(T/C)’ 등, 그 세계만의 전문용어가 소통되는 <비스티 보이즈>의 세계는 분명 특화된 구역이다. <비스티 보이즈>는 호스트바라고 불리는 특수한 세계를 스크린에 호기롭게 재현하며 리얼리티의 흥미를 유발한다. 하지만 <비스티 보이즈>가 작동시키는 리얼리티는 단순히 영화가 두른 병풍에 불과하지 않다. 강남 일대의 풍경을 담아낸 네거티브 질감의 영상은 그 거리에 팽만한 욕망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들춘다. 때때로 페이크 다큐나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같은 현실감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철저한 현장조사를 거쳐 만들어낸 영화의 리얼리티가 탁월한 까닭이며 동시에 연기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실제 자신을 캐릭터에 이입시켰다고 생각될 정도로 캐릭터에 잘 스며든 배우들의 연기가 누구 하나 손색없는 덕분일 것이다.
몰락한 강남 2세인 승우(윤계상)는 잠시 호스트의 삶에 기대고 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면서도 자신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괴리감을 때론 감당하지 못한다. 업소의 에이스로 추대될 만큼 호스트로서의 자질이 충분하지만 그 위장된 얼굴로 가린 내면의 자격지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 삶에 저항하듯 다혈질의 성격을 토해내곤 한다. 그 와중에 지원(윤진서)을 만나 그녀를 통해 삶의 통로를 찾아나가지만 진심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닥에 내몰린 승우는 끝없이 의심을 헤매다 결국 치정의 미궁으로 스스로 빠져든다. 도박의 늪에 빠져 큰 빚에 억눌린 재현(하정우) 역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으로부터 도피하려다 극단에 내몰린 경우다. 하지만 재현은 현실에 타협하며 끝없이 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비굴하게 내몰리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약삭빠른 근성은 천덕꾸러기처럼 그를 괄시하게 만드는 반면, 그가 호스트로서 천연덕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생존력의 기반이 된다.
강남의 밤거리에 불을 밝힌 호스트바는 물질적 욕망이 넘실거리는 향락의 무대와 같다. 청춘을 볼모로 한 청년들은 그곳에서 몸바쳐 주머니를 채운다. 청년들은 저마다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손님의 시중을 들지만 꿈은 결코 그 자리에 있지 않다. 그곳으로 흘러 들게 된 사정이야 어찌됐건 재현이나 승우에게 호스트바는 자신의 삶을 꿈꾸게 할 기회의 땅임과 동시에 언젠간 박차고 나가야 할 바닥이자 나락의 비상구로 통하는 길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어 희망도 없는 청년들은 암담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강남의 네온사인 아래 모여든다. 꿈을 쫓기 보단 돈을 쫓는 법을 먼저 배운 청춘들은 어떤 가치도 깨닫지 못한 채 돈을 향해 뛰어간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란 말처럼 승우나 재현이 소비하는 호화로운 삶은 그들의 현실에서 껍데기로 소화되는 것에 불과하다. 고급 차를 몰고 명품 옷을 입고 비싼 임대료를 내고 강남에서 살아도 그들은 결코 부유한 강남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자본이 꾸며놓은 진풍경 아래 살아가지만 그들의 호사는 그 거리의 주인의 모습이 아니라 향락을 서비스하는 거리의 노예에 불과하다. 에이스가 되고, 텐프로(10%)가 된다 한들, 수입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로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자본의 저변에 불과하다. 그건 어머니의 가게에서 이름은 같으나 얼굴이 다른 지원(윤진서)에게 목걸이를 사주지 못하는 승우의 꿈과 같다. 마치 자신의 것처럼 모든 것을 누리지만 결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변두리의 주체. 끝없이 물욕이 샘솟는 그 거리에서 그들은 자본의 주인이 되길 원하지만 소모품으로 전락할 따름이다.
이는 88만원 세대의 절망감과 무관하지 않다. 원대한 꿈보다 자본의 속박을 먼저 체감하는 청춘은 그 수하로 무기력하게 편입되어 덧없는 물욕을 꿈꾸지만 쳇바퀴 도는 제자리의 삶은 꿈을 아득하게 밀어내고 현실의 무게는 더더욱 삶을 짓누른다. 끝없는 경쟁을 고수하는 교육과정을 체득하고 사회로 나와 취업난에 허덕이며 자본에 의한 패배주의를 체감한 젊은 세대의 무기력함은 막연한 미래를 꿈꾸며 현실을 소모하는 호스트의 삶과 진배없다. 경쟁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고달픈 삶을 자연스럽게 익힌 청년들은 자본의 첨탑에 기어오르기 위해 스스로를 탕진할 따름이다. 손님들과 잔을 주고받으며 진심을 연기하는 호스트들이 메말라가는 자신의 영혼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자신이 내몰린 구석에서 처량함조차 잊으며 피폐한 삶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결국 반짝거리는 조명처럼 환락이 넘실거리는 서울의 밤을 뜨겁게 누비던 승우는 갈 곳을 잃고 나서야 스스로가 어두운 곳에 내몰렸음을 깨닫고 좌절한다. 한편, 현실로부터 달아나듯 사라진 재현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조차 진심을 가장한 호스트의 얼굴로 살아간다. 그건 압구정의 밤처럼, 신주쿠의 밤도 자본으로 세워진 네온사인 불빛에 불나방들이 몰려드는 덕분이다. 그리고 지금도 영혼을 저당 잡은 청춘들은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공사상대를 찾아 술을 따른다. 어지러운 세상, 파이팅 하면서. 그렇게 밤조차 밀어낸 도시의 허영심에 미혹된 불나방 같은 청춘들은 그것을 희망이라 믿고 그쪽으로 날개를 퍼덕이다 제 몸을 태우고 스스로 소진되거나 끝없이 몸을 부딪히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