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스크린의 검은 여백 위로 제목이 등장하고, 등장인물을 명시하는 자막이 눈을 깜빡이듯 몇 차례에 걸쳐 뒤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러다 마치 감았다 뜬 눈 앞에 비춰지는 어떠한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쫓아가듯 영화는 시작된다.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과 숏을 채우는 인물간의 거리는 일정하되 두서가 없다. 제3자의 곁눈질이거나 무심한 응시처럼 담담하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기록적인 다큐멘터리의 시야로 위장된 극영화다.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로 응시하는 관점이 발견된다.
재활원에 있던 킴(앤 헤서웨이)은 아버지 폴(빌 어윈)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언니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에 참석하기 위해서 집에 돌아온 그녀의 마음은 짐짓 무겁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이웃의 눈동자엔 모종의 경계심이 배어있고 그녀 역시 그 경계심을 온 몸으로 체감한다. 레이첼의 결혼을 위해 오랜만에 모인 가족 사이에는 짐작할 수 없는 이상 기류가 감지된다. 킴의 등장과 함께 집안의 공기가 달라진다. 감춰진 사연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에 있는 킴의 과거행적에 대한 불안 정도는 쉽사리 짐작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전 속에서 가족의 들추기 힘든 사연이 암시되며 양상은 또 한번 발전된다. 단순한 맥락이 예감되던 사연에 입체적 호기심이 형성된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다큐의 눈을 빌린 드라마다. 그 심연에 잠겨있던 사연을 들쑤시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갈등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반목을 통한 화합의 여정을 묵묵히 지켜본다. 시종일관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레이첼, 결혼하다>의 정서를 관통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이다. 흔들리는 카메라 너머의 인물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기적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마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 위력도 짐작되지 않는 갈등의 도화선 속에서 위태롭게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린다. 고의성이 다분한 캠버전의 거친 입자는 <레이첼, 결혼하다>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수단이 된다. 그 설득력이란 상황에 대한 사실적 인지라기 보단 정서적 동감에 해당한다. <레이첼, 결혼하다>가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그린 드라마가 아니라 때때로 가족이라는 구조적 실존을 고찰하는 실험극처럼 보이는 건 이 덕분이다. 캠 버전의 화질과 핸드헬드의 진동은 이를 위한 미장센에 가깝다. 혈연의 운명에 속박된 애증의 알고리즘이 뜨겁게 폭발하고 차분히 가라앉는 3일 간의 서사 속에서 은밀하고도 생생하게 관찰된다. 음악의 기능성 또한 탁월하다. 외부가 아닌 영화의 내부에서 직접 연주되는 음악들은 극적인 감정들을 적절히 보좌한다. 특히 갈등의 심화 지점에서 들리는 위태로운 바이올린 선율은 기능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 모든 것은 극적이되 과장되지 않았고 진심이되 사실은 아니다.
킴과 레이첼을 비롯한 그네들의 가족은 자신들의 불행한 과거사를 시간에 떠내려 보내고 망각하려 하지만 가족의 재회는 결국 기억의 소환을 이루고 갈등을 촉발시키며 서로의 상처를 긁고 이내 파헤친다. 다만 <레이첼, 결혼하다>는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명시하기 위한 단선적인 드라마의 노선을 택하지 않는다. 서로를 증오하듯 거친 언어를 내뱉던 가족이 종래에 서로를 다시 끌어안기까지의 과정에 돌발적인 변수들이 매복하고 예상의 범위를 수없이 벗어난다. 결혼은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내는 수단이자 갈등과 위기를 봉합하는 계기가 된다. 가족의 일원이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키는 과정 속에서 기존의 가족들과 벌이는 일종의 갈등은 유기체의 잉태와 마찬가지로 통증을 동반한다. 이는 새로운 굴레로 떠나기 직전에 벌어지는 일종의 속죄양이자 대속과 같다.
레이첼과 킴의 갈등 사이에서 아버지의 상흔마저 벌어진다. 내면의 침묵에 진심을 숨겨두며 살아온 가족은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상대의 상처 역시 확인한다. 감춰둔 사연이 드러나는 동시에 갈등이 폭발하고 위기가 도래하지만 결국 그 모든 상처를 확인함으로써 서로의 통증을 이해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전형적이란 단어로 일축되기 쉬운 사연의 본질은 입체적 양식을 통해 간과될 수 없는 특이성의 너비를 확보한다. 결국 가족은 갈등의 반목을 통해 화합에 도달한다. 그 화합의 방식은 어떤 사과나 반성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혈연에 대한 담담한 수긍을 통해 완성된다. 그 성찰의 깊이에 도달하기까지 큰 공헌을 펼치는 건 역시 배우들의 뛰어난 열연이다. 특히 앤 헤서웨이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이 확보된 눈빛을 갖추고 있다. 그녀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케 한 연기만으로도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연 값진 수확이다. 물론 로즈마리 드윗과 빌 어윈, 데브라 윙거를 비롯한 대부분의 배우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열연을 동반한다. 그 열연은 <레이첼, 결혼하다>에 진정성의 너비와 깊이를 확보하는 큰 자산과도 같다.
뜨거운 눈물보다도 묵묵한 이해 속에서 가족은 비로소 서로를 진심으로 감싸 안는다. 이해할 수 없던 애증의 장벽이 무너지고 깊은 이해가 가능해진다. 혈연이라는 구속이 비로소 연민을 넘어 사랑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가족은 새롭게 거듭나 다시 헤어지고 돌아선다. 서로에 대한 냉소를 걷고 진심의 온기를 확인한 채 그리움을 머금고 돌아선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지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담담한 시선으로 얼어붙어 있던 본의가 따스하게 녹아 내린다. 갑작스런 도입과 달리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결말의 롱테이크에 이 영화의 진심이 담겨있다.
저 푸른 산호초 섬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남은 평생을 휴양처럼 살고 싶어라. 전직수영국가대표 출신인 천수(김강우)의 꿈은 팔라우섬으로 가는 직행 티켓을 끊는 것이다. 이에 필요한 건 돈이다. 많은 돈이 필요하다. 짧은 시일 안에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곳은 도박판이다. 도박판에서 인생 한방을 노리는 천수의 꿈은 야무지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패 한번 잘못 봤다가 패가망신의 지름길로 들어선다. 팔라우섬은 커녕 장기를 팔게 생겼다. 그런 천수 앞에 강사장(조재현)이 나타나 ‘마린보이’가 될 것을 명령한다.
<마린보이>는 바다의 왕자가 아니다. 반대로 제물이 되기 좋은 운명이다. 마약밀매조직을 운영하는 강사장은 일본으로부터 마약을 밀수하기 위해 천수를, 정확히 말하자면 천수의 몸을 이용하려 한다. 신체를 마약을 숨겨오는 생체보관함으로 삼고자 한다. 수영실력이 좋은 천수는 도박으로 발목이 잡혔다. 좋은 먹잇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벼랑이 멀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직진해야 한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방향은 명확하다. 단순해지기 쉬운 구조다. 하지만 캐릭터를 통해 변수를 두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늘려나간다. 속셈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며 정체를 확실히 밝히지 않는 캐릭터를 포진시키며 진행될 상황에 대한 흥미를 더한다.
빠르게 전환되는 영상엔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다. 그 정보엔 진짜 패와 뻥카가 뒤섞여 날린다. 그 사이로 본심을 감춘 이야기가 여유롭게 떠다닌다. 이야기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빈틈이 엿보인다. 하지만 맥락의 큰 전환 지점마다 적절한 방향 표지판을 제시한다. 철저하게 잘 그려진 지도는 아니지만 길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의 기능성은 갖추고 있다.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플롯의 뼈대에 두툼한 살집을 붙이는 건 캐릭터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성격의 캐릭터를 통해서 평이한 이야기에 은밀한 호기심을 장착시킨다. 속셈을 알 수 없는 캐릭터들은 사연의 뒤편으로 갈수록 관계의 복마전을 거듭하며 거듭 상황을 전복시킨다. 다만 그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 결말부의 파괴력이 부족한 감은 있다. 서스펜스 구조가 신파 모드로 돌변하는 상황은 어딘가 작위적인 인상을 준다.
하지만 <마린보이>는 적절한 기본기를 갖춘 오락영화다. 새로운 발견이라 불리긴 어렵지만 적절한 선방이 이뤄진다. 한편으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코미디가 구사되곤 하는데 이는 천수를 연기한 김강우의 대사나 행동에서 기인한다. 진지한 상황에서 돌발적인 멘트를 날리거나 행동을 하는데 이게 엇박자에 가까운 개그를 발생시키며 궁극적으로 이는 다소 따분하게 내려앉을 수 있는 상황을 윤활유처럼 무마시키는 역할을 한다. 의도한 결과물처럼 보이진 않는다. 다만 배우 본연에게서 비롯된 정제되지 않은 태도가 우연스럽게 캐릭터에 부합된 결과처럼 여겨진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돌발적이나 그것이 캐릭터에 잘 부합되는 인상이다. 반대로 나머지 배우들은 캐릭터 역할에 충실하다. <마린보이>에서 가장 큰 장점은 그 캐릭터들이 자기 역할에 충실한 덕분에 단순한 플롯 위로 다양한 눈속임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를 가능케 한 건 바로 그 캐릭터적 연기다. 배우 본래의 성격이 반영된 느낌도 있지만 캐릭터에 몰입하고 있다는 감상을 준다.
어딘가 허전함도 남는다. <마린보이>에서 가장 큰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마린보이가 어떻게 마약을 몸에 내장(?)하고 바다를 거쳐 육지로 올라오는가라는 문제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린보이>는 가장 큰 호기심을 간단하게 묵살한다. 결정적인 순간이 가장 쉽게 무마된다. 덕분에 다소 맥이 풀리는 경향이 있다. 가장 기대했던 패가 알고 보니 뻥카에 가깝다. 바다를 무대로 한 액션이 주가 되리라 기대했건만 대부분의 사건은 육지에서 이뤄진다. 기대를 배반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액션보단 스릴러가 주가 되고, 때때로 유머가 발생하며 멜로까지 발을 걸친다. 기대를 배반하는 면모가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재미를 거둔다. 이것이 장점이 될지, 단점이 될지는 가늠할 수 없다. 버라이어티한 재미는 있지만 분명 원하던 재미가 아닐 공산을 배제할 수 없다.
영화를 관통할만한 지점은 아니지만 <마린보이>를 통해 읽혀지는 단상들이 존재한다. 천수와 마리(박시연)는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한다. 물론 그 이유는 피상적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현상이 읽힌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니, 이 나라 국민이 맞군.” 김반장(이원종)이 천수에게 던지는 대사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대한민국을 뜨고 싶어하는 청년의 욕망에 묘하게도 마음이 동한다. 깊은 사유를 끌어낼만한 이야기 수준에 이르는 건 아니지만 몇몇 대사와 설정들은 현실적인 고민을 강력하게 이끌어내기도 한다. 가볍게 찰랑거리지만 빠져들만한 매력이 존재한다.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신상명세를 설명하는 간략한 자막이 따라붙고, 서사의 변화를 표기하는 자막도 타이밍 맞게 등장한다. 이 사연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강조하듯 빈번하게 자막이 등장하며 화면을 수놓는다. 실제로 <알파독>은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마약딜러로 성공했지만 결국 미 FBI의 최연소 수배범으로 기록된 제시 제임스 할리우드라는 청년에 관한 서사를 극화했다.
과감하게 총질을 해대는 흑인 갱스터들이 걸러지지 않은 증오와 살의로 무장한 랩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커다란 TV로 방영된 힙합 뮤직비디오는 타락의 이미지를 쾌락의 메시지로 변형시킨 강렬한 비트가 젊은이들을 자극한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한 청년이 무심하게 소리친다. 총을 쏘면 기분이 죽이겠지! 행위의 결과적 책임보다도 행위에 대한 쾌락만이 강하게 감지된다. 흥청망청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타락의 무게를 감내할 줄 모르면서도 타락을 꿈꾼다. <알파독>은 자신이 무엇을 저지르는지 모르면서 무작정 내달리는 젊은이들의 비극을 품고 있다. 장난처럼 시작된 사연은 번져나가는 불처럼 걷잡을 수 없게 커져나간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쉴새 없이 에피소드를 만들어 돌린다. 각기 비중이 다른 다양한 인물들은 거미줄처럼 얽히며 사건을 형성해나간다. 그 사연의 중심엔 젊은 나이에 마약 딜러로 승승장구하며 호화롭게 살아가는 조니(에밀 허쉬)가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과 함께 매일같이 향락을 즐기고 흥청망청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에게 빌려간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겠다는 제이크(벤 포스터)와 심하게 다툰 후 그의 삶이 풍랑처럼 흔들린다. 제이크와 주고 받은 갈등의 전개 속에서 조니는 자신도 모르게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다. 우연히 만난 제이크의 동생 잭(안톤 옐친)을 납치한 조니는 친구인 프랭키(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잭을 떠넘기고 감시를 맡긴다. 본격적인 사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상황만을 설명하자면 상당히 심각한 범죄적 행위가 발생했다 할 수 있겠지만 실상 영화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서스펜스에 유리한 상황임에도 코믹이 발생하고 하이틴 무비의 발랄함이 감지된다. 심각한, 혹은 심각할 운명에 놓인 사연에 비해 혈기왕성한 스타일로 멋을 내기에 여념이 없는 영상엔 어떤 변수에 대한 예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가벼운 장난처럼 두서없이 부유하는 사연 속엔 그저 놀기 좋아하고 즐기기 좋아하는 청춘이 존재할 따름이다. 납치한 쪽이나 납치된 쪽이나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일종의 해프닝처럼 서로의 관계를 인식하던 이들은 때때로 끈끈한 교우 관계로 거듭나며 특별한 추억을 쌓기도 하고 미래를 기약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결말에 다다라서야 그 사태의 심각성이 각인된다.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사안이었는가를 깨달은 조니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마약을 팔고 유흥을 즐기던 20대 청년은 어른의 육체로 성장했으나 성숙하지 못한 아이처럼 미숙하기만 하다. 가벼운 리듬에 들썩거리듯 흘러가던 이야기는 결말부에 다다라 심각하게 주저앉는다. 큰 온도차가 발생한다. 흥겨운 파티와 취기로 가득하던 영화가 이내 급작스런 죽음을 대면하며 급격하게 얼어붙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알파독>은 책임보다 권력을 먼저 배운 청년들의 비극을 묘사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온도차만큼이나 충격도 크다. 하지만 이는 진지한 사유로 발전되기 위한 계기라기 보단 일회적인 충격요법에 가깝다. 다큐적인 양식을 통해 사안의 심각성을 조명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극의 말미까지 사연의 허구적 태도를 추구한다. 또한 그 상황의 주체를 묘사할 뿐 그 상황에 영향력을 끼친 배후를 지적하는데 미흡하다.
마약을 파는 조니의 아버지 소니(브루스 윌리스)는 아들의 사업을 방조하고 되려 육성한다. 부자의 기묘한 유대감이 시대적 타락을 가볍게 비웃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훈육은 아들을 망친다. 한편에서 잭은 어머니 올리비아(샤론 스톤)의 지나친 간섭에 스트레스를 겪고 이내 집에서 달아난다. 두 사연은 결국 기이한 파국을 낳는다. 이 사연은 특수하나 그 사연의 배후는 보편적인 문제를 품고 있다. 하지만 <알파독>은 그 사연의 배후보다도 그 사연의 형태를 탐닉하는데 열중한다. 결국 그 심각한 결과를 마주친다 해도 그 과정의 경쾌한 잔상이 아른거린다. 허구적인 내러티브가 진지한 실화를 압도한다. 의도보다도 수단이 앞선다. 스타일의 과잉 속에 자의식이 묻혔다. 영화의 의미가 증발된다. 기교는 성장했지만 의미를 성숙시키는데 실패한 셈이다.
영화화되는 건 비단 소설, 공연, 음악뿐만이 아니다. 작년에 개봉된 <히트맨>을 비롯해 너무도 유명한 <툼 레이더>나 <레지던트 이블>과 같은 사례처럼 오늘날 롤플레잉 게임(RPG)도 영화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출처가 되고 있다. 특히 자극적이고 스타일리쉬한 이미지에 몰두하고 있는 오락영화의 경향 속에서 어떤 게임들은 충분한 매력을 구가할만하다. 동명의 게임을 모티브로 한 <맥스 페인>도 마찬가지다.
슈팅이 주가 되는 롤 플레잉 ‘맥스 페인’처럼 영화 <맥스 페인>은 총격이 난무하는 액션씬의 스케일을 전시한다. 권총과 리볼버, 샷건과 기관총까지 다양한 총이 등장하는 <맥스 페인>은 분명 여지없는 액션 영화(처럼 보이는 영화)다.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건 일단 캐릭터의 사연이다. <맥스 페인>은 액션 시퀀스를 지니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리 호쾌한 액션 영화는 아니다. 되려 묵시록적인 분위기가 암울하고 침침하여 시종일관 무겁고 어둡다. 미해결 사건 부서(cold case unit)에 소속된 주인공 맥스 페인(마크 윌버그)의 타이틀을 제목으로 내건 영화는 미궁에 빠진 그의 사연을 추적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이 영화는 게임의 이미지를 그저 모티브로 소환했을 뿐, 게임과의 완전한 연관성을 염두에 둔 것 같진 않다. 다만 종종 액션 시퀀스에서 활용되는 블릿타임이나 슬로우 모션은 게임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매트릭스>에서 선사한 충격 이후로 이제 그것이 탁월한 성과를 이루지 않곤 맥 빠질 거란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암담한 건 단지 이 영화의 분위기가 아니다. 이 영화 자체가 실로 암담하다. 슈팅에 기반을 둔 롤플레잉 게임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만큼 액션 시퀀스에서 낭비되는 탄환 수는 상당하지만 그것이 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건 허세가 지나친 탓이다. 지나치게 낭비되는 스타일 앞에서 반응 속도가 느슨해진다.
의외지만 <맥스 페인>이 주력하는 건 이미지가 아닌 스토리다. 단지 게임은 모티브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포스트 9.11의 그림자도 노골적으로 아른거린다. 뉴욕의 톤 다운(tone down)된 색채도 세기말적이다. 묵은 냄새가 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맥스 페인>은 기존에 이미 써먹을 대로 써먹어서 너덜너덜해진 것들을 콜라주 하듯 스크린에 갖다 붙인다. 그 와중에 뉴욕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만들고 싶어하고 그 세계의 음모론을 파괴하는 고독한 안티히어로의 그림자를 그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맥스 페인이 바라보는 환각의 도시에서 활공하던 발키리의 무의미한 이미지처럼 <맥스 페인>은 허무맹랑하다. 액션은 기이한 슬로 모션의 강박에서 허우적거리고, 진지하게 흐르는 스토리는 지쳐 쓰러진다. 한가지 확실하게 증명되는 건 포스트 9.11의 영향력이 이 단순 명확한 게임마저도 지독한 허세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대단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결코 좋은 영향력이 아니란 점에서 실로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