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내 곁에>를 띄운 건 김명민이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백업이 조화를 이룬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공헌도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대사의 함량 미달이다.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자꾸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김명민)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지나친 오용이다. 합의되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진전되는 로맨스를 깎아지른 절벽마냥 드러내며 출발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을 진전시키기보단 변이하듯 전시한다. 쉽게 웃고 쉽게 울다가도 곧잘 정색한다. 마치 신파지만 신파로서 기능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듯 비극적 감수성에 발을 담그다 이내 달아난다. 사랑과 죽음을 무게중심으로 둔 플롯을 평행선처럼 대치시키며 멜로적 감수성을 확보해나간다. 일종의 평행선처럼 대치한 두 플롯이 각자 감정의 영역을 확보하며 이야기의 영역을 확대해나가지만 좀처럼 접목되지 못한 채 별개의 영역을 맴도는 두 플롯은 <내 사랑 내 곁에>의 감정을 분열시켜나간다.
루게릭병에 걸려 사지가 굳어가는 남자와 시체 닦는 여자의 로맨스. 죽음과 밀접한 두 사람의 연애는 끝내 눈물을 부르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사랑 내 곁에>가 자아내는 멜로적 감수성의 출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사랑의 언약과 운명적 파기보다도 인상적이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남자는 죽을 것이고, 여자는 망자가 된 연인 생각에 눈물지을 것이 빤하다. 결국 그 눈물을 얼마나 식상하지 않게 포장하고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가 <내 사랑 내 곁에>의 관건인 셈. (궁극적으로 비극을 연출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 할만한) 로맨스를 도입부에서부터 급작스럽게 밀어붙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쉽게 웃고 쉽게 울면서도 곧잘 정색하는 영화다. 좀 더 농익을만한 감정들이 인위적인 수순에 의해 절제되고 감정적 고양을 차단당하며 인색할 정도로 얕은 수위의 감정을 허락 받는다.
모친상을 당한 종우(김명민)와 장례대행사에서 일하는 지수(하지원)가 만나 곧 연인이 되는 과정은 감정선의 설득력을 배려하지 않은 것마냥 급작스럽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의 무르익음을 설명하며 감정선의 설득력을 획득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마냥 멜로의 시작을 무뚝뚝한 단면처럼 잘라내듯 내보인다. 그 이후로 농밀하게 진전되는 로맨스는 비극적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환경을 외면하듯 생기 있게 그려진다. 전후반부의 감정적 격차를 통해 신파적 깊이를 우려내는 <너는 내 운명>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 내 곁에> 역시 전후반의 감정적 격차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며 감정선을 조절한다.
감정이란 것이 매번 설득력 있는 서사를 담보로 서서히 우러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급작스런 감정적 변화를 선보이는 서사적 흐름에 설득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랑 내 곁에>가 선택한, 본질적으로 박진표 감독이 선택한 감정의 급변이 그 방식의 활용면에서 효율적인가를 의심해볼 여지는 있다. 그것이 박진표식 멜로라는 이름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그런 감정적 절제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직접적인 대사와 나레이션 독백까지 동원하며 감정을 직접 실어 나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스크린 밖에 놓인 관객의 감정이 무르익기를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는 영화다. 관객 스스로가 그 감정선에 들어서기 전에 스크린은 감정을 뚝뚝 떨어뜨리다 일거에 방류한 뒤 곧잘 표정을 바꿔버리고 지난 감정을 탈색시킨다.
최루성 신파를 지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어느 정도 인정할만한 방식이지만 그 의도 내에서도 거둬내야 할 감정적 수긍이 있었다면 그 방면에서는 실패한 형식이다. 멜로적 감수성을 통해 승부수를 띄우는 <내 사랑 내 곁에>가 눈물을 자아내는 멜로의 상투성을 포기한 건 도전적이나 그 의도 안에서 숙성시켜야 할 감정적 키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건 역시나 식상한 일이다. 동시에 로맨스와 죽음에서 비롯되는 멜로적 감수성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기보단 별개적으로 괴리되는 인상이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감정처럼 서로 마주선 두 형태의 멜로적 플롯을 끝내 이어 붙이지 못한 <내 사랑 내 곁에>가 죽음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맥락을 접목시키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말해도 될 것이다.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인상적이라 할만한 지점은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설득력 있게 그려나가는 과정에 있다. 현실적인 좌절감을 외면하기 위해 비극을 외면하고 희망을 연기하던 인물들이 비극의 무게에 무기력하게 짓눌리는 희망의 실체를 발견하는 순간, 삶은 좌절로 급격하게 내려앉는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부각시키는 건 김명민의 헌신이겠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적절한 백업이 조화를 이루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연기적 공헌과 별개로 그들이 던지는 대사에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전적으로 대사의 함량 때문이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종종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명백한 오용이다. 신파로서 지나친 감정적 고양을 자제하려 한 의도는 존중할만하나 그 의도 안에서도 실패의 흔적이 역력하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조선말기, 질곡의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허구의 로맨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실존인물을 밑그림으로 허구적 로맨스를 채색한 작품이다. 기록적 역사에 근거를 둔 재현이 아닌, 실존인물을 통해 뻗어나간 상상을 스크린에 입힌다. 비극적 역사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을 비극적 멜로의 주인공으로 재생산한다. 이런 사연이 있었다면 어떨까, 정도의 가벼운 거짓말을 실제적 삶에 덧칠한다. 논픽션의 캐릭터에 픽션의 삶을 입힌다는 건 나름대로 쓸만한 설정이다. 그런데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추구하는 픽션의 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명(조승우)의 순애보에 동화되기엔 그 얕은 사연에 감정을 담그기 망설여지고, 대원군(천호진)과 명성황후 민자영(수애)이 벌이는 심리전까지 어지럽게 날뛰는 통에 감정이 산만하다. 그 가운데서 판타지에 가깝게 연출된 CG액션신이 종종 스크린을 채운다. 분명 멜로적 플롯이 주가 되는 것 같은데 멜로에 집중하자니 손발이 오그라들고, 역사적 플롯에 눈을 돌리자니 영화를 볼 이유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이건 멜로드라마도, 역사스페셜도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명성황후를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치환해서 얻어낸 값어치가 고작 이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고작 이걸 해보자고 92억이나 되는 제작비를 썼단 말이다. 덕분에 미술은 꽤나 볼만하다만, 스크린을 전시관 윈도우로 착각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 이걸 어쩐담.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던 '이브 생로랑'을 '디오르(Dior)'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굴하고 '존 갈리아노'를 디오르의 지휘관으로 발탁했던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는 말했다. "검정색 풀오버와 열 줄짜리 진주목걸이로 샤넬(Channel)은 패션 혁명을 일으켰다." 우아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디오르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실용성을 강조한 '가브리엘 샤넬(Gabriel Channel)'의 패션을 시대적 혁명으로 정의했다.
샤넬이 파리로 진출했던 1910년경의 여자들이란 그저 남자들을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여성이 아니라면 일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던 시대였다. 화려하게 치장된 옷을 입고 매일같이 사교계를 전전하는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 신분이 천하고 처지가 박하지 않은 여자가 일을 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유년 시절 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버려진 샤넬 역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은 샤넬(오드리 토투)이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영화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반체제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직업적으로 선망한 여성이라 묘사한다.
1893년, 부모에게 버려져 여동생과 함께 수녀원에 맡겨진 샤넬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이후로 성인이 된 그녀의 모습을 통해 본격적인 서사를 밀고 나간다. 물랭(Moulin)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와중에 카페에서 노래를 하며 가수의 꿈을 키워나가던 샤넬은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엔티엔 발장(브누아 포엘 부르드)을 만나게 된다. 샤넬의 도전적인 태도에 호감을 느낀 발장은 그녀가 파리에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얻지만 샤넬의 오디션은 실패하고 발장 역시 파리 근교에 있는 자신의 사저로 떠난다. 하지만 발장을 찾아가 그의 사저에 머물며 고위층의 사교생활을 경험하게 되는 샤넬은 그곳에서 고위층 부녀자의 화려한 패션에 실소를 머금고 자신만의 심플한 스타일을 선보인다. 그리고 샤넬은 자신의 인생을 좌우할만한 연인 보이 카펠(알레산드로 니볼라)을 만나게 된다.
<코코 샤넬>은 샤넬의 스타일이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만약 <코코 샤넬>을 통해 샤넬의 스타일을 만끽하고자 티켓을 구매한 관객이라면 만족감을 쥐고 상영관을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 될 거다. <코코 샤넬>은 샤넬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샤넬이란 브랜드를 창시한 가브리엘 샤넬의 비화를 다룬 전기적 성격의 영화다. <코코 샤넬>이 묘사하는 샤넬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전문직업인이자 비극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다. 무엇보다도 샤넬이 만들어내는 것보다도 샤넬이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묘사보다도 서사에 집중한다. 남성의 부에 기대어 화려한 치장을 뽐내며 살아가는 부유층 여성들의 삶을 무료하게 인식하며 무능력을 강요하는 사회에 회의를 느끼는 샤넬은 심플하고 실용적인 자립여성의 스타일을 완성해나간다.
샤넬의 스타일에 영감을 준 사회적 배경이 <코코 샤넬>의 1차적 자산이라면 샤넬의 삶을 관통하는 로맨스는 2차적 자산이다. 결국 <코코 샤넬>은 샤넬이라는 인물의 삶이 빛나는 지점을 다룬 화려한 소품이 아니라 그 삶이 정점에 오르기 위해 어떤 여정을 거쳤는가를 드러내는 드라마다. 쉽게 말하자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을만한 이미지를 배제하고 서사적 끈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범한 선택을 추구하는 작품이라 평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관객 입장에선 비효율적인 소비를 느끼게 만들만한 지점이다. 샤넬이라는 인물에 대한 매력은 현재 샤넬이라는 브랜드가 부여하는 물질적 환상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는 인물의 성장이라는 역동적 소재를 지나치게 정적인 분위기에 가둠으로써 단조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감정적 고양을 무마시킨다. 절정이 삭제된 소설을 읽는 것처럼 권태로운 감상이 도모된다.
이름만으로 대변되는 인물의 삶이란 분명 들춰보고 싶게 매력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 인물의 현재를 이룬 기반을 살핀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코코 샤넬>의 서사적 선택은 그런 면에서 타당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을 온전히 설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코코 샤넬>은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설득시키기 어려운 영화다. 오늘날 명성을 얻은 명품 브랜드의 네임밸류를 만든 건 그 브랜드의 시작을 이룬 누군가의 삶이라기 보단 그 브랜드가 현대의 물질적 욕망과 상응하는 덕분이다. 물론 인물의 삶에 집중한 <코코 샤넬>이 패션쇼 따위를 기대한 관객의 기대감을 만족시켜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 기대심리를 배반하는 가치를 선택했다면 그것을 설득할만한 결과물을 제시해야 할 의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코 샤넬>은 설득력 없는 드라마다. 샤넬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단조로운 드라마를 통해 설명되고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 전락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코코 샤넬>은 세기의 혁명이라 불리던 패션 아이콘을 투정하는 아이처럼 치환해버린 과소비적 영화다.
확고한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명품 브랜드, <코코 샤넬>은 분명 그 이름만으로도 누군가의 소비심리를 부추길만한 영화다. 하지만 환상은 금물. <코코 샤넬>은 트렌디한 스타일로 무장한 패션쇼가 아니다. <코코 샤넬>에서 스크린의 용도란 명품 스타일을 전시하기 위한 쇼윈도가 아니라 인물의 감춰진 삶을 훔쳐보기 위한 창과 같다. 코코 샤넬이 디자이너로서 빛나는 경력을 쌓아가기 이전에 그 삶을 어떻게 디자인 했는가를 조명하는 <코코 샤넬>은 엄밀히 말하자면 코코 샤넬이라는 인물을 위시한 멜로드라마이거나 페미니즘 전기에 가깝다. 그러니까 코코 샤넬이라는 이름이 구가하는 명품적 환상성에 이끌려 <코코 샤넬>을 선택했다면 상영 시간 내내 무기력한 감상을 동반할 확률이 크다는 말. 물론 인물의 절정을 배제한 채 그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 인물이 감내한 시간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비범한 선택이라 추켜세울만한 구석은 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이라는 이름이 비극적인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 국한된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다. 마치 가봉된 옷을 입고 다니는 것마냥 불완전하고 절정이 삭제된 소설을 읽는 것마냥 무료하다.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은행을 털고 유유히 FBI를 따돌리던 갱단의 리더 존 딜린저(조니 뎁)가 검거됐다. 존 딜린저를 구치소로 이송하는 차량 주변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 환호를 지른다. 존 딜린저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환호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열광에 가까운 것이다. 존 딜린저가 수감될 예정인 미네소타 구치소에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도 뜨겁다. “은행 하나를 터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나요?”“1분 40초 정도면 가능하지.”기자가 던진 가벼운 질문이 농담으로 튕겨져 돌아온다. 악명 높은 범죄자를 목전에 둔 긴장감 따위란 없다. 마치 유명인을 눈 앞에서 두고 본다는 들뜬 기분이 현장을 장악한다. 그 사이에서 여유로운 미소로 현장을 장악한 존 딜린저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그 표정 너머의 시대를 관찰하기 보단 그 표정을 통해 시대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발견하는 영화다.
영화의 도입부, 스크린에 명시된 한 줄 자막에 따르면 미국 경제대공황이 4년째에 접어든 1933년에 존 딜린저의 삶은 절정에 달했다. 1930년대, 미국 경제대공황기에 전성기를 누렸다는 갱스터 존 딜린저의 전기적 실화를 다룬 <퍼블릭 에너미>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일생 가운데 절정을 이뤘다는 마지막 1년을 발췌하는 작업이다. 인물의 생애 안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회자되는 한 시절이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경찰에 검거돼 인디애나 주립교도소로 이송된 존 딜린저가 수감 중이던 동료들과 함께 교도소로부터 도주하는 광경을 통해 출발하는 <퍼블릭 에너미>의 서사는 바이오 그라프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존 딜린저가 FBI의 포위망 속에서 사살되는 1944년까지, 약 1년 여간의 생을 스크린에 재연한다. 인물을 조명하는 전기적 서술이 서사적 뼈대를 이루는 동시에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공기가 갱스터 무비의 육체와 멜로드라마의 감성을 입고 유려하게 포착되고 수집돼나간다.
고집스런 리얼리즘 영상 <퍼블릭 에너미>는 사실주의적인 재현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원론적 고집과 노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존 딜린저와 FBI의 총격전이 벌어진 실제장소인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이뤄진 로케이션 촬영과 FBI의 포위망에 걸려든 존 딜린저가 총에 맞아 즉사한 장소인 ‘바이오 그라프 극장’을 고스란히 재현한 세트 촬영은 그 객관성의 자질을 구체화하기 노고에 가깝다. 실제 은행강도 범죄전력이 있는 ‘제리 스칼리스’를 고용하면서까지 실제적 완성도를 고려했다는 은행강도 신 역시 리얼리티를 최우선으로 삼은 연출적 고집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퍼블릭 에너미>가 이루는 리얼리즘 이미지의 대부분은 총격신에 걸쳐있다. 특히 극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디애나 주립교도소 탈주 신은 <퍼블릭 에너미>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극명한 이정표나 다름없다. 선명한 디지털 색감이 이루는 생생한 질감의 영상 너머로 역동적인 핸드헬드가 연출하는 현장감과 외부적 사운드의 유입을 차음(遮音)하고 현장음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총격전 이미지는 다큐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현장성에 의존된 연출력을 선보인다. 그 뒤로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존 딜린저와 멜빈 퍼비스(크리스찬 베일)가 지휘하는 FBI의 야간 총격신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추구하는 연출방식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도심 총격신의 바이블로 꼽혀도 손색이 없는 <히트>를 비롯해 <퍼블릭 에너미>와 기종이 다른 HD카메라로 촬영된 <콜래트럴><마이애미 바이스>등을 통해 생생한 질감의 총격신을 연출한 마이클 만은 <퍼블릭 에너미>에 이르러 더욱 거칠고 역동적인 동시에 광범위한 클래식 총격신을 디지털 장비로 연출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또렷한 색감은 재현이라는 객관성을 공고히 다져나간다. 또한 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극대화된 총성과 역동적인 동선을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영화의 외부적 위치에 놓인 관객의 감정적 침입을 차단하듯 현장성을 극대화시키며 목격으로서의 감상을 극대화시킨다. 물론 <퍼블릭 에너미>가 시종일관 현장성이 극대화된 흔들림으로 가득한 핸드헬드의 기록적 영상만을 전시하는 건 아니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기록적인 범죄행적을 따라잡는 동시에 존 딜린저라는 개인의 독립적인 사연을 연출한다. 일종의 서브 플롯에 가깝게 보이지만 실상 <퍼블릭 에너미>를 관통하는 건 이 독립적인 사연, 즉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마리안 코티아르)의 로맨스다. 그 로맨스는 <퍼블릭 에너미>의 사실주의적 풍경으로부터 자제되는 영화의 감정적 근간을 발생시킨다.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
1933년과 1934년 사이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퍼블릭 에너미>는 대공황기의 혼란 가운데서도 낭만을 확보하는 존 딜린저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대공황의 주범이라 지목됐던 은행과 연방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시민들이 은행을 털고 시민의 돈을 갈취하지 않는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낸 건 그의 범죄적 행위가 그들의 반정부적 불만을 대리적으로 해소해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퍼블릭 에너미>는 시대를 관통하기 보단 시대의 한 이미지를 영화적 배경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대공황기의 주효한 이미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퍼블릭 에너미>에서 시대적 궁핍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건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내는 군중의 모습에서다. 갱스터에게 열광을 보내는 군중의 이미지에서 낭만의 유희를 상실한 대중의 곤궁한 정서가 읽힌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종종 존 딜린저를 마치 유령처럼 묘사되는 시퀀스를 등장시키곤 하는데 특히 존 딜린저가 극장에 앉아 자신의 수배 영상을 보는 광경과 자신의 검거전담반이 있는 경찰서 안을 휘휘 도는 광경은 <퍼블릭 에너미>의 의도가 반영된 연출적 결과물에 가깝다. 명성에 도취된 채 실체를 망각한 시대적 증후, 대중은 실체를 짐작하기 보단 명성에 도취되어 환호하고 그 이름을 쫓는 공권력은 도리어 실체 없는 악명에 짓눌려 겁쟁이처럼 눈을 돌린다. 그 한가운데서 갱스터는 대중의 환호를 얻는 판타지 스타이자 공권력을 조롱하는 히어로가 된다.
사실상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의 족적을 배려한 전기물이라기 보단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가 만들어낸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에 가깝다. 존 딜린저라는 인물로부터 새어나오는 낭만성이 시대를 장악하고 객관적으로 위장된 연출적 풍광의 영향력을 넘어서 관객을 도취시킨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건져 올려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의 특수한 단면을 도려낸 뒤, 해석적 연출을 가미한다. 연출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액션신을 리얼리즘에 가까운 영상으로 구사하는 건 <퍼블릭 에너미>가 신에서 발생할 만한 극적 흥미보다도 그 이미지에서 발생할만한 해석을 객관적으로 위장시키는데 치중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퍼블릭 에너미>는 이런 해석적 위장을 통해 범죄자를 미화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풀려나는 영화다. 관객에게 인물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인지를 거듭하면서 인물로부터 배어나오는 매력적인 분위기마저 객관적 형태로 이해시킨 뒤, 영화가 연출하는 시대적 공기 안에서 관객을 만취시킨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조니 뎁이라는 배우의 캐릭터 연출이 많이 반영된 영화이기도 한데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의 멜로 플롯이 이루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건 그 플롯의 비중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향력의 전반은 조니 뎁이 연출하는 캐릭터의 뉘앙스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로적 잔향을 남기는 결말부의 여운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궁극적으로 느와르보단 멜로적 감수성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만하다. 궁극적으로 <퍼블릭 에너미>에 방점을 찍는 정서는 로맨틱한 무드를 연출하는 멜로 그 자체에 놓여있다. 그 멜로적 분위기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매력을 연출하는 밑그림이기도 하다.
인물의 퇴장이 고하는 시대적 종언 존 딜린저가 죽음을 맞이한 바이오 그라피 극장에서의 결말부는 <퍼블릭 에너미>에서 궁극의 이미지라 할만한 광경이다. <맨하탄 멜로드라마>(1934)를 감상하는 존 딜린저가 스크린 너머의 클라크 게이블과 명확히 조응하는 눈빛으로부터 <퍼블릭 에너미>의 클라이막스가 형성된다. 한 시대의 끝을 예감하는 인물의 눈빛에서 비장한 영웅적 면모가 연출된다. 스크린 너머에서 단호하게 퇴장을 선택하는 배우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장하게 다짐한다. 존 딜린저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결말은 실상 한 인물의 생이 마감되는 순간이라기 보단 한 시대의 종말에 가까운 의미를 연출한다. 명예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시대로부터 뒤쳐져 버린 인물이 자신과 조응할 만한 캐릭터의 비장한 결말에 도취될 때, 자신이 지배하던 시대의 끝을 직감한 인물의 느와르적 예감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어쩌면 결말부에서 중요한 건 존 딜린저의 죽음이 아니라, 끝을 직감하는 존 딜린저의 표정인 셈이다. 여기서 끝이란 죽음이라기 보단 자신의 시대에 가깝다. 그 시대로부터 어떻게 퇴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영웅적 면모가 고독하게 돋보인다.
존 딜린저의 죽음을 담아낸 영화의 결말부는 범죄자에 대한 사살이라기 보단 비겁한 공모적 암살에 가깝게 연출된다. 그 순간,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rmies>, 즉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은 명확히 반어적인 언어로 전복된다. 고독한 영웅적 면모를 선보이는 갱스터가 무리 지어 모인 FBI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장한 페이소스를 연출한다. 시대적으로 퇴물이 되어가는 갱스터의 낡은 영광이 영면에 든다. 겁쟁이처럼 숨어서 존 딜린저를 기다리던 수사관들은 그가 주검이 된 뒤에야 그 얼굴을 대면한다. 겁쟁이들을 평정한 영웅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거대한 인물의 죽음을 마주한 뒤에서 시대의 종언을 체감한다. 떠나간 사람을 추모하며 뒤늦게 한 시대의 끝을 체감하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그렇게 시대의 끝은 뒤늦게 직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겁쟁이들이 끝없이 사라지는 것과 달리 영웅은 이야기를 통해 영생을 누린다.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낭만주의적 영웅은 시대를 넘어 스크린에 부활된다. <퍼블릭 에너미>에서 '존 딜린저'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고유명사라기 보단 진정한 낭만주의적 영웅을 대표하는 실존적 육체에 가깝다. 결국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의 육체를 통해 영웅의 시대를 기리며 낭만의 부활을 꿈꾸는 영화인 셈이다.
<지. 아이. 조: 전쟁의 서막>(이하, <지. 아이. 조>)는 두 사람 모두에게 첫 번째 블록버스터 출연작이다. 특별한 감흥이라도 있었나? 채닝 테이텀(이하 ‘채닝’): 말한 대로 첫 블록버스터라 처음엔 매우 긴장을 한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실제로 연기를 시작하고 나니까 그 어떤 영화와 마찬가지로 연기력에 대한 집중력을 요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물론 ‘나노마이트’와 같은 것이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그런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영화라서 재미있고 즐겁지 않았나 싶다. 궁극적으론 이런 영화에 출연한다는 건 소년 시절의 꿈과 같은 일이 아닐까. 그런 꿈 같은 일을 실행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고 재미있었다. 시에나 밀러(이하, ‘시에나’): 이런 대규모의 영화를 촬영할 수 있다는 게 익사이팅했다. 흥미롭고 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건 내 커리어의 관점에서 메인스트림, 보다 주류의 영화를 해볼만한 단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영화 산업에서 현실 도피적인, 순수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관객들이 많이 찾는 거 같다. 그런 영화에 도전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역할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총이나 무기 관련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무술도 배울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원작만화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었나? 채닝: 나는 TV만화로 <지. 아이. 조>를 계속 봐오면서 자랐다. 실제 만화책은 최근 들어서 보게 됐지만 매일 아침 학교 가기 전에 <지. 아이. 조>를 봤고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선더캣츠>라는 만화에 이어서 <지. 아이. 조>를 보면서 자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스네이크 아이즈’와 ‘스톰 쉐도우’였는데 이들 때문에 어렸을 때 닌자가 되고 싶어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촬영 세트에 와서 내 옆에 실제로 있는 스톰 쉐도우와 스네이크 아이즈를 보면서 ‘와, 이건 너무 쿨하다!’라고 생각했다. (웃음) 내 어릴 적 꿈을 실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꿈의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가상의 장면을 상상하면서 블루 스크린 앞에서 연기해야 했다는 점에서도 생소한 경험이 아니었을까. 채닝: 실질적으로 CG가 들어갈 장면을 상상하면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감독님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대로 연기했기 때문에 붕 떠있는 느낌이 들긴 했다. 감독님 머리 속에서 영화가 다 구상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고 그가 지시하는 대로 최대한 동작들을 크게 취해야 연기했다. 저기서 폭발물이 터진다, 그러면 와! 하고 반응해야 했고. 그런 CG효과도 많았지만 실제로 촬영한 액션도 많았다. 예를 들면 ‘코브라’가 ‘듀크’와 ‘립코드’를 공격하는 첫 장면은 다 실제로 촬영됐다. 헬리콥터 추락 장면에서도 실제 현장에서 헬리콥터를 떨어뜨리기도 했으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 액션이 훨씬 더 많았다.
채닝 씨는 기자회견에서 한국인 매니저가 있다고 했는데, 혹시 그 덕분에 한국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된 부분이 있었나? 채닝: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내가 노출된 부분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사실 매니저도 미국 뉴저지에서 자랐기 때문에 미국사람에 가깝다. 그래도 한국말을 잘 알고 내게도 가르쳐주려고 노력한다. 사실 처음으로 한국에 왔지만 점점 한국과 사랑에 빠지고 있다. <올드보이>, <달콤한 인생>같은 영화도 감명 깊게 봤고, <좋은 놈 나쁜놈 이상한 놈>도 조만간 보게 될 거 같다. 한국영화들이 좀 더 어둡거나 치열하고 빡빡한 느낌들이 있다고 느꼈는데 이런 부분들에 매료됐고 그만큼 사랑에 빠지는 단계다.
<달콤한 인생>은 어떻게 봤나? 채닝: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 씨의 연기에 감명받았다. 차분하면서도 강인함을 나타내는 모습이 감동적이더라. 이런 연기를 하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나 싶었다. 개인적으로 강인한 연기를 좋아하는데 내게 필요한 차분함이 있었다. 잔인하기도 하지만 강인하고 세련된 표현을 재미있게 감상했다. 시에나: 리메이크된다는 것 자체가 원작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대변해주는 게 아닐까. 채닝: 할리우드 리메이크작이 원작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김지운 감독의 예술적인 열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돈과 흥행에 집중하는 할리우드에서 그만큼의 예술성이 살아날 수 있을까. 그래도 일단 덴젤 워싱턴의 연기는 기대된다.
한국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보인다. 원래 관심이 많았나? 채닝: 난 연기 경력이 길지 않다. 한국영화산업이 이렇게 발달됐다는 것도 몰랐다. 내 매니저인 ‘빌 최’가 최근 들어서 한국 영화에 대해 교육 시켜준 덕분에 한국영화산업에 대해서 알게 됐다. 덕분에 그 스타일에 매료됐다.
김지운 감독을 만났다던데. 채닝: 어제 만나서 내가 그 분의 작품을 어떻게 봤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병헌의 작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실제로 그 분이 지금 미국 진출작을 작업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어제 그 부분에 대한 말까진 나누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어제 너무 많은 한국 배우들과 감독들을 만나서 모든 이들과의 대화를 소화할 순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꽤나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시에나: 나는 미국 진출작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직은 준비 중이며 대본이 완성되면 우리에게도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기회가 된다면 함께 일해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아직 그런 단계의 이야기를 할 순 없었지만 대본을 보내주시겠다고 하니 일단 기대가 된다. 개인적으론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기회만 준다면 어느 누구와 싸워 이겨서라도 출연하고 싶다. (웃음) 채닝: 물론 이병헌은 아니고. (웃음)
이병헌 씨와 많이 친해진 것처럼 보이더라. 이병헌 씨가 처음엔 친해지기 어려워서 고생했다는 말을 했던 거 같은데 본인들은 어떻게 느꼈나? 시에나: 이병헌 씨가 농담한 게 아닐까. (웃음) 난 처음부터 친한 것처럼 느꺄졌다. 촬영하면서 계속 농담도 같이 나누고 장난도 쳤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채닝: 처음 촬영 때 이병헌 씨는 ‘코브라’ 그룹이었고, 나는 ‘지. 아이. 조’ 그룹이어서 서로 어울릴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프라하에서 같이 촬영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덕분에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언어의 장벽이 있었지만 나는 이병헌 씨를 직접 보기 전부터 그의 작품을 보고 존경해왔기 때문에 친해질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실제로 나이가 그렇게 많은지 전혀 몰랐다. ‘뷰티풀 맨’, 아름다운 남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오해는 마라. 난 결혼한 남자니까. (웃음) 정말 미남이라서 더더욱 친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아시아에서 이병헌 씨의 인기가 대단하다. 어떻게 느끼나? 시에나: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돌아다니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스타인지 체감했다. 일본 프리미어 행사에서 수 천명의 팬들이 비를 맞거나 뙤약볕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을 보면서 아시아에서 그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됐다. 채닝: 사실 이런 블록버스터 영화가 처음인 만큼 이런 세계적인 환영이나 환대엔 익숙하지 않다. 이병헌과 같은 메가스타와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는 경우도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인기를 겸손하게 소화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러웠다.
채닝 씨는 부인과 함께 입국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채닝: 신혼인데 영화 때문에 아직 신혼생활을 즐기지 못했다. 신혼여행도 짧게 다녀와서 우리끼린 미니문이라고 부른다. (웃음) 이번 투어가 끝나면 진짜 허니문, 풀문을 다녀올 계획이다.
시에나는 할리우드의 패셔니스타라고 알려졌는데 자신이 그런 이미지를 얻게 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시에나: 패션 아이콘이라는 인식이 어디서 시작되고 발달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런 이미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는 건 연기자로서 방해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의적인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한동안 스타일리쉬하다는 말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했더니 덕분에 왜 이렇게 옷을 못 입고 다니냐면서 악평을 받게 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솔직히 그 말이 싫어질 때도 많다. 채닝: 옆에서 보면 예술감각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덕분에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눈에 띄는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시에나 씨는 <팩토리 걸>과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그래서인지 블록버스터 여전사 이미지가 생소했다. 시에나: 나도 솔직히 내 자신이 이런 역할에 어울린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그래서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많이 위축됐던 것 같다. 그래도 도전할 수 있는 기회이며 재미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순수한 엔터테인먼트 중심의 작품을 할 수 있는 첫 기회이기도 했고. 솔직히 차별화된 여전사 이미지를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이런 역할은 안젤리나 졸리와 같은 배우가 훨씬 더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영감을 얻기도 했다.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다양한 무기를 다루고 무술을 배우면서 악역을 연기한다는 건 하나의 도전이었고 이번 영화가 그런 도전을 실제로 소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채닝 씨는 <스텝업>을 통해 많은 인지도를 얻었다. 이런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건 그런 인지도를 어느 정도 인정받은 결과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채닝: 리스크가 적은 소규모 작품을 주로 해왔던 내가 이런 대규모의 영화를 하게 됐다는 건 내게도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내 커리어에서 봤을 때 좋은 기회이자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이걸 기반으로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만큼 첫 시발점이 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믿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기회가 왔다. 연기를 하게 될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에 빠지게 됐고, 좋은 시기에 좋은 작품을 만났다. 이 작품 자체가 로또다. (웃음) 그런 만큼 후속편이 나와서 캐릭터를 이어나갈 수 있길 바란다.
바야흐로 6번째 시리즈, 해리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배우며 모험을 거듭하다 호그와트 6학년 상급생이 된 해리포터는 이제 시리즈의 졸업 관문까지 나아간다.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이하, <혼혈왕자>)는 결전을 향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다. ‘트리위저드’ 대회라는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던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비극적 엔딩 이후로 급격하게 다크 판타지로 선회하기 시작하던 시리즈는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과 <혼혈왕자>에 이르러 더욱 어둡고 예민해진 낯빛을 드리운다.
사실 <해리포터>시리즈를 영화화한다는 건 까다로운 일이다. 150여분의 긴 러닝타임을 투자한다 해도 따라잡기 어려운 스토리의 절대량을 줄여나가면서도 긴밀한 흐름을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해리포터>가 큰 사건의 맥락 외에도 아기자기한 소품적 에피소드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시리즈란 점에서도 서사의 여백 자체가 영화적 손실이 될 수 있다는 건 영화화 작업의 난관 중 하나에 가깝다.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짧은(!) 137분의 러닝타임을 투여했던 <불사조기사단>이 원작의 하이라이트 영상 편집본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을 얻었던 전례를 떠올린다면 전작에 이어 다시 한번 <혼혈왕자>의 연출자로 낙점된 데이빗 예이츠가 메가폰이 아닌 마법 지팡이라도 쥐고 있기를 바라는 심정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불사조기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혼혈왕자>에도 150여분 이상의 러닝타임이 할애됐지만 분명 원작이 지닌 미니멀한 장점들은 텍스트를 이미지로 선별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인 희생양이 된 것임에 틀림없다. <혼혈왕자> 역시 <해리포터>의 영화화 작업의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선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혼혈왕자>는 서사의 선별이란 측면에서 좀 더 과감한 선택이 뚜렷한 작품이다. 부분 3D로 제작된 <혼혈왕자>는 도입부부터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선사하며 원작의 서사를 의식하지 않은 듯 호기롭게 출발한다. 물론 <혼혈왕자>은 온전히 원작소설을 밑그림으로 두고 완성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단지 원작의 서사를 따라가며 작은 맥락들을 절제하는 단순 작업방식에서 벗어나 필요에 따라 서사의 생략과 도치, 혹은 접합을 통한 재구성의 방식으로서 영화를 원작의 동의어가 아닌 유의어 수준으로 격상시킨다. 지금까지 시리즈가 소모해왔던 마법적 세계관의 눈요기가 더 이상 <혼혈왕자>의 장기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듯 이미지의 과장을 절제하고 세계관의 진전에 주력한다.
8년 동안 여섯 번의 시리즈를 거듭한 만큼 <해리포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몰라보게 성장한 아이들이다. 성숙하고 농밀한 로맨스까지 연출이 가능해졌을 정도로 <해리포터>는 아동들의 모험담에서 2차 성징 판타지로 무르익었다. 더 이상 풋풋한 성장판타지가 아닌, 다크 판타지의 색채를 자랑한다. 그만큼 채도가 낮아진 <혼혈왕자>는 (지금까지 영화화된)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불길하고 암담한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상 마지막 관문으로 가기 위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는 <혼혈왕자>는 궁극적으로 서사적 연결고리의 기능적 목적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를 테면 어느 정도 전작들을 복습하고,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염두에 둔 감상자로서 상영관을 찾을 때 만족도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란 의미다. 그만큼 원작의 흐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감상적 호의를 베풀 공산이 크다. 원작의 흐름을 잘 이해한 이들에게 <혼혈왕자>는 이유 있는 여운이 되겠지만 그와 동떨어진 관객에겐 어지러운 미로가 될 것 같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와 맞서야 하는 해리포터의 운명은 현재진행형에서 완료형으로 달린다. 해리포터도, 론(루퍼트 그린트)도, 헤르미온느(엠마 왓슨)도 자랐다. <혼혈왕자>는 성숙한 아이들의 2차 성징을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혼혈왕자>의 볼거리는 속도감을 자랑하는 ‘퀴디치’경기도, 번쩍거리는 신비한 마법지팡이도, 기억을 재생하는 ‘펜시브’도, 심지어 ‘어둠을 먹는 자’들과의 긴박한 결투도 아니다. 마법부의 기억상실 주문에 걸리는 ‘머글’이 아닌 <해리포터>의 충직한 관객들에게 <해리포터>의 세계는 더 이상 낯선 볼거리가 아니다. 이는 분명 <해리포터>가 선사하는 이미지가 그만큼 놀라운 볼거리로서 위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혼혈왕자>의 관건은 로맨스다. 더 이상 애들이 아닌 호그와트의 상급생들은 마음껏 키스하고 부둥켜 안으며 연애를 즐긴다. <혼혈왕자>에서 스펙터클의 공백을 대체하는 건 농밀한 로맨스의 예감이다. 성장한 아이들은 암울해지는 세계 속에서도 성징(性徵)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며 나름의 생기를 확보한다.
책 한 권 분량의 절반 가량을 덜어내며 비극적 의미를 강화한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질풍노도의 운명론은 더욱 비장해질 가능성이 크다. 2편으로 나눠질 마지막 스크린 시리즈는 사실상 <혼혈왕자>를 포함한 트릴로지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혈왕자>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서사의 서막으로서 제 기능에 충실한 작품이다. 적절한 변주를 통해 서사를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 나름대로의 몫을 해낸다. 다만 시각적 묘미의 감소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에게 2시간 30분은 지루한 여정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 결국 감상의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대한 문제는 애정과 관심의 무게를 얼마나 얹어놓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이제 <해리포터>가 애들이 보기엔 어둡고 무거운 시리즈가 됐다는 것. 더 이상 어리다고 놀릴 수 있는 성장 판타지가 아니란 말씀.
관능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노출뿐이라 생각한다면 빈곤한 상상력을 탓할 필요가 있다. 직관적인 이미지는 자극의 잠재적 성과를 되레 반감시킨다. 선명한 이미지의 관찰보다도 불투명한 실루엣이 발생시키는 상상력이 감상적 욕구를 자극하곤 한다. 이미지가 발생시키는 자극의 충만보다도 잠재적인 욕구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보다 매혹적이다. 여인의 나신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관능적인 티저포스터가 눈길을 사로잡는 <오감도>는 분명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에로티시즘의 상상을 예상케 한다.
변혁의 <his concern>, 허진호의 <나 여기 있어요>, 유영식의 <33번째 남자>, 민규동의 <시작과 끝>, 오기환의 <순간을 믿어요>까지, 에로스라는 주제에 차례로 내걸린 다섯 개의 시선을 내건 옴니버스 <오감도>는 분명 적확한 기대감을 부르는 기획영화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한 여인에게 이끌린 남자, 섹스리스의 일상 속에서 비극적 예감을 참아내는 부부, 서투른 신인배우와 관록 있는 중견배우의 충돌과 이를 조율하는 명감독의 기이한 삼각관계, 남편의 부음과 외도 사실을 함께 알아버린 아내의 미스터리한 동거, 발랄한 10대들의 속을 알 수 없는 파트너 체인지. 다섯 편의 작품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장르적 탈을 쓰고 에로스의 수위를 오르고 내린다.
로맨틱코미디, 멜로, B급호러, 미스터리, 하이틴로맨스, 각기 다른 장르의 탈을 쓴 <오감도>는 저마다 야심적인 방식으로 개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오감도>는 작품을 거쳐나갈수록 방식의 차이에 따른 자극적 성취를 선보이기보다 권태를 축적해나간다. 옴니버스라는 형식으로 내걸린 다섯 편의 작품은 분명 에로스라는 관능을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공유하고 있으나 다섯 편의 작품은 어느 하나도 이를 관통하지 못한다. 차분한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캐릭터의 심리적 흐름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에피타이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저마다 다양한 장르적 욕망을 선보일 뿐, 결과적으로 권태를 쌓아나간다. 저마다 좀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각인시키지 못하는 결과물이 연속적으로 전시된다.
옴니버스는 다양한 시선을 통해 하나의 주제를 발견한다는 귀납적 묘미와 하나의 주제로 다채로운 해석을 만끽할 수 있다는 연역적 묘미가 가능할 때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해진다. <오감도>는 옴니버스의 다양성을 악재로 몰고 나가는 두서 없는 기획이다.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지 못하는 동시에 저마다 하나같이 피곤한 감상적 결과를 부른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기대감은 파격이란 단어를 낯설게 만드는 이미지와 창의적 해석과 무관하게 장르적 과욕에 사로잡힌 스토리텔링의 거듭된 난국 속에서 빠른 속도로 낡아간다. 도전적이라기 보단 과욕적이며 창의적이라기 보단 자만에 가깝다. 짧은 단편들이 마치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암담해진다. <오감도>는 에로티시즘이 증발된 에로스의 만찬이다.차린 건 많아 보여도 좀처럼 잡히는 게 없다. 그저 티끌처럼 쌓여나가는 권태가 끝내 태산처럼 쌓여 식욕을 감퇴시킬 따름이다.
중년을 넘긴 나이에도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는 문학교수 데이빗(벤 킹슬리)는 매력적인 대학원생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를 통해 늦깎이 사랑에 들어선다. 자신의 감정이 원나잇 스탠드로 해소될만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야기하는 권력의 우열관계에서 아래 놓인 자신을 자각한다. 자신이 홀로 남게 될 때마다 불안과 초조를 느낀다. 소유욕이 강해진다. 그 불안은 결국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 감정을 좌초시키도록 스스로를 유도한다. <엘레지>는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작품이다. 기품 있는 영상 속엔 우아한 관능적인 클로즈업은 우아한 곡선 위로 흐르고 그 여백마다 서정적인 격랑이 찬찬히 모이고 흩어진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야기되는 고독과 슬픔이 고요한 침묵을 통해 드러나고 상실과 죽음의 공포가 차분한 이미지로 다가와 머무른다. 뒤늦게 자신의 마음이 쓸쓸함으로 텅 비었음을 깨닫게 된 남자는 그 공허함을 통해 체감한 진심의 무게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일정한 범위를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메트로놈처럼 그저 반복적인 만남과 이별 속에서 살아가던 남자는 비로소 사랑을 갈망하고 정착한다. 감각적인 언어, 감미로운 멜로디, 감성적인 이미지, 감정적인 연기, <엘레지>를 이루는 모든 것들은 슬픔을 통해 허물어질 듯 삶을 이룬다. <엘레지>는 슬픔을 노래하는 시도, 슬픔을 연주하는 악장도, 그 너머를 갈망할 때 더욱 애잔한 법이라는 걸 잘 아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