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초반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
아, 지루했다는 말?
지루하다기 보단 판곤의 행위가 너무 흉악해서 보고 있자니 끔찍한 기분이더라.
죽이는 걸 질질 끄니까 그런 면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감독님도 기자간담회에서 말했잖아. 나는 한 사람을 죽여도 바로 죽이지 않고 질질 끌면서 죽인다고. (웃음)
촬영 기간이 얼마나 됐나?
한달 열흘 정도 찍었나. 10억도 안 되는 예산으로 찍은 영화인만큼 촬영도 빠듯했다.
상업영화로 치면 저예산인데 그만큼 감안해야 할 현장의 열악함이 있었을 것 같다.
예산이 적다는 게 영상으로 드러난다는 건 내 입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다만 배우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있더라. 가령 현장에서 시간적 여유가 없어지는 상황이 생기니까 감독님과 디렉션을 주고받을 만한 여유가 생기지 않았고, 캐릭터를 충분히 잡아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기도 힘들었다. 추가적인 투자까진 바라지 못해도 시간이라도 더 있어서 커트라도 더 살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아서 아쉽다. 사실 요즘은 차라리 홍보비조차 아껴서 영화에 돈을 들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싶은 생각마저 든다. (웃음)
많이 걱정되나 보다.
기대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있잖아. 스케일이나 주연배우의 캐스팅, 감독의 브랜드, 아니면 시나리오가 좋았다는 소문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가 그 기대감에 일조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실종>은 예산 규모에 비해 너무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질 수 있으니까. 물론 내 걱정이 너무 앞서간 것도 있다. 어쩌면 내가 이런 영화를 찍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시나리오가 영화보다 더 세다고 들었다.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이게 스릴러 영화 시나리오구나 싶었다. 솔직히 나는 머리가 꽉 찬 배우는 아니다. (웃음) 아직 내가 시나리오만 보고 영화를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시나리오를 접해본 것도 아니고. 그냥 연기해보면 잘 할 수 있겠다, 이런 단순한 계기를 통해 캐릭터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멋모르기 때문에 항상 그 씬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일 테고.
잔혹한 장면이 많은데 이미지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
지난 번 기자간담회에서 말했지만 스릴러 장르에서의 역할이 여배우에겐 쉬운 기회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스릴러 영화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김성홍 감독님이 나를 찾았다. “자현아,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들 건데 너를 염두에 뒀다. 다만 상황이 조금 힘들지도 모르지만 참여해줬으면 좋겠다.” 열악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로 인한 판단은 없었다. 그저 스릴러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감독님을 신뢰할 수 밖에 없었고, 시나리오가 표현한 장면들이 과연 어떻게 묘사될지를 생각하기 급급했지. 이렇게 잔인한 걸 찍고 나면 이미지는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은 못했다.
육체적인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예산이 없는 환경에서 그냥 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지. (웃음) 몸이 다치거나 그런 건 힘든 일이 아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엔 그런 건 잊어버린다. 촬영하는 동안엔 모른다. 멍이 들어도 아픈 줄 모르고 그냥 맞고 있지. 물론 컷하고 나면 아파서 난리 나지. 그런데 촬영 끝나고 숙소 들어가면 공허함이 굉장히 심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그러면서. 풍족한 상황까진 아니어도 세팅이 되면 충분한 의사소통을 하면서 시간적인 여유도 벌고 좀 더 괜찮게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런 상황이 못됐으니까. 내 스스로 부족함을 너무 많이 느낀 거지. 감독님께서 기자간담회에서 배우들에게 고맙다고 말씀하셨던 건 아마도 그런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힘들어 하지 않고 몸소 열심히 해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였을 것 같다.
대부분의 사건이 미니멀한 한 공간에서 벌어지고 영상적 기교가 최대한 배제된 만큼 배우에게 시선이 집중될 가능성이 큰 영화다. 그만큼 배우의 연기가 중요한 영화이긴 하다.
난 묻어간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겸손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잘한다기 보단, 내가 절반 정도를 만들어 가면 현장의 소품이나 감독님의 연출, 상대배우의 느낌으로 나머지가 채워진다는 말이다. 현장에서 받는 기운으로 내가 그 캐릭터에 묻어가거나 변해갈 수 있다. 그런데 <실종>에선 그럴 수 없었다. 말한 바대로 시선이 갈만한 소품이나 기교가 없는 거다. 그냥 카메라 하나 놓고 그 앞에서 연기하라는 거지. 그 카메라 앞에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서 <미인도>같은 경우엔 가채라도 있었지. 덕분에 이렇게만 해도(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 동작 하나로 느낌이 변한다. 그냥 방안에 앉아있어도 6천만 원짜리 자개병풍이 최고의 기녀라는 포스를 만들어주거든. 그 방안에 세팅된 가구들이 돈으로 3억 5천 원이었다. 그런 백이 있으니까 내가 고개만 살짝 돌리고 조명만 비춰도 특별한 자세가 발생한다. 하지만 <실종>은 정말 그야말로 눈빛만으로 뭔가를 표현해야 되니까 아직 단련되지 않은 나 같은 배우로서는 힘든 작업이었지. 예산이 적다거나 빨리 찍어야 해서 힘들다기 보다는 그만큼 배우가 해야 할 몫이 많아서 부담이 컸다. 그런데 (손가락을 살짝 벌리며) 내 그릇은 요거밖에 안됐던 거지.
문성근 씨가 지독하게 악랄한 연기를 보여줬다. 자극을 얻었을 것 같다.
그나마 내가 의존할 수 있는 장치는 문성근 선배님의 눈빛이었다니까. 다른 데 의존할 것 없이 그 눈빛만 보고 연기했다. 일전의 인터뷰에서 문성근 선배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무서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건 범인으로 변신해서 연기하는 문성근 선배님의 눈빛이 살인마처럼 무섭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단 내 기가 빼앗길 만큼 눈빛이 강렬해서 연기하는 게 무섭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상대에게 짓눌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의미일까.
내가 만약 그냥 당하는 입장이었다면 상관없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만약 뭔가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호흡을 맞춰가는 역할이라면 서로 설정을 맞춰가며 호흡을 나누는데 이건 철저하게 피해자와 범인이니까 연기도 대결처럼 펼쳐진다. 그것도 50대가 넘은 대선배 앞이니까. 게다가 남자 가해자와 맞서는 여자 피해자로서 끝까지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한 기싸움이 힘들더라.
본인이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영화가 무너지는 셈이니까.
문성근 선배님은 그냥 편안하게 계셔도 아우라가 있으신 분이다. 카메라가 돌면 무슨 칼라렌즈라도 끼는 것 같더라. 눈빛이 이상해져. (웃음) 순간적으로 내가 준비되지 않았다 느껴도 앞에서 눈빛이 확 변해버리니까 나도 같이 긴장하게 됐지.
상대배우의 중요성을 확실히 깨닫게 된 영화였을지 모르겠다.
상당히 중요하더라.
<사생결단>의 지영이나 <미인도>의 설화는 겉으로 강한 척하지만 안으로 여리고 쉽게 무너지는 여자였던 것과 달리 <실종>의 현정은 안에서부터 강한 여자다.
요즘 인터뷰를 하면 이런 질문을 받는다. ‘계속 세고 강한 캐릭터를 맡는데 의도한 바냐.’ 마약 중독자나 팜므파탈 기녀, 색깔이 강한 느낌이긴 했다. 하지만 캐릭터 자체가 딱 만들어져 있는 인물이니까 그걸 내 식대로 이리저리 표현해내는 것에 불과했지. <실종>의 현정은 평범한 여자다. 외유내강이지.
현정은 동생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강해지는 여자다.
피가 당기는 친동생이니까 무언가에 끌려가는 거다. 덜덜 떨면서 창고 문을 열어보는 게 아니라 그냥 본능으로 가는 거지. 이런 가족애에 대한 설정을 내가 납득했기 때문에 후반부에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던 거 같다. 만약 동생이 아니라 딸이었다면 더했겠지. 예를 들어 <세븐 데이즈>같은 영화나, 올해 개봉한다는 <마더>처럼 자매가 아니라 부모라면 더 강해졌을 거다.
영화에서는 자매 외에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없다는 추측이 가능한데.
원래 시나리오에 그런 설정이 언급된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어필하고자 노력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관객에게 추측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게 가능할 때 현정의 모성애적인 감정에 확실히 동의할 수 있다. 그만큼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렇게까지 많은 생각을 하면서 연기하는 배우는 아니라. (웃음) 농담이고, 한 씬을 통한 설명 정도로 드러내려 했던 거 같다. 김성홍 감독님은 직접적인 설명을 많이 배제하는 스타일 같다. 예를 들어 홍감독의, ‘그 엄마보다 더 무섭다는 언니?’ 이런 대사 한마디로 넘어가는 식이지. 그리고 부모님 슬하에 있는 자매라면 동생이 늦게 들어오지 않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데, 부모가 없기 때문에 안 들어오면 직접 전화해서 꾸중해야 하는 거고. 그리고 동대문에서 일하는 장면을 통해 억척스럽게 동생을 뒷바라지 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 현아도 자기가 의지할 곳은 언니밖에 없다는 걸 아니까 다툰 뒤에 다시 전화로 사과하면서 애교도 떨고, 언니에 대한 의지가 큰 거지.
반대로 동생을 납치한 범인이 아니라 그냥 납치범이라면 같은 상황이라도 이해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가 동생을 납치하고 죽인 범인한테 다시 납치당하는 언니가 아니라 그냥 납치를 당했다면 그냥 전세홍 씨처럼 공포에 휩싸이는 역할만 납득할 수 있었겠지. 그런데 판곤이 내 동생을 죽인 범인이라 생각하니까 나도 공포보단 분노가 일더라. 저 인간이 나를 어떻게 할까, 이게 아니라 내 동생도 이렇게 당했겠지 싶으니까 미치는 거다. 범인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돌아버리는 거지.
그런 감정은 사실 정말 당해보지 않고선 알 수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런 감정을 납득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 같다.
힘들었던 건 과연 정말 이런 일을 당한 사람들은 어떨까 싶었던 거지. 물론 영화에서는 그 느낌으로 연기하려 했지만 진짜 그런 가족들의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이상 모르잖아. 내가 감히 어떻게 그 심정을 대변할 수 있겠어. 마지막에 감형을 유도하기 위해서 정신병을 주문하는 변호사에게 던지는 대사는 그런 고민에서 나온 거다. 혹시 딸 있냐고.
실질적으로 그 대사의 객체는 관객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감정을 함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한마디가 뭘까, 감독님과 상의한 결과 얻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이 잘 살려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변호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관객에게 던지는 거지. 우리영화에 엔딩은 없다. 영화의 이야기는 마무리됐어도 어딘가 다른 곳에선 똑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심지어 지금 인터뷰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지. 난 그저 스릴러 영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정말 현실적인 비극과 내 주변의 아픔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여러 가지로 자아를 성숙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실제로 흉악한 범죄가 많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실종>은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여자들은 그런 범죄 앞에서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여자로서 느끼는 공감대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공감대까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믿었고, 영화를 찍을 때만 해도 이건 정말 영화니까 가능한 상상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단지 스릴러 영화를 찍은 것 뿐인데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영화가 섬뜩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영화가 돼버렸다. 사실 내가 강호순 사건에 대해선 잘 모른다. 내가 드라마나 예능 프로는 잘 봐도 뉴스는 잘 안 보거든. (웃음) 그래서 큰 사건만 사람들을 접해서 듣곤 하는데 연쇄살인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나서 느낀 건 정말 무섭다는 것보단 살해당한 분들 가족들은 어떡하나 싶은 마음이었다. 어쩌면 <실종>을 찍은 뒤 생긴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그 가족들은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아픔이겠지.
영화에서나 벌어질만한 사건이라 믿었던 일이 현실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더욱 끔찍할 수 있겠다. 어쩌면 영화보다 더 끔찍한 건 현실인 셈이랄까.
예전에 감독님께서 <실종>의 모티브를 말씀해주셨다. 우리나라같이 땅덩이도 좁고 호구 조사도 잘 된 나라에서 몇 년 동안 연락이 안 되는 여자들은 다 어디 있을까, 라는 거다. 거기에서 시작됐다고 하더라. 본의 아니게 연쇄살인사건이 터졌고 우리가 현실에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를 상업적으로 쓰려고 했던 건 아닌 거지. 그래서 감독님께서 그런 부분에 스트레스를 받으셨던 것 같다.
1996년에 데뷔했으니 <사생결단>으로 신인상을 수상했던 2006년은 데뷔한 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김지수 선배님도 <여자, 정혜>로 13년 만에 신인상 받지 않았나? 어쨌든 참, 멀리도 돌아왔다.
배우로서는 꽤나 겸연쩍은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데뷔 10여 년 만에 신인상이라니.
나에게 있어서 상이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이건 겸손도 아니고, 경솔도 아니다. 난 단순히 그 시상식에 참여하는 여배우 중 하나라는 게 좋더라. 왜냐면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머쓱하거나 불편하지 않다고 느껴지니까. 내가 노미네이트 돼서 주목을 받았고, 어쩌다 보니 상까지 받았을 뿐이다. 워스트 드레서라도 내가 레드카펫에 설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 좋았다.
그래도 연기자로서 처음으로 받는 상이었는데.
이런 얘기를 언제 했는지 모르겠지만 또 어디서 말 실수 하느라고 했을 거다. (웃음) 우리나라 시상식이 누가 상을 받고 레드카펫에서 배우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에 주목하는 것보단 영화인의 축제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스탭들도 레드카펫을 밟을 수 있고, 누군가가 상을 받으면 현장에서 함께 했던 팀들이 다 같이 무대에 올라가서 축하도 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 아카데미 시상식의 할리웃 스타들도 누구 하나가 상 받으면 그 팀들이 무대에 나와서 축하해주잖아.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현장에서의 감동이 별로 없는 것 같더라. 그 자리에 있는 게 머쓱한 건 아니었지만 시상식을 끝내고 돌아오니 단순히 그냥 스케줄 하나 끝낸 기분이었다.
그래도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얼마 전 백지영 씨가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말하더라. ‘사랑 안 해’로 다시 주목 받게 됐을 때 스스로 자신이 잘 견뎌왔다는 걸 칭찬해줬단다. 그리고 예전에 한번 겪어봤듯이 지금 받고 있는 이 사랑이 거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그 감정에 쉽게 휘말리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 나도 만약에 연기 시작하고 한 2~3년 만에 신인상을 받았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눈물, 콧물을 흘려가면서 좋아했을지 모르겠는데 한 10년 정도가 흐른 뒤라 그런지 위로를 얻는 기분이었다. <사생결단>이란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건 내 연기적 목마름에 어울리는 적재적소와 같은 작품을 만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생활 탤런트로 타협하지 않고 도전해온 내 인생에 대한 위로랄까? 내가 혼신을 다했던 연기에 상을 준다는 건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한 노고가 지금까지 잘 다져오려 했던 내 인생에 대한 칭찬이란 느낌이었지.
그런데 어째서 느낌이 없었다고 말하는 건가?
만약 내가 이 상을 받을 당시 내 힘든 여정을 같이 보냈던 사람들이 앞에 있었으면 눈물이 났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 레드카펫을 밟는 자리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나 탑배우들이 앞에 앉아 있는 가운데 수상을 하게 되니까 그 자리가 낯설고 편하지 않았다. 그냥 얼떨떨한 느낌이었지. 그런 의미다.
그 수상이 인생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진 않았을까. 인생을 연기에 걸어도 될 것 같은 일말의 확신이라도 말이다.
부담과 자신감이 함께 오는 거 같다.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해내면 인정을 받게 되는구나 싶은, 보답 받는 기분. 그렇게 칭찬받는 기분을 느끼고 내가 또 다시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원동력이 자신감이겠지. 반대로 이렇게 상을 받았으니 다음엔 얼마나 더 주목을 하실까 싶은 부담도 생긴다. 다른 배우들이야 예쁘니까 상관없지만 난 연기라도 잘 해야 먹고 사는데. (웃음)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 <실종>찍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지. 이렇게 자꾸 말하니까 너무 변명 같지만 <사생결단>이나 <미인도>보다 예산이 적고 그만큼 열악하다 보니까 오히려 그 때보다 더 잘해야 되는데 쉽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놓치고 가는 게 많아서 큰일났다 싶더라.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촬영 내내 그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건가?
작품이 끝나가는 와중에 문득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상황이 좋으면 누가 연기를 못해. 힘들고 열악한 상황일수록 끝까지 페이스를 놓치지 않아야 진정한 배우인 거지. 그래야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거지. 완벽하게 세팅된 곳에서 누가 연기를 못하겠어.” 크랭크업 이틀 남겨놓고 깨달았다. 이미 찍을 거 다 찍어버렸는데. (웃음) 정말 내가 아직도 멀었구나 싶더라.
그래도 느낀 바가 있다는 건 분명 긍정적인 계가가 된다.
부딪혀봐야 내게 부족한 걸 알지, 백날 생각해본다고 아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 예를 들어서 내가 마라톤 달리기를 한다면 몇 미터까지 달릴 수 있는지 뛰어봐야 안다. 난 1km는 거뜬해,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뛰어보니까 800m밖에 못 뛰는 아이였다. 그럼 오케이, 웨이트를 더 하자. 그렇게 1km짜리 작품을 할 수 있는 나를 만들자. 800m의 한계를 넘어서 나머지 200m를 채우자고 생각했지. 이렇게 문제를 발견해나가면서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얻었다.
(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