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랜드의 피터팬이 아니라면 깨달아야 한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음을. 제임스 딘이나 리버 피닉스처럼, 죽음만이 젊음을 보존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죽지 않았다. 그의 젊음도 저물어간다. 하지만 그는 성장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남자로서 중후한 삶을 피워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신중하게 말했다. “올해는 내 스스로에게도 정말 조심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난 35살이 됐고 많은 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가끔은 너무 심각하다 싶을 정도지. 내가 다음으로 하게 될 무엇이라도 확인해보고, 나를 위해 진짜 옳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다다른 곳을 보게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어느 덧 30대 중반의 남자가 됐다. 디카프리오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젊은 관객들에게 그의 현재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디카프리오의 현재란 분명 놀랄만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1974년생인 디카프리오는 1990년대의 출발과 함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아역배우들의 그것처럼 디카프리오의 경력의 시작도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다. 몇 편의 TV시리즈나 시트콤 등에 출연한 디카프리오는 번번히 영화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있었다. 당시 비슷한 경험을 반복해 나가던 토비 맥과이어와의 인연을 맺게 됐다는 것 정도가 뒤늦게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할까. 게다가 첫 스크린 출연작이었던 B급 호러영화 <크리터스3>(1991)는 주목을 얻지 못한 채,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했다.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경력은 1993년에 찾아왔다. 수많은 경쟁자들이 참여한 오디션을 통과한 디카프리오는 <디스 보이스 라이프>에서 로버트 드니로와 알란 버킨과 같은 대배우들과 한 공간에서 연기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 <길버트 그레이프>에 출연했다. <디스 보이스 라이프>가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자양분과 같은 작품이라면 <길버트 그레이프>는 디카프리오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만든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니 뎁과 형제로 출연한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디카프리오는 정신질환이 있는 동생을 연기하며 인상적인 평가를 얻어냈고,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불과 열 아홉 살의 나이였다. 진 해크만을 비롯해 샤론 스톤, 러셀 크로우가 출연한 서부극 <퀵 앤 데드>(1995)는 디카프리오에게 하이틴 스타로서의 운명을 제시한 작품이다. <퀵 앤 데드>에서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소년은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맞서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반쪽 짜리 오이디푸스나 다름없었다. 소년의 여린 얼굴 위로 우수에 찬 눈동자가 덧씌워질 때, 캐릭터의 비극적인 운명은 보다 낭만이란 수식어를 얻는다. 그 뒤로 디카프리오는 혈기왕성한 청년의 비극적인 무용담과 로맨스를 본격적으로 활보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출연했던 <토탈 이클립스>에서 아더 랭보 역할에 내정된 건 리버 피닉스였다. 하지만 리버 피닉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그 빈자리는 디카프리오의 것이 됐다. 이는 리버 피닉스의 적자로서 디카프리오가 선택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바스켓볼 다이어리>(1995)는 하이틴 스타로서 디카프리오의 운명을 온전히 다지는 작품이었다. 뉴욕 출신의 뮤지션이자 시인이기도 한 짐 캐롤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바스켓볼 다이어리>는 가난과 폭력에 갇힌 10대 소년들의 비극적인 무용담을 담아낸 수기다. 이 작품에서 디카프리오는 특유의 반항아적인 기질과 예민한 감수성을 마음껏 분출시킨다. 하이틴 스타로서 디카프리오의 절정을 이룬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1996)과 <타이타닉>(1997)이었다. 특히 21세기까지도 유효한 <타이타닉>의 기록적인 흥행은 곧 ‘레오 매니아(Leo-mania)’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킬 정도로 전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렀다. “<타이타닉>은 완전히 내 인생을 바꿔놨다.” 디카프리오의 말처럼 <타이타닉>은 그의 인생을 풍랑으로 밀어넣었다. “운전하거나 걸어다니는 모든 일상의 공간에서 갑자기 너댓명의 파파라치들에게 뒤쫓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됐다. 내가 갔던 어떤 공간에서, 누군가는 나에 관한 이야기가 새어내보내고 있었다.” 인기는 기회라는 백지수표와 같다. 한없이 누릴 수 있지만 그 끝을 예감하기란 어렵다. 디카프리오는 그 순간에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20대 중반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무엇이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서 다른 경험을 얻을 것이다. 나는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게 확실히 배울만한 경험이었다. 그 경험은 내가 배우가 되는 결정에 보다 집중하게 만들었다.” <타이타닉> 이후, 알렉상드로 뒤마의 고전 <삼총사>에 바탕을 둔 <아이언 마스크>(1998)에서 출연했던 디카프리오는 뉴 밀레니엄을 맞아 모험을 감행한다. 대니 보일의 <비치>(2000)를 선택한 것. 심지어 디카프리오의 자발적인 지원으로 당초 캐스팅에 내정됐던 이완 맥그리거가 밀려났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2000년의 시작과 함께 디카프리오는 엄청난 혹평을 감당해야 했다. 심지어 태국의 환경단체로부터 생태계 파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영화사는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떠나 디카프리오의 선택은 그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어떤 욕망을 짐작하게 했다. 그 욕망을 해소해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조력자가 등장했다. 마틴 스콜세지였다. “그는 강요당하는 것처럼 매우 이상한 통과의례를 관통해냈다.” 디카프리오와 함께 <갱스 오브 뉴욕>(2002)에 출연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말처럼 디카프리오에게 <갱스 오브 뉴욕>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나는 대단한 너비와 디테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경험이었지.” 디카프리오의 말처럼 <갱스 오브 뉴욕>은 디카프리오의 욕망을 발현시키는 관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갱스 오브 뉴욕>은 디카프리오에게 스릴러의 거장이자 세계 영화사의 산증인 마틴 스콜세지와의 만남을 주선한 작품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낳았다. “그와 함께 일한다면 이걸 알아야 한다. 그저 모든 시간 동안 끝장을 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하지만 하루의 끝에 다다르면 그의 언어는 금처럼 귀중해진다. 그가 당신의 캐릭터를 위해 지켜본다는 것이 영화를 보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신뢰해야 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는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온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소년의 고독을 벗어나 진짜 생존을 위한 혈투로 내던져진, 일종의 피비린내나는 성인식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디카프리오가 로버트 드니로를 잇는 스콜세지의 적자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비에이터>(2004)와 <디파티드>(2006), 그리고 최근작인 <셔터 아일랜드>(2010)까지, 디카프리오는 스콜세지의 남자에서 스콜세지의 조력자로 성장해 나갔다. 스콜세지는 디카프리오에게 배우로서의 삶에 거대한 이정표가 된 인물이나 다름없다. <갱스 오브 뉴욕> 이후, 디카프리오의 행보는 심상찮은 것이었다. 스콜세지의 네 작품을 비롯해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과 에드워드 즈웍의 <블러드 다이아몬드>(2006), 리들리 스콧의 <바디 오브 라이즈>(2007), 그리고 샘 멘데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2009), 그리고 현재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셉션>(2010)까지, 그는 지금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선망하는 최전선에 선 배우다. 동시에 최근 그의 행보는 과거 하이틴 스타로서의 경력을 온전히 지워버리는 과정에 가깝다. 특히 현재의 디카프리오를 보여주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그는 스콜세지의 세계를 채우는 구성원이 아닌, 그 세계를 장악하는 표정을 구축해내고 있다. 폐쇄적인 인간의 내면을 심도 깊은 서스펜스와 너른 페이소스로 버무리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디카프리오는 스콜세지가 창조한 혼돈의 세계관을 융용시키는 발화점이자 최고의 연기적 화력을 구사한다. 또한 스콜세지의 새로운 신작으로 예정된 루스벨트에 관한 영화에서도 디카프리오를 보게 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고 한다. 스콜세지 역시 디카프리오를 통해 새로운 영화적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곳은 어디나 가난하고 깨끗한 물이 충분하지 않지만 그들은 믿을 수 없을만큼 놀랍게도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 서구세계가 가능한 한 원조를 계속해 나가는 건 값어치 있는 일이다. 그것이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2004년부터 영화 제작에 참여해온 디카프리오는 2007년, 다큐멘터리 <11번째 시간>을 제작하고 직접 나레이션까지 도맡았다. 지구의 파괴와 환경의 오염에 관한 진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그의 관심사가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해 있음을 알렸다. 시에라리온에서 벌어지는 서구 회사의 착취적인 다이아몬드 채굴 횡포를 고발하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출연한 이후, “다이아몬드에 얽힌 갈등과 그 사건들에 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의 진심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는 최근 아이티섬의 구호를 위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2002년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디카프리오는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이 지나도 나는 내가 영화에서 연기한 다양한 캐릭터들을 돌아보며 여전히 이에 관해 말할 수 있길 바란다.” 2년을 더 기다릴 것도 없다. 그는 이미 그 꿈에 도달했다. 우수에 젖은 눈빛과 맨주먹을 쥐고 세상에 부딪혀 쓰러지던 소년의 사춘기는 지난지 오래다. 세월을 지나 소년을 벗고 남자를 입은 디카프리오는 지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현명한 배우로서 삶을 전진시키며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로 간다. (beyond 5월호 Vol.44 'STAR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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