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왔다. 피렌체를 보고 왔다. 다녀 오니 남는 건 흩어져 나갈 기억과 그 기억을 조금이나마 붙들어줄 사진들이더라. 사진은 많이 찍어서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고, 할 말도 너무 많아서 기록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당장 급한 마감이 끝나면 적당히 여행기를 정리하고 사진도 정리할 생각이다. 그냥 버려두고 방치하기엔 큰 경험이었고, 좋은 시간이었다.
내 인생에서 피렌체의 두오모를 오를 날이 올 거란 생각은 한 적 없다. 현실은 때로 꿈꾸지 못한 것들을 이루게 함으로서 무언가를 꿈꾸게 만든다. 그런 날이었다. 어쨌든 나는 다시 내 삶이 놓인 곳으로 돌아왔고 다시 복잡하게 살 것 같다. 꿈 같은 시간은 지났고 난 다시 현실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꿈은 유효하며 그 꿈이 있을 때 삶이 보다 나아질 수 있음을 알았다. 난 아직 어리고 짧은 사람이지만 이 짧은 여행이 내 자그마한 나이테의 동선을 조금은 넓혀주지 않았을까, 문득 기대하고 있다.
활강, 도약, 비행, 착지로 이뤄지는 스키점프의 과정은 기승전결의 과정이다. 높은 스키점프 대를 신속하게 미끄러져 내려온 뒤, 하늘로 붕 떠올라 멀리까지 날아가서 사뿐히 내려앉는 스키점프는 그 짧은 과정만으로 드라마틱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국가대표>는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의 실화로부터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추출하는 영화다. 동계올림픽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서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이 일궈낸 현실을 발판으로 삼아 허구를 도약시킨다.
유년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밥(하정우)은 ‘알파인 스키’미국국가대표 자격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온다. 방송을 통해서까지 어머니를 수소문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밥에게 그의 전력을 아는 방 코치(성동일)가 찾아와 국가대표 스키점프 선수 자리를 제안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나를 미국에 삼천만 원에 팔아 넘겼다”고 말하는 밥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방 코치의 답변이 정곡을 찌른다. “너도 이용하라고, 대한민국.”밥의 마음이 움직인다. 비로소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단이 위용(?)을 갖추기 시작한다.
밥과 함께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를 구성하게 되는 나머지 4명의 청년들은 저마다 굴곡이 깊은 사연을 품고 있다. 학창시절, 도 대표 알파인 스키 선수로 활약하며 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지만 약물복용사실이 발각되어 수상 자격을 박탈당한 흥철(김동욱)과고깃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권위에서억눌리듯 살아가지만흥철의 팀 동료로서그와 함께 메달을 박탈당했던 알파인 스키 선수 출신재복(최재환)이 선수단에 참여한다. 그리고나이든 할머니와 정신지체 증상이 있는 동생 봉구(이재응)를 돌보며 힘겹게 살아가지만 입영 날짜를받아들고 고민하는청년 가장 칠구(김지석)가 선수단에합류한다. 청년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두고 방 코치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군대를 면제받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기 위해서,심지어 한 눈에 반한 여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국가대표를 허락(?)한다.
스키점프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스키점프 국가대표로 발탁된 5명의 선수들은 세계와 맞서기 전에 열악한 국내 실정 안에서 고군분투한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노리는 무주의 스키점프 시설 공사장 주변에서 먼지를 마시며 러닝을 하거나 폐쇄된 놀이공원 후룸라이드를 스키점프대로 직접 개조하면서 연습을 거듭하는 모습은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 고생스럽다.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멤버들의팀워크를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개개인 간의 갈등이 도출되고 내분이 발생하며, 심지어외부에서 돌출된 알력으로 선수단이 와해될 위기를 연출하기까지 하는 국가대표단의 상황은 오리무중의 연속이라 구차하기 짝이 없다.
지나치게 쉽게 진전된다는 인상을 부여하는서사 속에서 헐거운 이음새를 종종 노출하곤 하는 <국가대표>가 뛰어난 이야기적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선수들의 개별적인 사연들은 지극히 상투적인 드라마의 개연성 위에 각자 자리를 잡은 채 계산적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저마다 착지하고자 하는 감정적 목표가 확실한 영화 속 사연들은 때때로 개연성을 보장할만한 경사각을 구축하지 못한 채 무리수를 두고 단독질주를 감행하며 각기 미끄러져 내려가는 탓에 전체적인 호흡을 어지럽힌다.결국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연들이 각자 내달리는 탓에 각자의 사연이 저마다의 지점에서 선전하지만 궁극적으로 총합적인 이야기의 스코어를 깎아먹는다. 그럼에도 그 스토리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건 상투적인 예감에 미묘한 오차범위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유머의 순발력과 실화라는 원천적 동력이다. 지극히 계산적인 진지함을 연출하곤 하는 사연을 유연하게 중화시키는 입담이 구사되고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끼워 넣는 배반적 설정이 상투성을 둘러싼 사건을 순발력 있게 대체한다.
가장 확실한 밑천은 실화다. 실화를 밑그림으로 허구를 덧칠함으로써 가산점을 획득하고 감점을 얻었지만 사실상 현실이라는 원색이 환기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그 모든 스코어는 무의미해진다. 비인기종목의 서러움과 지정학적 편견, 열악한 제반 조건을 이겨내고 올림픽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낸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압축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절대적 질량이 현실적 기반 위로 부피를 확보한 드라마의 허구보다도 효과적인 페이소스를 발생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악한 현실 자체가 품고 있는 페이소스의 자질이 스포츠 영화로서의 쾌감에 정당한 상승을 부여하며 허구에 가속력을 부여한다. 특히 <국가대표>는 스포츠 영화로서 앞선 어떤 전례보다도 탁월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스키점프 신은 앞서 덜컹거리던 드라마의 단점을 잊게 만들 만큼 압권의 쾌감을 선사하고 성기게 진전되는 허구 속에서도 서서히 숙성되던 마이너리티적 감수성을 일거에 폭발시킨다. 마치 스크린을 통해 스키점프 경기를 단체관람하고 있다는 착각을 부를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는 스키점프 신은 직선으로 내리 뻗은 스키점프 대를 타고 내리는 활강의 속도감과 도약의 쾌감, 그리고 비행의 체공감과 착지의 성취감을 고스란히 이미지로 구현한다. 스키점프 신의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감정적 오르내림을 선사하는 기승전결의 압축적 이미지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캐릭터들의 고군분투를 정당하게 보상하는 신이란 점에서도 매끄러운 인과 관계가 발견된다. 서사와 묘사의 연동이 매끄럽다.
실화라는 질량을 유지한 채 허구의 부피를 늘려나가고 그 가운데 느슨해지는 드라마의 밀도가 발견되지만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질량을 보존하는 실화의 묵직함이 영화적 감수성을 보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그랬듯, <킹콩을 들다>가 그것을 복기했듯, <국가대표> 역시 실화에 밑진 영화다. 유머가 적절히 곁들어진 신파를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 나열해도 궁극적으로 현실을 대변하는 자막 한 줄의 위력에 닿지 못한다. 여전히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5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엔딩의 한 줄 자막이 <국가대표>가 부지한 2시간 여의 러닝타임보다도 위력적인 울림을 전한다. 헝그리 복서에 대한 기억이 낡았을 뿐, 대한민국은 여전히 촌스러운 마이너리티의 신파가 산재하는 세상이다. 경제적 지표를 자랑스럽게 전시하면서도 먹고 사는 문제에 촌스럽게 매달리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스포츠 루저들을 양산하고 영화는 이를 착취한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 루저들을 ‘자랑스럽고 무궁한 영광’에 도매금처럼 팔아먹지 않는 <국가대표>는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공정한 스포츠 신파라 인정할만하다.
호수 위를 우아하게 유영 중인 백조는 부지런히 발을 젓는다. 겉으로 드러난 우아함은 실상 부단한 노력의 산물에 가깝다. 외모의 화려함에 가려진 내면의 절실함을 알아채기란 어렵다. 화려한 프로페셔널의 외양에 반해 그 자리를 동경하던 대부분의 초짜들은 가시밭길의 첫걸음을 체감하곤 한 바가지의 눈물과 한 대야의 땀을 흘리고서야 그 우아함의 정체를 파악하기 마련이다. 눈물과 땀을 먹고 자란 경험과 관록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진정한 프로로서의 신고식을 통과한다. 미운 오리새끼는 비로소 백조로 탈바꿈하는 노하우를 익히고 첫 번째 비행을 준비한다. <해피 플라이트>를 시작한다.
발랄한 소년, 소녀들의 도전을 담백하고 유쾌하게 담아낸 청춘물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야구치 시노부는 근작인 <해피 플라이트>를 통해 청년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선다. 싱크로나이즈를 위해 물장구치는 소년들과 유쾌한 박자에 몸을 흔드는 소녀들의 긍정적인 도전기는 유년 시절의 추억담처럼 밝고 투명하며 보는 이에게 관대한 감동을 선사한다.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만큼이나 긍정적인 기운이 넘치는 <해피 플라이트>는 두 전작보다 좀 더 전문직드라마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첫 비행이자 마지막 실전심사를 앞둔 가상 비행 테스트에서 바다에 추락해 진땀을 흘리는 부기장 스즈키(다나베 세이치)와 첫 승무원 비행의 설렘을 앞두고 지각과 실수를 반복하다 상사로부터 질책을 얻고 눈물까지 흘리는 에츠코(아야세 하루카)는 마치 미운 오리새끼와 같은 존재다. 성취보다도 실패를 먼저 체험하고 좌절을 경험하기 전에 학습을 먼저 거친다. 폼 나는 이미지 속의 만만치 않은 실체를 체감한다. 그러나 만회를 위한 기회는 다시 한번 찾아온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미운 오리새끼들은 실패를 딛고 다시 한번 우아한 날갯짓을 시도한다.
비행기 내부부터 관제탑, 통제실, 정비장, 활주로까지, 공항 대부분의 공간을 누비는 카메라는 모든 현장을 스케치하고 그 공간에 위치한 캐릭터들을 인상적으로 수집한다. 승무원과 관제사를 비롯해 비행기 한대를 띄우기 위해 자기 업무에 종사하는 공항의 모든 구성원들의 역할을 두루 살피고 개개인의 캐릭터까지 세심하게 돌본다. 공간마다 개별적인 에피소드가 쏟아지고 이를 통해 분야의 전문성을 독립적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그 다양한 에피소드를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조합하는 방식은 <해피 플라이트>의 가장 훌륭한 장기 중 하나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사건의 기승전결이 유연하며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산만하지 않게 제 매력을 보존한다. 그 중간중간 명확하게 끼어드는 코미디와 드라마의 연출력도 탁월하다.
<해피 플라이트>는 낙관과 긍정을 연료로 채우고 이륙하는 유쾌한 코미디다. 디테일한 취재를 바탕으로 완성된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현장감과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자랑하는 다채로운 캐릭터의 매력으로 고도를 유지하고 균형을 잡으며 예정된 좌표를 향해 이야기를 순탄하게 비행시킨다. 물론 <해피 플라이트>는 기승전결의 과정을 지녔음에도 오차범위를 예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해피엔딩으로 착륙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그 해피엔딩이 선보이는 훌륭한 착지는 명확한 감동을 부른다. 우아한 백조의 활공을 꿈꾸는 미운 오리새끼들의 발버둥은 때때로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실패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성공의 한 걸음을 내딛는 용감한 성장담을 지켜본다는 건 분명한 매력을 선사한다. 결국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가 되어 난다. 누구나 알지만 순수한 감동을 전하던 그 동화처럼 <해피 플라이트>도 날아오른다. 실로 즐겁고 아름다운 비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