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려하다가도 몰아치게, 고요하면서도 가열차게, 조 라이트는 특유의 감각적 재능으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고 초월한다. 사운드와 비주얼의 공감각적인 여정, 조 라이트의 길을 돌아본다.
1972년 런던에서 조 라이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65세였다. 그는 아들이 19세가 되던 해에 숨을 거뒀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은 라이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는 꼭두각시 인형극 극단을 설립하고 극장을 운영했다. 그 극장에서 본 인형들의 연기는 살아있는 라이트의 삶을 흔들었다. 사실 소년 라이트는 책상에 앉아서 교과서를 펴고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이 될 수 없었다. 소년에게는 난독증이 있었다. 그럴수록 소년은 슈퍼 8미리 카메라로 세상을 비추며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결국 예술학교에 진학한 라이트는 미술과 영화를 전공한 예술대학에서 첫 연출작인 단편영화 <크로코다일 스냅>(1997)을 완성하고 이를 통해서 주목을 얻기 시작한다. “나는 카메라맨이나 디자이너, 혹은 배우가 될 수 없었다. 내가 감독이 된 건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것들 덕분이다. 일반적으로 나는 평범한 삶에 어울리는 법을 잘 알 수 없었던 대신 촬영장에 나가서 영화를 찍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나는 몇 년 전부터 행운을 얻고 있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 말이다.” 여기서 라이트가 말하는 행운은 2000년 무렵에 시작됐다. TV미니시리즈로 연출 경력을 쌓으며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그는 2003년 BBC에서 방영된 4부작 시대극 <찰스 2세>로 영국 아카데미 2관왕에 오르며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오만과 편견>(2005)이 바로 그것이었다. 유려한 문체로 시대를 풍자한 당대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을 스크린에 옮기는 데 있어서 그는 어떤 구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그는 말한다. “내게 각본이 보내지기까지 그 책을 본 적이 없었다.”놀랍게도 그는 잘 모르는 제인 오스틴을 필사하는 대신 각본을 바탕으로 자신의 감각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했다. 라이트는 대학시절의 수업에 대해서 이처럼 말했다. “매우 이론적이고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나는 실질적으로 내러티브를 지닌 영화를 만들길 원하는 것뿐이다.” 그는 이론 수업에 의지하기 보다 방과후와 주말마다 극장에서 펼쳐지는 현역 배우들의 강습에 참여하며 경험과 감각에 의지하는 법을 깨우쳐 왔다. 원작에 비해서 자립적인 현대의 여성성이 강하게 투영되고, 보다 로맨틱한 감수성이 안개처럼 내려앉은 <오만과 편견>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이런 자질 덕분이다. 특히 서정적인 음악과 고풍스러운 영상의 결합은 로맨틱한 기운을 한껏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는 결국 원작의 유명세보다도 라이트의 이름을 눈여겨보게 만들었다.
성공적인 필름 데뷔 이후, 그의 두 번째 행보는 다시 한번 유명 원작을 각색한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속죄>의 영화화 작업은 제인 오스틴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일이었다. 교과서에 등장할만한 고전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과 달리 명성이 자자한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건 “나는 내 심리의 등에서 뛰어다니는 피해망상을 얻었다”고 할 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심리를 압박하듯 일정한 속도로 반복되는 타자기 소리, 발자국처럼 찍히는 활자의 행렬을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현해낸 오프닝 시퀀스의 리듬감에서 출발하는 <어톤먼트>(2007)는 사운드와 비주얼을 융화시키는 라이트만의 공감각이 빛을 발한 작품이다. <어톤먼트>의 오스카 음악상 수상의 공은 일차적으로 음악감독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에게 돌려야 마땅하겠지만 음악과 영상을 능수능란하게 접목시킨 라이트의 재능도 간과할 수 없다. 서정적인 운율의 클래식한 넘버 위가 흐르는 가운데 투명하게 떨어져 분산되는 자연광은 파국적인 로맨스에 깃든 처연함을 더욱 애잔한 여운으로 밀어 보낸다.
과거 시제의 두 작품을 통해서 연출력을 인정받은 라이트는 <솔로이스트>(2009)를 통해서 현대극에 도전한다. 실화에 기반한 이 작품은 정신적 질환으로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한 거리의 악사 나다니엘을 발견한 <LA타임즈>의 인기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가 관찰자로서 그를 찾아가다가 끝내 그와 교감을 이루고 서로의 치유를 돕는 과정을 기술한 칼럼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단조처럼 우울한 삶 속에서 무기력과 피로감을 느끼는 탓에 쉼표 같은 삶을 찾던 스티브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착란에서 헤어나올 마침표가 필요한 나다니엘, 이 두 사람의 만남을 그린 <솔로이스트>는 영화와 실화의 협연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사실 라이트의 비범한 전작에 비해서 <솔로이스트>는 상대적으로 범작에 가깝다. 하지만 콘트라베이스의 현 위에 떨어진 몇 줄기의 빛을 포착해낸 감각적인 클로즈업 샷과 결을 따라 흐르는 듯한 현악기의 유리 같은 선율, 베토벤 관현악을 듣는 나다니엘의 심상을 빛의 파동으로 표현해낸 환상적인 컬러는 라이트만의 진수를 드러낸다.
마치 경력의 전후를 가르듯 라이트는 연이어 현대적인 작품을 선택한다. 그러나 <어톤먼트>로 데뷔한 시얼샤 로넌을 타이틀 롤로 앞세운 <한나>(2011)는 그의 전력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한나>는 그의 지난 작품들에 비해서 다른 문법을 지닌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한나>는 서사적인 개연성보다는 공간의 변화와 이동을 통해서 극을 전개하고 진전시키는 양상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무엇보다도 원작 소설도, 실화적 모티프도 없는 오리지널 각본으로 완성한 라이트의 첫 영화라는 점에서도 새롭다. 사실 이 작품을 처음 선택한 건 라이트가 아니었다. 바로 캐스팅이 확정된 로넌의 추천을 통해서 라이트가 보다 늦게 합류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대적인 판본의 잔혹동화라 해도 좋을 <한나>에서 라이트는 자신이 지닌 공감각을 폭발시키듯 분출해낸다. 특히 노이즈와 전자음에 어울리는 만화경 비주얼은 사이키델릭 그 자체다. 현대적인 판본의 잔혹동화라 해도 좋을 <한나>는 라이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악랄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란 점에서도 중요하다. 자신의 한계를 깬다는 것, 이는 가능성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는 보기 드물게 시대성을 초월하는 공감각적 재능을 지닌 연출가다. 그리고 라이트는 말한다. “영화를 만드는 매 순간, 그것이 내게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기회를 주고 있음을 느낀다.” 운명과도 같았던 영화는 여전히 그에게 방향을 가리키는 지표다. 그의 공감각적 여정은 그렇게 새로운 길로 접어들고 있다.
제목의 뉘앙스가 오묘하다. ‘나의 친구’는 온당하지만 ‘그의 아내’는 불온하다. 시선이 느껴진다. 나의 친구를 넘어 그의 아내를 바라보고자 하는 어떤 욕망이 감지된다. 제목이 지정하는 ‘나’, 예준(장현성)은 ‘친구’이자 ‘그’인 재문(박희순)을 거쳐 ‘그의 아내’ 지숙(홍소희)을 바라본다. 제목만으로도 묘한 뉘앙스가 풍긴다. 묘한 삼각관계가 구상된다.
예준은 재문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다. 유능한 외환딜러인 예준은 미국 이민 생활을 꿈꾸는 재문과 지숙 부부를 위해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 뒤로 찾아온 불미스런 위기에서 재량을 발휘해 친구와 가족을 구원한다. 재문은 예준의 우의에 고마워하는 동시에 경제적인 지원을 피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종의 열등감을 품는다. 모종의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물론 기저에 놓인 우정은 진심이다. 하지만 수면 위의 상황이 수면 아래 진심을 은밀하게 억압한다. 견고한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남자의 우정은 실상 빈부의 자장 안에서 발생하는 우열의 기울기로 변질되어 서로를 바라본다.
불미스러운 결정적 사건이 관계구도를 전복위기로 몰아넣는다. 우연이 겹쳐 거대한 비극적 필연을 완성하고 친구의 오랜 우정은 진동한다. 관계의 파국을 막아서는 건 재문의 희생이다. 재문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고 상황을 와해시킨다. 결국 구도적 안정이 깨지면서 잠재된 기저의 욕망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잠재된 우열이 권력화된다. 예준을 위해 스스로 희생을 각오하는 재문의 심리를 순수한 우정의 발로라고 이해하기엔 석연찮다. 부채의식 이상의 어떤 위기감이 엄습한다. 예준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된 재문에게 있어서 예준은 자신과 지숙을 구원해줄 수 있는 동아줄과 같은 존재다. 재문의 희생은 친구에 대한 헌신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대한 자괴적 수긍과도 같다. 이는 단순히 극영화로서의 전개 속성에 따른 사건의 발단에 불과하다 여겨도 상관없겠지만 이 영화의 태도가 정치적 해석의 의도를 부추긴다.
아내 지숙(홍소희)의 뱃속에 있는 아들 이름에 대해 고민하는 재문에게 예준은 말한다. 남자면 민혁, 여자면 예니. 예준은 민혁은 민중혁명의 약자이며 예니는 칼 마르크스의 아내를 의미한다고 첨언한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위트는 정확히 이 정도다. 정치적인 조롱에 가깝지만 그것이 실질적인 핵심은 아니다. 강변이라기 보단 유희에 가깝다. 어떤 의지를 표하기 위한 웅변이라기 보단 허구적 기호 속에서 드러나는 현실적 상황을 관찰하며 아이러니한 태도로 현실을 유희로 전락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때때로 파격적인 설정이 발견되지만 전반적으로 리듬감 있는 스토리텔링이 큰 무리없게 이어진다. 극영화로서의 자질이 농후하다. 하지만 그 유희적 태도 안에 잠재된 본연의 목소리가 심상찮다. '나의 친구' 재문과 '그의 아내' 지숙을 경제적으로 원조하던 예준은 자신이 잉태한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재문의 대리적 희생을 등에 업고 속죄의 기회를 놓친다. 결국 파국의 책임을 뒤집어 쓴 재문은 지숙과의 관계를 단절하며 도리를 다하고 이를 지켜보는 예준은 도리어 본인의 잠재적 욕망의 상속 기회를 펼쳐나간다.
궁극적으로 파국적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마다 발견되는 다양한 기호들이 해석의 여지를 발생시킨다. 영어에 무지한 소시민은 미국을 동경하고, 비좁은 골목마다 가득한 차는 자가주택이 없는 소시민이 이웃의 비하를 얻게 되는 계기로 발전한다. 궁극적으로 영화의 양상을 전복시키는 비극도 그 상황과 연동된다. 한국적이라 할만한 환경적 요소들이 비극을 잉태하는 점층적 수단으로 활용되고 생생히 묘사된다. 자본에 강력하게 종속된 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착취하는가라는 날 선 주제를 기발한 관점으로 리드미컬하게 풀어낸다. 이는 죄의식과 속죄양이라는 종교적 고찰과도 맞닿는다. 자신의 죄를 속죄할 기회를 놓친 자의 뒤늦은 파국은 양심을 향한 숭고한 의지를 변호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에 가깝다. 하지만 이 모든 것과 무관하게 순수한 극영화적인 내러티브에 집중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야기 전개 자체가 흥미롭다. 문학적 비유를 동원한 문장처럼 장면과 상황은 유희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현실을 조명하는 식견이 탁월하다.
돋보이는 배우들의 연기도 공헌도가 높다. 특히 예준을 연기하는 장현성은 악의와 호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망설이는 예준의 이중적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2년 전 완성해 이제야 빛을 보는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환상에서 허우적거리는 서민들의 삶이 진행 중인 대한민국의 현실을 연상시킨다는 점이 기이한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2년 전보다도 더 구려진 요즘 현실이 이 영화의 시사성을 더 부채질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기이한 삼각 구도는 수많은 오류를 품고 멀쩡하게 유지되는 현실의 축약판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