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의 뉘앙스가 오묘하다. ‘나의 친구’는 온당하지만 ‘그의 아내’는 불온하다. 시선이 느껴진다. 나의 친구를 넘어 그의 아내를 바라보고자 하는 어떤 욕망이 감지된다. 제목이 지정하는 ‘나’, 예준(장현성)은 ‘친구’이자 ‘그’인 재문(박희순)을 거쳐 ‘그의 아내’ 지숙(홍소희)을 바라본다. 제목만으로도 묘한 뉘앙스가 풍긴다. 묘한 삼각관계가 구상된다.
예준은 재문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다. 유능한 외환딜러인 예준은 미국 이민 생활을 꿈꾸는 재문과 지숙 부부를 위해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 뒤로 찾아온 불미스런 위기에서 재량을 발휘해 친구와 가족을 구원한다. 재문은 예준의 우의에 고마워하는 동시에 경제적인 지원을 피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종의 열등감을 품는다. 모종의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물론 기저에 놓인 우정은 진심이다. 하지만 수면 위의 상황이 수면 아래 진심을 은밀하게 억압한다. 견고한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남자의 우정은 실상 빈부의 자장 안에서 발생하는 우열의 기울기로 변질되어 서로를 바라본다.
불미스러운 결정적 사건이 관계구도를 전복위기로 몰아넣는다. 우연이 겹쳐 거대한 비극적 필연을 완성하고 친구의 오랜 우정은 진동한다. 관계의 파국을 막아서는 건 재문의 희생이다. 재문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고 상황을 와해시킨다. 결국 구도적 안정이 깨지면서 잠재된 기저의 욕망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잠재된 우열이 권력화된다. 예준을 위해 스스로 희생을 각오하는 재문의 심리를 순수한 우정의 발로라고 이해하기엔 석연찮다. 부채의식 이상의 어떤 위기감이 엄습한다. 예준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된 재문에게 있어서 예준은 자신과 지숙을 구원해줄 수 있는 동아줄과 같은 존재다. 재문의 희생은 친구에 대한 헌신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대한 자괴적 수긍과도 같다. 이는 단순히 극영화로서의 전개 속성에 따른 사건의 발단에 불과하다 여겨도 상관없겠지만 이 영화의 태도가 정치적 해석의 의도를 부추긴다.
아내 지숙(홍소희)의 뱃속에 있는 아들 이름에 대해 고민하는 재문에게 예준은 말한다. 남자면 민혁, 여자면 예니. 예준은 민혁은 민중혁명의 약자이며 예니는 칼 마르크스의 아내를 의미한다고 첨언한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위트는 정확히 이 정도다. 정치적인 조롱에 가깝지만 그것이 실질적인 핵심은 아니다. 강변이라기 보단 유희에 가깝다. 어떤 의지를 표하기 위한 웅변이라기 보단 허구적 기호 속에서 드러나는 현실적 상황을 관찰하며 아이러니한 태도로 현실을 유희로 전락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때때로 파격적인 설정이 발견되지만 전반적으로 리듬감 있는 스토리텔링이 큰 무리없게 이어진다. 극영화로서의 자질이 농후하다. 하지만 그 유희적 태도 안에 잠재된 본연의 목소리가 심상찮다. '나의 친구' 재문과 '그의 아내' 지숙을 경제적으로 원조하던 예준은 자신이 잉태한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재문의 대리적 희생을 등에 업고 속죄의 기회를 놓친다. 결국 파국의 책임을 뒤집어 쓴 재문은 지숙과의 관계를 단절하며 도리를 다하고 이를 지켜보는 예준은 도리어 본인의 잠재적 욕망의 상속 기회를 펼쳐나간다.
궁극적으로 파국적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마다 발견되는 다양한 기호들이 해석의 여지를 발생시킨다. 영어에 무지한 소시민은 미국을 동경하고, 비좁은 골목마다 가득한 차는 자가주택이 없는 소시민이 이웃의 비하를 얻게 되는 계기로 발전한다. 궁극적으로 영화의 양상을 전복시키는 비극도 그 상황과 연동된다. 한국적이라 할만한 환경적 요소들이 비극을 잉태하는 점층적 수단으로 활용되고 생생히 묘사된다. 자본에 강력하게 종속된 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착취하는가라는 날 선 주제를 기발한 관점으로 리드미컬하게 풀어낸다. 이는 죄의식과 속죄양이라는 종교적 고찰과도 맞닿는다. 자신의 죄를 속죄할 기회를 놓친 자의 뒤늦은 파국은 양심을 향한 숭고한 의지를 변호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에 가깝다. 하지만 이 모든 것과 무관하게 순수한 극영화적인 내러티브에 집중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야기 전개 자체가 흥미롭다. 문학적 비유를 동원한 문장처럼 장면과 상황은 유희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현실을 조명하는 식견이 탁월하다.
돋보이는 배우들의 연기도 공헌도가 높다. 특히 예준을 연기하는 장현성은 악의와 호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망설이는 예준의 이중적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2년 전 완성해 이제야 빛을 보는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환상에서 허우적거리는 서민들의 삶이 진행 중인 대한민국의 현실을 연상시킨다는 점이 기이한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2년 전보다도 더 구려진 요즘 현실이 이 영화의 시사성을 더 부채질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기이한 삼각 구도는 수많은 오류를 품고 멀쩡하게 유지되는 현실의 축약판이나 다름없다.
<007 카지노 로얄>은 새로운 징조였다. 젠틀한 매너로 본드걸의 마음을 사로잡는 훈남 스파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22번째 ‘007’ <007 퀀텀 오브 솔러스>(이하, <007 퀀텀>)는 전작의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받은 새로운 작전명이다. 전작의 아크로바틱한 오프닝만큼이나 육중한 카체이싱으로 포문을 여는 <007 퀀텀>은 근육질로 대변되는 터프한 마초적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잡았음을 무심하듯 시크하게 증명한다.
<007 퀀텀>은 정체불명 글로벌 조직의 배후를 추적하고 그들의 음모를 소탕하는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의 활약을 그린다. 동시에 전작 <007 카지노 로얄>의 결말부에서 목숨을 잃은 연인 베스퍼(에바 그린)의 복수를 노리는 제임스 본드의 사적 심리를 끌어내기도 한다. 제임스 본드의 호화로운 스타일은 유지되지만 그는 더 이상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바람둥이가 아니다. 지나간 연인에 대한 깊은 향수가 제임스 본드를 지배한다. 말없이 묵묵한 인상에서 단호한 의지가 보인다.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정형화된 대중성은 그렇게 변주된다.
‘007’이란 프랜차이즈는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다. <007 카지노 로얄>은 냉전이라는 패러다임으로 고착화된 브랜드를 갱생시키기 위한 일종의 시도였다. 선악의 개념으로 대비되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경계가 이데올로기의 몰락과 함께 죽은 언어로 퇴색하고 제3세계의 약진으로 재편된 세계 질서 속에서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질 것 같았던 시리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옷을 갈아입는데 성공했다. <007 퀀텀>은 시도를 통해 고무된 새로운 선언과도 같다. 제임스 본드는 이익에 따라 손을 잡거나 등을 돌리는 전세계적 질서 사이에서 더욱 돈독해지고 치밀해지는 음모의 배후를 추적한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서 첩보원의 존재는 시대착오적인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정보의 소유가 거대한 이익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아날로그적 접근은 더욱 절실해진다. 제임스 본드의 육체가 더욱 부각되는 건 그만큼 더욱 복잡하게 움직이는 정보의 뒤를 쫓아야 하는 현대 첩보전의 고단함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첨단기기를 총동원해 세계를 감시하는 디지털 첩보전의 공백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제임스 본드는 당연히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여야만 한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적격이다. 그의 제임스 본드는 새로운 세대를 영접하기 위한 패러다임 전환의 적자나 다름없다.
육해공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다채로운 액션씬은 <007 퀀텀>을 스파이물보다 액션물의 기준에서 바라보고 싶게 만든다. <본 얼티메이텀>을 비롯한 ‘본’ 시리즈의 영향력인지 정교하면서도 묵직한 육박전이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심지어 제임스 본드는 제이슨 본처럼 장소를 불문하고 시종일관 달리고 또 달린다.-실제로 <본 얼티메이텀>의 액션감독을 맡았던 댄 브레들리가 <007 퀀텀>의 액션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도망자 제이슨 본이 아닌 추격자 제임스 본드는 고뇌의 무게보단 저돌적인 과감함을 선택한다. 무엇보다도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기존의 제임스 본드들과 궤를 달리하면서도 그 클래식한 느낌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캐릭터의 형상은 겹쳐지지만 태도적 차이는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이미지를 보존한다. 뉴타입으로 개조된 제임스 본드는 또 한차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시대는 변했고, 제임스 본드도 변했다. 하지만 '007'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본드, 제임스 본드의 성공적인 귀환이다. 잭 화이트의 기타 훅(hook)과 알리샤 키스의 소울풀한 창법으로 새롭게 변주된 오프닝 넘버는 신세기 제임스 본드의 본격적인 재출범을 알리는 강렬한 신호탄이나 다름없다.
동구권 이주노동자를 영국 회사에 중계해주는 직업소개소에서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는 싱글맘 앤지(키얼스턴 워레잉)는 상사의 성희롱에 발끈한 뒤, 납득할 수 없는 해고 통지를 받게 된다. 자신의 룸메이트 로즈(줄리엣 엘리스)에게 이런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던 앤지는 그녀에게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제안하고 동업을 권한다. 그녀가 제안한 사업 아이템이란 무허가 불법 직업소개소를 차리는 것인데 로즈는 이에 불안해하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솔깃해 결국 제안을 수락한다. 결국 ‘앤지와 로즈의 레인보우 인력소개소(recruitment)’를 설립한 앤지와 로즈는 각각 오토바이와 웹사이트를 이용해 기동성 있는 홍보와 신속하고 민첩한 대응, 그리고 미인계까지 동원하며 시장을 확보해나간다. 하지만 자신들이 중계해준 공장에서 직원들의 임금을 체불하기 시작하며 앤지와 로즈는 점차 곤혹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앤지와 로즈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놓인 다리다. 자본가의 시선에서는 노동자에 해당하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자본가의 편에 선 일차적 고용주다. 영화는 계약직 노동자였던 앤지가 자본의 순환 구조를 파악한 뒤 자본가의 위치를 점해가는 과정을 면밀히 살핀다. 자본가와 노동가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을 구체화시키고 그 구조적 문제를 표면으로 끌어낸다. 계약직 노동자들을 공장에 취업 알선해줌으로써 그로부터 발생하는 수수료를 얻고 계약금을 받지만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불법영업으로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고 고용보험료마저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불법적인 이익을 착취한다. 사업을 시작할 당시 겪었던 어려움은 사업의 확장을 고려할 정도로 무마된다. 나이가 서른인데 크레디트(credit)로 연명한다며 자신의 삶을 하소연하던 앤지는 어엿한 사업가로 변신하는데 성공한다. 공장에서 임금을 체불당한 이주노동자들의 성화가 자신에게 넘어오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만큼은 착실히 수행한다.
<자유로운 세계>는 결코 순탄할 수 없는 모순을 안고 있는 이 세계의 기이한 순환 구조에 의문을 던진다. 일을 해도 돈을 벌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수입은 어디로 증발한 것인가. 이 세계의 실용주의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마치 자본의 수하로 고용 당한 듯한 인간들의 세태는 불행 속에서 쳇바퀴를 돌 듯 고단하고 피로하다. 계약직 사원에서 직업소개소의 사업가로 변신한 앤지는 고용자에서 고용주로 탈바꿈함으로써 더 많은 수익을 얻고 지위적 여유를 얻었음에도 더욱 불안감에 시달리고 각박해진다. 피라미드처럼 세워진 자본의 유통 구조에서 더 높은 자리를 점할수록 자본에 대한 욕구가 강해진다. 결국 자본가와 노동자의 괴리감은 그 욕망의 방향성이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돈이 지배하는 금권만능주의 시대에서 자유란 말 그대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논하는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경쟁의 합법적 논리를 정당화시키는 껍데기의 언어로 몰락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인색함이 속살을 드러낸다. 입 좀 닥치고 고개 숙이는 노동자들을 원하는 자본가와 일을 달라는 노동자들의 처지는 경제적 생산성에 종속 당하고 자본의 노예가 된 현대인의 궁핍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풍경이다.
전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영국으로부터 자유독립을 꿈꾸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가던 아일랜드인의 내부적 갈등과 역사적 소요를 드라마틱한 연출력으로 승화시킨 켄 로치 감독은 <자유로운 세계>역시 탁월한 연출을 통해 직설적인 정치적 텍스트를 보편적인 예술적 언어로 완성시킨다. <랜드 앤 프리덤> <빵과 장미>처럼 억압당하는 피지배 계층의 정당한 의지에 대한 옹호와 지지를 보내던 그는 <자유로운 세계>를 통해 피지배자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시선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그 불합리한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생시키며 부정한 가치관을 합리화시키는 세계관의 실체를 관찰한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짓밟고 인간적인 윤리관보다 실리적 비윤리를 중시하는 비인간적인 현실이 어떤 구조로 정착되고 있는가를 살핀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세계의 모순적 합리화는 88만원 세대의 비정규직 문제와 기륭전자의 끝없는 투쟁을 주변부에 두고서도 묵묵히 체계를 유지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도 직결된 사안이다. 부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 하고 그 방식은 비윤리적인 노동 착취를 통해서 빈번하게 이뤄진다. <자유로운 세계>는 그 불평등한 자본의 논리로 착취되는 자유의 허상을 이야기한다. 대기업의 횡포와 불법적인 착취는 국가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그럴싸한 명목으로 포장되어 면죄부를 얻고 그 아래 신음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는 정당한 노동의 의무로 몰락한다. 그것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진실이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개개인의 기이한 환상이 거대한 모순을 정상적인 것처럼 끌고 간다. 결국 모든 사람이 부자아빠가 될 수 없는, 혹은 부자아빠를 둘 수 없는 현실에서 다수는 괴롭고 일부 그 세계에서 착취에 성공한 부자아빠들과 그의 가족들은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조차도 더 많은 것을 차지하거나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때론 불안에 떤다. 개개인들이 자본에 의한 지배 논리를 암묵적으로 수긍하는 시스템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그 시스템에 종속당한 대다수는 불행의 쳇바퀴를 고단하게 돌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영화보다도 더욱 거대한 모순을 관찰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매트릭스다. 그로부터 깨어나지 않는 한 답은 없다. <자유로운 세계>는 결국 그 허세 같은 망상을 지적하는 역설의 훈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