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좀처럼 목을 물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미지로 이빨을 드러낼 뿐이다.
‘영원히 산다’라는 말을 뒤집어 봅시다. ‘영원히 죽지 못한다’라고 생각해봅시다. 영원히 산다는 건 그만큼 권태롭고 지겨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두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단어를 굳이 수정한 건 두 존재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단히 오래된 존재처럼 말하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1세기 남짓의 경험만이 가능한 인간과 달리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인류의 역사를 살피며 살아왔습니다. 아니, 살아남았습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뱀파이어가 됐는지 몰라도 태초부터 그들의 삶엔 낮이 없었던 것만 같습니다. 매우 평온하지만 은밀하고 때때로 아슬아슬한 그들만의 밤을 수 세기 동안 버텨왔습니다.
일단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주는 장르적인 기대감을 품고 상영관을 찾았다면 대단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짐 자무쉬가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애초에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단히 서정적인 리듬감과 시적인 묘사로 특유의 미학적인 시선을 견지해온 짐 자무쉬의 뱀파이어물에서 장르적인 공포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낯선 것이니까요. 그리고 짐 자무쉬 특유의 미학적인 방식은 이 영화가 주목하는 뱀파이어들의 영속성과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고상하고 우아하게 소모되는 뱀파이어들의 평범한 일상은 때때로 대단한 블랙코미디의 자질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Only Lovers Left Alive>라는 시적인 문장은 생각보다 절박하고 짓궂은 제목입니다. 특히 느슨하게 풀려있던 영화의 흐름을 강하게 확 당기는 듯한 결말부 덕분에 이 영화 자체가 대단히 악랄하고 재기발랄한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아남는다’라는 절박한 감정과 직접적인 행위의 중의성을 한번에 깨닫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으론 뱀파이어들이 ‘인간 따위가’란 식으로 계급적인 우월성을 드러낼 때 그들이 지닌 고매한 정신이 느껴지지만 인간 세계에 기대서 자신의 삶을 연명해나가는 일상을 거듭 목격하다 보면 멸종을 앞둔 동물의 자존심을 보는 것과도 같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아 버린 귀족 가문의 풍경 같기도 하고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할법한 존재들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대단한 아이러니이기도 하죠.
나이트신으로만 점철되어 낮은 조도의 색채감으로 채워진 영화의 풍경은 그만큼 정적입니다. 어둠과 어둠을 밀어내는 조명들로 채워진 영화의 몽환적인 풍경과 비현실적인 색감 자체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 듯한 근사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물들만큼이나 영속성을 지닌 듯한 소품들로부터 반시대적인 낭만 같은 것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백미는 캐스팅입니다. 틸다 스윈튼은 그냥 뱀파이어를 섭외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요. 특유의 신비감과 중성적인 매력이 더해져서 영화의 비현실성을 강화하는 도구적인 역할도 해내고 있다는 인상도 들고요. 반대로 톰 히들스턴은 뱀파이어로서 ‘생존’과 ‘생활’이라는 현실적 화두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캐릭터의 조합이 영화 자체의 시공간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하도록 이끄는 것도 같고요. 서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미아 바시코브스카와 안톤 옐친은 캐릭터의 쓰임새나 표현력이 적절합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비장한 페이소스와 역설적인 냉소를 품게 만드는 존 허트의 존재감도 탁월하고요. 완벽하다고 칭송해도 모자랍니다. 기꺼이 목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랄까요.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로부터 배어나는 낭만적 기운을 로맨틱한 에피소드와 연결한 기획적 옴니버스다. 파리를 배경으로 18편의 옴니버스를 직조한 20명의 감독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통해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성을 부추긴다. 사실상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고유적 낭만성을 증명하기 이전에 긴 세월 동안 환상성을 구축한 도시가 로맨스라는 감정을 얼마나 탁월하게 보좌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사랑해, 파리>에 이어 새로운 낭만도시 프로젝트의 제작에 착수한 엠마뉘엘 벤비히가 <뉴욕, 아이러브유>로 뉴욕을 새로운 로맨틱 시티로 낙점한 것도 그 도시를 동경하는 이들의 환상을 등에 업은 것이나 다름없다.
18편의 에피소드마다 명확한 구획을 나눈 <사랑해, 파리>와 달리 <뉴욕, 아이러브유>는 각 단편의 시작과 끝을 이어 붙이며 마침표의 영역을 지워버렸다. 주가 되는 단편 사이마다 다리 역할을 하는 짧은 전환점(transition)을 삽입하고 이를 통해 사연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그만큼 매 순간의 감정을 음미할 여유가 줄어든 반면, 다음 작품에 몰입할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산만한 인상을 줄 확률도 적지 않다. 매 단편마다 적확한 마침표를 찍어내듯 경계를 둔 <사랑해, 파리>보단 보다 불친절한 형태로 완성된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번잡함을 영화적 구성 그 자체로 승화해버린 것마냥 번잡한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부르는 동경심의 너비만큼이나 풍요로운 로맨스의 만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이와이 슌지를 필두로 11명의 감독이 만들어낸 로맨틱한 상상을, 그것도 다채로운 배우들의 얼굴을 빌려 뉴욕의 사랑담을 그려내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일면 의미 있는 일이다. 작품마다의 편차를 떠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모티브로 삼은 러브스토리의 향연을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흥이 배어난다. 특히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황홀한 충격을 선사하는 세자르 카푸르와 고전적 무게감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는 이와이 슌지의 단편은 <뉴욕, 아이러브유>안에서 단연 빼어난 감상을 부여한다. 그 밖에도 장난끼 넘치는 반전을 품은 브렛 라트너와 이반 아탈의 작품, 그리고 수다스럽지만 귀여운 노부부의 애틋한 감정을 깊게 전달하는 조슈아 마스턴의 영화 또한 꽤나 인상적이다. 감독으로 데뷔한 나탈리 포트만의 깔끔한 연출력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관심사가 될만한 지점이다.
번잡한 뉴욕의 교차로를 건너듯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단편적 상상력을 따라잡는 건 그만큼의 집중력을 요하기에 피곤한 감상을 부여할지 모른다. 동시에 옴니버스의 특성상 작품마다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도 일종의 맹점이 될만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그 다채로운 감각과 다양한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먹음직스러운 만찬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어느 도시에서나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랑해, 파리>와 <뉴욕, 아이러브유>는 특별한 도시의 로맨스라기 보단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둔 특별한 로맨스적 일화의 총망라에 가깝다. 떨리는 찰나의 이끌림도, 담담한 영원의 엇갈림도, 낮과 밤을 아우르며 도시를 떠돌다 그 거리에 낭만을 켜켜이 채워나간다. 낭만을 먹고 자란 도시는 전인류적 동경을 끌어안고 그 환상을 품에 안은 채 또 다른 낭만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뉴욕, 아이러브유>는 도시를 위한 낭만의 헌사라기 보단 유려한 도시를 풍경으로 낭만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새로운 낭만은 또 다른 도시로 전파된다. 아마도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랑을 꿈꾸는 도시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과학기술의 진화 속도는 나날이 빨라진다. 그와 함께 과거엔 공상과학의 소재가 되던 이미지들이 현재에선 일상적 산물이 된다.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레 인터페이스도 변한다. 이미지의 변화는 중요하다. 화상전화나 터치스크린 따위가 더 이상 생소한 허구가 아니라는 건 구시대에서 SF적 이미지로 활용되던 산물들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단지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의 등장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시대는 지났다. LA도심에 뒤엉켜 나뒹구는 변신 로봇의 시대에서 터미네이터의 존재는 희미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남았다는 사실이다. 우려먹든, 개조하든, 프랜차이즈의 수명이 유효하다고 판단될 때 한번이라도 시도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젠 주지사로 활동 중인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왕림이란 점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실질적으로 시리즈의 커다란 구멍이란 오명을 남긴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이하, <터미네이터3>)이후로 시리즈 자체가 무색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리즈는 다시 한번 전진을 선언한다.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Terminator salvation>(이하, <터미네이터4>)은 본래 원제에 포함된 ‘salvation’이라는 단어처럼 시리즈의 구원을 명령 받은 새로운 적자다. 미래의 예언적 영웅을 보존하기 위한 현재의 사투를 그려 온 지난 세 편의 시리즈는 비로소 시간을 지나 그 미래에 도달했다. 사실상 어떤 설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껍데기 구실을 하던 본질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결코 버릴 수 없는 아이템이다.
<터미네이터3>가 역대 작품 중 가장 형편없는 만듦새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역할을 간과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위치에 있다. 말로만 듣던 ‘심판의 날(judgement day)’을 실시간의 상태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건 시리즈의 미래를 여는 교두보 역할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터미네이터4>는 그 이미지를 밟고 선다. 2018년, 심판의 날을 지휘하던 슈퍼컴퓨터 스카이넷이 만들어낸 인간들의 지옥 속에서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 실시간으로 묘사된다. 더 이상 과거의 존 코너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 전쟁을 이끄는 진짜 영웅 존 코너를 볼 수 있다. 물론 <터미네이터>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었던 아놀드 주지사 님의 순간이동 누드신을 추억으로 떠밀려 보내야겠지만.
서사의 완성 방향은 반대지만 <터미네이터4>는 흡사 <스타워즈>와 비슷한 노선을 걷는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나의 트릴로지를 완성한 이후로 서사적 공백을 채우는 트릴로지를 계획한다. 다만 트릴로지의 시간적 격차가 크다는 점에서 트릴로지 사이의 영상적 괴리감이 발생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이득을 보는 쪽은 <스타워즈>보다 <터미네이터>쪽이다. <스타워즈>가 프리퀄 형식의 서사를 뒤늦게 기획한 탓에 오히려 과거보다 영상기술적 성과가 낮은 미래의 이미지를 보유하게 된 것과 달리 <터미네이터>는 순차적인 서사의 흐름에 놓여있는 덕분에 이미지의 진화 방향에 따른 거부감에서 보다 자유롭다. 게다가 추격의 형태로서 액션장면을 연출하던 전자들과 달리 새로운 시리즈는 거대한 전투씬과 전쟁의 이미지를 그려 넣는다는 점에서 블록버스터로서의 너비가 과거에 비해 광활하다. 과거엔 묘사할 수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게 가능해졌다. 시리즈의 탄생 배경은 이런 기술 제반 조건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압도적이다. <트랜스포머>가 변신로봇 풀세트를 완비하며 로봇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아동 취향의 꿈을 대리 만족시키는 완구로봇의 실사적 성취감에 가까운 성과다. <터미네이터>의 로봇들은 이미지만으로도 인간에게 위협적인 디자인을 갖춘 살상병기란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보존한다. <터미네이터>는 단순한 액션블록버스터에 불과하지 않은, <에이리언>만큼이나 불길한 서스펜스를 발생시키는 스릴러적 취향의 SF영화다. 과거 아놀드 주지사님이 열연하던 시절, 반토막난 T-800 로봇에 추격당하던 사라 코너의 포복 장면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야기한 건 제임스 카메론의 연출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금속로봇의 날카로운 손이 주는 위협적 디자인도 중요한 원인이라 할만하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유사한 기시감이 발생한다.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는 ‘T-800’의 등장신은 앞선 전례만큼이나 위협적이다.
<터미네이터4>에서 두드러지는 건 새로운 로봇들의 등장이다. 비행기 로봇인 ‘헌터킬러’, 바이크 형태의 로봇 ‘모터 터미네이터’, 물뱀형태의 수중로봇인 ‘하이드로봇’을 비롯해 거대한 ‘하베스터’까지, T시리즈의 인간모델로봇이 아닌 기계적 로봇들이 대거 등장하며 제각각의 쓰임새에 걸맞은 액션을 연출하고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게다가 분리와 합체의 기능마저 전시하는 모습은 마치 <트랜스포머>의 성과가 남긴 유물처럼 인식될 정도다. 무엇보다도 과거 첫 번째 시리즈에서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미래에서 날아온 카일 리스의 꿈을 통해 짧게 보여지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이미지가 온전히 펼쳐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올드팬과 새로운 팬층 모두에게 흥미를 부를만한 지점이다. 육중한 전투씬과 거대한 폭파 장면, 그리고 스피디한 카체이싱과 공중전까지, <터미네이터4>는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괴적인 이미지를 과감하게 전시한다. 물론 단순히 스크린이 스펙타클을 담보로 한 전시관 역할로 기능성이 제한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건 단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영상을 구현하는 연출력에 놓여 있다. 특히 일반적인 핸드헬드를 선택하지 않고 고정된 샷 안에서 존 코너의 상하가 역전되는 구도를 묘사하는 헬기추락신의 앵글은 이 영화의 탁월한 장면 연출력을 대변하는 이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액션 장면들은 훌륭한 연출과 구성을 통해 하나같이 빛을 발한다.
물론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건 액션만큼이나 스토리다. <터미네이터4>는 ‘T-600’이 T-800’으로 진화하는 2018년을 배경으로 둔다. 기존의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T-1000’ 그리고 ‘T-X’와 같은 첨단로봇의 진화는 좀 더 뒤의 일이다. 이는 곧 <터미네이터4>가 어떤 시작점에 있는 이야기이며 시리즈의 가능성을 새롭게 재단해도 좋은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시리즈는 자신의 지난 발자취를 배려해야 한다. 저항군을 이끄는 존 코너와 마찬가지로 존 코너의 존재를 완성하는 카일 리스(안톤 옐친)의 존재는 시리즈의 숙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마커스 라이트(샘 워싱턴)의 등장은 <터미네이터4>의 선택이다. 존 코너만큼이나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커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 어디서 발생하는가라는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말과 같다. 동시에 마커스는 과거 <터미네이터>가 지속시켰던 규칙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중요한 캐릭터다. 표적이 되는 인간과 표적을 쫓는 로봇, 그리고 표적을 지키는 로봇이라는 삼각 구도의 유지는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서도 가능해진다. 또한 마커스는 인간보단 로봇에 가까웠던 기존의 인간형 로봇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간적인 고뇌가 뒤섞인 표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다. 다만 <터미네이터4>의 야심이 관건이다.
<터미네이터4>는 분명 서사의 활용도에 있어서 운명론을 배제할 수 없는 영화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단계에 착륙한 <터미네이터4>에게 선택의 여지란 많지 않다. 다만 어느 정도로 과감해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마커스는 그 돌파구를 위한 일종의 열쇠다. 개봉 전 세간에 유출됐던 파격적 결말도 그런 가능성에서 출발한 하나의 결과적 형태였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안정을 추구한다.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기존의 인과율을 흔들만한 시도를 감행하느니 적절한 선에서 파격을 선사한 뒤 암묵적 룰을 따른다. 이는 기존 시리즈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방식이다. 구원자의 위치에 선 로봇의 퇴장은 시리즈마다 반복된 형태이므로 <터미네이터4>가 선택한 방식 또한 규칙을 준수한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터미네이터4>를 어떤 가능성 안에 가두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터미네이터4>는 마커스의 활용을 일회적인 수위에서 멈춤으로써 자신의 운명론을 공고히 다지지만 반대로 그 운명론에 철저하게 갇혀버렸다고 말해도 상관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이대로라면 결국 카일은 언젠가 과거로 보내질 운명이고, 존 코너는 미래에서 끝없이 진화하는 기계와 맞서야 한다. 정해진 운명론에 속박된 서사의 흐름이 경직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기존에 완성된 이야기 구도를 존중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마치 예언을 증명하기 보단 현실을 예언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다. 덕분에 시리즈 자체의 가능성이 얕아진 인상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작품 자체로서의 스토리도 조금씩 빈틈을 드러낸다. 인과관계를 배려하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심지어 중요한 설정을 설득할만한 배경 자체가 누락된 경우도 적잖게 눈에 띈다. 스토리텔링 자체가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지난 시리즈를 숙지하지 못한 새로운 젊은 관객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한다는 건 오랜 세월의 공백을 둔 시리즈의 인과율에서 비롯된 급소다 .
분명한 건 기존의 시리즈가 발생시키던 묵시록의 기운이 이번 시리즈를 지탱하는 기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이 시리즈가 가상의 서사로 전제하던 막연한 디스토피아의 운명론을 실시간의 현실적 이미지로 묘사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덕분이다. 비로소 존 코너는 미래를 위해 생존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미래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터미네이터4>의 의미는 그 지점에 있다. 언젠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리즈의 명성을 좌우하던 장기 역시 그와 함께 변한다. 묵시록의 예언은 하이브리드 영상으로 대체된다. 상상이 아닌 이미지가 시리즈를 지탱한다. 더 이상 형태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건 불필요하다. 물론 운명적으로 두 세계는 결착되어 도무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리즈는 자신이 설계했던 운명의 영토로 들어섰다. 존 코너는 미래의 불안과 싸우는 것이 아닌 그 미래에서 싸운다. 그 운명적인 단계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운명을 주체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스스로 운명에 끌려간다. 개별적인 작품 자체의 결말을 지켜보는데 무리는 없겠지만 시리즈의 미래가 위태롭게 느껴진다. 돌파구를 찾아내기 보단 스스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일시적인 업데이트엔 성공했지만 새롭게 설치된 메인보드의 장기적인 한계가 감지된다. 차후 업그레이드가 관건이다.
국내에서 방영됐던 TV시리즈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네레이션>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스타트렉>의 네임밸류는 분명 국내에서 ‘듣보잡’에 가깝다. 특히 <스타트렉>이 전세계적으로 ‘트레키(Trekkies)’라는 광신적인 팬덤까지 형성하며 성대한 지지를 얻은 시리즈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시리즈가 국내에서 얻은 대우는 가히 ‘안습’에 가깝다. 하지만 1966년에 제작된 진 로든베리의 오리지널 시리즈로부터 5번에 걸쳐 진전된 TV시리즈와 10편의 극장판까지 업데이트 된 <스타트렉>의 발자취는 국내 사정과 무관하게 무궁무진 그 자체다. J.J.에이브람스가 이 시리즈의 프리퀄(prequel)이라 소개된 <스타트렉: 더 비기닝>(이하, <더 비기닝>)을 축조하기까지의 과정도 분명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스타트렉>은 분명 전설이다.
<더 비기닝>은 전설을 위해 마련한 또 다른 초석이다. 시작을 의미하는 부제처럼 시리즈의 시계를 원점으로 되돌린 것 같지만 실상 그 야심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간단히 말하자면 <더 비기닝>은 단순한 프리퀄이 아니다. 그저 앞선 시리즈가 묘사하지 못한 옛날 이야기 따위를 삽입하거나 발전된 그래픽기술을 통해 과거에 불가능했던 비주얼을 전시하는 부록의 기능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더 비기닝(The beginning)’이라는 부제는 그 위치를 알리는 지표가 아니라 일종의 선언에 가깝다. 다시 원점에서 시작되는 ‘리셋(reset)’도 아니고 지금까지 진행되던 모든 사연을 뒤엎고 새롭게 건축하는 ‘리부트(reboot)’도 아니다. 말 그래도 또 다른 시작에 가깝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또 다른 원점을 그려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건 서사의 영역을 단선적 배치로부터 탈피시킨 상대성 원리다. 공간에 구멍이 뚫리고 그 공백을 통해 차원의 장벽이 무너질 때 시간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개념은 순간이동과 상대성 원리의 기초적 결합이며 이는 <더 비기닝>이란 프로젝트 자체를 가능케 하는 원리이자 규칙이 된다. 또한 <스타트렉>이라는 세계관 자체가 이미 기본적인 물리적 원리를 동력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원리를 응용하는데도 무리가 없다. <스타트렉>은 영화 밖 현실에서 가설의 형태로 존재하는 물리적 법칙들이 이미 현실화된 하이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다. 그만큼 영화 밖 현실과 영화 안 현실의 괴리는 미래의 기술적 진보라는 테마 자체만으로 극복이 가능하다. 미래라는 서사적 허구는 현실적인 불확실성을 원리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판타지의 현실적 그릇으로 확보된다. 그 안에서 다양한 시도가 가능해진다. 시대적 성취로 인정되는 다양한 가능성이 새로운 이야기의 동력원으로 확보된다.
<더 비기닝>은 이런 가능성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로 거듭난다. 서사의 형태를 전혀 다른 것으로 가공하거나 새롭게 포장만 바꾼 것이 아닌, 과거와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대체 현실(alternative reality)’을 창조해낸다. 마치 어떤 표면을 흐르는 카메라가 궁극적으로 우주선의 몸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더 비기닝>은 어떤 일부분의 노출을 통해 흥미를 자극하면서 거대한 결과물을 통해 탄성을 내지르게 만든다.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시작은 이야기의 파편과 같다. 그 파편의 흔적을 추적하고 새로운 파편을 수집하며 이야기의 동선을 가늠할만한 단서가 되는 거대한 원리가 등장하는 중반부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롭다. 캐릭터의 탄생 시점을 비틀고 이를 통해 운명을 보존하되 새로운 필연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캐릭터의 성향이 변화하고 새로운 변주가 설득력을 얻는다. 이는 <스타트렉>시리즈의 전통적인 트레키나 새로운 트레키의 양자가 될 후보군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이다.
제임스 커크(크리스 파인)와 스팍(잭커리 퀸토)을 비롯해 우후라(조이 살디나)와 술루(존 조), 맥코이(칼 어번), 스콧(사이먼 페그)과 같이 새로운 얼굴로 대체된 전통적 캐릭터들은 오래된 추억과 교감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위한 양자로서의 표정을 드러낸다. 또한 체코프(안톤 옐친)와 같은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이 시리즈가 과거와 다른 방향의 탐사를 펼칠 것임을 예고하기도 한다.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미래를 담보로 한 대부분의 SF영화들과 달리 다소 낙관적인 <스타트렉>시리즈의 감수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음과 동시에 과거보다 진보된 영상 기술을 통해 과감한 스펙터클을 전시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쾌감을 장착한다.
이는 프리퀄도 아니고, 속편도 아니다. 시리즈의 0번째 위치를 선점한 동시에 11번째 자리마저 점유한다. 시리즈의 중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출발점에 섰다. 서사에 합류하기 보단 서사에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탈출해버렸다. 확실한 건 이 시리즈가 매력적인 탐사를 시작할 것이란 기대감이다. <더 비기닝>은 새로운 탐사에 앞서서 새로운 세대의 트레키를 끌어당길 거대한 떡밥 그 자체나 다름없다. <더 비기닝>은 이로서 추억을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경험이 펼쳐질 광활한 우주적 가능성을 품었다. 이는 새로운 대탐사 시대를 예언하는 확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제임스 커크의 질문에 관객은 답해야 한다.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바꾸는 거, 반칙이죠?”올드 트레키들은 “장수와 번영을! (Live long and prosper!)”그리고 새로운 트레키들은 ‘행운을! (Good luck!)’. 어떤 쪽이라도 황홀할 것이다.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신상명세를 설명하는 간략한 자막이 따라붙고, 서사의 변화를 표기하는 자막도 타이밍 맞게 등장한다. 이 사연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강조하듯 빈번하게 자막이 등장하며 화면을 수놓는다. 실제로 <알파독>은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마약딜러로 성공했지만 결국 미 FBI의 최연소 수배범으로 기록된 제시 제임스 할리우드라는 청년에 관한 서사를 극화했다.
과감하게 총질을 해대는 흑인 갱스터들이 걸러지지 않은 증오와 살의로 무장한 랩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커다란 TV로 방영된 힙합 뮤직비디오는 타락의 이미지를 쾌락의 메시지로 변형시킨 강렬한 비트가 젊은이들을 자극한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한 청년이 무심하게 소리친다. 총을 쏘면 기분이 죽이겠지! 행위의 결과적 책임보다도 행위에 대한 쾌락만이 강하게 감지된다. 흥청망청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타락의 무게를 감내할 줄 모르면서도 타락을 꿈꾼다. <알파독>은 자신이 무엇을 저지르는지 모르면서 무작정 내달리는 젊은이들의 비극을 품고 있다. 장난처럼 시작된 사연은 번져나가는 불처럼 걷잡을 수 없게 커져나간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쉴새 없이 에피소드를 만들어 돌린다. 각기 비중이 다른 다양한 인물들은 거미줄처럼 얽히며 사건을 형성해나간다. 그 사연의 중심엔 젊은 나이에 마약 딜러로 승승장구하며 호화롭게 살아가는 조니(에밀 허쉬)가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과 함께 매일같이 향락을 즐기고 흥청망청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에게 빌려간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겠다는 제이크(벤 포스터)와 심하게 다툰 후 그의 삶이 풍랑처럼 흔들린다. 제이크와 주고 받은 갈등의 전개 속에서 조니는 자신도 모르게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다. 우연히 만난 제이크의 동생 잭(안톤 옐친)을 납치한 조니는 친구인 프랭키(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잭을 떠넘기고 감시를 맡긴다. 본격적인 사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상황만을 설명하자면 상당히 심각한 범죄적 행위가 발생했다 할 수 있겠지만 실상 영화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서스펜스에 유리한 상황임에도 코믹이 발생하고 하이틴 무비의 발랄함이 감지된다. 심각한, 혹은 심각할 운명에 놓인 사연에 비해 혈기왕성한 스타일로 멋을 내기에 여념이 없는 영상엔 어떤 변수에 대한 예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가벼운 장난처럼 두서없이 부유하는 사연 속엔 그저 놀기 좋아하고 즐기기 좋아하는 청춘이 존재할 따름이다. 납치한 쪽이나 납치된 쪽이나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일종의 해프닝처럼 서로의 관계를 인식하던 이들은 때때로 끈끈한 교우 관계로 거듭나며 특별한 추억을 쌓기도 하고 미래를 기약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결말에 다다라서야 그 사태의 심각성이 각인된다.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사안이었는가를 깨달은 조니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마약을 팔고 유흥을 즐기던 20대 청년은 어른의 육체로 성장했으나 성숙하지 못한 아이처럼 미숙하기만 하다. 가벼운 리듬에 들썩거리듯 흘러가던 이야기는 결말부에 다다라 심각하게 주저앉는다. 큰 온도차가 발생한다. 흥겨운 파티와 취기로 가득하던 영화가 이내 급작스런 죽음을 대면하며 급격하게 얼어붙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알파독>은 책임보다 권력을 먼저 배운 청년들의 비극을 묘사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온도차만큼이나 충격도 크다. 하지만 이는 진지한 사유로 발전되기 위한 계기라기 보단 일회적인 충격요법에 가깝다. 다큐적인 양식을 통해 사안의 심각성을 조명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극의 말미까지 사연의 허구적 태도를 추구한다. 또한 그 상황의 주체를 묘사할 뿐 그 상황에 영향력을 끼친 배후를 지적하는데 미흡하다.
마약을 파는 조니의 아버지 소니(브루스 윌리스)는 아들의 사업을 방조하고 되려 육성한다. 부자의 기묘한 유대감이 시대적 타락을 가볍게 비웃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훈육은 아들을 망친다. 한편에서 잭은 어머니 올리비아(샤론 스톤)의 지나친 간섭에 스트레스를 겪고 이내 집에서 달아난다. 두 사연은 결국 기이한 파국을 낳는다. 이 사연은 특수하나 그 사연의 배후는 보편적인 문제를 품고 있다. 하지만 <알파독>은 그 사연의 배후보다도 그 사연의 형태를 탐닉하는데 열중한다. 결국 그 심각한 결과를 마주친다 해도 그 과정의 경쾌한 잔상이 아른거린다. 허구적인 내러티브가 진지한 실화를 압도한다. 의도보다도 수단이 앞선다. 스타일의 과잉 속에 자의식이 묻혔다. 영화의 의미가 증발된다. 기교는 성장했지만 의미를 성숙시키는데 실패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