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의 집과 사무실과 가게들이 오픈하우스
서촌이라는 이름을 걸고 문을 열었다. 지난해에 이어서 올해 또 한번,
벌써 두 번째 손님맞이였다.
지난 2013년에 시작된 오픈하우스 서촌은 지난해에 참여했던 프로그래머들의
긍정적인 호응을 통해서 지난 5월 17일부터 25일까지, 일주일 동안 두 번째 손님맞이를 마쳤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의 오픈하우스 서촌에서도 건축가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서촌에 터를 잡은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이나 사무실을 공개하는 오픈하우스와 오픈스튜디오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또한 서촌 일대에 자리한 레코딩 스튜디오와 레스토랑, 갤러리, 아트북 서점 등이 오픈스튜디오와 오픈마켓, 오픈키친 등의 테마를
내걸고 제각각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한편 오래된 한옥들이 늘어선 서촌의 좁은 골목을 함께 걸으며
그 골목에 깃든 정취를 즐기는 재미와 오랜 역사 속에서 뿌리내린 의미들을 설명하는 답사 프로그램이 서촌의 곳곳에서 진행됐다.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열의도 대단하다. 마냥 편히 즐기는 축제 현장이라기
보단 강의를 찾아온 학생들 같다고 여겨질 만큼 눈 여겨 보고, 귀담아 듣고, 때론 받아 적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대단히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그 일주일 사이에 서촌을 찾았던 이들 가운데선 이런 행사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이들도 많았을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픈하우스 서촌을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홍보
방식이 동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홍보 자체를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직접적인 홍보 수단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SNS로 국한된다. 프로그램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참가 신청을 원하는 이들은 프로그램 담당자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야 한다. 참가비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무료로 진행된다. 다만 사적인 공간이나 특정한 동선에 따르는 프로그램들이 대부분인 만큼 참가 인원이 20명 안팎으로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만큼 적극적인 홍보 자체에
대한 큰 필요성이 요구되지 않으며 실질적으로 적극적인 홍보 자체도 불가능한 면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온전히 한 사람이 주관하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건축전문 저널리스트 임진영이 서촌에서 살기 시작한 건 6년 전이었다. 유달리 건축가 사무소가 많은 동네였고, 건축전문기자인 만큼 친분이
있던 건축가들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서촌엔 건축가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나 창작자, 콘텐츠 기획자들이 존재했다. 그들을 통해서 크고 작은 네트워크와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그들이
머무는 공간에선 소소한 이벤트가 마련되곤 했다. 이를 목격한 임진영은 이 소소한 커뮤니티들을 하나로
묶을 플랫폼이 존재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서촌에 사는 건축가 황두진을 비롯한 주변의 지인들과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점차 계획이 구체화됐다. 이 동네에 터를 잡은 콘텐츠 창작자들의 교류를
통해서 형성되는 크고 작은 이벤트에 참여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각자의 집과 스튜디오를 오픈해보자. 그래서
태어난 것이 ‘오픈하우스 서촌’이다.
오픈하우스 서촌의 모티프가 된 건 올해 가을 개최를 목표로 준비 중인 ‘오픈하우스
서울’이다. ‘오픈하우스 뉴욕’이나 ‘오픈하우스 런던’처럼, 서울에 살면서도 잘 알지 못했던 어쩌면 알기 힘들었던 서울의 건축물들이나 건축가와 창작자들의 스튜디오를 일시적으로
개방해서 서울이라는 도시의 건축적인 환경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취지의 일환에서 기획되는 건축 전문 축제다.
그만큼 행사를 주관하는 기획자가 중심이 되는, 중추신경계의 역할이 중요한 축제다. 하지만 오픈하우스 서촌에선 자율신경계의 역할이 보다 두드러져 보인다. 오픈하우스
서울의 주인공이 서울의 ‘건축’이라면 오픈하우스 서촌의 주인공은
서촌의 ‘사람들’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사적인 공간이나 상업적인 공간을 개방하고 비상업적인 이벤트의 장으로 돌려서 사람들의 접근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오픈하우스 서촌과 오픈하우스
서울의 프로그램 기획 방식은 유사하다. 하지만 모든 프로그램들이 한 방향의 목표를 향해서 약진하듯 진행돼야
할 오픈하우스 서울과 달리 오픈하우스 서촌은 모든 프로그램들이 제각각 각개전투하듯 진행되는 행사다. 모든
프로그램이 서촌이라는 공통 분모를 플랫폼 위에 놓여있을 뿐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야심이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 야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오픈하우스 서촌은 서촌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의 행사가 아니다. 그저
서촌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크고 작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서 자신들만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해온
한 사람이 이에 관심을 가질만한 이들에게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뿐이다. 다만 서촌에서 공존하는
느슨한 커뮤니티들에게 어울릴만한 느슨한 플랫폼을 마련하고 평소 서로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인식했던 커뮤니티간의 교류를 도모하자는 성격의 행사이니만큼
게으른(?) 홍보 방식도 나름대로 어울린다. 물론 오픈하우스
서촌이 외부인들을 배려하지 않는 그들만의 축제인 것은 아니다. 다만 서촌에 대한 흥미가 있었던 이들에게
단순히 서촌을 전시하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 서촌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안겨준다는데 보다 뚜렷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의 터가 되는 서촌엔 전통적인 기반과 새로운 흐름이 공존한다. 덕분에 오픈하우스 서촌에 참여하는
이들이 20대부터 60대까지 고른 연령 분포도를 보인다는
것도 신선한 일이다.
오픈하우스 서촌은 지역 기반의 축제가 해당 지역의
경제 활성화라는 미명하에 되레 지역 주민을 소외시키는 행사일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다. 거창하고 화려한
축제로 지역을 포장하는 것보다도 그 지역을 구성하는 일원들의 즐거움을 도모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오픈하우스 서촌은 오픈하우스 이태원이 될 수도 있고, 오픈하우스
가로수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 플랫폼을 확립할 수 있는 자발적 의지가 필요할 뿐이다. 오픈하우스 서촌은 임진영이란 기획자를 통해서 시작됐고, 올해까진
포스터 제작을 비롯한 공적인 비용을 모두 그녀 개인이 충당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많은 비용이 드는
건 아니지만 부담되는 바가 없진 않다. 그래서 후원이나 모금을 고민하고 있다지만 아무래도 비영리 축제로서의
취지를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조심스럽다. 어쨌든 임진영 씨는 올해까진 괜찮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 대답은 마치 내년에도 오픈하우스 서촌이 계속될
것이라는 선언 같았다.
조선의 왕을 위해 피어났던 궁중채화는 왕실의
몰락과 함께 져버렸다. 하지만 지금 다시 궁중채화가 피어나고 있다. 조선의
임금이 아닌 만인을 향해서, 정성 어린 손끝에서 다시 피어난다.
채화는 어느 계절이 되면 자연스레 피어나는 꽃이 아니다. 사람의 손
끝으로 피우는 꽃이다.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드는 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쉽게 조화라고 말하기가 꺼려진다.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피고 지는,
나름대로 생의 주기를 지닌 꽃이기 때문이다. ‘비단 채’자와
‘꽃 화’자, 풀이하자면
비단으로 만들어진 꽃. 그래서 채화다. 하지만 조선 시대
궁궐에선 ‘꽃 화’자 대신 ‘빛날 화’자를 썼다고도 한다. 궁중을
장식했던 채화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채화가 단순히 궁궐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으로서만 존재했던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8일부터 25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아름다운 궁중채화’ 기획전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궁중채화 기능 보유자인
황수로 장인이 재현한 궁중채화들을 전시했는데 단순히 채화 자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수준을 넘어서 궁중 속에 자연스럽게 머물렀던 채화의 진경을
살필 수 있는 기회였다. 이 기획전은 기축년(1829년) 순조 즉위 30년을 기념하는 궁궐에서의 잔치를 축약해서 재현하며
그 풍경 곳곳에 자리한 궁중채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창경궁 명정전에서의 낮 잔치를 재현한 임금의
잔칫상 앞에 좌우로 자리한 건 하얀 벽도화준과 붉은 홍도화준이다. 여기서 화준이란 쉽게 말해서 꽃병이란
의미에 가깝다. 하지만 왕의 주변을 장식하는 꽃답게 꽃나무 자체를 병에 세웠다. 그 크기와 화려함만으로도 위엄이 느껴지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벽도화준과
홍도화준의 꽃은 오얏꽃이다. 오얏꽃은 ‘오얏 이’자의 한자어로 표기되는 조선의 이씨 왕조를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에 이 두 화준은 그야말로 왕을 상징하는 실수목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크고 화려한데 꽃잎과 잎사귀 사이마다 자리한 나비와 벌, 꿩과 공작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고 화준의 꼭대기에 자리한 한 쌍의 봉황도 올려다 보인다. 이는 임금을 상징하는 오얏꽃에 몰려든 군신들을 의미한다. 이는 곧
두 화준 자체가 조선왕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 화준 너머로 1500명의 문무백관들이 쭉 앉아있었는데 이들
모두 ‘잠화’라는 머리꽃을 꽂고 있었다고 하며 그 외에도
악사나 무희들 심지어 시중을 드는 이들까지도 모두 머리에 잠화를 꽂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금의
진찬상 위의 고임음식에도 ‘상화’라 불리는 꽃이 장식돼 있었고, 문무백관들의 독상에도 모두 이와 같은 꽃장식이 돼있었다고 한다. 물론
잠화나 상화는 모두 생화가 아닌 채화였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절대권력을 자랑하는 임금의 어명을 통해서 전국의 다양한 생화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굳이 채화를 제작해서
사용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유교를
숭상했던 당대의 조선의 왕실이니만큼 솔선수범해서 유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존중했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꽃을 꺾어서 궁궐의 장식물로 쓸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의미를 담은 꽃이 시든다는 건 그만큼 불경한
의미로 읽힐 수 있으니 생화 대신 불변하는 채화를 제작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사실 채화의 제작 과정은 만만치 않다. 일단 조선 시대 기록의 고증에
따르는 만큼 천연 재료 기반의 제작방식을 고수한다. 천연 재료로 만든 천에 천연 염색은 물론 3년 동안 숙성시킨 밀풀을 바르고, 본드 대신 아교로 접착한다. 그래서 염색한 천은 다듬이로 두드린다. 이는 천연 소재의 천을 가위로
자르면 올이 쉽게 풀릴 수 있기 때문에 다듬이로 두드려서 씨줄과 날줄의 결을 으깨어 천을 단단하게 만드는 거다.
게다가 윤기도 더해져서 보다 자연스러운 빛깔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단단해진 천을 열
겹 정도 겹쳐서 꽃 모양의 본을 뜬 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한번에 가위로 오린다. 그렇게 오려낸 한
장 한 장에 밀랍을 발라 코팅한 뒤 인두로 지져서 자연적인 꽃잎의 형태를 만드는데 그야말로 채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인 셈이다. 그렇게 완성된 꽃잎을 네다섯 겹으로 겹쳐서 모아 한 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꽃잎들을 네다섯 장씩 모아서 꽃 한 송이를 조립하고 거기에 꽃술을 붙이면 꽃이 완성된다. 본래
꽃술은 노루 꼬리털로 만들었다지만 지금은 구할 수가 없으니 모시나 삼베로 만든다. 모시나 삼베를 꼬아서
가느다란 꽃술의 형태를 만든 뒤 꿀과 아교를 발라 송화가루로 채색한다. 이렇게 완성된 꽃을 평균적으로
다섯 송이 정도씩 가지 하나에 달게 되는데 이를 한 타라고 한다. 이때도 대나무로 만든 죽실을 이용해서
꽃송이를 가지에 고정시킨다. 홍도화준이나 벽도화준은 2000개
가량의 타가 모여서 완성된다. 화준 하나마다 대략 만 송이에 가까운 꽃으로 이뤄지는 셈이다.
채화의 꽃과 잎은 모두 만들어낸 것이지만 채화를 매단 가지는 자연 가지를 꺾어다가 쓴다. 오래된 매화의 가지를 구해서 바싹 말려서 쓴다. 조화와 채화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된다. 조화와 달리 채화는 생사의 경계가 존재한다. 마치
생화가 시들듯이 채화도 시든다. 천연염료를 썼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바래지고, 습도가 높으면 꽃잎이 힘을 잃는다. 채화가 사람의 손에 닿아야 피는
꽃이라는 건 그래서다. 사람의 손으로 지속적으로 관리해줘야 한다. 조선시대
궁궐에선 채화를 만드는 장인인 화장이 15명 정도 있었다는데 상시적으로 궁궐의 채화를 관리했다고 한다. 게다가 꿀을 채취하는 꿀벌의 분비물인 밀랍으로 꽃잎을 코팅하고, 송화가루를
꽃술에 바르는 만큼 채화 역시 작게나마 생화의 생기를 품고 있다. 실제로 2007년 덕수궁에서 열린 채화 전시에선 문을 열어놓자 벌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궁중채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자연스레 그 명맥이 끊겼다. 지금은 가까스로 그 명맥을 일부나마 재현하고 있지만 사실상 오늘날엔 일상에서의
실용성을 완전히 상실한, 박제화된 전시품에 가깝다. 그만큼
황수로 장인은 현시점에서 모색할 수 있는 채화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그 힌트를 찾은 건 먼 프랑스에서다. 19세기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실크 소재의 꽃을 만들어온 프랑스의 르제롱 가문은 4대가 지닌 지금도 꽃을 만드는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격변기를 거치며 몇 번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그 명맥을 이어온 건 시대와 어울리는 방식으로서 전통적 기술을 실용화시키고자 하는 노력과 탐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20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다양한 모자의
장식품으로서 유행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엔 크리스찬 디올, 지미 추 등의 오트쿠튀르와의 파트너십을
통해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채화 역시 현시대에 어울리는 실용적 가치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재현해야 할 채화의 종류가 많다는 건 일종의 기회다. 그만큼
채화의 실용성을 탐색해볼 수 있는 기회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용적인 가치 창출이야말로 전통을
보존하는 최선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조선에서 피어났던 채화를 다시 피워내는 노력은 어쩌면 불멸의 상징이길
바랬던 채화에 진정한 영원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일지도 모른다.
든 자리도 알고 난 자리도 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건 없어졌고, 없어야 할 것이 굴러다녔다. ‘내 집’에선 상상할 수 없던 일이 결혼 후 ‘우리 집’이 생기면서 벌어졌다.
“사람을 갑자기 바꾸려고 그러면 안돼. 그냥 서로 맞춰서 살아야지.” 장모님께선 신신당부하셨다. 하지만 인내심이 바닥을 치는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내는 종종 ‘조커’ 같았다. 집안 곳곳을 무질서하게 어지럽혔다. 여기가 신혼집인지 고담시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 무찔러야, 아니, 바로잡아야 했다. 질서를 확립해야만 한다. 복면을 쓸 필요까진 없었다. 대신 단호하게 언어를 던져야 했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가방은 제발 식탁 의자에 던져두지 말라니까.” 그렇게 옥신각신한 이후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가방은 주문이라도 받을 사람처럼 식탁 의자에서 발견됐다. 종종 쇼파에서도 목격됐다. 목탁을 두드리며 반야심경이라도 읊는 마음으로 그 무질서를 견뎠다. 사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내로 업데이트 되기 전, 그러니까 여자친구 버전이었던 당시에 그녀가 혼자 살던 집에서도 이런 풍경을 적잖이 목격했으니까. 사실 낯익은 그림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정리라는 단어와 멱살이라도 잡은 양 생활하는 누나를 보며 자랐고, 덕분에 여자와 정리라는 단어는 강남구와 캘리포니아주처럼 요원한 관계임을 암기해 왔다. 문제는 그것이 더 이상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 한가지 개념을 정리해보자. 간혹 청소와 정리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정확한 의미부터 짚어보자. 청소의 사전적 의미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함’이며 정리는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함’이다. 그러니까 바닥에 널브러진 지갑이나 옷 따위를 치우고 나서 우리가 ‘바닥을 깨끗하게 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간단히 정의해서 날 잡고 하는 게 청소라면 언제라도 그러하듯이 해야 하는 게 정리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밑줄 쫙. 청소를 하겠다고 정리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그냥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씀. 청소를 위한 정리란 말 그대로 청소 직전의 일상적인 행위 중에 불가피하게 어질러진 것을 치운다거나 청소기 헤드에 걸릴만한 것들을 임시적으로 옮기는 하등의 행위일 뿐이지 약속된 위치에 두지 않은 것들을 몰아서 제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노동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건 청소가 아니라 온전히 정리에 관한 것이다. 솔직히 청소는 주기적인 노동일 뿐이지 일상적인 습관이 아니니까. 중요한 건 정리가 되지 않는 상태에선 청소도 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물론 항상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 깔끔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깔끔한 상태를 좀처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정리가 안된 상태에선 청소도 힘드니까, 결국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고.
정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리의 대상이 되는 물건의 위치를 지정해주는 것이다. 자주 쓰는 물건과 그렇지 못한 물건을 구별하고 위치가 얼마나 자주 바뀔 것인지 그 가능성을 탐색한 뒤 물건의 용도와 어울리는 동선을 생각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옷방에 국자를 두지 않고, 부엌에 옷걸이를 걸지 않는 이치랄까. 물론 이처럼 명확한 경우엔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만 공간의 특성에 딱 떨어지지 않는 물건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고민이 필요하다. 집마다의 구조적인 특성에 기반한 노하우도 요구된다. 스스로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체 그건 어디 있는 거지?’ 당장 필요한 무언가가 약속된 위치에 놓여있지 않아서 생기는 혼선에 익숙하다면 정리를 못하는, 어쩌면 안 하는 쪽인 셈이다. 아내를 비롯해서 몇몇 여자들이 가끔 핸드백이나 가방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찾는 모습을 보는데 그때마다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작은 가방에도 작게나마 별도의 주머니가 있는데 굳이 그 핸드백 안의 잡동사니들 속으로 핸드폰을 묻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리곤 매번 겨우내 핸드폰을 발굴한다. 그때마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긴장하기도 하면서. 문제는 실제로 잃어버렸음에도 잃어버린 건지 모르고 뒤늦게 그 상황을 파악하는 순간도 존재한다는 것. 정리란 물건의 공간을 확정 짓는 동시에 공간의 용도를 명확히 가져가는 일이다. 단지 집 안에서만 쓸모 있는 기술이 아니다. 정리가 필요한 건 비단 ‘집 구석’만은 아니니까.
원래 나는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짐에 불과한 것들을 구별해서 최대한 신속하게 버리는 편이기도 하다. 방의 면적엔 한계가 있었고 넘치는 잡동사니들을 수납할 만한 공간의 견적을 파악해서 채워 넣는데 이골이 났다. 문제는 그런 덕분인지 빈 공간에서 어떤 강박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신혼집을 방문한 몇몇 지인은 말했다. “신혼집이 아니라 이미 몇 년 정도 살아온 집 같은데?” 그러니까 무언가 꽉 채워진 공간 같다는 인상을 주는 건 아내보단 내 욕심이 반영된 결과다. 처음 신혼집으로 이사하던 날부터 집정리의 윤곽이 잡혀가던 3일 간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주도했던 건 아내가 아니라 나였다. 지금도 무언가 자리를 잡아야 할 가구가 생기면 으레 자리를 지정하는 건 아내보단 나다. 물론 의견을 교환하고 수렴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하는 건 주로 내 몫이 됐다.
아무래도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가 되듯이 더 많이 정리하는 쪽도 약자가 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빨래가 마르면 당장 치워야 속이 편한 쪽이 전전긍긍하다가 빨래를 걷게 된다. 설거지도 마찬가지이고, 청소 역시 그렇다. 그러다 보니 살짝 억울해지는 순간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정리 페티쉬라도 있는 것마냥 정돈된 이미지로부터 쾌감을 느낄 때도 있다. 어쩌면 이건 피곤한 강박일지도 모른다. 규칙을 정하고 따르길 설득하며 실태를 확인하는 쪽이 자연스레 더욱 피로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딱히 정리에 신경 쓰지 않는 아내가 편해 보이기도 하고. 물론 아내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식탁 의자나 쇼파에서 아내의 가방이나 핸드백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고, 집 안을 떠돌아다니던 물건들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물건의 가짓수가 늘고 있으니까. 반대로 내가 무장해제되는 순간도 생기는데 ‘포기하면 편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는 순간도 있다고나 할까. 노력하는 속도가 빠를지, 포기하는 속도가 빠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애초에 정리는 내 몫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발만 맞춰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결국 우린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는 과정이 필요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건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장점이 될 수도 있더라.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보다 인정받는 일이 있다면 생색도 낼 수 있기도 하고. 가끔 머슴처럼 살고 있다는 기분은 그저 착각이겠지.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