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매틱은 확실히 편하다. 하지만 스틱 한번 제대로 잡아보면 그 ‘손맛’을 잊기 힘들다. 물론 기어보다도 중요한 건 타고 싶은 차 그 자체다.
친구에게 물었다. “수동적인 여자와 능동적인 여자 중 누가 좋아?” 류현진의 직구처럼 답이 날아왔다. “낮에는 수동적이고 밤에는 능동적인 여자!” 그야말로 능동적이다.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든, 수컷들은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운 여자’를 원한다. 이왕이면 침대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능동적인 여자를 원한다고 말하는 건 한번 어떻게든 ‘해볼라꼬’ 노력했던 기억의 산실일 것이다. 그러니 능동적인 여자가 좋다. 혹시 능동적인 여자 이상의 자동적인 여자라면, 주님께 영광.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라. ‘너무 수동적인 여자친구 때문에 고민입니다.’ ‘관계시 수동적인 여자는 어떻게 적극적이게 만들까요?’ ‘연애를 할 때 수동적인 여자 아닌 능동적인 여자 되라?’ ‘능동적인 여자의 섹스.’ ‘남자는 능동적인 여자를 좋아한다.’ 등등. 세상 수컷들의 관심은 로마가 아니라 섹스로 통한다.
‘수동적’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란 이렇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의 작용을 받아 움직이는. 또는 그런 것.’ 반대로 ‘자동적’은 이렇게 정의된다. ‘다른 힘을 빌리지 아니하고 저절로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또는 그런 것.’ 그러니까 수동적인 여자란 달과 같은 존재다. 자신을 비춰줄 남자가 필요하다. 상대의 액션에 따라서 리액션도 제각각이다. 흥미롭지만 속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다. 자동적인 여자란 자연히 태양과 같다. 주변에 빛과 온기를 전한다. 누리고 싶은 존재다. 에너지가 넘친다. 하지만 때론 견딜 수 없게 뜨겁다. 지나치게 주장이 강해서 지칠 때도 많다. 고로 섹스를 기준으로 여성의 수동성과 자동성을 판단한다는 건 다분히 수컷의 본능일 뿐이다. 게다가 남녀가 만나서 발정기의 개처럼 섹스만 하는 건 아니다.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도 ‘밤이 오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사나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이순재 선생님의 특별한 제안에 귀가 솔깃해질 나이가 온다. 인생은 길고, 섹스는 짧다. 수동적인가, 자동적인가라는 이분법적인 구별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얼마나 매력적인가라는 기준이다.
페로몬 향수보다도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지 몰라도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일지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물론 니체는 ‘두 사람이 있는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니체는 평생 혼자 살았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말은 자웅동체가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전략이 필요하다. 수동적인 여자와 자동적인 여자를 구별하는 건 남자일지 몰라도 기준은 분명 대상이 되는 여성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성격을 자신의 매력으로 승화시키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필요하다.
“아니, 1년을 사귀었는데 한번을 안 해주는 거야. 내가 무슨 스님이냐? 그래서 1년 되는 기념일에 해외로 여행을 가기로 했어. 같이 해외까지 나가서도 설마! 그리고 역시 드디어! 했지. 했어. 그리고는 한국으로 돌아왔어. 아, 이젠 좀 쉽겠지. 아놔, 그런데 이게 뭐야. 또 안 해주는 거야. 내가 걔랑 한 3년 사귀었는데 1년에 한 두 번했나? 그런데 진짜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지금도 종종 걔가 생각난다니까? 헤어진 지가 언젠데.” 정말 아이러니한 사연이다. 쉬운 여자가 아니었기에 미련이 남는다. 자동적인 여자가 보다 좋다고 느낀다는 건 감정적 판단이 아니라 경험적 믿음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를 리드해야 한다고 믿는다. 침대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녀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말이 없다. “그냥 너 편한 대로 해”라는 말을 믿었다가 맘 상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차라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거나 아예 상황을 리드해주는 자동적인 여자가 수동적인 여자보다 상대적으로 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연상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의 심리도 어쩌면 이런 것이다. 그녀들은 남자를 자신을 위한 지갑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댈 수 있는 편안한 파트너십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남녀란 섹슈얼한 긴장감이 필요한 관계다. 연인이 아니라 모자지간이 돼선 곤란하다. 당신이 원하는 건 연애이지 육아가 아니니까. ‘나는 솔직하고 털털한 여성이야. 그게 매력이지’라고 믿는다면 당신이 구애하는 그 남자에게도 그런 동성 친구 몇 명쯤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남자의 ‘베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정신 차려야 한다.
“클럽에서 만난 두 명의 여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해봐. 한 명은 정말 화끈하게 잘 놀아. 그런데 그 옆에 좀처럼 말도 없고 새침한 여자가 앉아있어. 둘 다 예뻐. 섹시해. 일단 그날은 화끈한 여자랑 자겠지. 그런데 아마 그 다음 날엔 그 옆에 있는 여자에게 연락할걸.” 좀 놀아본 지인의 말이다. 모든 남자의 심리가 꼭 이렇진 않다. 하지만 참고할 필요는 있다. 물론 내숭 떠는 여자는 매력이 없다. 정확하게는 내숭만 떠는 여자는 별로다. 물론 적당한 애교에 녹지 않는 남자는 드물다. 하지만 꼭 콧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그저 상냥하게 한번 거절해보시라. “미안하지만 안돼.” 당신의 자동적인 여자의 유전자를 억누르고 수동적인 여자의 탈을 써보라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먹기 쉬운 떡은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먹기 힘들어지면 애써 손을 뻗는다. 남자의 마음도 간사하다. 쉬운 여자가 되느니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마음을 얻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체질을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적당히 조절하라는 말이지. 지나치게 수동적인, 의존성이 심한 여자는 피곤하다. 누구라도 쉽게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적절한 수동적 태도는 이성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매력이 될 수 있다. 채찍질을 한번 했으면 당근을 하나 물려줘야 하는 법이다. 긴장과 이완의 균형처럼 수동과 자동의 균형을 맞추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남자를 리드하는 건 좋다. 처음부터 모든 패를 보여줘선 곤란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을 아낄 필요가 있다. 좋아한다면 모든 것을 줄 필요가 있다. 다만 일방적이거나 쉽게 줘선 곤란하다는 말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에피소드에서 캐리는 상담사에게 하소연한다. 연애도 잘 안 풀리고, 인생도 꼬여간다며, 자신이 만난 남자들이 왜 다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그때 상담사가 말했다. “당신이 만난 이상한 남자들의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죠.” 모든 이유는 당신의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자동적인 여자이건, 수동적인 여자이건, 남자의 선택을 기다리지 마라. 스스로를 뽑기 인형이라 여기지 않는다면. 선택을 이끄는 여자가 돼야 한다. 매력 있는 여자가 돼야 한다. 남자가 원하는 것도 그런 여자이니까.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우리 그만 헤어져.” 아니, 너는 비빔밥 집에서 무슨 그런 말을 하니? 이유를 물었다. 달래도 봤다.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고도 해봤다. 그런데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더라. 언제나 너에게 최선을 다했고, 널 위해서 희생했고, 배려했는데, 이건 배신이야, 배신! 슬픔의 끝에서 파도처럼 분노가 밀려왔고, 분노에 휩쓸려 나가다 보면 망망대해 같은 외로움이 펼쳐졌다. 아, 글쎄, 이소라 누나가 부른 것처럼 바람이 분다니까. 그리고 김동률이 노래합니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아, 정말 어떻게 안될까. 그런데 결국 그녀가 돌아왔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잘 있냐는 인사가 무색할 만큼. 그런데 이 노래가 이별 후 재회하는 노래였던가? 그걸 잘 몰라서였을까. 그 뒤로 우린 네 번 헤어졌고, 다섯 번째에서야 비로소 진짜 헤어졌다.
<연애의 온도>는 장영(김민희)과 이동희(이민기)의 이별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건 이별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지난하다 못해 지긋지긋하다. 한때 사랑했던 사이라는 게 어이 없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 개차반 같은 공방이 펼쳐진다. 뒤에선 울고 불고 짜다가도 앞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을 듯이 이빨을 내밀고 으르렁거린다. 그런데 그 관계가 우연한 계기로 다시 회복된다. 거짓말처럼 붙어먹는다. “나 너랑 처음 하는 것처럼 떨려.” “나도 그래.” 몇 번이나 함께 뒹굴었던 그 방의 침대에서 마치 처음 자는 것처럼 말하고 진짜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때 우리가 대체 왜 싸웠지?” 아무도 모른다. 그게 뭐 대수인가.
희한한 일이다.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망쳐놓은 뒤에야 풍요로웠던 시절이 간절해진다는 것이. 누구나 러브 스토리를 꿈꾼다. 솔로일 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고, 공자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나타나기만 해봐라! 금이야 옥이야 물고 빨며 간도 쓸개도 다 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시작할 때만큼은 귀엽고 예뻐죽겠지. 그리고 점점 변한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가 ‘이 정도도 못 참아?’에서 ‘이 정도로 해줘도 저래?’로 진화한다. 편하다는 것과 막 대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다 이해하고 뭐, 그런 거 아닌가? 결국 그 관성은 이별에 부딪혀서야 멈춰서고 되돌아본다. 그리고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덕분에 헤어진 연인 가운데 몇몇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대부분 다시 헤어진다.
<연애의 온도>는 이별의 과정 이후의 결과를 전시하며 시작된다. 그 이후의 재회를 통해서 이 남녀가 일찍이 어떤 방식으로 헤어졌을지 깨닫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건 동어반복이다. ‘헤어진 남녀가 다시 만나서 잘될 확률은 3%’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불안하지만 ‘로또에서 1등이 될 확률이 814만분의 1이라는데 매주마다 1등이 나온다’니 희망을 갖고 다시 사랑한다 말한다. 미안하지만 관계에서 로또는 없다. 당신의 애인은 복권이 아니다. 그러니 서로를 기꺼이 감내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결국 당신 혹은 내가 변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난 그녀와의 다섯 번째만의 이별에서야 그걸 알았다. 당장 내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나도 서로를 변화시킬 수 없음을, 그걸 알 때 비로소 진짜 이별했다. 그날은 잠도 잘 왔다. 깨진 접시는 다시 붙일 수 있어도 선명한 금은 남는다. 더 이상 예전의 접시가 아니다. 박살난 관계에서도 금은 선명하다. 단지 망각할 뿐이다. 사실 그 금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봐야 부질 없다는 속설이 돈다. 그렇게 당신도, 나도 이별했다. 이별했었다.
<연애의 온도>에서 배우는 실전 연애 팁
DO 기다림
헤어지자는 그녀 혹은 그를 당장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은 버려라. 즉흥적인 흥분으로 내뱉은 말이라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준다. 그러니 일단은 시간을 갖고 생각해라.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대에게도 시간을 줘야 한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이별이라면 당장의 어떤 노력에도 되돌리기 힘들 거다. 그러니 당신에게도 감내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Don’t 진상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뭐, 여기까진 괜찮다. 하지만 “야!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부터 “남자(여자) 생겼어? 그 새끼 누구야?” 같은 막말을 내뱉는다면 당신 역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잡고 싶으면 당신부터 잡을만한 사람이 돼야 한다. 헤어지겠다는 결심을 정말 후회 없는 결정이었다고 추억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깊은 배려라면야 어쩌겠냐마는.
연애는 엄두가 안 난다. 하지만 사랑은 하고 싶다. 연애를 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날 엄두는 안 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면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딱히 겨울이라 그런 건 아니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 그냥 그렇다고 핑계를 대보자. 차라리 그게 낫겠다. 누군가에게 고백한다는 건 힘든 일이다. 뻥 차여 시퍼렇게 마음이 부어 오를까, 용기 내어 전한 마음이 냉랭하게 얼어붙을까, 이래저래 걱정스러운 일이다. 다들 사랑은 하고 싶다는데 정작 용기가 없어서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호감에서 죽어버린 사랑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구한다는 말도 구라는 아닐 게다. 용기가 없으면 미인은 고사하고 여자 곁에 갈 수도 없지.
누군가 내 마음을 받아줄 사람이 있었고, 그렇게 쉴 마음이 있어서 안온했다. 지난 연애가 그랬다. 누군가로부터 마음을 주고 받는다는 것이 그런 정신적 포만감을 안기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만큼 뒤늦게 깨닫는 괴로움이 만만치 않았다. 재회를 반복하며 마음을 몰아치던 세찬 격량을 여러 번 겪고 난 후, 비로소 난 그 평온함을 인정하게 됐다. 그 잔잔한 평온이 날 살게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마치 지난 교감들을 부정할 것마냥 어느 순간 난 편안하게 그 이별에 안착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랬다. 연애도 칼로리를 소모하는 일이라고, 그만큼 피곤하고 피로해지는 일일 수밖에. 그 피로감에서 벗어난다는 걸 실감하던 순간에 이별이 가능해졌다. 날 죽일 것 같던 일이 날 살리는 일이 됐다. 조금은 허무했고, 조금은 안도했다. 혼자서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난 조금 슬펐고, 조금 기뻤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싶다. 아니, 사랑하고 싶다. 감정이 부딪히고 뒤엉켜 구르다 이내 나자빠져도 그게 참 좋은 일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대화할 상대를 쉽게 찾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가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무덤덤하게 누르며 어느 새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는 기분으로 살아간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누구나 다 외롭다. 매한가지다. 다만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리저리 손을 뻗어보는 사람이 있고, 그 외로움을 회피하려 스스로 움츠려 들어 그 마음을 감추는 사람이 있다. 난 쉽게 움츠려 드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손을 뻗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이 나이 먹도록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왔다. 안다. 인정한다. 난 내가 세상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군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그것이 날 외롭고 위태롭게 만드는데도 스스로 그것을 감추고 덧대려 허둥대면서도 정작 타인 앞에서 꼿꼿이 얼굴을 들고 살아가느라 애쓰는 인간이라는 걸 안다. 그게 자존심이라 믿었던 세월도 있었고,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믿었던 나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닌 것 같다.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 나를 사랑해준다면, 그리고 내가 그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다. 외로운 일이다. 그 단 한 사람을 찾기란, 그리고 그 단 한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주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린 점과 같은 존재다. 세상이란 단면 위에서 먼지처럼 흩날리며 살아간다. 그 한 점과 한 점이 만나 선을 이루기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하지만 이젠 선을 그리고 싶다. 날 이어줄 한 점이 필요하다. 날 이 한 점에서 구해줄 인연이 문득 그리워졌다. 이제 다시 선이 되고 싶다.
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지금 막 미국에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친구 사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특히 남자에 대한 견해가 판이하다. 조건을 꼼꼼히 따지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지닌 약혼자가 있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최근 새 남자친구와 이별을 겪었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왔지만 두 사람의 기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hristina Barcelona>(이하, <내 남자>)는 심플한 원제처럼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바르셀로나’에서 겪은 이야기다. 건축학 석사논문에 도움이 될만한 가우디 건축물을 기대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새로운 경험과 상대를 원한다.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전혀 다른 꿍꿍이는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밀어낸다. 물론 그 계기는 엉뚱하게 찾아온다. 우연히 미술관에서 마주친 화가 안토니오(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반한 크리스티나는 비키와의 식사 테이블로 찾아와 여행에 초청하겠다는 안토니오의 뻔뻔한 청을 받아들인다. 비키는 이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결국 그 여행에 합류하게 되고 그 여행은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이탈시킬 만한 비밀을 선물한다.
크리스티나의 위궤양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비밀을 얻게 된 비키는 이로 인해 자신의 일생을 뒤흔들릴만한 충동을 겪게 된다. 한편 여행을 병석에서 보낸 크리스티나는 다시 바르셀로나에 돌아와 안토니오와 연인이 된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유명한(!)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나타나고 기묘한 삼각관계가 이뤄진다. <내 남자>는 두 개의 삼각관계를 중첩하는 세 여자와 한 남자 사이에 놓인 기묘한 사연을 펼쳐놓은 영화다. 한 쪽은 비밀에 휩싸여 있으며 한 쪽은 기묘하게 얽혀있다. 누군가에게 익히 비정상이라 불릴 만한 관계 속에서도 로맨스는 이뤄지고 일상은 반복된다.
특별한, 혹은 기이한 사연을 담담하게, 혹은 유쾌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그 사연을 대하는 영화의 관점이 한없이 사소한 까닭이다. 동시에 리드미컬한 내레이션과 경쾌한 배경음이 불미스러움으로부터 그 인물들의 행위를 구출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두드러지지 않지만 소소하게 묻어나는 유머 감각이 산재한 이 막장 스토리를 조율하는 우디 알렌의 감각적 리듬이 영화의 중심에 있다. 저마다의 감정을 이루고 동선을 펼치는 캐릭터들의 조합은 어떤 약속도 없는 이야기를 펼쳐내듯 흥미롭게 사연을 구성한다. 우연적인 감정과 필연적인 본능에 휩싸일 때 사연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튄다. 그러나 그 예기치 못한 사연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주체들을 결심하거나 체념하게 만든다.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각각 예상 밖의 경험을 얻는다. 안토니오와 그의 전처 마리아는 그 경험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그 경험을 통해 비키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가치관의 진동을 느끼고, 크리스티나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가능성을 발굴한다. 자신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일상을 체험하거나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성을 발견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비키와 크리스티나에게 불가능한 영역을 선사하거나 선물한다. 물론 대단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경험담을 관통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 남자>가 그저 그래서 허무할 것 같은 이야기 따위는 아니다. 형태적으로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비키는 자신의 약혼자와 결혼한 채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또 다른 충동을 꿈꾼다. 하지만 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의 인생에 미묘한 변화를 부르는 첫 번째 도미노가 된다. 약혼자와의 잠자리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거나, 아무런 재능도 없다고 믿어지는 삶에서 뷰파인더의 가능성을 찾는다. 또한 서로 사랑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믿는 안토니오와 마리아 역시 크리스티나를 통해 완전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만족스런 일상을 보낸다.
우디 알렌은 항상 인물들의 작은 사연들을 관망하듯 수집한 뒤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그 세계엔 윤리적 태도보다도 결과적인 이야기의 형태만이 끝내 자리잡는다. <내 남자>도 그 과정 끝에 남는 어떤 결과만이 존재할 뿐이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훈계를 위해 복무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저 스토리텔링으로서 순기능에 충실하며 인물들은 저마다의 삶을 산다. <내 남자>는 그 사연이 부르는 후일담이 대단하다기 보단 순간을 채우는 관계와 사건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흥미로운 경험담을 듣는 즐거움에 가깝다. 결국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차례 경험담을 거친 인물들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 뭔가 대단한 형태의 결과를 기대한다면 한편으로 허무에 시달릴지 모를 일이나 그저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면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만하다. 훌륭한 재담꾼의 이야기는 그저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만족감을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간과할 수 없는 감상포인트가 된다. 특히 페넬로페 크루즈는 남미의 태양처럼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낸다. 물론 한 가지 애석한 점은 심플하고 도도한 원제를 천박한 막장 드라마 반열에 올린 한국개봉명이랄까.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제목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만족감도, 하나 같이 깎아 내릴만한 작명 센스다.
그토록 많은 연애 지침서가 존재하는 건 그토록 많은 연애 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뻔한 문장들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반증이리라. 그건 마치 오래된 잠언처럼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싶은 것뿐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로맨틱 코미디 혹은 멜로처럼 특별한 케이스를 빙자하고 있지만 뻔한 결과론을 담고 있는 게 인지상정. 다양한 커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버라이어티하게 나열하는 가운데 우연과 필연의 법칙 속에서 엮이고 풀리는 관계를 그려나간다. 주어와 보어의 뉘앙스만으로 감지되듯 남성보단 여성에 대한 편애가 좀 더 강하지만 이는 귀여운 투정처럼 넘어갈만한 문제다. 남성을 여성의 속죄양 취급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다양한 에피소드가 일관되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건 문제다. 비중 차가 존재하는 각각의 로맨스를 분자 배열한 뒤 충돌시킨 반응의 에너지 값이 생각보다 미약하다. 이름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배우들의 면면보다 나아 보이는 구석이 없다. 사랑에 목매지도 간과하지도 말라는 것, 결론은 누구에게나 뻔한 교훈이다. 중요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열되는 로맨스 속엔 상황에 대한 인지가 존재할 뿐 진심을 전달하는데 인색하다. 그저 질문을 던지고 농담으로 받아 치듯 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