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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도 아닌 1989년이다. 전작이라고 명명되어야 할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의 개봉연도가 말이다.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이하, <해골의 왕국>)은 그로부터 20년에서 1년이 모자란, 무려 19년 만에 제작된 속편이다. 이는 분명 어떤 이들에겐 상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그리고 해리슨 포드가 함께 한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를 21세기에 스크린으로 볼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도 못했던 올드팬들에게 <해골의 왕국>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어나보니 산타 할아버지가 왔다 가셨더라, 는 말처럼 진위만 분명하면 이유 따위야 알 바 아니란 듯이 들뜨게 되는 일이다.

어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가죽 중절모와 무엇이든 낚아채고 때론 밧줄처럼 활용되는 채찍은 20여 년이 지나도 쓸모가 대단하다. 물론 흰머리가 무성한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 이하 ‘인디’)는 분명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실감하게 하지만 여전히 그는 지적이면서도 화끈하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조롱 섞인 위트를 날릴 줄 알며 코 앞까지 닥친 위기 앞에서 순발력 있게 기지를 발휘하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예전 같지 않다고 한숨 쉬지만 여전히 그는 쉼 없이 달리고 주먹을 날리며 악에 대항한다.

물론 20세기 아날로그 방식으로 채워진 <인디아나 존스>는 흡사 어드벤처 영화의 유물이라 할만한 것이다. 특히나 디지털 방식이 대세인 21세기에서 그것은 실로 시대착오적이라 할 만큼 쉰내 난다고 소박맞을 물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이하드 4.0>으로 돌아온 존 맥클레인이 ‘죽지 않아’를 증명했듯 인디아나 존스 역시 21세기에서 현저하게 불필요한 노동으로 분류된 아크로바틱 액션의 진가를 여지없이 발휘한다. <해골의 왕국>은 철저하게 <인디아나 존스>라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고대 유물에 얽힌 전설, 그리고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정, 유치하고 조악해 보이지만 마음을 설레게 하는 모험심을 유발하게 만드는 낭만. <해골의 왕국>은 <인디아나 존스>가 관객에게 쥐어주던 의미를 간과하지 않았다.

세월의 변화를 증명하듯 전작에서 악의 축으로 등장하던 나치는 사라지고 빈자리를 메운 건 공산진영의 소련군이다. 1930년대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두르던 전작들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건 비단 영화 밖만이 아니다. ‘Better dead than red(빨갱이가 되느니 죽음이 낫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적나라하게 증명하듯 <해골의 왕국>은 미소진영의 대립이 한창이던 1950년대 냉전시대의 미국에 서있다. 게다가 의미심장하게도 <해골의 왕국>은 <인디아나 존스>시리즈의 서막인 <레이더스> 말미에 등장했던 네바다 군사기지 51구역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덕분에 <레이더스>에서 인디가 찾아냈던 성궤도 잠시 형체를 드러낸다.- 그곳에서 그들은 포로로 잡은 인디에게 무언가를 찾아내라 종용한다.

<인디아나 존스>에 대해서 알만큼 아는 당신이라면 이 시리즈가 지닌 이야기 맥락이 예상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몰랐다면 이제라도 알아둬라.- 숨겨진 보물과 이를 악용하려는 무리들의 음모에 맞서 인디는 한두 명의 파트너와 함께 모험을 감행한다. 그리고 숱한 난관을 이겨내고 보물을 찾아내지만 이를 소유하려는 악은 소멸하고 인디는 살아서 제집으로 돌아온다. <레이더스>에 등장했던 메리언(카렌 알렌)이 재등장하고, 이전에 그녀의 아들이자 인디와도 깊은 관계임이 밝혀지는 머트(샤이아 라보프)가 동행하는 모험은 원전에 충실한 반가운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신선한 감각이 수혈된 것이다. 다만 인디의 아버지 헨리(숀 코네리)는 죽어서 사진으로만 등장한다.-숀 코네리가 나이 관계상 출연제의를 고사했다고 한다.-

동세대를 배경으로 하는 블록버스터와 달리 인디가 ‘공산당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1950년대가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의 배경이 된 건 인디의 나이를 고려한 것이자 모험의 실효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역동적인 액션을 펼쳐야 할 인디의 나이를 고려할 때, 1930년대를 배경으로 했던 전작 시리즈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거니와, 성스런 유물을 악용하려는 무리들이 존재해야만 모험은 이뤄진다는 점에서 냉전시대 소련은 나치만큼이나 유효한 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냉전의 이념대립이 구시대의 산물이 된 요즈음에 소련이 전작의 나치들마냥 악의 무리처럼 활용된 것이 불편한 사실이 될 수 있겠지만 전작들이 그러했듯 <인디아나 존스>에서의 악은 그저 모험을 성립시키는 구실로서 활용되는 것에 불과했을 뿐, 불필요하게 감정을 유발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우크라이나 억양의 이리나 스팔코 역으로 케이트 블란쳇이란 매력적인 배우가 악역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빼면 전작들에서 등장했던 소모적인 악역들과 <해골의 왕국>에서의 그들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해골의 왕국>은 올디스(oldies)한 시리즈의 감성을 현대에서도 구디스(goodies)하게 살렸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단지 인디아나 존스의 채찍질이, 그리고 그의 치킨 레이스가, 그리고 세월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푸념마저도, 돌아온 풍운아 존 맥클레인의 아날로그 액션에 비견할 만큼 환호와 열광을 점지해도 좋을 만한 것이다. 동시에 무모하면서도 땀내나는 인디의 액션은 인간적 유대감을 형성시킬 정도로 숭고한 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디지털 기술을 두른 동세대 영웅들의 초현실적 몸놀림으로 즐비한 블록버스터의 현세태에서 아크로바틱 액션과 아날로그의 감성이 주를 이루는 <해골의 왕국>은 구시대적 유물의 현대적 희소성을 환기시킨다.

물론 <해골의 왕국>은 모험 그 자체로 이뤄졌다. 오랜 팬에게는 실로 반가운 귀환이자 <인디아나 존스>가 낯선 세대에게는 생소하지만 만끽할만한 체험이 될만한 것이다. 물론 의외성은 존재한다. 마치 멀더와 스컬리가 제기했을 만한 <엑스파일>스러운 결말은 무시무시한 스케일이 가공할만하지만 세대를 막론하고 빵상 아줌마를 대면했을 때나 느낄만한 생소하고도 난감한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특유의 어드벤처 감수성은 <해골의 왕국>의 말미에 이르러 SF적 경이로움으로 치환된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인디는 ‘그들도 고고학자였다’며 감탄사를 날리지만 그것이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지지한 범우주적 프로젝트의 실상에 대한 충격을 상쇄시킬만한 위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이건 호불호에 대한 말이 아니다.- 모험의 종착역은 지금까지 <인디아나 존스>에서 봐왔던 초자연주의적 신앙을 초월한 것이며 경이롭고도 경악적인 것이다.-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알고 봤다 해도 결국은 당했다고 말할만한 것이다.- 마치 도입부에서 등장하는 핵폭발 씬만큼이나.

중요한 건 <해골의 왕국>이 미래보단 현재에 충실하며 과거를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유년시절에나 꿈꿀만한 유치하고 조악한 상상을 영화적 모험으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그 당시 관객들이 그것에 열광했다는 것. 그건 그 단순하고 유치한 꿈이 매번 낭만과 위트를 지닌 정의로운 인간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대 관객의 취향이 과거 당시와 많이 달라졌다 할지라도 인간이 지닌 기본적인 감수성은 세대를 넘어 전승된다. 그리고 <해골의 왕국>은 취향을 뛰어넘을만한 보편적 기질이 가득하다. 다시 한번 고고학 노동자, 인디아나 존스가 주목 받을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핵 떨어져도 죽지 않는 진정한 ‘다이하드’ 노장 인디아나 존스는 죽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다만 사라질 뿐. 물론 이전과 다르게 인디아나 존스 가족의 재구성이란 점에서 이번 시리즈는 각별하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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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우리가 지배한다(We own the night).’ 명암이 뚜렷한 도시의 뒷골목에서 발생하는 알력을 지배하는 자와 이를 제압하려는 자들이 지향할만한 중후한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제목으로 내건 <더 나잇>은 그 먹이사슬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그 사이에 끼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자의 운명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더 나잇>의 관심사에 가깝다.

미국의 뒷골목을 지배하던 갱과 이들을 소탕하려는-혹은 그들을 장악하려는- 경찰들의 관계의 간극에서 비롯된 사연은 미국범죄영화들의 오랜 소재기반으로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범인을 검거하는 경찰들, 하얀 마약가루와 바늘 달린 주사기들. 무덤덤한 회상처럼 사건기록사진처럼 보이는 흑백의 스틸컷이 차례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도입부는 <위 오운 더 나잇>(이하, <더 나잇>)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공표하는 것과 같다. <더 나잇>은 1980년대 뉴욕에서 상반되는 지점에 선 형제의 관계 변화를 통해 시대적 공간에 담긴 세태의 모습을 묵직하고도 담담한 시선으로 스크린에 담아낸다.

디스코 음악과 현란한 조명 아래 음주가무에 들뜬 인파들, 매일같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뉴욕의 유명클럽에서 매니저를 맡고 있는 바비 그린(호아킨 피닉스)은 도시의 밤이 잉태한 향락을 기반으로 엔조이한 삶을 계획한다. 하지만 그의 부푼 꿈은 뉴욕 경찰서장인 아버지(로버트 듀발)와, 역시 촉망 받는 경찰인 형 조셉(마크 윌버그)이 주도하는 마약수사로 인해 혼선을 빚고 그로 인해 형제는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뒤늦게 안 바비 그린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숙명을 깨닫고 그로 인해 그는 예측범위를 벗어난 삶의 진로에 놓이게 된다. 나이트 클럽의 매니저로서 자신의 사업만을 골똘히 구상하던 바비 그린이 경찰 배지를 달기까지의 과정을 진지하게 보여주는 <더 나잇>은 어떤 의문을 품게 한다. 소시민적 행복을 추구하던 거리의 탕아는 왜 제도적 질서에 편입돼야 했을까? ‘네가 조만간 우리 편에 서지 않는다면 마약꾼 편에 서게 된다’는 아버지의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비 그린이 경찰이 되기로 결심한 건 그가 질서유지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기 보단 가문을 수성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희생은 바비 그린을 각성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한번의 선택으로 인해 삶의 수평이 흔들린 바비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한 방향으로 기울일만한 선택을 다짐하는 건 적을 완벽하게 제거함으로써 가문을 수성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애초에 자신의 계획과 가장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 바비는 자신이 양부처럼 모셨던 클럽의 회장과 반대편에 서게 된다. 결국 그는 가족을 위해 꿈을 상납하고 기꺼이 국가 질서의 수하로서 국경 밖에서 유입된 악의 세력을 처단한다. 선택을 종용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갈등하고 변화를 고민하는 바비 그린을 묵묵히 묘사하는 <더 나잇>은 국경의 외부에서 유입되는 위험에 노출된 미국인이 제도로서 자신을 재무장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다양한 인종의 유입으로 이뤄진 미합중국의 힘은 때로 무분별하게 유입된 외부의 불순분자들로 인해 거리의 질서를 훼손당하고, 결국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동원된 공권력은 종종 되려 그들의 역습으로 명예를 훼손당한다. 동시에 뉴욕의 밤거리에서 거래되는 마약은 미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한 외부 유입물이다. <더 나잇>에서 바비 그린의 경찰되기는 결국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한 미국인의 결속과도 같다. 그 과정에서 거리의 질서는 회복되고 가족의 평안은 유지되지만 결국 개인의 주체적 삶은 제도적 강건함을 위해 소모된다. 경찰제복을 입고 형과 나란히 단상 위에 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바비 그린의 모습은 거듭난 미국인의 초상과 같다.

<더 나잇>은 다양성을 통해 존립의 기반을 마련한 미국사회가 스스로 야기시킨 자기모순의 희생자는 누구인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미국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과 싸워왔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적을 단결시킨다.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과 맞서며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각성해왔다. 그것이 아메리카 드림의 양면성이자 그라운드 제로를 품은 미국적 현실이다. <더 나잇>은 중후한 80년대 범죄드라마의 형식을 통해 과거를 되짚고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세련된 자성에 가깝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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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으로 포화 속에 갇힌 동심을 위로하기 위해 C.S.루이스는 아이들에게 판타지의 대륙을 선사하고자 했다. 전쟁을 피해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간 네 아이들이 옷장을 넘어 나니아 대륙이란 신세계로 들어서게 된 건 그런 연유에서다. 그리고 C.S 루이스의 ‘나니아연대기’가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시리즈를 상기시키지만 본심은 <판의 미로>에 보다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이 점에 있다.

‘나니아 연대기’가 성인들에게 유치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건, 그것이 애초에 아동들을 위해 집필된 동화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는데 큰 영향을 얻었다는 J.R.R. 톨킨의 고백처럼 ‘나니아 연대기’는 ‘중간계’를 잉태한 판타지의 원전으로서 명백한 가치를 지닌다. 대자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종적 구성원(<반지의 제왕>)들로 이뤄진 현실 이면의 판타지적 세계관(<해리포터>)은 <나니아 연대기>가 판타지라는 대륙을 안착시킨 원형임을 입증하는 것과 같다. <나니아 연대기: 사자, 옷장, 그리고 마녀>에 이어 제작된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이하, <캐스피언 왕자>)는 4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의 두 번째 시리즈이자 7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된 원작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분기점이기도 하다.

전작에 이어 모험을 주도하는 아이들, 피터(윌리엄 모슬리), 수잔(안나 포플웰), 에드먼드(스캔더 킨즈), 루시(조지 헨리)가 전작과의 서사적 간격을 증명하듯 과거에 비해 훌쩍 자란 모습으로 등장하는 <캐스피언 왕자>는 확실히 유아적 취향에 머물렀던 전작에 비해 성인을 고려했다고 할만한 것으로 성숙했다. 이는 동물의 왕국을 방불케 하는 전작의 전투씬에 비해 <캐스피언 왕자>의 전투씬이 체계가 잡힌 인위적 전투의 양상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캐스피언 왕자>가 성장기에 접어든 캐릭터의 고뇌와 숙명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니아 왕국의 수장이 된 피터와 대대로 이어온 왕위를 복원해야 하는 캐스피언 왕자는 각각 강박에 시달리듯 자신의 숙명 앞에 고뇌한다.

피터가 성장통을 겪는 사이, 그들 중 가장 어린 루시는 아슬란을 봤다고 유일하게 말한다. 성인이라 부를만한 연령에서 가장 동떨어진 루시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다. 이는 아동의 순수한 믿음이야말로 성스러운 것에 가깝다고 믿는 C.S.루이스의 신념을 대변하는 것과 같다. 의무감에 빠진 피터가 무리수가 예상되는 작전을 강행하다 실패를 맛보고, 모사의 간계에 이끌린 캐스피언 왕자가 마녀의 부활에 이용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 것과 달리 구원의 가능성을 본다. 이는 C.S.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집필하던 폭력의 시대에서 아동들에게 주고자 했던 구원의 메시지이자 성인들을 향한 일말의 훈계였을 것이다. 동화를 원형으로 했지만 ‘나니아 연대기’는 분명 성인의 발상으로 이뤄진 함축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캐스피언 왕자>는 전작이 지니지 못했던-실상 원작으로 인해 지닐 수 없었던- 비범함을 가미하며 단순한 구조의 권선징악 스토리를 원전의 위엄에 한발자국 접근시켰다. 아이들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시리즈도 성숙했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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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를 위협하는 리얼리티와 풍만한 색채가 보편화된 동시대 애니메이션들을 떠올린다면 이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극의 대부분이 흑백 컬러로 채색되고 앙상한 선이 그대로 드러난 드로잉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띄운 셀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가 말이다. 하지만 2000년에 출간된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인 유명 그래픽 노블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페르세폴리스>는 상상력의 유희와 드라마틱한 구성, 그리고 의미심장한 시대적 단상을 통해 기술이 충만할 수 없는 감수성의 깊이를 보여준다.

독재정권인 팔레비 왕조의 오랜 탄압에 반발한 이란 국민들의 대대적인 항거는 무력진압을 맞이하고 이는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페르세폴리스>는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혁명이 발발한 1970년대 이란에서 시작된다. 마르잔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로운 집안에서 자라 활발한 아이다. 이소룡을 좋아하는 소녀는 혁명의 기운이 증폭되는 테헤란에서 지인들과 자유를 논하는 부모님들의 성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스스럼없이 혁명을 외친다. 결국 혁명은 이뤄지고 독재왕권은 몰락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세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마호메니 정권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토대로 한 새로운 정권의 기치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이로 인해 국민들은 혁명 이전의 정권보다도 더욱 극심한 탄압에 시달린다.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던 여성들에게 챠도르를 씌우며 극심한 보수로 들어서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마르잔은 펑크락을 듣고, 강압에 저항한다.

혁명과 독재, 그리고 전쟁까지, 강압의 알레고리들이 넘실대는 굴곡이 심한 시대적 상황을 견디기에 마르잔은 너무나도 자유분방하다. 결국 마르잔의 부모는 딸의 왕성한 혈기가 지독하게 폐쇄적인 이란의 현실을 인내하기엔 역부족임을 깨닫고 마르잔을 프랑스로 유학 보내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타국에서 삶을 꾸려야 하는 소녀는 끝없이 방황하다 결국 피폐해지고 나서야 다시 이란의 부모곁으로 돌아온다. 물론 여전히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강압적 폐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란의 정치적 현실을 단순하지만 명쾌한 이미지로 그려낸 <페르세폴리스>는 간단히 말하자면 마르잔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녀가 격변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육체라는 점이 간과될 수 없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쾌하고 활기차게 세상을 바라보던 소녀가 자조적이고 망연자실한 눈빛의 여인으로 자라나기까지, 그 순탄치 않은 삶이 이란의 격동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했던 민중의 외침이 또 다른 견고한 형태의 억압을 이루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는 소녀의 성장기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개인의 정체성에 의문을 부여한다. 국가적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듯 파리로 출국한 마르잔이 그곳에서 느끼는 생경함은 결국 자기 정체성의 자각기회를 박탈당한 인간의 고독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체제적 오류는 끝내 수정되지 않으며 결국 그 안에서 개인은 고통을 인내해야 할 따름이다. 마르잔은 오류적 믿음을 강압하는 폭력적 체제 속에서 방황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문득 깨닫는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심플한 영상은 때론 재기발랄한 웃음을 유도하며 때때로 뭉크의 ‘절규’와 같은 표정으로 경악을 표출한다. 단순하지만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캐릭터들의 명확한 표정만큼이나 뚜렷한 가치관을 지닌 <페르세폴리스>는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를 통해 올곧은 정치적 자의식을 강건하고도 유연하게 전달한다. 대부분 흑백컬러의 영상으로 이뤄진 <페르세폴리스>는 (8만장의 드로잉 작업 덕분인지 몰라도) 아날로그적인 호감을 부여하며 때론 기록처럼 읽히는 이미지에 설득력을 더한다. 긴 고난의 여정 속에서 어느 새 성숙해버린 마르잔은 다시 한번 파리에 홀로 서지만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은 이성을 잃게 하고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는 할머니의 충고처럼 마르잔은 ‘항상 정직하게 살라’는 의미를 드디어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이란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소망한다. 그렇게 소녀는 거대한 비겁한 체제의 폭력에 대항하는 건강한 방식을 터득하며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그리고 우리는 소망(해야) 한다. 그녀에게 금지된 것들을.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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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홍상수 감독은, 혹은 그의 영화는 항상 그 고민을 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답다라는 말이 현실적이다라는 말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결부되어 있는지, 그의 영화는 항상 그걸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사실 나는 생각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스크린은 가끔 (혹은 대부분) 현실을 향해 젖혀놓은 창처럼 보인다. 실제로 촬영 순간에 임박해서야 배우에게 대본이 주어진다는 그의 영화작업을 생각해보자면 영화라는 작업이 현실이라는 중력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밀착해갈 수 있다는 믿음의 소산물 같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물론 이것이 숭고하다라는 식의 작위적 수식어로 의미 부여되지 않길 바란다.- 홍상수 감독의 8번째 작품 <밤과 낮>을 보고나니 마치 그의 영화가 너무나 현실 같아서 낯설다는 느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동시에 그것이 영화라는 기교적 장막을 모두 다 걷어내고 나서야 온전한 감상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취색을 띠는 창호지 재질(같아 보이는) 종이 위에 붓 펜으로 쓰인 듯한 궁서체 프롤로그가 무언(無言)으로 말하듯 <밤과 낮>은 대마초를 피웠다가 들켜 파리로 도피한 국선화가 김영남(김영호)의 34일 간의 수기(手記)다. 3인칭 관찰자 시점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프롤로그가 지나가고 나면 파리 공항에 도착한 김영남의 모습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그의 34일간의 고백담이 펼쳐진다. 서사의 영역을 구분하는 날짜가 프롤로그와 마찬가지 형식으로 잠깐 동안 화면을 정적으로 메우고 나면 그의 일기체 내레이션 혹은 그의 일상적 행위들이 그 간격 사이를 채운다. 간격에는 일정한 룰이 없으며 그 간격의 단위도 일정치 않다. 그건 때로 하루가 되기도 하고 이틀이 되기도 한다. 김영남의 독백은 일기체 형식으로 이뤄지지만 그건 왠지 기록된 것이 아닌 것 같다. 마치 기억의 단편을 끄집어 내듯 자신의 기억 속에 담긴 선명한 것들을 차례대로 끄집어 나열한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이 추억하고 싶어하거나 잊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선명하고 구체적이지만 자신의 무의식 중에 기억났거나 기억나지 않은 것들은 어떤 내레이션을 동반하지도 않거나 그냥 가볍게 뛰어넘어버린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밤과 낮>이 엄연히 김영호의 기억에서 끌어들인 수기이며 그의 시점으로 이뤄진 단상들의 조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은 대부분 그의 시점을 통해 그녀들을 대하거나 감상하고 세상을 관조하거나 살아갔다. 하지만 이를 남성중심적인 태도라고 말하기 석연찮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들 앞에서 속물이었을 뿐이니까. 남성을 위한 합리화는 없었다.-물론 그들을 향한 질시가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밤과 낮>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밤과 낮>의 시점은 전작들과 미묘하게 다르다. 그건 <밤과 낮>의 일기체 형식의 서사와 관련이 있다. 일기란 지나간 일을 기록하는 행위이며 그 형식을 따르는 <밤과 낮> 역시 지나가버린 과거와 대면하는 회상이란 의미다. 전작들이 현재형의 이야기를 했던 것과 달리 <밤과 낮>은 과거형의 이야기를 하며 이는 전작들과 <밤과 낮>의 형식이 달라진, 혹은 달라져야 했을 근간적 연유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일기체 형식의 서사는 상당히 어울리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일상에 대한 퇴고처럼 삶을 대구로 반복하곤 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은 일상의 흐름의 지속 그 자체를 드러낸다. 그 반복적인 일상이 대구로 느껴지는 건 그 일상을 부유하는 인간의 심리가 변모되기 때문이다. 변화는 삶을 채우는 인간의 내부에서 비롯된다. <밤과 낮>은 그 일정한 흐름 안에 담긴 인간의 미묘한 대구적 삶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밤과 낮>의 대구를 이루는 건 시간과 공간의 진리적 변화일 뿐, 행위가 아니다. 이야기 흐름의 양면성을 이루던 주체적 행위는 서사 위를 흐르는 시간의 범주 위에서 흘러가고 그 주변의 영역이 대구를 이룬다. 파리와 서울, 그리고 꿈과 현실. 파리로 도피한 영남의 좌절감이 유정(박은혜)을 만나 기묘한 설렘으로 변모하기까지, 그리고 유정과 사랑에 빠진 뒤 갑작스럽게 서울로 돌아와 성인(황수정)과 재회하기까지, 균등하지 않은 서사의 흐름을 따르는 <밤과 낮>은 일상을 더듬어가는 편린의 기억을 통해 영화의 재현성을 갖춤과 동시에 현실을 반추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현실소통의 언어로 재생된다.

파리라는 지정학은 이질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한국적 소통을 부각시키는 보색적 환경성을 띠고 있다. 이는 시시콜콜한 한국적 풍경을 가득 내포하고 있음에도 타향의 감수성-구체적으로 프랑스-을 연상하게 만들던 전작들을 떠올렸을 때 역설적이다. 이는 홍상수 감독이 에릭 로메르나 장 으스타슈와 같은 누벨바그 양식을 따르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들의 행위는 비현실적이라기 보다 비(현대상업)영화적이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대사나 명확하지 않은 동선은 결벽한 연출력과 거리를 두며 영화적 현실에서 그들은 타자화되어 공간의 기운을 변질시킨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의 기운은 공간을 생소하게 만든다. –이는 현실의 모순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적인 것과 맥락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밤과 낮>은 (본래 홍상수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단순히 국적의 관계에 상정되지 않고 지정학적 중력에서 이탈하던 홍상수식 영화들의 근본적 까닭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밤과 낮>은 홍상수 감독의 변처럼 밤과 낮의 서사가 다른 지구 반대편을 가로지르는 통화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이야기다. 대구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도 공유되는 동 시간대의 삶. 결국 보편적인 삶은 인간의 중력들이 끌어당긴 관계로 이뤄지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기억으로 채워진 서사가 된다. 그 보편적인 삶 속에는 기억나는 서사와 기억나지 않는 서사가 부유한다. 결국 인간의 삶은 특수한 기억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보편적인 서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밤과 낮>은 삶이라는 특이한 서사 위를 흐르는 고유의 시간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한계영역이다. 그 삶 안에는 현실이 있고 동시에 꿈이 있다. 꿈과 현실은 각각 우리의 밤과 낮을 지배하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며 그 영역 위에 존재하는 우리는 꿈을 꾸거나 현실을 살아가며 그렇게 밤과 낮을 지나 자신만의 기억으로 채워진 특별한 삶을 꾸려나간다. 마치 하늘을 채우는 구름이 매일같이 그 너비를 달리하듯 인간의 삶은 보편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채워나갈 따름이다. 미묘한 기법의 변화도 눈에 띠지만 <밤과 낮>은 통찰과 직관을 아우르는 화폭의 순수한 역량을 먼저 느끼게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바로 영화라는 고민에 대한 홍상수 감독의 진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의 음부를 ‘세상의 기원’이라 했던 쿠르베처럼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진솔한 풍경을 영화의 기원이라 말하고 있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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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happiness), 기쁨(pleasure), 슬픔(sorrow), 사랑(love). <내가 숨쉬는 공기>에서의 공기(air)란 기화된 원소의 질량을 가늠하기 위한 명명이라기 보단 부피로서 상정되는 공간성에 대한 공유를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가늠할 수 없는 동선의 접촉으로 이뤄지는 타인간의 관계 맺기. 일정한 시공간의 공유로 인해 교차되는 동선의 필연적인 접촉은 활성화된 원소들의 충돌이 이루는 개인의 삶이 지닌 질량을 재기 위한 것과도 같다.

네 가지 감정의 문구들로 경계를 정한 뒤, 제 각각의 동선을 배회하는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은밀한 접점을 이루는 옴니버스 형식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의 결과를 도출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시작에서 명명되는 테마에 맞는 이야기를 수행하는데 그에 따라 이야기의 중심 인물도 각각 달라진다. 미묘하게 맞닥뜨리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인물들의 개연성은 적당한 이해심을 동반한다면 그만큼의 설득력을 지닐 만큼은 된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스토리텔링으로 보자면 옴니버스라는 분절된 형식에서 일관된 맥락을 놓치지 않는 어리석은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역량이 충분한 배우들이 포진한 만큼 그들을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감상을 부를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각각의 사연이 담고 있는 테마는 이야기의 내면에 비해 과잉의 인상을 부른다. 말 그대로 행복이라 부르기 애매한 것을 행복처럼 위장하는 전술처럼 <내가 숨쉬는 공기>는 자신이 내건 테마에 이야기의 구색을 맞추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게끔 유도한다. 구체적인 주제 의식에 비해서 모호한 의미로 여운을 남기는 각각의 이야기는 결론에 이르러 명확한 상을 남기지만 그만큼이나 전자의 주제들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 애매하게 만든다. 그건 아무래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겉멋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이지호 감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만든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걸출한 배우들을 총동원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시나리오가 궁금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을 가장한 우연을 통해 개연성을 확보하는 이야기를 특정한 주제의식으로 엮어 넣으려는 의도는 다분히 무리수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녹록하지 않은 연기를 지켜보는 것으로 상쇄되지 않는 싱거운 뒷맛은 아무래도 이 때문이다.

(씨네서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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