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 아즈코의 단편 ‘멋진 하루’를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멋진 하루>는 우연과 필연이 겹친 두 남녀의 만남이 이뤄내는 하루 동안의 서사극이다. 오래 전 자신의 연인이었던 병운(하정우)에게 역시 오래 전 빌려줬던 350만원을 돌려받기 위해 희수(전도연)가 찾아간다는 사연은 단순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역시나 사연의 진행도 번거롭다. 350만원은 고사하고 자신의 거처조차 없는 변변찮은 신세인 병운은 자신에게서 빚을 받으려면 자신과 동행해서 빚을 융통하러 다녀야 한다고 희수에게 제안한다. 두 사람의 동행과 함께 본격적인 <멋진 하루>가 시작된다. <멋진 하루>는 전사와 후일담이 궁금한 쌍방향의 호기심을 추적하는 로드무비이자 경계가 희미한 로맨스 영화다.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만큼이나 병운에게 냉랭하기 그지없는 희수와 달리 병운은 시종일관 뻔뻔하리만큼 천연덕스럽게 희수를 대한다. 해묵은 두 사람의 관계는 채무관계만큼이나 어색해야 마땅하지만 병운은 그 모든 어색함의 테두리를 거리낌없이 지워낸다. 병운의 능청스런 태도에 희수는 줄곧 짜증을 내지만 점차 태도는 누그러진다. 두 사람의 심리적 관계 변화는 <멋진 하루>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희수의 심리적 변화에서 시작되는 파생적 결과다. 희수의 심리는 <멋진 하루>를 지배하는 전체적인 감수성이다. 오랜 과거와 비교해도 전혀 변함이 없는 병운과 달리 희수는 단 하루 동안에도 만감이 교차하는 감성적 변화를 거친다. 병운을 짜증스럽게 대하던 그녀가 병운과 동행하며 그에 대한 태도를 서서히 누그러뜨릴 때, 그 변모의 계기가 되는 건 불현듯 찾아오는 로맨스적 회고다. 병운과 만 하루 동안의 여정을 함께 하는 희수는 그 동선 안에서 과거 로맨스의 추억을 종종 되새긴다. 오랜 과거로부터 변한 것이 없다는 병운은 현재의 희수에게 현실을 가늠하게 만드는 일종의 기준점이다. 희수는 병운을 통해 자신의 현모습을 자각하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병운은 희수의 감성적 변화를 도모하는 일종의 대비적 거울이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건 대부분 현재 병운의 현실이다. 병운이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만나는 수많은 여성들은 병운의 현실을 구체화시킨다. 희수는 그런 병운의 삶에 경멸의 눈빛을 보내기도 하지만 은연중에 모종의 공감대를 품는다. 그건 한때 350만원을 융통해줬던 과거의 자신과 병운에게 자금을 융통해주는 현재의 여성들에 대한 동질감이다. 관찰과 목격을 통해 수집되는 병운의 사연과 달리 희수의 사연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희수의 감춰진 사연은 어느 순간 스스로의 입을 통해 발설된다. 희수는 병운에게 잠시 나직하게 자신의 어떤 사연을 내뱉지만 병운은 그것을 능청스럽게 눙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병운의 일시적 배려임이 뒤늦게 드러나지만 그 순간에 선명한 정체를 드러내고자 한 희수의 심리적 변화가 여실히 포착된다. 얕은 표면을 맴돌던 이야기 속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으며 심해에 잠겨 있던 진심이 일순간 수면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멋진 하루>는 희수가 잃어버렸던 어떤 날을 찾아가는 만 하루의 여정이다. 350만원이라는 가격은 희수가 내몰린 조급한 심리적 채무를 대변하는 액수이자 만 하루라는 일상의 소소함을 꽉 채우는 계기가 될만한 가격표다.
무엇보다도 <멋진 하루>는 희수와 병운이라는 두 캐릭터의 앙상블이 묘미의 축이다. 이윤기 감독의 전작에서 등장하던 캐릭터들이 극 중 상황에 식물적으로 배양되듯 사건에 종속되어 가던 것과 달리 <멋진 하루>의 희수와 병운은 능동적인 동선 위에 주체적인 해결방식을 도모한다. 이는 두 배우의 영향력이 캐릭터에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정우의 능청스러운 대사와 행동은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만큼이나 시니컬한 전도연의 표정에 반사되어 더욱 능수능란해진다. <비스티 보이즈>에서 선보인 연기적 방식과 겹치는 면이 발견되긴 하지만 하정우가 펼치는 기막힌 넉살 연기만큼이나 이를 거울처럼 반사시키는 전도연의 리액션이 탁월하다. 두 배우의 조합은 때때로 괴상하게 느껴질 만한 여정에 자연스러움을 녹여낸다.
<아주 특별한 손님>과 마찬가지로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을 영화화한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는 전자와 마찬가지로 돌발적인 상황에서 출발하는 만 하루 동안의 특별한 에피소드다. <멋진 하루>는 <아주 특별한 손님>과 마찬가지로 로드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미니멀리즘한 연극적 에피소드에 어울려 보이는 사소한 개연성을 담고 있다. 하지만 신선한 설정에서 지속되는 찰나의 응집력이 세심하게 군집을 이룬다. 인물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거나 멀리서 고개만 살짝 내밀며 인물을 훔쳐보는 수줍은 핸드헬드와 깜빡임 없는 눈동자처럼 신중하게 인물을 지켜보는 롱테이크 역시 영화에 깃든 감성을 대변한다. 물론 커다란 자극이 발생하지 않는 평온한 흐름 안에서 지속되는 이야기는 다소 밋밋한 느낌의 파스텔톤 색채를 반복적으로 감상하듯 지루함을 부여할 가능성도 배제하긴 힘들다.
과거 연인이었던 두 남녀가 동행한 만 하루 동안의 여정은 삭막한 자본의 강요에 채무 된 희수의 낭만을 환기시킨다. 350만원을 받기 위해 오래 전 연인이었던 병운을 찾아나선 희수의 선택은 그만큼이나 삭막한 희수의 삶을 드러내는 지표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무위도식으로 내려앉은 지겨운 삶에 자극을 얻고 싶었던 희수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돈이 없다고 하면 그냥 욕이나 실컷 해주고 싶었던’ 희수가 ‘자신을 따라오면 갚아주겠다’는 병운을 따라나선 건 그 무기력한 삶에 새로운 활력의 계기를, 혹은 무료함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쫓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지나간 옛 연인과의 일시적 만남은 만 하루의 유효기간이 경과할 때 즈음 이별의 수순을 밟는다. 그리고 차용증은 새롭게 갱신된다. 희수는 왜 병운과의 채무관계를 갱신했을까? 언젠가 희수는 삶이 무료해지고, 일상이 각박해질 때 즈음 또 한번 병운을 찾아갈 것이다. 물론 희수는 병운을 찾아 스페인까지 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멋진 하루>는 어느 날 한번쯤, 충동적으로 갈망할만한 소소한 그리움을 자연광처럼 투명하게 담아낸 이야기다. 사소한 일상은 아련한 로맨스를 품고 특별해진다. 낭만은 그렇게 때때로 대책 없이 짙어지는 법이다.
<영화는 영화다>의 원작이 김기덕 감독의 시나리오라고 들었다. 그 시나리오를 선택하기 이전에 본인이 구상했던 시나리오는 없었나? 개인적으로 쓰던 시나리오가 몇 개 있었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잘 안 풀리기도 하고,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감독님께서 이 시나리오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살펴보고 결국 하게 됐다. 내가 만든 이야기보단 원작이 있는 이야기로 첫 연출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됐고, 더 많이 배운 거 같다. 그래서 나에겐 더 좋은 선택이었던 거 같고.
김기덕 감독의 원작 시나리오로부터 가장 크게 각색됐다 할만한 바가 궁금하다. 전체적인 뼈대는 원작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그래서 원작의 느낌들은 그대로지만 일단 이야기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화법을 각색함에 있어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화법을 선택했다는 게 가장 큰 변화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수타는 강패와 대등한 관계였던 게 아니라 지금보다 좀 더 비중이 적었다. 원래 7:3(강패:수타)에서 6:4정도였던 걸 반반 정도로 각색했다. 물론 두 남자의 이야기란 점에서 영화와 시나리오가 같은 이야기란 건 맞지만 원작에선 강패 이야기의 비중이 더 컸다. 그리고 봉 감독에게 코믹한 요소를 많이 가미한 점도 있고.
아무래도 원작의 영향력이 완전히 배제되진 않았나 보다. 영화상에서 캐릭터 무게중심이 수타보단 강패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느낌이 없진 않았다. 그런데 두 남자의 비중을 대등하게 변화시킨 의도는 뭔가? 김기덕 감독님의 원작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도 서로 다른 삶을 동경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난 처음부터 비중이 비슷하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비슷해지면 두 남자를 모두 각자 돋보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영화와 현실의 비중도 비슷하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기덕 감독과 연이 닿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대학교 때 학생회위원을 했는데 학교 축제에 저명하신 분들을 초청해서 특별강의 같은 걸 하는 명사 초청강연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내가 김기덕 감독님께 와서 해주십사 연락 드렸고 그 인연으로 가끔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 졸업하면서 영화가 너무 하고 싶어서 감독님께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메일을 드렸다. 감독님께 답장이 왔는데 지금 들어가는 영화가 있으니 여기서 연출부로 일하면서 영화가 자신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일단 해보라고 하시더라. 경험을 해보면 알 수 있다고. 그래서 처음으로 영화를 하게 됐고 그 후로 여기까지 온 거다.
김기덕 감독의 촬영현장에서만 경험을 쌓은 건가? 일단 <사마리아>연출부로 영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마리아>가 끝나고 한번 <신부수업> 연출부로 참여했다가 다시 <빈집>연출부로 참여하고, <활>과 <시간>의 조감독을 맡았다.
김기덕 감독의 현장과 일반적인 영화 현장엔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차이가 많다. 내가 다른 영화현장을 많이 경험해본 건 아니지만 일단 김기덕 감독님의 현장은 굉장히 빠르다. 현장에서 순발력 있는 상황대처를 보이시니까 촬영진행속도가 빠른 것 같다. 날씨나 외부적 환경요인으로 인해서 촬영이 어려운 날이 생겨도 그런 여건에 맞게 현장상황을 즉각 바꿔서 결국 본인이 원하는 내용을 담아내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는 배우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안 하신다. 뭔가 얘길 해보면서 배우들이 못하겠다고 하면 그걸 강요하진 않는다. 나 같은 경우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게 약간 있나 보더라.
<영화는 영화다>는 한 편의 영화가 완성돼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감독의 입장에서 자신의 영화 속에서 영화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한 감정 같은 게 생기진 않던가.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관객들에겐 두 캐릭터의 삶이 먼저 보였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 이후에 영화와 현실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의도도 있었고. 물론 아이러니는 많았지. (웃음) 촬영하는 스태프들이 실제로 연기를 했는데 카메라 뒤에선 그렇게 활발하던 스태프들이 카메라만 보면 자꾸 도망가는 거다. 그래서 스태프 연기시키기가 너무 힘들더라. (웃음) 스태프 연기시키는 날엔 촬영도 오래 걸리고.
낙원상가 옆에서 촬영한 씬에서 촬영장의 스태프들과 그 사이로 걸어 들어오는 강지환 씨의 모습이 대비적이라 재미있었다. 전문연기자와 비 전문연기자들이 카메라를 대하는 방식의 대비가 발견되는 느낌이랄까. 차이가 크다. 사실 영화에서 스태프를 찍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영화에서 좀 더 리얼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서 찍었는데, 막상 찍어보니까…..안 찍는 게 좋겠더라. (웃음) 물론 스태프들이 고생을 많이 했고 사실 갈수록 스태프들의 연기가 늘었다. 스태프들도 모니터하면서 자신들의 연기가 느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 면에서 행복한 촬영현장이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영화적 리얼리티와 현실적 리얼리티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감독이라면 현실적 리얼리티를 고려하면서도 영화적 리얼리티를 고민해야 한다. 게다가 영화란 진실을 보여주기 보단 진심을 담아내는 작업에 가깝다. 진짜가 있고, 정말 진짜 같은 게 있다면 사람들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 진짜가 아니라 오히려 같은 쪽이 아닐까 생각한다. 진심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있고, 진심처럼 느껴지게 잘 전달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런데 사람들이 진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후자다. 그게 정말 리얼해서가 아니라 리얼한 느낌을 주면 그걸 보는 사람들은 리얼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때론 그게 약간 슬프기도 하다. 물론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정직하게 찍으려 했던 부분이나 배우들과 그렇게 작업했던 분위기는 영화에 담긴 거 같아 다행이다.
수타와 강패란 이름은 상당히 직설적이다. 명쾌한 은유지만 반대로 노골적이다. 한편으론 희화화된 뉘앙스로 받아들여질 위험도 있어 보인다. 고민이 좀 있었겠다. 위험할 수도 있었지. 그래서 고민도 좀 했는데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어서 그대로 갔다. 제목도 사실 원작 그대로인 만큼 수타와 강패란 이름도 그대로 가보고 싶은 느낌이 있었다. 물론 그게 좀 코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봉 감독은 상당히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감독이다. 아무래도 감독 캐릭터란 점에서 감독인 당신과 비교하고 싶어진다. 당신과 봉 감독의 거리감은 어느 정도일까? 차이가 좀 있지. 봉 감독은 결국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영화적 설정을 진짜로 찍는다. 그런데 나라면 봉 감독처럼 그렇게 못한다. 영화는 순서대로 찍는 게 아니지 않나. 만약 싸우는 씬을 찍고 난 다음날 싸우기 전 씬을 찍어야 한다면 실제로 싸움을 한다고 했을 때, 배우 얼굴에 상처가 나면 사소하게 나마 맥락적 연결상의 문제도 생기니까.
실제적인 공간의 형태를 과감히 드러내는 느낌이다. 그 공간의 기시감이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는 느낌도 얻었다. 실제로 찍을 때와 전체적으로 컷들이 붙었을 때, 공간의 느낌이 달라졌다. 총체적으로 오는 느낌이 찍을 때보다 좀 더 리얼한 느낌을 주더라. 더 자연스러운 느낌도 있고. 인사동도 그렇고, 갯벌도 그렇고, 그 공간의 느낌들이 완성된 상태에서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더라.
인사동이나 낙원상가처럼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장소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인파를 통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종로는 어차피 골목 앞을 막으면 사람들이 들어올 수가 없으니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인사동은 완전히 열려있으니까 거의 전쟁이었지.
게다가 소지섭에 강지환이라, 그 심각한 엔딩 장면을 찍으면서 다들 집중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소지섭이다! 강지환이다! 다 이러고 있으니, (웃음) 전쟁이었지. 우린 사람이 죽어가는 심각한 장면을 찍고 있는데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소지섭이다, 강지환이다, 이러면서 웃으며 사진 찍고, 우리는 통제하느라 정신 없고. 사실 그걸 찍으면 진짜 리얼한 건데 말 그대로 그건 영화가 아니니까. (웃음)
상황 자체가 현실과 영화가 공존하는 아이러니처럼 들린다. 인사동에서 옆으로 빠지는 골목 안에 폐지 수집하는 곳이 있다. 몇 차례 헌팅을 갔을 땐 조용하다 싶어서 한적한 골목을 헌팅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촬영날은 폐지 수거하는 날이라 끊임없이 폐지를 실어 나르고 자동차도 오가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왔다 갔다 하시고, 개도 있고. (웃음) 그런데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소지섭, 강지환이 누군지도 모르는 분들이라 그런 점에선 무리가 없었다. 한편으론 그런 점이 노인분들의 생활고가 느껴지는 측면이라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영화라는 결과물을 위해서 작업한 것이지만 그 현장 자체가 나에겐 현실이었고, 그런 부분들이 소중한 경험처럼 느껴졌다.
액션도 꽤나 중요한 관건이었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현장에서 액션연출을 경험해봤을 리는 없을 것 같고, 그에 대한 노하우가 전무했을 텐데. 마지막 갯벌 장면 같은 경우엔 두 배우가 지칠 때까지 싸우는 느낌을 담고 싶었고, 결국 싸움 자체에 의미가 없어지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건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생각했던 부분이다. 그런 바가 화면에서 드러나는 거 같아서 다행이다. 그걸 담아내기 위해서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지섭 씨는 촬영 끝나고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도 귀에서 갯벌 흙이 계속 조금씩 묻어나올 정도라니까, 고생 많이 했지.
사실 갯벌은 계획된 로케이션 장소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원래는 그게 뻘에서 하는 액션은 아니었다. 내가 각색하면서 조금 수정된 부분인데 두 배우가 뭔가에 흠뻑 젖어서 같은 색깔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 컨셉에서 강패는 블랙이었으면 좋겠고, 수타는 화이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옥상씬을 보면 강패는 블랙을 입고 있고, 수타는 화이트를 입고 있지 않나. 그리고 봉 감독의 영화 안에서도 강패는 계속 정장 안에 검은 셔츠를 입고, 수타는 흰 셔츠를 입고 있고. 나중에 둘 다 뻘이 묻어서 같은 색깔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똑같아졌다는 느낌. 그래서 갯벌을 생각하게 됐다.
그 갯벌씬에서 강패는 결국 수타와의 싸움에서 진다. 결국 주인공이 이긴다. 그건 어쩌면 검은 돌을 지워나가던 강패가 스스로 흰 돌에 둘러싸인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 갯벌씬은 온전히 영화적인 현실에 대한 자조처럼 보인다. 수타가 이겨야만 하는 어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까. 사실 영화 한편이 만들어진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의 느낌이랄까. 관객들이 보는 영화는 스크린에 걸린, 완성된 영화다. 스크린에 걸리기 위해 촬영됐지만 극장에 안 걸려서 상영이 안 되는 영화들도 있고, 촬영이 다 끝났지만 개봉을 못하는 영화들도 있다. 그래서 극장에 걸리는 건 사실 행복한 경우인데 관객들은 그런 영화들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기 때문에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느낌이나 스태프들이 얻는 그 순간의 느낌을 전달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에선 해피엔딩이 가능하다. 목적했던 결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목적대로, 시나리오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하지만 영화는 시나리오대로 완성되고, 그래야만 한다.
그 라스트 씬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건가? 원래 원작의 엔딩이다. 원작에서 온전히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던 부분이기도 했고.
사실 갯벌씬은 엄밀히 말해서 영화적 영역의 성취인 셈이다. 영화만의 쾌감이지. 영화적인 만족감이고.
그에 반해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엔딩은 대비적이다. 영화적 결말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려는 현실적 거부감처럼 느껴진다. 현실이란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것이니까. 캐릭터로 얘기한다면 수타는 성장하고 변모한다. 그런데 강패는 변하지 않는 캐릭터다. 변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똑같은 캐릭터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옷을 입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변하지 않는 모습이 굉장히 슬픈 거 같다. 현실의 사람들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 마지막은 그런 현실적인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결국은 그것도 영화라는 느낌을. 마지막 장면에서 스크린이 뒤로 빠지고 크레딧 올라가기 전에 프레임이 하나 더 생기지 않나. 그런데 그게 극장에서 상영할 때 많이 잘리더라. 그 극장의 이미지가 객석의 한 세줄 정도는 보이고 더 넓어야 하는데 객석은 안 보이게 잘리는 경우가 있더라.
스크린의 비율 문제 때문에? 맞다. 그래서 혹시 관객들이 그 부분을 놓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 결국 그것도 영화였다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극의 말미에 피칠갑을 한 강패가 수타를 노려보는 장면은 마치 객석을 노려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사실 소지섭 씨가 연기한 강패가 강지환 씨가 연기한 수타에 비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그건 종종 영화 속의 악인을 동경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인데 강패의 눈빛은 그 영화적 환상에 빠진 관객에 대한 경계심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과 악이라는 경계에 대한 사유도 가능할 것 같다. 난 사람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기 보단 모든 사람에겐 두 가지 면이 다 있어서 선한 행동을 하거나 악한 행동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강패는 악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마지막에도 선하지 않은 행동을 한 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단 그것이 선이냐 악이냐를 따지지 않고 더 매력적인 부분에 끌린다. 사실 그것도 좀 슬픈 거다. 재미없는 선보단 재미있는 악에 더 끌리니까. 물론 강패가 악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각자 직업이 다르고, 사회적인 입장이 다른 건 스스로 선택한 어떤 초기의 결정 때문이다. 그 사람 자체가 매번 그런 판단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스스로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 좋겠다. 사람들이 안 좋은 일은 직업으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음)
갯벌 장면은 정말 처절했다. 얼굴이 갯벌에 반쯤 잠긴 강지환의 얼굴이 열의를 대변하더라. 이런 장면을 주문하는 감독은 얼마나 악랄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웃음) 악랄하겐 안 했다. (웃음) 그냥 두 배우들이 스스로 열심히 했다.
강패와 수타를 바라보며 봉 감독은 아무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에서 캐릭터로 완성되는 배우들을 지켜보는 과정은 여러모로 즐거운 일일 거다. 굉장히 즐겁겠지.
똑같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본인에게도 비슷한 즐거움이 있었을 것 같다. 강한 열의를 갖고 연기에 임하는 배우들을 지켜볼 수 있는 감독의 입장이라면 봉 감독 못지 않게 즐거웠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런 얘기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배우들은 무지하게 고생했지만 솔직히 난 속으로 즐거웠다. (웃음) 배우들한테는 고생해서 마음이 아파요, 이렇게 얘기했지만. 영화에 그런 강렬한 느낌들을 주니까 그런 광경을 찍을 수 있어서 즐겁지.
그 장면을 촬영하기 직전에 봉 감독과 강미나가 주고 받는 대사가 생각난다. 두 배우를 격려하고 돌아온 봉 감독에게 미나가 괜찮겠냐고 묻자 봉 감독은 ‘감독이라고 뭐, 다 아나?’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미나가 그럼 감독님은 뭘 아느냐고 되묻자, ‘내 배우 끝까지 믿어야 된다는 거’라고 답한다. 그 대사가 어쩌면 감독 본인이 하고 싶은 대사였을지 모르겠더라.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봉 감독이 대신하는 대사가 조금 있다. 물론 그 이전에 봉 감독 캐릭터를 위한 대사다. 코믹하긴 하지만 결국 감독이니까 감독다운 모습을 마지막에 보여주고 싶었다.
감독으로서 배우를 믿고 가야 하는 순간이 있을 것 같다. 때론 갈등이 될 수 있지만 결국 감독이 배우를 신뢰할 수 있을 때 결과물의 가능성도 더 높아지는 게 아닐까 싶다. 배우들과의 소통은 어땠나? 두 배우가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하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각자 캐릭터에 대한 애정들이 느껴졌다. 두 배우가 스스로 생각하는 강패, 수타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고민해온 부분이 있지 않나.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생각했던 캐릭터가 있고. 근데 두 배우가 많이 고민한 부분을 내가 일방적으로 여기선 어떻게 해야 된다고 지도하진 않았다. 일단 배우들이 만들어온 캐릭터를 최대한 담고 싶었고, 그게 전체적으로 큰 톤에서 벗어날 때만 얘길하는 편이었지. 어찌됐든 소지섭의 강패, 강지환의 수타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 오히려 편했다. 배우들과는.
사실 첫 영화부터 캐스팅이 화려하다. 일단 두 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촬영 내내 흐뭇했지. 어떻게 잡아도 그림이 나오니까 편한 것도 있고. (웃음) 두 배우가 굉장히 길지 않나. 만약 어느 한 쪽의 다리가 짧거나 머리가 컸다면 투샷을 잡기 보단 상대적인 표정 위주로 잡아야 되고 이런 걸 신경 썼을 텐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서 카메라도 편하게 잡았다.
감독으로서 두 배우를 컨트롤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나? 두 배우와 작업하게 된 게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지섭 씨나 지환 씨가 각자의 캐릭터를 너무 잘했기 때문이다. 만약 컨트롤한다고 생각했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 같다. 그런데 컨트롤한다기 보단 같이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편하고 즐거울 수 있었던 거 같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배우를 처음으로 경험해본 셈이기도 했다. 감독과 배우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본 바는 없나? 아직 정의를 내릴 정도로 경험을 해본 것 같진 않다. 다만 누구나 자신과 결혼할 아내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상형이 있다. 그런데 결국 만나는 사람에 맞춰서 달라지지 않나. 실제로 만나게 된 사람을 그 이상형으로 맞출 순 없으니까, 서로 같이 변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같이 잘 살아야 된다. 감독과 배우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강패와 수타가 달리기를 하면서 테이크가 반복되는 장면은 마치 강패의 현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영화적 현실을 안착시키는 작업처럼 느껴졌다. 그건 봉 감독이 강패를 길들이는 광경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감독의 입장에서 배우를 다스려보고 싶었던 바는 없었나? 의견의 차이가 발생한 적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크게 마찰하거나 충돌했던 점은 없었다. 의견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그냥 배우들이 원하는 걸 선택했다. 대부분 내가 특별한 주문을 안 한 상태에서 기본적인 동선만 정해주고 배우들이 잡아온 캐릭터로 테이크를 갔다. 물론 만약 내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더 표현돼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원하는 바를 배우들한테 얘기해서 한번 더 테이크를 갔다. 의견 충돌의 느낌은 없었고 그 테이크 중 좋은 걸 쓰면 됐다. 그래서 오히려 작업이 빨랐던 거 같다.
사실 고창석 씨가 연기한 봉 감독이란 캐릭터가 없었다면 이 영화가 꽤나 삭막해졌을지 모른다. 봉 감독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두 캐릭터가 같이 영화를 찍는다는 설정이 가능해지기도 하고,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각색하면서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캐릭터였다.
남자로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꽤 귀여운 캐릭터였다. (웃음) 무대인사 다닐 때마다 관객 분들이 귀엽다고 하더라. 봉 감독님이 인사하면, 귀여워요! 이러니 매번 봉 감독님께서도 당황하셨지. (웃음)
여성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을 것 같다. 그래서 이 나이에 내가 이런 소릴 듣게 될 줄 몰랐다고 얼굴이 많이 빨개지시더라. (웃음)
말미에 강미나의 말처럼 끝까지 없어 보이지만 그만큼 인간미가 느껴진다. 인간적인 매력을 주고 싶었다. 사실 감독님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나도 김기덕 감독님을 많이 봤지만 현장에서 있어 보이게 폼 잡고 있기 보단 대부분 편하고 후줄근한 차림으로 작품 자체에만 몰두해서 계신다. 현장에서 본인이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하는 것보단 그런 게 오히려 멋있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평소 김기덕 감독의 현장 분위기는 어떨지 궁금하다. 보편적으로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김기덕 감독님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있지 않나. 김기덕 감독님과 작업해보거나 개인적으로 만나오신 분들과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만나보면 재미있고 귀여운 부분도 있다.
귀엽다? 약간 개구장이 같은 부분이 있다. 음, 여하간 그렇다. (웃음)
혹시 김기덕 감독에게 원작 시나리오의 모티브나 소재를 얻게 된 경로에 대해서 한번쯤 물어본 적 없나? 원작은 오랜 예전부터 김기덕 감독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시나리오라고 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기 위해서는 많은 요소들이 작용돼야만 하는 것 같다. 감독님께서 보시는 배우들에 대한 느낌,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조폭들에 대한 느낌, 그런 부분들에서 아마 시작되지 않았나 싶더라.
사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대중적으로 많은 지지를 얻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대중과의 충돌이라 할만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나. 아무래도 그런 일련의 상황을 김기덕 감독의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김기덕 감독이 얻은 몇몇 어려움에 대한 감정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일단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던 부분은 감독님이 많이 외로워 보였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감독님을 생각하는 오해적 이미지들 때문에 더 그런 것 같고, 무엇보다도 감독들이 대체로 좀 외롭지 않나. 현장에서 얘기할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일적인 얘기를 해도 그 전체를 보는 사람은 감독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다 이해해 줄만한 사람도 없고. 그런 부분들이 많이 외롭게 보이더라. 다른 감독들도 그렇겠지만 작품을 깊게 들어가다 보면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누구나 아는 얘길 하면 공감을 많이 할 수 있듯이. 그런 부분들이 어려운 거 같다. 내가 한번 김기덕 감독님께 유치하게 여쭤본 적이 있다. 감독님, 영화가 더 힘든가요? 현실이 더 힘든가요? 그렇게 여쭤봤더니, 당연히 현실이 더 힘들지, 그러시더라. 그러면서 영화 찍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얘기하시더라. 영화를 찍을 때 제일 행복하고 시간도 잘 간다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시는 거 같다. 나도 이번에 처음 찍으면서 들었던 느낌은, 배우들 고생시키고, (웃음) 고생시키면서 나도 고생하고, 그렇게 몸은 힘들어도 정말 행복하더라.
<영화는 영화다>라는 제목 자체가 애증을 동반한 느낌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애증이랄까. 현실을 넘을 수 없는 영화적 한계에 대한 인정 같기도 하고, 현실은 결코 이룰 수 없는 영화적 성취에 대한 선언 같기도 하다. 영화에선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얘기들도 가능하다. 거기엔 어떤 차이가 있는 거 같다. 다만 굳이 그 차이에 얽매여서 영화와 현실을 대비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물론 영화는 끊임없이 현실적 리얼리티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는 반면, 영화를 보는 현실의 사람들은 영화를 모방하려고 한다. 각자가 지닌 장점들을 따로 봤을 때 오히려 그게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정말 리얼한 걸 보고 싶다면 현실을 일상적으로 스치듯이 지나치지 말고 차분하고 주의 깊게 뭔가 본인이 원하는 걸 찾아보면 된다. 그럼 좀 더 리얼한 걸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영화와 현실 사이엔 그런 차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현실과 영화의 우열관계를 나누기 보단 평행우주라는 대등한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 같다. 하지만 결말부의 뉘앙스는 아무래도 영화보단 현실에 비중을 준 느낌이다. 영화도 현실을 위해서 있는 부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은 현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패와 수타라는 두 캐릭터가 대립적인 관계로 보이지만 은연 중에 서로에 대한 묘한 애정이 오가는 것 같다. 약간 가볍게 말하자면 싸우면서 친해지는 관계 같기도 하고. 그런 게 느껴졌으면 했다. 사실 더 친하게 보이는 테이크들이 더 있었다. 그런데 너무 그런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찍으면서도 배우들과 얘길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느낌은 있지만 너무 친하게 보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두 사람의 경계가 희미해지기 보단 느슨해졌을 것 같다. 둘이 너무 친해지면 그것도 너무 영화적인 거니까. 사람이 또 그렇게 쉽게 친해지지도 않지 않나.
사실 <영화는 영화다>에서 강패를 비롯한 조폭들이 현실적인 조폭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영화에서나 등장할만한 느낌이랄까. 일단 조폭 영화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폭에 관심이 많진 않았다. 솔직히 강패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 조폭들을 만나서 취재하거나 그러지도 않았고. 한국 조폭이라기 보단 한국 영화 안의 조폭이랄까. 기존 영화들에서 묘사된 느낌들만을 통해서 설명하고 싶었던 부분들이 있었다. 룸싸롱이나 공사현장처럼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상황들이 있지 않나. 그리고 누군가를 죽여야 되는 부분도 실상 영화적으로 가져온 부분들이다. 스타 영화배우와 조폭의 부두목이란 직업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을 동경한다는 부분이 중요했다. 개인적으론 꼭 깡패일 필요가 있고 스타일 필요가 있는지가 중요하기 보단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동경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물론 일단 영화에서 그렇게 설정을 한 이상 캐릭터 자체의 삶은 리얼하게 보여야 되는 부분이 있다. 그걸 개인적 의도에 의해서 소모시키거나 조금 사소하게 다룰 수 있는 부분은 또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설정 안에서 최대한 캐릭터의 삶을 살리려 노력했다.
그렇다면 현실보단 영화적 참고 사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태양은 가득히>와 <무간도>가 떠올랐다. 두 남자가 각자 살아보지 못한 서로의 삶을 동경하는 느낌이나 정서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그 부분을 굉장히 중시했고 영화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차피 이건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적인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차용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서 강패가 영화를 촬영하면서 겪는 일은 영화적인 부분들이 많다. 연애만 해도 수타의 연애는 현실적인 연애고, 강패의 연애는 영화적인 연애다. 바닷가에서 키스하거나 그런 전형적인 영화적 느낌들이 강패의 연애에 있다.
아무래도 두 남자가 겹쳐지는 국면의 세기가 상대적으로 그 주변부에 배치된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보다 눈에 띄기 때문에 어떤 주변 캐릭터는 간과되게 느껴질 공산도 있을 것 같다. 아까 말했던 그 연애적 형태의 대비도 본인의 의도에 비해 가볍게 여겨질 가능성도 있을 것 같고. 둘의 이야기에서 중심축을 이뤄야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다른 주변부의 비중이 커지면 둘의 에피소드가 전반적으로 산만해질 것 같았다. 둘에 집중시켜야 하기 때문에 일부로 키우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리고 두 남자가 서로를 통해 변화를 느끼는 지점도 있지만 각자 서로 사랑하는 여자를 통한 변화의 느낌은 부수적으로 주고 싶어서 그렇게 설정했다.
사실 결말을 배제한다면 강패는 배우로서 더 좋은 미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엔딩은 감독으로서 캐릭터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린 셈인데 좀 가혹한 면이 있는 것 같다. 현실이 가혹한 거 같다. 현실은 잘 안 바뀌지 않나. 사람도 쉽게 안 바뀌고. 그런데 역으로 난 정말 사람들이 보다 좋은 자신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는 결정들을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희망사항을 영화적인 만족감으로 적용한 채 끝내고 싶었던 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영화는 그렇게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관객들은 자신의 현실에서 가능한 변화의 지점들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적인 대리만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엔딩에서 드러내는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은 현실과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안전거리처럼 보인다. 안전거리라는 표현을 해서 그런데 영화 자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그게 때로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을 결국 한발 떨어져서 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면서 감성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얻는 것도 좋겠지만 결국 마지막엔 이것도 영화라는 느낌을 이성적으로 감안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바람이 있었다.
드라마틱하게 흐르던 영화가 가장 노골적인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며 엔딩을 맞이하는 셈인데 한편으론 도발적이면서 그만큼 위험한 시도처럼 보인다. 허무함을 느끼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 같단 점에선 위험을 무릅쓴 선택 같기도 하고. 위험하지. 후반 작업 하면서 그런 의견들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처음에 이야기가 출발된 지점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그 부분이 표현돼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관객들이 허무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걱정도 했다. 자칫 잘못하면 관객을 영화에 계속 참여시키다가 마지막에 가서 만든 사람만의 영화로 바뀌어버릴 수도 있는 거니까. 창작자의 화법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정서적으로 적절하게 살짝 거리를 두고 빠져 나온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수정을 많이 했다. 화면이 빠지는 타이밍이나 음악적인 부분을 고민했다. 결국 영화가 하려던 얘길 변질시킬 순 없는 거니까 강하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럽게 했던 거지. 그런데 결국은 객석이 좀 잘려서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안타깝다. (웃음) 그리고 사실 지섭 씨는 이 엔딩 때문에 이 영화를 결정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남는 장면은 어딘가? 개인적으론 뻘 씬도 애착이 가고 다 애착이 가지만 지환 씨와 지섭 씨가 많이 얘기했던 부분이 있다. 지환 씨는 강패를 보는 수타 입장에서 강패가 부하랑 공사장에서 가짜 액션하는 장면을 많이 좋아한다고 했고, 지섭 씨는 수타를 보는 강패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까페에서 은선이랑 둘이 차 마시는 장면이라고 하더라.
그 두 장면은 각자 캐릭터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나도 개인적으론 강패의 가짜 액션 장면이 가장 좋았다. 사실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두 번째 볼 땐 결과를 알고 봐서인지 그 장면에선 꽤나 슬픈 느낌이 나더라. 그 시점에선 유쾌한 느낌을 주지만 그게 결과적으론 좀 슬픈 장면이다.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강패가 느끼는 영화에 대한 안타까움이 상대적으로 더해지니까.
수타는 결국 성장했고, 강패는 모든 것을 잃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지막 순간에 웃고 있는 건 수타가 아니라 강패다. 하지만 그게 이겼다는 승리의 느낌이라거나 정말 기분 좋은 만족감에서 나오는 웃음은 아니다. 되려 웃음 자체가 역설적으로 슬픈 느낌을 대변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언젠가 본인의 이야기로 연출을 하게 될 기회가 있을 거다. 본인이 주로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 뭔가? 사람에 대한 부분이다. 인생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누구나 다 하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사람에 대해서 생각한다. 사람이 중요한 거 같고. 아마 내가 글을 쓰게 되면 그런 부분들이 영화에 반영되지 않을까. 그리고 선악에 대한 이야기도 매력이 있는 거 같다.
확실히 구분할 수 없는 경계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경계가 그렇지. 어느 상황에서는 그게 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느 상황에선 그게 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 미묘한 경계에선 분명한 긴장감이 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선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스릴러를 많이 좋아하기도 했었고. 물론 공포 빼곤 대부분 좋아하지만. 공포영화는 무서워서 잘 못 본다. (웃음)
첫 영화였던 만큼 지나고 나서 느끼는 아쉬움도 있을 것 같다. 많지. (웃음) 지금은 무대인사 다니느라 바쁘지만 무대인사 끝나고 이제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다. 사실 빨리 혼자 있고 싶다. 물론 그 전에 무대인사를 열심히 다니고 싶고. 그 이후로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면 내가 찍은 영화에 대해서 내 스스로 다시 한번 공부해봐야 될 거 같다. 어떻게 찍었으면 더 좋았을까라는 부분, 아쉬운 부분들은 왜 아쉬운지, 그런 부분들을 공부해야 개인적으로 영화가 마무리될 거 같다.
영화는 개봉했고 첫 번째 작품은 본인의 손을 떠났다. 기분이 어떤가? 홀가분한 느낌도 있고, 일단 배우들과 함께 무대 인사 열심히 다니면서 잘 되길 빌어야지. 그리고 빨리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 (웃음)
트럭 운전으로 성실하게 생계를 꾸리고 가장의 역할을 하던 정철민(유해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건 가난이다.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가난이 성실한 서민을 살인자의 공범으로 몰락시킨다. 딸의 수술비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철민을 좌절하게 만들고 스스로 패가망신하는 길이라 믿던 도박판에 희망을 걸게 만드는 과정은 가히 안쓰럽다. 돈은 성실한 가장이자 아버지를 쉽게 무너뜨린다. <트럭>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우열의 논리로부터 발생하는 비극을 스릴러적 긴장감으로 치환시키고자 한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한 딸에게 깊은 부성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사연은 시체를 싣고 달리는 트럭의 운전수란 설정의 좋은 전제가 된다. 인간의 양심을 통제하는 것이 자본에 대한 욕망 이전에 아버지의 부성이란 점은 <트럭>이 괜찮은 드라마의 자질을 갖췄다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불청객이 그 트럭에 합승하기까지, 그리고 그 트럭에 합승함으로써 벌어지는 일련의 긴장감은 스릴러란 장르적 욕망을 지닌 <트럭>의 좋은 연료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에게 닥친 시련이 눈덩이처럼 덕지덕지 달라붙게 되는 과정들이 흥미롭게 이어진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양심조차도 외면한 채, 유기해야 할 시체를 가득 채운 트럭에서, 살인마와 동승한, 철민은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트럭>은 이 물음에 답변하는 첫 번째 난관에서 뺑소니 치듯 달아난다. 냉철한 논리적 개연성이 절실해지는 순간, 우연을 동원해 달아난다.
배우들의 연기는 적당한 편이다. 유해진은 부성애가 깊은 아버지의 간절함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다소 평면적이긴 하지만 진구는 극 속에서 요구하는 캐릭터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추격자>의 지영민과 <트럭>의 김영호를 비교하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두 살인마는 역할 비중이 전적으로 다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김영호는 지영민만큼이나 캐릭터적으로 가공될만한 여지를 마련 받지 못한 캐릭터다. 그저 배치된 형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김영호는 정철민의 고난 수위를 높여주기 위한 일종의 장애물에 불과하다. 물론 살인마의 풍모는 필요하다. 그 평면적인 수위가 그것이다. 문제는 캐릭터가 아니라 상황에 있다. 장철민의 고난을 늘어놓는 것까진 좋지만 그것들을 해결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안이하다. 게다가 후반부엔 불필요하게 캐릭터의 비중이 흔들린다. 나름대로 벌려놓은 이야기를 봉합하고자 마련한 또 하나의 맥락이겠지만 역시나 효과적이지 않다.
자본의 횡포가 선량한 인간을 조롱하고 죄악의 공범으로 몰락시키는 윤리적 태도가 장르적 계기로 나아가는 과정은 <트럭>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지점이다. 하지만 <트럭>은 그것이 본래 의도된 길목에 들어서서 되려 무기력해진다. 차라리 애초에 선량한 서민이 자본에 놀아나는 과정이 살인마와 얽히는 후반부보다도 더욱 공포스럽다. 구구절절 늘어놓은 사연은 절실한데 그것의 본래 목적지는 드라마가 아니라 스릴러에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더욱 촘촘하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만한 논리적 개연성이 심각할 정도로 안이하게 우연에 몸을 기댄다. 살인마를 태운 트럭이 검문소를 돌파하기 직전의 긴장감은 난데없이 등장한 트럭의 횡포에 줄행랑치고, 살인마와 사투를 벌이며 죽음의 기로를 오가던 주인공이 제3자의 개입으로 구원 당한다. 그 와중에 엔딩은 가히 초현실적이다. 수많은 설명이 필요하고 윤리적으로도 온당치 못한 상황을 개입시키며 무모하게 상황을 종료시킨다. 어쩌면 그것이 실현된 미래가 아니라 정철민이 바라는 일종의 꿈이라 우긴다면 수긍할만한 여지도 있다. 허나 그 이전에 이미 담보 잡힌 문제들이 산더미다. 빚은 한없이 늘어가는데 갚아나갈 능력이 가물가물하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싶은 상황 앞에서 결말은 백치미스럽게 해피엔딩이다. 진정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도 벌어진 모양이다. 문제는 그것조차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첩첩산중이다.
강패(소지섭)와 수타(강지환)라는 이름은 깡패와 스타에 대한 노골적인 직유지만 동시에 현실과 영화에 대한 은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는 영화다>는 그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리얼리티를 구사하려 하지만 카메라의 슛이 들어가고, 슬레이트를 내려치는 순간 현실의 탈을 쓴 프레임의 파편으로 변질된다. <영화는 영화다>는 제목 그대로 현실을 넘어설 수 없는 영화적 한계에 대한 인정, 혹은 현실이 이룰 수 없는 영화적 선언처럼 보인다.
강패는 공갈과 납치, 심지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깡패다. 그는 종종 홀로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다. 그가 보는 영화 속에는 칼부림하는 깡패들의 액션이 멋있기만 하고, 심지어 칼에 맞아 죽어가는 주인공의 모습마저도 어딘가 숭고하다. 어느 날, 강패가 관리하는 단란주점에 신작 영화를 찍는 감독과 배우들이 찾아온다. 그 중 유명 영화배우인 수타의 팬이라는 강패는 우여곡절 끝에 수타에게 싸인을 받지만 수타는 강패에게 쓰레기처럼 산다며 빈정거린다. 하지만 곧 수타는 강패를 통해 자신의 연기적 허세와 다른 진짜 기세를 느끼게 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인연이 얽혀 들어가는 그 지점에서 영화는 고조된다.
영화 속에서 깡패를 연기하는 수타는 강패를 한낱 쓰레기 취급하지만 현실에서 진짜 깡패인 강패는 수타에게 흉내조차 잘 못내는 주제에 주인공 행세하는 건 운이 좋은 것일 뿐이라며 받아친다. 서로의 반대편에서 상대에게 조소를 보내는 두 남자는 아이러니하게 점차 상대의 영역을 동경한다. 수타와 강패의 동선이 교차를 거듭할수록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종종 상대의 경계를 침범하기 시작한다. 수타에게 강패의 언어는 실제로 도달하고 싶은 실존의 대화고, 강패에게 수타의 언어는 언젠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대사다. 강패가 현실에서 내뱉은 문장을 대사처럼 따라 하는 수타와 수타가 읊은 대사를 현실의 대화에 삽입하는 강패는 서로를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불분명한 진창으로 끌어들인다. 강패와 수타의 비극은 각각 그 경계를 넘으려는 찰나에서 발생한다.
‘진짜 싸우는 거라면 하겠다’는 강패와 ‘영화란 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수타는 엄연히 다른 세계의 구성원이지만 두 사람은 거울의 구도로 서로를 비추는 닮음의 형태와 같다. 가짜와 진짜로서 영화와 현실에서 빛과 어둠처럼 존재하던 두 사람의 육체가 하나의 영역에서 뒤엉킬 때 <영화는 영화다>는 강렬하게 진동한다. 상대방에게 품은 애증을 격발하듯 상대에게 내뻗는 주먹과 발길질은 반대편의 영역을 향해 옮겨진 한발처럼 서로를 잡아당긴다. 반복되는 테이크 안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는 강패는 현실을 지워나가기 시작하고, 강패를 비아냥거리던 수타는 현실적 주먹에 얻어맞으며 영화적 한계를 체감한다. 점차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서로를 마주보고 빙글빙글 돌던 두 남자가 자리를 맞바꾸듯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고 서로에게 동화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영화다>는 철없던 어른아이의 거친 성장기이자 고독한 아웃사이더의 덧없는 호접몽이다. 영화 속 가상에 도취돼 세상을 만만히 내려보던 수타는 현실의 주먹에 얻어맞은 뒤에야 자신의 현실을 둘러보기 시작하고 카메라 앞에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던 강패는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을 더욱 절감한다. 결국 영화와 현실은 서로를 침범하지만 그 경계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종래에 뻘밭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두 남자의 얼굴은 진흙이 잔뜩 묻어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될 지경이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건 수타나 강패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결국 그건 결국 영화고, 주인공은 끝내 일어선다. 현실에 짓눌려서는 안 되는 것이 영화라면 영화의 망상을 경계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결말에 다다라 피칠갑을 하고 수타를 바라보는 강패의 날카로운 눈은 궁극적으로 어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마치 객석을 응시하듯 교묘하다. 만약 어떤 관객이라도 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강패로부터 매력을 느낀다면 결국 엔딩이 밀어내는 객석과 스크린의 거리감을 외면해선 안 된다. <영화는 영화다>는 결국 자신의 영화적 육체를 통해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 마주본 관객을 도발한다. 네 눈이 카메라야, 잘 찍어. 극 말미에 강패가 수타를 향해 던지는 이 ‘대사’는 수타를 매개로 영화 그 자체에 던지는 선언이다. 현실과 영화는 대립적이면서도 상호적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현실이고, 영화는 영화다. <영화는 영화다>는 결코 일치할 수 없는 현실과 영화의 경계에 대한 애증 어린 시선을 도발적으로 선사한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일본 망가의 거장으로 꼽히는 우라사와 나오키는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는 이상적인 작가군에 속한다. 그리고 영국특수부대 'SAS' 출신의 박학다식한 보험조사원의 일상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열한 ‘마스터 키튼’은 우라사와 나오키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명료하면서도 깊이를 잴 수 없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구축하고 탁월한 장면묘사와 컷의 전환으로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또한 그 와중에 공포와 유머가 함께 공존한다.
‘몬스터’와 ‘20세기 소년’, 그리고 현재 연재 중인 ‘플루토’는 ‘마스터 키튼’을 방대한 습작으로 삼은 결과물에 가깝다. 물론 ‘마스터 키튼’ 이전에 발표한 ‘야와라!’나 그 이후에 발표한 ‘해피!’처럼 명랑한 트렌디 스포츠 만화 역시 우라사와 나오키의 진면목이다. 하지만 사실적인 형태의 세계관에서 가늠할 수 없는 심리적 기운을 지닌 인물-요한, 친구, 플루토-이 그 세계를 장악해나가고 그 반대편에서 그 가늠할 수 없는 실체에 접근하는 인간들의 사투-덴마와 안나, 켄지 일파, 게지히트 형사-가 펼쳐질 때,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거대한 흥분을 일으킨다. 그의 만화는 영화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캐릭터 묘사에 능하고 장면의 연출에 과감하다. 영화화된 <20세기 소년>이 우려와 기대를 동반한다면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다.
<20세기 소년>은 원작의 재연 그 자체를 희망한다. 일단 실사의 인물들을 보자면 완전히 만화 속 캐릭터와 일치할 수 없음을 감안한다면 인물의 실사적 형태도 흠을 잡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거의 강박적이다. <20세기 소년>은 만화를 영화로 구현한다는 형태적 변형에 목적을 두고 있을 뿐, 영화적인 현실 자체를 간과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만화를 본지 오래된 독자들에게도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켜줄 정도로 원작의 상황을 충실히 재연한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만화의 탈을 쓴 채 경직된 흉내를 낼 뿐이고 엉뚱하게 울려퍼지는 음향효과는 기괴한 감상적 태도를 강요한다.
본래 ‘20세기 소년’은 그 기이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익살맞은 유머가 넘치는 작품이다. 그 가늠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에 지치지 않는 건 그 유머감각이 윤활유의 역할을 한 덕분이다. 영화는 후자보단 전자에 매료된 것인지, 혹은 후자가 일본영화 특유의 썰렁한 정서 연출 속에서 매몰된 것인지 좀처럼 후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만약 <20세기 소년>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의 진지함이 우스꽝스럽다고 느낀다면 그 안에서 발생해야 할 유머감각들이 깡그리 결여됐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펜터치에 녹아있던 정서적 인간미가 영화에서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을 오가는 컷의 전환방식도 간결한 칸과 칸 사이에 발생하던 만화의 상상력을 쫓지 못하는 양상이다. 성년이 된 인물들이 과거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거나 그 시절의 일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산만한 인상을 준다. 그건 마치 영화가 만화의 어떤 장면, 혹은 어떤 인물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인받으려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영화 속에서 발견되는 건 원작에 맞춰 영화를 검열하고자 하는 태도다. 단지 이미지를 재연하기 위한 식물적인 목적이 스크린을 생기 없이 지배한다.
원작에 대한 겸손함이 강박적이다. <반지의 제왕>만큼이나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관계적 접점이 중시되는 ‘20세기 소년’은 그런 캐릭터 관계를 명석하게 정돈하거나 과감하게 정리했어야 했다. 서사의 일부를 미약하게 변주했지만 전반적으로 장황한 인상을 남긴다. 한편으로 영화화된 <20세기 소년>은 만화를 예습하지 못한 관객에게 그 흥미로운 세계관을 온전히 담고 있는 만화에 대한 호기심을 충만 시키는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능동적인 호기심을 원치 않는 관객에게 <20세기 소년>은 거대한 괴작처럼 느껴질 공산이 크다. 3부작으로 기획된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은 ‘피의 그믐날’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다. 아직 이야기는 두 번이나 남았다. 문제는 ‘제1장, 강림’이 관객들을 남은 시리즈에 대한 흥미와 절교시킬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물론 실사로 구현된 ‘20세기 소년’을 본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 어떤 원작팬들은 <20세기 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극장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소년의 꿈이 악몽 같은 현실로 변모하는 흥미로운 과정을 애정이 아닌 애증으로 지켜볼 가능성이 크다면 그것만큼의 비극도 없어 보인다. 남은 두 번의 기회가 갈급해짐을 느낀다.
좋은 작품은 때로 장르적 경계를 넘어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한다. 뮤지컬에서 영화로 변주된 <오페라의 유령>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와 같은 작품은 너무도 유명하고 활자에서 영상으로 치환되는 유명 소설의 예는 방대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심지어 ‘비틀즈(Beatles)의 음악과 삶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나 퀸(Queen)의 노래에서 모티브를 얻은 뮤지컬 ‘We will rock you’처럼 그 영향력은 형태의 판이함조차 무난하게 극복한다.
텍스트와 이미지, 무대와 스크린, 음악과 연기, 그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제반 조건은 컨텐츠의 육체를 입고 변형되는 소스의 기본 자질이다. 특히 오늘처럼 하이브리드와 크로스오버의 유통이 활성화된 시대에서 훌륭한 작품은 장르의 형식을 초월해 다양한 양식으로 거듭 재생산될 가능성이 크다. 스웨디쉬 팝(Swedish Pop)의 전설적인 그룹 ‘아바(ABBA)’의 노래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유명 뮤지컬 ‘맘마미아!’ 역시 훌륭한 컨텐츠의 변형 유통 생산과정을 거친 모범전례라 할만하다. 199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이후로 160개국이 넘는 국가에서 공연된 뮤지컬 ‘맘마미아!(Mamma Mia!)’가 이제야 비로소 무대 공연이 아닌 스크린 상영의 단계로 옷을 갈아입었다. 게다가 2004년 국내에서 초연된 이후로 7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전례가 있는 만큼 <맘마미아!>의 영화화 소식은 결코 국내 관객에게도 무심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의 한 섬에서 오래된 호텔을 경영하는 도나(메릴 스트립)의 딸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아버지로 추측되는 어머니의 옛 연인 세 명에게 결혼을 앞두고 편지를 보내 그들을 초대한다. 결국 중년의 세 남자가 섬을 방문함으로써 그들과 그녀들 사이에 묘한 사건들이 펼쳐진다는 <맘마미아!>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 뮤지컬만큼이나 발랄한 넘버들로 채워진 유쾌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리스 섬을 둘러싼 지중해의 푸른 바닷물만큼이나 싱그러운 뮤지컬 넘버들이 유명세만큼이나 연기되고 노래되는 배우들의 목청으로 재탄생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 역시 눈과 귀가 즐거운 호사임에도 틀림없다. 게다가 캐스팅 자체가 이 영화의 야심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이미 근래 <프레리 홈 컴패니언>을 비롯한 과거 여러 작품에서 발군의 노래 실력을 뽐낸바 있는 메릴 스트립을 비롯해 피어스 브로스넌, 콜린 퍼스, 줄리 월터스와 같은 배우들이 관록 있는 보컬을 선사하고 소피 역의 아만다 사이프리드를 비롯한 젊은 배우들이 청량한 화음을 더한다.
연출의 평이함은 이 뮤지컬의 유명세에 따른 기대감을 다소 중화시킨다. 넘치는 야심에 비해 특별함을 과시해야 할 몇몇 장면들이 지극히 안일해 보인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던 현란한 율동을 영화적으로 재연해보고자 한 야심들은 스크린의 평면성을 극복하지 못한 것인지 다소 비약적인 상황만을 제시할 뿐 정리되지 못한 산만함을 드러낸다. 평면적인 스크린에 무대의 입체적 양식을 구사하지 못하고 강요하는 꼴이다. 특히 급작스러운 전개와 함께 펼쳐지는 초반부엔 극중 몰입이 쉽지 않은 느낌이다. 특히 배우의 개인적 동선이 군무로 확장될 때 종종 세련된 무대 매너가 연출되지 못하고 스크린을 채운 배우들의 수적 우위만이 확인된다.
그 모든 악재를 무시하고 싶은 건 끝내주는 뮤지컬 넘버들 덕분이다. 걸출한 배우들의 목소리로 레코딩된 사운드 트랙은 오리지널 뮤지컬 넘버와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상당한 물건이다. 장면 연출에 대한 아쉬움이 상쇄되는 건 그 음악들이 발군의 엔터테인먼트적 충족감을 주는 덕분이다. 특히 메릴 스트립은 가히 독보적이다. 물론 때때로 말괄량이처럼 구는 그녀의 모습은 어색함을 유발하지만 그런 극히 일부의 상황을 배제한 대부분의 장면들은 장면의 평이함에 깊은 감흥을 불어넣는다. 특히 샘 카마이클(피어스 브로스넌)을 바라보며 ‘The winner takes it all’을 부르는 후반부는 잊을 수 없는 관록의 깊이를 발산한다. 생기발랄한 에너지가 충만하게 뒤엉키던 초반부의 어지러움은 덕분에 후반부로 접어들며 안정을 찾는다. 훌륭한 배우들과 그들의 목소리로 불려지는 좋은 노래들 덕분에 <맘마미아!>는 뮤지컬의 명성을 따라잡지 못해도 사랑스러운 영화로 거듭난다. 특히 결말부 엔딩 크레딧과 함께 펼쳐지는 특별한(?) 공연은 흥겹다. <맘마미아!>는 지중해의 푸른 바닷물처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해맑은 감격을 줄만한 영화다. 그리고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관객을 미소 짓게 한다면 충분한 값어치는 있다.
‘롤링 스톤즈’가 길 바닥의 구르는 돌멩이만큼의 관심거리도 안 되는 이에게 이 영화를 권하기란 힘들지 모를 노릇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담긴 공연이 어떤 극영화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 무대가 롤링 스톤즈의 것이기 때문이다. 1962년 런던의 클럽에서 데뷔해 ‘비틀즈(Beatles)’와 함께 브리티쉬 인베이션(British invasion)의 신화를 쌓아 올린 로큰롤의 악동들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단단한 팀워크를 자랑하며 여전히 패기만만하게 살아있다. 2005년, 13번째 정규앨범 타이틀 ‘A bigger bang’을 발표하며 이뤄진 월드투어이자 최다수익을 기록한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된 ‘Bigger Bang tour’ 중 뉴욕의 비콘 극장(Beacon Theater)에서 이뤄진 공연실황을 담아낸 <샤인 어 라이트>는 이 밴드의 거창한 역사를 뜨겁지만 담백하게 소개하는 스포트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9년, 마이클 워드라이가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촬영한 20시간 분량의 필름을 4시간 가량으로 편집해 <우드스톡>을 완성한 장본인이 마틴 스콜세지임을 제시한다면 <샤인 어 라이트>의 설득력은 더해진다. 게다가 밥 딜런의 도발적인 이미지들을 생생히 기록하며 뮤지션의 모호한 내면을 들춤으로써 그 아우라를 강건하게 재생하는 <노 디렉션 홈: 밥 딜런>(2005)을 경험한 누군가라면 소통이 난해한 뮤지션에 대한 탁월한 접근을 이룬 마틴 스콜세지의 내공을 이미 알고 있기에 <샤인 어 라이트>의 무대가 변변찮은 라이브 클립에 불과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할지도 모른다.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공연실황 라이브클립으로 치부(?) 당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싶다면 이 공연실황을 카메라에 온전히 담아낸 이가 뉴욕의 필름 거장 마틴 스콜세지라는 점이 든든한 근거가 되어줄 것이다.
공연을 앞둔 롤링 스톤즈 멤버들의 여유로움과 공연 셋리스트를 기다리는 마틴 스콜세지의 초조함을 대비시키며 출발하는 <샤인 어 라이트>의 초반부는 긴 세월 동안 자기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남은 뮤지션과 영화감독의 치열한 대립구도를 은밀하게 드러낸다. 밴드의 생존력을 여전히 무대에서 증명하는 뮤지션의 풍모와 필름을 관통한 시선으로 긴 세월을 관조한 영화감독의 치열한 자의식은 중후한 관록의 형태로 융합되어 영화에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는 결국 공연을 기다리는 공연장의 관객들만큼이나 카메라를 통해 무대를 보게 될 관객들의 긴장을 불어넣는데 적합한 역할을 한다. 라이브 무대가 펼쳐지기 전, 마틴 스콜세지는 공연 이전의 풍경들을 끌어와 무대의 열기를 이루기 위한 발화점의 온도를 찾는다. 비로소 롤링 스톤즈의 무대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무대를 향한 객석의 열기는 적절한 온도로 상승하고 이내 마틴 스콜세지의 슛 사인과 함께 시작되는 첫 번째 넘버 ‘Junpin’ Jack Flash’와 함께 세차게 가열된다.
19곡의 셋리스트로 이뤄진 공연은 관객들의 열광만큼이나 멤버들의 나이를 믿기 힘들 정도로 무대에 넘치는 활력을 거침없이 분출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건 끝내주는 공연이다. 앙상하지만 섹시하게 하늘거리는 몸동작으로 열정적인 보컬을 선사하는 믹 재거의 무대 장악력과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조니 뎁이 연기한 잭 스패로우의 모델로 알려진 키스 리차드의 독특한 패션만큼이나 시선을 빼앗는 기타연주와 무대매너는 단연 훌륭하다. 또한 키스 리차드의 기타를 보완하는 로니 우드와 그들의 뒤에서 차분하게 드러밍에 집중하는 과묵한 찰리 와츠는 파수꾼처럼 무대를 든든하게 이룬다. 또한 '화이트 스트라입스(White Stripes)'의 잭 화이트, 블루스의 장인 버디 가이와 팝의 뮤즈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게스트로 등장하며 특별한 즐거움을 더한다. 총 16대의 카메라는 세련되면서도 박력 있게 무대 너머로 흐르는 열기를 생생하게 포착한다. 특히 곡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롤링 스톤즈의 과거 인터뷰 장면을 비롯한 기록들은 롤링 스톤즈의 오랜 여정을 서술하며 무대의 저력에 깊은 감상을 부여한다. 오랜 관록으로 카메라를 조율하는 마틴 스콜세지의 깊은 음악적 조예는 인물에 대한 탁월한 접근적 시선을 더하며 <샤인 어 라이트>에 깊이 있는 열광을 부른다. 게다가 그것은 관객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 않으면서도 그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의 표정을 예상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가 지켜봤던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스크린이 무대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샤인 어 라이트>는 그저 롤링 스톤즈의 명곡들이 담긴 라이브 실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스크린을 통해 무대를 재현하는 일종의 체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롤링 스톤즈의 무대와 그것을 바라보는 마틴 스콜세지의 시선은 거대한 관록의 시너지를 이룬다. 연륜 있는 필름거장은 위대한 라이브 제왕의 무대에 영원을 헌정한다. 그리고 그 무대를 바라볼 주체는 바로 관객이다. 비로소 2시간 여의 공연이 끝나고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밴드의 뒤를 쫓는 카메라는 하늘로 솟아올라 뉴욕의 거대한 야경을 비춘다. 그 풍경과 함께 흐르는 넘버 ‘Shine a light’의 가사, ‘shine a light on you’처럼 조명은 무대를 비추지만 그건 결국 객석에 앉은 당신을 위해 비춰지는 빛이다. <샤인 어 라이트>는 당신을 위해 마련한 VIP석이다. 실로 그 무대를 즐길 줄 아는 관객에게 <샤인 어 라이트>는 실로 비좁은 상영관의 좌석을 박차고 일어나 몸을 흔들며 환호하고 싶을 만큼 전율적인 흥분을 선사한다.
지난 2000년, 인터넷에 유포된(?) 류승완 감독의 중편영화 <다찌마와 LEE>를 보며 방구석에서 낄낄댄 기억이 있는 이라면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 리>)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다찌마와 리>는 모니터에서 스크린으로 주소지를 옮긴 자기 복제작,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품종 개량작이라 명명해도 좋다. 버전업된 ‘일백푸로 후시녹음’과 ‘정통 액숀’, 그리고 상하이와 만주, 스위스, 미국까지 이어지는 다국적 비(非)현지(?) 로케이숀으로 돌아온 <다찌마와 리>는 ‘디지털 푸로젝트’ 액션협객물 <다찌마와 LEE>를 글로발 스케일의 잘빠진 첩보액션물로 확장시킨 또 한번의 문제작이다.
과장된 수사를 남발하던 한국고전액션영화의 문어체 대사를 원형 그대로 영화에 활용한 <다찌마와 LEE>는 구시대적 촌스러움을 복고적 유희로 승화시키는데 전략적으로 성공했다. <다찌마와 리>역시 그 전략을 뻔뻔하면서도 노골적으로 답습한다. 다만 모니터에서 스크린으로 스케일이 넓어진 만큼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음을 간파한 것인지 의도적 규모가 넓어졌다. 자신의 문제작을 다시 한번 매만진 류승완 감독이 추가한 메뉴의 정체는 박노식 감독의 1977년작,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에 ‘급행’의 추임새를 넣어 변주된 긴 부제로부터 음미할 수 있다. 권선징악의 목표가 뚜렷한 6~70년대 한국고전액션물에서 만연했던 수사남발 장문대사를 익살스럽게 배치하던 <다찌마와 LEE>의 전략적 응용사례를 헌사수준으로 격상시키는 한편, 그 영역을 한국고전액션물에서 동아시아 첩보활극까지 확대했다. 게다가 유희적 스킬이 추가됐다. TV에서 종종 개그맨들이 구사하던 엉터리 외국어 음차가 거리낌없이 도입됐고, 그와 함께 무단 배포 형식의 인터넷 영화자막을 활용한 풍자적 개그까지 가미된다.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위력적인 화장실 개그도 종종 눈에 띤다. 극장판은 과거 인터넷판보다 분량이 늘고 스케일이 확대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희적 너비의 폭을 더욱 발전적으로 확충했다.
<다찌마와 리>는 사실 모든 면에서 아이러니한 영화다. 쌈마이 정체성의 구시대적 B급 유희를 발산하지만 때깔은 최신판 세련미로 충만하다. 어찌 보면 이건 굉장히 실험적이다. 낡아빠진 구시대적 유물에 현대적 회화기법을 채색하는 모험이다. 만약 그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보고 자지러진다면 그 의도적인 방식을 수용할 의사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관객이라면 그 의도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암묵적인 이해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시대를 배반하는 언어가 유희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의도된 쓰임새에 대한 충분한 수긍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찌마와 리>는 모든 것이 헐거워 보이지만 실제론 상당히 계산된 구조로 작동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즉흥적으로 발생한 애드립을 추임새로 넣어도 상관없을 듯한 장문대사들의 희극성은 실제로 치밀하게 직조된 대화의 합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쯤 나사 풀린듯한 자세를 취하지만 실제론 확실한 의도를 품고 조율된 경로로써 진행되는 영화적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만큼 모든 경로를 추적하는 배우들의 역할 몰입이 중요해진다. 그런 점에서 극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임원희의 연기는 애초에 <다찌마와 LEE>로 잉태된 그때만큼이나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국경 살쾡이 역을 맡은 류승범은 <다찌마와 리>에서 가장 큰 파괴력을 자랑하는 웃음을 발생시키는 다크호스라 할 수 있다. 물론 가장 무시무시한(?) 웃음의 희생양은 진상 8호 역의 정석용이 맡았다.-이건 보면 안다. 당사자에게 깊은 위로를.- 게다가 박시연의 일관성있는 후시 연기도 꽤나 눈길을 끈다.
하지만 뼈 속까지 유치 찬란해 보이는 이 영화에도 비범함은 있다. 코믹과 액션은 <다찌마와 리>의 양 날개나 다름없다. 전자가 관객과 스크린을 끼워 맞추는 너트라면 후자는 그것을 조이는 볼트나 다름없다. 웃음은 관객을 <다찌마와 리>로 응시하게 만드는 일종의 감상적 매개체라면 액션은 그 감상의 화룡점정을 찍는 결정적 지점이다. 최근 만주벌판을 무대로 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이 실제 만주를 카메라에 온전히 보존하며 호쾌한 활극적 기운을 담아낸 것과 비교했을 때 영종도를 눈 딱 감고 만주로 치환한 <다찌마와 리>의 성과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것에 실제로 접근하지 않고서도 그것을 전시할 수 있는 대범함은 <다찌마와 리>가 단지 퍼포먼스 위장술에 능통한 혹은 우격다짐이 강한 영화라서가 아니다. 다찌마와 리가 자신을 찾아온 국경 살쾡이와 마적단 일행에 맞서는 일대 다수의 평원 결투씬은 만주 평원에서 말을 타고 내달리던 <놈놈놈>의 그 장면 못지 않게 스펙터클한 감상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류승완 감독은 세월 너머로 희미해진 한국고전액션영화에 새로운 육체를 대입해 재생하곤 한다. 그 순간만큼은 <다찌마와 리>가 품은 비범한 액숀 로망이 한없이 분출된다.
<다찌마와 리>는 마치 막 꾸며낸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 재미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입담 좋은 이야기꾼의 언변과도 같은 매력이 있다. 물론 그 싸구려 유희의 의도를 체감하지 못하는 관객에게 <다찌마와 리>는 그저 열라 유치한 삼류영화로 몰락해버릴 공산도 있다. 하지만 그 유희는 순간적인 컷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어 만만찮다. 무엇보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뻔뻔함에 기가 차서 감탄할 정도다. 특히 거대한 자막을 패기만만하게 앞세운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흑룡강 씬을 예로 들만하다. 누가 봐도 성수대교임이 분명한 그곳에서 심지어 지나가는 차가 앵글에 포착되고 뒤편으로 아파트까지 적나라하게 보이는데 영화는 그 곳이 압록강이라고 시치미를 떼더니 후에 두만강과 흑룡강까지 재활용하면서도 딱 잡아뗀다. <다찌마와 리>의 다국적 로케이숀은 이렇게 완성됐다. 이 정도면 노골적인 커밍아웃이다. 하지만 그 우격다짐이 실소 대신 폭소를 유발하는 건 실제공간을 대리 출석한 그 짝퉁 공간들의 기능성이 기발하게 발휘되는 덕분이다. 순발력있는 유희를 그 순간에 확실히 소비하되 그것을 토막내지 않음으로서 전체적인 리듬을 해치지 않는다. <다찌마와 리>는 상당히 노련하면서도 민첩하고 성실한 영화다. 류승완 감독의 고군분투를 바탕으로 한 총체적 경험에서 잉태된 의욕적인 시도들이 상당수 엿보인다. <다찌마와 리>의 뻔뻔함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건 그 의욕이 남기는 잘생긴 호감 덕분이다.
멀더의 방에 들어서면 항상 그 문구를 먼저 봐야 했다. I WANT TO BELIEVE, 나는 믿고 싶다. 그것은 ‘엑스파일’의 정신을 대변하는 슬로건이자 이 TV시리즈에 애정을 아끼지 않던 이들의 신념처럼 숭고한 것이었다. <엑스파일>의 테마는 진실 그 자체를 향하고 있었다. 미지의 정체를 추적하는 멀더와 스컬리는 각각 반대의 영역에서 신념의 물음표를 던지곤 했지만 이는 각각 진실이란 종착역을 향한 귀납과 연역의 레일로서 서로를 보완했다.
1993년 9월 10일에 시작해 2002년 5월 19일까지,-한국은 1994년 10월 31일부터 2002년 10월 25일까지- 장장 9시즌에 걸쳐 방영됐던 <엑스파일>은 ‘미드’의 원조 혹은 전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8년에 기획된 첫 번째 극장판 <엑스파일: 미래와의 전쟁>(이하, <미래와의 전쟁>)이 만족할만한 흥행성적을 기록하지 못했음에도 TV시리즈의 종결 이후 6년 만에 새로운 극장판 <엑스파일: 나는 믿고싶다>(이하, <나는 믿고싶다>)가 기획된 건 여전히 그 TV시리즈의 아우라가 잉태한 신앙심의 유효기간이 존재하리란 믿음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지막 에피소드가 종료된 지 6년이 지난 새로운 시대에도 <엑스파일>이란 제목이 눈길을 끄는 건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의문이 강건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믿고싶다>는 외계인 음모설과 기괴한 미스터리라는 두 개의 불가사의를 주요한 소재로 삼았던 <엑스파일>에서 후자의 맥락을 선택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전자를 바탕으로 했던 지난 극장판이 ‘엑스파일’이란 밑그림을 통해 완성한 블록버스터에 가까웠다면 후자를 선택한 이번 작품은 외양적 스케일보단 공포와 신비라는 내실에 주력한 모양새다. 형체가 모호한 의문을 제시하며 출발하는 특유의 방식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하며 그 의문을 해소하는 여정에서 새어 나오는 미묘한 긴장감의 돌발적 리듬도 TV시리즈의 그것과 유사하다. 미묘한 의문을 끌고 가던 기존의 <엑스파일>시리즈에 익숙한 이라면 이는 분명 반가운 부분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어떤 빈틈을 만든다. 1시간 미만의 분량이던 한 회 분량의 에피소드를 90여분간 지속시키는 방식은 긴장감을 와해시키는 구조로 작동한다. 동시에 틀의 문제가 발생한다. 방대한 외형적 규모라는 레시피를 얹어 구워낸 <미래와의 전쟁>이 시리즈 특유의 맛을 살리지 못하고 평범한 블록버스터와 다를 바 없어진 전례와 같은 맹점이 <나는 믿고싶다>에도 존재한다. <나는 믿고싶다>는 기존의 TV시리즈가 지닌 미스터리의 신비를 부각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지만 그것을 비범함의 영역으로 승화시키기엔 역부족이다. 그건 아무래도 기존의 에피소드 분량보다 넓은 극장판의 너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결과론적으로 <엑스파일>이 지니고 있었던 미해결과제의 신비를 폭로해버리는 까닭이다. <엑스파일>의 에피소드는 그것이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의 결말로서 완전한 아우라를 보존했다. 하지만 <나는 믿고싶다>는 그저 평범한 범죄스릴러의 그것처럼 <엑스파일>의 새로운 과제에 확실한 마침표를 찍고야 만다. 특유의 신비로운 아우라는 끝내 증발한다. 또한 에피소드와 함께 진행되는 멀더와 스컬리의 미묘한 드라마 라인은 팬서비스에 충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신비스러운 긴장감을 와해시키는 결정적 단서라고 지적될 땐 어딘가 구차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나는 믿고싶다>가 눈길을 끄는 건 그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어졌던 마지막 이후를 다루고 있는 까닭이다. FBI수사관을 그만두고 자신의 전문분야인 의사로써 살고 있는 스컬리와 FBI의 음모에 휘말려 역시 FBI수사관직을 박탈당한 채 잠적한 멀더의 이야기는 분명 이 시리즈에 대한 신앙심이 충실했던 팬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만한 지점이다. 하지만 문제 역시 그 지점에 있다. <나는 믿고싶다>는 팬덤이란 신앙심에 의존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후의 이야기란 점은 최소한 그 이전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가 감상에 작용할 확률이 크다는 의미다. <나는 믿고싶다>를 포함한 두 개의 극장판이 TV시리즈의 서사를 영화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기존 시리즈를 섭렵하지 못한 이들과 괴리감을 형성할 수 있다. 이는 이 작품이 지닌 가능성임과 동시에 한계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확실한 건 멀더와 스컬리가 다시 진실을 쫓는다는 것이다. 그저 멀더와 스컬리의 얼굴을 죽은 듯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엑스필(X-Philes)들에겐 스페셜 에디션(Special Edition)의 역할을 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신앙심이 관건이다. <엑스파일>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일말도 없는 이들에겐 이해할만한 의무감을 부여하지 못하는 비현실적 범죄스릴러에 불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건 결국 믿는가, 믿을 수 없는가, 라는 문제의 양갈래 길에서 관객의 선택을 종용하고 있다. 이건 충분한 계기가 부족한 이들에겐 과도한 학습의 장이다. 저 너머에 진실이 있다 해도 그 진실을 보기 전에 선행돼야 하는 건 그것을 넘고자 하는 의욕의 고취다. 흥미를 자극할 만큼의 특유의 신비를 자체 발광시키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을 반사시키려는 <나는 믿고싶다>는 결국 향수를 복기하고자 하는 팬들을 위한 서비스의 기능성에 매몰된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그들만의 잔치가 화기애애할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더욱 확실한 건 더 이상의 <엑스파일>이 없을 것이란 예감이다. 적어도 이 시리즈와 한 시대를 건너왔다고 자부하는 당신이라면 특별한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P.S>당신 스스로가 엑스필(X-Phile)임을 자부한다면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까지 함께해야 한다.
뉴욕의 한 지하철, 졸고 있던 승객 하나가 눈을 뜬다. 늦은 새벽의 지하철은 한산하기 짝이 없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그가 문득 옆 칸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서서히 옆 칸으로 통하는 문을 향하던 그의 발이 무언가를 밟고 세차게 미끄러진다. 그가 밟은 것은 바닥에 흥건한 붉은 피, 당황하는 남자는 지하철 기둥을 붙잡고 가까스로 일어난다. 심히 경악할만한 광경을 앞에 둔 남자가 무언가에 홀린 듯 옆 칸으로 통한 문의 창문을 바라보며 그 쪽으로 서서히 다가선다. 그 창 너머를 바라보는 남자의 경직된 동공이 향한 곳에 놓인 건 누군가의 뼈와 살을 가르는 어느 살인마의 뒷모습이다.
클라이브 바커는 <헬라이저>(1987)나 <캔디맨>(1992)과 같은 작품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잔혹성을 과감하면서도 창의적으로 전시하는 감독이나 기획자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단 그 작품들의 원작자로서 더욱 확고한 유명세를 자랑한다. 공포소설의 대가 클라이브 바커의 유명한 공포단편집 '피의 책'에 수록된 동명원작단편을 영화화한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 Midnight Meat Train>(이하, <트레인>)이 관심을 끌 수 있다면 이것과 무관할 리 없다. 도시의 기원에 얽힌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은 실로 순수한 공포심을 자극하면서도 도시의 참혹한 내면을 고찰하고자 하는 정치적 혐의와 맞닿아있다. 도시의 기원이었던 오래된 존재들에게 인육을 바치기 위한 제단으로써 운행되는 새벽의 지하철은 가히 그 공간 자체만으로도 괴기한 초현실의 공포를 소환하는 자질이 된다. 또한 그 비밀스런 제례를 위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희생되는 이들의 사회적 위치를 염두에 둔다면 이는 도시의 이면에 놓인 계층적 갈등과 착취적 질서를 살피는 계기로 해석될만하다.
97분 러닝타임의 기원이 된 40페이지 분량의 단편원작은 모티브의 출발점이라기 보단 구심점으로서 명확하게 영화 상에 자리를 잡고 있다. <트레인>은 원작의 질감을 보존하면서도 형태적인 변주를 통해 새로운 양식의 작품을 재생산한다. 두 인물의 대칭적 구도를 한 점으로 맞닿는 방식으로 전진시켜나가던 원작의 평행적인 캐릭터 배열방식과 달리 <트레인>은 레온(브래들리 쿠퍼)과 마호가니(비니 존스)의 접근성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이는 방식으로 긴장감의 수축과 이완을 거듭한다. 또한 짧은 단편 분량 속에서 미니멀하게 소개되던 인물의 성향은 약간의 변화를 더하며 세심하게 다듬어졌다. 특히 영화에서 최대한 변주된 건 마호가니인데 그는 원작에서 보이던 최소한의 인간미마저 벗겨진 무신경한 광신적 살인마로서 재창조됐고, 결국 그는 영화상에서 절대적인 공포를 발산하는 주체로서 군림한다.
인물의 심리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직접적인 긴장감을 던지던 원작에 비해 진원과 진앙 사이가 멀어진 영화는 그 거리감을 통해 긴장감을 조율한다. 특히 변주된 캐릭터와 함께 뼈대에 살을 붙이듯 서사적 너비를 넓힌 영화는 인물간의 동선에 따라 긴장감도 함께 넓혀나간다. 사진작가로서 도시의 진짜 풍경을 담고자 하는 레온이 우연히 지하철 실종사건의 단서를 얻은 뒤, 사건의 현장을 포착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마호가니에게 접근할 때마다 마호가니의 굳은 얼굴만큼이나 지배적인 공포가 두려움이 역력한 레오의 표정을 통해 감지된다. 특히 도축장에서 벌어지는 두 인물의 추격씬은 가려진 시야를 헤매는 레온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하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그 긴장감의 포석은 거대한 망치로 무자비하게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는 마호가니의 무자비한 행위에 대한 목격에서 비롯된다. 등뒤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마호가니가 목표로 삼은 대상의 등뒤에서 당사자도 모르게 망치를 들고 뚜벅뚜벅 다가서는 광경을 지켜보는 심정은 심장을 움츠리게 할 정도로 공포스럽다.
이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면 연출력의 탁월함에서 비롯된다. 단순히 시야적인 맹점을 확보함으로써 관객을 놀라게 만드는 순발력이 아니라 차근차근 대상에 접근하는 살인마의 전진을 바라보는 앵글의 무기력한 목격행위는 알면서도 대처할 수 없는 화면 너머의 예견된 공포를 지배적으로 진전시킨다. 물론 그 살인 이후로 벌어지는 마호가니의 인간도축행위와 고기처럼 매달린 인간의 초라한 육신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에 도전하듯 적나라하여 되려 먹먹할 지경이다. 영화는 심리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진원지가 다른 공포의 발전적 양상을 성공적으로 조합해나간다.
영화는 도시의 이중적 내면을 고찰하던 원작의 함의적 공포와 다르게 선을 넘어서버린 어느 인간의 욕망을 그에 결부시키며 파괴적으로 변질된 인간의 내면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살인마 마호가니를 추적하던 레온이 그의 무시무시한 인간도살행위를 카메라로 담은 뒤 점차 변해가는 모습은 도시의 풍경이 인간에게 끼치는 거대한 영향력을 직감하게 한다. 결국 사진작가의 순수한 열망은 도시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와중에 예기치 않게 거대한 변질을 맞닥뜨리게 되고 이는 결국 그 남자의 삶을 거대한 파국으로 몰고 간다. <트레인>은 원작만큼이나 과감한 결말을 기대한 독자들에게 미묘한 변화를 감당하게 만들고, 그와 무관한 이들에겐 이질적인 백색공포를 강권하지만 세계관이 머금은 기운 자체에서 비롯되는 순수한 공포를 선사한다. 결국 파멸적이면서도 묵묵한 엔딩은 원작의 그로테스크한 세계관을 보존하면서도 영화적으로도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