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진엔 스토리텔링이 담겨있다. 시퀀스를, 씬을, 내러티브를, 스토리텔링을 예상하게 만드는 훌륭한 프레임이 된다. 그리고 사진을 찍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된다. 인물 사진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인물 사진이 어렵다는 건 인물과의 소통이 필요한 까닭이다. 어떤 풍경을 배려하는 완벽한 구도를 찾는다는 것과 조금 다른 차원의 재능이나 경험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색다른 프레임을 연출하거나 뷰파인더 너머의 공간을 발견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자질이 필요하다.
좋은 인물 사진은 아름다운 표정, 멋진 제스처를 연출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 이상을 전달한다. 마치 베어진 기둥 단면 나이테처럼 인물의 인생을 대변할만한 어떤 단면 그 자체가 된다. 모든 인물에겐 저마다의 드라마가 있다. 훌륭한 사진가는 그 인물의 드라마를 결정적 순간에 담아 영원히 보존한다. 유섭 카쉬(Yousuf Karsh)는 아마도 그런 사진가 중 한 사람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일 것이다. 그가 찍은 수많은 명사들의 사진엔 저마다의 드라마가 담겨있다. 벽에 걸린 얼굴들을 따라 걷다 보면 잔잔한 우아함에서 거친 격정을 아우르는 수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삶을 넘나드는 느낌을 얻는다.
유섭 카쉬의 자화상 포트레이트
이번 전시회는 보스톤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유섭 카쉬의 빈티지 프린트(vintage print) 중 65점을 직접 공수해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여기서 빈티지 프린트란 작가가 직접 인화한 오리지널 프린트를 의미하며 사진엔 작가의 자필 사인이 있다. 사실 사진은 그림과 달리 필름을 통해 많은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희소성의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필름이란 것도 결국 인화가 반복되면 그만큼 수명이 단축된다는 점에서 보존적 속성의 한계에 갇힌 물질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요즘은 은염사진 보다도 디지털로 출력되는 사진들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에 빈티지 프린트의 희소가치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진이든 그림이든 오리지널은 의미가 있는 법이다. 이번 전시회의 가치도 이런 점에서 분명 뜻 깊은 의미를 지닌다.
윈스턴 처칠, 오드리 햅번, 알버트 아인슈타인, 피델 카스트로, 파블로 피카소, 슈바이쳐, 테레사 수녀, 등. 분야를 막론하고 세계 각지의 유명 인사들을 필름에 담아낸 유섭 카쉬는 마치 그와 공존했던 20세기 명사들의 일생을 단 한 장의 이미지로 대변하기 위해 살아온 것마냥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유명 인사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이벤트가 된다. 하지만 단지 그 얼굴을 구경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된다. 카쉬의 사진을 볼 수 있다는 건 누군가의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될만하다. 그의 사진이 인물의 인생 전체를 대변할 순 없는 건 사실이다. 그건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인물의 인생을 짐작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업적이다. 적어도 카쉬의 사진은 그 이상에 도달한다.
이번 전시회가 재미있는 건 사진뿐만 아니라 사진에 얽힌 일화를 담은 텍스트가 함께 전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공휴일엔 쉽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 넉넉한 여유를 지니고 전시장에 들어선 이라면 엄청난 만족을 느낄 거다. 단지 햅번이나 처칠 사진 하나 구경하러 왔다면, 그리고 정확히 그런 식의 구경만 띄엄띄엄 즐기다 전시회장을 떠나버렸다면 헛것을 본 셈이다. 만약 작품을 들여다본 후, 그 텍스트마저 하나씩 곱씹을 수 있었다면 이 전시회를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카쉬의 사진이 대단한 건 그가 단순히 대단한 인물들을 찍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그 대단한 인물들에 걸맞은 사진을 찍기 위해 얼만큼 고심하고, 얼만큼 인물에 접근했으며 얼마나 대담하거나 섬세했는가를 눈 여겨 봐야 한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동원하고, 인물의 심연을 이미지에 노출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대화를 시도했으며 궁극적으로 상대와의 심리적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스스로를 얼마나 열고자 했는지를 볼 수 있다면 많은 감동을 느낄 것이다.
물고 있는 시가를 강제로 뺏어서 찍었다는 윈스턴 처칠의 으르렁거리는 표정과 흔들림 없이 우아하게 머무는 오드리 햅번, 총명하면서도 깊고 순수한 아인슈타인의 눈동자, 하이라이트와 암부가 선명하게 교차하는 파블로 피카소의 풍경 등, 어느 작품 하나도 쉽게 건너뛸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사진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음에 깊게 각인된 건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의 사진. 스페인 출신의 첼리스트 음악가인 그는 바흐의 ‘첼로 무반주 연주곡’을 발굴하고 끝내 하나의 완벽한 형태로 완성한 거장이다. 카쉬는 어느 여타의 인물들과 달리 첼로를 연주하는 그의 뒷모습을 필름에 담아냈는데 엄숙한 풍경 속에서 우아한 선율이 흐르듯 신비로운 한 컷이라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사진엔 기묘한 페이소스가 넘실거리는데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의 독재정권으로부터 미국으로 망명해 살았던 파블로 카잘스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파블로 카잘스
윈스턴 처칠
알버트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마더 테레사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헬렌 켈러와 폴리 톰슨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그레이 아울
시베리우스
소피아 로렌
제시 노먼
이번 전시회는 당초 8일로 끝날 예정이었으나 15일부터 앙코르 전시가 재차 열린다 하니 기회를 놓친 이들에겐 반가운 소식이 될 것 같다. 클림트전처럼 네임밸류에 비해 수준은 형편없는 전시회가 있는 반면, 이처럼 명성만큼이나 내용도 흡족한 전시회도 있다. 가격도 클림트전의 절반가인 8천원 수준이다. 이 정도 가격에 이런 전시를 즐길 수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혜택이다. 누구나 DSLR을 액세서리처럼 지니고 다니며 셔터를 낭비하듯 눌러대는 세상 속에서 카쉬의 한 컷들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깊이를 선사한다. 인물에 대한 깊은 배려와 고심의 흔적이 역력한 그가 선택한 찰나에 담긴 인물들은 이로서 영원을 산다. 단지 얼굴이 아닌 인생을 기록한다. 당신에게 이 전시회를 권하는 건 그 때문이다. 당신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인물 자체를 만나게 될 것이다. 카쉬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중세 유럽의 사실주의 화가들은 화폭에 현실을 옮겨 담고자 했다. 극사실주의적인 붓터치로 실사와 그림 간의 피아를 좁히고자 했다. 선명한 명암 속에서 드러나는 사물의 재질이 필사되듯 채워졌다. 크리스트교의 엄숙주의가 지배한 중세 바로크 미술은 우아함과 장엄함의 극치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눈이 호강하고 있는 것만 같다. 기계적인 인상도 느껴진다. 작은 포도알맹이에 맺힌 투명한 물기까지 화폭에 그려낸 사실주의적 색채감은 경외를 넘어 경악할 지경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접근이다. 그 실재적인 색감을 구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실패의 경험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력의 산물을 결코 간과할 순 없다. 하지만 중세 바로크 미술의 그림들은 아름다운 반면 떠오르지 않는다. 한 폭의 그림마다 경이로운 기교를 보여주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들이 그러하여 어느 하나가 잡히지 않는다.
‘서양미술거장전-렘브란트를 만나다’란 타이틀은 무색한 일이다. 렘브란트가 유화뿐만 아니라 에칭으로도 유명하다지만 실상 유화 한 점뿐인 렘브란트 전시회란 에칭으로 구색을 맞춘다 한들 어딘가 석연찮은 게 사실이니까. 물론 그 밖에도 루벤스와 반다이크, 푸생, 브뤼헐, 부셰 등,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그림이 몇 점 자리잡고 있지만 그저 구색을 맞추는 느낌이다. 서양미술거장전이란 거창한 타이틀은 무색하지만 어쨌든 화려하고 우아한 중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감흥이 생김은 부정할 수 없다. 완벽하고 섬세한 디테일이 가득한 사실주의적 터치과 우아하고 장엄한 신 고전주의적 감성을 지켜본다는 건 실로 기이한 낭만임에 틀림없다. 호화스럽되 우아하며 예민하지만 섬세하다. 르네상스의 성취를 후퇴시킨 바로크 미술의 걸작들은 암흑 시대 속에서도 나름의 고민을 품었다. 고상함 속에 영험을 그려 넣기 위해서, 분명 그들은 노력했을 것이다. 물러서는 와중에도 성취는 발견된다. 바로크 시대는 분명 성취를 위한 퇴보의 시대였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은 프랑수아 부셰의 ‘헤라클레스와 옴팔레’다. 관능적인 에로티시즘 사이로 매혹적인 우아함이 깃든다. 격정적인 낭만 속에서 고상한 품위가 유지된다. 실로 사랑하고 싶어지는 그림이다. 헤라클레스와 옴팔레의 서사를 알고 본다면 어딘가 서글퍼지겠지만 적어도 그림 너머의 순간만큼은 황홀하다. 풍만한 육체 속에 낭만이 깃들고 입을 맞춘 찰나는 화폭에 담겨 영원을 누빈다. 영원한 시간, 영원 하고픈 시간. 관능과 순수 사이에 놓인 투명한 매혹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