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는 알다시피 <어벤져스>의 속편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자 마블 히어로 무비의 절정이다.
최근의 슈퍼히어로 무비들은 액션 롤러코스터의 수준을 넘어서 동시대의 고민이 담긴 철학을 껴안은 현대적 신화로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이하, <윈터 솔져>)는 그 최전선에 놓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윈터 솔져>의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는 <어벤져스>(2012) 이후로 각개 전투를 펼치기 시작한 세 번째 마블 히어로다. 지난해에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준 <아이언맨 3>와 <토르: 다크 월드>만큼 혹은 그 이상의 만족감을 부여할만한 작품이다.
단순히 히어로 액션물이라는 오락적인 기대감 안에서 보자면 전반적인 액션 연출은 탁월하다. 빠른 속도감과 생생한 타격감을 전달하는 극 초반부의 해상 작전신을 비롯해서 중반부의 리드미컬한 카체이싱 신, 극 후반부의 거대한 공중 액션신 등 전반적인 액션의 스케일을 조절하는 방식과 그 안에서 보여지는 역동적인 액션 연출이 잘 조율된 인상이다. 물론 극초반부터 핸드 헬드 기법을 활용하며 지나치게 화면을 흔들어 대는 탓에 시각적으로 피로해지는 경향도 없진 않지만 현장감을 살린다는 측면에선 필요악처럼 여겨지는 선택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윈터 솔져>에선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신구 캐릭터들이 눈에 띄는데 특히 새로운 캐릭터들의 활약상이 극의 전반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개별적인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더한다. 특히 로버트 레드포드의 등장은 이번 작품을 위한 화룡점정에 가깝다. <윈터 솔져>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내부의 적을 찾아내고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린다. 완벽한 우리 편이 완전한 적이 되는 상황 속에서 갖은 위기를 건너는 가운데서도 위선의 가면을 쓴 거대악의 진면목을 추적하고 폭로해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과정이 주된 맥락을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슈퍼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외피만큼이나 정치 스릴러의 내면이 크게 와 닿는 작품인데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존재감 자체가 장르적인 중량감을 설득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통해서 <윈터 솔져>는 단순한 흥미를 쥐어주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이례적인 방향성을 탁월하게 제시하고 완결짓는다.
한편 주변부의 캐릭터인 닉 퓨리(사무엘 L. 잭슨)와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또한 이번 작품을 통해서 보다 뚜렷한 자기 내면을 드러내는데 이를 통해서 극의 심리가 보다 입체적으로 확장되면서도 세계관의 정체성을 강력하게 확립해내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진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어벤져스>까지의 여정을 고려한다면 대단히 흥미로운 예감을 부추긴다. 또한 그 밖에도 캡틴 아메리카의 사이드킥이라 할 수 있는 팔콘(안소니 마킨)과 관계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윈터 솔져’ 버키 반즈(세바스찬 스텐)의 등장 역시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를 보다 입체적으로 수식한다. 전반적으로 크고 작은 역할을 하는 캐릭터들이 단지 제 역할을 하는 수준 이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극 안에서 명확하게 세워 넣는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존재감을 통해서 자기 생명력을 얻는 이 작품으로선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을 낳았다고 평할만하다.
사실 캡틴 아메리카는 <퍼스트 어벤져>(2011)를 통해서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었지만 인지도가 낮은 캐릭터였고,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흥미도 떨어지는 인상이 강했다. 심지어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라는 캐릭터명이 포함된 원제 <Captain America: First Avenger>가 <퍼스트 어벤져>라는 정식 국내 개봉명으로 확정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메리카’라는, 국적성이 뚜렷한 이름을 지닌 탓에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대변하는 미국적 영웅의 선전도구라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힘을 대변하는 ‘영웅질’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라기 보단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지닌 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영웅성’의 기준을 제시하는 캐릭터다. 게다가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져스>의 세계관의 근본이 되는, ‘쉴드’의 뿌리가 된 캐릭터나 다름이 없다.
캡틴 아메리카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의 선친인 과학자 하워드 스타크가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통해서 개발된 ‘슈퍼 솔저’였고, 하루 아침에 빈약한 청년에서 벗어나 건장하고 강력한 육체를 지닌 최종병기가 된 남자였다. (슈퍼 솔져 프로젝트는 훗날 헐크로 변신하는 과학자 브루스 배너가 연구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수트를 입고 미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선전 도구처럼 전선을 배회하던 그는 본래 국가에 공헌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지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을 발휘할 기회를 얻고 위기로부터 자국의 군인들을 지켜낸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그 이름처럼 정말 ‘캡틴’이 된다. 미국적인 영웅상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영웅상을 제시한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순수하고 강직한 신념은 영웅으로서의 가치 그 자체를 대변한다. 게다가 그 본질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둔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통해서 본질적인 가치관을 훼손하지 않는, <어벤져스>라는 히어로 세계관이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본질적인 답변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세우는 작업이란 이 세계관의 전반적인 균형을 맞추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개별적인 캐릭터 스핀오프로서의 완결성은 물론 <어벤저스>를 향한 다리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한 작품이라 할만하다. <어벤져스> 이후로 <아이언맨 3>와 <토르: 다크 월드> 그리고 <윈터 솔져>로 이어진 마블 유니버스의 각개 전투가 성공적인 행보를 잇고 있는 만큼 이 시너지가 내년에 개봉될 <어벤져스>의 속편에서 어떻게 폭발할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한편 장기적으론 <윈터 솔져>는 <어벤져스>의 영웅들이 맞이할 파국이라 할 수 있는 <시빌 워>의 복선이라 해도 좋은 작품이다. 마블 엔터테인먼트에서 그리는 큰 그림을 명확히 알 순 없지만 ‘어벤져스’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구한 영웅들이 활약할수록 그 세계와의 갈등은 보다 거세질 것이다. 그만큼 고뇌도 심각해질 것이며 갈등의 불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의 신념이 향할 길은 명확하다.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들이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파국의 종주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언제나 인형 놀이를 하듯이 영화를 만들어왔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놀랍도록 비범한 걸작이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거듭해서 보면 볼수록 그가 대단히 고집스러운 감독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게 됩니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상하좌우로 정갈하게 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여지없이 딱 떨어지는 좌우대칭의공간 구도, 카메라가 비추는 공간 곳곳을 채운 소품들 하나하나가 모여 이루는 인위적인 완결성, 그 인위적인 풍경 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캐릭터들의 도드라진 설정과 과장된 연극적인 연기를 펼치며캐릭터 역시 하나의 무대 장치처럼 자리잡게 만드는 배우들, 유아적인 낙천성을 끌어안은 동화적인 세계관.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지닌 이 모든 일관성은 그의 영화들을 특별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특수한 개성이라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귀여운 소품 이상의 무언가로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영화 자체가 지닌 특이한 개성에 동감하면서도 사적인 취향으로 점철된 소유물 취급을 당하기 쉽다는 말이죠. 대중적인 공감대를 얻기 쉬운 영화는 아닐 거라는 말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동원되는 모든 요소들 또한 감독의 취향과 의도에 완벽하게 복무하고 있고, 철저히통제되고 있습니다. 물론웨스 앤더슨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그의 인형 놀이에 동참하면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그 놀이를 즐길 것임에 분명합니다. 배우들 입장에선 이런 방식의 기회가 많지 않을뿐더러 믿을만한 감독이 쥐어준 일탈과도 같은 연기적 경험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세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놀라운 캐스팅입니다. 개중 몇몇은 정말 두 신 안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영화에 출연하는 건 그만큼 이 놀이를 즐기고 싶어한다는 방증이겠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란 감독에 대한 배우들의 선호도를 대변하는 척도가 될만한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영화는 동유럽에 위치한 가상의 국가 주브로스카의 산 꼭대기에 위치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시작됩니다. 한때 세계 최고급 호텔로 꼽히던 이 호텔의 흥망에 대해서 간략하게 브리핑하며 그 간극의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던 영화는 직접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 사연에 대해서 상세하게 구술, 정확하게는 재현하기 시작합니다. 궁극적으로<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야기꾼의 영화입니다. 웨스 앤더슨이 지어낸 허구의 세계를 영화 속 화자의 입을 빌어서 사실적 재현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셈이죠. 언제나 그렇듯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역시 웨스 앤더슨의 전작들처럼 허무맹랑하지만 귀엽고 순진한 어드벤처의 형식을 통해서 이야기를 밀고 나갑니다.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다양한 공간들이 등장하고 그 공간과 공간의 연계는 세트를 부순 자리에 새로운 세트를 바로 지어세우듯이 동선의 연계성을 의심한다는 것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손쉽고 간편하게 이뤄집니다. 그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임에 틀림없으며 그 공간의 변화와 함께 등장하고 퇴장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수집하는 것 역시 특별한 재미를 주는 작품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처럼천진난만한 낙관성으로 점철되는 영화가 아닙니다. 인물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통해서 형성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어드벤처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 안에선 이례적인 폭력성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치고 냉소적인 유머와 개성 있는 캐릭터의 향연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대단히 동적이며 과장돼 있고,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말부에 다다르면 기존의 웨스 앤더슨표 영화들과다른, 놀라울 정도로 생소한 감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비극성을 감정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리듯 환기시키는데 생각 이상으로 큰 울림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론 웨스 앤더슨의 데뷔작인 <바틀 로켓>부터 최근작이었던 <문라이즈 킹덤>까지 단 한번도 체감해보지 못했던 상심과 애수에 가깝습니다.
기존의 웨스 앤더슨 영화들이 외부의 사건을 감독 개인의내적인 세계관에 집약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의 모티프가 됐을 법한 외부적인 사건을 내적인 세계관에 반영해서 인테리어했을 뿐, 그 외적인 모티프의 너비를 보존한 가운데서 보다 폭넓게 외부적인 영역으로 확장해 낸듯한 인상입니다. 영화는 여러 모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부른 살풍경들을 연상시키는데 이런 비극성의 요소들을 극적인 소품으로 활용하지 않고정면으로 마주보며 그 의미 안으로돌진해버립니다. 결국 그 비극성을 우회하지 않고 돌파해버리는 것이죠. 결국 객석의 관객들 역시 영화와 함께 그 비극성의 통증을 고스란히 관통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드러낸 최초의 비범함이자 거장으로서의 면모라고도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부연할 필요도 없는 걸작입니다. 게다가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가운데서도 이런 감정적인 여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웨스 앤더슨이란 창작자가품고 있었던 새로운 너비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 웨스 앤더슨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회자될 작품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론 영화의 결말부를 지나며 가슴 속에서 종이 울리는 기분마저 느꼈습니다끼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울림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 상영관을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멍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분이었죠.
웨스 앤더슨의 영화답게 음악의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명 음악감독인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와 랜달 포스터가 함께 완성한 이번 OST는 러시안 포크를 비롯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유럽의 악기들을 최대한 활용한 음악들로 채워져 있는데 덕분에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선율에도 영화의 특이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것이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리는 세계관의 특이성을 보다 도드라지게 반영하고 있다는 감상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화면 비율이 거듭 바뀌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에 유행했던 2.35:1의 와이드 스크린 비율을 비롯해서 1930년대에 유행했던 1.37:1, 그리고 오늘날에 자주 활용되는 1.85:1의 비율로 화면이 변하는데 이는 각각 그 시대에 유행했던 화면비를 적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화면비의 적용이란 곧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엄격한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 시대의 시선을 대변하겠다는 야심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적극적으로 반영한 최초의 현실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과적인 상심이나 애수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 웨스 앤더슨과 같은 창작자 역시도 간과할 수 없는 폭력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사실 아닐까요. 영화의 배경이 된 동유럽에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슈퍼스타 K> 시즌5의 실패 앞에서 혹자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위기라고 떠들었다. <K팝 스타 3>는 이를 비웃듯이 흥하고 있다.
요즘 <K팝 스타 3>는 지난 두 시즌과 또 다른 궤도에 올라선 것만 같다. 게다가 그 이전까지 오디션 프로그램의 최강자로 꼽혔던 <슈퍼 스타 K> 시즌5의 몰락 이후에 거둔 성공이기에 더욱 그 성과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같다. 잘 알다시피 <K팝 스타 3>의 변화란 양현석, 박진영과 함께 심사위원석에 앉게 된 유희열의 등장이다. 사실 기우가 없지 않았다. 지난 두 번의 시즌 동안 심사위원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이가 바로 그 자리의 주인공이었던 보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희열은 <K팝 스타>에 완벽하게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장본인이 됐다.
사실 유희열의 가세로 인한 가장 큰 수혜주는 심사위원 박진영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2도에서 6도 사이를 오가는 화음 지적과 ‘공기 반 소리 반’이란 명언까지 남기며 온갖 비아냥을 들어왔던 박진영은 유희열의 등장으로 인해서 오히려 어떤 전문성을 인정받게 된 것만 같다. 지난 시즌까지 심사위원을 맡았던 세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음악적인 전문가로서의 심사 견해를 표현한 건 박진영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진영이 비아냥을 듣게 되는 건 그가 음악 전문가의 입장에서 심사하기 때문이 아니다. 박진영 혼자서 전문가로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던 양현석과 보아는 음악적인 전문가라기 보단 자신이 몸담은 제작사의 대표자로서 위치하는 경향이 강했다. 기본적으로 옥석을 가리는 눈이 존재할지 몰라도 음악적인 견해를 판단할 수 있는 정확한 귀를 갖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덕분에 심사위원석에 앉은 그 누구도 박진영이 구사하는 단어나 화법에 대해서 놀릴 수는 있어도 그 견해에 대해서 명확하게 지지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인상은 아니었다. 마치 심사위원석의 외딴 섬 같았다.
유희열은 작곡과 제작 능력을 지닌 전문 뮤지션이다. 그만큼 음악적인 전문성에 신뢰가 간다. 가끔씩 박진영이 외계어처럼 화음과 발성에 관한 지적을 하거나 칭찬을 할 때, 유희열은 그 반대편에서 적당한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고, 그 의견에 동참하기도 한다. 보다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때론 냉철하고 과감하다. 어떤 식으로든 박진영이라는 심사위원으로서의 면모보다도 음악가로서의 역할을 납득시키는데 한 몫을 한다. 전반적으로 심사위원석에서 긴장된 분위기가 누그러진 반면 웃음의 빈도가 늘었고 활력이 더해진 것도적절하게 치고 들어오는 유희열 특유의짖굿은 입담 덕분때문이다. 게다가 때때로 진행자 역할을 해낸다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K팝 스타 3>는 유희열의 영입을 통해서 덕분에 오디션 프로그램으로서의, 포괄적으론 음악 프로그램으로서의 전문성을 보다 확실하게 구축하는 동시에 예능으로서의 재미까지 확보했다. 유희열이 세 심사위원의 균형에 있어서 무게 중심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덕분이다. 보아가 없어서가 아니다. 유희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K팝 스타>는 오디션 프로그램이기 전에 음악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이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시청자에게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물론 말로 설명하는 게 아니다. 가수를 뽑는 프로그램이니 노래로서 설명하는 거다. <슈퍼스타 K> 시즌5가 간과한 것이 여기에 있다. <슈퍼스타 K> 시즌5는 가수를 뽑는다고 했지만 예선을 진행하는 동안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별로 없었다. 예선을 보는 내내 끝까지 편집만 했다. 노래는 뭉텅뭉텅 잘리고, 오디션 참여자들의 사연 팔기에 연연하고, 다음 장면에 대한 호기심만 배가시키는데 눈이 멀었다. 노래도 제대로 들려주지 않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들은 날이 갈수록 엄격하기만 했다. 이유를 알 길이 없는 셈이다. 그만큼 경연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경연 참여자의 매력은 사연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대가 제대로 보일 때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응원하고 싶은 사람을 찾고 싶어한다. 누가 몇 점을 받았는가에 대한 흥미는 그 다음이다. 게다가 이상한 건 심사위원들 또한 매너리즘에 빠진 것처럼 굴었다는 것이다. 특히 생방송에 들어간 이후부턴 평점 자체가 들쑥날쑥했다. 오디션 참가자들도 심사위원들도 하나 같이 매력을 어필하지 못했다. 흥미가 없으니 긴장도 되지 않는다. 볼 맛이 안 난다. 2%도 미치지 못한 결승전 시청률은 결과적으로 그리 됐다는 수치상의 결과를 벗어나서 그 과정을 보건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엄하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위기를 진단하는 글들이 쏟아졌지만 그건 그저 <슈퍼스타 K>만의 자만에서 비롯된 실패였다.
<K팝 스타 3>는 <슈퍼스타 K> 시즌5가 간과한 것들에 제대로 집중하는 인상이다. 기본에 철저하다. <K팝 스타 3>를 보면서 단 한번도 노래에 지나친 편집을 가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경연에 참여한 이의 실력을 시청자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시청자 역시 오디션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시청자가 팬이 되는 건 이런 과정을 통해서다. 덕분에 볼 맛도, 들을 맛도 난다. 누가 어떤 목소리를 지녔는지, 무대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겠다. 그만큼 심사위원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프로그램 내내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이 <K팝 스타 3>를 궤도에 올려놓고 있다. 반대로 <슈퍼스타 K> 시즌5가 팬을 만들기는커녕 죄다 밀어낸 건 바로 이런 과정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 자체가 어린 참가자들을 경쟁으로 밀어 넣는다는 점에서 가혹한 면이 있다. 그만큼 땀과 눈물을 딛고 그 무대에 선 이들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그 무대에서 찬사를 받든, 지적을 받든, 그 무대에 서있는 순간만큼은 그 무대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존중이란 간단하다. 경쟁을 통한 당락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는 것보다도 중요한 건 바로 무대이고 노래다. 노래하는 이에겐 최상의 무대를, 지켜보는 이에겐 관람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환경을 제공해주면 된다. <K팝 스타 3>가 그렇다. 그래서 흥행하는 것이다.
생방송 무대에 진출한 톱 10 가운데 두 팀의 탈락자가 가려진 지난 3월 9일 방송은 시청률 10.5%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성공적이다. 지금까지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관철해나가고 있다고 평할만하다. 게다가 앞으로의 생방송 무대를 채울 8명의 경쟁자들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는 인상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언제나처럼 기대 반 응원 반으로 지켜보겠다. 그러니까 권진아 파이팅.(…응?)
올해에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작품마다 명암이 엇갈렸다. 보고 싶은 작품은 여전히 넘쳤다.
사실 생중계를 보진 못했다. 그저 결과만 실시간으로 체크했을 뿐이다. 그래서 U2의 라이브 무대를 생방송으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쉬웠다. 게다가 사회를 맡은 엘렌 드제너러스가 꽤 진행을 잘했던 것 같다. 미국의 유명한 TV쇼 프로그램인 <엘렌 쇼>의 진행자답게 유연한 진행 실력을 뽐내면서도 시상식의 품위에 어울리는 유머를 구사한다. 시상식이 열리는 할리우드의 코닥 극장으로 피자를 배달시켜서 브래드 피트가 손수 서빙을 하게 만든 건 정말 훗날에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일 거다. 그녀가 할리우드의 대단한 배우들과 찍은 셀카가 트위터상에서 무한하게 리트윗되는 과정은 오스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의 배우들이 모인 현장에서 권위보다도 대단히 소소한 동료애를 목격한다는 건 할리우드가 지닌 저력을 체감한다는 것과 같다. 영화를 통해서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료 의식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인상이 오랜 할리우드의 역사와 함께 해온 86년 전통의 아카데미 시상식만의 저력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상 결과를 놓고 보자면 이번 아카데미는 <그래비티>를 위한 무대였던 것 같다. 10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고,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시각효과 부문을 비롯해서 촬영, 음향효과 등 기술 부문을 거의 독식한 건 익히 예상한 결과였다. 지난 해에 발표된 영화 중 <그래비티>만한 기술적인 성취도를 보여준 영화를 언급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다만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주요부문에서 <그래비티>가 호명될 수 있을 지가 관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편집상과 감독상 부분 수상은 할리우드가 보기 드물게 SF영화를 인정한 결과라는 점에서 이례적이지만 한편으론 <그래비티>가 구현해낸 영상 기술이 특정한 장르적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인 영화적 감동을 전달하는데 혁혁한 매개체가 됐기 때문임을 아카데미 위원회 역시 인정한 것이 아닐까. 사실 <아메리칸 허슬>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편집상을 <그래비티>가 차지한 것도 기술적인 효과를 넘어서 영화라는 결과물로서의 완성도를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만약 <그래비티>가 작품상을 수상했다면 어땠을까? 반대로 <노예 12년>의 감독 스티브 맥퀸이 작품상 대신 감독상을 쥘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랬다면 제86회 아카데미는 역사상 꼽힐만한 오스카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기술적인 진보를 인정하는 의미는 더해지고 흑인 감독의 능력을 인정한 오스카로 기억됐을 테니까. 어쨌든 스티브 맥퀸은 처음으로 작품상을 수상한 흑인 감독으로 기록되며 역사에 남게 됐다. 덕분에 브래드 피트 또한 피자를 서빙했던 특별한 경험을 넘어서 배우로서 오른 적 없었던 아카데미의 단상을 제작자로서 오르게 됐다. <노예 12년>은 흑인 감독이 연출한 흑인 노예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보다 주목을 받을만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흑인 감독이 이토록 중립적인 시각과 건조한 감정 묘사를 통해서 그 시대성을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었다. 걸작의 면모가 충분한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앞서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한편으로 대중적인 호감을 얻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건 되레 이 영화가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화가 묘사하는 시대성의 비극을 생생하고도 건조하게 전달하는, 그만큼 무겁고 엄중한 시대적 목격이 될만한 영화다. 작품상 수상은 이 영화에게 어울리는 대우처럼 보인다. 그리고 <노예 12년>은 <헝거>와 <셰임>을 통해서 자신의 재능을 줄곧 증명해왔던 스티브 맥퀸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난 거장의 면모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환영할만한 결과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매튜 맥커너히와자레드 레토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정확하게는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 출연한 이후부터 배우 경력의 전후를 나눠버리 듯 눈부신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매튜 맥커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완벽하게 메소드 배우로 진화해 버린다. 에이즈에 걸린 텍사스의 마초 역을 맡은그는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미국 내에서 금지된 해외 제약사의 약품을 들여오고 이를 판매하는 사업을 벌이며 불합리한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맞서는 동시에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속에 갇혀 살던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인물을 온 몸으로 연기한다. 단순히 체중을 얼마를 줄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이 영화 속에서 살았던 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장담하건대 아마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이후로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된 어떤 배우도 이만한 연기를 보여줬던 적이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의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영화엔 자레드 레토도 있다. 아무래도 국내 인지도가 낮은 배우이지만 <레퀴엠>과 같은 작품에서 혹은 지난해에 개봉된 <미스터 노바디>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이 배우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보다 확실하게자신의존재감을 발산한다. 매튜 맥커너히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란 영화를 가득 채우는 면과 같다면, 자레드 레토는 이 영화의 결을 만드는 선과 같다. 일찍이 <영 빅토리아>와 같은 실화 바탕의 영화를 연출한바 있는 장 마크 발레를 통해서 재현되는 시대적 풍경 또한 인상적이며 두 배우의 훌륭한 연기를 위해 마련된 완벽한 무대 노릇을 한다.
한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이 아카데미를 수상한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시종일관 모순된 일상을 전전하는 신경질적인 여인을 연기하며 풍자적인 웃음을 유발하다 결말부에 다다라 놀랍도록 처연한 심연의 민낯을 드러내며 영화 자체의 감정적인온도를 바꿔버린 그녀의 표정은 애초에 <블루 재스민>이란 영화가 품고 있었던 완벽한 결정과도 같았다. 물론 한편으론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에겐 조금 아쉬운 오스카가 아니었을까. 지난 2010년 <블라인드 사이드>로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거머쥐긴 했지만 <그래비티>는 그녀에게 대단히 특별한 작품이었을 거다. 한편으론 이번 아카데미 최대의 이변으로 꼽힐만한 루피타 니옹고의 여우조연상 수상은 지난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프레셔스>의 모니카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겼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 놀라운 결과다. 납득할 수 없는 결과는 아니지만 미친 듯한 연기력을 선보인 <아메리칸 허슬>의 제니퍼 로렌스나 탁월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 <블루 재스민>의 샐리 호킨스를 생각한다면 두고두고 이례적인 선택으로 회자될 것만 같다.
<슈퍼배드 2>를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린 <겨울왕국>이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건 역시 익히 예상한 바이지만 픽사가 아닌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건 최초란 점에서 특별한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은 2002년에 처음 신설됐다. 게다가 전통적인 주제가의 명가였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상 수상은 2000년 제72회 오스카에서 <타잔>으로 수상한 필 콜린스 이후로 무려 14년만이기도 하다. 한편 <겨울왕국> 상영 전에 짧게 소개된 단편 애니메이션 <말을 잡아라!>가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이 유력하다고 생각했지만 <미스터 허블롯>이란 작품에게 밀린 건 꽤나 놀라웠다.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변천사를 디즈니의 전통적인 흑백 캐릭터들을 통해서 유머러스한 연출과 테크니컬한 구현에 성공한 수작을 밀어낸 작품의 정체가 실로 궁금하다. 한편 미술상과 의상상을 수상하며 2관왕에 오른 <위대한 개츠비>는 영화가 지닌 야심에 비해서 아쉬웠던 결과물을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씁쓸한 결과처럼 보인다. 올해만큼은 내심 오스카 트로피를 노렸을지도 모를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또 다른 주연작이었다는 사실에선묘한 연민이 드는 것도 같다. SNS상에서 떠도는 레오의 아카데미 수상 실패에 관한 '짤방'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수상 실패가 인류 대화합에 기여하고 있는 것도 같다. 게다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매튜 맥커너히가 그와 함께 잠시 호흡을 맞춘신을 복기한다면동정심이 더해지는 효과가 유발되는것 같다.
물론 이번 아카데미에서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던 건 <그래비티>와 함께 10개 부문 후보로 오른 <아메리칸 허슬>이었다. 이 작품이 단 한 개 부문도 수상하지 못한 건 역시 이례적이다. 사실 <아메리칸 허슬>은 영화를 만드는 기능적인 면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으로 보이는 반면 결과적으로 정서적인 울림이 얕은 작품처럼 느껴지긴 했다. 마치 캐릭터들의 전장처럼 보일 정도로 배우들 저마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지는이 영화는 시대를 조망하는 시야와 능수능란한 연출과 빠른 편집이 돋보이는 코미디물이지만 그 실화의 재현이 끝내특별한 감흥까지 가 닿는다는 인상을 느끼진 못했다. 뛰어난 범작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것이 아마도 골든글로브에 비해서 영화적으로 보수적인 아카데미 위원회의 호응을 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을지도. 어쨌든 축제는 끝났고, <아메리칸 허슬>은 놀랍게도 무관의 제왕으로 남겨졌다.
한편 각본상을 수상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허>와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파올로 소렌티노의 연출작 <그레이트 뷰티>가 궁금하다. 해외 평에 따르면 <허>에서 호아퀸 피닉스가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존 말코비치 되기>와 <어댑테이션>,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같이 범상치 않는 작품들을 연출해온 스파이크 존즈의 작품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또한 전작 <아버지를 위한 노래>로 한국에서도 알려진바 있었던 파올로 소렌티노의 <그레이트 뷰티> 역시 눈길을 끈다. 참고로 <그레이트 뷰티>는 6월에 개봉된다고 한다. 아직 <허>는 개봉 여부가 불투명한 인상인데 아카데미의 힘을 빌어서 개봉에 탄력을 받았으면 좋겠다. 또한 수상엔 실패했지만 스타 캐스팅 하나 없는 흑백 영화로서 주요 부문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네브라스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디센던트>와 <사이드웨이>, <어바웃 슈미트>와 같은 작품을 연이어 내놓은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신작이라니 어찌 기대하지 아니할 수가. 이미 해외에선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아카데미 특수를 마저 누릴 순 없을까. 우리가 아카데미를 주목하는 것도 그곳에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가 있기 때문이니까.
지난 2월 23일에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았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Invisible People>이란 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유엔난민협회와 제일기획이 공동으로 기획한 전시로서 개최된 지 2주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사람들’이란 전세계의 난민들을 의미한다. 난민들은 고국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전쟁으로 인해서,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서, 인종 학대로 인해서 자신의 나라를 잃었거나 등져야만 했던 이들을 우린 난민이라고 부른다. 지난해 UN의 통계 발표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난민의 수가 약 4천5백2십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4.1초당 1명의 난민이 발생한다고 한다.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3층에 있는 전시장에 들어서서 볼 수 있는 건 전시장 벽을 둘러싼 영상이다. 벽에 걸린 한 LCD 모니터에선 난민들에 대한 사연과 난민에 대한 시민들의 생각을 담은 짤막한 영상을 재차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모니터에선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시킨 영상이 중계되고 있었다. 미술관 안팎에 놓인 카메라를 통해서 중계되는 실시간 영상이 공통적으로 비추는 건 난민들이었다. 물론 실제 난민이 아니다. 전시를 기획한 제일기획의 김홍탁 마스터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미니어처는 아프리카의 난민촌에서 만난 난민들을 3D 스캔한 뒤 3D 프린터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 난민의 미니어처는 전시장 곳곳을 비롯해서 미술관 안팎의 사소한 풍경 속에 자리하고 있다. 모니터 너머에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머무는 풍경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시장 곳곳엔 미니어처들이 배치돼있고, 전시 카탈로그엔 전시장 지도로 이 미니어처들이 자리하는 공간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니어처들의 주변엔 모델이 된 난민의 이름과 QR코드가 있는데 이 QR코드를 통해서 스마트폰으로 그들에 대한 직접적인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다. 전시장 중앙에 자리한 기둥의 터치스크린 모니터를 통해서 응원의 메세지도 전달할 수 있다. 인터랙티브한 아이디어와 의미 있는 메시지를 결합한 기획으로서 흥미를 제시한다. 다만 인터뷰 영상에 좀 더 심도 있는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면 보다 진한 의미를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김홍탁 마스터는 실질적으로 미니어처를 접근성이 좋은 공간에 배치하고 싶기도 했지만 개당 30만원 상당인 미니어처의 훼손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이런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전시장의 좁은 면적 또한 관객의 흥미를 휘발시킬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좋은 아이디어를 통해서 좋은 시도를 해본다는 점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가치 있는 전시라고 생각한다. 예산이라던가, 여러 가지 현실적인 한계를 아이디어로서 돌파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최소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여지라도 열어줄 수 있다면 성공적인 전시가 아닐까. 원래 3월 2일에 종료될 예정이었던 전시는 3월 30일까지 계속된다. 참고로 관람료는 무료다. 그저 찾아가기만 하면 보인다.
파격적인 동성애 영화로 알려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 어떤 멜로보다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러브스토리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지독한 멜로물입니다. ‘이별을 통한 소녀의 성장통’이란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건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그 이별이 성장으로 해소되기 보단 통증으로 내려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길에서 마주쳤던 엠마(레아 세이두)와의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들을 거듭해나갑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미래로 나아가는 엠마와 그 주변부의 삶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삶이 예상 밖의 궤도를 돌게 되는 셈이죠.
단순히 성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 이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저편으로 나아가버리는 셈이에요. 결과적으로 아델에게 있어서 엠마와의 이별이란 감정적인 단절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기회와의 단절로도 이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만큼 이별이라는 진통은 아델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절망이자 비통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신이 보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저편까지 나아가 그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원점으로 튕겨져 추방돼버린 셈이니까요.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좋습니다. 특히 아델 역을 맡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는 전반적으로 영화의 서사와 함께 인상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인데 이별 이후의 감정적 진폭을 드러내는 후반부의 연기는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어질 만큼의 감정적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충동적인 계기로 맞닥뜨린 이별에 의한 심적인 고통이 스크린 밖으로도 절절하게 전이되는 기분이죠. 게다가 그 반대편에 선 엠마 역을 맡은 레아 세이두는 거대한 감정적 파고를 형성하는 매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이별 이후에 남게 되는 애틋함 같은 감정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극적인 페이소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두 배우의 화학작용 자체가 이 영화의 감정을 입체적인 구조로 이끌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건 대단히 수위가 높은 여성간의 섹스신이 긴 분량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대단히 적나라해서 한편으론 담담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은밀하고 농염한 연출을 위한 카메라 앵글이 동원되기 보단 사물을 관찰하듯 평범한 프레임 안에서 행위가 목격되는 인상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언가를 먹을 때 보는 이의 욕구를 건드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토마토 파스타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장면에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기도 했죠. 색욕보다도 식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니 좀 묘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이 영화가 섹스신을 특별한 영화적 체험처럼 위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라는 소재는 이 영화의 주요한 키워드가 될 뿐,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안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찰나의 엇갈림을 보면서 ‘운명’이란 단어에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뒤바꿀 수 없는 결과를 등 뒤에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델의 뒷모습을 비추는 엔딩시퀀스의 롱테이크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 염려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렇게 그 너머를 살아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보다도 영화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죽음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면의 생에 대한 호기심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 영화에선 프랑스의 전인적인 교육 환경을 목격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하는 신에서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대사가 나올 땐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불법시위라는 목적을 앞세운 과격한 진압 장면 같은 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문득 생각하게 되네요.
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좀처럼 목을 물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미지로 이빨을 드러낼 뿐이다.
‘영원히 산다’라는 말을 뒤집어 봅시다. ‘영원히 죽지 못한다’라고 생각해봅시다. 영원히 산다는 건 그만큼 권태롭고 지겨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두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단어를 굳이 수정한 건 두 존재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단히 오래된 존재처럼 말하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1세기 남짓의 경험만이 가능한 인간과 달리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인류의 역사를 살피며 살아왔습니다. 아니, 살아남았습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뱀파이어가 됐는지 몰라도 태초부터 그들의 삶엔 낮이 없었던 것만 같습니다. 매우 평온하지만 은밀하고 때때로 아슬아슬한 그들만의 밤을 수 세기 동안 버텨왔습니다.
일단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주는 장르적인 기대감을 품고 상영관을 찾았다면 대단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짐 자무쉬가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애초에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단히 서정적인 리듬감과 시적인 묘사로 특유의 미학적인 시선을 견지해온 짐 자무쉬의 뱀파이어물에서 장르적인 공포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낯선 것이니까요. 그리고 짐 자무쉬 특유의 미학적인 방식은 이 영화가 주목하는 뱀파이어들의 영속성과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고상하고 우아하게 소모되는 뱀파이어들의 평범한 일상은 때때로 대단한 블랙코미디의 자질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Only Lovers Left Alive>라는 시적인 문장은 생각보다 절박하고 짓궂은 제목입니다. 특히 느슨하게 풀려있던 영화의 흐름을 강하게 확 당기는 듯한 결말부 덕분에 이 영화 자체가 대단히 악랄하고 재기발랄한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아남는다’라는 절박한 감정과 직접적인 행위의 중의성을 한번에 깨닫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으론 뱀파이어들이 ‘인간 따위가’란 식으로 계급적인 우월성을 드러낼 때 그들이 지닌 고매한 정신이 느껴지지만 인간 세계에 기대서 자신의 삶을 연명해나가는 일상을 거듭 목격하다 보면 멸종을 앞둔 동물의 자존심을 보는 것과도 같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아 버린 귀족 가문의 풍경 같기도 하고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할법한 존재들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대단한 아이러니이기도 하죠.
나이트신으로만 점철되어 낮은 조도의 색채감으로 채워진 영화의 풍경은 그만큼 정적입니다. 어둠과 어둠을 밀어내는 조명들로 채워진 영화의 몽환적인 풍경과 비현실적인 색감 자체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 듯한 근사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물들만큼이나 영속성을 지닌 듯한 소품들로부터 반시대적인 낭만 같은 것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백미는 캐스팅입니다. 틸다 스윈튼은 그냥 뱀파이어를 섭외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요. 특유의 신비감과 중성적인 매력이 더해져서 영화의 비현실성을 강화하는 도구적인 역할도 해내고 있다는 인상도 들고요. 반대로 톰 히들스턴은 뱀파이어로서 ‘생존’과 ‘생활’이라는 현실적 화두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캐릭터의 조합이 영화 자체의 시공간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하도록 이끄는 것도 같고요. 서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미아 바시코브스카와 안톤 옐친은 캐릭터의 쓰임새나 표현력이 적절합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비장한 페이소스와 역설적인 냉소를 품게 만드는 존 허트의 존재감도 탁월하고요. 완벽하다고 칭송해도 모자랍니다. 기꺼이 목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랄까요.
조셉 고든 레빗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돈 존>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찾으며 여자를 찾는 남자가 있다. 최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이 점수를 매기고, 최고등급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춤을 추다가 집으로 가서 섹스를 즐긴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게임이나 다름없다. 1회용품을 소비하듯이 자연스럽고 거리낌 없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다음날이 되면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도돌이표 같은 밤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도 그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위한 환상 속의 그녀는 따로 있다. 클릭 몇 번이면 만날 수 있는 포르노 배우들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보다도 그를 만족시킨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돈 존>은 할리우드의 미래로 꼽히는 영민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각본, 연출, 주연작이다. ‘돈 존(Don Jon)’이란 제목의 모티프가 된 건 스페인 귀족 가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주앙(Don Juan)이라고 한다. 돈 주앙은 카사노바와 달리 자신이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혐오를 샀는데 여자를 노골적인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돈 존>의 존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만족할 수도 없는 잠자리를 전전하는 건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자존감의 정복을 위해서다. 그를 충족시켜주는 상대는 인터넷의 포르노 사이트에 널려있다.
‘포르노 중독자’라는 캐릭터의 특성은 인터넷 시대의 폐해를 연상시키지만 <돈 존>은 궁극적으로 관계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수긍하게 만드는 영화다. 존에게 있어서 진짜 섹스를 위해 거쳐야 하는 스킨십과 전희의 과정이란 그저 결과를 위한 노동에 가까운 반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만족스럽다. 쾌감이란 결과에 닿기까지의 과정이 간편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바라(스칼렛 요한슨)에게 끌리는 것 또한 쉽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차 존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관계에 탐닉하던 남자는 자신을 매료시킨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일방적인 관계의 허무를 깨닫는다.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쾌감이 ‘가짜’임을 깨닫는다.
<돈 존>은 계산된 연출 방식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반복적인 패턴을 지닌 존의 일상을 도돌이표 같은 동선과 공간 묘사, 행위를 통해서 묘사하는데 이 패턴에 미세한 변화를 삽입함으로써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별다른 설명 없이도 효과적으로 이해시킨다. 과감한 인서트컷을 삽입하거나 빠른 컷의 전환으로 두 개의 신을 연결하는 교차 편집 등 편집 방식이 현란하게 느껴지는 신도 더러 있는데 때때로 과장되거나 넘치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발랄하고 영리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소모될만한 소재를 군살 없는 성찰로 승화시킨 성장드라마로 완성해낸 재능이 놀랍다. 과감하면서도 감복할만한 결말로 다다르는 이야기 방식도 탁월하다. 실로 주목할만한 연출 데뷔작이다. 조셉 고든 레빗,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다. 참고로 중반부에 놀라운 카메오가 등장하니 기대할 것.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의 영화다.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밖에 없는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공항에서 손짓을 이용해서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남자를 마중 나간 모양이다. 친밀한 사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차 앞좌석엔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두 사람의 재회가 이혼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같다. 그 끝에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카메라와 함께 이야기의 문턱을 넘게 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예상 밖의 이야기 범위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운용 방식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영화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입장을 핵심으로 그와 연관된 주변부의 입장을 끌어들이며 극의 너비를 확장해나간다. 단순명확해 보이던 사안이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확대된다. 평범해 보이던 사연이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과 충돌하고, 그로 인해서 예기치 않게 불거지고 밝혀지는 진실들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된다. 평면적인 일상의 기류에 입체적인 변곡점이 형성되고 점진적으로 이야기의 절정이 형성된다. 감독 아쉬가르 파라하디는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도 명확해 보이는 사연의 끝으로부터 가늠하기 힘든 이야기의 방향성을 살핀 바 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끝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는 끝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굴러나간다. 그 예측하기 힘든 방향성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묘미에 가깝다.
부조리극의 양상 자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그 복잡다단한 이야기 흐름만으로도 감정적인 진통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에게 가능한 화술과 작법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단지 그런 이야기 구조에 대한 흥미만을 안겨주는 작품은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는 명확한 결말을 묘사하는 대신 카메라를 두고 떠나버리듯 롱테이크 기법의 엔딩 시퀀스를 제공한다. 이는 단순해 보이던 도입부 상황과 대비적인, 어떤 것도 불확실해진 결말부의 상황 자체를 아이러니한 여운으로 각인시킨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던 상황들의 내면엔 감당하기 힘든 비밀과 켜켜이 쌓인 오해들이 존재했고 그렇게 방치된 비밀과 오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당사자들의 삶을 휩쓸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의 진실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진실을 알았다는 판단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으로 가닿는다. 인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엔딩 시퀀스의 이미지는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진동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