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LA에서 벌어졌던 UFO대공습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는 <월드 인베이젼>은 보다 현대적이고 사실적인 <인디펜던스 데이>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사실적인 시가전 장면에서 발생하는 서스펜스가 쓸만한 수준을 자랑하는데 멀게는 <블랙 호크 다운>의 발전적 모델이라 할 수 있으며 조악한 캠버전 영상의 숏을 통해 현장감을 증폭시킨 <클로버필드>나 <디스트릭트 9>의 수법도 영리하게 동원됐다. 컷의 전환을 빠르게 가져가며 긴장감을 배속시키고 외계인의 공격으로 초토화된 LA시가지의 재난 광경은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이루면서도 그 영토에 속한 이들의 공포를 영리하게 포착하며 스릴러적인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딥 임팩트>도 아니고, 인류멸망의 이야기를 예상할 리 없는 관객들의 예감처럼 <월드 인베이젼>은 외계인의 대공세 속에서 무력화되다시피 하던 인류의 대반격을 그리는 SF전쟁영화다. 이렇게 빤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음에도 영화가 식상하지 않은 건 그 안에 놓인 캐릭터들의 드라마가 설득력 있는 감정을 자아내는 덕분이다. 구시대적인 ‘팍스 아메리카나’ 영웅주의의 잔상이 보인다고 손가락질 당할 수도 있겠으나 딱히 정색할 필요는 없겠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재난 속을 헤매는 사람들이 세계인을 표방할 필요도 없지 않나. 외계문명의 디자인은 마치 진화된 기계문명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 때때로 초토화된 시가지의 모습은 <터미네이터>의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킨다. 한편으로는 <디스트릭트 9>의 외계인 복수 버전 같기도 하고, 보다 상업적으로 다듬어진 <우주전쟁>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볼만하다는 말씀.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위장된 극영화적 오락물. 도입부부터 인터뷰와 취재 영상을 동원하며 사실적으로 위장된 정보를 방대하게 쏟아내는 <디스트릭트9 District9>은 기존의 SF영화들이 제시한 상상력을 고스란히 녹여낸 도가니에서 온전히 판본이 다른 형태로 주조된 독창적 산물이다. 작은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된 결과물이 어떤 성과에 다다를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실험적 소품이자 기존의 할리우드발 상업영화들의 방법론을 하이브리드(hybrid)하게 응용한 SF변종이다.
거대한 우주선이 출몰한 건 맨하튼도 아니고, 시카고도, 뉴욕도 아닌,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상공이다. 이를 대사로서 읊조리기까지 하는 영화의 태도는 마치 할리우드 SF영화들의 관성을 배반하는 유희적 조롱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디스트릭트9>이 요하네스버그에 우주선을 출몰시키고 외계인 수용소를 설치한 건 단순히 할리우드에 대한 안티테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 <디스트릭트9>은 요하네스버그를 지배했던 과거의 부조리한 역사적 공기를 환기시킨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아공 안에서도 ‘디스트릭트6’라는 백인전용 출입공간이 실제로 존재했던 요하네스버그에 28년간 외계인 격리수용소 ‘디스트릭트9’이 존재했다고 설명하는 영화적 진술은 요하네스버그를 점하고 있었던 어떤 과거와 깊게 연동된다. <디스트릭트9>을 연출한 닐 블롬캠프가 남아공 출신이란 점은 이런 추측을 강력하게 보좌하는 사안이다.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외계인 수용소 ‘디스트릭트9’의 안팎에서 인간과 외계인은 28년간 공존해왔다. 그 28년간 인간과 외계인은 많은 사건과 사고를 공유했고 그 과정에서 상대와의 갈등은 불거져왔다. 영화는 초반부부터 객관적 형태의 이미지를 서사적으로 편집한 영상에 담아 일목요연하게 단시간에 과거사를 정리해 전달한다. 요하네스버그의 시민들은 ‘외국도 아닌 외계에서 온’ 이방인을 멸시와 적대로 맞이한다. 지도층을 전염병으로 잃었으며 사고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탓에 인간의 질서에 섞이지 못하고 요하네스버그를 무법천지로 만들어버리는 외계인은 시민들과 잦은 충돌을 빚게 된다. 결국 외계인에게 살해당하는 사람까지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요하네스버그의 시민들은 정부를 향해 외계인의 추방을 요구하는 소요사태까지 벌이게 된다.
외계인을 적대하고 그들의 수용소 이전을 요구하는 요하네스버그 시민들의 행위는 일종의 ‘님비(NYMBI)’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사태에서 발효되는 핵심적 의문은 좀처럼 공존을 모색하기 어려운 인간과 외계인이 어째서 맞닿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어째서 외계인은 지구를 떠나지 못하는지, 반대로 어째서 인간들은 외계인을 지구에 붙잡아두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한다. 영화는 이에 대해 대사로서 직접적인 힌트를 제공한다. “디스트릭트9엔 비밀이 많죠.” <디스트릭트9>은 궁극적으로 SF적 상상력으로 디자인된 음모론이다. 영화적 허구로 치장한 현실의 우화다. 외계인과 인간의 우열적 관계와 이를 통해 빚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의 형태는 실상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인종 분쟁의 모습과 가깝게 닮아있다.
닐 블롬캠프가 2005년에 발표된 6분 23초 분량의 단편 <얼라이브 인 요하네스버그 Alive in Joburg>는 <디스트릭트9>의 기본적인 자질이 어디서 구축되고 비롯됐는가를 보여주는 기본적인 소스나 다름없다. 이를 더욱 구체적인 이미지와 선명한 세계관으로 발전시킨 닐 블롬캠프는 그만큼 견고해진 정치적 의식을 완강하게 밀어붙인다. 3인칭 시점의 보도적 영상과 인터뷰 컷을 스트레이트하게 이어 붙여 나열하며 객관성과 현장성을 확보하는 <디스트릭트9>은 이를 통해 극영화적 연출력을 선보이는 후반부 이미지를 위한 설득력마저 확보해낸다. 객관적(으로 위장된) 이미지의 나열로서 거침없이 서사적 줄기를 뻗어나간다. 주요한 맥락의 중심에 선 인물 비커스(샬토 코플리)의 주변인물들을 인터뷰하며 비커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도입부는 영화가 도달해야 할 모종의 결과에 대해 예측하게 만듦으로써 극적 호기심을 부풀린다.
제3자들의 진술로서 회자되곤 하던 비커스를 등장시키며 서사를 정상궤도로 진입시키는 영화는 3인칭의 다큐적 시점에서 극중 인물과의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의 관찰에 치중해나간다. 다국적 연합 외계인 관리과 MNU(Multi-National United)에 근무하는 비커스는 디스트릭트9에서 요하네스버그로부터 200km떨어진 새로운 수용소로 이전하겠다는 조항에 대한 동의서에 180만 외계인의 싸인을 받아야 하는 중책을 담당하게 된다. 비커스의 뒤를 쫓는 카메라는 그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비커스의 행위를 관찰자 시점에서 따라잡으며 페이크 다큐멘터리로서의 객관성과 극영화로서의 연출력을 중첩시킨다. 현장감을 더하는 핸드헬드 영상과 거친 편집을 통해 사실성을 획득한 영화는 이를 통해 허구적 상상을 과감하게 현실세계에 안착시키고 점차 극영화적 진전을 거듭해나간다.
중반부에 다다를 때 즈음 묘사되는 비커스의 신체적 변이는 <디스트릭트9>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인물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던 영화는 이를 통해 인물과의 거리감을 해소하고 인물의 심리를 극적 감정으로서 포용해나간다. 신체적 변이를 경험하는 비커스의 심리적 변화는 점차 객석에 앉은 관객의 감상을 지배할만한 감정적 형태로 번져나간다. 동시에 <디스트릭트9>은 인간보다도 외계인의 입장을 배려한 관점과 감정이입을 고수할 수 밖에 없는 영화다. 영화에서 약자의 위치를 점하는 외계인들은 인간이 행사하는 다양한 폭력의 형태에 노출됨으로써 피해자로서의 위치를 점유하고 그 형태적 우열관계 속에서 관객의 감정을 점유할만한 동정심을 이끌어낸다. 디스트릭트9에 수용된 외계인들이 인간에 의해 받게 되는 다양한 폭력을 인종차별적 형태에 가깝게 묘사하는 <디스트릭트9>은 인종적 분쟁과 갈등을 외계인과 인간의 대립으로 치환한 우화나 다름없다.
정치적 메타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디스트릭트9>은 사실상 상업영화로서도 손색없는 오락성을 선보이는 작품이다. 현실이란 밑바탕을 훼손하지 않는 수순에서 SF적 상상력을 일부 수용해 넣은 <디스트릭트9>은 역동적인 액션을 연출하고, 캐릭터와 이미지를 활용해 서스펜스와 위트를 유발하기도 하며, 외계인과 인간의 우정을 다룬 버디무비적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는 동시에, 휴머니즘과 멜로적 감정마저 이입하는, 장르적 도가니나 다름없다.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다기 보단 이미 갖춰진 것들을 토대로 새로운 형태를 조립해나간다. 궁극적으로 정치적 우화로서의 자의식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극영화적인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종종 껑충거리듯 내러티브를 건너는 플롯은 영화적 단점이라기보단 의도된 효과처럼 인식될 정도로 <디스트릭트9>은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적 혁신이다. 저예산으로 완성된 영상의 조악함이 되레 현장성을 극대화시키고 극적 설득력을 더해나가는 수순을 지켜보면 흡사 웰메이드 영화에 대한 월등한 의식마저 전복되는 기분을 얻는다.
궁극적으로 <디스트릭트9>은 고도로 위장된 인종주의적 갈등을 치환한 정치적 우화다. 다국적연합 외계인 관리과 MNU가 사실 세계2위의 군수업체이며, 바이오기술을 적용해 외계인DNA에만 반응한다는 외계인의 레이저건을 활용하기 위해 인도적 차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디스트릭트9에 수용한 외계인들에게 생체실험을 자행한다. 심지어 인간과 외계인의 중간자로 변이된 비커스마저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들을 묘사하는 <디스트릭트9>은 반인류적 이미지로서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작품이다. 창조적인 소재를 발굴하거나 새로운 주제의식을 전달하고 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신선한 화법이 강렬한 인식을 남기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변종적 상상력을 동원한 세계관은 다양한 영화적 환상을 바탕으로 새롭게 설계한 하이브리드 이미지로서 현실을 환기시키는 우화적 주제의식을 품고 재생된다. 정확한 목표의식을 품고 거침없이 전진하는 영상은 그것이 월등한 오락적 가능성을 품고 있을 때 보다 효과적인 주제 전달을 가능케 한다는 걸 안다는 듯 강인하고 묵직하게 전진한다. 그만큼 <디스트릭트9>은 도전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작품으로서 오락성마저 포획한다. 이는 분명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인상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물론 3년 뒤,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전제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우주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운석이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결혼식 날 거인이 된 수잔(리즈 위더스푼, 한예슬)은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지하기지에서 선배(?) 몬스터들과 함께 ‘거대렐라’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채 격리된다. 그러던 어느 날, 외계로부터 정체불명의 거대로봇이 또 미국 땅에 떨어져(!) 무차별 공격을 감행한다. 전군이 동원됐지만 거대로봇에게 맞서긴 역부족이다. 결국 비밀리에 격리돼있던 몬스터들이 출격한다. ‘거대렐라’가 된 수잔과 함께 미씽 링크와 닥터 로치, 밥은 작전에 성공하면 자유로운 신분을 주겠다는 워 딜러 장군(키퍼 서덜랜드)의 약속과 함께 거대로봇을 제압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온다.
간단한 줄거리만으로 보자면 박진감 넘치는 SF액션물의 외피가 예상돼지만 <몬스터 vs 에어리언>(이하, <몬스터>)은 나사 빠진 캐릭터들의 우스꽝스러운 행위와 대사를 통해 유머로 발생시키는 스크루볼 코미디에 가깝다. 특히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라는 혈통을 입증하듯 의인화된 몬스터 캐릭터들이 해학적인 위트를 구사한다. 스토리 라인 자체는 결과적으로 단조로운 것이 사실이다. 주지하는 정서적 감흥이 뻔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식상한 스토리는 어떤 면에 있어서 <몬스터>의 야심에 어울리는 배경이다. 인간을 위협한다고 믿었던 몬스터들이 지구를 구하고, 되레 인간의 혐오를 극복하며 슈퍼히어로에 버금가는 존재로 변태되는 성장스토리엔 나름대로 제 크기에 걸맞은 의미가 있다. <몬스터>의 야심은 심오한 스토리텔링과 어울릴만한 것이 아니다. 스토리는 조연에 가깝다.
주연은 영상이미지다. ‘인트루 3D(Intru 3D)’라 지칭되는 3D영상기술을 통해 구현된 입체적 영상이 <몬스터>의 야심 그 자체다. 시각적 기술의 진일보를 통해 새로운 차세대 엔터테인먼트의 자극을 체험하고 만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일수록 이미지는 단명해진다. 거대로봇과 맞서는 몬스터들의 에피소드는 거대한 사물의 등장을 통해 스케일을 넓히고 스펙터클을 확장하려는 기술적 성취의 전시적 욕망의 부산물에 가깝다. <몬스터>는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시킨 3D영상의 엔터테인먼트적 자질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가를 알리는 현대의 지표란 점에서 일단 흥미롭다. 이미 역치의 수준이 실무율의 단계에 들어선 영상의 오락적 기능성을 대체할 입체영상의 현대적 지표가 어느 수준에 다다랐는가를 증명하는 기술적 성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몬스터>는 되레 자신의 야심과 다른 지점의 사실을 증명하는 영화 같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을 담보로 한 혁신적인 이미지를 장착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어떤 수준 이상의 이야기와 함께 맞물리지 못한다면 영화적 만족도를 주지 못한다는 것. 뛰어난 효과는 뛰어난 영상의 기반이 되지만 그것이 영화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창작적인 스토리를 기반으로 삼지 못한 이미지는 결국 영화로서의 가치에 도달할 수 없다. 때때로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인상적인 매력이 있지만 그것 또한 <몬스터>를 권할 만큼 강력한 매력이라 정의 내리기도 쉽지 않다. <몬스터>는 창작과 기술의 조합에 있어서 과도기적인 작품이다.
불청객은 경계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우주에서 날아온 외계인은 지구상의 인간들에겐 위협적인 불청객이다. 물론 E.T처럼 선량한 눈빛으로 감동을 선사하고 떠나는 훈훈한 이방인의 사례도 존재하나 그 밖에 지구를 찾아온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무시무시한 행패를 부리며 인류를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우주에서 날아와 뉴욕 센트럴파크에 착륙한 정체불명의 스피어, 그리고 그로부터 내려온 외계인 클라투(키아누 리브스) 역시 정체불명의 위협적 존재다. 그를 따라 내린 거대한 로봇은 더더욱 수상하다. <지구가 멈추는 날>은 지구에 시련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외계인을 그린다. 하지만 그들이 단순히 지구정복을 꿈꾸는 불한당은 아니다. 지구를 찾아온 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1951년작 <지구 최후의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을 리메이크한 <지구가 멈추는 날>은 냉전시대의 정치적 메타포를 환경이라는 화두로 치환했다. 시대에 걸맞은 패러다임을 찾아 옷을 갈아 입혔다. 현시대에 걸맞은 문제의식이자 적절한 전환이다. ‘지구가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인간이 죽으면 지구는 산다’ 클라투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전지전능에 가까운 외계인의 징벌 앞에 인류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그 무참한 이미지만큼이나 끔찍한 건 실제로 현실이 그 징벌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51년작 만큼이나 분명 흥미로운 주제를 던지고 있다. 51년 당시의 상상력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반원형의 UFO는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신비로운 스피어로 변형됐고, 거대한 로봇 고트 역시 CG의 힘을 빌어 더욱 위력적으로 묘사된다. 전작과 달리 <지구가 멈추는 날>은 이미지의 제공권을 빌어 파괴적인 스펙터클을 적극 동원하며 블록버스터의 스케일을 자랑한다. 두 영화의 사이에 놓인 세월은 이미지의 규모 차이 만으로도 여실히 설명된다.
그럼에도 <지구가 멈추는 날>을 전자보다 높게 평가하기란 어렵다. 전자와의 비교를 떠나서도 분명 그렇다. 주제는 흥미롭지만 문장력이 떨어진다. 할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구 최후의 날>이 50년대 냉전시대의 정치적 패러다임에 대한 비폭력적 경고였다면 <지구가 멈추는 날>은 파괴적 위협을 동반한 환경문제에 대한 경고에 가깝다. 지구가 인류의 것임을 부정하는 클라투는 전지전능에 가까운 신적 존재다. 그가 인류의 멸망을 이야기하는 건 일종의 선언과 같다. 운명론적이다. 그를 설득하는 헬렌(제니퍼 코넬리)은 실상 무기력하다. 궁극적으로 거대한 파괴가 시작되고 모든 것이 망가질 위협에 놓인 인류의 상황은 가히 종말론적이다. 수습할 겨를이 없을 지경이다.
상황은 간단하게 정리된다. 거대한 댐이 터져 넘치는 강을 바가지로 막듯 상황을 무마시킨다. 논리적 이치를 묻는 건 무의미하다. 어차피 이 세계의 현실로서 판독할만한 사안은 아니다. 단지 그 거대한 형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다.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 중요한 건 이미지였다. 단지 거대한 건물을 쓸어버리는 파괴적 이미지를 담을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인류의 종말을 선언하는 배경엔 그런 얄팍한 근거가 엿보인다. 궁극적으로 이미지로 배를 채웠으니 이야기는 굶어도 상관없다. 전시가 끝났고 설명은 귀찮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감정적 문제로 거대한 사건을 마무리 짓고 해피엔딩을 알린다. 거대한 이미지를 동원해 파괴적인 협박을 운운하다가 갑작스런 회유에 나선다. 환경주의적 메시지가 무색해진다. 지구가 멈추기 전에 의식이 멈추는 기분이다. 키아누 리브스의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감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