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미국은 격변의 시기였다. 공식적으로 흑인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흑인과 백인의 빈부 격차는 그들의 삶을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구분 짓는 주요한 잣대 노릇을 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이 관행적으로 자행되며 인종 간의 갈등이 야기됐다. 특히 미시시피에서 흑인들의 위상이란 백인 가정을 위해 제공되는 값싼 노동력에 가까웠다. 유년시절부터 흑인 가정부의 손에 길러진 미시시피의 백인 아이들은 자라난 뒤, 되레 그들의 상전 노릇을 했다. 표면적인 계급적 구별이 사라졌을 뿐, 차별은 더욱 공고해졌다. 캐서린 스토킷의 <헬프>는 광폭한 차별의 한가운데서 폭력을 체감하면서도 묵묵히 백인 가정의 살림을 도맡아온 미시시피 흑인 가정부들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의 원작자와 가까운 친구이기도 한 테이트 테일러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헬프>는 원작의 서사와 캐릭터에 약간에 손질을 가미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전개로 각색의 묘를 살렸다. 할리우드의 다양한 신구 여배우들이 주를 이룬 이 영화는 인종 차별이 일상의 풍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당대 미시시피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그리고 영화가 지닌 진지한 문제의식을 관객의 감상에 드라마틱하게 녹여낸다. 마치 21세기 버전의 <컬러 퍼플>이라 할 수 있는 <헬프>는 보다 경쾌하지만 역시 강건하게 그 세계의 부조리를 응시하게 만든다. 스크린은 어느 야만적인 시대를 중계하는 창과 같고, 그 너머에서 저마다 제 삶을 살아나가듯 연기하는 배우들의 뚜렷한 캐릭터들을 통해서 영화는 보다 명확해진다.
<헬프>는 지난 시대의 부조리를 반추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인종의 벽을 넘어서 소통한 어떤 여성들의 자아 찾기를 그린 드라마이기도 하다. 차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결국 자립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종착된다. 흑인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웅변이 아닌, 그 약자들이 자신의 진짜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과정을 뚝심 있고 사려 깊게 살핀다. 동시에 <헬프>는 용기에 관한 영화다. 용기란 것이 막강한 힘의 산물인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유일하게 쥘 수 있는 것이 그 용기라는 아이러니를 절실히 깨닫게 만든다. 물론 이 영화는 차별에 관한 영화다. <헬프>는 차별을 그리되, 차별을 웅변하지 않는다. 백인 가정에서 불합리한 처사를 견뎌내야 하는 흑인 가정부들이 사랑 받지 못하는 백인 아이들을 진심으로 끌어안는 광경 속에서 느껴지는 건 흑백의 구분이 아닌 체온의 공감이다. 눈물샘보다도 마음을 울린다. 그리고 따뜻하게 끓는다. 유연하고 강인한 수작이다.
소년은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세상 또한 소년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소년은 어려서부터 가난했고, 엄마가 없었다. 어느덧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소년은 가난과 소외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가난하고 소외된 소년을 향한 세상의 관심이 시작됐다. 완득(유아인)의 담임선생인 동주(김윤석)의 짧은 언어로. “얌마, 도완득!” 하지만 갑작스러운 관심이 완득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같은 동네, 그것도 심지어 건너편 옥탑방에 사는 담탱이는 퇴교 후에도 완득의 주변에서 그를 귀찮게만 한다. 그래서 완득은 기도한다.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하지만 그 교회에서도 완득은 듣는다. 자신의 호를 지어준 담임선생 동주의 부름을. “얌마, 도완득!”
김려령의 동명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완득이>는 타이틀롤 완득이에 관한 이야기다. 원작의 설정 일부에 작은 변주를 가하긴 했으나 <완득이>는 기본적으로 원작의 활자를 스크린에 세워 넣는 작업에 충실한 작품이다. <완득이>는 어느 한 가난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그늘과 부조리한 편견을 살피고 들추는 작품이기도 하다. 밤무대에서 춤을 추는 꼽추 아버지, 얼굴조차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니, 어려서부터 가난과 소외에 길들여진 소년이 세상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방어하며 성장해 왔다는 것을 설명해내기보다도 그 과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일련의 불행을 비추는 과정에서 감정적인 감상을 휘발시키고 객관적인 상황을 살필 수 있도록 감상을 유도한다.
영화의 주를 이루는 건 완득이와 동주의 관계다. 완득이의 일상에 빈번하게 침입하는 동주와 이를 괴로워하는 완득이의 관계적 변화, <완득이>의 드라마틱한 사연은 바로 그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살갑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진실된 담임선생님 동주가 조용하게 모나듯 살아온 완득이의 일상에 끼어들어가며 진심을 전달해내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꿈꾸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제자에게 꿈을 지도하는 스승, 그리고 차츰차츰 그 귀찮은 관심에 호감을 느껴나가기 시작하는 소년, 유아인과 김윤석의 탁월한 호흡이 만들어낸 캐릭터의 앙상블은 가히 탁월하다. 특히 촌철살인의 대화만으로도 유쾌한 동주가 사납지만 한편으로는 순진하여 속을 알 수 없는 완득이의 멘토가 되어서 그에게 세상으로 다가서는 법을 지도하는 과정은 시종일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유쾌하게 진전된다.
<완득이>는 거대한 비극의 자질 위에 쌓아 올린 희극의 탑이다. 주인공인 완득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주변에 산재한 대부분의 이웃들은 역시 가난하거나 심지어 핍박 받는 이주노동자들의 가족이다. 다양한 민족적 구성원으로 이뤄진 다문화사회로 들어선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서 영화가 여전히 편견과 부조리에 노출된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는 이해와 배려라는 기본적인 예의가 갖춰져 있다. 동시에 극적으로 구성된 그 모든 광경이 대단히 비극적인 현실성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결과물들임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그 비극적인 현상에 자리한 이들의 삶을 단순히 비극의 희생양처럼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가난과 소외, 편견과 멸시라는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연대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완성하고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공감을 얻어내는 동시에 일종의 희망을 불어넣는다. 동시에 기본적으로 영화가 품은 코미디의 품질도 훌륭하다. 대사의 호흡, 캐릭터들의 어울림, 상황의 진전, 전반적으로 영화는 군더더기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면서도 자신만의 고유적인 특성을 어필해낸다.
“가난해서 쪽팔린 게 아니라 가난해서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게 진짜 쪽팔린 거야.” <완득이>의 대사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주의 대사들은 명확하고 현명하게 현실을 관통한다. 타인의 불행을 애써 위로하는 대신, 그 불행을 직관하고 그 불행이 결코 삶의 끝자락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결국 <완득이>는 대책 없는 낙관으로 구제할 수 없는 불행을 위한 현실적인 처방에 관한 이야기다. 소외된 이들의 삶에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보다도 그 삶에 어떤 방식으로 손을 내밀어야 하는가라는 방향을 유쾌하게 제시한다. 물론 그러한 계몽은 완득이의 우직한 표정과 동주의 유려한 언변을 등에 업고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극의 중심에 놓인 완득이의 담담한 표정을 통해서 비극에 대한 자위적인 감상의 배출을 억제하는 대신, 역설적으로 웃음을 활성화시키며 그 현장을 꾸준히 응시하도록 유도한다. 완득이는 결코 울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하며 끝까지 지켜보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그 비극 안에서도 성장하는 소년이 있음을, 살아갈만한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허영만 작가의 원작만화를 영화화한 <식객>은 33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식객: 김치요리>(이하, <식객2>)는 그 성공에 힘입은 후속적 기획이다. 사실상 <식객2>는 허영만 작가의 원작 브랜드 네임밸류만을 차용할 뿐, 그 작품의 성격과는 무관한 시리즈가 됐다.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의 출연과 이름만 같을 뿐 성격적으로 다른 중심인물의 등장은 이미 <식객2>가 원작을 염두에 둔 기획이 아님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식객2>는 원작의 서사와 캐릭터 관계를 염두에 둔 전작의 후속편이란 형태 안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본 수상관저 수석요리사인 장은(김정은)은 한때 기생집이었던 요리집이자 자신의 어머니 수향(이보희)가 있는 ‘춘향각’으로 돌아온다. 춘향각은 장은에게 기생의 딸이라는 트라우마를 안긴 공간이다. 그래서 장은은 어머니가 아끼는 춘향각을 제 손으로 없애려 한다. 한편 트럭을 타고 전국을 누비며 채소 장사를 하는 성찬(진구)이 친어머니처럼 모시는 수향의 ‘춘양각’을 없애려는 장은의 야심을 알게 된다. 결국 장은의 야심을 막고자 하는 성찬은 춘양각을 지키기 위해 장은이 출전한 김치대회에 나가 장은에 맞선다.
원작자의 의도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스핀오프라기 보단 일종의 팬픽에 가까운 <식객2>는 어찌됐건 <식객>에 이은 시리즈 속편이다. 동시에 음식을 소재로 둔 영화란 기조는 이어지고, 원작만화와 전작에서도 등장하는 대사,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어머니의 숫자와 같다”가 반복된다는 점에서도 그 모토의 계승을 연출하려 한다. 사실상 요리 영화라고 하지만 <식객2>가 주시하는 건 요리보다도 인간의 관계다. 전작의 단순한 선악구도에서 벗어난 캐릭터의 사연은 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자질이란 점에서도 발전적이다. 요리의 완성보다도 요리를 만드는 사람의 손과 마음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 손과 마음에 어린 진심을 포착하기 보단 자꾸만 진심을 연출하려 든다. 요리를 만드는 이의 정성의 온기를 전달하기보다도 눈물을 끌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거둘 수 없다. 김치를 응용한 다양한 요리들을 소박한 앵글로 포착함으로써 <식객2>는 여기서 요리란 단지 이야기와 관계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진심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스스로가 요리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을 강조하는 <식객2>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만 같이 군다. 요리를 소박하게 연출한다 해서 진심이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식객2>는 자신의 의도를 살리지 못하는 반면, 그 의도를 감출만한 것들만, 혹은 그 의도에 좋은 양념이 될만한 재료를 자꾸 덜어낸다. 음식영화라는 장점을 스스로 포기한다.
결과적으로 <식객2>의 의도는 존중할만하다. 하지만 의도가 앞설 뿐, 전략이 서투른 영화의 완성도는 존중할만한 형태가 아니다. 전반적으로 간이 싱겁고, 맛이 애매한 영화가 됐다. 인물의 과거를 끌어내 청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그 인물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최소한 완벽한 밥상을 차리진 못했지만 적당한 손맛을 만끽하게 해준 전작의 묘미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쩌면 <식객2>는 애초에 그런 결정적인 맛의 비결을 모르는 영화였을지도 모르겠다. 전작의 흥행성에 고무되어 기획된 속편의 운명적인 결과란 이런 듯 뻔하고 뻔한 수순을 걷게 될 뿐이라고 쉽게 단정지어 버릴만한 또 한 편의 사례로선 유용하다. <식객2>엔 속편이 지녀야 할 깊은 맛도 새로운 비범도 발견되지 않는다.
고명한 피리를 불며 요괴를 잠재우던 표은대덕은 다른 세 신선의 실수로 요괴에게 피리를 빼앗긴 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세상으로 사라진다. 세 신선은 세상에 뛰쳐나온 요괴들을 잡기 위해 사라진 표은대덕과 피리의 행방을 좇고, 이를 위해 도사 화담(김윤석)에게 도움을 청한다. 신선들과 함께 요괴를 좇던 화담은 그 과정에서 전우치(강동원)와 맞닥뜨리게 된다. 설화적인 프롤로그를 밑그림으로 판타지의 자질을 채색해나가는 <전우치>는 이를 통해 토속적 비현실성을 현대적 시대상 안으로 이입해 나간다. 실존인물이라 전해지기도 하는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신묘한 주인공 전우치를 발체해 현대적 배경에 이입한 <전우치>는 전통적인 영웅 캐릭터의 뼈대에 현대적 서사라는 살을 붙이며 ‘한국형 히어로무비’의 유형을 제시한다.
욕망이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캐릭터들의 아귀다툼을 그려낸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전우치> 역시 저마다의 욕망으로 맞부딪히는 인물들의 격돌을 그린다. 하지만 최동훈의 지난 두 전작이 복마전이었다면 <전우치>는 각축전이다. 두 전작이 저마다의 욕망을 향해 내달리던 캐릭터들의 힘겨루기였다면 <전우치>는 욕망을 안은 캐릭터의 롤러코스터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의 캐릭터들은 욕망의 패를 감추고 상대의 패를 읽어내기 위한 수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복마전의 말판 위에 놓여있다. 그 말판을 설계한 최동훈 감독은 능수능란하게 주사위를 굴리듯 캐릭터들의 일진일퇴를 연출하며 다채로운 캐릭터의 묘미를 한껏 활용한다. 비중의 크고 작음과 무관하게 캐릭터들의 개성을 드세게 살리고 이를 통해 영화의 스타일마저 단단하게 동여맨다. 두드러지되 모나지 않는 캐릭터 영화를 완성해냈다. <전우치>를 향한 팔 할의 기대감도이를 겨냥한다. 나열된 배우들의 이름을 읽어내려 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에 대한 군침을 돌게 만드는 <전우치>는 궁극적으로 이를 조율할 최동훈의 캐릭터 조율 실력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물건처럼 보일만한 작품인 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매력적이다. 시대적 배경의 변화에도 곧잘 넉살 좋게 어울리는 전우치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처럼 과장된 제스처와 표정으로 비현실적 이미지를 축적하면서도 현실적 괴리감을 능숙하게 돌파해나간다. 단순히 그 캐릭터의 표현적 존재감만으로도 장르적 가능성이 구축되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주변부다. 중심에 박힌 캐릭터의 모양새는 명확하지만 그 주변부에 놓인 캐릭터들은 구심점이 흐리고 쓸모를 명확하게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된다. 유해진의 초랭이는 적당한 수준의 위트를 자아내고 사연의 전환점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쓸모를 지닌다. 전우치를 상대하는 화담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표현력은 적절하나 선악의 기질적 변화를 설득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 캐릭터 자체에 대한 흥미가 반감된다. 동시에 임수정이 맡은 서인경은 지나치게 장치적이며 세 신선은 <전우치>에서 제 구실 자체가 무력한 낭비에 가깝다.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린 백윤식과 염정아만큼의 설득력도 없다. 제 역할을 설득하지 못하는 캐릭터들은 그저 자리만 지킨다. <전우치>에선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리듬이시종일관 엇박자로 삐걱거린다. 그저 캐릭터를 볼모로 서사적 노선을 거침없이 돌파해나갈 뿐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전자보다 적극적으로 토속적 설화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보다 한국적인 판타지 장르로서의 토대를 마련했다 할만한 작품이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구상된 듯한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와 보다 어울리는 장르적 접목을 시도했다 할만한 지점이며 어느 정도 성과를 인정받을 만한 구석이 발견된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감을 구사하는 액션신을 따라잡기엔 숨이 차게 느껴지는 앵글의 잔상이 시야를 가리며 감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전반적인 액션신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앵글은 공간감에 있어서 탁월한 시야와 반경을 제공한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아낸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다만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하고 저마다 독립적인 빼어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보인다는 게다. 마치 저마다의 음을 지닌 음표들이 악보로서 오선지에 배열된 채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제 음을 고집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일말의 아쉬움을 떨쳐내긴 어렵다.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많은 것들을 흔들어 섞지 못해서 문제인 셈이랄까. 음표만 나열한다고 악보가 나올 리 없는 것처럼.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것까진 알 수 없지만 이거 하난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3D디지털 이미지에 심취한 저메키스는 이제 더 이상 실사적 세상을 뷰파인더로 관찰하지 않는다. 북유럽 영웅 서사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양각의 세계로 구현한 저메키스는 이제 디지털 세계의 조물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크루지(짐 캐리)는 마주선 이들을 질색하게 만드는 지독한 수전노다. 그에게 크리스마스란 놀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이 만들어낸 혐오적 하루일 뿐이다. 그에겐 크리스마스 파티는 낭비고, 웃음은 사치이며, 길거리의 찬송가마저 소음일 뿐이다. 그런 그의 삶에 대단한 반전이 찾아온다. 언제나처럼 홀로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을 보내던 스크루지는 7년 전 죽은 동업자 말리의 혼령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3명의 유령이 찾아올 것이란 말을 전해 듣게 된다. 스크루지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세 유령과 스크루지의 만남을 다룬 <크리스마스 캐롤>의 플롯은 동화적 교훈극의 온화함이 깃들어 있던 원작과 달리 호러와 판타지가 뒤엉킨 환상적 이미지로 재현된다.
배우의 실제적 외모를 스크린의 디지털 캐릭터에게 이양하려는 것마냥 보였던 <베오울프>의 편집증적 시도와 달리 <크리스마스 캐롤>은 그와 반대로 디지털 캐릭터의 불완전한 형태에 실제적 외모를 함몰시켜버린다. 전자가 디지털 체계를 응용해 실제적 이미지를 허구의 세계관에 실현시키고자 한 이입적 시도였다면 후자는 실사적 표현력을 허구적 세계관에 어울리는 이미지로 리모델링하는 디지털 부호의 변환적 시도에 가깝다.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디지털 캐릭터의 특성에 함몰된 실제적 배우의 외양은 희미한 형태를 간직하거나 온전히 자취를 감춘 채 영화적 세계관에 철저히 복무한다.
디지털 캐릭터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는 언제나 저메키스의 영화를 혐오하게 만들거나 폄하하게 만드는 한계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언캐니 밸리란 음산한 작품의 톤에 어울리는 적절한 장치적 효과로서 성과를 발휘한다. 시체의 눈이라는 비아냥을 얻는 디지털 캐릭터의 눈과 얼굴은 역설적인 효과적 표현력을 얻는다. 디지털 캐릭터의 음산함을 기본적인 요소로서 삼아 호러적 이미지를 확장하는 한편, 판타지적인 입체감을 덧씌운 <크리스마스 캐롤>은 디지털 캐릭터의 기술적 한계마저도 작품을 위한 표현적 질감으로서 설득시키는 적절한 맞춤형 선택처럼 보일 정도다.
다만 <크리스마스 캐롤>이 종종 과욕적 이미지를 선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순 없다. 입체적 이미지로서 탁월한 감상을 부여할만한 순간들이 존재하지만 입체적 이미지를 감상하기 위한 시각적 피로감과 맞바꿀 만큼의 기회비용적인 쾌감이 이를 적당히 보충하는가라는 질문에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동시에 저메키스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위한 맞춤형 효과로서 3D디지털 비주얼을 활용했다기 보단 지난 실험의 연장선상의 연결고리에서 시도를 거듭하는 가운데 <크리스마스 캐롤>의 효과를 후발적으로 얻어낸 것은 아닌가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저메키스의 실험은 여전히 과도기적이며 그것이 집착을 넘어선 발전적 지향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불가피하다. 중요한 건 그 도전적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점이다. 그 여부에 따라 저메키스가 꾸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 역시 가치적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눈에 띄는 건 디지털 캐릭터 아래 놓인 짐 캐리의 흔적이다. 그는 3D디지털 부호의 숲 안에서도 아날로그적인 기본기를 설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크리스마스 캐롤>은 진화보다도 답보란 측면에서 유용한 몽상가의 꿈인 셈이다.
풍요로운 부로 치장한 베이클랜드 가문의 부부 바바라(줄리안 무어)와 브룩스(스테픈 딜런)는 겉으로 드러낸 평온 속에 잠재된 예민으로 끊임없이 충돌한다. 지독한 권태는 점차 부부의 삶을 괴리시키고 일상을 침전시킨다. 은밀하게 경멸과 적대로 서로를 희롱하듯 살아가는 베이클랜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토니(에디 레드메인)는 온전하지 못한 질환적인 부부관계로부터 잉태된 후유증의 존재처럼 결핍에 시달린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중적 나선처럼 얽힌 듯한 토니의 독백을 통해 진전되는 서사는 결국 결말의 파국까지 나아가며 충격적인 이미지를 연출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세비지 그레이스>의 베이클랜드 가문의 인물들은 마치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미국인 중산층들의 권태를 닮았다. 영혼이 없는 껍데기의 삶을 부로 치장한 채 살아가는 가족의 일상을 멸시의 대상이 되기 좋은 형태로 그려낸다. 실상 그 이미지 너머로 어떤 성찰이나 교훈이 감지되지 않는다. 마치 현대사 박물관에 전시된 밀랍인형들과 같은 인물들이 그리스적 비극의 현대적 역할극을 재현하지만 실상 그 재현의 방식엔 실체가 없다. 껍데기 같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엔 충격이 엄습할 뿐, 어떤 감정적 결과물이 채워지지 않는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분명 충격적인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 충격은 어떤 감정도 잉태하지 못한다. 욕망조차 상실한 텅빈 삶처럼 영화적 욕망을 좀처럼 감지하기 힘들다. 줄리안 무어의 가공할만한 연기를 지켜보는 것조차도 결국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인 양식과 별개로 기이하게 권태롭다. 빼어난 수사로 치장했지만 진심이 배제된 문장을 읽고 있는 것마냥 영혼이 새어나간 스크린을 맥없이 바라보는 기분이다. 마치 그 공허함이 영화적 의도인 것처럼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