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훈의 <타짜>가 해운대 앞바다였다면 강형철의 <타짜-신의 손>은 캐리비안 베이다. 인공 파도에 휩쓸리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결국 인공 파도는 인공 파도다. 애초에 기획되지 않았던 속편이란 맹점과 한계를 그나마 강형철이 잘 메우고 이어낸 인상이지만 태생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상. <타짜>의 캐릭터들이 차, 상, 마, 포 같아서 저마다의 파괴력도 있고, 차가 판을 휩쓰는 압도감과 마가 차를 삼키는 쾌감도 있었지만 <타짜-신의 손>은 '졸'의 향연 같아서 실력이 평준화된 선수들의 싸움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졸'전임이 뚜렷해 보여 김이 새는 지점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속편인지라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진 않아서 크게 아쉽진 않았지만 썩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러닝타임에 비해서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았다는 점에선 본래 품었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연쇄아동살해사건이 발생한다. 대통령이 직접 경찰청을 방문해서 범인 검거를 독려할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덕분에 경찰 조직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총력을 기울이던 중,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 현장에서 경찰의 오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게 전전긍긍하던 수뇌부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한다.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범이라 위장시킬 만한 대체자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의 연출자로 낙점된 건 광역수사대 에이스로 꼽히는 최철기 반장(황정민)이다.
제목 그대로 경찰과 검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부당거래와 정경유착을 소재로 둔 범죄영화 <부당거래>는 먹이사슬처럼 얽힌 캐릭터들이 벌이는 첨탑 쟁탈전과 같은 영화다. 광역수사대의 에이스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침에도 경찰대 출신의 동기에게 밀려 번번이 승진 심사에서 탈락하는 최철기를 축으로 진전되는 <부당거래>의 서사는 최철기에게 빌붙어서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처벌을 면하는 사업가 장석구(유해진), 뇌물공여를 비롯한 정치적 공작까지 서슴지 않는 비리검사 주양(류승범)을 통해 극적 개연성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공생과 적대를 오가는, 겉과 속이 다른 제각각의 인물들은 저마다 몸담고 있는 조직의 직업윤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공적인 상징성을 환기시킨다.
<부당거래>는 기초적으로 시나리오 자체의 완성도가 예상되는 작품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원작자인 동시에 자신의 원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완성한 <혈투>의 연출자인 박훈정의 시나리오에 기초한 <부당거래>는 류승완의 연출력에 앞서서 주목해야 할 <부당거래>의 초석이었을 것이다. <부당거래>는 다층적인 캐릭터 구조와 다단한 플롯을 품고 있음에도 내러티브의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매듭을 묶고 풀어내듯 감정의 결자해지가 확실한 작품이다. 검찰과 경찰, 그리고 기업 스폰서와 언론의 공생관계를 엮어내는 <부당거래>는 그 불미스러운 관계의 이면을 탁월하게 살피며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높이는 동시에 사실적 폭로로서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액션 연출의 대가로 분류되던 류승완이 탄탄한 시나리오가 예상되는 <부당거래>를 통해 기승전결의 완곡을 조율해내는 연출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건 발견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한 사안일 것이다. <부당거래>는 액션이라는 장기에 묶여있는 것처럼 보이던 류승완의 입지를 새롭게 인식시켜줄 대전환과 같은 작품이다. 류승완 특유의 호쾌한 액션 시퀀스를 대체하는 건 우위를 점하려는 캐릭터들의 치열한 공방전이다. 또한 그 치열한 공방을 통해 각축을 거듭하는 관계의 우위는 대회전을 이루는 상황을 연속으로 이어지며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스토리텔링에 활기를 주입한다. 물론 주연과 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의 열연은 이 모든 결과물의 배후이자 근본적인 자질로서 유효하다.
무엇보다도 <부당거래>가 흥미로운 건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든 상황이 풍자로서의 기능성을 발휘하는 우화처럼 보이는 동시에 극대화된 리얼리즘의 산물처럼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흉악한 범죄가 벌어지는 사회 속에서 권력의 종용을 이기지 못한 채 진실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고 수사의 종결을 위해 사건을 위조하는 경찰, 사회적 정의를 위해 법을 집행하기 보단 법적 해석을 자신의 권력으로 삼아 자본에 결탁한 채 범법을 자행하는 검사, 그리고 이들과 결합해서 사회적 정의를 짓밟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기업가, 그리고 이 일그러진 구조에 기생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사건을 조장하는 언론까지, <부당거래>는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고 의심될 만)한 거대한 부조리를 통렬하게 겨냥한 폭로극과 같은 작품이다. 만약 <부당거래>를 보고 대한민국 사회 현실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데자뷰를 발견한다면 그건 착시일까. 하지만 당신의 데자뷰에는 죄가 없다. 단지 영화가 현실을 못 따라갈 뿐.
정의를 고수하며 싸움에 승리한 남자에게 남은 건 영광이라 부르기조차 넌더리나는 상처 뿐이었다. 가정은 무너졌고, 직장은 사라졌다. 만신창이처럼 너덜해진 삶 속에서 무기력을 체감한 남자는 덧없는 교훈 하나를 짊어진 채 관계를 단절시키듯 살아왔던 아버지의 시신이 놓인 지방의 마을로 떠난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굴 속으로’ 들어가듯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키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낀 남자는 ‘더러운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다시 마음에 지펴오르는 의심을 좇아 그 실체의 조각들을 수집하고 점차 완성돼 나가는 거대한 비밀과 마주서다 이에 맞서나가기 시작한다.
포털사이트에서 인기리에서 연재된 윤태호 작가의 <이끼>는 작은 실마리에서 출발해 거대한 담론으로 내달리는 작품이다. 마을을 둘러싼 비밀은 이 세계의 이면에 놓인 진실과 깊게 맞닿아 있으며 평온한 마을의 풍경은 부조리를 가린 위장의 합리로서 이뤄낸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류해국은 그 모든 위장된 합리로서 이룬 평온을 헤집어 내는 암적인 존재다. 애써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며 자신만의 공동체 속에서 평온을 유지해오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추적하는 류해국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밀어내거나 제거하려 들고 이는 결국 어느 한 쪽의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지난한 싸움으로 치열하게 발전돼 나간다.
영화화 단계부터 많은 관심을 얻어온 <이끼>의 연출자로 나선 강우석 감독은 분명 의외의 카드였다. <이끼>는 고요한 용광로와 같은 작품이다. 완벽하게 감정이 정제돼 버린 듯한 메마르고 거친 세계관은 극단의 대립 구도로 맞서는 캐릭터들의 갈등과 충돌로서 뜨겁게 달궈진다. 유머나 분노와 같은 인간의 평면적인 감정을 넘쳐 나듯 활용하는 강우석의 세계관은 분명 <이끼>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화된 <이끼>는 원작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품이란 점에서 그 세계관이 스크린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재현될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될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었다.
강우석의 <이끼>는 원작의 서사 일부를 재구성함으로서 극의 질량을 줄여냈다. 문제는 원작의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영화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작의 다양한 캐릭터들은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임과 동시에 그 세계관의 핵심이나 다름없다. 은밀하고도 긴밀하게 이뤄진 캐릭터들의 관계 구도는 <이끼>라는 세계가 품은 부조리를 완성하는 커다란 조각이며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이들과 대립 구도에 선 인물을 유인하는 지도나 다름없다. 캐릭터들의 사연은 그 세계관의 기원이자 그 세계를 이룬 부조리를 설명하기 위한 인과의 본체나 다름없다. 영화는 그 모든 사연을 묘사함에 있어서 힘을 배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문제는 그것이 그 캐릭터들이 극적으로 완수해야 할 목표를 훼손한다는 사실이다. <이끼>는 캐릭터들의 질량을 더해서 그 세계관의 무게감을 채우는 작품이다. 캐릭터의 사연은 바로 그 캐릭터들의 극적인 질량감을 표현하는 수단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개개인의 서사가 드러나고 축적되며 세계관의 본질이 완성되고 극이 진행된다. <이끼>는 원작이 묘사하는 세계관의 규모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서사에 빤한 편차를 둔다. 패착은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부피는 유지하되 질량이 줄어들었고, 전체적인 밀도는 낮아졌다. 변주의 시도 자체를 지적하는 게 아니다. 다만 원작을 수용하는 방식에서 그 본질을 이루는 구조를 간과하고 그 결과적인 형태만을 수용한 듯 보이는 결과물은 원작 자체에 대한 이해가 얕았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서사의 변주 역시 좋은 효과를 거둔 결과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색한 측면이 있다. 특히 서사적인 순열을 보다 손쉽게 매만지려는 의도처럼 보이는 오프닝은 궁극적으로 원작의 장점이 영화에서 희석된 이유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시나 다름없다. 인과를 감춤으로서 독자의 의문을 증폭시킨 원작의 서사는 단순히 구조적인 트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정체를 드러냄으로서 세계관의 너비에 서사적 질량을 늘려 나가며 극의 밀도를 채워나가는 작업과 같다. 서사의 변형은 그 구조의 자질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때때로 영화는 번뜩이는 긴장감이 담긴 시퀀스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전반적로 극의 흐름은 그 방향이 명확할 뿐, 강도의 편차가 크다. 동시에 어떤 전형적인 감정이 결여된 듯한 원작 캐릭터들과 달리 영화에서의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평면적이다. 배우들은 분명 열연을 펼치고 있지만 대부분 캐릭터로서 녹아들기 보단 배우가 지닌 스테레오 타입의 열연에 가깝다. 이는 배우들의 해석력 문제라기 보단 전체적인 디렉션의 방향성 문제로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이끼>는 리메이크라는 성과 안에서 온전히 실패한 작품이라 평할 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그것이 리메이크라는 의미를 지운 뒤의 성과 안에서도 딱히 특별하다 말할 것이 없는 평이한 범작에 가깝다. 때때로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우석 감독의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적인 냉소가 느껴진다는 건 흥미롭지만 그건 상대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특히 느닷없는 장광설로 변질된 결말부나 패착에 가까운 반전은 이 작품이 원작의 기질 자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변주라는 의미 안에서도 온전한 실패를 느끼게 만든다. 서스펜스가 증발해버린 듯한 <이끼>에서 때때로 예기치 못한 유머가 발견된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이는 고의적인 의도라기 보단 우발적인 발생에 가깝다. 결국 이마저도 연출적 실패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나 다름없다. 마치 변주가 아닌 변질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명한 피리를 불며 요괴를 잠재우던 표은대덕은 다른 세 신선의 실수로 요괴에게 피리를 빼앗긴 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세상으로 사라진다. 세 신선은 세상에 뛰쳐나온 요괴들을 잡기 위해 사라진 표은대덕과 피리의 행방을 좇고, 이를 위해 도사 화담(김윤석)에게 도움을 청한다. 신선들과 함께 요괴를 좇던 화담은 그 과정에서 전우치(강동원)와 맞닥뜨리게 된다. 설화적인 프롤로그를 밑그림으로 판타지의 자질을 채색해나가는 <전우치>는 이를 통해 토속적 비현실성을 현대적 시대상 안으로 이입해 나간다. 실존인물이라 전해지기도 하는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신묘한 주인공 전우치를 발체해 현대적 배경에 이입한 <전우치>는 전통적인 영웅 캐릭터의 뼈대에 현대적 서사라는 살을 붙이며 ‘한국형 히어로무비’의 유형을 제시한다.
욕망이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캐릭터들의 아귀다툼을 그려낸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전우치> 역시 저마다의 욕망으로 맞부딪히는 인물들의 격돌을 그린다. 하지만 최동훈의 지난 두 전작이 복마전이었다면 <전우치>는 각축전이다. 두 전작이 저마다의 욕망을 향해 내달리던 캐릭터들의 힘겨루기였다면 <전우치>는 욕망을 안은 캐릭터의 롤러코스터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의 캐릭터들은 욕망의 패를 감추고 상대의 패를 읽어내기 위한 수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복마전의 말판 위에 놓여있다. 그 말판을 설계한 최동훈 감독은 능수능란하게 주사위를 굴리듯 캐릭터들의 일진일퇴를 연출하며 다채로운 캐릭터의 묘미를 한껏 활용한다. 비중의 크고 작음과 무관하게 캐릭터들의 개성을 드세게 살리고 이를 통해 영화의 스타일마저 단단하게 동여맨다. 두드러지되 모나지 않는 캐릭터 영화를 완성해냈다. <전우치>를 향한 팔 할의 기대감도이를 겨냥한다. 나열된 배우들의 이름을 읽어내려 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에 대한 군침을 돌게 만드는 <전우치>는 궁극적으로 이를 조율할 최동훈의 캐릭터 조율 실력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물건처럼 보일만한 작품인 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매력적이다. 시대적 배경의 변화에도 곧잘 넉살 좋게 어울리는 전우치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처럼 과장된 제스처와 표정으로 비현실적 이미지를 축적하면서도 현실적 괴리감을 능숙하게 돌파해나간다. 단순히 그 캐릭터의 표현적 존재감만으로도 장르적 가능성이 구축되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주변부다. 중심에 박힌 캐릭터의 모양새는 명확하지만 그 주변부에 놓인 캐릭터들은 구심점이 흐리고 쓸모를 명확하게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된다. 유해진의 초랭이는 적당한 수준의 위트를 자아내고 사연의 전환점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쓸모를 지닌다. 전우치를 상대하는 화담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표현력은 적절하나 선악의 기질적 변화를 설득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 캐릭터 자체에 대한 흥미가 반감된다. 동시에 임수정이 맡은 서인경은 지나치게 장치적이며 세 신선은 <전우치>에서 제 구실 자체가 무력한 낭비에 가깝다.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린 백윤식과 염정아만큼의 설득력도 없다. 제 역할을 설득하지 못하는 캐릭터들은 그저 자리만 지킨다. <전우치>에선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리듬이시종일관 엇박자로 삐걱거린다. 그저 캐릭터를 볼모로 서사적 노선을 거침없이 돌파해나갈 뿐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전자보다 적극적으로 토속적 설화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보다 한국적인 판타지 장르로서의 토대를 마련했다 할만한 작품이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구상된 듯한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와 보다 어울리는 장르적 접목을 시도했다 할만한 지점이며 어느 정도 성과를 인정받을 만한 구석이 발견된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감을 구사하는 액션신을 따라잡기엔 숨이 차게 느껴지는 앵글의 잔상이 시야를 가리며 감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전반적인 액션신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앵글은 공간감에 있어서 탁월한 시야와 반경을 제공한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아낸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다만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하고 저마다 독립적인 빼어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보인다는 게다. 마치 저마다의 음을 지닌 음표들이 악보로서 오선지에 배열된 채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제 음을 고집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일말의 아쉬움을 떨쳐내긴 어렵다.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많은 것들을 흔들어 섞지 못해서 문제인 셈이랄까. 음표만 나열한다고 악보가 나올 리 없는 것처럼.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는 욕망이라는 게임판을 달리는 캐릭터들의 암투를 그린다. 최동훈의 장기는 상대의 패를 읽고 훔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다루는 능수능란함에 있었다.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여미는 캐릭터들의 조화는 최동훈의 장기를 여실히 증명했다. 그런 면에서 <전우치>는 핵심적인 기대감을 배반하는 작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꽤나 쓸만하다. 그 존재감과 표현력만으로도 하나의 장르적 가능성을 보게 되는 기분마저 든다. 다만 주변부의 캐릭터를 다루는 손맛이 무뎌졌다. 구심점이 흐린 인물들이 쓸모를 명확히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되고 그만큼 숫적인 산만함만 어지럽게 감지된다.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장점을 만끽할 수 없다는 점에선 분명 아쉽다.
하지만 <전우치>는 최동훈이란 이름에 얽힌 기대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르적 토대의 구축이란 점에서 성과가 발견되는 작품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토속적 설화를 적극 활용하며 캐릭터를 완성하고 스토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한국적이란 의미를 강하게 어필해낸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둔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의 국산화란 이름에서 보다 어울리는 형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품는다. 지나친 속도감을 두르고 묘사되는 액션신이 시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공간감을 구축하는 앵글의 포착력은 탁월하다 평할만하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은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문제는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한 채 저마다 독립적으로 장기자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음표들이 악보로서 연주되지 못하고 제 음만 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아쉬움을 떨쳐내기 어렵다.
트럭 운전으로 성실하게 생계를 꾸리고 가장의 역할을 하던 정철민(유해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건 가난이다.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가난이 성실한 서민을 살인자의 공범으로 몰락시킨다. 딸의 수술비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철민을 좌절하게 만들고 스스로 패가망신하는 길이라 믿던 도박판에 희망을 걸게 만드는 과정은 가히 안쓰럽다. 돈은 성실한 가장이자 아버지를 쉽게 무너뜨린다. <트럭>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우열의 논리로부터 발생하는 비극을 스릴러적 긴장감으로 치환시키고자 한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한 딸에게 깊은 부성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사연은 시체를 싣고 달리는 트럭의 운전수란 설정의 좋은 전제가 된다. 인간의 양심을 통제하는 것이 자본에 대한 욕망 이전에 아버지의 부성이란 점은 <트럭>이 괜찮은 드라마의 자질을 갖췄다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불청객이 그 트럭에 합승하기까지, 그리고 그 트럭에 합승함으로써 벌어지는 일련의 긴장감은 스릴러란 장르적 욕망을 지닌 <트럭>의 좋은 연료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에게 닥친 시련이 눈덩이처럼 덕지덕지 달라붙게 되는 과정들이 흥미롭게 이어진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양심조차도 외면한 채, 유기해야 할 시체를 가득 채운 트럭에서, 살인마와 동승한, 철민은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트럭>은 이 물음에 답변하는 첫 번째 난관에서 뺑소니 치듯 달아난다. 냉철한 논리적 개연성이 절실해지는 순간, 우연을 동원해 달아난다.
배우들의 연기는 적당한 편이다. 유해진은 부성애가 깊은 아버지의 간절함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다소 평면적이긴 하지만 진구는 극 속에서 요구하는 캐릭터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추격자>의 지영민과 <트럭>의 김영호를 비교하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두 살인마는 역할 비중이 전적으로 다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김영호는 지영민만큼이나 캐릭터적으로 가공될만한 여지를 마련 받지 못한 캐릭터다. 그저 배치된 형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김영호는 정철민의 고난 수위를 높여주기 위한 일종의 장애물에 불과하다. 물론 살인마의 풍모는 필요하다. 그 평면적인 수위가 그것이다. 문제는 캐릭터가 아니라 상황에 있다. 장철민의 고난을 늘어놓는 것까진 좋지만 그것들을 해결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안이하다. 게다가 후반부엔 불필요하게 캐릭터의 비중이 흔들린다. 나름대로 벌려놓은 이야기를 봉합하고자 마련한 또 하나의 맥락이겠지만 역시나 효과적이지 않다.
자본의 횡포가 선량한 인간을 조롱하고 죄악의 공범으로 몰락시키는 윤리적 태도가 장르적 계기로 나아가는 과정은 <트럭>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지점이다. 하지만 <트럭>은 그것이 본래 의도된 길목에 들어서서 되려 무기력해진다. 차라리 애초에 선량한 서민이 자본에 놀아나는 과정이 살인마와 얽히는 후반부보다도 더욱 공포스럽다. 구구절절 늘어놓은 사연은 절실한데 그것의 본래 목적지는 드라마가 아니라 스릴러에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더욱 촘촘하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만한 논리적 개연성이 심각할 정도로 안이하게 우연에 몸을 기댄다. 살인마를 태운 트럭이 검문소를 돌파하기 직전의 긴장감은 난데없이 등장한 트럭의 횡포에 줄행랑치고, 살인마와 사투를 벌이며 죽음의 기로를 오가던 주인공이 제3자의 개입으로 구원 당한다. 그 와중에 엔딩은 가히 초현실적이다. 수많은 설명이 필요하고 윤리적으로도 온당치 못한 상황을 개입시키며 무모하게 상황을 종료시킨다. 어쩌면 그것이 실현된 미래가 아니라 정철민이 바라는 일종의 꿈이라 우긴다면 수긍할만한 여지도 있다. 허나 그 이전에 이미 담보 잡힌 문제들이 산더미다. 빚은 한없이 늘어가는데 갚아나갈 능력이 가물가물하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싶은 상황 앞에서 결말은 백치미스럽게 해피엔딩이다. 진정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도 벌어진 모양이다. 문제는 그것조차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첩첩산중이다.
사실 <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은 <공공의 적 2>라고 명명됐어야 하는 작품 같다. <공공의 적2>?
사실 <공공의 적> 시리즈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강력반 형사 강철중이 다시 복귀한 거니까. 그렇지. 1편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1-1이 됐고.
솔직히 본인도 <공공의 적 2>보단 <강철중>에 애정이 남을 것 같은데. 백배나 당연하다. 솔직히 <공공의 적>이 너무 강렬해서, 바로 이어서 못하겠더라. 게다가 강력반 형사가 만날 적이 있고, 검사가 만날 적이 다르지 않나. 강력반 형사로서 적을 찾기가 힘들어서 직업을 바꿔봤지. 하지만 머릿속에 계속 저 강력반 캐릭터를 살려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조금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강철중>을 잡으면서 오케이, 이거다, 밀어붙인 거지.
사실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오랜만에 본인을 감독으로서 현장에 복귀시킨 캐릭터이기도 했다. 맞다.
그만큼 본인에게는 의미 있는 캐릭터였을 텐데 다시 한번 그 캐릭터를 꺼내 들었다는 건 제대로 진검승부를 해보겠다는 의지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감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감 플러스, 내가 제일 잘하는 장르를 다시 한번 해보자는 거였지.
동시에 한국영화 위기가 공공연해진 상황에서 강우석이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감이 <강철중>에 대한 비장감을 덧씌우는 것 같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이 영화 판에서 나까지 작품을 꺼냈는데 이게 안되면 나는 문 닫겠다, 난 이제 물러난다.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느껴졌다.
<강철중>에서 이원술이란 캐릭터는 전작의 ‘공공의 적’들과는 다르다. 완전히 다르지.
이전까지의 ‘공공의 적’들은 단선적인 악인이었다. 그냥 나쁜 놈. 머리 안 쓰고 그냥 나쁜 놈.
그에 반해 이원술은 다양한 감상을 부르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아무래도 그건 장진 감독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이원술은 분명히 영향이 있다. 다만 (장)진이가 만든 캐릭터를 강우석화(化) 시켜버린 거지. <공공의 적>시리즈의 승부처는 적이다, 적. 강철중이 아니다. 강철중이 만난 새로운 적이 어떻게 하느냐가 이 영화의 흥행결과로 나타나겠지. 그래서 난 정말 웃음을 주고 싶었어. 물론 사람들이 보기엔 참 나쁜 인간인데 영화가 경쾌하니까 덜 나빠 보일 수도 있단 말이야. 애정이 가기 시작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그 웃음 때문에 혹시 덜 미워 보이더라도 그런 걸 시도해보고 싶었어. 이렇게 악당도 웃길 수 있구나. 영화적으로 큰 웃음을 줄 수 있구나. 마지막에 처단할 때 덜 통쾌할 수 있더라도 영화를 보는 동안 재미를 주면 된다고 생각했지. 또 전편의 공공의 적들처럼 재영이가 직접 칼 쑤시고 다니는 것만 하면 사람 지친다. 내용만 바꿨지만 전편 또 보고 있다고 그러면 안되잖아. 본 영화 또 보는 거 같으면. 그래서 정말 새로운 영화하자, 고삐리 양아치도 나오고, 칼잡이도 나오고. 대신 1편의 향수가 있으니까, 이문식, 유해진이 나와야 된다, 그건 분명히 1편을 복기하면서 한번 즐겨라, 하는 부분이지. 그리고 이외의 나머지는 새롭게 한번 즐겨라, 는 것이고. 고삐리와 강철중의 대결도 있고, 이원술과의 대결도 있으니까, 분명 새롭지만 1편과 무관한 영화 같지 않다는 말이지. 그래서 1-1이 딱 맞는 거고.
어쩌면 지금까지의 ‘공공의 적’과 달리 이원술은 관객의 호감을 얻는 캐릭터가 될 수도 있다. 당연하지. 그래야 다음 편이 나온다.(웃음) 이번엔 저게 누구야, 이렇게 되야 한다고. 워낙 연기력이 탄탄한 설경구는 이제 그대로 두고, 이번에는 어떤 적인지, 그 놈을 어떻게 잡을지, 그런 기대치가 있는 거지. 적이 살아줘야 시리즈가 간다니까.
어쨌든 <강철중>은 여러모로 장진의 흔적이 배어있다. (장진 감독이) 설계를 했으니까. 물론 구성은 내가 올렸지만. 설계자의 설계가 나쁜 것이 아니면 구성에 받아줘야 해. 그렇잖아. 현무암 쓸 걸 대리석으로 쓰겠다, 이렇게 재질은 내가 알아서 결정하는 거지만, 그것도 쓸 때부터 나랑 말을 많이 맞췄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시나리오 작업에도 어느 정도 관여했다는 말인가? 관여 안 할 수가 없지. 아이디어는 내 아이디어인데.
그래도 장진 감독의 시나리오인 만큼 특색이 상당히 두드러졌을 텐데. 그런 걸 다 걷어내 버렸지.
본인의 연출적 취향에 걸맞게 변형되거나 제거된 게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름대로 반영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존재했을까? 당연하지. 예를 들면, ‘진아, 이 씬은 내가 못 쓴다. 내가 알아서 바꾸마.’ 그렇게 바꿨지. 그 대신에 전체 틀거리가 좋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수정을 하더라도 작가 입장에서 기분 나쁘지 않겠지. 오히려 자기 코미디에 내 코미디를 더 얹어줬으니까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러는 거지.
고등학생들이 조직에 연루된다는 설정은 누구로부터 착안된 아이디어인지. 어느 분 아이디어가 아니라, 영화 크랭크인한 뒤 한달 만에 이 사건이 실제로 터졌었어. 임성훈의 ‘세븐데이즈’에서 이게 나오는 거야. 조폭이 직업화되고 있다, 이 코너였어. 거기서 조폭들을 인터뷰하는데 조폭들이 어이없는 말들을 하더구먼. 나 이 생활에 만족한다, 나 연봉 얼마 받는데 대우도 괜찮다, 청소년들한테 이 직업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있어. 사회가 이런 식으로 가도 돼? 이게 다 영화 때문에 이렇게 되는가, 이런 생각도 들고. 영화 속에서 조폭들이 너무 멋있잖아. 드라마에서도 그렇고. 이거 한번쯤 말할 필요가 있겠구나 싶었지. 그 대신에 조폭을 너무 극악하게 그리면 영화가 너무 지저분해져 버린다고.
폭력의 수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건 경계했다는 말인가? 그렇게 폭력성이 가미되면 청소년들 보여주고 싶은데 이 영화는 못 보여줄 것이고, 대신 적을 좀 재미있게 가보자. 그래서 웃고, 즐기고 나오다가도 우리 사회가 이런 면이 있구나, 이 정도만 생각하게 해주면 상업 영화로서 할 도리를 다한 거 아닌가, 그런 판단을 했다.
이전 시리즈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굵어졌다. 웃기면서 메시지를 밑에 깔았으니까. 소리 지르지 않고.
장진 감독과 함께 K&J를 설립한 이후, <강철중>은 가장 본격적인 공동작업이기도 하다. 사실 이 전에 <아들>이나 <한반도>로 따로 놀긴 했지만 <강철중>이 우리가 영화사 세워놓고 함께 한 첫 게임이지. 처음 링에 오른 거야.
사실 본인이 오랫동안 장진 감독의 배후세력이기도 했다.(웃음) 난 진이가 한다면 뭐든지 밀었으니까. 심지어 시나리오가 안 좋아도 찍으라고 했으니까.
솔직히 장진 감독의 이야기가 본인의 취향에 부합하는 건 아니었을 텐데. 아니지. 하지만 생각은 비슷해. 다만 표현의 차이가 있지. 예를 들면 <거룩한 계보>도 잘 가다가 갑자기 판타지로 가버리잖아. 그래서 ‘진아, 이거 하지 마라. 위험하다.’ 그러면 절대 아니래. 그래서 ‘야, 총 맞고 비행기 떨어지고, 그게 (말이) 되니? 그게?’ 그 전까지는 꼭 <대부>처럼 멋있게 가잖아. 그러다 어느 순간에 벽 무너뜨린다고 벽에 달려가 박고 있고.(웃음) 그런 거야.
혹시 이 부분만큼은 살려줬으면 좋겠다고 장진 감독이 애착을 보인 부분은 없나? 이것만 살려달라고 할만한 건 내가 아니까 알아서 살려놓지. 애초에 내가 진이 보고, ‘네 맘대로 써라. 내가 못 찍는 건 알아서 걷어내마.’ 그랬더니 ‘감독님 알아서 하십쇼. 전 그냥 분량만 전적으로 채웁니다.’ 그래서 OK 한 거니까.
<강철중>을 <공공의 적>시리즈의 가능성을 책정하는 기준으로 생각하진 않나? 계속 가고 싶다는 뜻이지.
예전에 <투캅스3>같은 경우는 김상진 감독에게 맡기기도 했었다. <투캅스>와 <투캅스2>찍을 때, 너무 고생해서 내가 억만금을 벌어도 다신 이거 못한다 그랬지. 그런데 (김)상진이가 ‘그럼 감독님 이거 저 주세요.’ 그러는 거야. ‘자신 있어? 너?’ 그러니까 ‘네. 제가 청출어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랬다가 제대로 망해서 시리즈가 문 닫았잖아.(웃음) 지금도 혹시 (누군가가) ‘<투캅스>감독이세요?’ 그러면 ‘아, 아닙니다.’ 이래.(웃음) 어쨌든 그땐 그랬고, 강철중은 3편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이거야. 왜? 적이 바뀐다 이거지. <투캅스>는 적을 쫓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뭔가 만들어가야 되는 거고, 이게 시트콤이나 다름이 없단 말야, 시츄에이션 코미디. 근데 <공공의 적>은 우리 시대에 또 다른 천인공노할 나쁜 놈, 퍼블릭 에네미(public enemy)가 나타나면 되잖아. 그렇기 때문에 3편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이거야.
혹시 <투캅스3>처럼 이 시리즈도 언젠가 다른 감독한테, 에이, 노! 네버! 노! 안 하면 안 했지. 못 줘, 이제.(웃음) 진짜 못 줘. 그리고 내가 안 하면 설경구가 안 해.
조연들의 매력을 살리는 것도 염두에 뒀을 텐데. 아마 배우들 연기가 나쁘지 않았을 거야. 이번에 조연들을 하나씩 다 살려보려고 주변 배우들까지 내가 하나씩 일일이 다 컨트롤했다고.
사실 <공공의 적>이 인기를 얻은 배경으로 조연들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공공의 적>에 나왔던 유해진, 이문식이 드라마 운반하는 브리지(bridge)로 잠깐 나오고, 고삐리 태진이, 칼잡이 문수, 그 다음에 이원술 따라다니는 변호사까지 다 자기 노릇을 하잖아. 영화가 재미있고 완성도가 뛰어나려면 조연의 등장과 퇴장을 명확하게 잡아줘야 돼. 등장하면 왜 등장하는지, 무슨 롤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주고, 엔딩 아웃 시켜라 이거지. 내가 이번에 주인공만 쫓아다니는 게 아니고 조연들까지 일일이 다 손봤던 건 입체적인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의도였으니까.
사실 이문식이나 유해진 같은 경우는 <공공의 적> 개봉할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지.
하지만 지금은 종종 주연까지 맡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런데 너무 작은 역할을 맡기는 게 아닌가 불안함은 없었나? 아니야. 그들이 그 영화로 컸기 때문에 너무나 흔쾌하게 하겠다고 하더라고. 심지어 돈도 안받았잖아. 마치 아버지한테 아들이 뛰어오는 것처럼. 그래서 ‘너희 여기 출연한 거 후회하게 하진 않을게.’ 그랬더니 ‘아, 저희 믿습니다.’ 그러더라. 첫날 크랭크인을 이문식하고 갔고, 다음 날은 해진이하고 갔어. 아주 기분 좋게 찍었지.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당신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 크다. 한국영화 점유율이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기대감일 거다. 영화 잘 되면 또 찍고, (다른 감독에게도) 이 영화 찍게 하고, 저 영화도 찍게 하고, 그렇게 영화판을 몰고 가는 느낌에 대한 기대감. 이번에 <강철중>이 잘되면 한국영화가 어려운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 그런 기대 때문일 거다.
아무래도 그런 면에 대해서, 엄청 부담스럽지. 그런데 거기서 만약 진짜 개떡 같은 영화가 나왔다면 그 배신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거야. 기자들조차도, 쟤는 끝장났다, 이런 식으로 글들 엄청 써 보냈을 거야, 아마. 어이없는 영화 찍었다면, 너마저 이러냐, 너마저, 이런 마음에서 얼마나 많은 분노의 글이 나오겠어. 고등학생들조차 ‘이명박 OUT’ 피켓 들고 다니는데, 언론에서 일개 감독하나 못 죽이겠냐고. 거기에 대해서 난 각오한다니까. 이번에 만약 당신들이 봤을 때, 내가 유머 다 잃어버리고, 드라마도 모르는 놈같이 보이면 날 개같이 밟아도 좋다. 대신 좋으면 칭찬해줘라.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이잖아.
사실 예전에 <한반도>당시에 스스로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영화 찍고 나니까 한국 해경과 일본 해경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강철중>에서도 비슷한 시의성이 발생한 것 같다.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광우병’이란 단어 딱 한번 나오는데도 민감하게 들린다. 사실 그 전에 소 얘기 많이 나오잖아. 처음부터 도축장 씬도 있고. 나중에는 ‘수입산인데 속여 팔면 안되지.’ 이런 대사도 나오고. 후반부에 가면 ‘고기 맛이 어떻습니까?’ 물으면 강철중이 ‘이 맛이지. 한우가. 반성 많이 했구나.’ 이런데다가 광우병 대사까지 나오니까 사람들이 확 기겁을 하는 거지. 근데 4개월 전에 난 그런 의도로 찍은 게 아니라, 이왕 소고기 먹는 거 한우 먹어주자, 우리 농민들 위해서. 그런 뜻으로 한 건데…..내가 마치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말야.(웃음)
아무래도 시사적인 부분에서 영화적 모티브를 얻다 보니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게 아닌가 싶다. 사회적인 관심이 많아서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생기는 거 같아.
사실 최근 경찰 공권력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많은데. 근데 그건 걱정이 안 되는 게, <강철중>은 민생사범 쫓는 거야. 지금 경찰의 과잉진압이 문제가 있는 거지, 실제 강력반 형사들이 소매치기도 안 잡고 강도도 안 잡고 그런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잖아. 강철중은 민생사범을 잡는 일개 형사니까 그걸 여기에 비유해서 과잉 진압하는 경찰을 떠올리진 않을 거 같아. 일반시사 해봤잖아. 그럼 거기에 경찰 너무 미화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의견 나와야지. 근데 정말 나쁜 놈 잡는 거니까. 내가 봤을 땐 그런 염려는 안 해도 될 거 같다.
사실 강철중은 형사가 아니었다면 깡패가 될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강철중이란 캐릭터는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활용하는 방향에 대한 답변이라 해도 될 것 같다. 고삐리들한테, 깡패가 그렇게 되고 싶어? 너 깡패가 부럽냐? 이런 대사 하잖아. 그런데 실제로 그런 애들 많거든. 학교가면 일진회 있잖아. 그런 걸 선망한다는 말이지. 영화보고 나면, 이거 내가 조금 잘못 생각한 거 아냐? 한번쯤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강철중은 한국영화의 자본동원력 안에서 묘사가 가능한 안티히어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자금으로 할리우드 애들 못 이겨. 우리 정서로 이겨야지. 우리 정서로. 우리 식으로 이겨야 된다니까.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영화도 대작을 제작하는 비율이 늘었다. 시장상황도 그에 기대는 느낌이고. 조금 더 영화인들이 신중해질 필요가 있어. 너무 급하게 찍지 말고, 조금 더 고민하고, 정말 이 시나리오가, 이 내용이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건지, 상업영화 찍으면서 최소한의 그런 노력들은 해야 될 것 같단 말이지. 투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편수만 무조건 늘릴 게 아니라 내실 있는 영화들을 만들어주면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영화 선택한다. <괴물>이 재미있으니까 보러 간 거지, 누가 보라 그래서 봤냐고, 그러잖아. 그런 관점에서 우린 지금 영화 내실에 힘을 쏟아야 돼.
91년에 찍었던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이후로 각본 작업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다. 참여하던 안 하던 난 이름을 안 올리니까. 다 참여는 하는데 이름은 빼지. 내가 작가란 이름을 가지면 뭐하냐고. 누릴 거 다 누리는 놈이. 자기가 조금 써놓고 왜 이름 넣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공로 인정받으려고? 내가 다 썼으면 내 이름을 넣지.
워낙 할 일이 많다 보니 각본까지 도맡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건 아니고, 내가 촬영할 때 워낙 시나리오 수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아이디어가 안 나와서 그런 거다. 조금 미흡하더라도 작가에게 쓰게 하는 게 나아. 어차피 내가 고쳐 찍으면 되니까.
글쓰기는 일단 작가에게 맡기고 연출로 승부한다? 물론이지. 만약 내가 고치다가 힘들 때 다시, 이건 네가 고쳐줘야겠다, 그 정도 부탁은 하는 거지.
좀 오래 전 이야기가 되겠지만 강철중이란 캐릭터의 모티브가 궁금하다. 사실 1편 작가들이 뽑아낸 캐릭터다. 내가 꼴통 형사는 그려본 적이 없잖아. <투캅스>는 재미있는 형사였고. 작가가, ‘감독님, 꼴통 형사 이야기 한번 해보실래요? 진짜 나쁜 놈인데 꼴통 형사 이야기, 나쁜 놈이 더 나쁜 놈 잡는 영화.’ 이러더라. 그 때 감이 왔다. 바로 그거다. 화이트 앤 블랙이 아니고, 회색. 그렇게 오케이 한 거지.
그 당시 <공공의 적>으로 오랜만에 감독직으로 현장에 복귀했는데 만약 강철중을 못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게 아니었으면 아마 복귀 안 했을걸. 그 정도 되니까 내가 복귀했지. 3년 반 만에 영화 찍는 놈이 아무것도 들고 나오지 않으면 바보지, 바보.
<한반도>는 말이 많았었다. 좀 위험했지.
사실 <공공의 적>으로 현장에 복귀한 뒤로 공공의 적 시리즈를 제하면 <실미도>와 <한반도>가 남는다. 두 영화는 이데올로기적이란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한반도>가 <실미도>에 비해 민감한 반응을 얻었던 건 직설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반도>의 평에 대해서 내가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난 이런 일이 있다면 우리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라고 말한 것뿐이야. 나는 판타지로 소리를 질렀는데 사람들은 현실정치로 받아들이고 굉장히 오해를 하더라. 지금 이 세계화 시대에 일본에게 국수적으로 이래야 할 이유가 뭐냐, 굉장히 편협한 인종주의다, 막 이러는 거다. 사실 사상이 없는 영화였고 나한테는 판타지였는데 그렇게 들이대니까. 아, 지금 이 사람들이 영화평을 안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너 이런 얘기하면 안돼, 그래서 사실은 되게 당황했어. 억울하기도 하고. 관객한테, 우리 이런 일이 있죠.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죠? 이런 동의를 구하려던 거거든. 그걸 전달하는 수단은 웃음이 될 수도 있지만, 영화 보는 동안에 다른 생각 말고 나와 한번 생각을 맞춰보자는 거지. 이런 인물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관객하고 이렇게 얘기하고 소통하고 싶은 거였다. 일반 관객들은 받아주는데, 먹물, 화이트 칼라들, 또는 언론들, 평론가 시각에서 안 받아들이는 거야. 이런 영화는 만들면 안 되는 영화다. 그래서 난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사실 시의성도 컸다. 시의성 플러스 노무현 정권. 이거 이 정권 밀라고 찍은 거 아냐? 이런 오해까지 하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보고 차기 국회의원 나가시려고 그러죠? 이러고.(웃음) 내가 어이가 없어서.
어쩌면 그런 과정도 다시 강철중을 빼 들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됐을 것 같다. 그것 때문에 내가 다시 재미있는 얘기로 돌아왔을지도 몰라. 내가 바보가 아니거든.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편협한 민족주의자나 국수주의자 개념으로 영화 찍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다시 즐거운 영화 찍어드릴까요? 이런 마음으로 다시 몸풀어본 거라고. 내가 감각이 아직 죽진 않았다고, 연출자로서 비겁하지 않게 연출해보자, 그런 의도도 있고.
사실 처음 강철중이 상대한 공공의 적은 사소한 개인적 범죄자였다. 하지만 속편에서부터 그 범위가 조직적인 형태로 확장되는 느낌이다. <강철중>에서는 확실히 기업적인 조직 자체가 공공의 적이 됐고. 1편의 <공공의 적> 타이틀이 붙을만한 것인가, 약간 회의가 있었다. 천하의 몹쓸 놈이지, 그게 공공의 적인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공공의 적 2>에서는 천박한 자본주의자를 하나 건드렸고. 그건 공공의 적이 맞거든. 근데 <강철중>이 사실 공공의 적 중에 가장 사실 공공의 적답지. 그래서 이 영화보시고 어떤 어르신 한 분이 이번엔 정말 공공의 적 같네? 이러더라.
<강철중>에서 등장하는 강철중은 <공공의 적> 당시에 비해 성숙했다는 느낌도 든다. 캐릭터가 성장했다고 볼 수도 있고. 당연히 성장해야지. 세월이 흘렀는데. 인간이 변해가야지.
사실 애초부터 강철중은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형은 아니었다. 나쁜 놈이지. 정의롭지 않아.
<공공의 적>에서도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 상대에 대한 사소한 복수심이 발단이 되기도 했었고. 그렇지. 그런 개인적인 원한도 좀 있고.
하지만 <강철중>에서 그는 과거에 비해 사회적인 정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의지가 좀 더 보인다. 사람이 연륜이 몸에 배면 사고가 달라진다. 당신도 5년 후에 본인의 글이 달라질 거라고. 지금처럼 많이 안 써도 더 짧게 쓰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글이 나올 거라고. 그것처럼 세월이 흘러가면 사람도 자연스럽게 변한다. 나쁜 짓 했던 놈이 생활인이 되듯이, 그래야 시리즈 안에서 변해가는 이 사람과 함께 우리가 생활해가는 느낌이 들지. 과거가 좋았다고 해서 그대로 다시 가면 그 영화 무슨 재미로 봐.
딸이 많이 자란 것에 대한 영향도 있지 않나 싶은데. 사실 옛날에 가족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젠 가족도 중요해진 거지. 그래서 일일교사도 가잖아. 1편 같았으면 일일 교사 갔겠냐고, 걔가.
우린 깡패지만 사회에서는 우리를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건실한 청년이라고 부른다. 극 중 이원술의 대사에서 나오는 말인데 이는 마치 사회적인 조직체계나 조직문화에 대한 비유처럼 들린다. 실제 건달 아니지만 보면 건달 같은 애들 많잖아. 사회에서도 조직 형태가 그렇고. 일반 회사도 안으로 보면 깡패보다 더한 곳이 많아. 폭력을 안 쓸 뿐이지. 사람 함부로 자르고. 그니까 그 대사를 보면, 건실한 청년으로 불러주니까 깡패 짓 열심히 하다 보면 나처럼 돼, 이런 아주 나쁜 꿈을 던져주잖아. 우리가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강철중은 항상 주먹으로 공공의 적을 처단한다. 그런 응징방식을 묘사하는 건 그 상황에서 발생할만한 쾌감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만든 캐릭터인데 당연히 내 생각이 안 들어갈 수가 없지. 그리고 내 생각도 당연히 있지만 관객들도 대등하게 배려해줘야지. 우리는 깡패 보면 무서워서 피한다. 근데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피하면 안돼. 아무리 무서워도 들러붙어야 한다고. 그래야 사고가 맑아지고 투명해지는 거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우리는 길거리 지나가다가 진짜 깡패들끼리 싸우면 우리는 그렇게 못하지. 도망가야지, 어떡해. 무슨 칼 맞을 일 있어? 그런데 강철중은 그러면 안되지. 거기서 시비를 가려주던지, 다 때려서 무릎을 꿇게 만들던지. 그건 영화적 통쾌함 때문에 해야 하는 거야.
동시에 그것이 어쩌면 본인이 현실에서 지닌 공권력에 대한 불만을 영화적으로 해소하는 측면이 아닌가 싶다. 바람일 수도 있고. 맞다. 나는 강철중 같은 형사가 분명 있다고 본다.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오케이 하거나, 또 그렇게 못한 사람들이 보고, 나도 앞으로 이렇게 한다, 그럴 수 있잖아. 내가 형사는 안 해봤지만 실제로 <공공의 적 2>보고 검사들이, 맞아, 검사는 저렇게 해야 돼, 자기들끼리 그랬다는 거 아니야. 강철중 같이 검사라면 저렇게 해야지.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악을 잡아야지. 안되면 총을 들이대는 한이 있더라도.
요즘 안 그래도 시국이 어지럽다. 나는 촛불시위를 보면서 되게 슬펐다. 내가 작업 중이라 참가 못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이젠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이 진짜로 높아졌다. 먹고 사는 문제는 중진국 수준일지 모르나 의식들은 정말 선진국 수준이다. 아줌마들이 유모차에 애태우고 나온 거 보면, 야, 이제 정말 무서운 세상이 됐다, 싶더라. 난 되게 감동받았어.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영화적 모티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웃음) 난 더 이상 (영화적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감독이 되고 싶진 않아. (웃음)
사실 여성 캐릭터를 못 본지 오래됐다. 한 10년 됐지. 10년. 내가 사실 코미디라면 할 수 있다. 그런데 멜로 드라마 해라, 그런 건 내가 못해. 남녀 사랑이야기 같은 건 못한다고.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건 해보겠다 싶어서 코미디로서 여성 배우가 등장하는 건 앞으로 분명히 나올 거 같은데, 여성스러움을 묘사하는 건 난 못한다.
사실 <마누라 죽이기>나 <미스터 맘마>처럼 여성이 등장했을 때 코미디도 유연해졌던 것 같다. 그건 우리 마누라가 무진장 웃기니까.(웃음) 진짜로. 결혼하기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우리 마누라가 결혼하고 나서 지금은 완전 개그우먼됐어. 옛날에 내가 웃기려고 하면 화내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자기가 날 웃기고 그래.
사모님께서 유쾌하신 편인가 보다. 되게 명랑해. 되게 밝고.
다시 한번 여성캐릭터를 앞세운 코미디를 찍어도 될 거 같은데. (웃음) 일단 내가 해보고 싶은 거 한 두 개 먼저 해보고.
사실 최근 시네마서비스 위기설이 심상찮게 돌았었다. 실제 위기다. 실제 지금 심각한 위기라고. 지난 2년 동안 개봉했던 영화들이 다 망했잖아.
시네마서비스의 위기를 한국영화 위기의 실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우리하고 싸이더스 어려워진 거 보면 당연히 한국영화 전체가 어려워진 거지.
본인은 재미있는 영화의 부재가 한국영화 위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기회라고 본다. 진짜 한국영화가 질 높아질 수 있는 기회다.
부가판권이나 극장과 배급의 수익 배분의 구조적인 개선도 시급하지 않을까. 그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한국영화의 수준문제다. 수준문제. 사실 요 근래 극장에서 내걸기에 민망한 작품들이 많았잖아. 기자시사에서 보고 민망하지 않았어?
…… 기자들도 답답했을 거야. 어떻게 이런 영화에 3~40억씩 돈들이냐, 이런 영화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런 영화들 편수 줄이고, 한국영화 가능성 있구나, 발전하네, 이럴만한 영화들이 드문드문 나와줘야 된다 이거야. 너무 안 나오고 있잖아. 요즘.
그런 실망감이 축적되다 보니 관성적으로 한국영화 자체를 기피하는 관객도 발생하는 것 같다. 그걸 깨주려면 재미있는 영화가 계속해서 나와야 돼.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강철중>에 그런 기대를 하는 거 같아. 어려움도 극복해주고, 관객들도 만족시켜주고.
반면에 그런 관성이 <강철중>에게도 작동할 수 있다. 당연히 지금 관객들이 너무 안 나오니까, 사실 한국영화를 너무 안 보니까 걱정이 된다. 그러니까 좀 오게 해봐!(웃음)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강한섭 교수가 취임했다. 의견이 궁금하다. 나는 잘 할 거 같은데. 워낙 의욕이 넘치고, 본인도 너무 하고 싶어했고. 그리고 사실 지금 강한섭은 안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분명 더 잘할 것이라고 본다. 왜냐면 안티가 많다는 얘기는 감시가 많다는 얘기거든. 그래서 난 오히려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잘할 것이다. 내가 저번에 축하한다고 전화했는데 그 때, 당신 정말 잘해야 된다, 여러 명이 주시하고 언론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당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니 진흥위원회 똑바로 운영하고 정말 한국영화에 뭐가 도움이 되는지 정말 잘해달라, 그랬다. 그러니까 정말 믿어달라고 하더라. 자기가 3년 동안 한국영화에 큰 도움이 돼보겠다고. 잘할 거다.
지금 사실 제작자나 기획자로서, 한국영화 안에서 산업적으로 많은 짐을 지고 있는데, 종종 감독역할에만 치중하고 싶다는 생각하진 않나. 왜, 정말 하루에 수십 번도 하지. <강철중>기자시사회에서 어떤 기자들이 그러더라. 온갖 이상한 짓 다 하면서도 이 정도는 만드는데, 감독만 하면 정말 어떤 영화가 나올지 너무 궁금하다고.
사실 순차적으로 따지자면 <공공의 적 3>에 해당한다. 하지만 <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이 본래 타이틀 대신, ‘강철중’이란 캐릭터의 네임밸류를 앞세우고 ‘1-1’이란 번거로운 순번을 꼬리에 붙인 건 다름아닌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구시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틀로 전면에 내세운 ‘강철중’은 그 앞에 ‘원조’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1-1’이라는 순번이 붙은 부제는 전작인 <공공의 적 2>를 시리즈로부터 분가시키는 동시에 <공공의 적>으로 돌아가 가문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강철중>이 ‘공공의 적 1-1’이 된 사연은 이렇다. 결국 <강철중>은 <공공의 적>이란 브랜드를 재건하는 작업이다. 무리한 확장사업으로 인해 훼손된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강철중>은 동어반복의 함정에서 탈피해야 한다. 가문의 정통성을 계승하되, 개별적인 존재의미를 확보하는 것은 속편이 맞이해야 할 숙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강철중>에 주목할만한 점은 설경구의 출연, 강우석 감독의 연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장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강철중>에서는 장진 감독 특유의 촌철살인적인 대사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만큼은 아니지만 드물지 않게 눈에 띤다. 또한 강철중과 상대하는 이원술(정재영) 역시 전작에서 등장한 악인 캐릭터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조규환(이성재)과 한상우(정준호)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절대 악인으로써 강철중과 대척점에 놓였다면 이원술은 전자들에 비해 인간적인 냄새를 풍긴다. 물론 그는 고등학생에게 태연하게 칼을 쥐어주는 악인이긴 하지만 조직적 의리를 중시하고, 자가수성적 대범함을 갖추고 있으며, 가족적 자상함마저 갖추고 있다. 강철중을 주목하게 만들던 전작의 단선적인 악인들에 비해 이원술은 좀 더 입체적인 선을 지닌 캐릭터로 완성됐다.
동시에 <강철중>의 강철중은 <공공의 적>의 강철중에 비해 성장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양아치만큼 껄렁껄렁하고 애처럼 멋대로이며 손발이 자동 반사되는 폭력적 습관도 여전하다. 그러나 자신의 철없음을 타이를 수 있을 만큼 똑똑하게 성장한 딸이 있고, 15년 차 경찰 공무원 월급으로 좀처럼 해소되지 못하는 빈곤한 현실적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 게다가 세월에 장사 없듯, 나이를 먹어서인지도 모르지만 <강철중>에서 강철중은 철없이 막무가내이던 <공공의 적>시절에 비해 성숙한 인상을 준다. 문제는 그 지점에 있다. 위트가 감소한 강철중 앞에 인간적 매력을 갖춘 악인 이원술을 대립시키면서 캐릭터 구도가 종종 역전되는 뉘앙스를 준다는 것. 사실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이 조규환을-<공공의 적 2>는 논외로 치고- 미치도록 잡고 싶어한 건 강철중이 정의에 목숨 거는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조규환이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인면수심의 탈을 쓴 악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원술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악인이다. 특히 그가 사시미 하나를 쥐고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그 두목(문성근)과 담판을 짓고 나오는 장면은 인상적인 카리스마가 구사되고 인간적인 유머까지 겸비한다.
단선적이던 캐릭터 나열방식에 불분명한 혼선이 발생했다. 강철중은 강우석 감독의 것이지만 이원술은 분명 장진 감독의 것에 가깝다. 결국 두 감독의 조합은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쉽게 융합하지 못하고 겉도는 위트에 도취되기도 한다. 수위가 넘칠 것 같은 웃음의 타이밍에 좀처럼 쉽게 반응할 수 없는 건 융합될 수 없는 스타일의 간극 때문이다. 선이 굵고 묵직한 강우석 감독의 판을 지탱하기엔 장진 감독의 스타일은 가볍게 들뜬다. 동시에 캐릭터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공공의 적>의 단선적 관계는 공익적인 메시지를 얹으며 다소 번거로워졌다. 학교 폭력과 청소년 문제에 관여하는 조폭들의 실상을 그리는 <강철중>은 누가 봐도 공익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그 안에는 작게는 상도덕의 윤리부터, 크게는 기업의 경영 윤리가, 게다가 대한민국의 조직적 위계질서에 대한 풍자까지, 넓은 현실관념의 메시지가 펼쳐져 있다. 문제는 이런 측면들이 더더욱 <강철중>을 경직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장진 감독의 유머가 녹아 들지 못하는 것도 이 심각한 사안들이 주제의식과 무관하게 극적인 유연성을 방해하는데 있다.
결과적으로 <강철중>은 ‘<공공의 적> 혹은 강철중 리턴즈’라 명명돼도 상관없는 작품이다. 하는 꼴을 봐서는 깡패인지 형사인지 구분하기 힘들 것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던 강력계 형사 강철중에게 호감을 보였던 이라면, 게다가 양복 차려 입은 검사 강철중이 정의를 주창하던 경직된 모습에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던 이에겐 더더욱 반가운 사실일 수도 있다 게다가 오리지널 <공공의 적>을 계승하는 만큼 본래 <공공의 적>을 채우던 캐릭터들도 고스란히 돌아왔다. 삼류양아치였던 산수(이문식)는 강철중 덕분에 학교(!)에 다녀온 뒤, 유흥업으로 성공해 외제차를 몰고 다니고 칼잡이 용만(유해진)도 정육점을 운영하며 건실하게 살고 있다. 또한 강철중과 애증을 나누는 엄 반장(강신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공공의 적>의 중요한 관점포인트가 다양한 조연 캐릭터들을 통해 얻어지는 굵직한 재미였음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은 <강철중>의 장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강철중은 서민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한국형 안티히어로에 가깝다. 그가 상대하는 악인은 언제나 부자이며 그들은 하나같이 비열하다. 게다가 강철중은 가난하고, 심하게 강직하지 않다. 계급적 정체성에 대한 풍자가 막연한 단상처럼 녹아있는 강철중은 분명 대한민국 서민들을 통감시킬 만한 자의식을 걸치고 있다. 게다가 그의 공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기 보단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 ‘형이 돈이 없다 그래서 패고, 말 안 듣는다 그래서 패고, 어떤 새끼는 얼굴이 기분 나빠, 그래서 패고, 그렇게 형한테 맞은 애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다.’ 다소 길지만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내뱉는 강철중의 대사는 결코 선한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사회를 부패시키고, 이를 좀먹고 자라는 무리들을 향해 그는 주먹을 날리고 맞짱을 뜬다. <공공의 적> 그리고 <강철중>에 어떤 쾌감을 느낀다면 분명 이 때문이다. 게다가 권력친화적이고 부에 관대한 대한민국의 알량한 공권력과 달리 강철중은 공권력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허구적이지만 실존적인 심판을 몸소 실천한다. <강철중>에 호감을 부여할만한 요인은 영화 외적인 환경에서 기인하는 바도 (분명) 존재한다. 게다가 미국산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광우병’ 위협에 시달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시의 적절한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