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키우는 개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 일러스트 작가인 올리버(이완 맥그리거)에게는 45년 동안 부부로 살았던 어머니와 사별한 아버지 할(크리스토퍼 플러머)이 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고백했다. 자신의 진짜 삶을 찾고 싶다고. 할은 게이였다며 아들에게 커밍아웃한다. 40대가 넘은 아들에게 70대 중반을 넘긴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제 삶을 찾아나서는 광경은 심란하듯 놀라운 발견이었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지인들에게 무료한 삶의 복판에서 스스로의 삶을 방치하듯 사는 그에게 아버지의 고백과 그 고백 이후의 삶은 잔잔하게 물결치는 파문이었다.
일상을 무기력하게 수동적으로 전전하던 남자는 능동적인 선택을 머뭇거린다. 그 선택으로 인해서 얻어질 변화가 그에게는 두렵기만 하다. <비기너스>는 바로 그 결정적인 선택을 통해서 능동적 변화를 맞이하기까지의 한 남자의 일상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아버지의 기습적인 커밍아웃으로 인해서 출렁이던 삶을 담담하듯 받아들인 올리버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을 조금씩 인식해나간다. 인생의 종말을 예감하면서도 기존의 삶에 접어놓았던 진짜 삶을 펼쳐놓고 그 위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에게 일종의 배반이면서도 생경한 자극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삶에 새로운 계기가 되는 건 사랑이다. 프랑스 출신의 여배우 애나(멜라니 로랑)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의 평온한 일상이 들끓기 시작한다.
<비기너스>는 제목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나가는 이들에 관한 영화다. 좀 더 정확하게, 새로운 삶의 문턱 앞에 들어선 이들에 관한, 그 시작 직전에 선 연인들의 시간을 살피는 영화다. 하지만 <비기너스>에서의 로맨스는 극의 중심을 관통하는 사연이라기보단 어떠한 전체를 이루는 조각의 요소처럼 보인다. 영화는 올리버를 중심으로 그가 목격하는 아버지 할과, 그와 직접적으로 감정을 교류하는 연인 애나와의 관계를 통해 극의 너비를 확보해나간다. 이 모든 관계는 올리버의 시선을 통해서 목격되고 해석되는데, 이는 곧 올리버의 시선이 <비기너스>에서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는 눈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올리버라는 인물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 인물의 변화보다도 그 변화를 완성하고 돕는 주변의 관계적 너비를 살피는 것이 <비기너스>의 핵심적인 감상에 가깝다.
물론 그 모든 관찰과 감정의 대상인 올리버의 변화가 <비기너스>의 화두인 건 맞다. 하지만 그 주변 관계에 대한 목격과 그 목격을 통해서 얻어지는 감정적 변화가 <비기너스>의 주를 이룬다는 건 다시 말해서 올리버가 그만큼 능동적인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는 인물이라 이해될 수 있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중심인물인 올리버의 주변, 그 주변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삶을 목격하는 과정을 통해서 묵묵하지만 묵직한 성찰을 이끌어낸다. 인생의 막바지를 준비하는 나이에서도, 그것도 말기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가 뒤늦게 자신의 지난 삶을 부정하듯, 반대로 진짜 자신의 삶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듯 확고한 커밍아웃을 알리며 새로운 삶을 살아나가는 여정은 마흔을 넘어서도 확실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지 못하는 아들에게 어떠한 식으로든 자극을 안긴다. 그리고 사랑을 예감하면서도 한발 물러서서 경계선 앞에서 머뭇거리던 아들의 삶이 변한다. 누군가의 삶이 결국 가까운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키고 나아가게 만든다는 것. <비기너스>는 삶의 주체가 되는 이에게 영감을 주는 주변인의 삶을 비춤으로써 어느 개인의 삶이 단지 그 개인의 너비에 국한된,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만든다.
염소를 노려보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눈빛만으로 염소의 심장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염소가 죽었다. 정말 죽었다. 물론 그것이 그의 눈빛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랬다. 하지만 그 문제의 인물 캐서디(조지 클루니)는 이를 진지하게 고백하고 또 경고한다. 누구에게? 애인과 이별한 뒤, 자신의 정체성을 찾겠다며 이라크로 날아간 미국의 저널리스트 밥(이완 맥그리거)에게 말이다. 우연히 캐서디를 만난 밥은 그렇게 그에게 낚여 그와 함께 이라크 땅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로부터 문제의 초능력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 가운데, 황당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정말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자랑하는 국내 정식 개봉명을 얻게 됐지만 <초(민망한)능력자들>은 덜 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아니다. 미국이 양성한 초능력 부대 ‘제다이 전사’의 일원으로 육성됐다는 캐서디의 말은 영화를 위해 마련된 허풍이 아니라 실화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이는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풍자적인 소설로 출간되어 선풍적인 반향을 얻었다. 이런 반응은 이 작품을 BBC의 3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지금의 영화 제작 결정에 이른 것이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실화적인 음모론에 입각한 블랙코미디다. 사실 이 영화가 주는 웃음의 묘미란 정말 그것이 표피로 느껴지는 코믹한 행위의 관찰에 있지 않다. 이 영화로부터 유머를 얻어가기 위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사건의 연속 안에서 거듭 드러나는 어처구니 없는 진실들, 그러니까 투명 망토를 입고 모습을 감춘다거나, 벽을 통과한다거나, 눈빛으로 염소를 죽인다는, 이런 황당한 상황들을 몸소 겪었다는 인물의 진지함에서 드러나는 역설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한다. 단순히 취향의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표면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웃음의 깊이가 존재한다.
비정상적인 무용담을 전하는 캐서디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끝내 이해하게 되는 밥의 관계는 <초(민망한)능력자들>에서 블랙코미디적인 감각만큼이나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폭로적인 비아냥으로 가득한 원작과 달리 영화는 그 황당한 실화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캐릭터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부여한다. 이를 테면 초능력 부대의 일원으로 존재했던 캐서디를 비롯해서 그의 동료들을 단순히 허풍선 같은 얼간이로 활용하며 코미디의 장치로 몰락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 나간 시대적 이념에 휩쓸려 망상적인 피해자로 몰락한 인물에 대해서 영화는 가혹한 애드립 이상의 역할을 부여한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외부적으로 정치적 폭로가 담긴 풍자극이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한 인물의 성장을 그린 성장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보다도 더욱 영화 같은 현실을 다룬 이 영화는 이를 영화적으로 영리하게 이용해나간다. 썰렁하기 그지 없는 유머의 간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취향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영화가 될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아이러니한 넌센스의 감각은 영민하게 계획되고 조작된다. 이를 통해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정신 나간 시대를 노려보되, 그 시대 속에 휩쓸린 개인을 애정 어린 송가로서 위로한다. 또한 조지 클루니와 이완 맥그리거, 케빈 스페이시, 제프 브리지스 등 굵직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작품 속에서 거침없이 망가지는 배우들의 열연은 그 자체로 기막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제안한,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이들이 궁금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권력은 음모의 숙주다. 음모를 먹고 자란 권력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욱 음모를 키워나가지만 점차 덩치를 키운 음모는 권력에 기생하다 결국 그 권력 자체를 먹어치운다. 베스트셀러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자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로만 폴란스키의 <유령작가>는 자신이 마련한 음모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파멸되는 어느 권력가와 그 권력을 조종하는 거대한 배후의 질서를 대필작가의 눈으로 묘사해내는 정치스릴러다.
미국의 해변에서 시체 한구가 발견된다. 이는 영국수상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집필하던 그의 최측근 맥아라였다. 이를 대신할 대필작가를 찾던 출판사는 새로운 고스트(이완 맥그리거)를 적임자로 찾게 되고, 그를 아담 랭이 있는 미국 별장으로 보낸다. 하지만 이와 함께 아담 랭이 국제전범재판소에 기소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그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가운데 자서전 집필을 위해 그의 곁에 머무는 고스트는 그 주변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로만 폴란스키는 예전부터 인간성의 극단에 대한 물음에 매달려 왔다. 할리우드 진출작인 <악마의 씨>는 광신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를 환기시키고, 초기작인 <물속의 칼>이나 <혐오>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는 나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묘사한다. 또한 <차이나타운>을 통해서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조명하며 <테스>나 <비터문>을 통해서는 엇나간 성적 욕망을 묘사해낸다. 무엇보다도 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는 홀로코스트를 묘사함으로서 인간이 빚어낸 거대한 폭력의 참상을 고발한다.
사실 <유령작가>는 원초적인 광기와 공포가 지배하던 그의 전작들에 비해 보다 장르적으로 매끈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보다 확실한 건 <유령작가>가 바로 현시점에서 펼쳐지는 전세계적인 부조리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내면적 자의식을 확장하기 보단 그 개인의 자의식이 사회와 연동되는 현상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피아니스트>를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부정한 세계의 장벽에 맞서던 개인의 허무한 말로를 그려낸다는 점에서는 <차이나타운>의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영화 가운데 가장 장르적인 형태로서 매끈한 선을 지닌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경계하는 것처럼 서서히 전진하듯 서술적으로 묘사한 로버트 해리스의 원작에 비해 폴란스키의 영화는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된 듯한 서사의 경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서사의 단계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원작의 디테일한 텍스트는 영화에서 암시와 복선의 이미지로 대체된다. 이처럼 플롯의 잔가지를 쳐내고 보다 긴밀하면서도 단단한 내러티브를 구성해내는 동시에 보다 극적으로 변주된 연출을 동원한 폴란스키의 <유령작가>는 원작과 비교했을 때 극영화로서의 묘미를 살렸다고 평해도 좋을 만큼 뚜렷한 각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영화들로부터 감지되던 원초적인 기운이 탈색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특이점으로 자리잡을만한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연출을 선보이며 흉악한 시대의 속살을 응시하는 폴란스키의 시선은 확실히 유효하다. 권력의 상층에 머물던 이의 치부가 드러나는 순간, 그의 몰락이 세상의 정의를 일으켜세운다고 믿지만 결국 그 몰락은 그 배후에 놓인 누군가의 또 다른 권력의 수단으로서 소비될 뿐이라는, 거대한 이 세계의 은밀한 진실을 일깨운다. 영국의 전수상 토니 블레어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아이러니한 감상을 부르는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깊은 시선과 배우들의 호연을 통해 탁월한 정치스릴러로서의 품격을 얻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오페라라고 한다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 할만하다. 두 작가의 작품은 각각 종교적 음모론을 추적하는 기호학자의 수사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공통분모를 두고 있지만 전자가 철학적 기호를 추출하는 반면, 후자는 대중적 이슈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각기 다른 분자를 지닌다. 물론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른 건 단지 기독교의 권위를 뒤흔들만한 이슈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라 국한할 순 없다. 종교적 진의에 대한 갑론을박만큼 이야기의 리듬감도 중요한 관건이다.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보다도 속도감이 빠른 소설이다. 뒤늦게 인기를 얻은 탓에 오히려 스크린에선 속편으로 둔갑한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와 마찬가지로 장르적 서스펜스와 지적 호기심, 그리고 블록버스터의 스케일까지 선점할 수 있다는 장점을 고루 갖춘 작품이다. 게다가 마치 주먹질하지 않는 '인디아나 존스'를 연상시키는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은 지적인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역동적인 동선을 활보한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매력을 두루 얻기 좋은 캐릭터다. 물론 댄 브라운의 소설에 담긴 놀라운 단서들이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자처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서야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수집품인가를 판단할 수 있기란 쉽지 않다. 다만 작가의 취재를 기반으로 벌어들인 단서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밀고 나가는 재능이 얼마나 쓸만한가를 확인하는 건 가능하다. 댄 브라운의 두 작품은 때때로 액션처럼 치열하게 공방하는 인물 간의 대화와 위트와 긴장감을 조절하는 캐릭터의 심리를 통해 대중적 호감을 발생시킨다. 영화적으로 표현하자면 댄 브라운은 장르적 연출이 뛰어난 감독에 가까운 작가다. 론 하워드 감독이 댄 브라운의 소설에 호감을 느꼈다면 그런 지점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빈치 코드>가 영화적 실패로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스크린이 텍스트를 축약하기 위한 전시판의 역할에 국한돼버린 탓이다. 오락적 속도감마저도 상실한 듯한 안이한 형태는 원작의 가능성마저도 간과하게 만들 정도였다. <천사와 악마>의 불안요소도 다름 아닌 <다빈치 코드>의 영화적 전례에 있다. 하지만 <천사와 악마>는 시작부터 <다빈치 코드>와 다른 전철을 밟아나간다. 소설에서 대화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연출하고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몇몇 캐릭터는 제 위치에서 생략되거나 비중이 축소된다. 서사가 재편되고 관계가 재구성된다. 다만 주요한 캐릭터의 관계나 활용성은 대부분 보존한다.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와 달리 영화적 변주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아무래도 <다빈치 코드>에 비해 소설의 영화화 과정에서 좀 더 과감한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원작이 지닌 속도감은 보존하되 텍스트를 고스란히 이미지로 재연하려는 과욕에서 벗어났다.
<천사와 악마>가 가장 자신있게 선전해도 좋을 요소는 호사스러운 풍경이다. 고대 로마제국과 중세 크리스트교 시대의 영예를 대변하는 로마와 바티칸의 예술적 자취와 건축적 풍광을 관람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특별한 시각적 묘미다. 또한 교황의 서거 이후 교황의 인장이 새겨진 '어부의 반지(Pescatorio)'를 폐기하고, 교황을 추도하는 ‘세데 바칸테(Sede Vacante)’기간 이후 새로운 교황을 추대하는 추기경들의 투표가 이뤄지는 ‘콘클라베(conclave)’까지, 비밀스런 가톨릭 의식을 사실적으로 연출한 장면들 역시 이색적인 묘미를 부른다. 또한 반가톨릭 조직이라는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존재와 거대한 입자가속기에서 ‘반물질(antimatter)’을 추출하는 ‘CERN(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최근 빅뱅 실험으로 논란을 부른-의 존재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무엇보다도 극의 말미에 등장하는 반물질 폭파 장면은 과학과 신앙이라는 패러다임의 충돌과 융화를 주제로 둔 <천사와 악마>의 클라이막스로 대변해도 좋을 만한 이미지적 성과다.
물론 <천사와 악마>는 원작에 비해 간결해진 스토리와 구체화된 이미지 덕분에 입체감이 보다 떨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흘러 넘치는 빽빽한 정보를 온전히 이미지로 치환하기엔 무리가 있음을 고려한다면 <천사와 악마>의 선택이 최선이라 단정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필요악의 순기능을 수행했다고 평할만하다. 물론 <천사와 악마>에서 전달하는 정보가 어느 정도의 사실성을 확보했는가에 대해서 평가하는 건 무리다. 단지 그 정보를 엮어가는 스토리가 얼마나 특별한 오락적 묘미를 발생시키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건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와 악마>는 어느 정도 무난한 묘미를 발생시키는 오락물로서 인정할만한 영화다. 기적적 체험에 도달하진 못해도 흥미로운 교리를 듣는 묘미 정도는 확보한다. 확실한 건 적어도 <다빈치 코드>보단 낫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