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이 처음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97년, <접속>을 통해서였다. 그녀가 <밀양>으로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건 2007년이었다. 정확히 10년 만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라는 빤한 수사의 진짜 주인이 된 게 말이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한발한발 작품을 내디디며 오늘에 다다랐다. 그녀가 또 한번 발을 내딛는다. <카운트다운>으로, 전도연이 돌아왔다.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이전에도 전도연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다. 그녀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누비며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나갔다. 백지처럼, 캐릭터의 색을 입었고, 리트머스처럼, 작품에 스며들었다. 그녀가 시작부터 자각이 뚜렷한 배우는 아니었다. “그냥 어리다 보니까 호기심이 많았을 뿐이죠. 처음부터 의식을 갖고 연기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를 각성시킨 건 <해피엔드>(1999)였다. <해피엔드>는 파격적인 노출신과 베드신을 요구하는 작품이었다. <접속>(1997)과 <약속>(1998)의 연이은 성공과 <내 마음의 풍경>(1999)으로 좋은 연기적 평가를 얻었던 여배우가 선뜻 집어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런 결정을 하려면 제 자신을 납득시켜야 하잖아요. 남들 시선보단 내가 원하는 것에 더욱 귀를 기울기게 된 시기였죠.” 그녀는 표현의 한계를 부수고, 연기적인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임을 알았다. 결국 선택했고, 해냈다.
“언제부턴가 우등생처럼 빤하게 1등 해서 상 받는 게 당연한 배우로 여겨진 것 같아요.” 전도연에게 <밀양>(2007)은 ‘그런 빤함을 뒤엎어주는 작품’이었다. “너 연기 잘하는데, 그냥 연기를 잘 해.” 이창동 감독의 말은 전도연에게 ‘정곡을 찔리는 기분’을 안겼다. 당시 <너는 내 운명>(2005)으로 비평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전도연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여배우였다. 이창동은 그런 그녀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흠잡을 곳 없는 ‘정석적인 배우’ 전도연에게 그 이상의 연기를 요구했다. 그녀는 촬영 내내 온갖 의심에 시달렸다. 결과적으로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와 온갖 상찬이 뒤따랐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떨떠름한 일이었다. “뭔가 스스로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국 제 자리였어요. 진짜로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나만의 비법을 가진 것처럼 잘난 척도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니까요. 정말 모르겠어요.”
충무로는 여배우에게 척박한 땅이다.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전달받기란 드문 일이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다. 실력으로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다. 전도연은 작품 작업 중에는 다른 시나리오를 보지 않는다. 밀양에서 <멋진 하루>(2008)에 대한 제의를 받은 전도연은 서울에서 시나리오를 보고 작품을 결정하기로 했다. 비로소 모든 촬영이 끝났다. 그녀는 서울로 올라오며 새롭게 쌓여있을 시나리오들을 기대했다. 하지만 매니저가 건넨 시나리오는 단 하나, <멋진 하루>뿐이었다. “만약 시나리오가 별로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제가 좀 더 빨리 차기작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요.” 언론과 대중은 <멋진 하루>의 전도연을 주목했다. 칸에서의 수상 뒤 첫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욕심은 굉장히 많은데, 꿈이 없어요. 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는 무엇이잖아요. 전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욕심이 많아요.” 목 아래까지 단추를 채우고 반듯하게 몸을 세운 듯한 <밀양>과 달리 옷을 살짝 풀어헤치고 느슨하게 누워있어도 좋을 것 같은 <멋진 하루>는 보다 여유로워진 전도연의 관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작품이 끝나면 공허하죠. 무언가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하루 아침에 여운도 없이 끝나버리는 거니까. 돌이켜 보면 이 작품이 정말 마지막인 것처럼 보든 열정을 다 쏟아 부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평소에 열정을 쏟아 넣을만한 게 없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결국 남는 건 작품이죠.” 그랬다.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전도연은 작품을 삼키듯이 쉬지 않고 연기해왔다. 결혼을 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데뷔 이후로 처음 2년여 간의 공백을 경험한 그녀에게 이제 연기란 무엇일까.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마음 써야 할 게 많아지니 연기가 더욱 절실한 것임을 알게 됐죠.” 그녀의 구미를 당기는 시나리오는 여전히 드물었다. 그 가운데, <하녀>(2010)는 일종의 오아시스였다.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김기영의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에서 전도연은 파격의 옷을 가벼운 깃털처럼 걸치듯 연기했다.
허종호 감독의 입봉작 <카운트다운>(2011)에서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구가하는 전도연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시나리오를 검토했고, 출연을 결정했으며, 제 역할에 정진했다. 최근의 출연작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두드러지는 스릴러물에서 전형적인 팜므파탈을 연기한다. 전도연의 변신이라는 수사가 으레 따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변신을 목적으로 작품을 선택해본 적이 없어요. 그저 인물 안에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기에 작품을 선택했고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죠.” 사람들은 그녀에게 묻곤 했다. 지난 번 그 곳은 험준한 봉우리가 아니었냐고, 완만한 능선이 아니었냐고. 하지만 정작 전도연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여기 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저를 내리막길에 내려놓기도 하고, 꼭대기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그건 제 자신과 상관없어요. 저는 항상 평행선을 걸어왔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언제나 일정한 걸음으로 연기적 보폭을 넓혀왔다. 길은 열려 있었고, 그저 걸어왔을 뿐이다. 그렇게 다시, 전도연은 발을 내딛는다. 또 한번 길이 열린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더 이상 사람들이 시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시상은 더 이상 운율 위로 흐르지 못하고 메마른다. 참혹한 세태 속에서 시구는 마치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은 씨앗처럼 감성을 잊은 듯 단단하게 메마른인간의 마음에 뿌리 내릴 수 없는 것마냥흩날려 간다. 물기를 잃어버린 것처럼 메말라버린 세상 속에서 시쓰기를 절실히 갈망하면서도 좀처럼 시상을 떠올리지 못하는 어느 여인은 그 대신 험악한 세상의 단면만을 거듭 목격하고 체험해 나갈 뿐이다.
물 흐르는 소리만이 가득한 강가에서 흙을 만지는 아이들, 그 중 한 아이의 시선이 강물 위로 머문다. 그 시선을 따라잡은 카메라 너머로 수면 위로 무언가가 점차 스크린 너머의 객석을 향해 떠밀려온다. 한적한 자연풍경과 대비적인, 참혹한 광경이 눈앞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시>는 대사 한마디 없는 풍경만으로 유려하고 명징하게 이 세계의 단면과 이면을 발췌해 관객의 눈 앞에 들이민다. 안온한 풍경 안에서 쉽게 표정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참담한 실체의 고요한 등장. <시>는 직설적인 문체와 서정적인 운율이 동반된 한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형태를 두르고 있지만 그 내면에 담긴 끔찍한 직설과 비통한 은유를 찌르고 머금는 영화다.
직장문제로 부산에 내려가 지내는 딸 대신 홀로 손자(이다윗)를 키우며 할머니 미자(윤정희)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어느 날, 어꺠결림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미자는 강으로 투신해 자살했다는 소녀의 어머니가 넋나간 듯 딸을 찾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잊지 못하던 미자는 그것이 곧 자신과 가장 가까운 혈육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강으로 투신한 소녀가 대면해야 했던 폭력은 끔찍하게 매듭지어졌지만 그 폭력의 당사자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들의 가해를 쉽게 희석시키고, 그 당사자들의 부모는 위로나 슬픔의 감정보단 해결과 처리의 이성적 방안을 마련한다. 그 이성적인 해결방안은 미자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시상에 몰두해나간다.
어떤 일상은 파문처럼 번지듯 조용히 떠밀려와 삶을 출렁이게 만들고 흘러 넘쳐 채울 수 없도록 흔들어대지만 실상 삶은 그렇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다시 제 삶을 이룬다. <시>는 사건의 단면을 끌어내며 감정을 진동시키기 보단 사건을 품은 일상의 풍광을 고스란히 지켜봄으로서 감정을 억누른다. <밀양>이 일상을 파헤치고 삶을 도려내어 그 생의 심층을 관찰하는 영화였다면 <시>는 일상으로 덮여가는 삶의 진행적인 너비가 결국 가닿을 수 밖에 없는 생의 영토를 살피는 영화다. 담담하게 떠밀려 내려와 삶을 위협하는 현실 위로 일상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지만 실상 그 삶은 쉽게 내려앉지 않은 채 켜켜이 시간의 중력 위로 떠밀려 내려가 새로운 일상을 쌓아나간다.
그 어떤 날, 우연히 스쳐 지난 타인의 일상이 제 일상의 발목을 붙잡듯 운명은 어떠한 예감도 없이 너비를 펼쳐 생을 덧없는 것으로 몰아가고 일상은 당연스럽게 생의 너비를 밀어낸다. 그 흐름에 순응하듯 인간의 생은 무력하게 유지되지만 그 삶의 흐름마저도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처럼 차분히 이 세계 속으로 안착한다. 아름다운 일상의 총합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삶의 너비는 마치 물처럼 흐르는 일상 속에서 점차 정화될 수 밖에 없는 기억처럼 고요히 흐름을 지속해나갈 뿐이다. <시>는 <밀양>처럼 어떤 종교적인 엄숙함을 감지하게 만드는 영화지만 그것은 삶에 대한 체념적 체험이 아닌 갈망적 의지로서 보다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둔탁하고 거친 각운의 경험이 남긴 심상의 상흔은 결국 삶의 운율 속에서 보다 깊고 고요한 문체가 되어 삶을 정화시킨다.
<시>는 아이러니와 딜레마를 통해 보다 명징한 통증과 수려한 슬픔을 각인시키면서도 끝내 그것이 아름답다 말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경이로운 영화다. 이미 존재 자체로서 시나 다름없는 여인은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시를 흉내내는 속물들의 세상 속에서 시를 되묻는다. 그리고 결국 한편의 시를 완성한다. 통증의 세상에서 깊게 침전해 내려가는 감성의 운율은 아련하다 못해 시리고 창백해서 아프고 고결해 소중한 것이다. 이창동은 정적이면서도 첨예하게 파고 드는 문체를 구사하는 가운데, 윤정희는 그 안에서 자신만의 화법을 동원하며 독자적인 운율을 보존한다. 세상은 메마르고, 삶은 시리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는 되묻는다. 당신은 시를 쓸 수 있는가. 저마다의 삶은 모두가 그렇듯 스스로 돋아나고, 자라나는데 세상은 이처럼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시상을 어렵게 떠올리고 쓰는 사람이 적어지는 것처럼 삶을 아름답게 떠올리고 써내려 가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탓이 아닐까. 그래도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있더라도, 살아서 만나기를.
<멋진 하루>는 <밀양>이후 전도연 씨의 첫 작품이란 점만으로도 궁금증을 부릅니다. <밀양>은 아무래도 그 이전까지 전도연 씨의 연기에 대한 적정기대감을 파괴할만한 경지였으니까요. 어쩌면 배우가 세상보는 눈까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죠. <밀양>을 보신 많은 분들께서 어딘가 달라졌다고 말씀하셨어요. 전도연이 어련히 알아서 했겠어. 전도연은 안 봐도 잘 했겠지. 언젠가부터 이렇게 1등 해서 상 받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는 우등생처럼 뻔한 애가 됐는데 <밀양>이 그 뻔함을 뒤집어 엎었다는 거에요.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아요. 뭔가 흠잡을 때 없이 연기는 잘 하지만 그 이상의 기대감을 주지 않는, 뭔가 더 이상의 호기심을 갖지 않게 만드는, 정말 정석처럼만 연기하는 배우라 느껴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그렇다고 느꼈던 건가요?
<밀양>때 이창동 감독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 연기 되게 잘하는데 그냥 연기를 되게 잘 해. 이러시는 거에요. 연기를 되게 잘 한다는 건 말 그대로 연기처럼 보이는 거죠. 그래요. 그 말이 저에겐 충격이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계산하면서 연기했던 건 아니지만 이창동 감독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정곡이 찔리는 느낌이 들잖아요. 뭐라고 말은 못하겠고 들을 수 밖에 없었죠. 그 때 좌절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고, 그게 대체 뭘까, 뭐가 문제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갑자기 뒤돌아보니 모든 게 후회스러워지는 거 있잖아요. 감독님께서, 그 틀을 깨지 못하면 너와 내가 만난 의미가 없어진다, 하셨어요. 아마 감독님께서도 공직에 계셨던 이후로 첫 작품이라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나 관심에 부담을 느끼셨던 거 같아요. 물론 그건 제가 느껴온 것과 차원이 다른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그걸 뛰어넘어야 된다는데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싶은 거죠. 뭐에요, 제발 가르쳐주세요, 그래도 감독님께서도 모르겠다 하시고, 너 스스로 답을 찾아라, 이러시니 전 또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지금은 그 뒤로 뭔가 달라졌다고 스스로 느끼십니까?
제가 진짜 억울한 건 그게 아직도 뭔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밀양>을 찍고 나서는 아마 그 영향을 받아서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국 달라진 것 없이 제 자리에 있더라고요. 차라리 도대체 그게 어떤 차이인지 알면 좋을 거 같아요. 그럼 정말 깐느에서 상 받은 것도 자랑하고 다닐 수 있을 것 같고, 그렇게 되서 잘난 척도 해보고 싶어요. 나만의 비법을 가진 것처럼.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정말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밀양>은 전도연 씨에게 큰 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험한 일을 겪고 나면 그만큼의 여유가 생기기 마련인데 신애처럼 진폭이 큰 캐릭터를 연기한 이후로 연기에 접근하는 여유가 생기진 않던가요?
그것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잠시 생각하다가) 저는 매번 항상 이번 작품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해왔기 때문인지 여유가 잘 안 생기더라고요. 끊임없이 달려야 돼, 이 정도까진 아니지만 저는 지금 저도 잘 모르는 미궁 속에 빠진 채 계속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여유도 잘 안 생기는 것 같아요. 생길 수도 없을 것 같고요. <밀양>에서 신애라는 연기를 했으니까 다음엔 어떤 연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여유가 생겼어, 이런 게 없더라고요. 그럴 거 같았지만 또 다시 똑같은 과정 속에 빠지고, 다시 힘들고, 그 과정이 다를 뿐 비슷한 거 같아요.
그렇다면 <멋진 하루>는 <밀양>이후로 첫 번째 작품이란 점에서 되려 부담이 있었을 법한데요.
이번 작품이 너무 두렵고 떨렸던 건, 사람들은 이제 전도연이 다음 작품에 어떤 연기를 할지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는데 정작 저는 그 맛의 비법을 모르고 있다는 거였죠.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그때랑 똑같은데 말이죠. 그래서 심판대에 서는 것처럼 너무 무서운 거에요. 잘못하면 사람들이 다 날 잡아먹을 것 같고.
아무래도 <밀양>에 대한 의식을 떨쳐내는 것이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저보다 오히려 제3자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럴 것이다, 라고. 그런데 저 역시 제3자들의 시선이나 생각들로부터 영향받지 않을 수는 없어서 부담이긴 하죠. <밀양>으로 받게 되는 부담이 크기 때문에 좀 더 빨리 다음 작품을 선택하고 싶었어요. 제가 원래 작품을 작업할 때 다른 시나리오를 읽지 않는데 <멋진 하루>원작은 단편이고 짧아서 밀양에 있을 때 읽어봤어요. 희수 캐릭터는 보이지도 않았고, <여자, 정혜>의 남자버전 같은 이야기라 생각했죠. 책만으론 결정할 수 없고 나중에 시나리오가 나오면 결정하겠다고 했는데 서울로 올라와서 받은 <멋진 하루>시나리오가 너무 고마웠어요. 제가 좀 더 빨리 다음 작품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요.
<멋진 하루>외에 맘에 드는 시나리오는 없었나요?
아, 갑자기 정곡을 찌르시네요. (웃음) 다른 시나리오가 안 들어왔어요.
예? 정말인가요?
저도 밀양에 꽤 오래있었으니까 서울로 돌아가면 시나리오가 많이 쌓여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없더라고요. 매니저가, 누나, 이게 다에요, 이러면서 <멋진 하루>시나리오를 주는데 어머, 싶었죠. (웃음) 약간 당황스럽긴 했지만 아쉽지는 않았어요. <멋진 하루>시나리오가 너무 좋았으니까. 만약 시나리오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선택하지 않았겠죠.
감독님들께서 전도연 씨에 대한 자기 검열이라도 했던 걸까요?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그런 말씀들로 위로를 해주시긴 했지만, (웃음) 그건 아닌 거 같고요. 아무래도 영화계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영화 제작 편수가 많이 줄어든 탓에 많은 여배우들이 피해를 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도 그 중 하나고. 첫 주연작이었던 <접속>이후로 꾸준한 작품활동을 계속해왔습니다. 특별히 기복을 보인 적 없이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오셨습니다. 제 자신은 내리막길 없이 늘 항상 평행선을 걸어왔다고 말하고 싶어요. 여기 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저를 내리막길에 내려놓기도 하고, 꼭대기에도 올려놓기도 했겠지만 그건 제 자신과 상관없이 저를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제 자신은 그냥 평행선을 쭉 걸어왔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 있지 않나요? 그럼으로 인해서 어떤 결과에 대한 기대감이나 실망감을 얻을 수도 있고요.
제가 철저하게 제 자신을 제어하는 건 기대감을 없애는 거에요. 그건 스스로에 대한 기대감일 수도 있고, 그 무엇에 대한 기대감일 수도 있어요. 기대했다가 현실에 의해 배반당하는 걸 못 견디겠어요. 그러니까 자꾸 기대감을 스스로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 같고요. 그렇기 때문에 그냥 이번 작품 하나만 생각하고, 그 무언가가 있을 다음 날을 생각하지 않는 거죠. 뭘 하더라도 이걸로 인해서 생겨나는 기대를 스스로 제어하는 것 같아요. 그건 실생활에서도 그렇고요. 기대했다가 배반당하는 게 너무 두려워요. 왠지 로또 당첨을 기다릴 때 끝자리 번호 하나 틀린 것처럼 너무 허무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지도 모를 거 같고. 복권을 다시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건 너무 싫어요.
크게 배반당했다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라도 있었나요?
느껴본 적은 없지만, (잠시 고민하다가) 아니, 없진 않겠죠. 소소하게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사소하게 섭섭함을 느끼기도 하잖아요. 생일날은 뭘 해주실까, 생일이니까 오늘은 집에 들어가면 손님들도 많이 와 있고 기쁠 거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어렸을 때부터 늘 항상 그런 현실에 대한 좌절을 겪었던 거 같아요. (웃음) 물론 큰 좌절의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게 싫었나 봐요. 그런 게 은연 중에 배버린 것 같아요. 당연히 이번 여우주연상은 내가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상을 못 받으면 웃고는 있지만 얼굴이 파르르 떨리면서 표정 관리 안 되는 것처럼. (웃음) 어쩌면 그런 경우도 해당될 수 있겠죠.
기대감을 제어한다는 건 그만큼 먼 계획을 잡지도 않는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이율배반적인 이야기지만 욕심은 굉장히 많은데 꿈이 없어요. 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는 무엇이잖아요. 제가 만들어낸 어떤 모습이고. 전 그것보단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욕심이 굉장히 많아요. 하나하나 산을 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게 저한테 주어진 최선의 길이라면 저는 거기에 최선에 다하지, 이것을 넘으면 뭔가가 있을 것이다, 이런 꿈을 꾸는 것 같진 않아요. 만약 그 산을 넘었는데 오아시스가 있다면 그냥 고마운 일이죠.
전도연 씨의 연기가 매 작품마다 절박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일까요. 마치 그 순간을 뛰어넘기 위해서 스스로를 소진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이나 작품을 끝낼 때마다 공허함이 크지 않을까 싶어요.
작품 끝나면 공허하죠. 뭔가 막 집중해서 열중하다가 갑자기 여운도 없이 하루 아침에 딱 끝나버리는 거니까요. 물론 그런 공허함은 누구나 다 있는 거 같아요. 저는 그걸 절박함이라고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그래요. 절박함이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요. 제가 그런 생각을 늘 하는 건 아니지만 돌이켜 보면 이 작품이 정말 마지막인 것처럼 모든 열정을 다 쏟아 부었던 것 같긴 해요. 어쩌면 별 관심분야도 없고, 취미도 없고 그래서 평소에 뭔가 열정을 쏟을 만한 게 없어서 그렇게 되는 것일지도 몰라요. 일도 그렇지만 사랑도 그렇고요. 다시 무언가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게 돼요. 이게 정말 마지막 선택인 것처럼, 결국 남는 건 작품이죠.
배우로서 원대한 꿈이 없었다 해도 어느 순간 자신이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되는 계기는 있었을 것 같습니다. 배우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문득 인지하게 된 순간 말이죠.
<해피엔드>때였던 거 같아요. 그 전엔 제가 배우인지도 몰랐고 그냥 어리다 보니까 호기심이 많았을 뿐이죠. 배우라는 의식을 갖고 연기하지 않았을뿐더러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주니까 우쭐해지기도 했고. <접속>이 그랬고, <약속>도 마찬가지였죠. <약속>은 <접속>이 잘 되니 그 부담에 밀려서 그냥 얼떨결에 떠밀리듯 한 작품이기도 했고요. <해피엔드>는 나름대로 위험한 시도였고, 무모하다는 말도 들었죠. 무엇보다도 일단 그런 결정을 하려면 제 자신을 납득시켜야 하잖아요. 그 때 처음으로, 난 어떤 배우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예쁜 배우도 아니고, 예쁜 이미지만 쌓아서 결혼한 뒤 잘살 수 있는 배우도 아니고, 결국 나는 내가 원하는 길을 가는 배우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뚫렸어요. 그 때 잠깐 생각이 자유로워진 거 같아요. 남들 시선보단 내 자신이 뭘 원하는지에 귀를 더 많이 기울이게 된 시기였고. 내로라할만한 남자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왔습니다. 매번 그런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다 보면 상대를 의식할 수 밖에 없을 텐데요. 저는 늘 제 자신이 몇 프로 부족한 거 같아요. 그래서 뒤쳐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있어요. 어쨌든 상대방과 같이 호흡해야 하니까 이건 그냥 제가 못해도 저 사람만 잘하면 되는 작업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조금이라도 부족해서 혹시 나 때문에 작품에 민폐가 되진 않을까, 이런 마음이 들어서 그걸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했어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저렇게 잘 하니까 난 더 잘해야지, 가 아니라 나도 거기에 맞춰서 더 열심히 해야지, 라는 자극을 받았죠. 물론 경쟁까지는 아니지만.
<멋진 하루>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하정우 씨는 예전에 TV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함께 출연한 적도 있죠. 그 당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신인배우였던 하정우 씨가 지금은 충무로의 블루칩이라는 수식어를 얻었습니다. 배우로서 이렇게 다른 배우의 성장적 변모를 지켜보는 느낌이 궁금합니다.
그냥 어느 순간 하정우란 배우가 배우로서 제 앞에 서 있었어요. <프라하의 연인>때는 제 파트너가 아니라서 함께 집중하며 호흡 맞출 여건이 아니었지만 그때도 이미 하정우 씨는 이미 준비된 배우였던 거 같아요. 단지 시간이 지나서 하정우란 배우와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덕분에 그 때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더 많이 느낄 뿐이지, 하정우 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거 같아요.
스스로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의 기준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제 기준은 시나리오에요. 다른 것보다 절대적으로 시나리오인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가끔 신기한 게 있어요. 종종 남자배우들 보면 시나리오를 보지 않고 미리미리 몇 작품을 정해버리잖아요. 송강호 오빠도 그렇고, 너무 신기해요. 물론 강호 오빠는 대부분 다 좋은 감독님들과 작업하긴 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요즘 같이 어려운 불경기 때는 그럴 수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왜냐면 미리 찜을 해놓으니까. (웃음) 그런데 저는 그렇게 못하겠어요.
송강호 씨처럼 어느 정도 작품에 대한 신뢰성을 보장받을 만한 이력을 지닌 감독님들의 러브콜이 시나리오보다 먼저 들어온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전 시나리오 달라고 할 것 같아요. (웃음) 저는 작품을 믿고 가고 싶어요. 그 작품으로 인해서 저란 배우도 있는 거고, 감독님도 있고, 다 있는 거지, 작품을 떠나서 좋은 배우, 좋은 감독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고집하고 싶어요.
<멋진 하루>도 당연히 시나리오가 선택의 배경이겠죠?
당연히 시나리오였죠. 그 동안 이윤기 감독님께서 좋은 작품들을 만드셨지만 선뜻 보게 되는 작품들은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결정하고 나서 다시 작품들을 쌓아놓고 봤죠. 어떤 감독님일까 생각하면서 봤어요.
이윤기 감독님의 전작들이 속된 말로 상업적으로 큰 인지도를 얻을만한 영화는 아니었죠. 그런데 전도연 씨와 하정우 씨가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멋진 하루>가 어쩌면 이윤기 감독님 영화 중 가장 상업적 인지도를 얻을지도 모르겠단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나리오 상으로는 그렇게 대중적인 영화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흥행에 대한 기대는 약간 접어놓고 시작한 작품이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까 점점 욕심이 나기 시작하는 거에요. 영화도 시나리오보다 훨씬 밝게 나왔고, 요즘 하정우 씨도 블루칩이라니. (웃음) 어려운 감정이 아니라 느껴지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볼 수 있는 영화니까 좀 많이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멋진 하루>는 이윤기 감독의 전작들과는 좀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전작들과 다른 능동성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건 아무래도 두 배우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 싶습니다. 두 분이 주고 받는 대사의 톤에도 활기가 있고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과 프리(pre-production) 작업 하면서 제가 그랬어요. 저러니까 <여자, 정혜>같은 영화를 찍을 수 있으셨지. 아, 나쁜 뜻에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웃음) 맨날 바늘 하나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꼼꼼하게 고민하시는 걸 보고 있으려니까 숨이 턱턱 막히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오히려, 감독님, 그냥 마음 편히 가지세요, 이랬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촬영에 들어가면 숨막히고 답답할 줄 알았어요. 너무 꽉 조이실까 봐. 그런데 오히려 촬영장에서는 배우에게 전적으로 맡기시고 진행도 너무너무 빨랐어요. 그래서 저는 너무나 놀랐죠. <여자, 정혜>를 비롯한 전작들을 대체 어떻게 찍었을지 너무나 궁금해진 거에요. 프리 작업을 보면서, 아, 저렇게 찍어오셨겠구나, 했는데 오히려 같이 작업하고 나니까 정말 어떻게 찍었을까 싶어질 정도로 놀랐어요. <멋진 하루>는 단 하루 동안의 이야기에요. 하지만 촬영이 하루 동안에 이뤄진 것은 아니니까 긴 촬영기간 동안 그 하루 동안의 감정을 긴밀히 간직하고 이어나가는 게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전 감독님들이 웬만하면 (서사에 따른) 순서대로 찍었으면 좋겠어요. 정 그럴 수 없을 경우엔 어쩔 수 없겠지만 웬만하면 말이죠. 저에겐 그게 중요해요.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가 없더라고요. 난 희수야, 이렇게 처음부터 극중 인물이 될 수 있게 아니라 저도 그 상황을 겪으면서 그 인물이 돼가는 거니까 겪지 않은 걸 한다는 건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번 작품도 거의 순서대로 찍었어요. 다만 어떤 톤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데 저는 제 스스로 신경 쓰지 못해요. 제가 전체적인 걸 보긴 힘드니까요. 아무래도 감독님께서 전체적인 걸 봐주시니까 톤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감독님한테 많이 맡기고 의지하는 스타일이죠.
예고편에 등장하지만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장면이 있더군요. 희수가 마주 앉은 누군가에게 병운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 같았고요.
개봉시기가 늦춰지면서 감독님께서 편집을 바꾸면서 다른 식의 영화를 만들고 싶으셨나 봐요. 희수가 집 앞에서 친구를 만나서 너스레 떨 듯 얘기하는 장면이 있었죠. 병운이를 만났는데 어쩜 그러니, 로부터 시작해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는. 제가 그때 감독님한테 그랬거든요. 분명히 이거 못 쓰실 거에요, 안 쓰실 거에요. 그래도 감독님께서 우기셔서 촬영했죠. 그래서 막 투덜투덜대면서 찍었어요. (웃음) 그런데 그 땐 스모키 메이크업이 아니라 저도 좀 새롭긴 했어요. 하지만 결국 제 말대로 못 썼죠. (웃음) 그런데 저희 영화 편집 정말 잘 하지 않았나요? 시간이 많아서 감독님께서 편집을 다양하게 해보셨나 봐요. 사실 감독님들께서 후반작업이 중요하다고 하시는데 전 그 의미를 잘 몰랐거든요. 편집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그런데 후반작업이 길었던 만큼 공들인 보람이 있는 것 같아요.
<멋진 하루>에서 보여지는 서울 시내 곳곳의 풍광들이 낯설지 않지만 이국적인 느낌이 있어요. 실제로 촬영하며 보던 풍경을 영화상에서 보니 어떻던가요?
저도 놀랐어요. 서울 시내 곳곳이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나올 줄 몰랐으니까요. 서울이 아니라 마치 제3의 도시 같잖아요.
자연광을 주로 활용했는데 전도연 씨는 피부가 좋아서 자연광이 두렵지 않을 것 같아요.
그건 아니고요. 이제는 뭐 나이 때문에......(웃음) 무엇보다도 HD카메라가 두려웠어요.
병운 같은 남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옆에 있으면 짜증나고, 없으면 보고 싶고. (웃음)
결국 희수는 병운에게 빚을 일부 남깁니다. 의외의 선택이죠.
소유하고 싶은 욕망일지 모르겠어요. 여자들 특유의. (웃음)
여자로서 그런 희수의 심리가 이해가 가던가요?
희수는 원래 욕심을 부렸던 거잖아죠. 하지만 병운을 만나 예전의 희수로 돌아오면서 결국 욕심을 부린 자기 자신에 대해 반성할 여지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게 내 모습이야, 라는. 그래서 그 차용증이 병운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희수에겐 큰 여지를 둔 거란 생각이 들어요. 후에 스페인의 막걸리집 간판이 나오잖아요. 어쩌면 나중에 그 차용증을 가지고 희수가 스페인까지 찾아갈지도 모르죠. (웃음)
남자가 봐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상대 같아요. 하루 동안 그런 상대와 보낸다는 건 나름 특별한 이벤트가 될 수도 있겠죠. 물론 평생이 된다면 좀 곤란할지도 모르겠지만.
아까 저희 코디 언니가 재미있는 얘길 해주더라고요. 갑자기 누나 동생으로 지내는 남자 관계자 분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뜬금없이, 병운이가 어떤 남자야? 이렇게 물었대요. 알고 보니 시사회에 아는 여성 관계자 분을 초대해서 영화를 보여줬더니 그 분이 그 남자분한테 문자를 보냈던 거에요. 넌 병운이 같은 자식이야, 이렇게. 그래서 코디 언니가 그 분에게, 네 캐릭터가 어떤지 알겠다, 이러면서 전화를 끊었다고 해요. (웃음) 아까 그 얘기 듣고 너무 웃었어요. 넌 병운이 같은 자식이야! (웃음) 사실 찍을 때 짜증이 많이 났어요. 그런 캐릭터가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니 같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울화통이 터질까, 너무 짜증나는 거에요. (웃음) 그런데 영화를 보니 병운이가 너무 사랑스러웠어요. 병운이는 떨어져 있어야 알 거 같아요.
같이 있을 때는 모르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나는 사람이니까요.
그게 병운이의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굉장히 뜬금없고, 그런 애가 어디 있을까 싶지만 남자마다 다 그런 구석이 있는 것도 같기도 하고요. 곁에 있을 때는 얘가 너무 싫어, 짜증나, 하지만 결국 그게 나름대로 매력이었다는 걸 돌아 돌아 알게 되지 않을까 싶고요.
희수가 돌아왔던 것도 건 그래서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웃음)
이윤기 감독님의 영화에 출연한 여자주인공은 이윤기 감독님의 차기작에 카메오 출연하는 건 아시죠?
아, 이번에도 한효주 씨도 나왔죠. 그런데 전 까메오라 해도 시나리오보고 결정할거에요. (웃음)
(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