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첫 방한이 아니다. 뭔가 특별한 일정이라도 보냈나.
여명(이하, '여'): 와서 보니까 홍보사에서 영화 홍보를 위해 스케줄을 많이 잡아놓은 덕분에 일단 일하느라 시간이 없다. 같이 온 스텝들은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남대문도 다녀 왔다는데. (웃음) 홍콩에서 한국이 TV에 나오는 걸 보고 놀러 가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막상 맨날 오게 되면 일만 하고 간다. 가끔 그냥 편하게 거리를 걸어 다녀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쯔이(이하, '장'): 어제 간 극장은 새로 만든 극장인지 좋더라. 한국의 영화 산업이 빨리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더라. 여: 처음 한국에 온 게 12년쯤 된 거 같은데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친숙하다. 그 시간 동안 여러 번 와서 그럴까. 물론 잠깐씩 머물 수 밖에 없었지만 몇 주마다 한번씩 오가던 곳처럼 그 시간차가 너무 짧게 느껴진다.
<매란방>은 경극을 소재로 한 영화다. 현재 중국에서 경극에 대한 인지도가 어느 정도인가? 여: 일단 내가 사는 홍콩에도 경극의 일종인 ‘오극’이라는 홍콩식 지방 경극이 있다. 그러나 홍콩은 워낙 작은 도시고, 시장도 작기 때문에 점점 ‘오극’은 많이 없어지는 추세다. 그래서 정부에서 보호차원으로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공연하기도 한다. 그래도 중국은 워낙 도시들이 크니까 계속해서 꾸준히 경극이 공연되는 기회가 많아지는 걸로 안다. 최근엔 ‘매란방 대극장’이라는 게 생겨서 매란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많은 경극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들이 마련되고 있다.
본인은 경극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 수준이었나? 여: 나도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 대부분은 경극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인지는 없다. 매란방만 해도 우리 역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고, 그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 학교 교과서를 통해 소개되는 이야기 정도만 알게 됐을 뿐, 깊은 지식은 없었다.
그만큼 요즘 젊은 세대들에겐 생소한 영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여: <매란방>을 본 젊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당시 매란방이 살았던 연예계가 지금과 얼마나 다른지를 이해하면서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동시에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사는 비슷하다는 걸 느낀다. 단지 핸드폰이 없어서 전보를 쳐서 연락하는 것처럼 기술적인 환경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가 하는 일, 사랑과 같이 겪어내야 할 감정, 이런 인간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어떻게든 극복하는 걸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시대적 차이만 있을 뿐,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걸 느낀다면 <매란방>이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맹소동의 헤어스타일이 그 당시 유행이었는데 지금도 유행되곤 하지 않나. 그조차도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시간이 흘러도 어디에 있어도 사람 사는 건 마찬가지다. 어제 기자회견에서 사진기자들의 플래쉬가 영화를 다시 플래쉬백하는 느낌이었다. (웃음) 영화로 치자면 미래가 되는 지금 내 앞의 기자들의 플래쉬가 그때보다 빨리 터진다는 것만 다르지. (웃음) 살아가며 느끼는 감성은 시대와 무관하게 비슷하다고 느낀다.
연기에 임하기 전에 준비과정이 있었을 것 같다. 장: 경극을 훈련하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경험이 전무한 예술을 배운다는 것도, 실제 인물을 모방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2달 정도의 훈련 기간을 거치면서 그 인물 자체가 되려고 노력했고 그 덕분에 촬영 당시엔 그냥 그 인물이 됐다. 돌아보면 즐거운 작업이었다. 여: 우리 같은 후배에겐 먼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부터 공부했다. 한 세기 이전의 성취감을 따라잡는다는 건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 당시 주변 환경과 모습이 어땠는가에 대한 세심한 연구와 토론을 거쳤다. 그에 근접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장쯔이 씨는 남장 배우 ‘맹소동’을 연기했다. 소감이 궁금하다. 장: 일단 첸카이거 감독님과 영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좋았고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었다. 항상 내가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난다는 건 흥분되는 일이다. 물론 경극을 배우는 과정은 사실 상당히 힘들었다. 몸의 자세부터 작은 손동작이라던가, 입 모양까지 다 배워야 하는 탓에 힘들었지만 그런 과정들이 내 자신에겐 큰 도전이었고 그래서 즐거웠다. 맹소동의 분량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때때로 맹소동을 좋아해주거나 그로부터 신선한 생동감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걸 보면서 좋은 경험을 마쳤다고 생각했다. 매란방과 가슴 아픈 사랑을 나누지만 영화에서 햇빛처럼 밝은 부분을 차지하는 역할이라고 본다.
반대로 여명 씨는 여장 배우를 연기하는데 그만큼 여성적인 제스처를 익히기 위한 노력이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혹시 그로 인한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나?
여: 사실 영화로 보여진 연기가 생활의 일부가 된 것처럼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무대 위에서는 여자 같지만 무대 밖에서는 남성적이지 않나. 촬영 중에 특별히 신경 쓴 바는 없었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감독님이 잘 연출해준 덕분이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정신적으로 전력을 다해서 임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에피소드처럼 전하면 그 모든 과정 자체가 단순하게 이야기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것 같아서 그에 대한 말은 삼가겠다. 그냥 배역 그 자체로 생활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추억을 훼손하지 않고자 배려하는 거니 이해해달라.
<패왕별희>의 장국영과 비교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여: 비교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다. 장국영은 존경하는 배우다. 외부에서 비교하는 걸 좋아한다 해도 내가 그 비교에 참여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상관없다.
서로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나? 여: 장쯔이 씨는 내면이 꽉 찬 배우다. 관객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연기를 한다. 사실 데뷔 이후로 10년 동안에 출연작이 10여 편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만큼 배우로서 하나하나 신중하게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더 많은 도전을 할 수 있고 더 좋은 작품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신인 때 찍었던 무협영화 한편(<와호장룡>)이 크게 흥행한 만큼 그 이미지에 지배당할 수도 있었을 텐데 스스로가 그 동안 새로운 장르와 작품을 선택해왔다. 최근엔 본인이 직접 제작한 현대물도 찍었다는데 이런 움직임을 보면 많은 관객들이나 나 같은 배우의 입장에선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만큼 장쯔이라는 배우를 보는 관객들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장: 여명 씨는 매란방처럼 젠틀하고 우아한 면이 있는 반면에 가끔씩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연예계 톱스타로 살아왔으면서 그런 모습을 간직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참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워낙 친한 관계이고 평상시에 배우라는 의식을 안하고 산다는 공통점이 있다. 덕분에 현장에서 연기를 하려고 의식한다기 보단 최대한 편안하게 촬영에 임했다. 영화에서 매란방과 맹소동이 즐겁게 웃는 장면을 보면서 평상시 서로를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우정이 있기 때문에 함께 교감하는 모습들이 연기를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여명 씨의 말대로 장쯔이 씨는 <와호장룡> 이후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장: 지금까지의 작품을 보면 분명 그 때보단 범위가 넓어진 거 같다. 최근에 소지섭 씨와 찍은 <소피의 복수>에서 내가 연기한 인물의 나이는 스물 대여섯 정도인데 실제로 내 모습은 열 일곱, 여덟 정도로밖에 안 보이더라.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미안한데, (웃음) 다들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고 비단 내 생각만은 아니다. (웃음) 덕분에 배우로서 나이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 내 실제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경험을 얻었다. 반대로 나이가 많은 역할을 해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배우로서 연령을 맞춰서 연기하는 범위도 훨씬 넓어진 것 같다.
장쯔이 씨는 예전에 <야연>으로 내한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 멜로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에 소지섭 씨와 함께 <소피의 복수>로 호흡을 맞췄다. 장: 아, 그건 한국영화가 아니니까 아직 이뤄진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웃음)
함께 호흡을 맞추는 건 어땠나? 장: 일단 소지섭 씨는 중국어 대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거다. (웃음) 영화에서 상반신 육체가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덕분에 아름다운 근육을 봤다. 아쉽게도 여명 씨는 근육을 보여줄 기회가 없더라. (웃음)
혹시 여명 씨는 함께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할 만큼 인상적인 한국 여배우가 있나? 여: 항상 이런 질문 받을 때마다 화제를 바꿔보고 싶다. (웃음) 어떤 남자배우가 어떤 여자배우와 일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단지 하루 동안의 뉴스 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영화사가 아시아의 모든 배우들을 캐스팅할 역량이 되고 그 영화에 투자할 수 있는 생각이 있으며 최소한 10편까지 찍을 수 있는 시리즈를 기획할 수 있다면 일년에 오직 그 영화 한 편만 나와도 될 것 같다. (웃음)
매란방을 연기하면서 직접 화장을 하기도 했는데 배우로서 화장하는 게 어색한 일은 아니었을 거 같다. 여: 연기할 때도 화장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다만 <매란방>에선 화장도 준비의 일종으로서 하나의 예술 안에 포함되는 행위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단순히 일상적인 화장과 비교할 순 없는 거 같다.
<매란방>에서 원화는 백부로부터 무대를 떠나라는 유언을 얻는다. 하지만 결국 배우의 길을 걷는다. 본인들도 배우로 살아가면서 얻는 자부심도 있지만 그만큼의 난관도 느낄 것 같다. 배우로서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장: 일단 배우로서 살아가면서 얻는 장점이 단점보단 많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그만큼 사회가 주는 책임감을 받아들이면서 생활을 한다. 다만 사생활에서 많은 제약이 있고, 가끔 미디어에서 기사를 팔기 위해서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한다. 그럴 땐 힘들지만 그런 작은 문제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이 일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배우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가거나 연기를 하면서 그걸 표현해내는 과정은 굉장히 행복한 일이다.
“자신의 연기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는 매란방의 대사가 배우로서 의미심장하지 않던가? 그리고 연예인으로서 ‘종이족쇄’를 차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때가 있나?
여: 예술가는 누군가가 사랑을 얻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점유하게 되면 그것도 결국 불행이 될 수 있다. 맹소동이 매란방을 떠나가는 것도 정답인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감히 매란방의 선택을 대신할 순 없다. 다만 나 역시도 사랑보다 일을 선택하게 될 것 같다. 나 역시도 연예인으로서 감내해야 할 운명적인 아픔이 있다. 장: 많은 사람들은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가지만 누구나 자신의 일 가운데서 결정해야 할 문제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나 역시도 어떤 실제적 경험이 영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때때로 영화 속 감정이 현실의 감정과 충돌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여: 요즘 장쯔이 씨한테 ‘종이 족쇄’가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풀린 거 같다. (웃음) 나도 예전에 우리 집 커튼 사이로 사생활을 찍어가는 이들을 대면하곤 했다. 가끔 파파라치들 떄문에 속도 위반을 하면서도 피해야 할 때도 있고. 이런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감내해야 하는 측면이 없진 않다.
만약 자식이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겠나? 장: 만약에 내가 낳은 자식이 배우가 되느냐, 안 되느냐, 라는 문제는 그 아이가 선택할 일이다. 만약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엄마로서 배우를 하며 겪게 됐던 좋지 못했던 경험까지 다 가르쳐주고 싶다. 여: 난 스무 살 때부터 서른 다섯 살까진 자식이 생기면 죽어도 배우는 못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우리 집안엔 다시 나 같은 배우가 나올 수 없을 테니까. (웃음) 만약 자식이 생긴다면 아들보단 딸을 갖고 싶다.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로서 너무 많은 기대를 할 거 같다. 그런데 그 아들이 내가 기대하는 바에 미치지 못하면 기분이 좋지 않겠지. 하지만 딸이라면 내가 충족시켜야 할 기대가 많지 않을까. 딸은 내게 있어서 성공적인 걸 보여주지 못해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다. 혹시나 아들이 연예계 계통에 있다면 절대 얼굴이 알려지는 일은 못하게 할 거라 결심했다. 예를 들어 프로듀서라던가, 그러니까 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게끔 할 거다. 물론 이건 다 내 생각에 불과하고, 정말 그런 상황이 왔을 땐 운명에 따르게 될 거다. 다만 나는 훌륭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지금부터 엄격한 가치관을 갖고 있을 뿐이다. (웃음)
최근 홍콩영화가 많이 침체됐다. 여: 예전엔 분명 홍콩영화가 좋았던 시절이 있었고, 잘되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 만약 냉기라면 분명히 다음엔 더 좋아지는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주식도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가 있는 것처럼 모든 일엔 기복이 있다. 관객들은 항상 새롭고 자극적인 뉴스를 원한다. 영화도 그런 면에서 관객들을 자극시킬 수 있고 새롭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성장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중국영화는 검열이 심해서 표현의 제약이 많은 게 사실이다. 장: 듣기로는 한국도 옛날엔 영화를 찍거나 상영하는 데 있어서 많은 제약이 있었다고 들었다. 심의도 거쳐야 되고, 절대 보여질 수 없는 부분도 있고. 그런데 이젠 등급제도 정착되고 관객들이 많은 영화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들었다. 중국 영화는 아직 심의 제한이 있어서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예전에 심의가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에서 <올드보이>의 혀가 잘리는 모습과 같이 폭력적인 묘사를 담은 영화가 상영될 수 있었을까? 지금이기 때문에 그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영화는 인간의 심정을 눈으로 보는 표현의 문화다. 중국도 점점 올라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소재를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면 더 많은 관객들이 중국영화를 선택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대작들이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여: 시간에 따라서 모든 변화가 이뤄진다. 할리우드는 뭔가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면 <트랜스포머>같이. 하지만 아시아인들은 뭔가를 생각해도 실질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창의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너무 비슷한 소재만 나올 수 밖에 없는 것도 그런 환경의 제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란 새로운 것을 창작해나가는 일인만큼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인재를 통해 공간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난 배우로서 연기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순 없겠지만 영화를 만드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노력에 동참하고 싶다.
<매란방>에서도 보이듯 자본과 예술은 어느 정도 필연성이 있다. 여: 좋은 예술이 나오려면 돈 많고 용감한 사람이 투자해야 한다. (웃음) 게다가 지금처럼 영화계 시장이 좋지 않을 땐 투자자들이 잘 선택해서 투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내가 한 발자국 나가야 할지, 물러서야 할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마 다른 전세계 영화시장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영화를 더 잘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관객들은 어차피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그 숙제는 우리가 풀어가야 한다. 전세계 어디에나 예술가는 존재하고 그들은 자신의 길에서 노력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공헌하고 있다. 그리고 난 <매란방>을 통해 어떤 어려움이 있고 힘들다 해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겨나가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사진기자가 판곤과 비슷한 제스처를 주문하니 완강하게 거절하더라. 그 인물을 지금 느닷없이 하라면 안돼. 인물을 잡은 상태에서 시작했다면 아무리 지치더라도 갈 수 있는데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는 갑자기 들어갈 수 없지.
아무래도 인물에 몰입하기 위한 충분한 과정이 필요하니까.
그런 것도 있고,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느닷없이 그게 되는 게 아닌 거지. 그리고 사실 지금 들어가고 싶지도 않아. 영화 끝났는데 왜 그 인물을 다시 경험해. 지옥인데.
판곤은 완전한 악인이다. 그 악랄함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부담이 많았지. 일단 범인을 미화하는 영화들이 많잖아. 멋있게 포장한다거나, 반역설적인 비장미를 풍기기도 하고, 최소한의 자기 합리성을 부여하기도 하지. 이를테면 <비상구는 없다>는 남창을 하다가 성불구가 된 남자가 성적으로 방탕한 여자들을 응징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런 경우엔 내적 동기라도 있잖아. 그런데 <실종>은 그런 걸 다 없애고 무시하는 거지. 처음 대본엔 약간이나마 과거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 사람이 이래서 저렇게 됐구나, 라는 느낌을 줄 수 있었지. 그런데 다 걷어냈어. 그냥 날것으로 들이밀자고.
상당히 불쾌한 캐릭터였다. 연기하는 당사자에 대한 이미지가 걱정될 정도로.
결국 그 부담은 배우한테 오는 거지. 이렇게 해도 될까, 생각하기 마련이잖아. 그래도 내가 그 동안 참 다양한 역할을 해온 만큼 이제 와서 ‘저 사람 진짜 나쁜 사람 아냐?’라고 느낄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관객에 대한 믿음이랄까. 한번 해보자, 싶더라고.
작년 즈음에 했던 인터뷰에서 판곤이란 역할에 대한 감이 안 잡혀서 불안하다고 했더라.
그랬을 거다. 아마. 초반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내가 고발한 적은 있어도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된 적이 없는데 그 입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할 수 있을까 싶더라. <수>(2007)에서 연기했던 구양원을 다시 떠올려 보기도 했고.
잠깐 <수>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흥행에 실패했지만 연기적으로는 꽤나 인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까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선 연기자로서는 참 만족스럽게 했던 영화였으니까. 처음 가성을 써봤고, 인물을 살아있게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영화가 흥행이 안되니까 그냥 쉽게 넘어가버렸지. 개인적으로 같은 동포이자 민족으로서 최양일이란 인물에 대한 애정도 있었다. <피와 뼈>를 보면 참담하잖아. 양석일이라는 재일동포 작가가 쓴 소설이 원작인데 양씨는 제주도 성씨야. 원래 제주도 인구가 30만 명이었는데 ‘4.3항쟁’당시 6만 명이 죽었지. 그 때 좌우에서 죄다 죽이니까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도 많이 했거든. 그래서 다 어디로 갔겠어. 일본 하부로 밀려들어간 거지. 야쿠자 행동대원 중에 제주도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잖아. 그런데 최양일 그 양반이 ‘4.3항쟁’을 영화로 꼭 찍어보고 싶다는 거야.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4.3항쟁’이 80년대 광주나 똑같거든. 그런데 <수>가 웬만큼 됐어야 그것도 가능한 거지. 게다가 일본과 한국의 영화 현장은 경우가 달라서 어려운 점도 있고.
아무래도 악인을 연기할 때 임팩트가 크다. 예전에도 악인을 연기한 적은 없지 않았지만 <수>의 구양원은 악인이라는 본질 자체에 대한 세계관을 스스로 구축한 상태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지식인을 많이 연기했는데 사실 지식인을 연기하는 건 쉽다. 다들 비슷하니까 조금씩만 바꾸면 돼. 조금 비굴해지거나, 조금 더 섹스를 밝히면 된다. 별 거 아니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수>를 하면서 느꼈던 건 악인은 굉장히 어렵더라는 거다. 왜 악한지를 모르니까. 난 악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난 싸움도 안 하는데 내가 왜 사람을 죽여. 난 논쟁도 싫어하고 싸움도 싫어한다. 중학교 때 이후로 여태까지 싸움이란 걸 해본 적이 없어. 그런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접근이 잘 안 되니까 이래선 안 되겠다 싶더라. 이 인간을 관통하는 게 뭘까 생각했다. 구양원은 자기 조직원에 대해서는 의사 가족주의로 가족애처럼 같이 간다. 그런데 그 바깥에 대해서만큼은 굉장히 깊은 적개심을 갖는 거지. 까닭 없는 적개심을 갖고 해보면 되겠다 싶었지. 그리고 이미 배태곤(<초록물고기>)을 통해 내적으로 충분히 합리적인 적개심을 갖는 방식을 경험했기 때문에 적개심을 가지고 캐릭터를 들여다보는 건 어렵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이 한없이 잔인해지더라. 그래서 그때 덕분에 굉장히 즐겁게 영화를 찍었다. 만족스러웠지. 그걸 <실종>에서도 다시 한번 적용시켜보려 했지.
판곤을 연기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이 있었을 텐데.
판곤은 싸이코패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 굉장히 큰 정신적 충격이나 사건이 있었던 거야. 자기가 아버지를 돼지 우리에 밀어 떨어뜨려서 뇌진탕으로 죽었다는데 그게 얼마나 아프겠어. 살의를 가졌던 건 아니지만 아버지를 죽였으니까. 그래서 엄마랑 옆에서 울다가 시체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냥 무서워서 떠났을 거 아냐. 그런데 다음 날 가보니까 돼지가 시체를 뜯어먹은 거야. 그리고 마음에 엄청난 비밀이 남는 거지. 그런데 이제 그 고통을 어떻게 감내해. 자기 합리화인 거지.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했으니까, 등등.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이미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은 없어지고 나밖에 안 남는 거지. 난 괜찮은 놈인데, 똑똑한 놈인데, 예술가인데, 자신만의 나르시스만 보면서 자신만의 기준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니까 윤리나 도덕, 규율이고 뭐고 없고, 가족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이 나밖에 없는 자. 이걸로 키를 잡고 대본을 들여다 보니까 그대로 관통이 되는 느낌이더라. 그래서 그걸 핵심으로 삼고 들어가서 디테일을 붙였다.
구양원이 자신의 상황을 통해서 악인으로서의 운명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판곤은 그냥 무의식 중에 자신의 악행 자체를 합리화시켜버리는 질환적 인물이다. 판곤은 그 심성 자체를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운 역할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런데 키를 잡고 들어가면 어렵지 않다. 사실 연기할 때 디테일을 많이 찾아서 구축하고 캐릭터를 만들면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그런데 이건 다 필요 없는 거야. 다 필요 없고 오로지 나밖에 없어. 모든 걸 다 무시한다는 방식으로 키를 잡으면 그냥 들어가게 된다. 그런 다음에 상황에 던져지는 거지. 상황에 던져지면 그냥 그 때부터 그 자체로 살면 되는 거고.
그럼 촬영이 시작되면서부터 그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었던 건가.
처음부터 키를 잡았고, 이렇게 가면 된다는 걸 알았던 거지. 그래서 대본을 충분히 숙지하고 갈 수 있었다. 물론 찍는 도중에 좀 더 디테일을 붙이면서 간 건 있다. 장면 속 상황에 직접 들어가면 대본에 쓰여져 있는 것보다 훨씬 디테일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 예를 들면 분쇄기 앞에서, “통째로 가는 건 처음인데, 기계가 괜찮을라나.” 이 대사는 내가 현장에서 하자고 한 거다. 그런 느낌이 드는 거야. 개 장수에게, 내가 목숨을 끊을 테니까 시체만 같이 옮기자고 협상한 뒤 도끼나 톱을 챙기잖아. 그 전까진 그렇게 쪼개서 갈아왔다는 이야기지. 그런데 이 경우는 그럴 시간이 없었던 거야. 언니가 자꾸 찾아오고 불안하니까 일단 묶어서 입만 막고 분쇄기에 넣어둔 거지. 그런데 그 여자를 다시 꺼내기 귀찮은 거지. 무거우니까. 그래서 그냥 갈기로 한 거야. 그런데 이 기계가 괜찮을까, 그런 걱정이 되더라니까! (웃음)
그 끔찍한 대사의 출처가 본인이었단 말인가. (웃음)
내가 감독한테 이렇게 하자고 그랬지. 그랬더니 “(머리를 감싸면서)우리 괜찮을까요, 이렇게 찍어서? (옆을 보면서)이거 정말 괜찮은 거냐?” 하더라. 그런데 연출부 애들한테 물어보면 걔네들이 말을 하겠어. 결국 하세요, 하고 이렇게 한 거지. (웃음)
마치 판곤과 대화하는 것 같다. (웃음) 결국 그 살인마의 입장에서 모든 상황을 생각하게 될 정도로 그 역할에 몰입했다는 것처럼 들린다. 바깥에서 볼 땐 살인마지만 내 입장에서는 살인마가 아닌 거지. 사람을 죽이기는 하는데 죄의식이 없잖아. 판곤인 나는 즐겁게 살자고 동생을 잘 잡아놨는데 언니가 나타났으니 언니 잘못이지. (웃음) 그래서 나중에 네 탓이라고 하잖아. 너 때문에 동생이 죽은 거라고. 이빨은 다 뽑아놓고. (웃음)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잖아. 논리는 정확한 거지.
그런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연기하고 나면 배우 본연에게도 어떤 영향력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드는데.
어떤 영향?
그런 캐릭터의 정신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어쩌면 개인적으로 심리적인 손상을 감내하는 행위가 아닐까.
이런 정도의 인물을 연기했을 때 오히려 상처가 남을 거 같진 않다. 쉽게 말해서 흉물인데, 워낙 나와 다른 사람이고, 참 드문 사람이잖아. 도리어 난 <경마장 가는 길>이나 <오! 수정>같은 영화에서의 연기가 배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은주가 했던 <주홍글씨>같은 경우는 상처가 될 수 있는 거지. 더군다나 은주는 어렸으니까. 그런 연기를 자주 하다 보면 평상시에도 그런 비슷한 감정에 쉽게 이입돼버리기도 하고.
오히려 본래 자신과 캐릭터 사이의 격차가 클 때 오히려 캐릭터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맞다. 그리고 사실 나는 <실종>같은 영화를 별로 보지 않았다. 김성홍 감독이 <쏘우>라는 영화를 봤냐고 했는데 본 적이 없었다. <올가미>나 <손톱>은 봤지. 그건 국내 영화였고 그 당시 한국영화는 서로 다 봐줄 때였으니까. <양들의 침묵>은 워낙 유명하니까 봤고. 그런데 <쏘우>라는 영화는 처음 들었어. 솔직히 관심이 없었지. 그래서 그걸 찾아봤는데 그냥 '공포 영화는 저렇구나'라고 생각했다. 다만 판곤을 연기하는데 있어서 참고 삼을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 어떻게 맥을 잡고 나니까 더 이상 연구가 필요 없더라. 그냥 하면 되는데 뭘 자꾸 연구해. 공포스럽게 찍는 건 감독의 몫이고, 나는 그냥 판곤만 하면 되니까.
혹시 캐릭터에 대한 의견 충돌은 없었나?
배우가 그 인물로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면 감독은 알아서 구성을 이끌고 가는 거다. 전적으로 감독을 신뢰하고 가야 한다. 경험으로 봐서 촬영 중간에 감독하고 의견이 달라져서 충돌하는 경우는 대개 감독이 옳아. 배우는 자기 인물 관점에서만 보지만 감독은 여러 인물을 충돌시켜서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훨씬 더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든. 처음 대본을 받고 이에 관한 토론을 하는 과정은 얼마든지 길어도 상관없고, 토론을 좋아하는 감독도 많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그 대본대로 찍겠다고 한 다음엔 전적으로 믿는 게 맞다. 괜히 중간에 끼어봐야 망가진다. 막상 한 4~5회 들어가보고 나서야 ‘아차’ 싶을 때도 있지만 그땐 이미 늦은 일이다. 그땐 교정하려고 해도 이미 관성이 붙어서 가니까 교정되지 않는다. 대본 논의 과정에서 충실히 손봐야지, 나중에 다툰다고 될 일이 아니다.
8년 간 직장 생활을 하다가 회사를 그만 두고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다. 원래 연기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뒤늦게 연기에 대한 청운을 품게 된 건지 궁금하다. 갈망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오페라 연출가 문호근 씨가 큰 형인데 대학교 때 연극을 했었다. 오태석, 정화연 교수나 음악원 이건용 교수 같은 분들과 연극을 하면서 많이 돌아다녔었지. 지금 은행을 다니는 작은 형도 대학교 때 연극을 했다. 내가 중학교 시절부터 그런 걸 보고 컸으니까 난 당연히 대학 가면 그냥 연극하는 줄 알았지. 그래서 대학가서 연극반을 찾았고 1학년 때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영어로 공연했다. 그랬더니 선배들이 배우 하나 들어왔다고 하더라. 사실 이게 꼬드기는 말이었는데 난 낚싯밥인지도 모르고 한때는 내가 정말 잘해서 그러는 줄 알고 연극을 띄엄띄엄 하게 된 거다.
연기를 전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진 못했나.
일단 돈이 없으니까 연극으로 살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었지. 그래서 취직을 했는데 5~6년 정도 회사에서 지내다 보니까 도저히 못 다니겠더라. 내 인생이 망하더라도 부속품으로 마모되지 말고 내가 좀 결정하고 살자, 그래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가서 할 일이 연극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무역회사를 다니다가 그 조직체가 싫어서 떠나 나왔으면 무역은 수출입에 관계하는 에이전트가 많으니까 독립해서 살았을지도 모르겠는데 난 건설회사에 있었기 때문에 뭐가 있겠어. 연극 밖에 할 게 없는 거지.
하지만 연극과 발이 닿을만한 거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나.
회사 다니면서 연우무대 공연은 띄엄띄엄이라도 다 가서 봤다. 다만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었고, 지금 여의도에서 치과 의사하는 오종우 씨라는 분이 연우무대 창립멤버였는데 표를 팔아달라고 나한테 맡겼던 거다. 큰 형 친구였거든. 20장씩 맡기는데 그게 어디 팔리나. 그래서 결국 회사 친구들 공짜로 보여주기도 하면서 계속 내 돈 내고 20장씩 사준 셈이지. 그 중에 나는 한 장만 쓰는 거고. 그렇게 공연을 쭉 봤다. 그때 무대에 서 있는 박광수도 보게 됐지. 그래서 회사를 나간 뒤 연우무대로 간 거야.
사회 생활을 거친 뒤 연기자로 거듭난 셈인데 그런 과정이 배우로서 사는데 있어서 플러스가 되거나 마이너스가 된 지점이 있나.
굉장히 도움이 안 됐지. 그나마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는 건 내가 연우무대에서 극단 살림이나 기획에 관여를 많이 했는데 그건 그런 경험이 나 밖에 없었으니까. 극단에 파일이 없어. 문서 정리가 안돼있더라. 그런 사무적인 정리에선 도움이 됐지만 조직 생활을 오래 한다는 건 그만큼 눈치를 보게 된다는 거라 배우로서의 인생과 상당히 멀어져 있었던 거지.
필모그래피가 한국영화계의 변천사를 대변하는 느낌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사이 영화계의 변화가 보인다. 스스로도 많은 변화를 느낄 것 같다. 과거부터 생각해보자면, 87년까진 검열이 무지하게 셌다. 내가 그때부터 영화를 하진 않았지만 영화를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들었지. (안)성기 형 이야기를 들어보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같은 경우는 거의 난도질을 당했다 하더라. 그래서 그 이원세 감독은 그 영화 찍고 나서 이민가버렸다. 그 이후로도 금방 완화된 건 아니다. <그들도 우리처럼>(1989)에서 연기한 김기영은 노동운동을 하는 인물인데 광주에서 시위하는 자료화면을 넣었더니 검열에서 들어내라고 그랬다. 그래서 서울시 뒷골목에서 도심불명의 형태로 바꿔서 끼워 넣었지. 그때까지도 검열이 있었단 이야기다. 그래서 박광수 감독이 말하기를 <칠수와 만수>(1988)는 일부로 88올림픽 직전에 검열 넣었다 한다.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는데 검열문제로 신문에 보도되면 국제적 망신이니까, 그 시점에 넣어야 좀 덜할 거라 예상했다지.
90년부터 영화에 출연했다. 그 당시엔 완화되던 시점 아니었나.
90년 문민정부 이후부터 검열이 거의 없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실질적으로 완화됐다고 봐야지. 88년부터 90년 사이에 <그들도 우리처럼>이나 <성공시대>처럼(1988) 사회적 발언을 담은 영화가 만들어진 것도 그런 배경이 됐다. 90년대 초에 나를 캐스팅한 감독들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면 나는 7~80년대 억압구조를 경험해본 사람이니까.
상업적 감각을 지닌 영화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메시지 중심이 아니라 오락 중심으로 비중이 변해가는 시점이라 말할 수 있겠지. 그런 분위기에서 로맨틱코미디의 새로운 신호탄이라 할 수 있는 <결혼이야기>(1992)도 나온 거다. 그 영화는 철저하게 시장조사를 하고 찍었다.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그게 성적인 소재를 다룬 스토리라면 누가 연기해야 좋을지, 그런 분위기에서 최민수와 심혜진이 결정된 거지. 주문 생산했다는 의미인데 그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히트를 쳤다는 것도, 그만큼 사회가 연성화된 덕분이겠지.
2000년대 들어서 정책적 발언대에 서게 된 뒤로부터 몇 년간 출연이 뜸했다.
나는 원래 99년도 스크린쿼터 투쟁 당시 개입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거기에 엉켜 들면 일이 안되니까. 난 배우로 살자고 노력했고, 순수하게 연기자 심성을 갖고 싶었거든. 그런데 우연찮게 직접 개입해버리는 계기가 생겼지. 스크린쿼터 1차 투쟁에서 그 문제를 들고 방송에 출연하는 영화계 인사들이 이야기하는 거나 언론에서 얘기하는 게 저렇게 얘기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소위 우린 약하니까, 란 식의 이야긴데 나쁘게 말하자면 앵벌이를 하는 셈이었지. 물론 실제로 한국영화가 약했던 건 사실이었다. 다만 그러니까 할리우드에 어떻게 대항합니까, 이런 식의 얘기들 밖에 없었던 거지. 그런데 난 무역학과 출신이다. 내 생각에 이건 수출입의 문제고 독과점의 문제로 보였다. 그래서 글을 써야겠다 생각을 한 거야. 그런데 내가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다가 쓰려니까 굉장히 오래 걸리더라. 한 일주일 걸렸나. 워드로 쳐서 프린트한 걸 외출하면서 이창동한테 갖다 줬다. 가까운 일산에 살았거든. (웃음) 그렇게 나갔다 와서 밤에 전화해보니까 다 썼다 그러는 거야. 그런데 가서 보니까 너무 잘 써버렸어. (웃음) 물론 내 문체를 가급적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내 문장은 많이 살아있었지만 중간에 몇 가지 사례를 넣었는데 너무 유려해진 거야. 그래서 “내가 이걸 썼다고 하면 누가 믿냐. 못 내겠다” 그랬더니 짐짓 화를 내더라고. 하루 종일 머리 빠개지게 일 시켜놓고 안 낸다고. (웃음) 그래서 결국 보냈지.
‘씨네21’에 기고했던 글 말인가?
그때 지면편집이 다 끝난 상태라서 뒤에 있는 독자란에 깨알 같은 글씨로 넣게 됐지. 그걸 보고 영화계에서 전부 놀란 거야. 이거 말 되는 논리다. 그래서 동화면세점 앞에서 시위할 때 나보고 연단에 올라가서 얘기하라니까 그걸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했지. 그랬더니 언론에서 벌떼같이 달려든 거야. TV카메라 오고, 거기서부터 말린 거지. (웃음)
당시 발언을 주도하는 이들이 있었을 텐데. 87년에 ‘4.13 호헌조치’라는 게 있었다. 당시 국민들은 직선제개헌을 요구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5공 헌법대로 다음 대통령을 뽑겠다고 강행한 거지. 그때 정지영 감독의 주동으로 영화계가 반대성명을 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정지영 감독이 영화계 일을 쭉 맡아서 했지. 직배반대도 그랬고. 그런데 99년에 느닷없이 내가 거기에 개입되기 시작한 거다. 이창동도, 영상원 교수 심광현도 그 당시 새 멤버였지. 김혜준 사무국장, 양기완 사무처장, 정지영 감독이 원래 있던 멤버들이고. 그 멤버 중심으로 쿼터 투쟁을 했다.
결국 영진위 부위원장까지 맡게 됐다.
2000년에 영화진흥법이 개정돼서 영화진흥원에서 영화진흥위원회로 조직이 개편되는데 정지영 감독이 때려죽여도 위원장을 하지 않겠다는 거야. 연배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 양반이 그 때 위원장을 해야 될 것 같은데 안 한다니까 그 다음 세대로 바통이 넘어왔고 그럼 내가 맡아야 된다는 거야. 그런데 나는 위원장을 하면 안 돼지. 어리니까. 그렇게 부위원장이 된 건데, 막상 그 당시엔 부위원장을 내가 한다고 확실히 약속된 건 또 아니었거든. 조직개편을 앞두고 백지상태라서 어떻게 될진 모르는 거니까. 그때 원래 이런 저런 영화를 해보자는 제의가 있었는데 내가 영진위 들어가게 되면 그걸 어떻게 하겠어. 당시 보수적인 분들, 중도적인 분들, 개혁적인 분들이 막 섞여있어서 충돌이 생기고 그러는 판국이니 이거부터 어떻게 해보자 싶더라.
노사모에 가입한 뒤,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가 있었다.
노사모와의 관계가 2002년 3월 즈음에 시작해서 그 해 말까지 계속됐는데 그때가 영화를 완전히 할 수 없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관객 입장에서 볼 땐 순수한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린 거지. 영화배우면서 <그것이 알고 싶다>로 인해 강한 인상이 있었던 가운데 참여가 이뤄졌으니까, 상업배우로서의 가치가 확 떨어진 거다. 그러면서 그때 2년 정도 영화를 못했지. 그 다음부턴 내가 대본을 고르는 입장이 아니라 웬만하면 하는 입장으로 변한 거고. 90년대 후반으로 들어가면서 영화 성향이 바뀌기 시작하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난 그 당시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 같다. 그러니까 여전히 메시지가 강한 영화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러니까 영화의 흐름이 달라진 거다. 그런 가운데 영진위나 쿼터 문제부터 말려들기 시작했고.
그래도 9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배우 중에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배우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 때는 배우가 많지 않았으니까. 90년대 초 중반에 활동을 시작한 남녀배우를 다 합쳐도 열명 이내나 될까. 최민수, 이경영, 강수연, 심혜진, 아무튼 생각해보면 그다지 많지 않았어. 이를 테면 이런 배우들이 캐스팅 되야 영화가 투자된다고 말할 수 있었던 배우들이 열명 안짝이었지.
90년대 당시에도 한국영화제작편수는 활발했지만 점유율은 높지 않았다.
스크린 쿼터 감시단은 90년대 초에 만들어졌는데 그 당시는 직배가 이뤄지면서 한국영화계도 궤멸 상태에 빠졌던 시기였다. 그전까진 외화를 30편만 수입하고, 스크린쿼터 146일이 있었지만 외화 30편은 걸면 무조건 대박이 났다. 한국영화는 쿼터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서 편수가 대충 채워졌지만 점유율이 현저하게 떨어졌지. 극장이 직접 당일 날 한국영화 상영작을 구청에 신고했는데 신고만 하고 실제론 외국영화 틀고 그랬다. 직배가 정확히 몇 년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88년 시작- 직배 후에 한국영화 점유율이 14%까지 떨어졌던 적도 있다. 스크린쿼터 감시단을 만든 건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투쟁한 셈인 거지.
당시 쿼터 투쟁에 대해서 반발하는 여론도 형성됐다. 어쩌면 투쟁을 통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 아니었을까. 당시 서울극장의 곽정환 회장은 원래 데모를 싫어할 만한 양반인데도 쿼터 투쟁을 독촉할 정도였다. “너희들 데모 열심히 해라. 다만 서울극장에 돌만 던지지 마라.” 그랬으니까. 그리고 <쉬리>가 잘된 것도 쿼터 투쟁의 결과라고 말씀해주셨다. <쉬리>가 완성도 있는 오락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당시는 할리우드 직배사들이 죽겠다고 토로하던 시기였다. 마케팅에 돈을 쏟아 부어도 관객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다. 다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쿼터 투쟁의 결과라고 본다. 쿼터 사수 시작 당시 쿼터 지지율이 3:7정도로 불리했다. 그런데 두 달 정도 투쟁을 하니까 6:4로 역전됐다.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기운 거다. 할리우드가 지나친 압박을 하고 있고 이렇게 한국영화가 궤멸될 수 있다는 논리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진 거야.
결국 쿼터 투쟁이 단순히 스크린 쿼터 사수에 국한된 결과물이 아니란 소리다.
99년에 한국영화 점유율이 24%까지 가 있던 상태였다. 쿼터 투쟁 이후, 영진위가 조직됐고 이를 통해 정부지원이 들어왔다. 그리고 영진위가 투자조합을 만들어서 투자재원도 마련했고, 쿼터까지 단단히 박혔다. 그때부터 국내영화 산업이 확 커지기 시작한 거지. 동시에 능력 있고 상업적인 감각이 있는 감독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한국영화를 걸면 막 터지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들이 존재했던 거지.
그런 시기에 오히려 자신은 영화배우로서 작품을 하지 못했다.
한국영화들이 되는 시점에서 나는 영진위로 말리고, 노사모로 말렸지. (웃음) 물론 말린다는 말은 그냥 그렇다는 말이고, 지난 <무릎팍도사>에서도 얘기했듯이 난 길게 생각하고 결정한 사안이었다. 상업영화 배우로서 망하는 길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들어갔다.
배우나 연예인의 공적인 코멘트는 때때로 표적이 되기 쉽다. 그런 걸 스스로 그런 바를 몰랐을 것 같진 않다.
분명 깊게 고민했던 사안이었다. 상업배우로서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란 걸 알고 시작했지만 정말 굉장히 심각했다. 사실 내가 노사모를 주도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실질적으로 캠프회의에 간 적도 없었고, 그냥 강연만 다녔다. 조직 운영은 명계남 씨가 주도했지. 그 양반이 정말 잘 했거든. 다만 내 강연 장면이 담긴 <노무현의 눈물>동영상이 인터넷 사상 최대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렇게 인식된 바가 없지 않다. 아마 그 당시 150만 클릭이었는데 그게 퍼서 옮겨지는 것까지 염두에 두려면 클릭수에 곱하기 4를 해야 얼추 맞아떨어진다고 하더라. 결국 6백만 클릭이 있었던 셈이다. 그때 안약을 넣었다느니, 이런 식의 공격까지 당했던 게 그 동영상을 찾아서 확인하려는 사람이 늘었던 이유 중 하나다. 게다가 뉴스까지 나왔으니까. 심대한 타격을 얻을 거라 생각했는데 치명적이었지. (웃음) 90년대 말에서 2000년 이후부터 활동이 줄고 작품 성향이 바뀌게 된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재물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고 정말 정치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나?
나는 연기자로서 여러 번 말했다. 나는 배우다. 내 직업은 배우이고 그 직업을 정치인이나 행정가로 바꿀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된다 해도 그에 따른 어떤 혜택도 받지 않겠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자마자 연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고. 정치분야와 관련된 사람들은 국민들에게 심하게 욕을 먹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정치는 아수라장이잖아. 다만 아수라장에서 아수라처럼 노는 사람도 있는 반면 아닌 사람도 있는 거지.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행위 자체는 대단히 이성적인 행위거든. 다만 한국의 짧은 민주주의 발전 역사에서 그런 행위를 온전히 납득시키는 건 아직 쉽지 않다.
결국 2000년대 초반에 배우로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제도적인 면도 그렇지만 영화 현장에서의 변화가 큰 시기이기도 했다. 그 공백으로 인한 영향력이 있었나?
노사모 활동 직전인 2002년 3월에 촬영이 끝난 <질투는 나의 힘>(2003)이후로 1년 반 정도 현장에 갈 일이 없었지. 결국 <오로라 공주>(2005)현장에서 예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심성이 완전히 변한 거야. 난 그냥 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연기자 심성이 아니더라. 기타 줄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느낌 있잖아. 배우는 몸이 악기인데 내 줄이 다 끊어졌다는 걸 느낀 거야. 어마어마하게 당황했지. 이게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몰랐지.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까. 결국 <오로라 공주> 끝날 때까지 발버둥을 치다가 <한반도>들어갈 때쯤 다시 배우가 되더라. 사실 얼마 전에 방은진이 만나서 미안하다고 그랬어. 내가 진짜 그렇게 연기자 심성이 날아갔을 줄 몰라서 자신 있게 하겠다고 그랬던 건데 찍다 보니까 아니더라고. 그런데 그때는 내가 너한테 말을 못했고, 그게 미안했다고. 지금 와서 다 끝났으니까 얘기하는 거지만 진짜 그때 죽는 줄 알았다, 그랬지.
고작 몇 년 정도의 공백은 극복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을 거다.
그랬을 거야. 연기에 대해서 끝없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어쨌든 <오로라 공주>를 지나면서 다시 배우로서 회복을 했단 말이야. 그게 참여정부 중반 즈음이었는데, 그 당시 참여정부를 둘러싼 논란이 무지하게 많았잖아. 참여정부 씹기가 마치 국민 스포츠처럼 돼 버렸고. 그러니까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고, 한편으로 화도 나는 등등, 그러다 보니 내가 없어지자 싶더라. 그 뒤로 5년 동안 정치발언은 하나도 안 했다. 뭐라고 말해도 논란이 되거나 씹힐 수 밖에 없어졌기 때문에, 아예 칩거를 해버리듯 산에만 다녔던 거지. 그러다가 참여정부가 끝나면서 해방감 같은 게 생기더라. 산에 다니면서 느낀 게 많았다. 연기를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건 당연한 건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압박을 받아왔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하면서 느낀 사회적 책임도 있었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마음이 변치 않더라도 압박을 털어내야 연기가 잘 된다는 걸, 성취도가 높아진다는 걸 늦게 깨달은 거다.
아무래도 연기자로서의 삶보다도 공적인 발언과 참여자로서의 전사를 묻는 질문들이 많아졌다. 그런 질문들에 답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나?
참여정부나 MB정부에 대한 평가라던가, 그런 건 할 생각이 없지만 내가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감출 필요가 없다. 물어보는 대로 다 이야기할 수 있지.
온전히 배우로서 평가되기란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
글쎄. 솔직히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선거 국면 때 내가 공개적으로 약속했던 건 지켰다. 그 당시 아무도 안 믿었을지 모르지만 5년이 지나야 입증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5년이 지난 지금은 입증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난 시민의 정치 참여가 의무라고 생각에 전혀 변함이 없다. 어찌됐건 약속을 지켰고 열심히 내 본업을 하고 있으니까 이제 나를 배우로 봐준다면 참 고맙겠다. 물론 없어지진 않겠지. 그건 내가 살아온 생이니까. 어느 정도 세월은 걸릴 거다. 그러나 적어도 스스로 약속을 지켰다 생각하는 만큼 앞으로 나를 가급적이면 배우라는 이름을 중심으로 봐주신다면 좋겠다. 그런 희망을 갖게 된다.
최근 예년과 달리 스크린이 아니라 브라운관에서도 행보를 거듭하는 건 그런 희망과 무관한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런 욕심이 크지. 결국 연기를 계속해야 된다는 거.
지루하다기 보단 판곤의 행위가 너무 흉악해서 보고 있자니 끔찍한 기분이더라.
죽이는 걸 질질 끄니까 그런 면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감독님도 기자간담회에서 말했잖아. 나는 한 사람을 죽여도 바로 죽이지 않고 질질 끌면서 죽인다고. (웃음)
촬영 기간이 얼마나 됐나?
한달 열흘 정도 찍었나. 10억도 안 되는 예산으로 찍은 영화인만큼 촬영도 빠듯했다.
상업영화로 치면 저예산인데 그만큼 감안해야 할 현장의 열악함이 있었을 것 같다.
예산이 적다는 게 영상으로 드러난다는 건 내 입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다만 배우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있더라. 가령 현장에서 시간적 여유가 없어지는 상황이 생기니까 감독님과 디렉션을 주고받을 만한 여유가 생기지 않았고, 캐릭터를 충분히 잡아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기도 힘들었다. 추가적인 투자까진 바라지 못해도 시간이라도 더 있어서 커트라도 더 살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아서 아쉽다. 사실 요즘은 차라리 홍보비조차 아껴서 영화에 돈을 들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싶은 생각마저 든다. (웃음)
많이 걱정되나 보다.
기대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있잖아. 스케일이나 주연배우의 캐스팅, 감독의 브랜드, 아니면 시나리오가 좋았다는 소문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가 그 기대감에 일조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실종>은 예산 규모에 비해 너무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질 수 있으니까. 물론 내 걱정이 너무 앞서간 것도 있다. 어쩌면 내가 이런 영화를 찍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시나리오가 영화보다 더 세다고 들었다.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이게 스릴러 영화 시나리오구나 싶었다. 솔직히 나는 머리가 꽉 찬 배우는 아니다. (웃음) 아직 내가 시나리오만 보고 영화를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시나리오를 접해본 것도 아니고. 그냥 연기해보면 잘 할 수 있겠다, 이런 단순한 계기를 통해 캐릭터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멋모르기 때문에 항상 그 씬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일 테고.
잔혹한 장면이 많은데 이미지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 지난 번 기자간담회에서 말했지만 스릴러 장르에서의 역할이 여배우에겐 쉬운 기회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스릴러 영화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김성홍 감독님이 나를 찾았다. “자현아,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들 건데 너를 염두에 뒀다. 다만 상황이 조금 힘들지도 모르지만 참여해줬으면 좋겠다.” 열악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로 인한 판단은 없었다. 그저 스릴러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감독님을 신뢰할 수 밖에 없었고, 시나리오가 표현한 장면들이 과연 어떻게 묘사될지를 생각하기 급급했지. 이렇게 잔인한 걸 찍고 나면 이미지는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은 못했다.
육체적인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예산이 없는 환경에서 그냥 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지. (웃음) 몸이 다치거나 그런 건 힘든 일이 아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엔 그런 건 잊어버린다. 촬영하는 동안엔 모른다. 멍이 들어도 아픈 줄 모르고 그냥 맞고 있지. 물론 컷하고 나면 아파서 난리 나지. 그런데 촬영 끝나고 숙소 들어가면 공허함이 굉장히 심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그러면서. 풍족한 상황까진 아니어도 세팅이 되면 충분한 의사소통을 하면서 시간적인 여유도 벌고 좀 더 괜찮게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런 상황이 못됐으니까. 내 스스로 부족함을 너무 많이 느낀 거지. 감독님께서 기자간담회에서 배우들에게 고맙다고 말씀하셨던 건 아마도 그런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힘들어 하지 않고 몸소 열심히 해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였을 것 같다.
대부분의 사건이 미니멀한 한 공간에서 벌어지고 영상적 기교가 최대한 배제된 만큼 배우에게 시선이 집중될 가능성이 큰 영화다. 그만큼 배우의 연기가 중요한 영화이긴 하다.
난 묻어간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겸손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잘한다기 보단, 내가 절반 정도를 만들어 가면 현장의 소품이나 감독님의 연출, 상대배우의 느낌으로 나머지가 채워진다는 말이다. 현장에서 받는 기운으로 내가 그 캐릭터에 묻어가거나 변해갈 수 있다. 그런데 <실종>에선 그럴 수 없었다. 말한 바대로 시선이 갈만한 소품이나 기교가 없는 거다. 그냥 카메라 하나 놓고 그 앞에서 연기하라는 거지. 그 카메라 앞에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서 <미인도>같은 경우엔 가채라도 있었지. 덕분에 이렇게만 해도(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 동작 하나로 느낌이 변한다. 그냥 방안에 앉아있어도 6천만 원짜리 자개병풍이 최고의 기녀라는 포스를 만들어주거든. 그 방안에 세팅된 가구들이 돈으로 3억 5천 원이었다. 그런 백이 있으니까 내가 고개만 살짝 돌리고 조명만 비춰도 특별한 자세가 발생한다. 하지만 <실종>은 정말 그야말로 눈빛만으로 뭔가를 표현해야 되니까 아직 단련되지 않은 나 같은 배우로서는 힘든 작업이었지. 예산이 적다거나 빨리 찍어야 해서 힘들다기 보다는 그만큼 배우가 해야 할 몫이 많아서 부담이 컸다. 그런데 (손가락을 살짝 벌리며) 내 그릇은 요거밖에 안됐던 거지.
문성근 씨가 지독하게 악랄한 연기를 보여줬다. 자극을 얻었을 것 같다.
그나마 내가 의존할 수 있는 장치는 문성근 선배님의 눈빛이었다니까. 다른 데 의존할 것 없이 그 눈빛만 보고 연기했다. 일전의 인터뷰에서 문성근 선배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무서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건 범인으로 변신해서 연기하는 문성근 선배님의 눈빛이 살인마처럼 무섭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단 내 기가 빼앗길 만큼 눈빛이 강렬해서 연기하는 게 무섭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상대에게 짓눌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의미일까.
내가 만약 그냥 당하는 입장이었다면 상관없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만약 뭔가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호흡을 맞춰가는 역할이라면 서로 설정을 맞춰가며 호흡을 나누는데 이건 철저하게 피해자와 범인이니까 연기도 대결처럼 펼쳐진다. 그것도 50대가 넘은 대선배 앞이니까. 게다가 남자 가해자와 맞서는 여자 피해자로서 끝까지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한 기싸움이 힘들더라.
본인이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영화가 무너지는 셈이니까. 문성근 선배님은 그냥 편안하게 계셔도 아우라가 있으신 분이다. 카메라가 돌면 무슨 칼라렌즈라도 끼는 것 같더라. 눈빛이 이상해져. (웃음) 순간적으로 내가 준비되지 않았다 느껴도 앞에서 눈빛이 확 변해버리니까 나도 같이 긴장하게 됐지.
상대배우의 중요성을 확실히 깨닫게 된 영화였을지 모르겠다.
상당히 중요하더라.
<사생결단>의 지영이나 <미인도>의 설화는 겉으로 강한 척하지만 안으로 여리고 쉽게 무너지는 여자였던 것과 달리 <실종>의 현정은 안에서부터 강한 여자다.
요즘 인터뷰를 하면 이런 질문을 받는다. ‘계속 세고 강한 캐릭터를 맡는데 의도한 바냐.’ 마약 중독자나 팜므파탈 기녀, 색깔이 강한 느낌이긴 했다. 하지만 캐릭터 자체가 딱 만들어져 있는 인물이니까 그걸 내 식대로 이리저리 표현해내는 것에 불과했지. <실종>의 현정은 평범한 여자다. 외유내강이지.
현정은 동생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강해지는 여자다.
피가 당기는 친동생이니까 무언가에 끌려가는 거다. 덜덜 떨면서 창고 문을 열어보는 게 아니라 그냥 본능으로 가는 거지. 이런 가족애에 대한 설정을 내가 납득했기 때문에 후반부에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던 거 같다. 만약 동생이 아니라 딸이었다면 더했겠지. 예를 들어 <세븐 데이즈>같은 영화나, 올해 개봉한다는 <마더>처럼 자매가 아니라 부모라면 더 강해졌을 거다.
영화에서는 자매 외에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없다는 추측이 가능한데.
원래 시나리오에 그런 설정이 언급된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어필하고자 노력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관객에게 추측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게 가능할 때 현정의 모성애적인 감정에 확실히 동의할 수 있다. 그만큼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렇게까지 많은 생각을 하면서 연기하는 배우는 아니라. (웃음) 농담이고, 한 씬을 통한 설명 정도로 드러내려 했던 거 같다. 김성홍 감독님은 직접적인 설명을 많이 배제하는 스타일 같다. 예를 들어 홍감독의, ‘그 엄마보다 더 무섭다는 언니?’ 이런 대사 한마디로 넘어가는 식이지. 그리고 부모님 슬하에 있는 자매라면 동생이 늦게 들어오지 않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데, 부모가 없기 때문에 안 들어오면 직접 전화해서 꾸중해야 하는 거고. 그리고 동대문에서 일하는 장면을 통해 억척스럽게 동생을 뒷바라지 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 현아도 자기가 의지할 곳은 언니밖에 없다는 걸 아니까 다툰 뒤에 다시 전화로 사과하면서 애교도 떨고, 언니에 대한 의지가 큰 거지.
반대로 동생을 납치한 범인이 아니라 그냥 납치범이라면 같은 상황이라도 이해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가 동생을 납치하고 죽인 범인한테 다시 납치당하는 언니가 아니라 그냥 납치를 당했다면 그냥 전세홍 씨처럼 공포에 휩싸이는 역할만 납득할 수 있었겠지. 그런데 판곤이 내 동생을 죽인 범인이라 생각하니까 나도 공포보단 분노가 일더라. 저 인간이 나를 어떻게 할까, 이게 아니라 내 동생도 이렇게 당했겠지 싶으니까 미치는 거다. 범인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돌아버리는 거지.
그런 감정은 사실 정말 당해보지 않고선 알 수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런 감정을 납득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 같다. 힘들었던 건 과연 정말 이런 일을 당한 사람들은 어떨까 싶었던 거지. 물론 영화에서는 그 느낌으로 연기하려 했지만 진짜 그런 가족들의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이상 모르잖아. 내가 감히 어떻게 그 심정을 대변할 수 있겠어. 마지막에 감형을 유도하기 위해서 정신병을 주문하는 변호사에게 던지는 대사는 그런 고민에서 나온 거다. 혹시 딸 있냐고.
실질적으로 그 대사의 객체는 관객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감정을 함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한마디가 뭘까, 감독님과 상의한 결과 얻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이 잘 살려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변호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관객에게 던지는 거지. 우리영화에 엔딩은 없다. 영화의 이야기는 마무리됐어도 어딘가 다른 곳에선 똑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심지어 지금 인터뷰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지. 난 그저 스릴러 영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정말 현실적인 비극과 내 주변의 아픔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여러 가지로 자아를 성숙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실제로 흉악한 범죄가 많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실종>은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여자들은 그런 범죄 앞에서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여자로서 느끼는 공감대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공감대까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믿었고, 영화를 찍을 때만 해도 이건 정말 영화니까 가능한 상상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단지 스릴러 영화를 찍은 것 뿐인데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영화가 섬뜩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영화가 돼버렸다. 사실 내가 강호순 사건에 대해선 잘 모른다. 내가 드라마나 예능 프로는 잘 봐도 뉴스는 잘 안 보거든. (웃음) 그래서 큰 사건만 사람들을 접해서 듣곤 하는데 연쇄살인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나서 느낀 건 정말 무섭다는 것보단 살해당한 분들 가족들은 어떡하나 싶은 마음이었다. 어쩌면 <실종>을 찍은 뒤 생긴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그 가족들은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아픔이겠지.
영화에서나 벌어질만한 사건이라 믿었던 일이 현실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더욱 끔찍할 수 있겠다. 어쩌면 영화보다 더 끔찍한 건 현실인 셈이랄까.
예전에 감독님께서 <실종>의 모티브를 말씀해주셨다. 우리나라같이 땅덩이도 좁고 호구 조사도 잘 된 나라에서 몇 년 동안 연락이 안 되는 여자들은 다 어디 있을까, 라는 거다. 거기에서 시작됐다고 하더라. 본의 아니게 연쇄살인사건이 터졌고 우리가 현실에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를 상업적으로 쓰려고 했던 건 아닌 거지. 그래서 감독님께서 그런 부분에 스트레스를 받으셨던 것 같다.
1996년에 데뷔했으니 <사생결단>으로 신인상을 수상했던 2006년은 데뷔한 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김지수 선배님도 <여자, 정혜>로 13년 만에 신인상 받지 않았나? 어쨌든 참, 멀리도 돌아왔다.
배우로서는 꽤나 겸연쩍은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데뷔 10여 년 만에 신인상이라니.
나에게 있어서 상이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이건 겸손도 아니고, 경솔도 아니다. 난 단순히 그 시상식에 참여하는 여배우 중 하나라는 게 좋더라. 왜냐면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머쓱하거나 불편하지 않다고 느껴지니까. 내가 노미네이트 돼서 주목을 받았고, 어쩌다 보니 상까지 받았을 뿐이다. 워스트 드레서라도 내가 레드카펫에 설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 좋았다.
그래도 연기자로서 처음으로 받는 상이었는데. 이런 얘기를 언제 했는지 모르겠지만 또 어디서 말 실수 하느라고 했을 거다. (웃음) 우리나라 시상식이 누가 상을 받고 레드카펫에서 배우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에 주목하는 것보단 영화인의 축제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스탭들도 레드카펫을 밟을 수 있고, 누군가가 상을 받으면 현장에서 함께 했던 팀들이 다 같이 무대에 올라가서 축하도 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 아카데미 시상식의 할리웃 스타들도 누구 하나가 상 받으면 그 팀들이 무대에 나와서 축하해주잖아.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현장에서의 감동이 별로 없는 것 같더라. 그 자리에 있는 게 머쓱한 건 아니었지만 시상식을 끝내고 돌아오니 단순히 그냥 스케줄 하나 끝낸 기분이었다.
그래도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얼마 전 백지영 씨가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말하더라. ‘사랑 안 해’로 다시 주목 받게 됐을 때 스스로 자신이 잘 견뎌왔다는 걸 칭찬해줬단다. 그리고 예전에 한번 겪어봤듯이 지금 받고 있는 이 사랑이 거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그 감정에 쉽게 휘말리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 나도 만약에 연기 시작하고 한 2~3년 만에 신인상을 받았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눈물, 콧물을 흘려가면서 좋아했을지 모르겠는데 한 10년 정도가 흐른 뒤라 그런지 위로를 얻는 기분이었다. <사생결단>이란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건 내 연기적 목마름에 어울리는 적재적소와 같은 작품을 만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생활 탤런트로 타협하지 않고 도전해온 내 인생에 대한 위로랄까? 내가 혼신을 다했던 연기에 상을 준다는 건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한 노고가 지금까지 잘 다져오려 했던 내 인생에 대한 칭찬이란 느낌이었지.
그런데 어째서 느낌이 없었다고 말하는 건가?
만약 내가 이 상을 받을 당시 내 힘든 여정을 같이 보냈던 사람들이 앞에 있었으면 눈물이 났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 레드카펫을 밟는 자리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나 탑배우들이 앞에 앉아 있는 가운데 수상을 하게 되니까 그 자리가 낯설고 편하지 않았다. 그냥 얼떨떨한 느낌이었지. 그런 의미다.
그 수상이 인생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진 않았을까. 인생을 연기에 걸어도 될 것 같은 일말의 확신이라도 말이다.
부담과 자신감이 함께 오는 거 같다.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해내면 인정을 받게 되는구나 싶은, 보답 받는 기분. 그렇게 칭찬받는 기분을 느끼고 내가 또 다시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원동력이 자신감이겠지. 반대로 이렇게 상을 받았으니 다음엔 얼마나 더 주목을 하실까 싶은 부담도 생긴다. 다른 배우들이야 예쁘니까 상관없지만 난 연기라도 잘 해야 먹고 사는데. (웃음)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 <실종>찍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지. 이렇게 자꾸 말하니까 너무 변명 같지만 <사생결단>이나 <미인도>보다 예산이 적고 그만큼 열악하다 보니까 오히려 그 때보다 더 잘해야 되는데 쉽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놓치고 가는 게 많아서 큰일났다 싶더라.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촬영 내내 그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건가?
작품이 끝나가는 와중에 문득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상황이 좋으면 누가 연기를 못해. 힘들고 열악한 상황일수록 끝까지 페이스를 놓치지 않아야 진정한 배우인 거지. 그래야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거지. 완벽하게 세팅된 곳에서 누가 연기를 못하겠어.” 크랭크업 이틀 남겨놓고 깨달았다. 이미 찍을 거 다 찍어버렸는데. (웃음) 정말 내가 아직도 멀었구나 싶더라.
그래도 느낀 바가 있다는 건 분명 긍정적인 계가가 된다.
부딪혀봐야 내게 부족한 걸 알지, 백날 생각해본다고 아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 예를 들어서 내가 마라톤 달리기를 한다면 몇 미터까지 달릴 수 있는지 뛰어봐야 안다. 난 1km는 거뜬해,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뛰어보니까 800m밖에 못 뛰는 아이였다. 그럼 오케이, 웨이트를 더 하자. 그렇게 1km짜리 작품을 할 수 있는 나를 만들자. 800m의 한계를 넘어서 나머지 200m를 채우자고 생각했지. 이렇게 문제를 발견해나가면서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얻었다.
1972년 6월 17일오전 2시반, 워싱턴 민주당사를 도청하려던 5명의 용의자가 검거됐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두 기자는 그 배후를 추적했고, 그 끝자락에 닉슨 대통령이 관련됐음이 기사를 통해 폭로됐다. 차기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던 닉슨 대통령의 불명예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닉슨은 이를 적극 부인했지만 결국 여론의 압박이 대단했다. 결국 1974년 8월, 국회의 탄핵의결을 거쳐 대통령직을 사임하며 닉슨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이다. 여기서 워터게이트는 워싱턴 민주당사가 있던 건물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대부분의 정치 스캔들 명칭에 ‘게이트(gate)’란 어미가 붙게 된 것도 이 덕분이다. 어쨌든 닉슨 대통령은 대단한 정치적 영향력을 남긴 셈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이하, <프로스트>)는 기록적인 영상과 언어를 동원해 워터게이트와 닉슨 대통령의 사임까지의 서사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하며 시작된다. 묵직한 실화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도입부는 영화의 야심을 위한 포석과 같다. <프로스트>는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이후에 벌어진 또 다른 실화, 정계에서 은퇴한 닉슨(프랑크 란젤라)과 영국 출신의 토크쇼 MC 프로스트(마이클 쉰)의 인터뷰를 다루는 영화다. 그 실제적인 사건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건 그 후에 벌어지는 사건의 현장감을 얼마나 비중 있게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과 맞닿아 있다. 기록적인 영상은 도입부 이후로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건 극화된 장면이다. 희곡을 바탕으로 둔 연극 원작엔 문학적 자질을 염두에 둔 허구적 재능이 가미됐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대의 연출과 달리 영화는 좀 더 실제에 가깝게 묘사될 때 탄력을 얻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록적인 사실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도입부는 허구를 가리기 위한 방법론에 가깝다.
1977년의 역사적인 TV인터뷰를 스크린에 옮긴 <프로스트>는 역시나 어떤 결과를 재현하기 위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 결론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라는 점이다. <프로스트>가 선택한 지점은 그 결론을 위해 과정이 종사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느냐에 가깝다. 프로스트의 결심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는 닉슨의 결심만큼이나 중요한 지점이다. 프로스트와 닉슨은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인터뷰를 선택한다. 워싱턴 정계로 재진입하기 위한 재기의 발판으로 인터뷰를 선택하는 닉슨과 마찬가지로 프로스트 역시 미국 연예계로 재입성하고자 인터뷰를 기획한다. 두 사람은 그 인터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그 인터뷰는 두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다. 인터뷰를 둘러싼 긴장감 역시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정의 구현을 바탕으로 둔 훈계엔 관심이 없다. 모든 것을 건만큼 이득을 보지 못하면 손실이 큰 싸움이다. 4번에 걸쳐 이뤄지는 인터뷰까지의 과정 중 마지막 4번째 인터뷰에 에너지가 응집되는 양상 역시 그런 까닭이다. 4쿼터 역전승을 거두듯 닉슨에게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가 전세를 역전하는 마지막 인터뷰의 묘미는 두 사람의 클로즈업된 표정으로부터 전세가 역전되고 있음이 표현될 때 온전한 전율을 전달한다. 승자와 패자의 만감이 탁월하게 교차된다. 물론 그 표정의 주체가 되는 두 배우마이클 쉰과 프랭크 란젤라의 뛰어난 역량이 언급돼야 마땅하다. 특히 프랭크 란젤라의 얼굴은 <프로스트>로부터 느껴지는 감정 그 자체다. 그의 얼굴은 영화의 정서적 변화를 대변하는 온도계나 다름없다. 그리고 마이클 쉰은 그 온도계를 쥐고 자신의 연기적 체온으로 극적인 변화를 온전히 주도한다.
날카로운 촌철살인의 언어로 두 사람은 진검승부를 펼친다. 인터뷰 직전 상대의 의표를 찔러 심리적 우세를 점령한 뒤 허를 찔린 상대의 조급한 심리에 여유 있게 응대하는 닉슨의 표정엔 우아한 관록이 배어 나온다. 그 너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심리적인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는 역공의 전환을 맞이한다. 강력한 맞수 닉슨의 우연한 전화는 공황 상태의 프로스트에게 자극을 전달하고 계기를 마련해준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적의와 호의라는 이분법적 시선으로 자신을 접대하는 것과 달리 프로스트만이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닉슨의 표정엔 자신의 내면을 속이고 외면의 야심을 치장하듯 추구하는 자의 고독이 서려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스스로 고백을 자초하는 닉슨의 표정엔 그 고독에 대한 자각이 담겨있다. 거짓말을 통해 모든 사람을 속일 순 있지만 결국 스스로를 속이지 못함을 이미 깨달았던 자의 뒤늦은 회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로스트>는 승패에 관한 이야기다. 승자와 패자의 표정은 확연히 구별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승자보다 패자다. 닉슨은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파고 드는 물음 앞에서 스스로 무너진다. 서로의 빈틈을 파고 들거나 유연하게 피해서던 촌철살인의 공방 속에서 결정타가 되는 건 스스로조차 감내할 수 없었던 진실의 무게다. 결코 속일 수 없던 자신에 대한 깊은 연민이 끝내 닉슨의 입을 열게 만든다. 타인의 비방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함에서 비롯된 고독은 결국 자존심을 무너뜨린다. 자신의 지난 과오를 인정하는 닉슨의 얼굴엔 피곤이 서려있다. 패배를 감지하는 자의 참담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거짓을 가리기 위해 거짓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던 자는 결국 뒤늦게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세월의 피로를 감지하고 허망하게 주저앉는다.
결국 닉슨의 패배는 스스로를 지탱하던 거짓의 신화가 붕괴될 때 이뤄진다. 그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야심을 이룬 프로스트와 달리 닉슨은 결국 영원히 야심을 접어야 했다. 그 인터뷰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재회한 프로스트와 닉슨의 대화는 꽤나 인상적이다. 닉슨은 왜 자신도 모르게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욕망을 이루기 위해 전진을 일삼는 자가 적에게 보인 호의는 어떤 의도를 품고 있었을까. 물론 그건 어느 누구도, 심지어 당사자조차 알 수 없는 진실이다. 단지 그 삶이 얼마나 짐작하기 힘든 피로를 짊어지고 있었는가가 체감될 뿐이다. 진실을 숨기며 삶을 지탱하는 자의 삶이란 이토록 피로하다. <프로스트>는 그 거짓된 삶의 패배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설득하는 수려한 웅변이자 품격 있는 언어다.
다음 영화가 또 돈과 관련된 영화다. <십억>말이지. 내가 믿는 구석이 있다면 그 전에 <우리 집에 왜 왔니>가 개봉해서 <작전>의 이미지를 순화시켜줄 수 있을 거란 점이다.
<십억>도 신인 감독 영화더라. <작전>의 이호재 감독에 이어 계속 신인 감독과 작업하게 됐다.
내가 언제부터 신인 감독 따지는 배우였다고 그런 말씀을. (웃음) 데뷔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신인감독들이 나를 찾아줬고 그 분들의 시나리오에 믿음이 가니까 했던 거지. 내가 조금 풀렸다고 해서 신인 감독하고 안 하는 것도 웃기잖아.
예전 인터뷰를 보니까 송강호 씨가 ‘시나리오보다 감독이 더 중요하다’라고, 그 말의 의미를 알겠다고 했던데.
첫 대본을 받고 감독님을 만나 뵈면 그 분의 인품이나 철학, 생각이라던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이 작품을 썼는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100% 옳은 건 아니겠지만 일단 그 분이 생각하는 지점이 드러났을 때 판단이 서면 같이 하는 거지.
<작전>을 선택하게 된 뚜렷한 이유를 묻는다면 뭐라고 말할 건가?
일단 주식이란 소재가 국내영화에선 다루지 않았던 거라서 신선했다. 우리나라엔 정치, 경제, 사회를 다룬 시사성 있는 영화가 많이 드물잖아. 소위 감독이라고 불리는, 철학이 있는 분들이 예술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사회 풍자를 비롯해 여러 다양한 시도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게 많이 부족하다 느끼던 차였다. 상업영화, 오락영화지만 요즘처럼 경제도 어려운데 주식이란 소재를 가져왔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어 보이더라.
주식 관련 전문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일반인에겐 어려운 용어지만 관객 입장에서 그냥 한 귀로 흘리듯 들어도 상관없게 완성됐기 때문에 문제는 없을 거 같다. 내가 주식을 모르는 입장에서 대본을 이해 못할 정도라면 할 필요가 없겠지. 예술영화도 아니고, 오락영화인데 대중과 소통이 쉽게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 안 했을 거다. 내가 주식을 전혀 모름에도 캐릭터를 따라가다 보니까 이건 해도 괜찮겠다 싶더라. 화투를 몰라도 <타짜>를 재미있게 본 것처럼. 나는 진짜 화투로 숫자 세는 것도 모르는데 (영화에서) 땡이 된다고 하니까 땡인가 보다, 이러면서 봤으니까. <작전>도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주식을 사려고 하는지, 팔려고 하는지, 이것만 알면 대충 맞춰가는 거지.
최근 했던 인터뷰가 인터넷에 많던데 또 조폭 연기를 했다는 질문이 많더라. 그런데 사실 조폭이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닌데 다들 그렇게 묻는 거 보면 조폭이 획일적인 이미지란 생각이 든다. 결국 그런 질문이 본인의 이미지를 신경 쓰게 만들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그렇지. 기자간담회 때도 일부로 조폭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었다. 그런 선입견이 생길까 봐. 조폭이란 어감 자체가 좀 그렇지. 미국은 마피아잖아. 좀 그럴 듯하지만 조폭은 어감도 안 좋고. 예전에 조폭 코미디가 워낙 많이 나왔기 때문에 ‘또 조폭이야’, 이런 선입견이 나부터도 있는데 관객들은 오죽하겠어. 그래서 웬만하면 얘기를 안 하려고 했는데 기자님들이 자꾸 꺼내시니까. 그게 다른 캐릭터란 걸 얘기하기 위해서 참여하는 편이지.
<작전>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악역 캐릭터를 연기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사실 악역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많을 거 같다. 캐릭터도 좀 더 입체적인 경우가 많고.
그런 면이 없진 않다. 다만 지금 하고 있는 것과 다른 걸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저 착하고 사랑 받는 역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번에 센 걸 했으니까 다음엔 유한걸 해서 나의 정신세계를 바꿔보고 연기적인 마인드도 변화시켜보자 이런 거지, 관객에게 사랑 받고 싶으니까 이런 역을 하자, 이런 건 아닌 거 같다.
악역 이미지로 국한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해본 적은 없나?
한번 이런 걸 하면 다시는 안 시킬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가족>을 했는데 그런 역이 더 많이 들어오더라. 그때 내가 잘 참은 거 같다. 돈도 많이 필요했고 힘들었지만 그때 좀 늦게 가더라도 참자고 했던 게 지금으로서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왜냐면 그때 참고 <러브토크>를 했으니까. <러브토크>의 지석이 너무 답답하고 평범한 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니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역이더라. 그 뒤로 여러 작품을 하면서 배우로서 다양한 층을 지닐 수 있게 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 우연찮게 센 역할로 흥행이 돼서 저 사람은 센 연기를 하는 친구다, 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건 보는 사람 마음이니 어쩔 수 없지. (웃음) 물론 센 역할이 더 쉽게 각인되는 면도 있고.
황종구는 종종 상황을 유머스럽게 만든다. 진지한 상황을 빗나가게 하는 행위를 한다고 할까. 원래 시나리오 상에서의 캐릭터도 그랬을까?
그렇게 웃기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내가 그런 상황 자체에서 ‘척’을 많이 하는 인물로 설정했기 때문이지. 품위 없는 사람이 품위 있는 척을 하니까 그로 인해 생기는 에피소드가 많을 거라 생각했다. 감독님이 쓰신 대본을 봐도 그렇게 폼 잡고 멋있는 척하는 놈이 ‘이 신발 봐, 이게 얼만지 알아?’ 이런 대사를 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라고 생각했다. 더 좀스럽게 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진짜 멋스러운 여유가 있고 품위 있게 보여야 격은 살리면서 재미있는 코미디가 나올 것 같더라. 다만 우리끼린 웃음을 참기 힘들 정도로 NG도 내고 재미있게 찍었지만 관객에게 통할까 싶은 걱정은 계속 있었지.
이번에도 나름 센 역할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유머를 삽입한 건 그 세기를 줄여보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된 게 아닐까.
캐릭터상 이런 게 가미되면 좋겠다 싶었지. <작전>은 상업영화인만큼 웃음이 있다면 좋을 거라 판단했다. 의도했다기 보단 이게 잘 어우러져 공감대가 형성이 되니까 할 수 있었던 거지. 물론 이 캐릭터 자체가 센 느낌을 주는 장면이 여러 번 있기 때문에 독특한 유머가 가미된 인물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부분은 있었다.
본인이 염두를 둔 캐릭터가 감독이 생각했던 캐릭터와 충돌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촬영 들어가고 나서 싸우는 건 이미 늦은 거지. 그땐 감독을 따라가는 게 맞다. 그리고 촬영하기 전에 먼저 컨셉이 섰을 때,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고. 대충 내가 어떤 연기를 했을 때 이 작품이랑 맞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는 이런 지점을 잡고 있는데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도장 찍기 전에 그런 조율을 마치는 편이다. 이번에도 작품 수정고가 몇 편 나왔고 그걸 보면서 감독님한테 믿음이 생겼다. 사실 내 나름대로 연기 컨셉이 잡혀져 있는데 그게 내가 해왔던 그런 류의 연기가 아니라면 나에게도 모험인 셈이다. 이걸 하는 게 맞는지 안 맞는지 계속 되물어 보고 되짚어보고 하는 편이지.
이호재 감독과 조율하는 과정은 순탄했나?
감독님도 내 모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지만 감독님 스스로도 궁금해하고 두려워하는 지점이 있었을 거다. 처음에 찍기 시작할 때, 내가 품위를 지키려 하고, 톤을 다운시키고, 깔고, 이렇게 가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할 거냐고 묻더라. 나는 아직 보여주지도 않았고 나도 지금 서서히 적립해가고 있는 건데. 그래서 지금 찍은 것까지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니까, “아니, 문제는 아니고요. 이렇게 쭉 가시진 않을 거죠?” 그러시더라. 감독님도 믿음은 있었지만 걱정이 많이 됐던 거지. 그래서 좀 기다려보라고, “나도 터지는 부분이 있고, 그럴 때 뭔가 이뤄져야 하는데 지금은 아니지 않냐.” 그랬지. 그러다가 자동차에서 허리띠 풀러 주는, 그 장면을 4회 차에서 찍었는데 그때 이 톤으로 가면 되겠다, 라는 판단이 나도 섰고, 감독님도 만족하셨고, 그렇게 계속 갔지. 그리고 중반으로 가면서 유머를 조금씩 넣기 시작하니까 이젠 감독님이, “그쪽으로 너무 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셔서, “감독님이 생각하는 지점을 간 뒤 번외로 내 걸 갑시다.” 제안했다. 그래서 감독님이 오케이 하면, 내 버전을 다시 갔다. 그 때 막 애드립도 넣었지. 현장 편집에서는 애드립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그런데 스튜디오 편집에선 내 애드립이 다 들어갔더라. 어느 정도 가다 보니까 여기선 유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조금씩 가미를 한 거였다.
그 연기에 의심이 생긴 적은 없었나. 차라리 경험이 적은 배우는,
그냥 마구 밀어붙이는데.
반대로 경험이 많으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경험에 비춰서 자기 연기에 대해 종종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초반에 걱정이나 의심을 많이 하게 되지만 처음 생각했던 게 맞는 거라 생각하면서 자신을 추스른다. 내가 그려놓은 상이 있으니까 거기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돼야지, 이걸 다른 방향으로 틀면 내가 무너지고, 이 작품 자체가 무너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내가 그려본 상에 자신이 있을 때 도장을 찍는다고 얘기했듯이 그걸 다시 되짚고 되찾아가려고 노력한다. 새롭게 노선을 바꿨다가 나도 망치고 작품도 망칠 수 있으니까. 내가 생각했던 거, 내가 적립해놨던 게 맞을 거라고, 다시 자신감을 100% 채운 뒤 설정을 적립하지.
<작전>에서 그런 의심의 지점이 있었나? 초반에 조금 그랬다. 어느 시점부터 현장 편집을 조금씩 확인하는 편인데, 중반 정도 가니까 클라이맥스로 가는 도중에 좀 정적으로 흐르더라. 여기선 뭔가 보여줘서 긴장감을 살려야 될 거 같은데 내가 생각한 컨셉대로 가버리면 다운될 거 같은 거다. 그래서 노선을 바꿨지. 감독님한테, “이쪽은 좀 세게 가야 될 거 같지 않아요? 여기서 분위기를 잡아주지 않으면 너무 정적으로 가기 때문에 뒤에서 손해보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렇게 가게 됐다. 내가 생각한 뼈대는 그대로 가되 조금씩 수정을 가했지.
영화를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로 구분하는 것처럼 연극도 마찬가지다. 목화에서 나와서 대중적인 연극에 몇 편 출연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 했던 연기는 분명 목화 시절과 다른 연기였던 거 같다. 좀 더 계산적인 연기랄까. 영화에선 그런 계산적인 연기가 더욱 요구되지 않나.
모든 영화에서 계산적으로 연기한다. 물론 어떤 캐릭터를 만드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인간 박희순이 더 많이 보여지는 영화가 있긴 하다. 일상적인 연기를 할 땐 내가 많이 보여지겠지만 나와 동떨어진 캐릭터를 만들 땐 내가 아닌 부분이 보여지겠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나 <러브토크>에서의 평상시 모습은 박희순이 많이 보이는 거 같다. 만약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출연한다면 정말 인간 박희순이 나오지 않을까. 진짜 술을 먹이신다는데, 내 술버릇도 나오겠지. (웃음) 반대로 캐릭터를 만들고 설정을 붙여서 다른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예전에 목화 연극을 12년 동안 하다 보니까 답답함과 염증이 생겼지만 같은 공간, 같은 연출, 같은 배우들 사이에 있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목화에서 나와서 <록키호러쇼>나 <그리스>, <아트>나 <클로저>를 거친 건 목화와는 다른 연기 톤을 시험해보고 싶어서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마다 다른 연기 톤을 가지고 나를 더 보여주느냐, 아니면 나와 다른 걸 가미하느냐라는 연기 플랜이 생기는 거지.
캐릭터에 인공적인 느낌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관건이 아닐까 싶다.
그것 자체가 모험일 순 있지. 캐릭터에 지나치게 치중하다 보면 인공적이다, 내지는 과장됐다, 이런 말을 들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그래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만드느냐가 큰 숙제지. 황종구란 역할을 만들면서도 계속 이걸 혹시 받아들이지 못할까, 라는 걱정도 하고 의심하면서 만들어 나갔다. 편하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설정을 하지만 현장에서도 편해지려고 노력하고 끊임없이 이에 대해 공부하는 편이다.
김무열은 요즘 무대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배우다. 무대 출신 후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일단 기본기가 탄탄하지만 이 친구의 장점은 성실성이다. 준비를 많이 하고 분석 능력이 탁월하더라. 보통 스스로 배역을 준비해올 때 겉모습에 많이 치우쳐서 오히려 진짜 자신의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친구는 정말 많은 준비나 설정을 해왔더라. 촬영장 안에서 자꾸 없어진다. 찾아보면 한쪽에서 연습하고 있더라. 기본기가 탄탄함에도 불구하고 성실성을 갖고 있다는 게 후배지만 믿음직스러웠다.
함께 호흡을 맞추는 씬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의 장점도 있었을 거 같은데. 각자 설정해가는 부분이 있잖아. 나는 이렇게 가게 되면 이 친구 또한 자기대로 해석하지. 연극을 경험했던 친구니까 어떤 설정을 맞춰감에 있어서 열려있는 측면이 있었다. 이 친구와 연습을 많이 했었다. 자동차에 담배 비벼 끄는 씬도 감독님이 설정만 해준 걸 우리끼리 다른 데서 연습해서 완성했다. 그런 재미가 있었지. 내가 이렇게 할 테니까 너 이렇게 해, 이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할건데 넌 어떻게 할래, 이럴 때 남자들끼리라도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거든. 물론 현장 분위기 자체가 워낙 좋기도 했고. 내가 중간에 연극을 한번 보러 갔었다. 워낙 유명하단 소리를 많이 들어서 같이 작업한 친구니까 보러 갔지. 나는 탁구경기를 보는 줄 알았다. 모든 여자관객들이 (고개를 좌우로 왔다갔다하면서) 김무열만 쫓아다니는 거야, 김무열만. (웃음) 근데 진짜 그럴 만하더라. 이 친구는 룩(look) 자체도 괜찮고, 연기적인 설정이나 감성이 너무 좋더라. 정말 진심으로 박수를 쳐줬다. 그리고 나중에 농담 삼아 얘기했지. 네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 알았으면 내가 배려를 안 했을 텐데. (웃음)
극단 목화에서 12년간 있었으니 오태석 선생님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다. 혹시 본인이 출연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 적은 없나?
그런 건 없는데 이번에 상 받았을 때 직접 음성이 왔더라. “너 상받았다며? 축하해! 파이팅!”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지.
목화를 나올 때만 해도 많은 기분을 느꼈을 텐데, 지금 그 당시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진짜 기적 같지. 그 12년 동안 연극 판에 있었으면서 영화 판에 가서 내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내가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고, 잘 적응할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요즘 내가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게 정말 기적 같다.
<세븐데이즈>가 출세작이 됐다. 오랫동안 연기를 해왔지만 한 작품으로 유명세가 생겼다.
그 당시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답변을 한 적 있는데, 나는 꾸준하게 많은 캐릭터를 변신해왔는데 그 때는 신경도 안 쓰더니 대중적으로 흥행이 하나 되니까 그걸로 나를 평가한다는 게 자꾸 서운하기도 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그 작품 하나로 인해서 내 전작들을 찾아본다는 거지. 재평가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더라.
<작전> 포스터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난 현상수배범인 줄 알았어. (웃음) 사실 그건 권력들 사이에 있는 개미를 표현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뿐이지. 내가 뭐 잘 나서 그런 건 아니고. 얼굴이 크게 나오지만, 그런 것뿐이지.
하지만 분명 그 포스터엔 이제 박희순이란 배우의 이름과 얼굴이 영화의 홍보에 득이 된다는 계산도 내포된 셈이다.
용하나 민정이는 충분히 인지도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영화를 이끌어 갈만한 자격이 있는 친구들이지만 나 같은 경우는 많이 약하기 때문에 책임감도 많이 느낀다. 그래서 인터뷰도 많이 하고, 심지어 <해피투게더>까지 나가고. (웃음) 나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홍보를 위해서도 노력하지.
자신의 인지도가 넓어지고 있다는 걸 의식한 적은 없나? 작품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영향력을 느낀다거나.
거기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못한다는 말도 있잖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품이나 캐릭터의 색깔과 다른 걸 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런 게 더 우선이지, 내가 원톱이냐, 투톱이냐, 전면에 서느냐, 후면에 서느냐, 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부분에 부담을 느끼고 쫓아가다 보면 다치게 되는 모습을 많이 봐왔고, 나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왔다. 내 인생은 수직상승형이 아니라 계단형이다. 그런 걸 일부로 거부하거나 역행할 필요는 없겠지만 쫓아가진 않으려 한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연기에 매진했다. 연기가 자신에게 있어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박희순이란 사람은 재미도 없고, 모험을 즐기지도 않고, 활동적이거나 사회적이지도 못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콤플렉스도 많은 사람이다. 그런 내가 작품에 임할 땐 자신할 수 없지만 누구보다도 더 모험을 즐기고, 새로운 걸 추구하고, 스스로 깨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연기를 안하고 가만히 집에 있을 때는, 정말 내가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지, 나이를 먹으면 변해야 되지 않나, 이런 자책을 하게 되는데 연기하는 동안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유머스러움까지, 많은 변화가 있다. 박희순은 30%밖에 없는 거 같고, 70%를 배우로서 사는 거 같다. 그 70%가 있기 때문에 박희순이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사는데 의미가 생기는 거 같다. 그런데 이 30%는 정말 의미가 없는 거 같다. 내 삶에서 배우가 돼서 연기를 하고 영화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있는 70%가 내 인생이고, 내 호흡이며,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이고, 직업인 거 같다.
그런 당신이 어떻게 연기를 하게 한 건가?
그냥 막연하게 시작했지, 뚜렷한 계기는 없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그래서 그럴지도 모르지. 날 보여주는데 익숙하지 않고, 교우관계도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지만 무대에 섰을 때 조명을 받으면 내가 가면을 쓴다고 생각하고 연기할 수 있는 거니까 이 안에서는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도피나 회피이거나 미지의 세계였던 거 같아.
연기라는 것이 어쩌면 삶을 지탱하는 수단이란 말처럼 들린다. 반대로 연기를 하지 않는 순간에는 그만큼 쓸쓸함을 느끼고 있다는 건데.
연애를 안 해서 그런가? (웃음) 연애를 하면 달라질지 모르지. 사실 요즘 유난히 더 그러는 거 같다. 애인도 없이 한참 바쁘게 연기만 하고 살아와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이가 들면서 느껴지는 허전함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런 당신이 연기를 하겠다고 할 때 부모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나?
아이러니한 게 아무런 끼도 보여드린 게 없었는데 어머니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거다. 항상 연극을 하는데 있어서, 너는 잘 될 것이다, 너는 잘되길 빈다, 기도한다, 이런 얘기를 하셨지, 때려 치고 다른 걸 해라,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남들이 그런 얘길 하면, ‘너나 잘해!’ 이런 식이었으니까. (웃음) 그건 참 고마운 일이지.
장가가라는 말씀은 안 하시나.
하지. 그러니까 주위에 여자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웃음) 모든 기자들에게 내가 지금 밑밥을 깔아놓고 있다.
나도 궁한 사람이라서. (웃음) 이제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을 것 같은데 어떤가?
못 알아본다. (웃음) 일단 내가 알아보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인기를 얻게 돼서 좋은 건 작품이 다양하게 들어와서 내가 작품을 고를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난다는 거다. 내가 영화를 10작품 이상 했지만 사회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 (웃음) 나로선 다행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작품 속의 나와 박희순은 너무 많은 차이가 나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너무 다르니까 대입을 못 시키는 거 같아. 그리고 설사 알아본다 하더라도 내가 장동건도 아닌데 뭐, 별로 신경이나 쓰겠어? (웃음)
배우로서의 이미지 외의 모습들은 잘 드러나지 않은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최근에 <해피투게더>, <놀러와>에 출연했던 것 때문에 약간 걱정된다. 아, 이젠 정말 그런 거 안 하려고. (웃음)
홍보 때문에 예능프로에 출연했나 보다. 어땠나?
죽는 줄 알았지. 진짜 목욕탕에서 찍더라. 그 좁은 데서 카메라 열대 늘어놓고 너 웃겨봐 그러는데 나가고 싶더라. (웃음)
사실 요즘 예능프로들이 좀 공격적이지 않나. 막말도 넘치고. 그래서 어려운 건 없었나.
그렇지. 다만 그냥 자기들끼리 하면 좋겠는데 자꾸 시키니까. 난 좀 내보내줬으면 좋겠는데. (웃음) 질문에 있는 얘기만 물어보면 준비를 해갈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니니까. 박명수 씨한테 엄청 혼났지. (웃음)
예능도 그 나름대로의 연기가 필요하다.
‘테이프 갈고 하겠습니다’ 하면서 잠깐 쉬면 힘들어서 늘어져있다가 다시 시작하면 왁자지껄하다. 연기라고 생각하고 하는 거 같더라. 박명수 씨도 녹화 중엔 막 큰소리치더니 다 끝나니까 다가와서, ‘팬입니다. 영화 너무 잘 봤습니다.’ 이러더라.
연기로 치자면 감정에 몰입해서 연기하다가 컷이 된 후 그 감정에서 빠져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말할 수 있겠다. 혹시 연기에 몰입했다가 빠져 나오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편인가?
감정씬이 너무 많아서 힘든 경우가 있다. 사실 지금까지 개봉작 중에선 가장 힘들었던 게 <남극일기>였다. 재미있기도 했지만 일 년 내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힘든 작품은 <우리 집에 왜 왔니>다. 일단 육체적으로 10키로나 살을 뺐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아내를 잃고 계속 자살을 시도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아픔을 품고 있었다. 그 안에서 또 코믹한 요소도 있다. 연극할 때 어르신들이 하시던 말씀 중에, 비극은 희극처럼 희극은 비극처럼 연기해라, 라는 말이 있다. 코미디가 전반에 흐르고 있는데 그걸 비극처럼 하니까 당사자는 괴롭지. 저예산이다 보니까 24시간 넘게 촬영을 강행하기도 하고, 그 두 달이 지옥 같다고 느낄 정도로 힘들었다.
연기하는 감정에 따라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있나 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통닭 먹고 우는 씬 때문에 하루 종일 감정씬을 했었다. 와이프와 재회하고 헤어지는데 눈물이 계속 나더라. 그렇게 눈물을 닦고 또 통닭 먹는 씬을 찍는데 죽겠더라. 답답하고 너무 힘들었지. 그 씬 찍고 나서 커트를 했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그렇게 30분을 대성통곡했다. 내가 그렇게 소리 내서 울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엉엉대며 울었다. 밤에 다른 씬을 찍어야 되는데 눈이 너무 부어서 얼음찜질하고 몇 시간 있다가 찍을 정도였지.
그렇게 괴로운 경험을 겪게 되면 몰입하는데 있어서 반사적으로 움츠려 들진 않던가?
그렇진 않다. 그런 건 배우로서, 연기에 있어서 그렇게 몰입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지. 그걸 거부하면 연기를 할 수 없다. 연기가 흐르는 데로 배우는 가는 거지.
시장이 좁다 보니 그만큼 선택의 폭도 줄어들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을 거다. 시도가 가능한 장르가 제한된 만큼 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캐릭터도 제한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쉬움이 많다. 스릴러 하나 잘되니 계속 스릴러가 나오고, 내년엔 <과속스캔들>따라 간다는 얘기도 있고. 다들 천편일률적으로 이때다 싶으면 몰리고, 그런 점에 대한 답답함이 있지만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나는 거꾸로 가는 거 같다. 작년에 한참 스릴러를 많이 찍었지만 <작전>이 새로운 시도처럼 보여서 한 거고, 그전에 <우리 집에 왜 왔니>도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겠단 판단이었다. 스릴러에 원톱은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세븐데이즈>보다 재미있거나 새로운 게 없더라. 형사역할만 들어오는데 굳이 그런 걸 또 하면서 새로운 걸 찾을 수 있는 노력을 허비할 바에야 정말 새롭고 독특한 걸 해보는 게 낫겠다 생각하던 차에 <우리집에 왜 왔니>가 들어왔고, 이건 내가 보여주지 못한 독특한 색깔이 있기 때문에 저예산이든, 원톱이든, 투톱이든 상관없이 하겠다고 했지. 그건 내 선택의 문제지, 나에 대한 강요는 없으니까. 우리 ‘열음’(소속사)이 나한테 많이 맡겨주는 편이다. (웃음)
혹시 외국영화보면서 자신이 해봤으면 좋겠다 싶은 캐릭터가 있었나? <캐리비안의 해적>의 조니 뎁이 연기한 잭 스패로우처럼, 그런 역할을 하면 재미있겠다 싶었던 적은 있었지.
할리우드로 가야겠는데. (웃음) 혹시 다시 무대에 설 계획은 없나?
올해 말에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 스케줄 때문에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영화가 계속 들어와서.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건가.
아직 구체화된 건 아니고 2년 전부터 생각이 있었는데 영화가 계속 끊이지 않고 들어오니까. 조금 더 미뤘다가 할 수도 있는 거고.
어쩌면 본인의 인지도가 연극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시점일지도 모르겠다.
거창하게 무슨 기여를 한다거나 그런 건 생각이 없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연극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지. 가수가 공연에서 라이브로 관객과 만나서 신나게 한판 놀 수 있는 것처럼 그런 무대가 그리운 거다.
작년에 <연극열전2>가 꽤나 화제였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 시도는 좋고 박수도 쳐줄 수 있다. 다만 영화배우나 탤런트를 무대로 데려와서 예전에 대박난 작품들을 우려먹기처럼 다시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창작극을 만드는 새로운 시도 안에 그 배우들이 존재한다면 모르겠지만 배우들을 상품화시켜서 좋은 작품에 끼워 맞추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걸로 연극을 대중화시킨다는 건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거지, 지속적으로 연극을 발전시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완전히 작업이 끝난 건가?
이미 <작전>이전에 끝났다.
개봉이 지연된 셈인데, 사실 이런 경험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그렇고, <바보>도 그렇고, <세븐 데이즈>도 우여곡절이 있었고. 예전에 스스로 곗돈 찾는 기분이라고 말했던 적도 있었던데, (웃음) 배우로서 자신이 출연한 작품을 볼 기회가 미뤄진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나?
지금 했던 작품과 다른 작품을 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영화를 선택하는 놈인데 그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지는 사태가 자꾸 발생하고 있다. 그것마저도 운명인 거 같다. 내가 이 작품을 선택하는 게 운명이듯이 이 작품의 개봉이 엉키는 것도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세븐 데이즈>끝나고 작년에 <우리 집에 왜 왔니>와 <작전>을 찍었는데 그게 올해로 넘어왔다. 그래서 원래 작년 1년이 비는 셈이었는데 그 자리에 <바보>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왔으니까 오히려 다양성 면에서 잘 됐다 싶은 면도 있었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셈이다. 어쨌든 벌써 다음 영화에 캐스팅됐고 꾸준히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기회가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연기 외적으로 짊어지는 부담도 늘어난 바는 없나.
한 작품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도 있고, 다음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도 있고, 내 스스로 새로움을 찾기 위한 모험도 있지만 어차피 난 늦었거든. (웃음) 그러니 더 서두르고 말고 할건 없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대로 천천히 가면 된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린다는 건 사치지. 작품하고 있는 것만해도 행복하니까.
1년만의 출연작입니다.
개봉일이 다가오니 시험 보는 수험생 같은 느낌이 드네요. 시험문제를 빨리 봤으면 좋겠다는 설렘도 있고, 한편으론 긴장감이나 걱정도 많고, 초조함과 부단함이 복합적으로 섞인 기분이에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한 기대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시도적으로, 작품적으로, 개인적으로도.
사실 굳이 <쌍화점>이 아니라도 유하 감독님과는 한 작품이라도 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죠. 하지만 제게 섭외가 들어왔을 땐 좀 의아하기도 했어요. 어쨌든 <쌍화점> 시나리오를 보고 왕후 역할에 푹 빠져서 진짜 꼭 해보고 싶어졌죠. 제 스스로 연기자라는 일을 갖고 살아간다면 한번쯤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욕심이 많이 났죠.
심리적인 변화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양상입니다.
단아하고 아름답고 고결한 느낌이 있는 반면, 굉장히 강한 카리스마가 있고 냉정한 면모도 있으니까요. 그런 이중적인 면모를 지닌 왕후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떤 배우라도 한번쯤 연기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겉으로 보여지는 면과 안으로 숨겨진 면을 적절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난관도 있었을 겁니다.
쉽지 않았죠. 쉽지 않으리란 생각 때문에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고요. 경험하고 나니까 역시나 유하 감독님께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일깨워 주셨다는 걸 느꼈어요.
유하 감독님의 전작들은 보셨죠?
예.
전작인 <말죽거리 잔혹사>나 <비열한 거리>처럼 유하 감독이 남성을 중심에 둔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의 비중은 다소 미비합니다. <쌍화점>도 두 남자가 중심이 되는 영화죠. 여성 캐릭터가 소외되진 않을까라는 걱정은 없었습니까?
일단 왕후는 영화를 끌고 가는 인물에서 제외되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왕후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분량이 많이 나오느냐, 영화를 끌고 가는 캐릭터냐, 를 떠나서 얼마나 임팩트가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왕후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고, 영화의 모든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배제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어요. 유하 감독님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시는 경우가 많지만 남자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여자가 빠지면 안 되는 상황이 굉장히 많잖아요.
남자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성공했다는 인상이 남더군요. 어쩌면 저에 대한 기대치가 크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웃음)
많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아무래도 포커스는 두 남자에게 맞춰졌으니까.
(웃음)
노출 연기가 과감했습니다. 전작인 <색즉시공2>에서 얇게나마 노출씬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때 단단해진 바가 있기에 이번 결정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요.
사실 <색즉시공2>는 노출연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건 단지 인서트에 불과한 상상씬에서 기술적 착오로 인해서 노출되지 말아야 할 부분이 나왔던 거고, 그게 저에게 어떤 경험이 됐다는 생각은 안 하니까요. 저는 <색즉시공2>에서의 경아 역할이 좋아서 연기했지만 노출을 염두로 두진 않았을 때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색즉시공2>가 <쌍화점>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쌍화점>을 선택하고 끝내기까지 저는 처음이란 생각과 신인이란 생각으로 모든 걸 버리고 시작해야겠다는 용기밖에 없었죠.
분명 부담되는 결정이었을 텐데 무엇을 통해 용기를 얻었나요?
제 앞길을 이끌어 주실 분은 감독님밖에 안 계셨고 그 길의 지도는 <쌍화점>이라는 시나리오였죠. 어느 누군가가 제게 득이 될만하다 생각하는 무언가를 저에게 주시면 오히려 그건 짐이 됐어요. 유하 감독님께서는 공부한다고 이거 저거 참고하거나 찾아보는 걸 싫어하셨거든요. 오로지 순수한 왕과 왕후와 홍림을 원하셨고 그 사이에 뭔가가 들어가서 포장되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쌍화점>에 있어서는 외적인 부분을 신경 쓰지 않아야 했고요.
하지만 부담되는 건 사실이었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그런 부담을 극복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이걸 끝내고 나서 어떻게 하겠다, 사실 이럴 정도로 저는 정치적인 사람이 못돼요. 전 감정적인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쌍화점>에서의 베드씬은 몸이 얼만큼 노출되고 어떤 자세가 나오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베드씬을 위한 베드씬이 아니에요. 클로즈업이 굉장히 많이 나오죠. 그 부분이 가장 많이 걱정되고 우려되는 부분이었어요. 몸과 자세는 감독님께서 잡아주신 포지션대로 하면 되지만 표정이 클로즈업되는 경우엔 제가 감정을 받아들이고 인지하지 못하면 얼굴로 표정이 나오지 못하니까, 그 부분이 사실 가장 큰 부담이었어요.
<쌍화점>을 통해 단순히 노출연기를 했다는 것 이상의 어떤 경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연기적인 선도 그렇고, 저에 대한 선도 그렇고, 제 연기 생활에 있어서 어떤 큰 산을 하나 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스스로도 그런 터닝포인트를 염두에 둔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여태까지 제가 선택한 작품의 폭이 그다지 넓지는 않았어도 언제나 즐겁게 일하자는 생각으로 생활을 꾸려왔으니까요. 절 만족시키면서 행복하게 일하자는 건데, 가만히 보면 제가 지금껏 했던 작품 중 인기가 많았던 캐릭터와 닮은 이미지를 붙잡고 순탄하게 갈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전 그게 싫었어요. 어떤 맹목적인 한가지 이미지로 많은 분들에게 어필하는 것 자체가 정체된 느낌이니까요. 그래서 <색즉시공2>도 하게 됐고 그 후로 찾은 게 <쌍화점>이었죠. 그래서 어쩌면 지금까지 했던 제 역할들의 이미지가 전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텐데 저는 그게 만족스러워요. 내가 이번 한 작품 하고 나면 남들이 이렇게 보겠지? 그러면 그 다음 작품은 어떤 걸 하고 그 다음 작품은 어떤 걸 해야지. 이런 정치적인 생각은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요. 해본 적이 없어서.
왕후는 수동적인 여자였지만 홍림과의 로맨스를 통해 적극적인 여자가 됩니다.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에 공감하는 게 관건이었을 거 같습니다.
왕후는 원에서 공주로 있다가 정치적인 정략 결혼으로 고려에 와서 한 남자를 지아비로 섬기고 살아야 하는데 알고 보니까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죠. 그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하는 만큼 홍림에 대한 감정이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넘어선 감정이지 않을까, 라고 감독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그게 연민일까? 아니면 동정일까? 아니면 동질감? 지효야, 어떤 걸까?’ 감독님이 이렇게 물었을 때 저는 단지 여자가 갖는 시기나 질투 이상의 것이란 왕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왕후고, 왕후는 모든 걸 받아들여야 되고, 감싸야 되고, 내색하지 않아야 되는 외로운 사람인 거에요. 그러다가 제 자리가 위태로워지고 지아비로 섬기는 왕의 자리가 위태로워지고 고려라는 나라가 위태로워지니까 정치적인 모든 상황을 배제하지 못하고 여자로서는 정말 치욕스런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잖아요. 그래서 대리합궁을 했는데 제가 생각하는 대리합궁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거죠.
의외의 결과를 낳게 되는 계기가 돼버리죠. 감독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굉장히 연하디 연한 연시가 바늘로 콕 찔렸을 때 내용물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다고. 다만 왕후로서 난 터지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내용물을 감추다 보니까 거짓말을 하게 되고 자기 스스로까지 속이게 되는 거죠. 그러다가 아예 겉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니까 아예 오히려 그거 하나만 보고 가버리는 거에요. 감독님께서 그렇게 예를 들어서 말씀해주시니까 많은 이해가 갔어요.
아무 것도 몰랐던 여자가 처음으로 뭔가를 깨닫고 느끼게 됨으로써 변화를 겪는 셈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한번도 그런 경험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홍림과 왕후의 입장은 비슷했다고 느껴집니다. 홍림 역시 자신의 욕망 자체를 인식할 겨를 없이 왕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모든 행동을 당연시했던 것뿐이니까요. 그래서 홍림과 왕후의 사랑은 로맨스이기도 하지만 동병상련의 연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왕이 홍림에게 갖는 감정이 질투 시기를 더 넘어선 거라고 감독님이 말씀을 하셨던 거고요.
왕후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대상이 되는 셈이죠.
그렇게 왕후가 점점 한 사람만을 불같이 사랑하는 여자로 변해가기 때문에 점점 이 세 사람의 관계가 얽히고 설키고 거짓말하게 되고 배신하게 되고 슬픔과 상처가 남고 파국으로 치닫는 것 같아요.
아까 말했듯이 왕후는 사랑을 통해 소극적인 여자에서 적극적인 여자로 변합니다. 그렇다면 본인은 어떤 사람이라 생각됩니까?
둘 다? (웃음) 사실 저는 항상 제 안에 있는 부분들을 늘 하나씩 꺼내서 보여드리려 노력하거든요. 그래서 <여고괴담3>의 진성이, <썸>의 예진, <궁>의 효림이, <주몽>의 예소야, <색즉시공2>의 경아, <쌍화점>의 왕후까지, 모두 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조금씩 부각시켜서 보여드리는 거죠. 저에겐 이 부분도 있고, 저 부분도 있기 때문에 왕후라는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 이건 연기하시는 분들이 전부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생각해요. 각자 제 안에 있는 부분에 숨결을 불어넣어서 캐릭터를 만들지 않을까.
연기를 하면서 발견한 측면도 있지 않을까요. 연기를 하다 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낼 때도 있고, 만들어 낼 때도 있고, 그러다 보면 자신에 대한 이면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 같고요.
정말 많죠. <여고괴담3>부터 많이 느꼈어요. 아, 이래서 연기를 하나보다라고 느끼며 시작했다가 점점 한 작품씩 하면서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니까 내가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고, 내가 이런 모습이 있었는데 참 많이 변했구나, 이게 나이가 들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건가, 원래 내겐 이런 면이 있었는데 많이 없어졌구나, 이런 생각들이 들고. 이렇게 계속 성향들이 많이 바뀌는 거 같아요. 그렇게 깨닫고 느끼면서 안 좋은 건 버리거나 놓게 되고, 새로운 건 재발견해서 부각시키게 되고, 그런 거 같아요.
<여고괴담3> 당시를 생각하면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기분도 당연히 다를 테고.
그럼요. 그 때는 정말 애기였어요. 애기. 뱃속에서 바로 태어나 응애, 하고 우는 애기였죠. (웃음)
아무 것도 몰라서 무서운 게 없었을 때였을지도 모르죠. 나이대가 비슷한 배우들과 함께 어울리듯 연기할 수도 있었고, 그만큼 심리적으로도 안정되는 바가 있었을 테고요. 반면 차기작인 <썸>에서는 반대로 부담이 크지 않았을까 싶어요.
부담이 사실 굉장히 많았어요. 왜냐면 첫 작품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끝내놓고서 갑자기 80억짜리 블록버스터의 여주인공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컸죠. 게다가 장윤현 감독님과 작품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부터 처음으로 남자배우를 상대배우로 만나게 되니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부담스럽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그때도 지금만큼이나 참 많이 힘들었던 작업을 했었네요.
결과적으로 흥행마저 좋지 않아서 나름대로의 마음고생이 더해졌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지적당했던 부분도 많았고요. 아무래도 예산이 크다 보니까 기대치가 높아졌고 그만큼 흥행이 따라주지 못해서 속상했죠.
그 뒤로 약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음, 그런데 저는 <여고괴담>한 뒤에 1년 정도 공백이 있었고요. <썸>후로도 1년 정도 공백이 있었죠.
1년 단위로 작품을 한 셈이군요.
예. 어떻게 그렇게 됐어요. 그러다가 이제 <궁>을 하게 되고, <궁>을 할 때까지도 한 5개월에서 8개월 정도 쉬었던 거 같고요. <궁>끝내고 <주몽>할 때도 그 정도 쉬었던 거 같고요. 그렇게 여태까지 계속 달려왔네요, 지금까지.
드라마는 영화와 리듬감이 달랐을 텐데요.
많이 다르더라고요. 저는 현장의 템포가 그렇게 빠른 줄 모르고 아침에 가서 라면 하나 먹겠다고 그랬다가 깜짝 놀랐어요. 모두 다 저만 기다리고 계시더라고요. (웃음)
아무래도 현장의 분위기를 몰랐을 테니까.
잘 모르는 데다가 신인이니까 정말 큰 실수를 범한 셈이죠. 그러니까 영화는 시간은 꼭 지켜야 되지만 여유가 있잖아요. 드라마는 여유가 없더라고요.
아무래도 준비기간이 짧으니까요. 영화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들어간다면 드라마는 연기를 하면서 그 캐릭터가 되어가는 셈이라 볼 수 있고.
그리고 드라마는 얘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더라고요. 이렇게 (손가락으로 전방을 찌르면서) 일방적으로만 표현돼요. 그래서 많이 당황스러웠던 기억도 나요.
리액션이 많이 배제되죠. 그런 면에 있어서는 영화가 연기자 입장에선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텐데요.
드라마를 하고 나니까 영화에서 얻지 못하는 장단점이 있어요. 드라마는 굉장히 순발력을 요하는 작업이다 보니까 한 작품 끝내고 나면 저도 모르게 순발력이 늘어 있고, 영화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가 깊어져 있으니 이 두 가지를 짬뽕시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웃음)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해요. 하지만 그만큼 뭐 하나 쉬운 게 하나도 없잖아요. 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오디션을 통해서 <여고괴담>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연기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을 것 같은데요. 그 지점이 연기자로서의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호기심이기도 하고, 뭔가 새로운 도전에 대한 희망이기도 했었고, <여고괴담>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그런 기대감도 사실 굉장히 많았었죠. <여고괴담>에 출연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보다도, <여고괴담>이라는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질까에 대한 기대감이 많았던 거 같아요. 내가 이 작품의 오디션을 보게 된다는 것만으로 신기해지는 것도 있었고요.
많은 여배우들의 등용문이 됐죠. 드라마를 거친 뒤 다시 영화를 하게 된 뒤로 연기적으로 달라진 지점도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많이 다른 게 영화 같은 경우엔 여유가 있는 반면 깊이 파고들 수 있고 뭔가 생각을 하게 되고 혼자 해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잖아요. 드라마는 그게 아닌 거에요. 저 혼자 모든 걸 다 해내야 되고, 제거는 제가 챙겨야 되고, 누구 하나 챙겨주지 않았고. 그렇게 영화에 대한 장단점과 드라마에 대한 장단점을 다 느끼고 나니까, 오히려 저는 접목해보고 싶더라고요. 이런 거 있잖아요. 현장은 드라마처럼, 촬영은 영화처럼. 이런 느낌이요. 이런 거 괜찮지 않아요?
감독님께서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웃음) 아마 무지 힘들겠죠.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를 하다 보니 적극적인 면모가 많이 느껴집니다.
얘기하다 보면 그래요. (웃음)
연기할 때도 캐릭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파고드나요? 모든 것을 알아내고 구축해야 성미가 풀린다거나.
다른 작품도 물론 그랬겠지만 이번 작품은 특히 신경을 썼던 게 감독님한테 매달렸어요. 왜냐면 모든 정답을 감독님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독님에게 캐릭터와 상황이나 시나리오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어보고 그랬던 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개인적으로.
마치 학생이 선생님에게 질문하는 모습이 생각나네요. 정말 그랬어요! 저한테는, 진짜 그랬어요.
선생님 입장에서는 그런 학생이 예뻐 보이는 법이죠. 유하 감독님은 적극적으로 디렉팅을 주시는 편이던가요?
아까 연시 얘기 했듯이 그렇게 늘 리액션을 주셨어요. 여기서 눈빛의 흔들림조차도 관객들에겐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지 생각하시고 목소리의 톤과 말투 하나까지도 신경쓰셨고.
본인이 생각했던 어떤 지점도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디테일한 디렉팅으로 캐릭터를 디자인해주면 분명 본인의 생각과 충돌되는 지점도 있었을 겁니다.
충돌은 있었지만 거기 집착하면 그 순간부터 저의 한계에 부딪히는 거죠. 그래서 제 안에 있는 제 것을 버리고 감독님이 주신 옷을 입어야 하는데 이 옷이 어떻게 입어야 맞는지 몰라서 제대로 입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걸 입을 때까지 수없이 테이크를 가고 수없이 감독님과 얘기하고 감독님은 수없이 저에게 디렉션을 주셨어요. 지효야, 이 사각형을 한번만 더 접으면 될 거 같은데, 접을 때 손가락 세 개를 이용해서 반반씩 잡아서 접어봐. 이렇게 디테일한 디렉션을 주실 때도 있으셨고 아까 연시의 예를 드는 것처럼 디렉션을 주실 때도 있었고 굉장히 다양한 디렉션을 주셨어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덕분에 그대로 이행하면 되는 것도 있는 반면 반대로 스스로 답을 찾아야 되는 요구도 있었을 겁니다.
돌려서 말하면 자꾸 생각하게 되죠. 고민하게 되고, 이게 뭐지, 자꾸 찾고 싶은 거에요. 충동심이 장난이 아닌 거죠. 매 한 순간이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이제 조금이라도 저에게 무언가가 오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좋은 습관도 생겼어요.
대중들은 배우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잘 사냥하기도 합니다. 특히 <쌍화점>처럼 선정적인 마케팅을 펼치는 영화의 배우들은 씹기 좋은 대상이 되기도 하죠.
저는 제가 상처받을 짓을 잘 안 해요. 그냥 인터넷은 안 하면 되는 거고, 그런 얘기를 들을만한 행동을 안 하면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자꾸 저를 절제시키는 거 같아요. 자제를 많이 하고. 이젠 그게 좀 익숙해진 거 같아요. 스스로가.
이제 곧 29살이 됩니다. 서른이 1년 남았군요.
이제 내일 모레 그 시기가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웃음)
중요한 시기인 거 같습니다. 배우로서나 한 사람으로서나, 지금까지는 보이는 것에 충실하게 따라왔다면 이젠 뭔가 찾아가고자 하는 욕심도 생기지 않을까 싶고요.
제 입장이 커지고 제 생각의 폭이 달라진다면 저는 그것 또한 제가 미리 생각할 부분이 아닌 거 같아요. 저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걸 하면 되는 거고, 제가 싫어하는 걸 안 하면 되는 거고, 그런 정치적인 부분은 아직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건 사무실에서 생각하시겠죠? (웃음) 제 개인적으론 그렇게까지 제약을 받으면서 생각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제가 너무 이기적일까요? (웃음)
자신의 의사 정도는 필요하죠. 다만 때때로 타협해야 하는 상황도 올 테니까요. 배우에게 이미지를 포장하는 문제도 때론 중요한 전략처럼 활용되기도 하고요.
아직까진 제 안에 있는 걸 끌어내야 되는 시기인 거 같아요. 저는 아직까지 저를 빚어서 어떤 모양으로 만들까 생각할 순 있어도 저에게 어떤 색깔을 입히며 어떤 옷을 입혀야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제 기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 한 것보단 안 한 게 더 많고 그래서 조금 더 경험이 쌓이게끔 가려는 거죠. 결국 그 경험치가 제게는 너무나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 되지 않을까요?
주연을 맡은 두 작품이 연달아 개봉됩니다.
사실 너무 운이 좋았어요. <초감각커플>은 1년 된 작품인데 <과속스캔들>이 개봉시기와 우연히 맞아서 서로 개봉시기가 맞아 떨어지게 됐네요. 저는 감사하게 생각해요. (웃음)
말투가 조곤조곤하군요.
맞아요.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편이에요. (웃음)
영화상에서는 당돌한 이미지인데.
지금 왜이리 축 쳐졌는지 모르겠지만,(웃음) 명랑 쾌활한 편이에요. 촬영장에서는 목소리가 커져요!
어려 보인다는 말 많이 듣죠? 그럼 기분이 어떤가요?
사실 좋을 때도 있죠. 그런데 이제 어리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노래를 잘 하더군요. 음색이 참 좋았습니다.
제가 부른 것도 있지만 사실 도움을 받은 부분도 있어요. 편곡을 너무 잘 해주신 덕분에.
가수 생각해본 적 없어요?
아니요! (웃음) 가수할 실력이 안돼요. 한 우물만 파기도 힘든 걸요.
EBS <비밀의 교정>으로 데뷔했죠. 연기는 언제부터 준비했나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데뷔하게 됐는데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준비했죠.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가졌나요?
중학교 때 영상동아리를 했는데 그때 친구들끼리 작품도 찍고 연기라는 걸 알게 됐어요. 연기를 직업으로 삼는 분들에 대해 가깝게 느낀 것도 그때였고요. 우연찮게 어느 작품으로 상을 받았고 모 회사 관계자분과 친분이 생겨서 오디션도 보고 연기준비를 했어요.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갈림길이었죠.
부모님의 조언이 중요한 시기였을 거에요.
중학교 시절은 아직 어릴 때니까 일을 준비하면서 공부도 하고 그렇게 일단 경험한 뒤 스스로 아니다 싶으면 전향해도 늦지 않게 생각하신다고 하셨죠.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게 후회가 남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고요. 그래서 연기를 준비하게 됐어요.
학업과 병행하는 게 힘들지 않던가요?
힘들었어요. 처음엔 그냥 일하더라도 학교에 잘 다닐 수 있고 수업엔 조금 빠져도 무리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아니더라고요.
친구들로부터 관심을 많이 받았을 거 같아요.
<왕과 나>할 때는 (유)승호 잘생겼냐고 제일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승호가 TV로 보는 것처럼 실제로도 잘 생겼니, 성격은 정말 왕자님 같니. (웃음)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어보고. 그리고 제가 구혜선 언니 아역을 하다 보니까 남자는 구혜선 언니 전화번호를 아냐고 묻고, 여자는 다 승호만 물어봤어요. (웃음)
처음 연기를 하게 됐을 때 나름 기대감도 컸을 텐데 실제로 부딪혀보니 어땠나요?
연기를 마냥 쉽게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나 봐요. 카메라 앞에서 대사만 외워서 표현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죠. 감정씬에서 자꾸 감정을 끊었다 다시 가곤 하잖아요. 바스트를 찍고 잠깐 쉬다가 카메라 각도를 달리 잡고 다시 찍는, 이런 식의 감정몰입을 반복하다 보니까 처음엔 적응이 어려웠어요. 감정연결이 뚝 끊기는 게 그림에서 자꾸 보이는 거에요. 감정연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다른 부분들도 다 신경 써야 하고. 머리카락이 약간 한쪽으로 기울었다고 다시 찍는 경우도 생기니까요. 물론 새로운 호기심과 재미를 느꼈던 부분이기도 하지만요.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어요. 학교에서 체계적인 것들을 익히는 게 현장에서 유용하던가요?
스크린이나 브라운관 연기를 현장연기라 한다면 학교에서는 연극에 관한 연기를 배우기 때문에 사실 배우는 것도 너무 많죠. 현장엔 마이크가 있잖아요. 그런데 연극에서는 발성으로만 소리를 크게 내서 뒤에 있는 관객에게까지 들리게 만들어야 해요. 학교에서는 발성연습을 하고, 호흡하는 법을 배우니까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죠. 연극을 해보고도 싶지만 제가 연극무대에 설 기회는 많지 않을 거 같아서 연극영화과에 지원한 측면도 있거든요. 연극적인 연기를 배우고 싶어서요. 그래서 지금 만족하고 있어요.
공부를 하기 전에 익힌 현장경험이 어떤 면에 있어서 플러스나 마이너스가 된다고 느낄 때는 없었나요?
플러스 요인이 될 때가 있고 마이너스 요인이 상황마다 다르죠. 사실 저는 현장에서 마이크가 있으니까 말을 적게 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수업할 땐 항상 발성으로 크게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면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일단 대사를 가지고 분석하거나 표정을 통해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친구들보단 경험이 있으니까 플러스 요인이 있기도 해요. 그리고 마이너스되는 부분은 학교에서 채우고요. 현장에서의 마이너스를 학교에서 플러스하는 거 같아요.
자기 얼굴을 스크린으로 볼 때 기분이 묘하지 않았나요?
이상해요. 좋기도 하지만 제 얼굴을 보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어떤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서 묘한 감정이 드는 거 같아요.
거울 보는 것과는 다르죠?
거울 보는 건 그냥 원래 제 모습을 보고 있는 거잖아요. 표정을 보고 고칠 수도 있고. 하지만 스크린의 모습은 연기니까 어쩌면 꾸며진 모습을 보는 셈이잖아요. 그것도 그렇고 카메라 앞에서는 제가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잘 모르니까 은연중에 버릇들이 나오기 때문에 스크린의 모습을 막상 보면, 아니, 내가 왜 저기서 왜 저랬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당연히 거울 보는 것과는 다르죠.
녹음된 자기 목소리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죠.
아! 진짜! 맞아요. 그런 거랑 비슷한 거 같아요. 내 얼굴이 아닌 거 같고.
그래도 자신의 얼굴을 스크린으로 보는 게 벌써 4번째에요. 나름대로 서서히 적응되는 바도 있을 텐데요.
이제 조금씩 제 얼굴에 익숙해져 가는 거 같아요. 사람을 처음 보면 낯선 감도 있지만 그렇게 조금씩 보면서 익숙해져 가는 거잖아요. 관객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처음 제 모습을 낯설어하실 수도 있겠지만 조금씩 지나면서 이런 친구가 있었지, 라고 생각하게끔 변화를 줄 수 있겠죠. 그러려면 많이 열심히 해야겠고요.
주변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도 어떤 반응이 있었을 텐데요. 아는 사람이 TV에 나오니 신기하다는 말은 안 하던가요?
처음에는 신기해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냥 ‘우리 딸 신문에 나왔더라. 힘들지?’ 이런 얘기만 하세요. 사실 큰 작품에 들어가면 부모님과 상의하기 때문에 부모님도 다 아시니까 후에 별말씀 없기도 하죠. 다만 친구들은 일단 모르고 보니까 약간 신기하다고 말하는 거 같아요.
<과속스캔들>의 황정남은 22살 나이니까 지금까지 맡은 역할 중에서 가장 성인에 가까운 캐릭터에요. 실제로 본인보다도 많은 나이고요.
일단 성인에 대한 연기라고 하면 막연한 느낌이 많이 들어요. 솔직히 제가 다른 성인캐릭터 연기를 했다면 모를까, 정남이는 그렇게 철든 엄마가 아니니까 어른이 아니라 성장하는 아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특별히 성인 연기로서의 부담은 없었어요. 나중에 철든 어른을 연기한다면 부담감이 생기겠죠.
미혼모를 연기한다는 게 사전에 마음 속으로 걸리진 않았나요?
제가 <과속스캔들>이 부담됐다고 말한다면 생애 첫 성인연기라기 보단 미혼모 연기라는 게 맞겠죠. 많이 부담됐어요. 나에게 6살짜리 애가 있다는데 내가 애를 키우는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싶어서 걱정한 부분이 많았죠. 그런데 애가 엄마라고 잘 따라준 덕분에 다행이었어요.
사실 엄마와 아들이라기 보단,
설마 동생 같아요?
누나와 동생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안 되는데.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22살짜리 엄마가 진짜 엄마처럼 보이면 그게 오히려 비현실적일 수 있죠. 누나 같은 엄마라서 22살짜리 엄마처럼 보이던 걸요.
어쩌면 그게 정남이가 애를 키우는 방법이었을지 모르죠.
좀 이른 질문이지만 혹시 연기하면서 자신이 엄마가 된다면 어떨까, 라는 상상해보진 않았나요?
했죠. 내가 엄마가 되면 어떨까, 라는 생각부터 기동이 같은 아들이 있다면, 까지. 그래서 결혼 늦게 해야겠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아이는 생각 좀 해보고……
아니, 어쩌다 그렇게 결혼에 대해 염세적인 생각을 품게 된 거죠? (웃음)
모성애를 느끼기 위해서 애를 끼고 살았어요. 애도 계속 저를 엄마라고 부르면서 많이 따랐고, 그렇다 보니까 사실 엄마의 힘겨움을 많이 느낀 거 같아요. 작품을 끝내고 엄마한테 효도 많이 해야겠단 생각도 했거든요. 제 컨디션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무조건 아이가 1순위가 되고 그 다음에 제가 되야 하더라고요. 촬영 때문에 힘들어도 아이가 와서 반갑게 인사할 땐 안아줘야 하고, 피곤해서 좀 쉬고 싶은데 그 초롱초롱한 눈으로, ‘엄마, 내가 신기한 거 발견했어. 빨리 와서 봐.’ 이러면 가서 봐야죠. 그리고 아이들은 항상 보는 것에서 끝내면 실망해요. 리액션이 있어야 되죠. 정말 신기하다, 내지는 정말 예쁘다, 이런 리액션이 있어야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게임도 많이 하는데 게임 도중에, ‘엄마, 이거 봐요. 몇 탄까지 갔어요.’ 이렇게 얘기하면서 게임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죠. 그럼 분장 고치면서, ‘아, 그랬어요? 우리 아들 진짜 멋있다.’ 이렇게 대꾸해줘야 기분이 좋아져요.
그 정도면 좋은 엄마였네요.
어쩌면 철이 들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부모님에게 효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지속적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차태현 씨가 마케팅 과정에서 많이 부각됐지만 본인의 캐릭터가 이끌어가는 드라마 라인과 감정선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요.
사실 조금 나눠가진 부분이 없진 않죠. 다만 주연으로서의 부담감을 아빠(차태현) 혼자서 짊어지고 가신 셈이죠.
극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사실 <울학교ET>와 같은 조연으로 촬영한 경우가 많으니까요. 감정선의 흐름을 보는데 있어서 갑자기 전체적인 영화를 봐야 하는 때가 온 거죠.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사실 아빠가 이끌어 주신대로 따라가는 게 제일 중요했던 거 같아요. 그런 걸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나이차가 많이 나는 선배와 호흡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먼저 다가오시는 편은 아니셨지만 약간 친해지다 보니 쉽게 마음을 여시는 편이셨어요. 워낙 동안이시고 젊게 사시던데요.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유머도 잘 아시고. 다만 옛날 영화 얘기할 때 세대차이가 느껴지긴 했죠. 어쩌다 ‘코난’ 얘기를 하게 됐는데 아빠가 ‘요즘에도 코난을 해?’ 그래서 ‘코난 해요.’ 그러면서 얘기하다 보니까 서로 내용이 다른 거에요. 그래서 ‘아빠, 어떤 코난 말하는 거에요.’ 했더니 ‘<미래소년 코난>이지.’이러시는 거에요. 저는 <명탐정 코난>이었거든요. (웃음) 영화 중에 노래 선정도 아빠가 많이 해줬죠. ‘아마도, 그건’이 최용준 씨 원곡이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전 서영은 씨가 리메이크한 노래만 알고 있었죠. 장혜진 씨 노래도 그랬고. 그런 부분에서 차이가 있긴 했죠.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장난도 치고 얘기할 때 그런 건 없었어요.
상대적으로 차태현 씨는 본인 덕분에 자신의 나이를 뼈저리게 깨달았을 텐데. (웃음)
아빠가 늘 충격 받더라고요. (웃음) 사실 아빠는 이제 아들도 있잖아요. 혹시 아빠 진짜 아들 찾으셨어요?
아, 모르고 봤는데 나중에 듣고 알았어요. 말미에 나왔더군요.
진짜 닮았어요. 그런데 아빠가 땀이 많아요. 그런데 아들도 요즘 땀이 너무 많이 나서 걱정이라고 고민하세요. 땀 많이 나는 사람의 고충을 잘 아니까 아들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자기보다 더 흘리는 거 같대요. 그리고 아빠 목이 두꺼운데 아들도 목이 두꺼워서 셔츠가 잘 안 맞는다고 걱정하시고. (웃음)
당돌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이 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아직 떨려요.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아요. 몸이 경직되는 것까진 아니지만 카메라 앞에서 두근거리는 게 제 마음대로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아직 그에 대한 고민도 많아요. 언제쯤이면 카메라 앞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을까, 라고.
연기가 하고 싶은 일이라 했지만 연기자로서의 길에 얼마나 확신을 갖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그건 아까 말한 그 갈림길에서부터 지금까지 제 자신에게 항상 끊임없이 하는 질문이에요. 아직 일에 대한 100%확신은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간혹 촬영하다 보면 제가 이 일을 선택한 게 잘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물론 연기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 흥미를 느끼는지 판단할만한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아직 일단 연기가 가장 재미있고 연기에 흥미를 느끼니까 그럴 수 있겠죠. 제 영화를 보시고 관객이 웃으면 이 직업에 보람을 느끼는 거 같아요. <울학교ET>의 리뷰 중에 영화를 보고 학창시절 선생님 전화 한 통 드렸다는 글을 봤어요. 제가 나온 영화가 누군가에게 어떤 삶의 영향력을 미치거나 기분이 좋아진다고 할 땐 이 직업을 택한 것에 대해서 즐거움을 느끼죠.
반면 뭔가 뒤늦게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 일은 없나요?
사실 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못 갔어요. 일을 선택하면서 친구관계에서 잃게 되는 게 많이 생기죠. 일 때문에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혼자 생각할 시간도 없어지는 거 같고요. 아직 전 아니지만 다른 선배배우들이 방송 같은 곳에서 종종 인기만큼 자기 사생활이 없어진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자기는 나가서 영화도 보고 싶은데 제약을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 결국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이제 사랑을 꿈꿀만한 나이가 됐어요.
그렇죠. 하지만 그것도 어쩌면 잃는 것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죠? 왜냐면 여배우로서의 이미지에 남자친구는 플러스보단 대부분 마이너스로 작용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배우에게 사랑 경험이란 중요할 거 같아요. 특히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하잖아요.
어떤 분이 제게 여배우는 사랑을 해봐야 한다고 그러시는 거에요. 왜냐고 했더니 사랑을 겪어보고 이별을 겪어봐야 한층 성숙된 연기를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지만 아직 경험해보진 못해서 전 아직 잘 모르죠.
사람마다 다르니 완벽하게 맞는 말이라 하긴 힘들죠. 그렇다면 혹시 개인적으로 존경하거나 동경하는 배우가 있나요?
전 아직 제 색깔을 찾고 있는 중이라서 어떤 배우가 되겠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다만 그냥 존경하는 배우나 연기적으로 닮고 싶은 분을 말하라면 전 배종옥 선배님이나 김해숙 선배님을 존경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연기적으로 그 분들을 닮고 싶죠.
연륜 있는 분들을 동경하는군요.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웃음) 어쩌면 제가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분들의 연기를 보면서 같이 울거나 웃게 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벌써 여기저기서 제2의 국민여동생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고 있던데.
글쎄요. 사실 그런 문구를 저에게 붙여준다는 점에서 일단 감사해야죠. 하지만 그에 따르는 부담감도 사실 많아요. 원래 국민여동생이라 불리시는 문근영 씨가 해온 것이 많다 보니까 그러다 보면 제게 주는 기대감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원하든 원치 않든 그 분과의 비교가 있을 수도 있고. 그런 점에 있어서 그 분이 워낙 잘했으니 부담이 있죠. 제가 따라가야 할 것 같은, 그리고 저는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는데 제2의 누구라고 하면 그 분과 똑 같은 길을 걸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 면에 있어서 거부감은 있죠.
배우로서 현장에 있을 때의 자신과 그냥 일상에서 친구들과 있을 때의 본인 사이에 간격이 조금씩 느껴지지 않나요?
계속 왔다 갔다 하게 되는 거 같아요. 현장에 있을 때는 배우 박보영으로서의 책임감이나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고, 마음에 담고 표현해내면서 정해진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또 현장에선 한국영화가 힘들다니 이런 얘기를 하지만 친구들을 만나면 얘기하는 게 주제나 소재에 대한 나이대가 맞기 때문에 서로 관심사가 비슷해져요. 현장에서 하지 못하는 사적인 얘기들을 많이 하니까 할말도 많아지는 거 같고요.
저번에 제작보고회에서 차태현씨가 짓궂게 폭로했죠. 원빈 좋아한다고. (웃음)
이제 그거 수습 안돼요! 인터뷰 할 때마다 영화제목이 <과속스캔들>이라고 꼭 스캔들 나고 싶은 배우가 누구냐는 질문을 주시거든요. 원래 그 날도 ‘없다’의 ‘없’이 목젖까지 나왔는데 갑자기 옆에서 (차태현이) ‘왜, W있잖아.’ 이렇게 장난치셔서 종잡을 수 없는 사태가 돼버렸어요. (웃음) 사실 제 친구들에게 말할 때 도진 씨라고 부르기도 하고, 정말 원빈 님이라고 부르거든요. 저에겐 가까이 하기 힘든 분이고 팬으로서 좋아하는 배우죠. 이성적으로 이상형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좋아하는 배우의 이미지가 더 맞을 거라 생각해요.
본인을 좋아하는 팬도 생길 거에요. 팬을 만나게 되면 어떨까요?
저도 생기겠죠. 나중에? 그럼 일단 기분 좋을 거 같아요. 제가 지금 이렇게 원빈 님을 좋아하는 것처럼. (웃음) 팬이라는 건 좋아하는 사람처럼 생각하면 기분 좋아지고 그런 것일 수도 있죠. 나중에 어떤 분이 좋아한다고 말하면 저도 기분이 좋아질 거 같아요.
배우로서 혹은 연예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대중 앞에 서야 하는 경우도 생길지 몰라요. 마음은 아픈데 웃어야 한다거나.
저번에 '박보영 악플'이라는 말이 검색어 순위에 떴어요. 어떤 기자 분들의 짜깁기로 작성된 기사에서 비롯됐죠. 악플 내용은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 제2의 문근영이란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거였는데 기사 확인해보니까 이게 합쳐진 거 같아요. 사실 제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오해가 생기면 제 속이 많이 상하지만 사실 그런 걸 알아주는 사람은 주위사람뿐이잖아요. 그걸 보는 네티즌 분들이나 관객, 시청자들은 제 이야기를 변명처럼 이해할 수 있고, 그냥 기사로서 접하는 게 편하니까.
브라운관을 거쳐 스크린으로 진출했어요. 다른 공간에 대한 욕심은 없나요?
연극 무대에 대한 욕심은 항상 있었어요. 다만 주변 환경적인 문제로 아직 이뤄지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단 연기가 안되니까요. (웃음) 연극 연기는 어떻게 보면 더 무거운 연기일 수도 있지만 사실 호흡이 길어야 하죠.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고 배운 부분들이 쌓이고 쌓이면 할 수 있을지 몰라요. 다만 지금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극무대에 오르면 제 자신이 싫을 거 같아요. 보시는 관객들도 편하진 않을 거고요.
그럼 연기는 재미있어요?
이건 정말 재미없으면 못 버틸 일 같아요. 억지로 스타성을 노려서 하는 거라면 버티기 힘들 거에요. 제가 경험을 많이 해보진 못했지만 주변의 지인들을 보면 참 힘들구나, 라고 느낄 때도 있으니까요. 무명 시절을 많이 겪는 분도 있고, 단지 인기를 얻으려 하는 일이라면 스트레스 쌓아가며 잃어야 할 게 너무 많아요. 그래서 그걸 참고 견디는 인내의 시간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만화를 즐겨보나? 굉장히 즐겨보는 편은 아니다. 유명한 만화들은 많이 봤지만 찾아서 보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마음에 드는 작가의 전작을 찾아보는 스타일이다. 작가 전작주의랄까.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하, <내 생애>)에서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원작 만화인 ‘서양골동양과자점’이 살짝 등장했다. 그전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뒀나?
내가 처음 본 건 6년 전이고, 곧바로 다음 영화로 만들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언젠가 내 영화 라인업이 될거라 생각하고 판권을 사뒀다. 의도적으로 넣은 장면이다. 물론 PPL은 아니고,(웃음) 아는 사람은 알았겠지만 그 장면에 관련된 씬이라 생각했으니까. 전남편이 게이였던 신경정신과 여의사가 게이가 나오는 만화를 통해 게이에 대한 열린 시각을 본다고 생각하니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고, 30대 여자의사가 만화책을 지니고 다닌다는 상황으로 권위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기도 했다. 만화책 갖고 다니는 30대 여의사라는 귀여운 소품으로 활용된 거 같다.
오래 전부터 동성애를 소재로 삼아왔다.
95년에 내 첫 작품인 단편 <허스토리>를 만들었는데 <여고괴담2>가 이 작품의 소재나 줄거리를 확장시킨 작품이었다. 그 때 처음 우리나라에서 게이 커뮤니티가 처음 생겼고, 게이 친구도 처음 만났다. 게이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나 선입견, 편견이 심하고 폭력적인 시기였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 시대에 대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토대로 삼아 영화를 시작했고 그게 굉장히 터부시된, 환영 받지 못하던 이야기였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오기도 있었다. 무슨 인권운동처럼 다루기 보단 이야기 속에 잘 녹여서 영화로서 환기시켜줄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에 과감히 시도했다. 성공적인 면도 있었지만 굉장히 불편해했던 사람도 있고, 만드는 과정도 쉽지 않았지.
<앤티크>자체가 시대의 변화를 대변하는 셈이다. <앤티크>처럼 말랑말랑한 소품 드라마 형식의 동성애 영화를 그 당시에 생각이나 했을까. 지속적으로 동성애를 소재로 삼아왔으니 그런 변화가 민감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벌써 <여고괴담2>로부터 9년이나 지났으니 많이 흘렀지. 강산도 변할 시기니까. 예전엔 영화 매체의 차이도 있고 인터넷이 없던 시대라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호기심이든 무서움이든 어떤 식으로의 관심이 있고 부딪히고픈 욕구가 있다면 원하는 걸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덕분에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라는 표현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여고괴담2>를 만들 당시는 어땠나?
<여고괴담2>를 만든 1999년은 영화 홈페이지라는 게 처음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데서 하던 낙서를 인터넷에 쏟아내고 서로 친구를 만들고 모임을 만들어서 자기들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기도 하고.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나 흥분을 접하게 되니까 영화는 짧고 간단한 2시간짜리 상품이라 일순간 소비되고 사라질 수도 있지만 그 잔상이 어떤 사람들에겐 굉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잠시나마 느꼈다. 물론 그때 공포영화의 ‘공’자도 모르는 민규동은 자폭하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웃음) 어쨌든 누군가 자극을 받고 자기 감정을 표현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아무런 자극이 없어서 이러거나 저러거나 하기보단 자기의 가치관을 표현하게 만들고 그 순간에 발생하는 충돌로 자기 가치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으니까.
<내 생애>에서는 여고생에서 중년으로 동성애의 대상이 바뀌었다. 어쩌면 더 과감한 선택일 수도 있고. 천호진, 김윤석이라는 낡은 남자들의 로맨스를 가져갔는데 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포스터에서 잘렸다. 시사회에서도 내가 무대인사하는데 김태현이란 배우가 부모님과 객석에 앉아있더라. 부르지 않은 거지. 왜냐면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걸 사전에 절대 노출하면 안 된다고 상의했나 보더라. 심지어 홈페이지에 스틸 사진도 없다. 개봉 후 한달 후까진 그 배우들은 인터뷰도 안 된다고 막아놨었다. 사실 실제로 보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그것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두려워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거지. 그래서 배우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작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아직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이구나, 라고 느꼈다.
그런 이야기가 요즘은 트렌드가 됐다.
난 이렇게까지 전면적으로 게이의 정체성이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 못했다. 개인적으로 굉장한 애정이 있는 캐릭터지만 트렌디하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게이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고 관심사가 됐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다고 편하게 이야기될만한 세상인 거지. 10대들 촛불집회 나오는 것처럼 저변도 넓어졌고 그냥 편한 이야기가 된 거 같다. 내 초기영화가 정체성을 고민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뤘다면 지금은 이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성욕을 가졌는지 뻔뻔하게 이야기할 정도로 보통 사람들처럼 그걸 보통의 욕구로 사회에 드러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아무리 불편한 대상이라 해도 솔직한 사람은 편해지기 마련이다. 거리가 좁아지니까. 편한 인물이 등장했고 그만큼 편하게 보는 거 같다. 세상을 진보시키거나 개혁시키겠다는 큰 욕망은 없지만 사람들 자신이 조금 더 넓어진 거 같다고 얘기해줄 때 내겐 즐거운 일이다. 작은 영화가 사람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으니까.
<앤티크>엔 4명의 주된 캐릭터가 등장한다. 각자 비중이 다르지만 개개인의 캐릭터를 조각케이크처럼 뚜렷하게 보존하고 조각케이크 같은 사연을 통해 전체적인 케이크의 구도를 완성하는 것이 관건이었던 거 같다.
난 화면 자체에 깊이가 있는 걸 좋아한다. <앤티크>는 레이어(layer)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공간에 포커스가 맞는 레이어를 위해 인물들을 계속 연속적으로 뒤쪽에 배치하는 거지. 맨 처음 선우가 나오고 기범이가 나오고 수영이가 나오고 이런 식으로 화면이 흐름을 타는데 그걸 이용해서 주제 라인도 흘러갈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서브젝트의 병렬을 만든다고 할까. 선우와 진혁의 멜로 드라마가 가장 큰 라인이지만 내면의 상처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진혁이 한 사람 이야기인 거 같기도 하다. 크게 보면 네 사람이 얽혀서 앙상블을 만들기도 하고,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보이게 만들려고 시점들을 계속 바꿔서 입장시키고 퇴장시키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내 생애>같은 경우는 씬들이 계속 바뀌고 인물들이 가끔가다 만나지만 <앤티크>는 한 공간에서 계속 부딪히니까 다른 방식으로 찾아가게 되더라. 사실 지금 최지호가 맡은 수영이라는 캐릭터가 없는 세 명짜리 버전의 시나리오도 만들었었다. 인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세 명만 깊게 가져가는 이야기로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단순한 조연이 아니다 보니 제하기가 아깝더라. 진혁이 어렸을 때부터 20년간 곁에서 지켜줬던 친구라서 주인공의 입체감을 강화시켜주는데 기여를 하는 측면이 있다.
그만큼 비중이 소외될만한데 다른 캐릭터랑 평형을 맞추는 느낌으로 완성됐다.
시나리오에서는 비중이 많지 않았지만 촬영 중에 본인이 많이 찾아갔다. 순간순간 자기 자리를 찾거나 루트를 잘 잡더라. 실제로 텍스트 비중보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얻어간 캐릭터다. 1분 동안 다른 캐릭터가 막 수다 떨면서 심각하게 고민을 얘기하면 마지막에 이상한 한마디로 포커스를 다 가져가는 거지. 포인트를 하나 짚어준 건 있었다. 어느 씬을 찍든 병풍처럼 서서 앞에 있는 사람의 대사를 들어주는 척하지 말고 그 순간에도 그냥 본래 자기 욕구에 신경 쓰라고 거.
<처녀들의 저녁식사> 남자버전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남자들의 커밍아웃을 수다스럽게 다룬 이야기는 흔치 않으니까.
남자들의 욕구는 너무 단순하고 뻔하지 않나. (웃음) 대부분 남자들 중심이기도 하고. 난 나중에 완성된 영화를 보고 <섹스 앤 더 시티>가 많이 떠올랐다. 도시에서 좌충우돌하는 남자들이 어느 순간 자기 욕구를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려진다는 게.
시대적으로 화두가 될만한 타이밍을 잘 잡았다.
난 조금 앞서 나갔다고 생각했었다. 화두가 어쨌든 호기심이 담기거나 자극적이거나 갇혀있다고 생각한 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못한다는 의미겠지. 그 안에 분명한 재미가 있는데 그걸 모른다고 생각해서 먼저 치고 나가면 지평을 넓힐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런 면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준비가 너무 오래 걸렸다. 덕분에 되려 지금 생각보다 편하게 받아주니까 반가운 일이다. 다시 말하면 2년 반 전엔 그게 이쯤이면 잘 맞을 거 같다고 판단할만한 것이 아니었겠지.
CG를 활용한 이미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만화적인 표현력을 영화로 이전한다는 건 질감의 차이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 각색하면서 오는 일반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소설이나 만화나 디테일들이 쌓여서 하나의 인상으로 만들어진다. 그걸 다 제하고 간편하게 만든다 해도 그 이상의 것을 남길 수 있을지에 대한 기술적 고민이 생긴다. 그리고 연재된 만화라서 맥락이 한 줄로 가는 게 아니라 왔다갔다하고, 그러니까 그걸 요약해서 고갱이를 잡아내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기본적으로 있었다. 만화다 보니까 오히려 상상력에 제한을 받는 측면도 있었고. 본래 그림들이 있다 보니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그림이 있어서 어떤 걸 선택할 때마다, 이래야 된다, 저래야 한다, 부침이 많았다.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장르가 섞여있다. 그만큼 이미지의 대조도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나?
스릴러와 로맨틱 코미디가 동시에 있지만 주안점은 둘 다 놓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인물의 화려함과 내면의 어둠에 따라 영화도 굉장히 밝고 어두움의 차이가 크다. 그 격차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켜서 인물이 자신을 숨겨가듯 영화도 그 형식의 맥락에서 현란함과 가벼운 느낌을 갈 수 있는 만큼 가보자라고 생각했다. 사실 실제로 구상했던 부분은 더 많지만 예산이나 다른 이유로 모두 구현하진 못했다. 우리는 본 게 많지만 봤던 것이 모두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시간과 비용과 사람 문제가 발생해서. 원래 상상은 좀 더 편하지 않나.
와이프(wipe)나 컷어웨이(cut away) 같은 장면 전환 기법을 많이 활용했더라. 전작 <내 생애>에서도 컷어웨이를 많이 활용했는데 그런 식의 테크닉을 선호하는 편인가?
<내 생애>는 주로 대사나 상황에 씬을 매치 시켰지만 이번엔 그냥 넘어가는 씬이 별로 없다. 아마 많은 사람의 이야기, 긴 시간의 이야기를 압축시켜가는 방식으로 그런 방법들을 찾게 된 것 같다. 최대한 맥락을 찾아서 상상력이 가능한 맥락의 재미를 찾아보려고 했고 그걸 하나의 고유한 스타일로 잡아봤다. 등을 기댈 여유를 안주고 갈 정도의 리듬이랄까. 어떤 사람에겐 굉장히 빨라서 잠깐 눈 길게 깜빡 하면 놓칠만한 것일 수도 있고. 씬의 농도가 짙어서 한번에 다 파악이 안될 정도지만 자꾸 보면 그 안에 정보가 굉장히 많다는 걸 알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영화를 연상해 봤다.
주지훈이 타치바나와 어울리지 않다는 원작 팬들의 성화가 종종 있더라. (웃음)
사실 30대 중반의 이미지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고등학교 시절이 나오니까 설정은 30대 초반으로 했다. 30대가 고등학생으로 나오면 리얼리티가 많이 떨어지니까 고등학생 대역을 써야 한다. 그런데 난 실제 대역보단 한 인물이 10년을 넘기는 사이의 이미지까지 연기해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을 전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변한 느낌을 주는 게 필요했다. 그리고 난 적절하게 연령을 맞췄다고 생각한다. 원작이 남자인데 여자로 바뀔 수도 있고, 심지어 노인으로 바뀔 수도 있지. (웃음) 그런 것에 민감해한다는 게 그냥 귀엽다. 애착이 얼마나 있는가를 드러내는 방식이니까. 다만 영화는 영화대로 그 안에서 어울리는 게 있으니까 난 전혀 개의치는 않는다.
원작이 그만큼 인기가 있는 작품이라 더 그런 거 같다.
양적으로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닌 거 같다. 다만 한 사람에게 어필하는 강도가 강한 거 같다. 대사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저렇게 자기들 것이 너무 많아서. (웃음)
사실 남자들이 쉽게 접할만한 작품이 아니다. 만화를 즐겨보는 편도 아닌데 이 원작을 접하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감독 친구에게 추천을 받았다. 지금 <키친>이란 요리 영화를 만든 친구인데 레퍼런스로 그 만화를 보고 나에게 추천해서 읽어봤다. 영화로 만들긴 아주 어렵겠지만 영화적인 순간도 있고 재미있다고 느꼈다. 젊고 어린 여자들의 전유물 같은 하이틴 로맨스가 아니라 깊이와 울림이 있는 매력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서 이 작가의 다른 만화도 전부 다 읽었다. 사실 어렸을 땐 만화가 불온 서적 아니었나. 아이들을 불량한 세계로 인도하는 만화와 오락실. (웃음) 그래서 만화가게에서 몰래 만화 보다가 야단을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난 소설이 익숙하고 편한 세대였던 거 같다.
‘앤티크’의 미장센도 공을 들인 느낌이다. 고전적이면서도 모던하다 할까. 제목부터 사실 기묘하다. ‘서양골동양과자점’이라니.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름이지. (웃음) 어떤 생각이 드나?
경성 시대 이름 같더라. (웃음)
앤티크를 위한 장소로 기와집이 많은 종로의 한적한 골목을 선택했다. 진혁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자기가 찾고 싶은 사람이 찾아올만한 케이크 가게를 만드는 게 목표다. 빈부나 나이나 계급 같은 정체성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편하게 올 수 있는 가게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케이크 이름들이 대부분 프랑스어라서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 서구적인 공간이 아주 오래된 쌀집이 있었을 법한 건물에 들어온다는 게 영화적인 주제와도 맞는 느낌이 있었다. 우리는 골동품 같은 상처 하나씩 안고 산다, 라는 영화의 전제에 맞게 조화를 맞추려고 했다. 앤티크는 시간이 오래 가서 가치가 생기지만, 케이크는 갓 구웠을 때 가치가 생기고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점점 없어진다. 영화에서도 이야기하지만 1837년산 접시에 구워서 나온 지 5분 밖에 안된 케이크처럼, 그런 조화가 인생을 음유하는데 적절한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오페라와 케이크를 비유하는 인트로에서 출발한다. <내 생애>에서도 시작은 괴테로, 끝은 니체로 갔다. 재수없지 않나? (웃음)
나름대로 취향을 대변하는 측면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을 때 책 앞에 항상 짧은 발문이 있다. 그게 나한테는 너무 중요하다. 아마 작가가 자기 이야기와의 연관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한 줄로 응축하는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그런 것들을 외우는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보는 것 자체가 너무 싫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게 강요되는 방식으로 들어가거나 젠체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영화적 맥락으로 마땅한 자리가 있을 경우엔 그렇게 표현이 가능하다. <앤티크>엔 어려운 케이크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가장 쉬운 케이크 이름이 오페라였고, 오페라는 영화처럼 어떤 이야기와 형식을 가지고 표현하는 고전적 양식의 예술이니까 중의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맥락을 통해서, 오페라라는 케이크가 인생의 무대 같은 것이다. 그 맛에 중독된 사람은 반드시 찾아오게 돼있다. 이런 얘기가 가능했다고 본다. 나는 그런 프롤로그가 씨뿌리기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걷어야 되니까.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저마다 장문으로 펼쳐질 만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이를 축약하고 개별적인 맥락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을 것 같다.
보통 한 달 이상 편집을 해본 적이 없는데 4개월이나 걸렸다. 물론 이번에 컷도 많았지. 이천이백 컷에 74회 차였으니까. 생략된 뮤지컬 컷도 있다. 뮤지컬은 한 씬만 해도 평균 5백 컷씩 쓰게 되더라. 그래서 기술적으로 많은 컷을 배열하는 씬 안에서의 문제도 있었다. 가장 큰 고민은 아무래도 네 명의 이야기가 한 사람의 주변인처럼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각자 한 사람의 이야기로 지각될 수 있는 리듬이나 맥락을 찾는 것이었다. 한 1년 정도 시간을 더 주면 1년 내내 편집할 거 같다. (웃음) 적절한 순간에 끊어야 된다. 그게 그 시대에서는 최선의 결과가 되는 거지.
원래 케이크는 좋아했나?
좋아하는 편이다. 담배를 안 펴서 그런지 힘들 땐 단걸 찾는 편이다. 다만 케이크는 비싸서 자주 먹진 못하고. (웃음) 군대에서 먹었던 케이크 맛을 잊을 수 없다. 프랑스 유학 때도 익숙하게 접했었다. ‘꼬르동 블루’라고, 오드리 햅번이 <사브리나>에서 다녔던 유명한 제빵 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옆에 살았는데 학교에서 실습하고 남은 케이크를 가져와서 배고픈 외국인들에게 주곤 했다. (웃음) 그래서 낯선 음식은 아니다.
만약 케이크에 대해 잘 몰랐다면 진혁과 같은 양상이 아니었을까 싶더라. 케이크를 전혀 모르던 아마추어가 케이크에 대해서 완벽한 프로페셔널이 되는 과정이랄까.
그건 같은 과정을 겪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케이크 리스트만 해도 몇 페이지였는데 우리 조감독 중에 한 명이 케이크 담당 조감독일 정도였다. 비슷한 이름이 나오면 안되기 때문에 끝없이 새로운 이름을 찾고, 어떤 이름은 너무 어려우니까 안되고, 재료를 바꾸고, 언제 케이크가 나올지 리드미컬하게 조율하고, 그 안에서 케이크 스스로도 자기 자리 찾느라 고생이 많았다. (웃음) 준비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만드는 어려움도 컸다. NG나면 컷하고 다시 가야 되는데 한번 깨물면 처음 것이 다시 나와야 된다. 다음 컷으로 갈 땐 카메라 위치도 바뀌고. 정말 너무 많은 케이크가 필요하더라. 세트장 밑에 공장을 차려놓고 케이크가 바로바로 올라왔었는데. 3천여 개 정도를 만들었다고 했다. 파티쉐들이 매일 잠도 못 자고 굽고 구워도 계속 모자랐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안 온다고, 어떻게 케이크를 기다리느라 촬영을 못하냐고 하소연하고. 그리고 빨리 못 찍으면 조명 때문에 다 녹는다. 녹으면 데코레이션이 바로 무너지기 때문에 모두가 케이크만 나오면 무서워했다. 또 요리 영화들이 겪는 공통적인 어려움이겠지만 수없이 쌓이는 먼지도 적이었고.
케이크가 가장 어려운 난관이었겠다.
아무도 예상 못했던 난관이었다. 회차가 늘어나거나 예산이 느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웃음)
사실 먹는 씬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먹는 컷이 그래서 많이 줄었다. 먹으면서 진행하면 열두 배수 정도는 있어야 되는데 나중에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해서 그냥 안 먹고 보는 씬으로 가거나 씬 자체를 바꾸게 됐다. 조희봉 씨 나오는 씬에서도 안 먹지 않나. 사실 그게 어느 정도 먹은 상태로 점프컷이 가야 하는데 그 데코에 한 4시간 걸리니까. 이건 먹으면 안 된다. 케이크에 주의가 안 가게 찍자. 그래서 카메라 위치 바꾸고 살짝 넘어가는 거지.
아무래도 유아인이 나오는 씬이 만만치 않았겠다.
아인이는 많이 먹었다. 끊임없이 먹고 대부분 먹으면서 대사할 때도 많고. 잘 먹더라. (웃음) 그런데 난 3개월 동안 하나도 못 먹었다. 믿어지나? 한 피스(piece)도 못 먹었다. 늘 모자랐고 스태프들 동작이 얼마나 빠른지 우연히 남은 케이크는 잔인할 정도로 해체됐다. 그날 안 먹으면 못 쓰기 때문에 그날 촬영 끝나고 뭐 하다 보면 다 없어졌지.
기자시사회 때 상영 전 무대인사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영화를 보고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본인이 촬영장에서 느낀 바가 아닐까. (웃음)
맞다. (웃음) 어떤 영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하면 할말이 많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케이크만 보면 토할 거 같아요, (웃음) 이런 감상이 나오면 안되니까. 영화를 다보고 나면 케이크 한 조각 먹고 싶은 생각이 들고, 케이크를 먹으면 영화 생각도 나고, 영화가 남겨준 잔상이나 잔향을 다시 한번 음미해보고 싶은 욕구가 남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적으로 발랄하게 포장됐지만 긴장감이 요구되는 스릴러적인 측면이 다른 표정처럼 끼어든다. 대비되는 온도차가 크기 때문에 이를 배열하고 융합하는 과정이 중요했을 거다. 나름대로의 모험이었다고도 생각된다. 포스터처럼 발랄한 이미지로 포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많은 사람들의 그런 요구가 있긴 했다. 그런데 난 그리 발랄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좀 침잠돼있고 조용한 사람이다. 내게 익숙한 게 잘 어울리는 거 같고 편하다. 내가 만화를 봤을 때 막 끌렸던 부분도 힘겨울 수 있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하는 시선이었다. 난 가렵지 않은 부분에 훨씬 끌렸었고 그걸로 이야길 시작했다. 원래 이야기보다 이렇게까지 더 무거워져도 될까, 싶을 정도로 생각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다만 그런 것들에 무게 중심이 치우치지 않게 하려고 가벼울 수 있는 순간에서는 발랄하거나 코믹하게까진 생각하지 못했지만 자연스럽고 편한 이미지들을 많이 구상했다. 반대로 진지할 땐 그것이 하려고 했던 본연의 이야기니까 강하게 해보려고 애썼다. 결과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발랄하게 풀렸다.
배우들의 이미지가 정형화되지 않은 젊은 배우들이었기에 얻어지는 장점도 있었던 거 같다. 캐릭터 자체가 배우의 캐릭터로 대변되기 보단 확실치 않은 배우의 캐릭터가 영화 속 캐릭터의 여지를 더 확보할 수 있게 만든 측면이 있다.
이 인물이 그냥 그 인물 같은 거지. 기존에 형성된 이미지가 많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내가 작업할 때 편했던 부분이다. 왜냐면 기존의 것을 벗고 새롭게 간다는 것을 유념치 않고 그냥 구상한대로 마음껏 움직이고 놀아도 되니까. 물론 경험들이 주는 순발력이나 영화 시스템에 대한 이해, 투자와 관련한 어떤 신뢰, 이런 부족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영화적 텍스트에서는 분명 그런 것들이 힘을 발휘한 면이 있었던 거 같다. 나이와 육체적인 조건을 맞추는 것도 신인들이 훨씬 용이했던 거 같고.
모델 출신 배우들이 기용된 것도 고의적 아닌가.
어쩌면 현실적이지 않은 이미지인데, 내면의 고민들이 겉으로 보이지 않는 느낌의 화려한 친구들이 기용된 거 같다.
동성애자의 이미지에 대한 오해가 형성되진 않을까.
그런데 영화에 게이가 너무 많이 나와서. 예를 들면 수염을 기른 고창석 씨가 게이바 바텐더로 나오는데 자기 게이 손님을 누가 뺏어가는 걸 질투하는 표정을 날리기도 하고. 선우 애인이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그렇고. 여러 부류의 캐릭터들이 나오지 않나. 그런데 주인공들은 원래 영화에서 다 멋있으니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아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조차 선입견이 될 수 있다. 그건 영화적인 표상이고, 기호니까.
캐릭터들의 심연에 있는 상처를 끌어올리는 방식이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이해라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그리고 나름 심각한 상황에서 인물들은 그 고백에 깊게 개입하기 보단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넘기고 서로에게 기댄다.
시선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다. 공통적으로 엄마의 사랑을 못 받은 결핍된 남자들이다. 엄마로부터 버림받거나, 엄마가 무력했거나, 나빴거나 아니면 너무 과했거나, 이런 엄마들로부터 자란 아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들을 보여줄 때 이게 굉장히 슬프고 힘든 거니까 좀 많이 같이 슬퍼해줘, 란 식으로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작게 넘어가지만 절대 잊혀지진 않는, 동정과 연민을 넘어서는 다른 방식의 소통을 보여주고 싶었다. 상처가 잘 치유되지 않는다는 본질적인 시선들을 내세우고, 치유가 안될 건데 그걸 왜 꽁꽁 감아두고 힘든 척하면서 사느냐,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런 표현방식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할 수 밖에.
<앤티크>만큼 남자들끼리 껴안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도 드물다. (웃음) 그게 어색하지 않은 건 단지 게이가 등장해서가 아니라 남자들간의 연대가 느껴지는 덕분이다.
사실 이 영화는 여자들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껴안는 장면도 많고 키스하는 장면도 있지만 스킨십을 통해 동지가 되는 순간들을 표현하고 그 순간의 따뜻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영화적 결론으로도 중요했다. 끝까지 그게 표현 안되면 기능적으로 각각 자기 역할만 맡아서 겉돌 뿐이니까. 촬영할 때도 그런 느낌이 있었다. 이성애자나 동성애자가 껴안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포옹 외에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 외에 다른 소통 방식이 없을 것 같은 순간에 그게 적절하게 일어났다는 느낌이랄까. 진짜 남자들은 잘 안 그런데도 그 순간이 잘 표현됐다면 좋은 거지. 사실 내가 남녀 불문하고 껴안는 걸 좋아한다. 내 문제인가? (웃음)
<앤티크>는 사실 남자들의 연대이면서도 어떤 동세대 남자의 연대기 같다. 젊은 청년들의 연대랄까. 젊은 세대를 관통하는 자립기 같은 느낌도 있다. 아버지 세대를 극복하고 싶은 동세대의 연대랄까. 어른의 몸을 가진 애들이 어른으로 성장해나가는 자립의 이야기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앤티크는 일종의 합숙소가 되는 셈이고.
명백히 성장영화라고 할만한 이야기다. 세대간의 관계라고 생각해보면 아까 엄마 얘기했듯이 상처받은 아이가 되기까지 큰 역할을 한 건 부모님들이니까. 진혁이는 자꾸, 얘는 괜찮다, 괜찮다,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괜찮은 척하고, 그래서 괜찮을 것 같지만 그런 아이로 변해있는 거다. 그래서 원래 편집되기 전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고 그만 내버려 두세요, 라고 선언하는 씬도 있었다. 선우도 엄마에 대한 증오감을 자신에 대한 증오감으로 확대시켜서 자기가 더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스스로를 막 굴리고 그러니까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 되고, 그게 마성을 만들어주고, 결국 그런 게 너무 불편하고 맨날 사건 사고가 생기고. 사실 영화에서 현실적인 조건이 바뀌거나 달라지는 사람은 없지만 조금 더 자기 박해를 덜하게 됐으니까 좀 더 자기를 사랑하게 되는 이미지로 영화가 정리되니까, 성장이란 건 어쩌면 <앤티크>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 될 수 있겠다.
많은 캐릭터들을 다루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좀 더 신경 쓰는 캐릭터가 있지 않나. 자신을 투영하는 느낌이 드는 캐릭터도 있을 거고.
내가 투영된 캐릭터는 주지훈이 연기한 진혁이다. 난 낸 상처를 잘 알지만 그걸 잘 삼키는 편이고 표현을 잘 안 한다. 그냥 잘 지나가는데 그것들이 많이 쌓여있다가 어떤 순간 너무 힘들거나 고달프면 그걸 단번에 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꼬였을까, 어떻게 하면 달라질 수 있을까, 엄청난 변화를 시도해보려고 부단히 애쓰고 힘겨워하는 게 내 스타일 같다. 내가 스스로 낙천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편이다. 그리고 내가 좀 더 객관적인 매력을 느끼고, 정말 잘 표현하고 싶었던 인물은 선우였다. 진혁이란 친구와 양날처럼 굉장히 다르지만 한 공간에 붙어있는 친구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지만 정말 갖고 싶은 것 한가지를 가질 수 없는 그런 친구다. 마성이 있지만 정작 얻고 싶은 사랑은 얻지 못한 캐릭터랄까. 그래서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잘 표현하고 싶었던 욕구가 많이 있었다. 재욱이한테 그런 얘길 했다. 앞으로 이렇게 대놓고 욕구를 표현하는 게이 캐릭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라고. 이건 자본의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거니까. 그리고 그런 캐릭터가 놓일 수 있는 시공간과 이야기 자체가 형성된다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숨거나 꺼려하지 말고 아주 전면적이고 노골적으로 맘껏 표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내 생애>에서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다뤄본 학습효과가 <앤티크>를 용이하게 만들어주진 않았을까. 여러 사람의 사연을 만들고 그걸 구조적인 맥락으로 이어나가는 작업의 선례가 있었으니까.
<앤티크>가 쉬웠던 거 같진 않다. 화살표 게임이라는 게 있는데 인물들을 표시해놓고 감정의 방향들을 화살표로 이어서 연관고리를 찾는다. 그런 게 한눈에 파악돼있지 않으면 트랙을 한번 잃게 될 때 덜커덩거리게 된다. 복잡하고 어렵다. 누가 그러던데. 너무 이성적인 영화 같다고. 너무 치밀하게 계산되고 그만큼 머리를 많이 써야 가능한 구조니까. 사실 덜커덩거려야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데 그렇게 잘 엮이는 순간이 보이면 너무 이성적으로 느껴져서 무섭다나. 왜 이런 것이 자꾸 내 취향이 되는 걸까 싶지만 그런 걸 통과할 때 쾌감이 있는 거 같긴 하다.
인물들은 변하지만 인물들을 둘러싼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해피엔딩의 양식으로 끝나지만 딱히 낙천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음, 너무 해피엔딩 같지 않았나? 난 해피엔딩에 대한 강박이 영화에 녹아있을까 걱정된다. 결국 지웠지만 원래 시나리오에선 악몽도 더 꾸고 상처가 전혀 치유되지 않았다는 걸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었다, 행복하게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건 너무 부담되니까. 왜냐면 현실은 그렇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영화 주인공이니까 행복해지면 반대로 행복해지지 못하는 우리들에겐 사형선고 같은 거지. 행복해져야 되는데 행복해지지 못하니까.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스스로 정답을 잘 모르는 거 같아서다. 정말 어떡하면 행복해지는지, 그런데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생각한다면 어떤 굉장한 희망이 있는 거고, 그럴 수 있다는 작은 위로가 필요한 거니까.
스스로 행복하다고 잘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닌가?
영화 만드는 감독으로서 삶을 돌이켜보면 너무 고통스럽다. 사람들은 엄살이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웃음) 한편 만들 때마다 한계를 넘어서 몸이 부서질 거 같다. 장미란이 저 무거운 역기를 들고 버티는 고통이 수년은 계속되는 것처럼.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영화는 내게 구원을 주지 않는 거 같은데 정작 내 영화는 구원을 얘기하고 행복을 예찬하니까 거기서 내가 스스로 소외되는 느낌이랄까. 영화가 세상에 구원이 가능하고 행복이 있다고 강변해버리면 정말로 내 스스로 사람으로서 느끼는 행복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와 다른 가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래서 완전히 닫힌 결말이 아니게 하려고 애쓰는 거 같다. <앤티크>는 거대한 해피엔딩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범인도 못 잡았고, 상처가 치유된 것도 아니고, 기억이라도 제대로 떠오른 것도 아니지만 범인을 찾아서 치유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거다. 세상이 변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이런 느낌을 아슬아슬하게 남기는 정도만 취하고 싶었던 거 같다. 원래 마지막에 다시 악몽을 꾸고, 괜찮아지긴 개뿔, 이렇게 투덜거리는 씬이 있는데 그걸 뺀 게 너무 아쉽다. (웃음)
엔딩은 좀 아이러니했다. 그렇게 갈망하던 존재가 실제로 눈 앞에 존재하는 순간을 그리도 무덤덤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게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만약 단번에 모든 것이 떠올라서 그 사람을 잡고 사건이 해결되면 우리는 그걸 기적이라고 불러야 한다. 너무 특별한 사람에 대한 혜택 같은 느낌이 안 들게 대단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문장에서 그림들을 봤을 때 이 순간이 매력적인 순간이고 인생을 얘기해주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영화들을 완성하면서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돌아보기도 하나?
다양한 사람들을 그리고 다양한 삶을 헤쳐나가는 사람들을 그리는데 나는 왜 저런 식으로 못살까? 이런 질문을 한다. 이성적으론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이런 캐릭터처럼 풀어내면 될 거 같다고 마음껏 상상하는데 잘 안 되는 것처럼. 예를 들어서 어떤 어려움을 잘 견뎌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영화 밖의 세상에서는 작은 어려움에 막 화를 낸다면 거기서 어떤 괴리감 같은 게 생기지 않을까. 내 영화는 너무 작고, 짧고, 자주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라서 그런지 사람들보단 내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 같다. 내가 정말 주의 깊게 듣고 싶거나 바라봐야 되는 어떤 세상이나 인물들을 통해서 스스로 자기를 들춰보는 경험인 거 같다. 나중에 내가 정신차리고 보면 내가 잘 챙겨 들어야 할 메시지가 있을 것 같고, 그런 게 다음에 또 이야기될 것들이 아닐까.
내적인 갈등이 보인다. 그렇게 영화를 찍으면서 뭔가를 깨달아가긴 하는 건가??
첫 단편 영화를 찍고 정신과를 찾아갔었다. 증오와 혐오에 시달려서. 늘 대의명분이 같은 사람들끼리 일하는 것 같지만 스태프들의 대의명분이 다 같지는 안거든.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그런 지점에서 오는 충돌이랄까, 그런 것들이 너무 낯설어서 힘겨웠다. 지금도 어려운 조건들 사이에서 겨우겨우 기적처럼 만들어내고 있다. 그 사이의 갈등과 충돌 때문에 힘겨운 점들이 많았었는데 예전에 비해서 그냥 ‘허허’하게 됐다고 할까. 스스로에게도 그렇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고 좀 너그러워진 거 같다. 감독이란 위치가 굉장히 완벽한 걸 요구하기 쉬운데 그럴 수 없는 게 대부분의 현실이니까 그런 걸 인정하게 되는 방식이거나 그렇게 요구하는 만큼 스스로도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그 채찍질이 너무 심했지만 스스로 이제 나를 잘 인정하고 게으름도 피우고 요구수준을 낮추면서 편안해지는 요령을 배웠다. 늙는 건가? (웃음) 세상이나 삶을 인정하기에는 부정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 더 많아진 거 같다.
대화를 하고 나니, 당신 같은 사람이 <앤티크>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웃음) 항상 그런 질문을 한다. 내가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도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고, <여고괴담2>를 만들었을 때도, <내 생애>를 만들 때도, <앤티크>를 만들 때도 의아해했다. 사실 나 스스로도 너무나 의아하다.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것들만 일방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거니까. <앤티크>는 내가 지닌 여러 색의 직소 퍼즐 중의 하나일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지, 라고 품어온 영화가 아니라 태어나서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어떤 춤을 추다가 이상하게 스텝이 바뀌면서 만들어진 느낌이랄까. 나중에 나머지 퍼즐들이 만들어지면 내 색깔도 보이지 않을까? 난 아직 만든 작품이 별로 없어서 내 색깔이라고 할만한 건 그냥 몇 개의 ‘갈지(之)’자 같은 흔적뿐이니까.
몸이 안 좋다고 들었다. 지난 주에 좀 안 좋았지만 이젠 괜찮아졌다. 촬영 스케줄이 타이트했는데 또 홍보 때문에 거의 쉬지 못했거든. 과로 때문에 목에 염증이 심하게 일어나서 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은 괜찮나?
생생하다! (웃음) 병원 가서 응급수술을 했거든. 생살을 찢어서 목 안에 있는 염증을 꺼내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까지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을 거다. 이젠 괜찮다.
하지만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색하지 못한다는 게 괴롭진 않았나?
관심 받지 못해서 불러주는 데가 없을 때 정말 더 힘들지. 지금은 저에게 관심 가져주고 불러주는 데가 많아서 오히려 기분은 더 좋다.
필모그래피만 봐도 꾸준히 활동해온 인상인데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있나?
꾸준히 많은 작품을 했지만 그 중 관심 받는 작품이 있는 반면, 관심 받지 못하는 작품이 있다. 작품 안에서의 비중에 따라 관심을 받는 정도를 떠나서 작품 자체에 대한 관심만으로도 확연한 차이가 있으니까.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많이 예뻐해 주니까 요즘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너무 좋다. 사실 요즘 잠을 많이 못 자는데도 웃으면서 일어나고 있다. 나도 모르게. (웃음)
<하류인생>이후로 한동안 영화보단 드라마에 주력했다가 작년부터 다시 영화에 주력하는 느낌이다. 날 찾는 곳이 있고, 내가 거기서 배울 것이 있으면 영화든 드라마든 상관없이 필요한 곳으로 이동하려 한다. 영화만 할 거야, 드라마만 할 거야, 그런 건 없다.
주로 어떤 작품에 흥미가 생기는 편인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한가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가진 9가지는 버리고 그 1가리를 얻으러 갈 수 있다.
<미인도>에서의 1가지는 무엇이었나?
신윤복이었다. 윤복이가 나를 통해서 세상 밖으로 나올 때 내 가슴에서 풀리는 게 상당히 많았다. 그 동안 가슴에 꾹꾹 눌러 담겨있던 감성을 가슴에 묵혀두는 게 아니라 폭발시켜서 밖으로 내던질 수 있는 거지. 그걸 풀어버릴 수 있는 <미인도>라는 공간이 있어서. 덕분에 지금 너무 홀가분하다.
올해가 연기경력 10년째가 되는 해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이하, <여고괴담2>)이후 10년만이다. <여고괴담>때는 정말 연기의 이응(ㅇ)자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가 연기하겠다고 신인 감독님들과 몸 부딪혀가며 배웠던 작품이다. 그 후로 이런 저런 경력을 쌓았지만 <미인도>에서 그렇게 쌓아온 걸 다 무너뜨려서 잠시 내려놓고 <여고괴담2> 당시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작품을 대했다.
10년이 짧은 세월은 아니다. 그런데 김민선이란 배우의 10년은 실감이 안 난다. 외모 덕분일지도 모르겠지만 배우로서 고정적으로 축적되거나 결정적으로 관통할만한 이미지가 없기 때문이 아닌 거 같다.
난 지금까지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오며 나에게 오는 상황에 대해서 최선을 노력을 다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됐고. 글쎄, 나를 온전히 다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아직까지 영화에선 만나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다만 내실을 다지고 싶단 생각에 연기를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나를 버리고 새로운 것에 계속 도전하려 했고, 모험을 하려 했다. 내가 어떤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지, 어떤 것이 나와 제일 잘 맞을 수 있는지 스스로 잘 모르는데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찾게 되면 놓치고 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도전과 모험이라는 건 젊음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렇게 계속하다 보니까 아마도 그런 활기나 생기가 지속적으로 활발한 이미지를 부여해서 그렇게 보여지는 게 아닐까.
작품에 따라 이미지의 변화가 다분하다. 작품 선택에 따른 의무적 감내일 수도 있지만 개인의 취향도 배제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된다. <미인도>도 비슷한 맥락 같다.
<미인도>는 모든 여배우가 탐을 낼만한 작품이다. 지금 베드씬이 과하게 관심을 얻고 있지만 그것보단 아름다운 영상미의 옷을 입고 있다. 자칫 노출에 대해 부담을 가질만한 여배우도 아마 영화를 보면서 부러워할지 모른다. 나도 당연히 시나리오를 보고 여배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 작품이 그럴만한 작품이라 느꼈다
여배우에게 노출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납득시켜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텐데.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가슴 한 구석에서 형체가 뚜렷한 녀석이 보였고 연기로서 그걸 풀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필연성을 느꼈다. (신)윤복이를 표현하려면 남자에서 여자로 본성을 찾는 과정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 백마디 하는 것보다 한 번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게 더 완벽하고 더욱 진정성이 생긴다. 단지 인간 김민선은 잘 못하는 부분이라며 선택을 망설일지라도 스태프들이 나를 보호해줄 거라는 믿음이 생기면 그 다음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나의 젊은 시절 모습을 담을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나.
<미인도>의 신윤복과 어울리는 지점이 있다. 남자로 살아가던 신윤복이 여자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본인도 중성적 이미지를 벗어나 여성적인 이미지를 어필하고 싶은 욕심이 없었을까. 난 톰보이 같은 녀석이다. 그만큼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줬고 그런 모습이 내가 세상과 소통하기 가장 편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남들이 보는 정도만큼 나 자신을 보고 있다면 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겠지. 하지만 윤복이가 남자를 사랑하면서 여자로서의 본성을 찾아냈듯이 나도 김민선이라는 여성성을 안다. 윤복이의 역할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안으로 담고 담았던 여성성이 거꾸로 드러나게 된 거다. 촬영하고 나서 내가 모르던 부분들이 많이 드러나서 나도 새삼스럽게 당황스러웠지만 나에게 이런 여성스러움이 있다는 걸 발견해서 기쁜 측면도 있었다. 세상하고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넓어진 기분이다.
신윤복의 여성성보단 김민선의 여성성을 발견했다는 게 더 맞는 말 같다.
신윤복 그가 피어나다, 그런 문구가 있는데 김민선 그녀도 피어났다. (웃음) 예전의 내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아예 달라졌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많이 넓어졌다. 이제부터 해야 할 작업은 넓어진 작업을 깊이 있게 만드는 거다.
<미인도>는 사실 통속적인 멜로다. 멜로라는 장르를 잘 이해할만한 세월이 지나기도 했다.
적당히 아픔도 알고, 적당히 슬픔도 알고, 소중한 것도 알고, 행복해지는 방법도 아는, 적당한 나이인 거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본능적으로 지금의 나이이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걸 느꼈다.
<미인도>는 10년을 기다린 시나리오라고 말했더라. 전윤수 감독을 직접 찾아갔다고 들었다.
집 근처로 찾아갔다. 감독님께서 마지막으로 시나리오 집필을 수정하러 지방으로 내려가시기 직전이었는데 한 10분 정도 잠깐 얼굴만 뵀다. 열정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물론 그게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면서 나 꼭 할래요, 이러는 게 아니라 그만큼의 준비가 됐다는 걸 보여드린 거다. 배우의 자존심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로 보여주는 거라 생각한다. 이 작품이 너무 하고 싶다면서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보단 내가 정말 하고 싶을 때 정말 하고 싶다고 직접 말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멋있는 게 아닌가 싶고.
<미인도>로 그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하다는 걸 체감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런 작품 만나게 되면 이렇게 해봐야지, 라고 생각만 했다가 비로소 배운 거지. 물론 그런 작품이 나한테 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지만.
사실 국내에서 여배우를 위한 캐릭터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욕심이 났을 법한데 배우로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연기를 위해 뭔가를 익히고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건 부담이 아니었을까.
가능성만 봤다. 후차적으로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라는 걱정부터 했다면 순조롭지도 않고 되게 힘들어했을 거다. 그런 건 하나도 보지 않고 가능성만 보고 뛰어들었다.
일단 그림을 배우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을 거다.
디테일하게 그리는 건 대역들의 손을 빌렸다. 다만 이게 무슨 그림을 그리는 건지도 모르면서 이 동작이 그저 흉내 내는 것만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붓만 제대로 잡자, 두 번째는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모르는 채 흉내내지 말자. 실제로 영화에서 나오는 그림들을 안보고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했다.
신윤복이란 사람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신윤복에 대한 역사적인 공부는 캐스팅 전에 이미 마쳤다. 고서에 나와있는 것부터 후세사람들이 신윤복에 대해서 평가하는 자료들까지, 역사를 거슬러서 공부했다. 나름대로 내가 본 신윤복의 그림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를 토대로 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 그 위에 즐거운 상상을 덧입힌 거지.
<바람의 화원>은 봤나?
초반에만 봤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학교도 못 가는 중이라. (웃음)
의식되는 바는 없나?
문근영 씨와 내가 하는 신윤복이 어떻게 보였나?
사실 맥락적으로 많이 다르다. 다만 소재 자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선점된 이미지에 후발주자가 비교될 가능성을 배제하긴 힘들 거 같다.
나는 단순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그런 걱정은 하나도 안 된다. 아마 그런 걱정부터 했다면 여기까지 못 왔겠지. 나는 윤복이다. 그래서 <바람의 화원>의 문근영 씨를 볼 때는 같은 윤복이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시청자의 입장에서 즐기는 드라마로 보게 됐다. 그녀와 비교하는 것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부담스럽지도 않다 .그냥 즐거운 관심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되려 기분이 좋다.
자꾸 윤복이 윤복이라 하는데,
나 윤복이다. (웃음) 혜원이라고도 부른다.
상당한 애정이 느껴진다. 윤복이,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김민선과 동떨어져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내 발끝에서부터 끌어내진 녀석이기 때문에 또 한 명의 나인 거지. 김민선의 또 다른 자아? 그렇기 때문에 애정이 느껴지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난 아직까지도 민선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윤복아, 윤복아, 하는 게 더 좋은 거 같다.
나도 윤복 씨라고 불러야 할까? (웃음)
윤복 씨는 이상하고. 윤복아, 이래야 된다. (웃음)
촬영장에서도 분위기가 비슷했을 거 같다.
현장에서 민선이라고 하는 분들은 없었다. 대부분 우리 윤복이, 아니면 혜원아. (웃음)
그런 상황들이 캐릭터에 대한 몰입에 도움되는 바가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그렇게 애정이 남는 캐릭터라면 촬영 후에도 배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나는 나다. 내가 조선 후기 신윤복이라는 인물의 자리로 들어간 것뿐이다. 김홍도를 만나고, 강무를 만나고, 설화를 만나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나의 성(性)을 버리고 남자로 살아간다. 그렇게 내 인물에게, 나에게 정체성을 주는 거다. 그럼 윤복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촬영장에서 벗어나면 나는 내 일상을 지나고 있다. 그럼 나는 김민선인 거다. 그 자리에 가면 사람이 변하는 것과 같다. 시상식에 있으면 격조나 품위가 생기다가도 친구들과 카페에 가면 떠들며 놀게 되는 것과 똑같다. 그 자리의 성격에 맞게 내 모습이 변하는 거지.
모든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너무 집착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되려고 집착하고 되지 않으려고 집착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굳이 벗어날 필요도 없고, 끌어안고 살 필요도 없다. 또 하나의 나니까.
배우로서 뭔가 자신만의 특별한 시각을 느낀 적이 있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다른 거 같다. 상대방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 대해서 생각하려 한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회사원일 것이고, 저 사람은 애인 만나러 갈 것이고, 이런 식으로 인생을 부여한다. 그냥 지나치는 그 짧은 순간에 보여지는 발걸음만으로. 그건 그 사람에게 애정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배우로서의 시각이 남들보다 예민하고 감정적일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시대극은 인물보다도 시대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시대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고 시대에 맞게 자신의 톤을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캐스팅되기 전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공부를 했던 이유도 그런 게 밑바닥에 쌓여있지 않으면 어떤 상상력을 입혔을 때 상당히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뿌리가 깊고 튼튼히 박혀있어야 꽃이 예뻐지는 거다. 꽃이 예뻐지라고 꽃잎만 닦아주고 좋은 햇빛을 아무리 비춰줘도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금방 죽어버린다. <미인도>라는 발칙한 상상이 지금 가능할 수 있는 것도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난 그렇게 준비된 세상이란 바탕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땐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이런 저런 경험을 해봤기에 가능한 법이지. 고속도로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차에 타거나 기차에 타지 않고, 걸어서 가볼 수 있는 데까지 가보고 싶다. 강에서 수영도 하고, 자갈밭에서 뛰어보기도 하고, 넘어져서 피도 흘리고, 손을 덜덜 떨어보기도 하다가도 산들바람에 기분 좋아지기도 하고, 꽃도 보고 나무도 보고, 그런 사람이고 싶다.
본인에게 그런 연기적 철학을 정립하게 만들어준 특별한 작품이 있었나.
얼마만큼의 비중을 가지고 있고, 얼마만큼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느냐를 떠나서 매 작품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한다. 혹은 첫 작품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다만 우연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겉으로 보여지기에 정말 인생의 터닝포인트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나는 보여지는 터닝포인트를 위해서 매 순간을 그렇게 살아왔고 잘 넘어온 거 같다. <미인도>를 통해서도 속풀이를 제대로 했고 마음껏 연기할 수 있는 공간들이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하이틴 잡지 모델 출신이다. 현재 동년배의 여배우 중 당시에 함께 활동했던 잡지 모델 출신이 적지 않다.
활동하기 참 좋은 시기에 같이 일을 하게 됐고 그만큼 다른 분야로 연결이 용이했다. 어렸을 때부터 봤던 동료들이 옆에 있다는 게 한편으론 든든하고 의지가 많이 된다. 나는 단 한번도 연기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TV도 잘 안보는 학생이었던 나와는 전혀 먼 세상이었다. 모델이나 연기나 처음 했을 때 내가 너무 잘했으면 지금 이 일을 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잘했다면?
처음에 너무 못하는 거다. (웃음) 당연히 못하겠지. 너무 소극적이었으니까. 누군가가 날 이렇게 바라볼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내 관심 밖이었던 만큼 당연히 카메라 앞에서 내가 어떻게 보여지는지,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도 몰랐었고. 너무 소극적이고 부끄러운 사람이라 그걸 통해서 뭔가 관심을 끌고 싶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다. 첫 촬영할 때 그 어색함이 여실히 다가왔다. 그게 너무 창피해서 오기로 모델을 계속하게 된 거다. 그런데 그게 고맙게도 단계적으로 연결돼서 연기도 하게 됐지만 역시나 너무 못해서 또 오기로 계속 달려왔던 거 같다. 그렇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안 타고 자갈밭을 걸어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 싶고.
잘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일반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인데. 난 여전히 부끄러운 게 많이 보이는 사람이라 그걸 이겨내는 게 사명이다. 남들이 너무 못해, 라고 얘기하기 전에 내가 보는 내 모습이 너무 못해, 라고 생각하면 그걸 이겨내고 싶은 거지. 사실 내가 연기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구나, 라는 걸 알았던 건 <가면>에서부터다. 그전까진 배우는 과정이 즐거운 작업이었지만 <가면>때부터 내가 가장 마음 편한 곳이 현장이구나, 이게 내 천성이구나, 현장에서 살아야 되는 사람이구나, 라고 깨닫게 됐다. 내 직업의식이 그 때부터 생기기 시작한 거지. (웃음)
불과 1년 전이다. 10년을 다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가.
시기에 따라서 목표점이 다르지 않을까. 20살 초반의 김민선은 연기를 잘 하자는 오기가 그 목표점이었던 거 같다. 연기를 정말 잘하고 싶었다. 그러다 5년 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그 목표점이 사라진 거 같더라. 그리고 다음 5년 동안 방황하면서 꾸준히 연기했지만 찰나마다 내 안에서 고민이 상당히 많았다. 목표점이 사라지니까 어딜 갈지 몰랐던 거지. 익숙하게 현장에 있긴 하지만 내 안의 생명력을 내가 느끼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 시기를 보내다가 현장에서 사는 내가 너무 행복하다는 느낌을 얻는 순간 나의 목표점이 다시 생긴 거지.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하더라. 어머니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력이 적잖아 보인다.
아마도 내가 그분의 존재감을 살아계실 때 알았다면 지금 이렇게 말할 필요는 없었을 거다. 자식은 그런 거 같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몰랐던 부분이 그 공간이 비워지고 나면 그게 너무 큰 공간이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우리엄마는 완전 멋있는 분이셨다. (웃음) 남자보다 더 대담하고 어느 여자보다 더 소녀 같았다.
현재 자신의 중성적인 매력도 유전인가 보다. (웃음)
그 어머니에 그 딸? 난 엄마처럼 안될 거야, 라고 했는데 난 엄마보다 더 하는 거지. (웃음) 내가 엄마한테 너무 죄송한 건 내 엄마가 여자라는 걸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거다. 가신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 엄마도 여자였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어렸지. 내가.
대부분 자식들이 그렇다. 여자라고 인식하기 보단 그냥 엄마인 거지.
엄마는 또 다른 성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남자보다 더 강한 게 엄마라고도 하잖아. 그게 가능한 건 수많은 위험 속에서 내 자식을 보호하는 엄마는 남자보다 강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여자다.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너무 여린 여자. 그리고 앞으로 나 역시도 엄마가 될 것이고.
그리고 분명 아들보단 딸이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점도 있는 거 같다.
여자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다. 남자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몇 자의 단어와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분홍색 립스틱을 좋아하셨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화장을 자주 하시는 분은 아니었고, 거의 안 하고 사셨지. 나중에 알았지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위해서 빨간 립스틱을 안 바르신 거다. 여자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시기가 빨간 립스틱이 어울리는 시기다. 난 아직 잘 안 어울리지만. (웃음)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싶어도 가족들을 위해서 분홍립스틱을 바르거나 그것조차도 안 바르고 맨 얼굴로 다니신 거다.
결국 어머니는 여자로서보다 어머니로서의 삶을 택한 거다. 여자가 어머니가 된다는 건 결국 나를 버리는 것에서 시작되는 건가 보다. 자식이 생각하기에 그게 아픈 거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나도 그렇게 전철을 밟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슴이 아픈 거다.
어쩌면 <미인도>에서 신윤복의 삶도 비슷하다. 여자지만 남자로 살았으니까.
그녀는 그런 여자였던 거지. 내 마음이 가는 곳을 그 누구한테도 말 못하는 아픔이 있는 여자지만 제 눈에 비치는 세상을 그림으로 옮길 줄 알았던 대담성을 가진 여자랄까.
신윤복은 자신이 봉인한 여성으로서의 자아에 둔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윤복이 여성으로서 사랑을 깨닫게 되는 건 진짜 자신의 삶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김홍도에게 그런 고민들이 무의미하다는 걸 다시 한번 이야기해주고 싶어한 거다. 더 이상 나로 인해서 불행이 없길 바랍니다, 그래서 정사가 이뤄지는 거고.
<미인도>는 배우경력에 있어서 가장 큰 파격처럼 보인다. 그만큼 모험의 여지도 있었고.
나는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천천히 생각하고 싶었고, 천천히 찾고 싶었다. 관객은 한 사람이나 어느 상황을 볼 때 자신들의 시각을 가지고 본인이 원하는 것만 본다. 나에게 찾은 모습도 그렇게 발견된 모습일 테고. 그런데 <미인도>를 기점으로 아마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전형적인 여성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 어쩌면 <미인도>를 통해 뒤늦게 그런 이미지를 스스로 발견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엔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없진 않았다. 비유를 하자면 담장에 장미꽃들이 만발해있다고 하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너무 예쁘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 장미꽃들은 누군가가 와서 예쁘다고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야만 내가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깨닫는다면 그건 참 가슴 아픈 순간일 거다. 난 이미 날 사랑하고 있고 내가 날 아낀다면 남들이 날 어떻게 봐주는가는 그 다음 문제인 거다. 그건 그리 중요한 얘기가 아닌 거 같다. 지금 <미인도>로 인해서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주시니 기분은 참 좋다. 이렇게 사랑 받을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난 그 전부터 이미 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에 대해서 휩쓸리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사람들이 관심 없을 때가 있을 때보다 더 많을 수 있는 법인데 거기에 휩쓸리고 싶진 않다.
전체적으로 카메라에 잡힌 다채로운 풍경들이 아름답더라. 그만큼 로케이션 이동도 잦았을 것 같고 고생도 많았을 거다.
정말 대단한 건 순제 32억에 100일 74회 차 촬영을 했다는 거다. 매일같이 이동하고 밤새면서 촬영만 했다는 소리다. 그것도 장마철이 한참 피크일 때. 단 하루도 촬영을 미룰 수가 없었다. 그러면 개봉 날짜가 틀려지는 거니까. 후반작업도 한달 반 정도밖에 여유가 없었다. 아주 타이트했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거다. 사극을 어떻게 32억으로 찍어. 정말 그 적은 제작비로 필요 없는 건 아끼고 허리띠 졸라매면서 갔다.
한여름에 겹겹이 한복을 껴입고 연기하느라 고생도 많았겠다.
그건 배우가 견뎌내야 할 몫인 거지. 우리 스태프들도 나름대로 견뎌내야 할 몫이 있었고, 서로 불편한 걸 불평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처음으로 사극에 출연했다. 사실 외모가 이국적이라 사극에 어울리는 인상은 아니다.
도구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틀려지는 거 같다. (생각하다가) 연필, 글 쓰는 물건이다. 하지만 연필을 비녀처럼 꽂아도 된다. 혹은 연필로 스트레칭도 할 수 있다. (웃음) 연필은 도구다. 배우도 도구다. 배우가 난 이렇게 생겼으니까 이런 것만 해야 돼, 라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진전도 없고 성장도 없을 거다. 배우에게 정말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도 불편하지 않은 거다. 만약 내가 <미인도>를 어색해했다면 보는 분들도 어색해했을 거다.
자신감이 느껴진다.
생각한대로 이뤄지는 것 같다. 내가 피곤하다고 느끼면 정말 피곤한 일이 생기고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한 일이 생기는 거 같다. 앞서서 걱정하는 것보단 가능성을 보는 게 훨씬 더 값지지 않을까. 그러다 보니까 하루하루 너무 즐겁게 사는 것 같고 재미있다. 사는 게.
도전적이면서도 긍정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누구보다 삶에 집착과 욕심이 큰 사람일 수도 있다.
이완은 조바심내지 않았다. 35억 짜리 영화가 언젠가 개봉하겠지. 긍정으로 2년을 견뎠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의 눈물을 동정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강해지는 것만이 소년의 유일한 희망이다.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어려움 없이 풍족하게 살아왔다’는 이완은 1953년 서울의 종두에게 어떻게 다가섰을까. “제가 아무리 긍정적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게 큰 시련이 닥쳐오면 난 견딜 수 있을까. 제 인생은 기복이 없었으니까요.” 배우에게 경험은 중요하다. 하지만 결코 직접 몸을 부대낄 수 없는 일이 있다. 1953년 서울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이완은 유년 시절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어린 시절 유난히 전쟁에 관심이 많았다. 시대를 몰라도 그 시대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지 몰라도 감성적인 훈련이 돼있었나 봐요. 유년시절 드라마로 쌓은 내공이죠.”
전공은 체육학이다. 특기생은 아니었다. 무작정 운동이 좋아서 체육학을 선택했다. 수학능력 시험도 보고, 기초체육 시험을 통과해서 대학에 붙었다. 그렇다고 삶에 대한 특별한 지표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던 삶에 변화는 우연처럼 찾아온다. 누나가 지니고 있던 그의 사진을 보고 이장수 PD가 접근했다. 처음엔 거절했다. “앞에 나서서 표현해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거절했어요.”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이완은 드라마광이었다. 때마침 입시의 속박에 벗어나 뭐든 해보고 싶은 자유가 만개하던 대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그것도 유명한 감독의 설득이었다. 그저 대사만 외워서 하면 어려울 것도 없어 보였다. “장난이 아니었어요. 촬영을 일주일 앞두고 이건 방송사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일났다는 생각 뿐이었죠.” 일련의 트레이닝을 받고 나니 되려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감독님한테 엄청 깨져가며 따라가다 보니’ 반응이 좋았다. 차기 드라마 <백설공주>에선 주연을 맡았고, <작은 아씨들>까지 캐스팅이 이어졌다. 그 해 신인상을 2개나 탔다. “신인상을 받았으니 연기를 잘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비로소 생겼어요. 연기에 욕심이 나기 시작했죠.” 운동을 좋아하는 만큼 승부욕도 강했다. 비슷한 또래 배우의 연기를 보면 묘한 경쟁심도 느꼈다. 하지만 자신밖에 할 수 있는 연기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 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는 건 <해변으로 가요>에서 비로소 느꼈다. 연기도 공부가 필요한 일임을 비로소 알았다.
어쩌다 보니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통해 일본에서 스크린 신고식을 치렀지만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이완이 국내 관객 앞에 서는 본격적인 첫 영화란 점에서 애착이 크다. “까먹고 있었는데 애정이 많았던 거 같아요. 제작보고회 때 메이킹 필름으로 현장 모습을 보면서 진짜 내가 열정을 가지고 찍었다는 게 다시 느껴졌거든요.”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이완에게 송창의는 현장에서 좋은 형이자 반가운 친구였다. 동시에 ‘마주보고 연기를 하면 대사를 까먹을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선배들을 마주보고 연기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다. ‘한 작품을 끝낼 때마다 느껴지는 게 많은’ 이완은 아직 배우로서 소년에 가깝다. “작품 하나를 끝내고 나면 오랜 전생이나 꿈에서 봤던 일처럼 떠오를 때가 있어요.” ‘35억을 들인 영화가 설마 개봉하지 않을까’라는 낙천으로 2년을 기다렸다. 소년은 꿈을 꾼다. 꿈은 소년을 부풀게 만든다. 이완은 영화에 매력을 느꼈다. 연기라는 꿈을 꾸고 있다. “칭찬이건 비판이건 채찍질 같아요.”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