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보고 싶다는 인물의 머리 위 하늘에 코끼리가 날아다닌다. 일순간 망각을 더듬어 기억을 재생하는 인물의 머리 속 두뇌 피질의 형태가 화면에 드러난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무의식적 추상을 이미지적으로 구체화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점철된 것만 같은 작품이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라는 제목에 내포된 허상처럼 영화는 디자인과 인테리어에 속박된 인물들의 공허한 심상을 끊임없이 겉돌아 나간다.
사진작가 현우(장혁)와 성형외과 전문의 민석(조동혁), 그리고 외국계 금융 전문가 진혁(이상우). 유년시절의 추억을 공유한 세 남자를 중심으로 사건을 확대해나가는 영화는 개별적인 사연을 진전시키는 동시에 종합적인 형태로서 사연들을 엮어나간다. 실연의 상처에 시달리는 동시에 코끼리를 찾아 헤매는 현우와 질환적 수준으로 성적 집착과 여성 편력에 빠진 민석, 그리고 12년 간 외국으로 떠났다 친구들 곁으로 돌아와 사랑을 갈구하는 진혁까지, 세 남자의 사연이 평행하게 전시되듯 흘러간다. 그 와중에 남편과 첫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연(이민정)과 불현듯 등장해 실연당한 현우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정신과 의사 장선생(황우슬혜) 등의 여성캐릭터가 세 남자의 사연에 깊게 연관되어 사건의 형태를 벌려나가기 시작한다.
시쳇말로 시크와 엣지라는 허세적 단어가 떠오를 만큼 스팽글하고 럭셔리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세 남자들은 저마다 여유로운 삶 속에서도 공허와 허무라는 사치를 떠돈다. 텍스트로 기록된 상상적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듯 직설적으로 시각화된 이미지들이 적나라하게 활용된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말 그대로 인테리어에 공을 들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중요한 건 그 인테리어적 디자인과 이미지의 기능성이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그 공들인 디자인과 이미지가 무엇을 위해 영화에서 복무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에 좀처럼 답을 주지 못하는 영화다. 단지 전시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강박적으로 추상(抽象)을 구상(具象)으로 변주해나가는데 치중한다.
동시에 두서 없는 145분 간의 사연은 장황함을 넘어 지난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낭비다. 물질적 욕구가 팽배한 가운데 정신적 허무에 시달리는 오늘날 젊은이의 삶을 그렸다, 라는 박제적인 문구가 떠오르는 영화의 형태는 정작 그 삶의 본질이 무엇을 갈구해야 하는가라는 지표를 드러내지도 못한 채 이미지만 둥둥 띄워 스크린에 드러내기에 급급하다. 흡사 자신의 미술숙제를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은 유아적 욕망처럼 칭찬받고 싶어서 안달 난 느낌이랄까. 흡사 영화적 스크린이 아니라 시각디자인 전시장의 쇼윈도 너머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이미지적 강박만큼이나 세 인물을 둘러싼 사연의 흐름 역시 허세로 가득하다. 뭔가 비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정작 잡히는 알맹이는 없다. 구조적으로 불완전하고, 내용적으로 지나치며, 의미적으론 모호하다. 그저 허상에 갇힌 전시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와 닿지 않는 선문답처럼 코끼리만 찾아 헤맨다.
아이러니한 감상을 부여하는 건, 영화와 무관하게 장자연의 얼굴이다. 대담하고 발칙한 홍보문구 따위가 낚시인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육체적으로 착취되는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장자연의 이미지는 살아있는 자의 감상을 숙연하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유작이 돼버린 이 영화에서 그녀가 남길 이미지들은 좀처럼 안쓰러워 보는 이를 침통하게 만들만한 것이다. 심지어 영화는 때때로 그녀를 비춘 앵글을 낭비적으로 활용하기도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녀의 캐릭터가 자살한 채 욕조에 몸을 누운 시퀀스에서 지나치게 그녀를 앵글에 수집해 넣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장면을 삭제할 순 없었겠지만 그 이미지가 그렇게나 자주 스크린에 잡혔어야 했을지 모를 일이다. 불순함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그만큼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뭔가를 더 보여주고 싶은 강박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화일 뿐이란 이야기다. 그 강박이 지나치다. 그리고 지난한 사연은 질식할 만큼 길고 더디다.
크랭크업 이후로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영화가 개봉됐는데 기다려지지 않았나?
촬영하는 동안 감독님께서 모니터를 많이 못 보게 하셨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너무 궁금증이 커진 상태에서 영화를 봤기 때문인지 새로운 면도 보이고 저 때는 내가 저런 감정으로 연기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선하더라.
제목부터 의미에 대한 호기심을 부르는 작품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어떤 감상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일단 색다른 이야기라 이걸 감독님이 과연 어떻게 표현해내실지, 그리고 만약 내가 메이를 연기한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궁금증으로 시작했다. 항상 내게 들어왔던 시나리오와 너무 다른 류의 영화였고 기존에 내가 해왔던 캐릭터와 상반된 면도 있어서 그런 호기심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주지홍 감독은 연기적인 요구가 많은 편이었나?
시나리오 상에는 디테일한 설정이 많았지만 일단 현장에 나오시면 어떤 게 편하냐고 물어보시곤 했다. 배우들에게 가장 편안한 현장에서 가장 솔직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하셨다.
한국에 온 메이는 고모에게 자신을 왜 미국으로 보냈냐며 따진다. 단순히 메이가 미국으로 보내진 것에 대한 불만을 고모에게 토로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미국 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억울함이 발생한 게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선 메이의 미국 생활에 관해서 결코 묘사하지 않는다. 배우로선 조금 답답할 수도 있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시나리오 읽으면서 감독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부분이 그 고모와의 대화였다. 일단 감독님은 메이 스스로 그게 고모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단지 고모에 대한 원망의 표출이 아니라 그 동안 쌓여왔던 아픔을 세상에 표출하는 것이라 하시더라. 그게 고모에 대한 원망으로 그려져선 안되니까 뻔한 오열 같은 신파적 표현이 동원돼서도 안됐다. 그런 감정을 잘 절제해서 보여주는 게 내 숙제였지. 그래서 이 신을 찍고 나서 다시 찍어보고 싶다고 얘길 드리니까 감독님은 이게 좋다고, 100%라고 하시는 거다. 그때 조금 아쉬웠는데 나중에 편집된 걸 보니까 감독님께서 만족하신 그 선이 맞았다는 걸 느꼈다. 메이가 미국에서 겪은 삶이나 양부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감독님께 여쭤봤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아닐지라도 학대나 홀대를 받고 자란 아이가 아닌, 보통 가정의 평범한 유년을 보낸 아이지만 항상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지닌 채 한국에 살아있을 부모를 생각하는 아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남들과 다른 아픔 때문에 항상 스스로가 벽을 만들고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감정을 보여줘야 한다고.
메이는 상당히 히스테릭한 캐릭터다. 단순히 기능적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만들어나간다 해도 그 정서에 스스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히스테릭한 부분도 그렇지만 메이가 항상 가지고 있는 답답함이 나를 힘들게 했다. 메이가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답답함을 한국에 오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막상 와보니까 어떤 해결책이나 돌파구가 없다는 답답한 느낌이 연기를 하면서 점점 더 나에게도 전이된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가끔씩은 촬영이 끝나고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워도 그 기분이 해소되지 않아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노력도 있었을 텐데.
3일 동안 세트장에서 대사가 한마디도 없어서 말 한마디 안하고 계속 답답한 기분으로 연기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너무 답답하더라. 어둡고 침침한 세트장에 있다 보니 밖은 햇살이 비치는 낮이라는 걸 망각할 정도로 메이의 감정에 빠져 있다 보니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졌다. 그래서 세트장 문을 박차고 햇빛 아래에서 30분 정도 앉아서 마음을 다스린 적이 있다. (웃음)
큰 사건들이 펼쳐지기 보단 두 남녀의 감정적 충돌과 교감이 중요한 영화였으니까 장혁 씨와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지 않았나? 나름대로 친밀감을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회사가 같아서 오고 가면서 인사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그 전에 내게 약간의 선입견이 있었던 거 같다. 감성적인 부분보단 이성적인 부분이 강할 것 같다는 느낌? 마초적인 느낌도 강하다 생각했고. 그런데 실제로 함께 연기를 해보니까 감수성이 예민하고 작품에 대한 열의도 강하시더라. 초반엔 감독님이 장혁 씨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얘기해서, (웃음) 처음엔 되게 어색한 사이였다. 그런데 영화의 흐름처럼 점점 더 친해지다 보니까 내가 몰랐던 매력들이 하나씩 발견됐다. 개인적으론 장혁 씨의 재발견?
스스로가 장혁 씨에 대한 선입견을 지녔다 말한 것처럼 당신의 선입견을 지닌 누군가도 있을 거다. 특히 아이돌 가수 출신 연기자들에게 대중들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최근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인 것도 그런 배경에서 얻은 상처란 생각이 든다. 대중들의 손가락질이 거셀수록 스스로 연기를 잘해나가야 한다는 책임이나 강박도 커질 거다.
예전엔 나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연기가 정말 좋아지고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 자체에 감사를 느끼게 됐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날 보시는 분들도 약간 변화된 느낌이 보인다고 하시는 것 같다. 그 동안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이런 마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방영했던 <태양을 삼켜라>가 본인의 8번째 드라마 출연작이었다. 주연 캐릭터를 거듭 맡아오고 있는데 작품의 얼굴로서 전면에 부각되는 게 부담될 때는 없었나?
처음엔 처음이기 때문에 봐주는 게 있지만 한 작품씩 해나가면서부터 대중들의 비판도 더 날카롭고 냉정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만큼 책임감도 커지는 것 같다. 특히 작품마다 6~70명 정도 인원들의 노고가 담기는데 나 하나 때문에 그 노고가 퇴색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책임감을 느낀다.
그 동안 브라운관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엔 익숙해졌겠지만 스크린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생소할 수도 있었을 거다.
일단 감독님께서 미묘한 감정선을 원하셨는데 아무래도 브라운관 연기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그런 연기는 뭔가 부족하거나 심심한 거 같고, 이 정도 표현으로 관객들이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도 약간 들었다. TV같은 경우 마음에 안 들면 채널을 돌릴 수도 있고 이런 저런 다른 일을 하면서 볼 수도 있지만 영화는 일단 스크린 크기도 그렇고 모든 관객들이 스크린에 집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잖아. 그래서 그런 미묘한 감정선도 캐치가 되고 느껴지는 것 같더라. 감독님께서 왜 나에게 저런 밋밋하다 느낄만한 감정선을 요구하셨는지 스크린을 보니까 알게 됐다.
드라마로 배우 경력을 쌓아왔으니 영화 현장은 처음이었다. 준비기간을 비롯해서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을 텐데 어땠나?
일단 드라마는 엔딩을 모르고, 심지어 다음 회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찍어야 되는 경우가 많아서 놓치고 가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게다가 대중들의 반응은 즉각적이라 배우입장에선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하고 계산한 상태에서 들어갈 수 있어서 배우에겐 보다 친절한 작업 현장이 되는 것 같다. 덕분에 내 스스로도 자신감이나 안정감이 있었던 거 같고, 다음 그림을 그리면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더 좋았다.
드라마는 현장 분위기가 상당히 타이트하다. 반면 영화는 좀 더 여유롭게 진행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좀 더 안정된 느낌이 있었을 것 같다.
일단 스태프 분들의 마인드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이라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배우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건 의무적이라기 보단 당연시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마인드 자체가 달랐다. 스태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일에 대한 프로의식과 열정을 지닌 것 같다. 그런 부분은 존경하고 본받을만한 점이라 느꼈다.
사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부터 본인도 프로로 대중 앞에 섰다. 그렇지만 바로 프로로서의 자각이 생겼던 건 아니었을 것 같다. 일단 나는 처음부터 대중들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그런 책임감을 가질 순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수가 자신의 무대를 즐기지 못하고 연기자가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정말 프로답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책임감이 기쁨이나 즐거움보다 앞서 있었던 거 같아서 그 어린 마음을 생각하면 조금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 중 하나다.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했던 부분도 많다. 뒤늦게 남는 아쉬움은 없나?
그 당시엔 그게 너무 익숙했고 당연했다. 겁도 많았고, 그냥 당연히 지나가는 게 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놓치고 간 부분이 많다고 느껴져서 마음이 아픈 순간이 있다. 평범한 삶을 조금 더 즐기고 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고. 연기자로서도 그런 경험을 남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토끼와 리저드>는 운명적 관계를 되새겨 나가는 남녀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과거 가수로서 데뷔했고 현재 배우로 활동하는 본인의 인생 속에서 뒤늦게 스스로 운명적이었다 느낄 수 있는 계기나 과정의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그 삶에서 얻은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힘이 됐을지도 모른다.
포스터에 이런 문구가 있다. ‘사랑보단 상처가 익숙했던 그들,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연기가 내게 상처가 되기 시작했고 나의 아킬레스건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연기의 참 맛이나 기쁨을 알게 된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여전히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을 밟아나가면 어느 순간 정점에 이르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은 이런 과정이 힘들다기 보단 오히려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면이 더 많아진 거 같다.
“왜 내가 네 손을 잡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는 은설의 대사처럼 운명이란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배우로서 살아가는 것도 결과론적으로 본인의 운명인 셈인데 그 상황 속에서 어떤 목표의식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에게 연기가 어떤 것이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연기는 나에게 운명과도 같은 존재라고 대답했다. 처음엔 정말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다가왔고 이로 인해 이런 저런 시련을 받았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벗어날 수 없게끔 상황이 이어졌다. 이젠 그 어떤 것보다 연기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 것 같아서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기에 대한 기쁨을 알고 내 길이란 확신이 생긴 만큼 내 스스로 연기를 즐기면서 보는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목표다.
인기라는 건 마치 때때로 버거워서 버리고 싶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메이의 짐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데뷔 초부터 많은 인기를 누렸던 만큼 그 인기의 허와 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너무 어린 시절부터,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인기를 얻어서 그런지 그런 인기에 대한 허와 실을 너무 빨리 알게 됐다. 그게 물론 나에게 중요한 건 안다. 다만 그게 삶의 목표가 되면 안 된다. 나한테 따라와주면 좋지만 따라와주지 못해도 너무 낙심할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했는데 원래부터 염두에 둔 선택이었나, 아니면 입시적 진로를 앞두고 결정한 문제였나.
솔직히 그 당시엔 학교에서 그때 내가 하던 것과 다른 부분을 배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다른 분야를 배우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연극영화과를 선택하게 됐다. 그런데 사실 학교를 갈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체계적인 공부도 하지 못했고 그런 부분을 놓치고 가야 했던 건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얻은 경험이 본인에게 실질적인 연기적 수업이 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의 시행착오도 겪어왔을 텐데,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설 때 기분은 어땠나?
아마 카메라에 대한 공포가 없고 오히려 친밀감이 있다는 게 가수 출신 연기자의 장점이 아닐까. 반대로 우리 식구든, 멤버든, 매니저든,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왔던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수십 명의 스태프들과 몇 달간 동거 동락하듯 지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생기는 다양한 트러블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낯설고 힘들었다. 게다가 짧은 순간의 무대 공연에 익숙해 있던 내게 긴 호흡의 연기는 낯설고 힘든 일이기도 했다.
무대에선 짧은 순간에 에너지를 폭발시키면 되지만 현장에서는 에너지를 배분해서 끊임없이 방전과 충전을 거듭해야 한다.
가수가 무대에 서는 게 100m 달리기라면 연기는 마라톤 같은 느낌이다. 그땐 에너지를 배분하는 법에 익숙하지도 못했고 서툴렀다. 그래서 연기적으로도 들쑥날쑥 하고 논란의 여지가 생긴 거 같다. 기존에 그런 걸 배우고 어느 정도 인지가 된 상태에서 시작한 게 아니었던 만큼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터득해 나가는 과정이다 보니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핑클’ 시절 덕분에 여전히 ‘요정’소리를 많이 들을 것 같다. (웃음) 그런 말이 지금의 당신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나?
그 당시에 우리가 그렇게 불려졌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련한 추억이 되는 거 같다. 재미있다, 그냥. (웃음)
‘핑클’은 이제 당신의 삶에서 과거형이다. 그럼에도 당신의 현재를 말할 땐 항상 핑클이라는 과거에서 시작된다.
‘핑클’이 큰 존재였구나, 라는 걸 알게 되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사실 예전에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지만 지금은 ‘핑클’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한다. 덕분에 이제 ‘핑클’ 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픈 욕심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수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활동을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핑클 활동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고, 가수 출신 연기자로서 끊임없이 비난을 받을 때마다 그런 고비가 있었다.
대중들의 비난에 항상 대응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는 것도 간혹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본인에게 비난을 던진 불특정다수의 사람들 중 그 영상을 통해 미안함을 품었던 이들도 있을 거다. 일일이 항변하거나 변명할 순 없지만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때때론 좋은 소통 방식이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한 번은 내가 아는 지인 분에게 이런 얘기들에 대해서 다 해명하고 싶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저에게 말씀해주시더라. “이 직업을 가진 이상,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이슈가 되거나,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돼 살아야 한다. 그런 오해와 구설수와 각종 루머에 대해서 네가 모두 하나하나 해명할 수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해라. 그러나 네가 해명하지 못한 그런 루머나 오해들은 사실이 돼버린다. 어떤 것을 선택할 거냐.” 내게 온 국민의 오해와 루머를 하나하나 해명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하는 법도 배워야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실은 분명 밝혀지는 것 같다. 만약 기회가 돼서 해명할 기회가 되면 해명할 수도 있고. 그리고 이젠 그런 지혜가 약간 생긴 것 같다.
‘핑클’ 시절 함께 활동했던 다른 멤버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제각각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함께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로부터 10년 정도 세월이 지났는데 지금 어떤 감회라 할만한 게 있을까?
항상 넷이었다가 혼자가 됐을 때는 각자 본인의 분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했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저마다 본인의 분야를 즐길 줄 아는 여유가 보이는 것 같고, 각자 분야에서 다들 인정받고 있는 거 같아서 좋다. 내가 제일 어려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자매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언니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잘 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요즘 새로운 10대 아이돌 그룹이 많은데 그런 후배들을 보면서 예전 생각을 할 때는 없나?
나는 그 당시에 우리 팬들이 우리 노래나 이미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를 좋아한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단지 어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예쁜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각자 개성도 뚜렷하고 재능도 뛰어나지만 그 나이 또래들만 누릴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에 저런 모습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면 새롭고 신기하고 그렇다. (웃음)
<토끼와 리저드>는 뒤늦게 찾은 운명적 상대에 대한 멜로다. 이제 데뷔 초에 비해 사랑에 대한 관념도 보다 깊어질 나이로 들어섰는데 운명적인 대상을 찾을 것까진 없겠지만, (웃음) 연애나 결혼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해 볼만한 나이가 됐다.
어릴 때부터 너무 특수한 환경 속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하게 만나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그런 소망이 있다.
<황태자의 첫사랑>에서 차태현 씨와 호흡을 맞췄다. <토끼와 리저드>에서도 차태현 씨가 출연하는데 본인과 호흡을 맞추는 신이 없어서 마주칠만한 일도 적었을 것 같다.
사실 포장마차 신에서 같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은설과 메이의 감정에 몰입하고 싶으시다고 편집하셨다. (웃음)
지난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를 새로운 작품에서 만나는 건 본인에게 몇 안 되는 경험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만났다는 점도 특별한 감상을 주지 않던가?
20대 중반의 내가 만난 태현 오빠와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태현 오빠는 참 많이 다른 사람 같더라. 그리고 태현 오빠도 이제 결혼했고 아이도 있는 만큼 보다 성숙한 느낌이 드니까 새롭기도 하고 그만큼 정감도 갔다.
방금 말한 대로 서른을 앞둔 나이인데 그만큼의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할 것 같다.
일단 20대엔 이런 저런 갈등이나 시련이 많았고 내 스스로 내 자신의 중심을 잘 세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20대 때 겪어야 할 과정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어떤 목표가 생기고 중심이 잡힌다고 느껴지니까 오히려 30대가 좀 더 기대된다. 그 목표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이랄까.
최근에 한 다른 인터뷰에서 장혁 씨가 성유리 씨를 교양 있는 여자라고 했더라.
(웃음) 워낙 장혁 씨가 교양이 있으셔서 나도 거기 발 맞추어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동적인 부분보단 정적인 부분이 많이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
사실 아이돌 가수 출신이라 발랄하고 활발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외란 말을 많이 듣게 되진 않았을까.
요즘 인터뷰하면서 많이 느끼는 건 내가 되게 발랄하고 활발한 이미지로 많이 생각된다는 점이다. 내 스스로는 내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는 점이 새로웠다.
메이의 히스테릭한 모습만 걷어내면 본인과 많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익숙한 감정이라 오히려 편하게 봤는데 보신 분들은 색다르게 보시더라. 이런 부분이 내겐 강점이 될 수 있겠구나 느꼈다.
<쾌도 홍길동>이나 몇몇 드라마에서 백치미적 캐릭터를 연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로 각인된 부분도 많을 거다. 어쩌면 정작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캐릭터들을 연기한 셈인데 자신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기분은 어떤가?
그런데 내 안에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친한 친구들은 그런 캐릭터들이 평소 생각하는 나와 닮았다는 얘기도 하더라.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이 부각되느냐 차이인 거 같다. 이런 저런 역할을 하다 보면 나도 잊고 있었던 성격들이 나온다. 결국 스스로의 재발견이랄까.
때때로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하면서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순간도 있을 테고.
어제 영화를 세 번째로 봤는데 눈 모양이 신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오는 게 보였다. 각도에 따라서, 아니면 조명에 따라서 그렇기도 하고, 어떨 땐 조금 올라간 눈이 되거나 반대로 내려간 눈이 되기도 하고. 나도 몰랐던 그런 부분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저럴 땐 이렇게 하는 게 좀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쉽겠구나, 이런 것도 알게 되고.
10년여 동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런 관심 속에서 짓눌리지 않고 살아남는 건 말 그대로 그 삶을 즐길 줄 알 때 가능할 것 같다. 그 삶 자체가 일종의 도피처가 되는 거랄까.
예전엔 사생활을 구속 당하는 느낌이 싫다는 막연한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 사생활이라 할만한 게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일상 속의 내 삶은 딱히 스펙터클하지 않고 재미있다기 보단 지루하다. 그런데 연기를 통해 다른 캐릭터로 살아가는 인생의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이젠 기꺼이 다른 부분의 희생을 받아들일 의향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이젠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싶은 사생활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노하우도 생긴 것 같아서 그 일상을 절충하는 게 가능한 것 같다.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에 의지한 채 감춰진 과거를 찾아 서울공항에 내려선 메이(성유리)는 길가에서 차에 등을 기댄 채 쭈그려 앉은 택시기사 은설(장혁)에게 손을 붙잡힌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은설의 손을 뿌리치려던 메이는 은설이 심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누군지 알 길이 없는 택시기사 은설은 심장이 언제 멈출지도 모를 ‘민히제스틴 증후군’이란 보기 드문 심장질환을 앓고 있다. 죽음과 직면하듯 살아가는 남자와 본의 아니게 상실한 과거를 되찾고픈 여자, 기구한 현실에 놓인 남녀는 운명적으로 손을 잡는다.
핸들을 붙잡고 고통에 신음하는 남자의 간절한 표정이 의문을 자아낸다. <토끼와 리저드>는 결말부의 한 조각을 떼어내 전진배치하고 이를 통해 유효해진 물음표의 정답을 찾아가는 멜로적 여정이다. 형태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토끼와 리저드>란 제목은 두 남녀의 트라우마와 연관된 두 마리의 동물을 나열한 것이다. 유년시절 기억에 남겨진 ‘빨간 토끼’를 찾아달라는 은설이나 어깨 뒤에 ‘도마뱀(lizard)’모양의 긴 흉터를 지닌 메이에겐 쉽게 치유되지 못하는 고통이 존재한다. <토끼와 리저드>는 두 남녀의 트라우마에 얽힌 운명론적 인연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그 상처마저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궁극적으로 결말부에 다다라서야 모든 의문을 일거에 해소시키는 <토끼와 리저드>는 결국 숨겨놓은 서사의 한 단면을 드러내기까지 얼마나 지속적인 극적 흥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 해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우연한 만남 뒤 필연적인 재회를 거듭하며 서로의 주변을 맴도는 남녀의 인연은 결국 운명적 관계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진다. 정체된 듯 미약하게 진전되는 남녀의 관계가 망각된 운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결말부는 <토끼와 리저드>가 다다르고자 하는 성취적 결과나 다름없다. <토끼와 리저드>의 관건은 사연의 핵심이 드러날 결말부에 다다르기까지 암시적 상황을 제시하며 극적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놓여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토끼와 리저드>는 답보적으로 진전되는 상황을 방치하고 캐릭터들의 감정을 설득시키는데 미숙한 멜로다. 영화는 온전히 캐릭터의 행위나 태도만으로 그 순간의 감정을 곧잘 묘사할 뿐, 캐릭터의 감정에 조언적 역할을 하는 상황을 제시하거나 연출적 뒷받침을 가미하지 못한 채 온전히 캐릭터가 자아내는 순간의 감정들을 방치하고 휘발시켜버린다. 사실 <토끼와 리저드>는 극적 의문을 해결할만한 결정적 서사를 감춰두고 서사적 진전과 함께 공개되는 기억의 너비를 늘려나가고 이를 통해 결말부에 등장할 결정적 순간의 목도까지 기다릴 관객의 인내심을 확보해나가야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대단한 감흥을 부를 만큼 인상적인 사건을 전개하지 못하는 <토끼와 리저드>는 단순히 두 인물간의 감정적 마찰만으로 러닝타임을 채워나가려는 듯 단조롭고 심심한 영화다.
자연광을 적극 활용한 투명한 이미지와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 화보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토끼와 리저드>는 종종 희미한 감정에 홀로 도취되는 것처럼 보인다. 운명적이란 수사는 무색하고 사연은 지극히 작위적이며 감정은 얕아서 마음을 담기 어렵다. 제목의 모호함만큼이나 어떤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영화에서 두 남녀 배우는 적절히 제 몫을 다 한다. 다만 두 배우의 기능적인 연기를 좀처럼 감정적으로 보좌해주지 못하는 영화 덕분에 캐릭터마저 겉도는 인상을 준다. <토끼와 리저드>는 서사적 배열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적으로 확장하지 못한 채 그 단편적 찰나에 기댄 채 사연만 늘려나간 형태로서 감상을 느슨하게 만드는 영화다. 궁극적으로 그 지난한 운명적 예감을 실체로서 공개하는 결말부도 딱히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좀처럼 설득력 없는 감정들이 느슨하게 전시되다 뒤늦게 정체를 드러낸 실체가 별다른 파장을 형성하지 못한다. 명백히 실패한 멜로드라마다.
관능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노출뿐이라 생각한다면 빈곤한 상상력을 탓할 필요가 있다. 직관적인 이미지는 자극의 잠재적 성과를 되레 반감시킨다. 선명한 이미지의 관찰보다도 불투명한 실루엣이 발생시키는 상상력이 감상적 욕구를 자극하곤 한다. 이미지가 발생시키는 자극의 충만보다도 잠재적인 욕구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보다 매혹적이다. 여인의 나신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관능적인 티저포스터가 눈길을 사로잡는 <오감도>는 분명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에로티시즘의 상상을 예상케 한다.
변혁의 <his concern>, 허진호의 <나 여기 있어요>, 유영식의 <33번째 남자>, 민규동의 <시작과 끝>, 오기환의 <순간을 믿어요>까지, 에로스라는 주제에 차례로 내걸린 다섯 개의 시선을 내건 옴니버스 <오감도>는 분명 적확한 기대감을 부르는 기획영화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한 여인에게 이끌린 남자, 섹스리스의 일상 속에서 비극적 예감을 참아내는 부부, 서투른 신인배우와 관록 있는 중견배우의 충돌과 이를 조율하는 명감독의 기이한 삼각관계, 남편의 부음과 외도 사실을 함께 알아버린 아내의 미스터리한 동거, 발랄한 10대들의 속을 알 수 없는 파트너 체인지. 다섯 편의 작품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장르적 탈을 쓰고 에로스의 수위를 오르고 내린다.
로맨틱코미디, 멜로, B급호러, 미스터리, 하이틴로맨스, 각기 다른 장르의 탈을 쓴 <오감도>는 저마다 야심적인 방식으로 개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오감도>는 작품을 거쳐나갈수록 방식의 차이에 따른 자극적 성취를 선보이기보다 권태를 축적해나간다. 옴니버스라는 형식으로 내걸린 다섯 편의 작품은 분명 에로스라는 관능을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공유하고 있으나 다섯 편의 작품은 어느 하나도 이를 관통하지 못한다. 차분한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캐릭터의 심리적 흐름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에피타이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저마다 다양한 장르적 욕망을 선보일 뿐, 결과적으로 권태를 쌓아나간다. 저마다 좀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각인시키지 못하는 결과물이 연속적으로 전시된다.
옴니버스는 다양한 시선을 통해 하나의 주제를 발견한다는 귀납적 묘미와 하나의 주제로 다채로운 해석을 만끽할 수 있다는 연역적 묘미가 가능할 때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해진다. <오감도>는 옴니버스의 다양성을 악재로 몰고 나가는 두서 없는 기획이다.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지 못하는 동시에 저마다 하나같이 피곤한 감상적 결과를 부른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기대감은 파격이란 단어를 낯설게 만드는 이미지와 창의적 해석과 무관하게 장르적 과욕에 사로잡힌 스토리텔링의 거듭된 난국 속에서 빠른 속도로 낡아간다. 도전적이라기 보단 과욕적이며 창의적이라기 보단 자만에 가깝다. 짧은 단편들이 마치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암담해진다. <오감도>는 에로티시즘이 증발된 에로스의 만찬이다.차린 건 많아 보여도 좀처럼 잡히는 게 없다. 그저 티끌처럼 쌓여나가는 권태가 끝내 태산처럼 쌓여 식욕을 감퇴시킬 따름이다.
에로스에 대한 다섯 개의 시선. 과감하고도 감각적인 누드 이미지를 내건 티저포스터는 <오감도>가 구사할 에로티시즘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긴다. 그러나 기대는 거기까지, 영화는 포스터가 주는 모종의 기대감과 동떨어진 결과물에 불과하다. <오감도>는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지 못하는 옴니버스이자 기획에 따른 기대감을 배반하는 결과물이다. 창의적인 해석력도, 과감한 묘사력도 선보이지 못한다. 도전적이라기 보단 과욕에 가깝고, 창의적이라기 보단 자만에 가깝다. 에피소드를 통과할수록 티끌과 같은 권태가 쌓여나간다. 또한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축적된 권태의 무게를 견디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고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