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제작된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쉐인 액커는 이를 통해 팀 버튼과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었고 자신의 세계관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다. 서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자체가 생략됐으며 캐릭터의 대사조차 동원되지 않는 탓에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세계관이지만 폐허와 같은 이미지 위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의 탁월한 액션신이 담긴 11분 가량의 단편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에 대사를 입히고 세계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암시를 동원한 80분짜리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됐다.
인간의 이기를 위해 창조된 기계문명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을 자초한다. <9: 나인>(이하, <9>)은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와 같은, 기계문명에 의해 공격받는 인류의 비관적 묵시록을 스팀펑크(steampunk) 이미지에 담아낸 애니메이션이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 남은 건 인간을 말살한 기계들과 피부대신 천을 두르고 살아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인형들이다. 멸종된 인간이 남긴 문명의 잔해 위에서 인간을 말살한 인공지능 기계로봇에 맞서 생존적 저항을 펼치는 새로운 존재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활약을 묘사한다.
등에 적힌 숫자로 이름을 대신하는 9개의 인형 캐릭터는 제각각의 뚜렷한 개성을 통해 상대로부터 차별화된다. 인간만큼이나 부조리한 반면, 현명하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저마다 이성과 감정의 양면성을 갖추며 사고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폐허가 된 인간의 세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처참한 풍경이지만 이는 딱히 불행을 인식시키지 않는다. 이는 그 폐허 위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들이 인간들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이 사라진 영토를 차지한 존재들은 인간의 비극을 감지할 수 없는 로봇과 인형에 불과하다. <9>은 마치 인류가 사라진 묵시록의 대지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창세기처럼 보인다. 폭력적 진화 속에서 멸망을 자초한 인류는 자신들이 건축한 세계로부터 퇴장 당하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멸망 당한 인류가 만들어낸 인공적 존재들이다.
<9>은 비범한 서사보다도 가벼운 묘사를 통해 매력을 어필하는 작품이다. 세계관의 기원과 캐릭터의 근원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고 암시조차 소극적이다. 하지만 문명에 대한 비관적 뉘앙스로 그려진 세계관은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치장하는 거대한 소품에 가깝다. 인류는 그저 사라져버린 종에 불과하며 이는 <9>에서 딱히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폐허가 된 문명 위에서 인류가 남긴 폭력적 문명에 대항하며 생존을 위한 대결을 펼쳐나가는 새로운 종의 투쟁 그 자체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포착된다.
물론 <9>에선 인류의 문명에 대한 비관과 조롱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9>에서 그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기란 어렵다. 이는 <9>이 그 세계관을 병풍처럼 두르고 방치하는 덕분이다. 암울한 세계관을 인테리어처럼 두른 채 창조적인 캐릭터들이 이루는 동선을 따라 구사되는 스타일리쉬한 액션은 고차원적인 해석의 의욕을 차단하는 동시에 일차원적인 시각적 묘미를 부여한다. 인류의 흔적을 지워버린 묵시록적 세계관을 스팀펑크의 이미지로 디자인하고 테크놀로지 기계 문명과 아날로그적인 캐릭터들의 대결 구조를 통해 화려한 볼거리를 확보해나간다. 비관적인 세계관은 낡은 천을 두른 인형 캐릭터들의 창작적 개성을 통해 암울함을 잊은 채 서스펜스를 구사하기 위한 응용적 배치로서 소모될 뿐이다.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구현하는 <9>에서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건 <9>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순수하게 만끽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여건에 가깝다. 창의적인 이미지가 구현하는 시각적 묘미를 부담 없이 즐기면 그만이다. 거창한 이미지를 통해 비범한 의미를 치장하지 않고 빠르고 신속하게 제 위치를 선점해나간다. 그런 면에서 <9>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의 오락적 너비를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라 말해도 좋을 작품이다.
그토록 많은 연애 지침서가 존재하는 건 그토록 많은 연애 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뻔한 문장들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반증이리라. 그건 마치 오래된 잠언처럼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싶은 것뿐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로맨틱 코미디 혹은 멜로처럼 특별한 케이스를 빙자하고 있지만 뻔한 결과론을 담고 있는 게 인지상정. 다양한 커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버라이어티하게 나열하는 가운데 우연과 필연의 법칙 속에서 엮이고 풀리는 관계를 그려나간다. 주어와 보어의 뉘앙스만으로 감지되듯 남성보단 여성에 대한 편애가 좀 더 강하지만 이는 귀여운 투정처럼 넘어갈만한 문제다. 남성을 여성의 속죄양 취급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다양한 에피소드가 일관되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건 문제다. 비중 차가 존재하는 각각의 로맨스를 분자 배열한 뒤 충돌시킨 반응의 에너지 값이 생각보다 미약하다. 이름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배우들의 면면보다 나아 보이는 구석이 없다. 사랑에 목매지도 간과하지도 말라는 것, 결론은 누구에게나 뻔한 교훈이다. 중요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열되는 로맨스 속엔 상황에 대한 인지가 존재할 뿐 진심을 전달하는데 인색하다. 그저 질문을 던지고 농담으로 받아 치듯 헐겁다.
불청객은 경계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우주에서 날아온 외계인은 지구상의 인간들에겐 위협적인 불청객이다. 물론 E.T처럼 선량한 눈빛으로 감동을 선사하고 떠나는 훈훈한 이방인의 사례도 존재하나 그 밖에 지구를 찾아온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무시무시한 행패를 부리며 인류를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우주에서 날아와 뉴욕 센트럴파크에 착륙한 정체불명의 스피어, 그리고 그로부터 내려온 외계인 클라투(키아누 리브스) 역시 정체불명의 위협적 존재다. 그를 따라 내린 거대한 로봇은 더더욱 수상하다. <지구가 멈추는 날>은 지구에 시련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외계인을 그린다. 하지만 그들이 단순히 지구정복을 꿈꾸는 불한당은 아니다. 지구를 찾아온 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1951년작 <지구 최후의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을 리메이크한 <지구가 멈추는 날>은 냉전시대의 정치적 메타포를 환경이라는 화두로 치환했다. 시대에 걸맞은 패러다임을 찾아 옷을 갈아 입혔다. 현시대에 걸맞은 문제의식이자 적절한 전환이다. ‘지구가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인간이 죽으면 지구는 산다’ 클라투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전지전능에 가까운 외계인의 징벌 앞에 인류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그 무참한 이미지만큼이나 끔찍한 건 실제로 현실이 그 징벌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51년작 만큼이나 분명 흥미로운 주제를 던지고 있다. 51년 당시의 상상력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반원형의 UFO는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신비로운 스피어로 변형됐고, 거대한 로봇 고트 역시 CG의 힘을 빌어 더욱 위력적으로 묘사된다. 전작과 달리 <지구가 멈추는 날>은 이미지의 제공권을 빌어 파괴적인 스펙터클을 적극 동원하며 블록버스터의 스케일을 자랑한다. 두 영화의 사이에 놓인 세월은 이미지의 규모 차이 만으로도 여실히 설명된다.
그럼에도 <지구가 멈추는 날>을 전자보다 높게 평가하기란 어렵다. 전자와의 비교를 떠나서도 분명 그렇다. 주제는 흥미롭지만 문장력이 떨어진다. 할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구 최후의 날>이 50년대 냉전시대의 정치적 패러다임에 대한 비폭력적 경고였다면 <지구가 멈추는 날>은 파괴적 위협을 동반한 환경문제에 대한 경고에 가깝다. 지구가 인류의 것임을 부정하는 클라투는 전지전능에 가까운 신적 존재다. 그가 인류의 멸망을 이야기하는 건 일종의 선언과 같다. 운명론적이다. 그를 설득하는 헬렌(제니퍼 코넬리)은 실상 무기력하다. 궁극적으로 거대한 파괴가 시작되고 모든 것이 망가질 위협에 놓인 인류의 상황은 가히 종말론적이다. 수습할 겨를이 없을 지경이다.
상황은 간단하게 정리된다. 거대한 댐이 터져 넘치는 강을 바가지로 막듯 상황을 무마시킨다. 논리적 이치를 묻는 건 무의미하다. 어차피 이 세계의 현실로서 판독할만한 사안은 아니다. 단지 그 거대한 형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다.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 중요한 건 이미지였다. 단지 거대한 건물을 쓸어버리는 파괴적 이미지를 담을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인류의 종말을 선언하는 배경엔 그런 얄팍한 근거가 엿보인다. 궁극적으로 이미지로 배를 채웠으니 이야기는 굶어도 상관없다. 전시가 끝났고 설명은 귀찮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감정적 문제로 거대한 사건을 마무리 짓고 해피엔딩을 알린다. 거대한 이미지를 동원해 파괴적인 협박을 운운하다가 갑작스런 회유에 나선다. 환경주의적 메시지가 무색해진다. 지구가 멈추기 전에 의식이 멈추는 기분이다. 키아누 리브스의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감흥이 없다.
<지구가 멈추는 날>은 시대적 패러다임을 반영한다. 50년대 냉전시대의 갈등은 21세기 환경문제로 치환된다. 구작과 신작의 공통분모는 인류다. 인류의 어리석음에 경종을 울리려 한다. 지구를 우리의 것이라 여겼던 인류는 외계인의 전지전능한 능력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지구가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인간이 죽으면 지구는 산다.’의미심장한 멘트까지 등장한다. 경이적이고 파괴적인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징벌적인 이미지는 위협적 설득에 가깝다. 분명 현시대에 유용한 문제의식을 야기한다. 문제는 문장이다. <지구가 멈추는 날>은 흥미로운 주제에 비해 문장력이 떨어진다. 50년대보다 발전한 이미지를 과시할 뿐, 반 세기 이전만도 못한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려는 환경주의적 메시지가 얄팍하다 못해 오만하다. 영화 속 외계인을 설득하는 사연이 되려 객석을 심드렁하게 만든다. 외계인도 알겠다는 변화의 가능성에 수긍이 가지 않는다. 지구가 멈추기 전에 두뇌가 멈추는 기분이다. 이래서야 인간을 변화시키고 지구를 살릴 수 있겠나. 거대한 이미지의 파괴적 협박 뒤에 남는 건 그저 지루한 단상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