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부터 플린트는 남달랐다. 그 아이는 남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해냈고,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문제는 그 재능이었다. 그 재능은 일종의 불운처럼 주변사람들을 비롯해 자신에게마저도 끝없는 민폐를 끼쳤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에 유익한 재능이 되길 바라던 소년은 결국 마을의 골칫거리로 소문이 자자한 성인으로 자랐다. 그리고 성인이 된 플린트는 발명가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마을에 끝없는 민폐를 이어나간다. 그런 어느 날, 그 삶에 반전이 찾아온다. 먹을 거라곤 정어리밖에 없는 마을에서 살아가던 플린트는 물을 음식으로 바꾸는 기계를 발명하고 우연히 기계를 하늘로 띄워보낸 플린트는 이를 통해 마을에 무전취식의 행운을 가져다준다. 말썽의 원흉이라 손가락질 당하고 모든 이들의 무시를 한 몸에 받았던 플린트는 이로 인해 마을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사실상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이 취하는 기본적인 설정, 예를 들자면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진다는 상황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이미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인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음식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그 자체가 이미 끝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갖가지 음식 세례를 맞은 몸은 소스로 범벅이 될 것이며 길거리는 부패한 음식의 악취가 들끓을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현실적인 세계관을 두르고 있되, 그 현실성을 풍자의 수단으로 치장한 작품이다. 영화가 연출하는 갖가지 상황들은 고의적인 농담에 가깝다. 사실적 증명에 실패한다기 보단 고의적인 비틀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 유머가 겨냥하는 팔할의 과녁은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가 차용하던 패러다임의 전복적인 패러디에 가깝다. 농담에 가까운 상황을 마구잡이로 건너뛰는 캐릭터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농담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단순하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아들을, 그리고 마을의 사고뭉치를 모든 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키는 과정은 할리우드 영웅스토리의 진부함을 그대로 차용한 결과물에 가깝다. 다만 진지한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크고 작은 농담들로 이뤄진 코미디의 틀거리로서 이해할 때 이는 유용한 방식이 된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드라마로서의 내러티브를 통해 이야기로서의 뼈대를 세우되, 본질적으로 자신의 목적이 양념처럼 쏟아지는 유머의 향연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작품이다. 만화적인 과장성을 노골적으로 내세우면서 그것의 활용도를 극대화시키는, 장르적 허용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해내고 있다. 진부한 성장드라마의 약점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유머와 재치로서 극복해냈다. 그리고 그 유머와 재치가 즐길만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얻어맞을지 모른다는 현실적 두려움보단 그 상황이 주는 놀라운 재미를 만끽하게 만든다. 관습적인 사연에서 벗어나지 않는 드라마의 진부한 가뭄은 지속적인 강우량을 자랑하는 번뜩이는 유머로 극복된다.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로부터 배어나는 낭만적 기운을 로맨틱한 에피소드와 연결한 기획적 옴니버스다. 파리를 배경으로 18편의 옴니버스를 직조한 20명의 감독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통해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성을 부추긴다. 사실상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고유적 낭만성을 증명하기 이전에 긴 세월 동안 환상성을 구축한 도시가 로맨스라는 감정을 얼마나 탁월하게 보좌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사랑해, 파리>에 이어 새로운 낭만도시 프로젝트의 제작에 착수한 엠마뉘엘 벤비히가 <뉴욕, 아이러브유>로 뉴욕을 새로운 로맨틱 시티로 낙점한 것도 그 도시를 동경하는 이들의 환상을 등에 업은 것이나 다름없다.
18편의 에피소드마다 명확한 구획을 나눈 <사랑해, 파리>와 달리 <뉴욕, 아이러브유>는 각 단편의 시작과 끝을 이어 붙이며 마침표의 영역을 지워버렸다. 주가 되는 단편 사이마다 다리 역할을 하는 짧은 전환점(transition)을 삽입하고 이를 통해 사연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그만큼 매 순간의 감정을 음미할 여유가 줄어든 반면, 다음 작품에 몰입할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산만한 인상을 줄 확률도 적지 않다. 매 단편마다 적확한 마침표를 찍어내듯 경계를 둔 <사랑해, 파리>보단 보다 불친절한 형태로 완성된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번잡함을 영화적 구성 그 자체로 승화해버린 것마냥 번잡한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부르는 동경심의 너비만큼이나 풍요로운 로맨스의 만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이와이 슌지를 필두로 11명의 감독이 만들어낸 로맨틱한 상상을, 그것도 다채로운 배우들의 얼굴을 빌려 뉴욕의 사랑담을 그려내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일면 의미 있는 일이다. 작품마다의 편차를 떠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모티브로 삼은 러브스토리의 향연을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흥이 배어난다. 특히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황홀한 충격을 선사하는 세자르 카푸르와 고전적 무게감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는 이와이 슌지의 단편은 <뉴욕, 아이러브유>안에서 단연 빼어난 감상을 부여한다. 그 밖에도 장난끼 넘치는 반전을 품은 브렛 라트너와 이반 아탈의 작품, 그리고 수다스럽지만 귀여운 노부부의 애틋한 감정을 깊게 전달하는 조슈아 마스턴의 영화 또한 꽤나 인상적이다. 감독으로 데뷔한 나탈리 포트만의 깔끔한 연출력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관심사가 될만한 지점이다.
번잡한 뉴욕의 교차로를 건너듯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단편적 상상력을 따라잡는 건 그만큼의 집중력을 요하기에 피곤한 감상을 부여할지 모른다. 동시에 옴니버스의 특성상 작품마다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도 일종의 맹점이 될만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그 다채로운 감각과 다양한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먹음직스러운 만찬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어느 도시에서나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랑해, 파리>와 <뉴욕, 아이러브유>는 특별한 도시의 로맨스라기 보단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둔 특별한 로맨스적 일화의 총망라에 가깝다. 떨리는 찰나의 이끌림도, 담담한 영원의 엇갈림도, 낮과 밤을 아우르며 도시를 떠돌다 그 거리에 낭만을 켜켜이 채워나간다. 낭만을 먹고 자란 도시는 전인류적 동경을 끌어안고 그 환상을 품에 안은 채 또 다른 낭만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뉴욕, 아이러브유>는 도시를 위한 낭만의 헌사라기 보단 유려한 도시를 풍경으로 낭만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새로운 낭만은 또 다른 도시로 전파된다. 아마도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랑을 꿈꾸는 도시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