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무공을 자랑하던 고수 라마가 죽어서 남긴 시신을 소유할 수 있는 자는 대단한 능력을 얻게 된다는 소문과 함께 강호에 피바람이 분다. 두 조각으로 나뉜 그의 시체를 소유하고자 절대고수들이 쟁탈전을 벌이기 때문. 그 가운데 잔인한 고수 문파로 알려진 흑석파가 시신을 보유한 한 가문을 급습해 부자를 죽이고 시신의 절반을 얻는데 성공하지만 그 시신을 소유하게 된 여성 검객 세우는 자신의 그런 삶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고자 도주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바꾸는 성형에 성공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흑석파는 그녀의 뒤를 좇게 된다.
앞선 문맥은 <검우강호>의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되기까지의 여정을 설명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검우강호>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프롤로그 시퀀스와 CG컷을 동원한 오프닝 시퀀스가 포함된 10분여의 러닝타임을 할애하며 이를 설명해낸다. 이는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이다. <검우강호>는 무협물로서 기초적으로 빤한 소재나 줄거리를 공들여 설명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다소 유치한 무협물 특유의 설정을 비범하게 포장하지 않은 채 단지 내러티브의 정보로서 전시되는 이 압축적인 도입부는 <검우강호>가 오락물의 하위 장르로서의 기능성에 충실한 작품임을 기대하게 만든다.
<검우강호>는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감지되는 작품이다. 무협의 코드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고전적인 웨스턴 무비의 정서와 특정한 스파이물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캐릭터와 플롯까지, 단연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감지되는 영화다. 오우삼 자신의 작품인 <페이스오프>의 흔적부터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와 같은 스파이물의 영향력이 깊게 감지되는 <검우강호>는 현대적 소재의 장치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작품이다. 동시에 비범한 대의를 표방하는 무협물의 정서와 달리 물질적인 욕망과 개인적인 삶에 천착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무협물의 포맷 안에서 이례적인 정서적 묘사를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빼어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검우강호>는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파악하고 목적지에 다다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어떤 의의를 전파하기 보단 자신의 기능성을 확실히 인지하고 그 역량을 전시하는데 능한 가공품으로서 유용하다. 다양한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표현하고 갈등을 야기시키는 내러티브의 소모품으로서 유용하게 등장하고 퇴장한다. 시종일관 거듭되는 유려한 액션신을 기대했을 어떤 관객에게는 <검우강호>의 액션신이 양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나 후반부를 장식하는 액션신의 완성도는 분명 즐길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검우강호>는 레일을 깔고 그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은 작품이다. 기차가 지나는 역을 살피기 보단 전진하는 기차의 방향이 보다 뚜렷하게 눈에 띈다. 어떤 특별한 철학적 의미를 발췌해내기 보다는 영화가 발생시키는 장르적 쾌감과 이야기의 진전에 방점을 둔 작품이다. 대단한 장르적 성취를 이뤘다거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작품이라기 보단 제 목적을 이루고 오락적 성과를 제공하는 무협물로서 유효하다. 취향의 문제만 아니라면 딱 눈감고 시간을 죽일 만한 유용한 롤러코스터적 무협물일 따름이란 말이다.
중국의 시성 두보의 오언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에서 제목을 빌린 <호우시절>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라는 의미를 지닌다. <호우시절>은 곧 ‘호애(愛)시절’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재회한 과거의 연인은 시간 속에서 낡아가던 기억을 현재에서 되새김질하며 다시 한번 로맨스적 예감을 꿈꾼다. ‘때를 알고 내린 좋은 비’처럼 ‘때를 알고 만난 좋은 인연’을 그린 <호우시절>은 낭만적인 로맨스 멜로다.
건설중장비회사 팀장으로 근무하는 박동하(정우성)는 중국 사천의 청두로 출장을 가게 되고 현지 지사장(김상호)을 만나 ‘두보초당’으로 안내를 받는다. 두보초당을 구경하던 박동하의 시선이 초당을 안내하는 여자 가이드에게 머무른다. 그 시선을 느낀 가이드의 눈빛에 놀라움이 선연하다. 과거 중국유학시절 연인이었던 박동하와 메이(고원원)는 그렇게 우연히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회포를 푼다. 우연한 만남 속에 지난 이별의 아쉬움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이 감돈다. 엇갈림이 빚어낸 안타까움이 번져 그리움이 되어 앙금과도 같은 추억으로 침전한다. <호우시절>은 그 앙금과도 같은 로맨스적 추억이 현실에서 재생된다는, 판타지적 로맨스다.
수채화처럼 투명한 역광 톤으로 포착된 이국적 풍경 속에서 자리한 선남선녀의 이미지는 <호우시절>을 순정만화처럼 특별하게 치장한다. 특히 우월한 기럭지로 매장면을 특별하게 수놓는 정우성과 싱그러움과 우아함을 동시에 갖춘 고원원의 미소는 <호우시절>을 좀처럼 평범한 러브스토리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특별한 매력을 부여한다. 사실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우연히 재회해서 묵은 감정에 생기를 불어넣게 된다는 사연은 보편적이라기보단 특별하다 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호우시절>은 그 특별한 사연에 담긴 감정의 보편성에 적절한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먼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내고 빛 바랜 감정을 다시 숙성시켜나가는 며칠 간의 로맨스를 풋풋하고 아련하게 묘사하며 그 말미에 긍정적 여운을 남기며 극적 낭만을 성숙시킨다.
본래 <호우시절>은 쓰촨성 지진을 추모하기 위해 세 개의 단편 옴니버스로 기획된 <청두, 사랑해>에 참여한 허진호 감독의 작품을 장편으로 리폼된 작품이다. 중국 청두를 배경으로 두 남녀의 짧은 재회와 이별을 그리는 <호우시절>의 단편적인 서사도 어쩌면 그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상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유일하게 풋풋한 기운이 산들거리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한 <호우시절>은 사실상 작가적 욕심보다도 기획적 태도가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도 좋은 형태로 완성된 결과물이다. 그만큼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소품에 가깝게 이해해도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쓰촨성 대지진과 개인의 사연을 연동시키는 방식이나 그 현장을 예감하게 만드는 몇몇 이미지는 본래 <호우시절>의 기획의도를 재확인시키는 증거나 다름없다.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로 낭만의 존속을 아련하면서도 첨예하게 그려내는 허진호 감독은 <호우시절>을 전작들보다 무던한 멜로로 완성했다. 새로운 로맨스를 맞이하기 위해 남녀는 환절기 감기와 같은 진통을 건너고 삶의 면역력을 높인 뒤 성숙한 계절에 들어선다. <호우시절>은 느낌표라기 보단 쉼표에 가까운 작품이다. 허진호 감독의 한 계절을 이루는 작품이라기 보단적절한 이음새에 가까운, 간절기 멜로다.
중국의 시성 두보의 오언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에서 따온 <호우시절>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란 본래 의미를 ‘때를 알고 만난 좋은 인연’이란 의미로 변용한다. <호우시절>은 곧 ‘호애(愛)시절’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재회한 옛 연인이 다시 로맨스에 빠져든다. 엇갈림과 그리움을 매개로 운명적 러브스토리를 연출하고 앙금처럼 내려앉은 추억 속 감정을 현재로 소환한다.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재회해 먼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내고 묵은 감정을 다시 숙성시켜나가는 며칠 간의 로맨스를 풋풋하면서도 아련하게 묘사해나간 말미에 발전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긍정적 여운이 아련하게 깃든다. 수채화처럼 투명한 역광 톤으로 포착된 이국적 풍경 속에 놓인 선남선녀의 자태가 마치 순정만화의 한 장면처럼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만 순정적인 로맨스의 보편적 감정을 설득력 있게 진전시켜나간다. 우월한 기럭지로 매장면을 화보처럼 수놓는 정우성과 싱그러운 미소 가운데서도 우아한 깊이가 묻어나는 고원원의 조화도 인상적이다.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로 낭만의 존속을 아련하면서도 첨예하게 그려내는 허진호 감독은 <호우시절>을 보다 무던한 멜로로 완성했다.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한 계절을 이루는 작품이라기 보단 적절한 이음새에 가까운 간절기 멜로다.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 제프(소지섭)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은 뒤 시름에 빠져 있던 만화가 지망생 소피(장쯔이)는 복수를 다짐한다. 미모의 연기자 안나(판빙빙)와 눈이 맞아 자신을 차버린 제프의 관심을 다시 자신에게 이끌고 시원하게 뻥 차버리는 것. 게다가 안나와 모종의 과거를 지닌 사진 작가 고든(허룬동)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든든한 지원사격까지 약속을 얻어낸다. 이른바 ‘소피의 복수’를 담은 <소피의 연애매뉴얼>은 좌충우돌의 명랑한 로맨스를 묘사하는 순정만화적인 로맨틱 코미디다. 5단계의 챕터로 구성된 스토리와 알록달록한 풍선껌과 같은 미장센, 그리고 과잉된 감정을 표출하는 캐릭터, <소피의 연애매뉴얼>은 온전히 순정만화의 컨셉이 반영된 영화적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귀엽고 깜찍한 이미지를 연출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간지러운 장면이 여럿이며, 단순히 순정만화적인 느낌을 벗어나 유치한 스토리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게 만든다. 아무래도 남자보단 여자들을 배려한 취향의 영화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거나 각오해야 한다. 장쯔이의 과잉된 연기보다도 차분하게 슬랩스틱을 선사하는 소지섭의 간지 버린 표정이 더욱 인상적이다.
베를린에서 공개된 <매란방>의 러닝타임이 147분으로 알고 있다. 어제 내가 본 건 118분이었는데 중국에서 상영된 건 어떤 버전인가? 중국에서 상영한 것도 베를린 버전과 같은 147분짜리였다.
혹시 118분 버전은 봤나? 편집에 어디까지 관여한 건가?
공교롭게도 아직 보진 못했다. 사실 영화사 측으로부터 한국 사정에 맞춰서 러닝타임을 줄인다는 말은 미리 들었다. 배급사에서 나름대로의 사전에 맞춰서 부탁한 것이라 생각하니 반감을 갖거나 크게 염두에 두진 않았다. 일단 러닝타임을 줄였다고 하니 조정된 부분이 어떤 부분일 거란 예감은 든다. 그리고 중국이 아닌 한국이나 다른 나라의 사정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요청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다만 수입사의 판단이 옳은 방향이길 바랄 뿐이다.
예전에 펑 샤오강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펑 샤오강 감독은 아시아에서 제작되는 블록버스터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항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펑 샤오강 감독이 그때 어떤 시점에서 그런 말을 하게 된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감독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하기 위해서 중국도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자신의 나라가 지닌 아름다운 문화와 역사를 영화에 담아내고 이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미국 영화 중에서도 훌륭한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영향을 준다. 실질적으로 지금 전세계적으로 미국 문화 자체가 우세한 위치에 놓인 건 확실하다. 만약 한국이나 중국 감독이 자기 나라의 역사적인 전쟁을 영화로 찍었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 대부분을 이해시키긴 힘들 거다.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경우는 다들 서양문화를 이해하는 만큼 쉽게 받아들인다. 만약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인도감독이 인도영화처럼 찍었다면 세계시장에서 지금처럼 인정받기 힘들었을 거다. 그렇지만 우리 문화와 역사 속의 중요한 부분들을 우리가 영화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매란방>에서 일본군 장교가 경극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그런 맥락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중국이 위대하다는 의도로 접근한 대사는 아니다. 실제로 매란방은 일본으로 서너 번씩 건너가 공연을 했고, 이를 통해 일본 친구들을 알게 됐다. 그 장면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 일본군은 무력으로 중국을 점령할 수도 있었지만 문화를 정복함으로써 중국을 완전히 점령하려고 했다. 영화에서 일본과 중국의 갈등을 좀 더 디테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5분 정도의 분량을 편집과정에서 잘라냈는데 만약 그 장면이 남아있다면 이런 부분을 좀 더 보여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경극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 건 <패왕별희>와 같은 중국영화의 영향력 덕분이기도 하다. 혹시 중국 내에서는 경극을 소재로 한 다른 장르나 매체가 제작되고 있나.
아직도 중국 내에서 많은 관객들이 경극을 좋아하고 보기 때문에 여전히 공연이 이뤄진다. 특히 북쪽지방 사람들은 더더욱 경극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이용해서 다른 컨텐츠를 만들기 보단 여전히 경극 자체가 존재하고 있다. 경극은 높은 경지의 예술 세계를 보여주는 예술이므로 영원히 존재하길 바라지만 지금 현재로선 완전히 대중적인 예술이라 말하긴 힘든 측면이 있다. 물론 예전엔 아주 대중적인 예술이었지만 지금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경극은 현실주의적인 예술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어떤 동작이나 도구를 사용하는 형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동작이나 표정으로서 모든 것을 나타내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경극이 서양에 끼친 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유명한 감독, 배우, 평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들 가운데 경극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찰리 채플린과 매란방은 굉장히 많은 교류를 하는 친구관계였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가령 예를 들어서 컵을 들고 물을 마신다면 실제로 컵은 없지만 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동작만 하지 않나. 사실 이런 것들이 매란방과의 교류를 통해서 얻은 영향의 결과가 아닐까 짐작한다. 그리고 러시아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은 매란방이 연기하는 장면을 실제로 찍었었고 여전히 그 영상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매란방은 단지 중국에 국한되는 인물이 아니라 당시 유명한 세계의 대가들과 교류하고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매란방이 세계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당신의 작품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바가 있을 거다. 15년 전 상영됐던 <패왕별희>를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그 영화를 통해 경극을 처음 알게 된 사람들도 있을 거다. 자신의 작품이 타국인들에게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걸 의식해본 적 있나? 혹은 반대로 자신이 타문화의 영향력을 얻었다고 할만한 경험은 없나?
실제로 내가 다른 관객들에게 큰 영향을 줬는지 스스로 잘 느끼긴 어렵다. 나는 문화혁명을 겪은 세대였고, 문화혁명으로 당시에 노동자가 됐다. 사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나를 영화 대가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문화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건 우리가 가진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더더욱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고. 물론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서양의 문화를 그대로 따라가고 싶지 않다. 우리 문화 속에서도 불합리한 부분들이 있는 것처럼 서양문화 속에서도 불합리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싶진 않다.
<매란방>은 예술가에 대한 일대기를 담은 영화다. 예술가라 할 수 있는 당신이 그 이야기를 선택한 것에 대한 계기가 있을 텐데.
<매란방>은 예술가가 자기 인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얻게 되는 어려움과 공포를 극복해나가는 영화다. 자신을 버리고 관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배우다. 유일하게 서방국가에서 경극을 보여줬던 배우이기도 했다. 일본 침략기엔 자신을 버리고 다시 배우로서 살아가고자 결심하기도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종이 족쇄를 차는 백부의 모습은 그 시대의 예술인들의 현실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다양한 매체와 접하지 못하고 그만큼 자유롭지 못했던 형편을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 예술가로서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작품이다.
<매란방>은 크게 세 맥락으로 구성된 영화다. 사실 세 번의 사건 속에서 매란방보단 그 주변부를 차지하는 인물에게서 얻어지는 극적인 감정이 크다. 궁극적인 의도가 궁금하다. 그리고 혹시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구상해보진 않았나?
실제로 매란방이란 인물에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생각되는 세 부분을 단락으로 나눠서 각자 세 명의 인물을 거치는 방식으로 묘사했다. 처음에 스승님과의 대결에서 매란방이 비록 승리자가 됐지만 사실 승리 이후에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걸 느낀다. 결국 성공이라는 것조차도 그 뒤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전쟁과 같은 어떤 외부의 압력에 의해 무대에서 자신의 예술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건 어떤 예술가에게라도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결과적으로 매란방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생의 세 단락을 통해 매란방이란 인물을 보여주고자 했다. 만약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을 통해 매란방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까.
<패왕별희>와 <매란방>은 당신이 만든 작품이란 점만으로도 비교되기 좋은 영화다. 벌써부터 그러는 분위기고. <패왕별희>는 15년 전 작품이다. <매란방>은 실재 역사적 인물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패왕별희>와 전혀 다른 작품이다. 일단 연기하는 인물들이 다르지 않나.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이 연기한 데이는 사회를 주도하는 주류라 할 수 있는 중심인물이 아니라 변두리의 인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 속에서 늘 긴장관계를 지니고 살았다. 결국 그 사회가 발전하는 변화 속에서 적응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반해서 매란방은 그에 반해서 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매란방은 물처럼 흘러가는 인물이었다면 데이는 불처럼 꺼져가는 운명이다. 매란방은 부드러운 저항가란 점에서 실제 아시아인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두 인물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화두는 없을까?
인물이 다르긴 하나 두 인물을 통해서 느껴지는 바는 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을 극복하려 하면 할수록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거 같다. 단지 나는 매란방이 이를 더 포용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매란방>을 통해서 포용하는 인간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패왕별희>의 장국영과 <매란방>의 여명을 비교한다면 어떤가?
장국영이라는 배우는 굉장히 민감하고 내적으로 불 같은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 배우였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서 여명은 마치 차분한 검객처럼, 혹은 불교를 공부하는 승려처럼 조용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배우다.
몇 년 전부터 아시아 합작영화들이 활발히 제작됐다. 이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아시아인이 느낄 수 있는 어떤 공통된 소재나 주제를 이용해서 아시아인들끼리 좋은 영화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이젠 이런 합작영화가 더 이상 소수의 사례가 아니라 보편화된 단계로 올라섰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합작영화에 참여해보고 싶기도 하다. 한국도 괜찮고, 일본도 괜찮고, 혹시 어느 회사랑 합작하면 미래가 밝을지 당신이 알려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웃음)
혹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이야기가 있나?
그리고 싶은 이야기는 많다. 다만 어떤 이야기들은 영화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거 같고, 어떤 이야기들은 관객들이 과연 그 이야기를 영화로 보고 싶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는 내가 소년 시절 문화혁명 당시, 남쪽 지방인 운남 열대야 지방의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겪었던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평범한 삶이긴 했지만 자연환경 속에서 얻었던 역경과 사랑, 이상을 비롯한 청춘 시절의 충동 같은 감정들과 그로 인한 다양한 사연에 대해서 한번 꼭 다루고 싶다. 다만 그게 관객들이 보고 싶어할만한 이야기일지 잘 모르겠다.
<천하무적>이란 타이틀은 우리가 아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세상에 적(敵)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둑(賊)이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두서없이 출발하는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단명하다. 소매치기 왕보(유덕화)는 그의 연인이자 동료인 왕려(유약영)와 떠돌아다니며 도적질로 삶을 연명한다. 그런 어느 날 왕려는 개과천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왕보와 깊은 갈등 국면에 들어선다. 그러다 우연히 사근(왕보강)을 만난 왕려는 그의 순수한 천성에 감화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왕보와 호려(유게)의 일당으로부터 사근의 돈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한다.
<야연><집결호>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 펑 샤오강 감독의 2004년도 작품인 <천하무적>은 사실 기교적으로 뛰어난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소매치기 씬이나 소매치기들 간의 결투 장면은 지나친 눈속임으로 일관하다 못해 때때로 한심할 정도다. 잔상이 심한 슬로모션을 통해 동작을 파악하기 힘든 영상으로 무마하는 소매치기 장면에서 디테일한 손놀림 따위를 기대했을 관객의 심리를 뻔뻔하게 반감시키고 만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소재를 활용하고 묘사하는 방식으로부터 어떤 기대를 지녔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좋다.
다만 일면 타당한 구석도 있다. 사건의 전개보다는 개과천선을 바라는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가 그렇다. 사건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의문을 야기시키는 그 변화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위한 배려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그 변화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시점부터 영화의 감정은 어느 정도 허무맹랑한 구석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천하무적>의 성찰을 높이 평가할만한 자신은 없다. 변화의 양상이 타당할 뿐, 그것이 깊은 감동을 부를만한 수준은 아닌 덕분이다.
동시에 소매치기라는 소재를 통해 발생하는 기교적 기대감은 철저하게 망연자실해진다. 내용물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기능에 충실한 그릇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천하무적>의 문제는 그 어느 쪽도 확실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점이겠지만. 때때로 허세로 가득 찬 화면과 음악을 접하고 있노라면 이것이 고의적으로 웃음을 야기시키는 의도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실소를 부르는 풍경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유덕화조차도 위안이 되지 못하고 동정을 부르는 느낌이다. ‘천하무의(意)’와 ‘천하무실(實)’의 연속이다. 의미도, 실속도, <천하무적>에선 얻을 수 없다.
이번이 첫 방한이 아니다. 뭔가 특별한 일정이라도 보냈나.
여명(이하, '여'): 와서 보니까 홍보사에서 영화 홍보를 위해 스케줄을 많이 잡아놓은 덕분에 일단 일하느라 시간이 없다. 같이 온 스텝들은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남대문도 다녀 왔다는데. (웃음) 홍콩에서 한국이 TV에 나오는 걸 보고 놀러 가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막상 맨날 오게 되면 일만 하고 간다. 가끔 그냥 편하게 거리를 걸어 다녀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쯔이(이하, '장'): 어제 간 극장은 새로 만든 극장인지 좋더라. 한국의 영화 산업이 빨리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더라. 여: 처음 한국에 온 게 12년쯤 된 거 같은데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친숙하다. 그 시간 동안 여러 번 와서 그럴까. 물론 잠깐씩 머물 수 밖에 없었지만 몇 주마다 한번씩 오가던 곳처럼 그 시간차가 너무 짧게 느껴진다.
<매란방>은 경극을 소재로 한 영화다. 현재 중국에서 경극에 대한 인지도가 어느 정도인가? 여: 일단 내가 사는 홍콩에도 경극의 일종인 ‘오극’이라는 홍콩식 지방 경극이 있다. 그러나 홍콩은 워낙 작은 도시고, 시장도 작기 때문에 점점 ‘오극’은 많이 없어지는 추세다. 그래서 정부에서 보호차원으로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공연하기도 한다. 그래도 중국은 워낙 도시들이 크니까 계속해서 꾸준히 경극이 공연되는 기회가 많아지는 걸로 안다. 최근엔 ‘매란방 대극장’이라는 게 생겨서 매란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많은 경극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들이 마련되고 있다.
본인은 경극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 수준이었나? 여: 나도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 대부분은 경극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인지는 없다. 매란방만 해도 우리 역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고, 그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 학교 교과서를 통해 소개되는 이야기 정도만 알게 됐을 뿐, 깊은 지식은 없었다.
그만큼 요즘 젊은 세대들에겐 생소한 영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여: <매란방>을 본 젊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당시 매란방이 살았던 연예계가 지금과 얼마나 다른지를 이해하면서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동시에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사는 비슷하다는 걸 느낀다. 단지 핸드폰이 없어서 전보를 쳐서 연락하는 것처럼 기술적인 환경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가 하는 일, 사랑과 같이 겪어내야 할 감정, 이런 인간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어떻게든 극복하는 걸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시대적 차이만 있을 뿐,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걸 느낀다면 <매란방>이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맹소동의 헤어스타일이 그 당시 유행이었는데 지금도 유행되곤 하지 않나. 그조차도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시간이 흘러도 어디에 있어도 사람 사는 건 마찬가지다. 어제 기자회견에서 사진기자들의 플래쉬가 영화를 다시 플래쉬백하는 느낌이었다. (웃음) 영화로 치자면 미래가 되는 지금 내 앞의 기자들의 플래쉬가 그때보다 빨리 터진다는 것만 다르지. (웃음) 살아가며 느끼는 감성은 시대와 무관하게 비슷하다고 느낀다.
연기에 임하기 전에 준비과정이 있었을 것 같다. 장: 경극을 훈련하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경험이 전무한 예술을 배운다는 것도, 실제 인물을 모방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2달 정도의 훈련 기간을 거치면서 그 인물 자체가 되려고 노력했고 그 덕분에 촬영 당시엔 그냥 그 인물이 됐다. 돌아보면 즐거운 작업이었다. 여: 우리 같은 후배에겐 먼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부터 공부했다. 한 세기 이전의 성취감을 따라잡는다는 건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 당시 주변 환경과 모습이 어땠는가에 대한 세심한 연구와 토론을 거쳤다. 그에 근접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장쯔이 씨는 남장 배우 ‘맹소동’을 연기했다. 소감이 궁금하다. 장: 일단 첸카이거 감독님과 영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좋았고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었다. 항상 내가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난다는 건 흥분되는 일이다. 물론 경극을 배우는 과정은 사실 상당히 힘들었다. 몸의 자세부터 작은 손동작이라던가, 입 모양까지 다 배워야 하는 탓에 힘들었지만 그런 과정들이 내 자신에겐 큰 도전이었고 그래서 즐거웠다. 맹소동의 분량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때때로 맹소동을 좋아해주거나 그로부터 신선한 생동감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걸 보면서 좋은 경험을 마쳤다고 생각했다. 매란방과 가슴 아픈 사랑을 나누지만 영화에서 햇빛처럼 밝은 부분을 차지하는 역할이라고 본다.
반대로 여명 씨는 여장 배우를 연기하는데 그만큼 여성적인 제스처를 익히기 위한 노력이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혹시 그로 인한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나?
여: 사실 영화로 보여진 연기가 생활의 일부가 된 것처럼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무대 위에서는 여자 같지만 무대 밖에서는 남성적이지 않나. 촬영 중에 특별히 신경 쓴 바는 없었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감독님이 잘 연출해준 덕분이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정신적으로 전력을 다해서 임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에피소드처럼 전하면 그 모든 과정 자체가 단순하게 이야기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것 같아서 그에 대한 말은 삼가겠다. 그냥 배역 그 자체로 생활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추억을 훼손하지 않고자 배려하는 거니 이해해달라.
<패왕별희>의 장국영과 비교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여: 비교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다. 장국영은 존경하는 배우다. 외부에서 비교하는 걸 좋아한다 해도 내가 그 비교에 참여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상관없다.
서로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나? 여: 장쯔이 씨는 내면이 꽉 찬 배우다. 관객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연기를 한다. 사실 데뷔 이후로 10년 동안에 출연작이 10여 편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만큼 배우로서 하나하나 신중하게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더 많은 도전을 할 수 있고 더 좋은 작품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신인 때 찍었던 무협영화 한편(<와호장룡>)이 크게 흥행한 만큼 그 이미지에 지배당할 수도 있었을 텐데 스스로가 그 동안 새로운 장르와 작품을 선택해왔다. 최근엔 본인이 직접 제작한 현대물도 찍었다는데 이런 움직임을 보면 많은 관객들이나 나 같은 배우의 입장에선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만큼 장쯔이라는 배우를 보는 관객들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장: 여명 씨는 매란방처럼 젠틀하고 우아한 면이 있는 반면에 가끔씩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연예계 톱스타로 살아왔으면서 그런 모습을 간직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참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워낙 친한 관계이고 평상시에 배우라는 의식을 안하고 산다는 공통점이 있다. 덕분에 현장에서 연기를 하려고 의식한다기 보단 최대한 편안하게 촬영에 임했다. 영화에서 매란방과 맹소동이 즐겁게 웃는 장면을 보면서 평상시 서로를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우정이 있기 때문에 함께 교감하는 모습들이 연기를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여명 씨의 말대로 장쯔이 씨는 <와호장룡> 이후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장: 지금까지의 작품을 보면 분명 그 때보단 범위가 넓어진 거 같다. 최근에 소지섭 씨와 찍은 <소피의 복수>에서 내가 연기한 인물의 나이는 스물 대여섯 정도인데 실제로 내 모습은 열 일곱, 여덟 정도로밖에 안 보이더라.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미안한데, (웃음) 다들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고 비단 내 생각만은 아니다. (웃음) 덕분에 배우로서 나이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 내 실제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경험을 얻었다. 반대로 나이가 많은 역할을 해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배우로서 연령을 맞춰서 연기하는 범위도 훨씬 넓어진 것 같다.
장쯔이 씨는 예전에 <야연>으로 내한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 멜로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에 소지섭 씨와 함께 <소피의 복수>로 호흡을 맞췄다. 장: 아, 그건 한국영화가 아니니까 아직 이뤄진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웃음)
함께 호흡을 맞추는 건 어땠나? 장: 일단 소지섭 씨는 중국어 대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거다. (웃음) 영화에서 상반신 육체가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덕분에 아름다운 근육을 봤다. 아쉽게도 여명 씨는 근육을 보여줄 기회가 없더라. (웃음)
혹시 여명 씨는 함께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할 만큼 인상적인 한국 여배우가 있나? 여: 항상 이런 질문 받을 때마다 화제를 바꿔보고 싶다. (웃음) 어떤 남자배우가 어떤 여자배우와 일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단지 하루 동안의 뉴스 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영화사가 아시아의 모든 배우들을 캐스팅할 역량이 되고 그 영화에 투자할 수 있는 생각이 있으며 최소한 10편까지 찍을 수 있는 시리즈를 기획할 수 있다면 일년에 오직 그 영화 한 편만 나와도 될 것 같다. (웃음)
매란방을 연기하면서 직접 화장을 하기도 했는데 배우로서 화장하는 게 어색한 일은 아니었을 거 같다. 여: 연기할 때도 화장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다만 <매란방>에선 화장도 준비의 일종으로서 하나의 예술 안에 포함되는 행위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단순히 일상적인 화장과 비교할 순 없는 거 같다.
<매란방>에서 원화는 백부로부터 무대를 떠나라는 유언을 얻는다. 하지만 결국 배우의 길을 걷는다. 본인들도 배우로 살아가면서 얻는 자부심도 있지만 그만큼의 난관도 느낄 것 같다. 배우로서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장: 일단 배우로서 살아가면서 얻는 장점이 단점보단 많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그만큼 사회가 주는 책임감을 받아들이면서 생활을 한다. 다만 사생활에서 많은 제약이 있고, 가끔 미디어에서 기사를 팔기 위해서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한다. 그럴 땐 힘들지만 그런 작은 문제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이 일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배우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가거나 연기를 하면서 그걸 표현해내는 과정은 굉장히 행복한 일이다.
“자신의 연기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는 매란방의 대사가 배우로서 의미심장하지 않던가? 그리고 연예인으로서 ‘종이족쇄’를 차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때가 있나?
여: 예술가는 누군가가 사랑을 얻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점유하게 되면 그것도 결국 불행이 될 수 있다. 맹소동이 매란방을 떠나가는 것도 정답인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감히 매란방의 선택을 대신할 순 없다. 다만 나 역시도 사랑보다 일을 선택하게 될 것 같다. 나 역시도 연예인으로서 감내해야 할 운명적인 아픔이 있다. 장: 많은 사람들은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가지만 누구나 자신의 일 가운데서 결정해야 할 문제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나 역시도 어떤 실제적 경험이 영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때때로 영화 속 감정이 현실의 감정과 충돌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여: 요즘 장쯔이 씨한테 ‘종이 족쇄’가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풀린 거 같다. (웃음) 나도 예전에 우리 집 커튼 사이로 사생활을 찍어가는 이들을 대면하곤 했다. 가끔 파파라치들 떄문에 속도 위반을 하면서도 피해야 할 때도 있고. 이런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감내해야 하는 측면이 없진 않다.
만약 자식이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겠나? 장: 만약에 내가 낳은 자식이 배우가 되느냐, 안 되느냐, 라는 문제는 그 아이가 선택할 일이다. 만약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엄마로서 배우를 하며 겪게 됐던 좋지 못했던 경험까지 다 가르쳐주고 싶다. 여: 난 스무 살 때부터 서른 다섯 살까진 자식이 생기면 죽어도 배우는 못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우리 집안엔 다시 나 같은 배우가 나올 수 없을 테니까. (웃음) 만약 자식이 생긴다면 아들보단 딸을 갖고 싶다.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로서 너무 많은 기대를 할 거 같다. 그런데 그 아들이 내가 기대하는 바에 미치지 못하면 기분이 좋지 않겠지. 하지만 딸이라면 내가 충족시켜야 할 기대가 많지 않을까. 딸은 내게 있어서 성공적인 걸 보여주지 못해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다. 혹시나 아들이 연예계 계통에 있다면 절대 얼굴이 알려지는 일은 못하게 할 거라 결심했다. 예를 들어 프로듀서라던가, 그러니까 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게끔 할 거다. 물론 이건 다 내 생각에 불과하고, 정말 그런 상황이 왔을 땐 운명에 따르게 될 거다. 다만 나는 훌륭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지금부터 엄격한 가치관을 갖고 있을 뿐이다. (웃음)
최근 홍콩영화가 많이 침체됐다. 여: 예전엔 분명 홍콩영화가 좋았던 시절이 있었고, 잘되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 만약 냉기라면 분명히 다음엔 더 좋아지는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주식도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가 있는 것처럼 모든 일엔 기복이 있다. 관객들은 항상 새롭고 자극적인 뉴스를 원한다. 영화도 그런 면에서 관객들을 자극시킬 수 있고 새롭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성장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중국영화는 검열이 심해서 표현의 제약이 많은 게 사실이다. 장: 듣기로는 한국도 옛날엔 영화를 찍거나 상영하는 데 있어서 많은 제약이 있었다고 들었다. 심의도 거쳐야 되고, 절대 보여질 수 없는 부분도 있고. 그런데 이젠 등급제도 정착되고 관객들이 많은 영화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들었다. 중국 영화는 아직 심의 제한이 있어서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예전에 심의가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에서 <올드보이>의 혀가 잘리는 모습과 같이 폭력적인 묘사를 담은 영화가 상영될 수 있었을까? 지금이기 때문에 그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영화는 인간의 심정을 눈으로 보는 표현의 문화다. 중국도 점점 올라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소재를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면 더 많은 관객들이 중국영화를 선택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대작들이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여: 시간에 따라서 모든 변화가 이뤄진다. 할리우드는 뭔가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면 <트랜스포머>같이. 하지만 아시아인들은 뭔가를 생각해도 실질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창의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너무 비슷한 소재만 나올 수 밖에 없는 것도 그런 환경의 제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란 새로운 것을 창작해나가는 일인만큼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인재를 통해 공간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난 배우로서 연기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순 없겠지만 영화를 만드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노력에 동참하고 싶다.
<매란방>에서도 보이듯 자본과 예술은 어느 정도 필연성이 있다. 여: 좋은 예술이 나오려면 돈 많고 용감한 사람이 투자해야 한다. (웃음) 게다가 지금처럼 영화계 시장이 좋지 않을 땐 투자자들이 잘 선택해서 투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내가 한 발자국 나가야 할지, 물러서야 할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마 다른 전세계 영화시장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영화를 더 잘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관객들은 어차피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그 숙제는 우리가 풀어가야 한다. 전세계 어디에나 예술가는 존재하고 그들은 자신의 길에서 노력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공헌하고 있다. 그리고 난 <매란방>을 통해 어떤 어려움이 있고 힘들다 해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겨나가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엽문>은 이소룡의 스승이자 영춘권의 계승자라는 엽문(견자단)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무인 곽원갑>이나 <정무문> 혹은 <황비홍>시리즈의 기시감이 드는 건 무리는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 망국인의 정신적 지주가 된 쿵푸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다는 점에서도, 동시에 무예에 조예가 있는 배우의 리얼 액션이 바탕이 된 무술 영화라는 점에서도 전자들과 공통 분모는 뚜렷하다. <엽문>은 일제치하의 역사가 잉태한 시대적 반일 정서를 통해 감정을 고양시킨다. 이는 국내 관객의 동감을 얻을 여지가 있다. 다만 그 민족적 자존심을 시대적 함성으로 승화시킨 광경 속에서 중국 민족주의에 대한 반발심이 우러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혹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물에 익숙한 세대라면 그것들을 보고 난 후와 비슷한 감상을 얻을지 모를 일이다. 다만 그 모든 감정적 판단과 무관하게 <엽문>이 중국 무술영화의 양자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작품임을 부정할 수 없다. 견자단은 자애롭고 여유로운 강자의 풍모를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유연하면서도 폭발력 있는 견자단의 몸놀림만으로도 <엽문>은 특별하다 말할 수 있는 영화다. 우직한 야심을 과감히 뿌리고 거둔다. 과거 중국영화의 향수를 느끼는 세대에겐 반가움을, CG와 와이어액션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는 묵직한 압권을 전하고도 남는다.
지난 27일 시청을 점거한 중국인 폭도들이 성화봉송의 출발지인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한국인을 집단 폭행했다고 한다. 폭행당한 그는 '티벳 평화연대'에서 나눠준 홍보용지를 들고 있다는 이유로 오성홍기를 든 중국인들에게 바닥에 내팽개쳐진채 발길질을 당했다고 한다. 필자도 한국인을 구타하는 사진을 보고 엄청난 분노를 머금었다. 이는 사람이기에 엄연히 당연한 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팩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들 잡아 족치자, 가 아닌 것이다. 감정에 감정으로 대응하자면 끝없는 반복의 악순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성을 찾아 대응해야 한다. 일단 색출이 가능한 중국인들에게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중국에 유감을 표명한 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단의 최선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최선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제관계의 역학에서 취해야 할 존비적 정책에 불과하며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제스쳐에 불과하다. 그것이 지난 일요일 시청에서 길길이 날뛴 오만한 중국인 유학생들에 대한 메시지로 작용될 가능성은 없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건 물리적 대응책이다. 경고적인 대응을 끝냈으면 그 다음으로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 분명 그들이 저지른 형사사건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 단지 중국 정부에 대고 유감을 표명하는 건 그저 국가적 의무의 수순일 뿐이다. 발본색원해서 시위에서 과격한 행위를 한 자들을 잡아서 그에 마땅한 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그건 그들이 우리나라 국민을 때리고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신경질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들이 범법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이 앞서는 문제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단지 인터넷에 올라온 얼굴을 보고 비방의 댓글 다는 수순으로 끝나거나 혹은 그들을 마주친 누군가가 멱살잡이를 해서 끌고 가는 것으로 해결되서는 안될 문제다.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은 공권력을 동원해서 그 무질서한 현장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는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의 존엄성을 세우는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사안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단지 이성을 잃은 무지한 분노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성적인 가능성이자 그들과 다른 우리의 차별성이기 때문이다. 시위라는 민주적 방식에 대항한 그들의 무자비한 폭력을 준법으로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폭도들의 몰지각을 일깨울 우리의 이성적 포용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추후에 이 땅에서 비슷한 일련의 사례를 방지할 수 있는 적절한 대응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용을 넘어선 그들의 행위가 어디서든 통할 수 있다는 무례함을 다스릴 수 있는 최선책이기도 하다.
P.S1>참고로 사진상에 등장한 전경들의 정지된 컷은 그들의 안일한 대응이라기 보단 10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에 벌어진 상황을 촬영한 카메라에 담겨지지 못한 그들의 대응이 생략된 팩트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손가락질 해야 하는 상대는 그들이 아니다. 또한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았을, 성화 봉송에 8000여명의 인원 배치를 지시했음에도 정작 중국의 인해전술을 방관하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지시 책임자의 윗선에게도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P.S2>어떠한 이유에서라도 티벳의 독립은 응원되어야 한다. 엄연한 주권국가에서도 저리 날뛰는 중국인, 그것도 유학생들의 태도가 저리할 정도면 현재 티벳의 상황은 무시무시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에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우리는 그 용기에 무의식적으로나마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목격한 무례한 그들의 태도에 맞서는 또다른 정당성이기 때문이다.
이건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엄연히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무시무시한 광경이다. 오성홍기를 휘날리는 중국인들이 위풍당당하게 한국에 체류하는 티벳인을 폭행하는 장면이다.이들은 그와 함께 미국, 캐나다인 6명을 오성홍기를 앞세워 구타했다. 27일 시청 앞 광장에서, 백주대낮에, 우리는 단지 티벳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깡패짓을 일삼는 중국인 무리들에게 아무런 저항없이 구타당하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봐야했다.
개같은 짱개들, 이라고 분노를 피워올리기 전에 당신은 한가지 생각을 먼저 품어야한다. 어째서 이들이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마음껏 난장판을 벌일 수 있는 것일까. 같은 시각 중국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이 이뤄지는 도로변에는 8000여명의 경찰 특공대가 파견되어있었다. 그들은 '성화봉송을 저지하는 시위에 강력히 대응하기 위해서' 성화봉송자 1인의 주변을 겹겹히 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울 한복판에서 베이징 올림픽에 보이콧하는 무리들을 응징하는 중국인들의 무법천지를 국가는 방관하고 있었는가. 그건 아니다. 현장에도 경찰은 투입됐다. 약 10여명의 경찰들이 중국을 수호하기 위해 모인 인해전술에 맞서고 있었다. 다만 숫자가 열악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10여 명 남짓의 경찰과, 8000여명의 경찰특공대라는 어마어마한 부등호를 그리게 만든 동시간대의 다른 상황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혐의를 부른다.
중국의 성화봉송을 안전하게 이루기 위해 8천명의 경찰이 배치된 상황의 반대편에서 우리는 중국에 대한 반대를 용인하지 못한다는 폭력의 공포를 온몸으로 대면했다. 국가가 보호한 건 국민이 아니라 성화였다. 공권력은 중국에서 벌어질 베이징 올림픽을 무사히 치르는 것에 총력을 기울였으되, 그 반대편에서 중국인들의 알력적 폭력에 마치 의도적인양 무관심했다.
국가의 이해관계는 경제적인 관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성화봉송을 위해 8000여명의 특수경찰을 투입한 건 중국과의 이해관계에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완연한 의지에서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바가 아니다. 다만 경제적 관념을 떠나 이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누려야 마땅할 국가적 존비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과연 이 나라의 실용주의가 누구를 위해 국가의 이해관계를 유력하게 생각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성화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될 공권력은 존재하지만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공권력은 없단 말인가? 동시에 자국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듯한 외국인의 무분별한 난동을 방관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정부가 티벳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하지 못하거나 베이징 올림픽에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백주대낮에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미친 듯이 난립하는 중국인들을 두 눈 멀겋게 뜨고 바라봐야했을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모르겠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은 결국 대한민국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만한 것이다. 물론 그 정체성을 표방하는 건 실권자들이다. 대한민국의 실권자들에게 중요한 건 성화봉송이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보호받고 살 권리가 있는 국민들은 시청 앞 대낮에서 벌어진 공포의 도가니를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아야 할 것이다. 지독한 민족주의를 구호로서, 그리고 폭력적 행위로서 도출하는 중국인들의 몰지각한 행동양식만큼이나 무시무시한 건, 그것을 방관하는 대한민국 실권자들의 몰염치한 사대주의적 근성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실용적이라고 믿는 것이라면 더더욱 침통할 수 밖에 없다. 제 국민의 안위를 버리고 밖으로 나갈 이익에 눈먼 정부의 방침은 결국 집을 돌보지 않고 외도하는 남편에 대한 불신감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믿고 있는 힘이라면 그만큼 어리석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