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을 쓰고, 연출도 하고, 연기도 하고, 편집도
한다. 그리고 불과 26세의 나이로 전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됐다. 자비에 돌란에겐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최소한 높은 꿈을 꾼다면 바로 그 아래에라도 떨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진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의 배우이자 감독인 자비에
돌란은 만 19세의 나이로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를 연출했다. 이 작품은 칸국제영화제의 감독주간에
초청됐고, 신인감독상이라 일컬어지는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다. 이
이례적인 결과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두 번째 연출작 <하트비트>(2010)와 세 번째 연출작 <로렌스 애니웨이>(2010)는 다시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됐고, 지난해에 공개된 <탐엣더팜>(2013)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 <탐엣더팜>은 연인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한 남자가 아슬아슬한 폭로의 기로에 서며 겪게 되는 폭력성과 상실감으로부터 발전된 왜곡된 감정들을 그린 스릴러물이다. 이야기 자체에 대한 집중력이 보다 돋보이는, 보다 성숙해진 작가적인
역량을 드러낸 수작이다. 사실 종종 자비에 돌란에게 ‘스타일
과잉의 아류’라는 오명을 씌우는 비평가들도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그의 작품이 남기는 강렬한 인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낸다. 자비에 돌란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비범한 스타일과 도발적인 메시지는 26세에 불과한 어린 감독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면서도 한편으론 그 나이에 걸맞은 도전적인 시도를 인정하게 만든다. 감각적인 영상과 적재적소에서 어울리는 음악으로 점철되는 <하트비트>와 <로렌스 애니웨이>의
공감각적인 묘미는 자비에 돌란을 스타일리시한 감독이라고 여겨지게 만들만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적인 제목의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가 어머니와의 의외로
순수한 울림을 지닌 성장드라마였던 것처럼 자비에 돌란의 영화들은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 자체로서의 힘을 지니고 있다. 지난 두 편의 전작 <하트비트>와 <로렌스 애니웨이>가
자비에 돌란의 감각을 총천연색으로 부각시킨 작품이었다면 <탐엣더팜>은 자비에 돌란이 지닌 무채색의 심연을 내보이는 작품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선 자비에 돌란의 신작 <마미>(2014)를
경쟁부문에 초청했다. <마미>는 역대 최연소 경쟁부문
출품작이다. 당신이 꼭 자비에 돌란에게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당신도 잘 알듯이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데엔 대부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자비에 돌란도 마찬가지다. 그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어린 나이에 배우로서 활동했다.
퀘벡의 TV쇼 프로덕션 매니저였던 이모는 아역 배우를 찾으면서 우리
어머니에게 내가 연기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치장하고, 노래하고, 춤추길 좋아했던 내가 이 일이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 살에 연기를 시작했고, 그 이후로 광고, 영화, TV 프로그램의 오디션에 참여했다.
그 당시가 기억날까?
세트가 신기했다. 그리고 촬영장 분위기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대여섯 살쯤에 촬영장에서 어른들의 욕이나 성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본능적으로 들어도 되는 것과 들어선 안될 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촬영장을
경험한 건 잊을 수 없도록 엄청난 기억이었다. 열 살 땐 열여섯 살 정도가 된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직접 연기하는 것도, 연기를 지도하는 것도 모두 능숙해 보인다.
연기를 하면서 동시에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하는 건 매우 어렵다. 나는 그들이 지닌 현재의 능력과 숨겨진 잠재력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지켜본다.
가끔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에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로렌스 애니웨이>를 찍을 땐 배우들의 작은 제스처를 확인했다. 직접적인 대사 대신 노래나 사소한 행위와 같은 디테일로도 장면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를 직접 편집하기
시작하면서 촬영 중에도 미리 결과를 그려낼 수 있게 됐다.
당신의 영화에서 주로 언급되는 건 스타일이다.
일단 캐릭터, 대사, 감정의
연결이 정말 중요하다. 이것들을 무시하면, 영화의 완성도가
흔들린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이야기다. 스타일은 액세서리에
가깝다. 내가 미장센만 신경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나는 스토리 위주의 영화를 생각하면서
미장센을 같이 떠올린다. 그래서 내 영화에 대해서 스타일에만 치중한 분석을 보면 불쾌하다. 스타일리시한 시퀀스는 영화의 15% 정도인데 사람들은 그것만 기억하는
것 같다. 관객들은 때때로 더 중요한 것을 놓친다.
어디서 주로 영감을 얻는 거라 생각하는지?
영화를 진지하게 본 건 16살 때부터였고, 18살에 처음 연출을 했다. 그 이후로 영화나 책은 볼 수 있는
만큼 많이 보고 있다. 특히 사진이나 그림에 대한 책이나 잡지를 보는 게 좋다. 뉴욕에 가면 항상 서점에 가는데 거의 파산할 정도로 책과 사진집, 화집을
산다. 이런 부분들이 내게 영향력을 끼치고 그렇게 형성된 분위기가 영화에 참고가 되는 것 같다. 때때로 영화는 잠재된 본능을 실현해주는 도구처럼 느껴진다.
데뷔작도 그렇고 당신의 영화는 부모님에
대해서 자주 말하곤 한다.
대중들은 때론 상어 떼와 같아서 영화를 던져주면 관대한 피드백을 주기도 하지만 너덜너덜해지도록 물어뜯기도 한다. 결국 내가 무엇에 가치를 둘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와 내 영화에
관해서도 말이다. 이 과정에서 나만의 관점이 생겨난다. 나는
세상을 위해 영화를 만들지만 근본적으론 부모님께서 내 영화를 사랑해주실 때 정말 행복하다. 그럴 때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어린 나이가 주목을 끄는 면도 있다.
45세가 된다고 해서 영화를 만드는 재능이 생기는 건 아니다. 사람이 나아갈 방향을 나이가 결정해주진 못한다. 나는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주변엔 35세, 45세, 55세, 60세가
된 친구들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미 네 살 때 오럴 섹스를 알기도 했다. 아니, 여섯 살
때였던가(웃음)?
퀴어 영화의 영역에서 분석되기도 하는데.
<로렌스 애니웨이>로
퀴어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사실 나는 그 상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퀴어를 강조할수록 특정 집단의
영화라고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상”이나 “유대인상”은 없는데, 퀴어
상이 있다는 건 아주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나는 내 영화가 동성애를 그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예술가로서 내가 할 일은 세상에 당연한 것이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당신의 영화가 무엇으로 남길 바라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쓰고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래서 팔짱을 끼고 연간 400편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다. 길을 걷던 나를 멈춰 세우고, “당신의
영화를 보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영화를 만든다. 영화를 보고 웃지도, 울지도 않는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다.
전도연이 처음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97년, <접속>을 통해서였다. 그녀가 <밀양>으로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건 2007년이었다. 정확히 10년 만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라는 빤한 수사의 진짜 주인이 된 게 말이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한발한발 작품을 내디디며 오늘에 다다랐다. 그녀가 또 한번 발을 내딛는다. <카운트다운>으로, 전도연이 돌아왔다.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이전에도 전도연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다. 그녀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누비며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나갔다. 백지처럼, 캐릭터의 색을 입었고, 리트머스처럼, 작품에 스며들었다. 그녀가 시작부터 자각이 뚜렷한 배우는 아니었다. “그냥 어리다 보니까 호기심이 많았을 뿐이죠. 처음부터 의식을 갖고 연기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를 각성시킨 건 <해피엔드>(1999)였다. <해피엔드>는 파격적인 노출신과 베드신을 요구하는 작품이었다. <접속>(1997)과 <약속>(1998)의 연이은 성공과 <내 마음의 풍경>(1999)으로 좋은 연기적 평가를 얻었던 여배우가 선뜻 집어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런 결정을 하려면 제 자신을 납득시켜야 하잖아요. 남들 시선보단 내가 원하는 것에 더욱 귀를 기울기게 된 시기였죠.” 그녀는 표현의 한계를 부수고, 연기적인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임을 알았다. 결국 선택했고, 해냈다.
“언제부턴가 우등생처럼 빤하게 1등 해서 상 받는 게 당연한 배우로 여겨진 것 같아요.” 전도연에게 <밀양>(2007)은 ‘그런 빤함을 뒤엎어주는 작품’이었다. “너 연기 잘하는데, 그냥 연기를 잘 해.” 이창동 감독의 말은 전도연에게 ‘정곡을 찔리는 기분’을 안겼다. 당시 <너는 내 운명>(2005)으로 비평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전도연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여배우였다. 이창동은 그런 그녀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흠잡을 곳 없는 ‘정석적인 배우’ 전도연에게 그 이상의 연기를 요구했다. 그녀는 촬영 내내 온갖 의심에 시달렸다. 결과적으로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와 온갖 상찬이 뒤따랐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떨떠름한 일이었다. “뭔가 스스로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국 제 자리였어요. 진짜로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나만의 비법을 가진 것처럼 잘난 척도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니까요. 정말 모르겠어요.”
충무로는 여배우에게 척박한 땅이다.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전달받기란 드문 일이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다. 실력으로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다. 전도연은 작품 작업 중에는 다른 시나리오를 보지 않는다. 밀양에서 <멋진 하루>(2008)에 대한 제의를 받은 전도연은 서울에서 시나리오를 보고 작품을 결정하기로 했다. 비로소 모든 촬영이 끝났다. 그녀는 서울로 올라오며 새롭게 쌓여있을 시나리오들을 기대했다. 하지만 매니저가 건넨 시나리오는 단 하나, <멋진 하루>뿐이었다. “만약 시나리오가 별로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제가 좀 더 빨리 차기작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요.” 언론과 대중은 <멋진 하루>의 전도연을 주목했다. 칸에서의 수상 뒤 첫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욕심은 굉장히 많은데, 꿈이 없어요. 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는 무엇이잖아요. 전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욕심이 많아요.” 목 아래까지 단추를 채우고 반듯하게 몸을 세운 듯한 <밀양>과 달리 옷을 살짝 풀어헤치고 느슨하게 누워있어도 좋을 것 같은 <멋진 하루>는 보다 여유로워진 전도연의 관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작품이 끝나면 공허하죠. 무언가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하루 아침에 여운도 없이 끝나버리는 거니까. 돌이켜 보면 이 작품이 정말 마지막인 것처럼 보든 열정을 다 쏟아 부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평소에 열정을 쏟아 넣을만한 게 없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결국 남는 건 작품이죠.” 그랬다.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전도연은 작품을 삼키듯이 쉬지 않고 연기해왔다. 결혼을 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데뷔 이후로 처음 2년여 간의 공백을 경험한 그녀에게 이제 연기란 무엇일까.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마음 써야 할 게 많아지니 연기가 더욱 절실한 것임을 알게 됐죠.” 그녀의 구미를 당기는 시나리오는 여전히 드물었다. 그 가운데, <하녀>(2010)는 일종의 오아시스였다.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김기영의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에서 전도연은 파격의 옷을 가벼운 깃털처럼 걸치듯 연기했다.
허종호 감독의 입봉작 <카운트다운>(2011)에서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구가하는 전도연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시나리오를 검토했고, 출연을 결정했으며, 제 역할에 정진했다. 최근의 출연작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두드러지는 스릴러물에서 전형적인 팜므파탈을 연기한다. 전도연의 변신이라는 수사가 으레 따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변신을 목적으로 작품을 선택해본 적이 없어요. 그저 인물 안에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기에 작품을 선택했고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죠.” 사람들은 그녀에게 묻곤 했다. 지난 번 그 곳은 험준한 봉우리가 아니었냐고, 완만한 능선이 아니었냐고. 하지만 정작 전도연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여기 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저를 내리막길에 내려놓기도 하고, 꼭대기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그건 제 자신과 상관없어요. 저는 항상 평행선을 걸어왔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언제나 일정한 걸음으로 연기적 보폭을 넓혀왔다. 길은 열려 있었고, 그저 걸어왔을 뿐이다. 그렇게 다시, 전도연은 발을 내딛는다. 또 한번 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