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서 (개인적인 처신까지도) 국민적 동의와 수반적 회의를 거쳐야 하거든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등장하는 대사는 일면 의미심장하다. “국민의 손과 발이 되겠다”던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대통령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자 전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대표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권력자다. 그만큼 대통령은 어느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면에 내걸 수 없는 대의적 존재로서 의무를 지닐 때 그만큼의 권력을 함께 보장받는다. 그리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국민적 동의를 통해 절대적 권력을 얻었다는, 그 대통령에 관한 드라마다.
사실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단순히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 대통령을 중심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전례들과 차별화 될만한 작품이다. 또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으로부터 행사되는 업무적 고뇌를 벗어나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아우라에 감춰진 개인적 인간미를 조명한다는 것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궁극적 방점이다. 어쩌면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근래 두 전임대통령의 부고를 겪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특별한 감상을 부를 만한 시의성을 두른 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대통령의 임기 교체 과정을 이어나가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세 대통령을 둘러싼 세 가지 사건을 형식적 단절을 생략한 상태로 접붙인 옴니버스적 장편이다.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로또 1등에 당첨된 김정호(이순재), 젊고 잘 생긴 최연소 대통령 자리에 올라 국책을 수행하던 중, 한 청년의 개인적 바람 앞에서 갈등하게 되는 차지욱(장동건), 그리고 건국이래 최초로 여성대통령이 됐지만 남편 최창면(임하룡)의 돌발적 행동으로 곤혹을 치르게 되는 한경자(고두심)까지, 세 번의 정권교체 속에서 세 대통령이 겪게 되는 큰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나열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그 주요한 사건을 통해 대통령이라는 틀에 감춰진 인간을 발췌하려 한다.
사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으로서의 공무적 현실성을 추적하는 작업이 아닌, 대외적 바람이 투영된 이상적 이미지즘에 가깝다. 공무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통령의 사소한 에피소드는 직책에 가려진 개인을 환기시킨다. 대통령이라는 공적 범위와 충돌을 일으키는 개인적 범위의 사연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대한 뿌리깊은 관성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도발과도 같다. 독재의 역사와 더불어 제왕적 이미지를 뿌리깊게 내린 기존의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현실적 권위를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한 허구적 작업과도 같다. 소박하고 진솔한 대통령들을 연이어 묘사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인간적이란 언어와 괴리감을 이루는 대한민국 대통령들과 차별화된 대리적 만족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고의적 판타지다.
현실에서 사실상 좀처럼, 어쩌면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일종의 희망사항이거나 허구적 대리만족에 가까운 작품이다. 대통령의 비현실적인 미담을 연이어가는 건 현실적 가치관을 역설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에 가깝다.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상을 영화적으로 대리 만족시킨다는 미덕이 발생한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지나치게 강박적인 영화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들뜬 기분을 죽이지 못한 채, 매 사연을 안이하고 평이한 해피엔딩으로 그려내기 위해 작위적인 미소를 짓는 느낌이다. “굴욕의 역사는 있어도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소.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마쇼.”극중 2번째로 등장하는 최연소 대통령 차지욱의 혈기왕성한 발언처럼, 때때로 과도하게 격양된 국가적 자부심을 웅변하거나, 매 에피소드마다 내재된 개별적 클라이맥스에서 과장된 음악을 삽입하며 감정적 고양을 조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은 마치 ‘인간적’이란 용어를 대변하는 이상적 롤모델로서 묘사되기 위해 동원된 이미지로서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이란 친서민적이거나 자기헌신적인, 혹은 일탈적인 일상을 꿈꾸는 대통령을 나열하기 위한 수단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치 소재에 대한 강박에 눌려 창작적 태도를 발전시켜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마냥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한 발 나아가지 못한 인상이 느껴진다는 건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동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재기발랄함과 치기어림이라는 취향적 호불호로서 명확한 팬덤을 두르던 장진의 영화란 점을 염두에 두자면 그 특이성을 거세한듯한 코미디와 평이한 이야기 전개를 연출한다는 건 작가적으로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물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나름대로 대중적 호응을 얻을만한 코미디적 감각을 품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 위무를 가능케 할만한 기능적 역할이 뚜렷한 작품이다. 예술이 현실 안에서 누릴 수 없는 꿈을 대변하는 기능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이상적 태도는 인정할만한 구석이 있다. 장진이라는 개인적 범위의 퇴보적 결과물이란 평을 떠나 <굿모닝 프레지던트>라는 영화가 지닌 대중적 고려는 시대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다만 그 판타지가 현실을 대변한다고 파악한다면 곤란하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대통령에 대한 현실적 이면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공익적인 우화일 뿐이다. 타인을 짓밟고 권위를 누리는 현실의 뻔뻔한 누군가들과 결코 무관한 이상적 대통령들이 사는 그곳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니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어쩌면 볼 수 없는 세 명의 대통령이 등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명백한 판타지다. 장동건과 같은 오로라적 외모를 지닌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가설만으로도 이미 명백한 판타지지만 전임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을 격려하는 그 세상은 이미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닌 거다. 그렇다고 그것을 손가락질할 필요는 없다. 때로 영화란, 혹은 예술은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혹은 보고 싶어하는 것을 묘사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렇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꿈꿀만한 거짓을 현실처럼 위장한 영화다. 특히 올 한 해 두 명의 전임 대통령을 잃은 우리에게 뼈에 사무칠만한 감상을 부를 정도로 ‘인간적’인 대통령을 그리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분명 우리가 보고자 하는, 혹은 봤으면 싶은 이상적인 지도자들을 나열한다. 그 판타지가 때때로 과잉적인 감정을 유발하고 지나치게 전형적인 타입의 이상을 그려나감에도 감히 그것이 잘못 됐다 말하기 힘든 건 그 때문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분명 어느 정도 위안이 될만한 손길로서 기능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다만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장동건의 코믹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이기 이전에 장진이라는 네임밸류를 걸고 나온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일면 아쉬움이 남는다. 전형적인 예상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수순으로 나아가는 소동극의 양상은 장진 영화라고 부르기에 지나치게 평범하다. 물론 현실정치에 던지는 발언이 미묘하게 감지되는 가운데 대중적 공감대를 이룰만한 코미디 연출은 무난한 웃음을 부를만한 것이다. 그러나 재기발랄함이건, 치기어림이건, 취향적인 호불호를 감안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감각적으로 낡은 영화다. 세 대통령의 임기 중 굵직한 세 사건을 각각 나열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마치 인터미션이 없는 연극 세 막을 연달아보는 것과 같은 옴니버스적 장편영화다. 매 에피소드마다 나름의 클라이막스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나름의 특이성을 확보하지만 그 순간마다 과잉된 음악으로 감정적 공감대를 자극하려는 영화의 태도는 오히려 소재로부터 발생하는 기본적 흥미를 반감시킨다. ‘인간적인 대통령’이라 제시되는 세 인물의 성격 또한 지나치게 보편적이다. 주제나 소재의 압박에 작가적 취향을 양보한 인상이다. 때때로 절묘한 소동극을 자아내긴 하지만 해피엔딩을 직조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 경직된 스토리는 대통령 훈화를 듣는 것만큼이나 식상하다. 지나치게 공익적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랄까. 무엇보다도 대중적 평준화를 지향하는 장진 영화는 호불호의 기준을 떠나 분명 심심한 일이다.
제목 그대로 정승필(이범수)의 실종을 통해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정승필 실종사건>에서 실종사건의 경위는 중요한 맥락이 아니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그 실종사건의 인과관계를 유추하기 위한 장르적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초반부에 정승필이 어떻게 실종됐는가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정승필 실종사건>은 그 실종사건으로부터 다단하게 뻗어나가는 예측불가의 상황을 장황하게 늘어뜨려가는 영화다.
<정승필 실종사건>은 두괄식 코미디다. 관객에게 개방된 정보를 모르는 극 속 인물들의 좌충우돌 소동극을 구경하는 코미디다. 어떤 면에서 이는 위험한 형식이다. 이미 궁극적인 정보를 쥐고 있는 관객의 흥미를 유지시키기 위해선 끊임없이 지속적인 흥미를 공급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방식으로서 어필할 수 있는 결과물을 내놓는다면 신선한 코미디로서 성공적인 평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하자면 <정승필 실종사건>은 명백히 실패한 코미디영화다. 장황하게 뻗어나가는 소동극의 양상은 애드립에 가까운 배우들의 개인기에 기대어 웃음을 유발하고자 노력할 뿐, 극적 흥미를 유발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상황의 유치함은 코미디의 자질적 속성이라 자처하더라도 ‘정승필 실종사건’이라는 맥락의 주변부에 산재한 캐릭터들의 역할이 지극히 나태하다. 상황을 벌려나가기만 할 뿐, 그 상황의 연속성이 철저히 무시된다. 마치 시트콤적인 에피소드가 지속적으로 나열되기만 할 뿐이다. 동시에 맥락의 논리 따위를 염두에 둘 필요도 없이 그 상황에서 빚어지는 코미디의 파괴력조차 미약하다. 간단히 말해서 도무지 웃기지도 않다.
결과적으로 정리하자면 <정승필 실종사건>은 웃길 줄 모르는 개그쇼의 향연이다. 권태를 느끼게 만드는 코미디만큼이나 지루한 것도 없다. 그건 마치 무섭지 않은 공포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힘겨운 일이다. 노고가 느껴지는 배우들의 활약이 안쓰러울 정도로 형편없이 진전되는 사연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허탈해지는 기분마저 감지된다. 동시에 그 장황한 사연의 끝에 얄팍하게 얹어진 감동적 시도까지 확인하고 나면 지나간 상영시간에 대한 지독한 자조마저 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정승필보다도 실종된 웃음을 찾아 헤매야 할 것 같다. 엄밀히 말해서 이는 실종이 아니라 상실이나 다름없다.
사람 잡는 식인멧돼지를 쫓는 사람들의 분투. <차우>는 명확히 답이 나오는 영화(처럼 보인)다. 괴수도 나오고, 살육신도 등장하고, 추격도 펼쳐지고, 사투가 벌어진다. 누구라도 예상하기 좋은 형태의 장르적 자질을 품고 있는, 괴수영화에서 재난영화를 포괄할만한 이미지가 선연해지기 쉬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물론 명확한 예감처럼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내달리는 추격전과 액션신은 등장한다. 하지만 8할이 코미디로 채워진, 그것도 평범한 방식의 코미디로 이해되기 쉽지 않을 취향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차우>는 ‘괴수 어드벤처’라는 카피에 이끌려 상영관으로 향한 관객들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덫에 걸렸다는 평을 얻기 좋은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시골로 전향된 김순경(엄태웅)을 비롯해 교수 임용을 위해 멧돼지에 관한 거창한 논문을 기획하는 변수련(정유미), 손녀의 복수를 위해 식인멧돼지 사냥에 나서는 천일만(장항선), 최고의 포수로 가오가 대단한 백만배(윤제문),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신형사(박혁권)까지, <차우>는 각자 캐릭터의 축을 이루는 다섯 인물을 통해 서사의 밑그림을 그린다. 한강괴물을 연상시키기 좋은 거대식인멧돼지와 함께 그 뒤를 쫓는 캐릭터 머릿수까지 <괴물>의 가족과 엇비슷하게 이뤄진 <차우>는 분명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중력에 놓인 작품처럼 보인다. 괴수영화로서 <괴물>과 비교될만한 소재를 취하고 있으며 시골이라는 환경을 무대로 둔 서스펜스와 블랙코미디의 활용에서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킬만한 자질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는 유사한 소재와 환경적 구조를 선점한 두 작품의 후발주자로서 비교 대상의 운명에 놓였을 뿐, 봉준호의 두 작품이 <차우>를 포괄하는 영역으로서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지 그 기시감이 명백할 따름이다.
소박한 표정 너머로 흉악한 인상이 감지되는 시골성의 전복적 기운과 거대 괴물의 출몰과 함께 그려지는 아수라장의 이미지까지, 한국의 토착성을 부조리하게 수식하는 사건들이 열악한 지방성의 감춰진 욕망과 함께 뒤엉켜 구른다.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소굴이자 기형적인 욕망으로 비뚤어진 인간들의 늪처럼 쇠락한 도시인이 모여들고 상승의 욕구로 팽배한 지방인들이 자리한 삼매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의 풍자를 위해 가공된 부조리의 공간이다. 인간의 잔혹한 본성과 포악한 기질을 응축한 다큐적 질감의 오프닝 시퀀스는 <차우>가 본질적으로 휴머니즘과 반대적 목적성에 사로잡혀 있음을 노골적으로 증명한다. <차우>는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낳은 괴물에 대한 이야기이자 되레 그 괴물을 포획하는 인간의 잔혹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안티-휴머니즘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예측불허의 슬랩스틱부터 엉뚱한 경로에서 끼어드는 캐릭터들의 난동극까지, B급 취향에 근접한 마이너 코드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차우>는 식인멧돼지가 등장하는 괴수영화의 기대감을 철저하게 배반하는 영화다. 순수제작비 60억 대의 메이저 상업영화로서는 무모하고도 과감한 유머가 도처에 널려있다. 이는 <차우>를 불순하게 수식하는 동시에 특수하게 치장하는 배반적 장기로서 활용된다. 종종 위태로운 이음새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플롯의 공백과 무뚝뚝하고 성긴 액션신의 연출이 매끄럽지 못한 장르적 자질을 인식하게 만들고, 연출력의 공백을 감지하게 만들지만 예측불허의 지점에서 난입하듯 발생하는 유머가 상황을 불식시킨다. 엉뚱하지만 때때로 기발하며 종종 효과적이다.
괴수영화로서 영화적 기대감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해하자면 <차우>는 분명 배반적인 결과물에 가깝다. 멧돼지와의 추격신과 액션신이 후반부에 집중된 건 CG예산과 관련된 집중력 문제에 있겠지만 ‘리얼 괴수 어드벤처’라는 카피의 기대감을 양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건 분명 불만을 얻을만한 지점이다. 그럼에도 분명 <차우>는 쏠쏠한 묘미가 있는 작품이다. 괴수물로서의 위용과 B급 유희가 맞물리는 조합은 컬트적인 호응에 다다를만한 근사값을 이룬다. 대자본을 활용한 메이저 상업영화로서의 중압감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마이너 코드의 결과물은 무모함과 과감함의 너비를 확보한다. 위태롭지만 흥미롭다. 대중적인 반응이 심히 궁금해질 정도로.
식인멧돼지가 등장하는 괴수영화.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적확하지 않다. 예측불허의 코미디 괴작이랄까. 예상하지 못했던 유머의 코드가 강하다. 유머의 속성도 예측범위 바깥에 있다. <차우>는 괴수영화로서의 장르적 특성을 덧붙인 토착적 코미디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기시감은 선점된 이미지로서의 영향력이 크다. 부조리한 풍경 속에서 발췌되는 유머 코드도 형태적으로 유사할 뿐 성격이 판이하다. (적어도 한국에선) 대작이라 불릴 만한 60억 예산의 괴수영화라는 메이저 상업영화로서의 중압감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마이너 정서의 유머 코드가 과감할 만큼 도처에 널려있다. 엉뚱하지만 기발하며 종종 효과적이다. 다만 취향에 따라 몹쓸 시도나 배반적 결과로 구분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스토리 흐름의 이음새가 눈에 띄게 덜컹거리는 것도 단지 영화적 기운의 특이성을 넘어 연출적 공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도 유효하다. 결과적으로 괴수영화로서의 위용이 기괴한 유머와 맞물리는 조합은 가히 컬트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장르적 기대감을 품은 어떤 관객에겐 배반적인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분명 쏠쏠한 묘미가 있다. 상업영화로서 대중적인 반응이 심히 궁금해진다.
호수 위를 우아하게 유영 중인 백조는 부지런히 발을 젓는다. 겉으로 드러난 우아함은 실상 부단한 노력의 산물에 가깝다. 외모의 화려함에 가려진 내면의 절실함을 알아채기란 어렵다. 화려한 프로페셔널의 외양에 반해 그 자리를 동경하던 대부분의 초짜들은 가시밭길의 첫걸음을 체감하곤 한 바가지의 눈물과 한 대야의 땀을 흘리고서야 그 우아함의 정체를 파악하기 마련이다. 눈물과 땀을 먹고 자란 경험과 관록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진정한 프로로서의 신고식을 통과한다. 미운 오리새끼는 비로소 백조로 탈바꿈하는 노하우를 익히고 첫 번째 비행을 준비한다. <해피 플라이트>를 시작한다.
발랄한 소년, 소녀들의 도전을 담백하고 유쾌하게 담아낸 청춘물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야구치 시노부는 근작인 <해피 플라이트>를 통해 청년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선다. 싱크로나이즈를 위해 물장구치는 소년들과 유쾌한 박자에 몸을 흔드는 소녀들의 긍정적인 도전기는 유년 시절의 추억담처럼 밝고 투명하며 보는 이에게 관대한 감동을 선사한다.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만큼이나 긍정적인 기운이 넘치는 <해피 플라이트>는 두 전작보다 좀 더 전문직드라마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첫 비행이자 마지막 실전심사를 앞둔 가상 비행 테스트에서 바다에 추락해 진땀을 흘리는 부기장 스즈키(다나베 세이치)와 첫 승무원 비행의 설렘을 앞두고 지각과 실수를 반복하다 상사로부터 질책을 얻고 눈물까지 흘리는 에츠코(아야세 하루카)는 마치 미운 오리새끼와 같은 존재다. 성취보다도 실패를 먼저 체험하고 좌절을 경험하기 전에 학습을 먼저 거친다. 폼 나는 이미지 속의 만만치 않은 실체를 체감한다. 그러나 만회를 위한 기회는 다시 한번 찾아온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미운 오리새끼들은 실패를 딛고 다시 한번 우아한 날갯짓을 시도한다.
비행기 내부부터 관제탑, 통제실, 정비장, 활주로까지, 공항 대부분의 공간을 누비는 카메라는 모든 현장을 스케치하고 그 공간에 위치한 캐릭터들을 인상적으로 수집한다. 승무원과 관제사를 비롯해 비행기 한대를 띄우기 위해 자기 업무에 종사하는 공항의 모든 구성원들의 역할을 두루 살피고 개개인의 캐릭터까지 세심하게 돌본다. 공간마다 개별적인 에피소드가 쏟아지고 이를 통해 분야의 전문성을 독립적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그 다양한 에피소드를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조합하는 방식은 <해피 플라이트>의 가장 훌륭한 장기 중 하나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사건의 기승전결이 유연하며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산만하지 않게 제 매력을 보존한다. 그 중간중간 명확하게 끼어드는 코미디와 드라마의 연출력도 탁월하다.
<해피 플라이트>는 낙관과 긍정을 연료로 채우고 이륙하는 유쾌한 코미디다. 디테일한 취재를 바탕으로 완성된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현장감과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자랑하는 다채로운 캐릭터의 매력으로 고도를 유지하고 균형을 잡으며 예정된 좌표를 향해 이야기를 순탄하게 비행시킨다. 물론 <해피 플라이트>는 기승전결의 과정을 지녔음에도 오차범위를 예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해피엔딩으로 착륙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그 해피엔딩이 선보이는 훌륭한 착지는 명확한 감동을 부른다. 우아한 백조의 활공을 꿈꾸는 미운 오리새끼들의 발버둥은 때때로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실패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성공의 한 걸음을 내딛는 용감한 성장담을 지켜본다는 건 분명한 매력을 선사한다. 결국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가 되어 난다. 누구나 알지만 순수한 감동을 전하던 그 동화처럼 <해피 플라이트>도 날아오른다. 실로 즐겁고 아름다운 비행이다.
충남 예산면 운곡리의 조필성(김윤석)은 한적한 시골에서 치안 유지보다도 집안의 경제난 해소가 더 고민스러운 한량 형사다. 만화방을 운영하며 남편의 쥐꼬리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아내(견미리)의 바가지는 득달같고, 두 딸에겐 매일같이 면목이 없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행운이 찾아온다. 소싸움 대회를 주관하던 중, 불현듯 찾아온 예감에 아내의 통장을 훔쳐다 판돈을 걸자 열 배의 배당금이 쏟아진다. 하지만 행운은 곧 불운으로 돌변한다. 친구에게 맡긴 배당금을 찾으러 가던 중, 희대의 탈주범 송기태(정경호)를 만나고, 돈도, 자존심도 모두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리고 추격이 시작된다. 거북이 달린다.
<살인의 추억>은 시골이란 정체된 정서의 공간에 스펙터클한 서스펜스를 채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추격자>는 추격의 대상을 숨기지 않고도 긴박한 추격전을 만들 수 있음을 (한국의 영화적 토양에서) 증명했다. 신분을 감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격자>와 유사한 구도를 보유한 <공공의 적>은 형사로서의 제도적 처벌보다도 개인적인 복수심에 근간에 둔 주먹질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결말을 그린다. 앞서 나열한 세 영화의 공통분모는 무능한 경찰력이다. 과학수사를 운운하거나, 직감을 따라가거나, 혹은 불법을 자행하거나, 범인들은 항상 형사들을 제치고 능수능란하게 빠져나간다. 이는 <거북이 달린다>도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서 ‘거북이’는 형사를 겨냥한 단어가 아니다. 구체적인 언어를 동원해 설명하자면 ‘시골’의 ‘서민’‘가장’형사다.
향토적 풍경을 바탕으로 축조된 수사물이란 점에서 <거북이 달린다>는 <살인의 추억>과 <추격자>를 연상케 하는 장르적 환경과 구조를 지닌다. 동시에 그 추격의 주체와 객체가 형사와 범인이라는 공적 신분을 벗어나 개인과 개인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는 피날레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공공의 적>이 떠오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거북이 달린다>는 앞선 세 영화와 활성화된 에너지의 유형이 다르다. 앞선 세 영화가 고체처럼 단단하게 응축된 서스펜스를 기본적인 영화적 질량으로 삼은 장르물이라면 <거북이 달린다>는 액체처럼 유연하게 출렁이면서 종종 넘쳐흐르는 방식의 코미디에 가깝다. 눈에 띄는 건 스토리보다도 캐릭터이며 전반적인 분위기보다도 순발력 있는 리듬이 관건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날렵한 탈주범과 그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시골의 느슨한 형사 사이엔 좀처럼 메울 수 없는 빈틈이 보인다. 공권력을 농락할 정도로 두뇌가 비상하고 운동신경 또한 발군인 송기태에게 조필성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적수다. 이는 ‘토끼와 거북이’의 토끼처럼 방심하기 좋은 상대인 셈이다. (동화의 관계를 염두에 둔 제목처럼) <거북이 달린다>는 방심하는 토끼를 쫓아 달리는 거북이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다. 그리고 그 거북이는 시골에 사는 서민이자, 가장이며, 아버지다. 형사의 추격전이라기 보단 촌놈의 사투에 가깝다. 촌스럽고 느슨한 루저의 승리를 연출하기 위한 서사를 그린다. 이성적으로 직조된 것이라기 보단 감정적인 결과물에 가깝다. 그만큼 선악의 관계는 배제되고 개인적인 사연이 중시된다. 형사도, 범인도, 제 나름의 사연이 있다. 다만 그 사연의 비중이 다르고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편애가 형성된다.
드라마틱한 감정을 주조하는 코미디로서 좀 더 효율성이 뚜렷한 <거북이 달린다>는 장르적 동선을 밟아나가는 덕분에 장르적 기시감을 부르지만 종종 느슨하게 풀리는 속도감을 활용해 유머를 발생시키고 드라마틱한 감정을 주조하는데 좀 더 효율성이 뚜렷한 작품이다. 장르적 비범함보단 평이한 드라마로서의 야심이 짙다. 추격전의 구도에 곁가지를 치는 가족주의의 감성으로 이뤄진 <거북이 달린다>는 지극히 단순한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지만 종종 명확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함으로써 일관성 있는 리듬감에서 벗어나곤 한다. 하지만 연주력의 공백을 메우는 건 배우라는 악기다. 주연과 조연 가릴 것 없이 <거북이 달린다>의 캐릭터를 이루는 배우들은 제 역할에 충실하다. 특히 김윤석은 마치 악센트와 같은 강세를 찍으며 단조로운 이야기에 특별한 음색을 새긴다. 다만 대비를 이루는 캐릭터의 세기가 좋은 형태를 이루지 못해 종종 사연의 중심이 흐트러지는 인상이 감지되고 그만큼 결말부를 장식하는 쾌감이 약해진다.
그럼에도 <거북이 달린다>는 환경을 잘 응용한 코미디이자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오락영화다. 과하거나 부족한 지점이 눈에 띄지만 마이너스와 플러스의 총합의 균형이 적절하다. 무엇보다도 캐릭터가 얻는 마지막 성취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촌놈을 위해 배려된 작위적 송가라지만 그 소박한 에너지가 온전히 전달되는 기분이다. 그 순박한 자질이 밉지 않다.
밤이 되면 박물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다. 뼈대만 남은 공룡이건, 모형 사람이건, 크기나 재질에 관계없이 살아나거나 작동된다. 신묘한 힘을 지닌 이집트 아크라 석판의 힘 덕분이건 뭐건 간에 그렇다. 따지고 들수록 스스로에게 연민을 품어야 할 정도로 엉터리 같은 법칙이지만 그 세계가 만들어내는 소동극의 이미지는 분명 오락을 발생시킨다. 연대가 다르고, 종이 다르고, 생사가 다름에도 다들 그냥 어울려서 일으키는 소란이 장관이다. 엉터리처럼 구겨 넣은 레시피가 맛깔스런 잡탕으로 거듭난 형국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엉터리 같은 재료들을 긁어 모아 우려낸 국물이었지만 마시기 편하고 입맛에 너그러운 묘미가 있었다. 그야말로 킬링타임용 엔터테인먼트였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온전히 전작의 성공에 편승한 기획이다. 컨셉은 같다. 밤만 되면 오만 잡것들이 살아나는 박물관의 야간 소동극을 재현하는 것. 하지만 그건 딱히 장기적인 유효기간을 지닌 것이 아니다.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란 간단하다. 내려갈 깊이 따윈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드니 너비를 넓힐 것. <박물관이 살아있다 2>를 다른 제목으로 대체한다면 ‘박물관이 넓어졌다’즈음 된다. 넓어진 만큼 채워 넣을 것도 많아졌다. 그만큼 더욱 두서가 없어지고 난장판의 범위는 제어가 되지 않는 지경에 다다랐다. 엉터리 같은 기획상품이 다시 한번 더 많은 엉터리를 끌어 모아서 대박을 노린다.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특성을 아이디어로 승화시킨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어드벤처와 판타지의 장점을 두루 갖춘 효과적인 영화가 됐다. 박물관이라는 실내 공간은 적절하게 상황을 통제할만한 너비의 한계를 지님으로서 미니멀한 장르적 수용을 가능케 한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너비를 넓힌 속편이다. 넓어진 박물관은 플러스같지만 되레 마이너스다. 자신의 부실한 단점을 가리기 좋은 규모를 간과하고 오히려 곳곳에 한계를 명확하게 전시한다. 연대나 지표 따위와 무관하게 소통하는 캐릭터들은 더 이상 귀엽다기 보단 유치하다. 전작의 매력이 어디서 발생했는가를 심각하게 놓치고 있다. 최소한 전작은 그 열악함을 눈감아 줄 정도의 아량을 발생시킬 정도로 적당한 매력을 구사할 만한 아담한 규모 속에서 소동극을 연출했다. 하지만 속편은 자신의 밑천을 깡그리 부수고 새집을 짓더니 자신의 어리석음을 곳곳에 전시한다.
열악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캐릭터의 매력도 전혀 계승하지 못한다. 전작에서 매력을 발생시키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별 쓸모가 없다. 개체 수를 늘린 새로운 캐릭터들 역시 별반 흥미를 끌지 못한다. 래리(벤 스틸러)의 변화를 설명할만한 단서 따위를 기대할 요량도 없지만 그의 성찰을 도모하는 진지함 자체가 지독하게 작위적이라 감동 대신 조소가 발생한다. 그나마 에이미 아담스의 귀여운 매력이 유일한 숨통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전형적인 속편의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소한 볼거리와 위트를 구사하는 킬링타임 무비로서 미덕이 유일한 장기였던 전작의 성과가 계산된 결과가 아닌 우연한 취득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플러스 된 모든 것이 하나 같이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역시 머리가 커졌다고 똑똑해지는 건 아니다.
밤만 되면 박물관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고 난장판을 이룬다. 어드벤처와 판타지의 요소를 두루 갖춘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사실 돌팔이 조제법으로 융해한 난장판을 연출하는 기획상품이었지만 소소한 볼거리와 위트를 구사하는 킬링타임 무비로서 미덕이 있었다. 열악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캐릭터와 어드벤처는 결국 이 작품을 효자상품으로 만들었다. 속편은 그흥행성을 담보로 내놓은 매물이다. 좀 더 규모는 커지고 캐릭터는 다양해졌다. 하지만 사실상 전작의 엉터리 같은 상황을 확장해서 답습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까. <박물관이 살아있다2>는 애초에 계획되지 않았던 속편의 전형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영화다. 지나치게 방대해진 탓에 아담한 규모로 맹점을 가리던 전작의 단점들이 오히려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결과를 맞이한다. 지나치게 진지한 탓에 때론 유치하며 스토리는 더욱 부실해졌다. 개체 수가 늘어난 전시물들은 다채롭기보단 산만하다. 전작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던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간과되고, 새로운 캐릭터들은 매력을 보충하지 못한다. 플러스가 오히려 마이너스의 효과를 부른다. 그나마 매력적인 에이미 아담스가 유일한 위안이 된다.
곧 개봉이다. 기분이 어떤가? 많이 긴장되지. 영화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아도 문제지만 반응이 너무 좋아도 긴장된다. 최대한 담담해지려고 애쓰는데, 일단 지금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얼마 전에 하늘 씨랑도 얘기했지만 차라리 개봉해서 1주차가 빨리 지났으면 차라리 좋겠다. 뚜껑은 열어보지도 않았는데 분위기만 좋으니까 이게 오히려 힘들더라.
시험 뒤, 성적표 받기 직전의 기분이겠다.
차라리 빨리 봤으면 좋겠다.
세 번째 영화인데 앞의 두 영화와는 기분이 좀 다르지 않을까. 나름대로 이만큼 넉넉한 규모의 예산을 가지고 촬영에 임한 영화는 처음이지 않나.
아직 상업영화니, 저예산영화니, 그런 차이를 제대로 느껴본 것 같진 않다. 처음 했던 <방문자>는 말 그대로 연기의 ‘연’자도 몰랐을 때 그냥 무작정 했던 영화고, 두 번째인 <영화는 영화다>는 지섭 씨가 3년 만에 복귀하는 상업영화이긴 했지만 김기덕 감독님이 제작자로 나선 영화이기도 했다. 나도 드라마만 하다가 영화로 옮겨 타는 정식 작품이었기 때문에 일단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연기를 잘해야겠다. 내용 자체도 남자끼리 붙는 영화다 보니까 연기가 뒤지면 안 되겠다 싶더라.
드라마로 인지도를 쌓았던 만큼 영화는 일종의 도전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드라마에선 연기력 논란 같은 게 없었는데 영화에서 그런 게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 캐릭터도 드라마와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였기 때문에 무조건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촬영을 끝내고 나서 분에 넘치는 상도 많이 받았지만 그런 긴장감이 강했기 때문에 개운한 느낌이 없었다고 할까. 카메라 앞에서 떨었던 생각밖에 나지 않고, 상은 다 남들 때문에 받았던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느낌을 좀 덜어버릴 수 있는 뭔가를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그게 <7급 공무원>이 됐다.
아까 카메라 앞에서 긴장됐다고 했는데 작품을 거칠수록 그 역시 많이 경감돼 간다는 걸 느끼지 않나. 혹은 어떤 작품이 한 순간 그런 계기가 됐을 수도 있고.
어느 순간 한 작품 찍고 나니까 확 편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말 그대로 매번 여러 작품을 하게 되면서 경험적으로 조금씩 바뀌는 거 같다. 계속 한 작품 해나갈 때마다 전 작품보다는 나아지는 건 맞다.
<영화는 영화다>에서 수타는 거칠고 남성적인 역할이라서 기존에 맡았던 캐릭터와 대비되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런 이미지를 연출한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쾌감이 있진 않았나? 그런 걸 느끼기엔 시간적으로나 많은 여건들이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준비가 잘된 여유 있는 상태에서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거라면 신인상 받을 때 눈물이라도 흘렸을 텐데, 오히려 반대로 연기를 하는 도중에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맞는 건지도 모르면서 조바심 내고 경직된 느낌이 강했다. 오히려 이제 <7급 공무원>으로 하고 싶은 걸 했다는 기분이 들어서 오히려 지금 시원하다. 이제는 영화 카메라 앞에서 떨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냈기 때문에 지금이 오히려 좀 시원해진 거 같다.
이재준이 손바닥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동작이 재미있더라. 그 외에도 캐릭터의 소심함을 대변하는 작은 동작들이 많았는데 그런 디테일한 설정은 직접 생각해 낸 건가?
맞다. 내가 다 만들었다. 이번 영화에서 대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60%면, 현장 애드립이나 분위기 파악하는 게 거의 3~40% 됐을 정도로 연구를 많이 해갔다.
원래부터 캐릭터의 디테일을 많이 설정하는 편인가?
특유의 손동작을 비롯한 애드립은 드라마에서부터 조금씩 해왔다. 그게 대본을 받아서 연기하는 주연배우의 의무라고 내 나름대로 생각한다. 작가가 쓴 대본을 대사로 받아들여서 읽기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뭔가 조금이라도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나 스스로가 그런 작업을 즐긴다. 나를 거쳐간 대본에 새로운 디테일을 가미하는 걸 개인 자신만의 연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성룡 영화 끝에 나오는 NG장면이나 오우삼 영화에서 매번 나오는 비둘기처럼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을만한.
방금 성룡과 오우삼을 말했는데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가?
액션 영화는 원래 좋아하지만 그보단 기존의 성룡이란 배우를 많이 좋아한다.
타격감이 느껴지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가 보다.
아니, 그런 것과는 좀 다른 차원이다. 정말 어려서부터 성룡영화를 봤지만 단 한번도 재미없다고 느꼈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성룡영화가 나에게 꿈과 희망이나 어떤 메시지를 줬다고 할 순 있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극장에서든 TV로든, 영화를 보는 2시간 동안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영화에 빠져서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드라마도 그렇고. 장르라던가 영화적 특성상 무언가 메시지를 담는 것도 좋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영화는 말 그대로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7급 공무원>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영화라고 말은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7급 공무원>이 말 그대로 편하게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서 찍었고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인 거 같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영화다.
사실 <7급 공무원>이 스토리가 훌륭한 영화는 아니지만 코미디로서의 장점이 그런 단점을 상쇄할만큰 탁월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코미디를 간과한 채 스토리를 지적하고 물고 늘어진다면 영화 대사처럼 ‘장난 한번 치니까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 될 거다. (웃음) 나는 일반관객과 함께 이 영화를 봤는데 관객반응이 상당히 좋다고 느꼈다. 일반시사에서 무대인사도 몇 번 한 걸로 아는데 혹시 상영관 분위기를 훔쳐본 적은 없나? 일단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두 번 정도 봤다. 제일 처음에 했던 기술시사에서 스태프들과 같이 한번 봤는데 이게 웃어야 하는 영화임에도 반응이 너무 없어서 그 당시에 완전히 충격을 먹었었다. 그런데 다음날 신림동에서 이벤트 시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신림동까지 모자를 뒤집어 쓰고 갔었다. 거기서 조금 안심이 되더라. 다시는 죽어도 기술시사엔 안 가야지. (웃음)
왜 그렇게 다들 무덤덤했을까.
다들 아는 내용이기도 하고. 배우가 처음 영화 보면 자기 연기부터 보듯이 조명은 조명보고, 분장은 분장보고, 그렇게 관점포인트가 다르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광경을 처음 봤으니까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당시엔 밤에 잠도 못 잤다. (웃음)
이런 코미디 영화를 봐주는 관객이 웃지 않는다면 배우입장에서는 당연히 긴장되겠다.
배우는 관객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연기를 하는데 그에 대한 반응이 냉담하면 작업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겠지.
드라마부터 영화까지 줄곧 주연을 맡아왔다. 나름대로 입지를 다지는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주연이라면 작품 자체의 얼굴이니만큼 부담되는 부분도 없지 않을 거다. 그런 부담감에서 자유로운 편인가?
나는 엄청 심하다. 드라마 할 당시만 해도 시청률에 엄청 민감했거든. 아까 얘기했던 것과 좀 겹치는 부분이지만 말 그대로 사람들이 봐주라고 연기하는데 안 봐줘서 시청률이 낮으면 그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그렇게 되면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게, ‘내가 연기를 못해서 그러나’, 아니면 ‘내가 스타가 아니라서 인지도나 없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예전에 아침드라마 할 땐, 방송 나간 다음날 아침 6시, 7시부터 ‘TNS’사이트 들락날락 거리면서 시청률을 확인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게다가 난 드라마 같은 경우 매번 운 없게도 30%넘는 드라마들하고 계속 같이 붙었다. <황진이>, <쩐의전쟁>, <뉴하트>, 다 30%넘은 드라마거든. 우리 드라마가 상도 많이 받고 절대 나쁜 작품이 아니었는데 매번 빛을 못 봤다. 특히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는 거의 밤을 새고 고생해서 찍는데 반응이 없으면 미친다. 뭐라고 말로 하기엔 그런 게 너무 힘들지.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크지만 성적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안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많이 안 좋지. 그런 상대적 박탈감으로 유독 힘들었지만 다행히도 <영화는 영화다>를 하면서 짐을 벗을 수 있었던 거 같다. 물론 <영화는 영화다> 하나뿐이라 이런 말이 우습긴 하지만 지금 <7급 공무원>반응이 좋다 보니까 그런 답답한 징크스를 한번 더 시원하게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바람이 큰 게 사실이다.
첫 영화가 신동일 감독의 <방문자>였다. 사실 국내에서 개봉이 불투명한 저예산 영화이기도 했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없었나?
그 당시는 내가 뮤지컬을 끝낸 뒤 아침 드라마 같은 작품에서 조연이나 단역을 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 뒤로 찾아주는 이도 없고, 일이 없더라. 오히려 조금 연기 맛을 보고 좀 더 해보고 싶어질 때부터 일이 끊기니까 그게 너무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방문자>를 시작하게 됐을 당시에 연기에 대해서 고뇌했던 건 아니었다. 몇 개월 동안 일거리도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 때 그저 주인공 오디션이란 말에 혹해서 오디션을 보러 갔었다. 내용 자체도 ‘여호와의 증인’이란 종교적 소재를 다룬다니 이게 재미있다고 느꼈겠나. 사실 처음엔 대본 내용도 잘 모르고 영화에 대해서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 그냥 단지 주인공이란 단어 하나 때문에 연기가 하고 싶었고, 카메라 앞에 서고 싶었지. 처음엔 그런 좋지 않은 의도로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을 하게 되면서 나중엔 좀 변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대본을 열심히 파면서 연기하게 됐고 덕분에 <방문자> 막바지에 있었던 <굳세어라 금순아> 오디션도 통과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나에겐 좋은 작품이었던 셈이다.
배우로서 연기 욕심이 앞선다는 건 부끄러운 일은 아닐 거다. 그런 욕심이 자신에게 있어서 어떤 자양분을 얻는 계기가 됐으니까 결과적으론 양화라고 봐야지. 그런데 최근 몇몇 인터뷰를 보니 배우 이전에 특이한 경력이 있다고 밝혔더라. 우여곡절 끝에 회사에 입사했고, 전공도 그래픽 분야던데, 연기를 생각한 계기는 뭔가?
아버지께서 영화를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되게 많이 봤다. 교인들이 일요일에 교회 나가는 것처럼 나는 당연히 일요일은 극장가는 날인지 알았다. 아버지께서 항상 동네에 있는 동시상영극장에 가셨는데 아들이 하나뿐이다 보니까 항상 데리고 가셨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영화를 접했다. 사춘기 때는 멋있는 장면이나 여배우와의 키스 씬을 보면서 나도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곤 했다. 그런데 영화를 좋아하는 집안 분위기에 노출돼있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없어지지 않더라.
아버지께서 아들이 배우라는 사실을 좋아하시겠다.
많이 좋아하시고 뿌듯해하신다.
배우로서의 진로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게 된 건 언제인가? 군대 있을 때 생각했다. 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 나중에 나이를 먹고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군대에서 인생설계를 하면서 확고하게 정리가 됐다. 서른이 되게 전까지 20대를 내 꿈에 투자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뮤지컬을 통해 데뷔했고, 드라마로 이름을 알렸다. 지금은 영화를 통해 인지도를 넓히는 중이다. 연기를 꿈꾸게 만든 계기가 영화였던 만큼 영화에 애착이 있을 것 같다.
뭐, 그런 건 없다. 그냥 중요한 건 배우, 연기였다. 지금 와서도 느끼는 건 드라마나 영화나 다양한 장르를 겪어보니까 작업환경이나 찍고 나서의 분위기만 다를 뿐이더라. 물론 영화 두 작품 해놓고 영화에 대해서 뭘 안다고 말할 수 있겠나. 단지 그냥 카메라 앞에 설 땐 마찬가지로 처음엔 항상 떨렸던 거 같다.
드라마와 영화는 제작 과정의 차이보다도 결과물의 감상 방식에 따른 차이가 두 매체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만든다. 영화는 아무래도 스크린으로 보는 만큼 브라운관을 통해서 자기 얼굴을 인식하게 되는 드라마와 판이한 감상을 줄 것 같다.
처음엔 짜릿했지. 솔직히 이런 느낌을 알게 된 건 <방문자>때보단 <영화는 영화다>기술시사에서였다. 스크린을 보는 동시에 웅장한 사운드가 들리는데 정말 짜릿했다. TV브라운관을 통해서 내 연기를 볼 때는 다른 집에 있는 사람들이 내 작품을 어떻게 보는지 모른다. 그런데 극장에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웃음소리나 숨소리를 느끼면서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엄청난 매력인 거 같다.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대한 누군가의 반응을 살핀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일이 될 거 같다. 그런데 최근 인터뷰 기사에서 아나운서 양성 학원에 다닌다는 말을 했더라. 목소리에 대한 문제라도 느낀 건가?
드라마 할 때는 전혀 못 느꼈지만 <영화를 영화다>를 하고 나니까 발음이나 목소리 톤에 대한 지적이 조금씩 들렸다. 물론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려 한다. 하지만 내게 시간이 있을 때 그런 부분을 조금만 보완하면 오히려 그런 측면을 내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먼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공부를 하게 됐다.
종종 대사를 할 때 목소리 톤이 급격한 하이톤으로 올라간다고 느껴지긴 하더라.
사람 목소리가 다 똑같을 순 없다. 물론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연기나 발음, 발성은 당연히 중요하지. 그런데 사람의 감정이 올라가다 보면 말 그대로 목소리가 갈라질 수도 있지 않나. 특히 연기를 표현함에 있어서 그런 부분이 자연스러움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모든 발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게 연기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목소리 기본톤이 하이톤이라서 내가 잘못된 건 줄 알고 무조건 고치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신 시청자나 관객들이 그 의사만 제대로 알 수만 있을 만큼 너무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연기할 수 있으면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발음이나 발성이 좋은 ‘FM(Field Manual)’연기자도 많겠지. 나는 내 연기가 ‘AM’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많은 종류의 배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많은 분들께서 지적해주시는 게 있고 그걸 내가 고치거나 다듬을 수 있다면 다음 작품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겠지. 딱 그 정도까지만 생각하려고 한다.
일단 대화를 나눠보니 당신이 상당히 조심스러운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당신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때때로 과감하다. <7급 공무원>의 재준은 소심한 듯 고집이 세고, <영화는 영화다>의 수타는 건방지고 자존심이 세다. 드라마에서는 때때로 뺀질거리는 캐릭터를 보여주기도 했다. 연기를 통해서 가끔씩 자신도 모르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경우를 느낀 적은 없나?
그러니까 ‘나에게 이런 면이?’ 이런 거다. 덕분에 내게도 배우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 같고. 물론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이 쉽게 보이는 대본이 잘 읽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배우는 연기변신이 필요하니까 쉽지 않을 것 같은 생소한 캐릭터에 도전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그만큼 겁도 난다. ‘내가 과연 이걸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막상 하면 하게 된다. 그러면서 내 자신에게 놀라기도 하고, 그런 매력 때문에 이 일을 놓을 수 없게 되는 거 같다. 오히려 같은 것만 계속 하면 물리겠지. 매번 작품을 선택할 때 저번엔 이런 역할을 했으니까 이번엔 다른 느낌을 얻을 만한 캐릭터를 선택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겁도 나지만 그걸 즐길 수 있는 거 같다.
<7급 공무원>은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서 배워야 되는 것도 많았을 거 같다. 펜싱을 하기도 하고, 말을 타기도 하고, 심지어 총 잡는 법이라도 익혀야 할 것 같고.
오히려 나는 다 배우지 않았다. 수지는 베테랑 요원이기 때문에 뭐든 잘해야 되니까 배우는 게 맞는데 재준은 뭐든 의욕만 앞서고 서툴러야 하니까 어설픈 그대로 보여주는 게 재준의 모습이라 생각해서 오히려 일부로 배우거나 연습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그 촬영장에서 타게 될 말이나 오토바이는 일단 연기를 위해서 경험만 해보는 정도로 타기만 해봤지. 그래서 많은 분들이 불안하다고 연습 좀 해야 되지 않냐고 하긴 했다. 그런데 일단 처음에 한번 접해보면 내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느껴지지 않나. 한번 해보니까 현장에서 어설픈 상태로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아서 일부로 배우지 않았다.
말 타는 장면의 어설픔은 연기가 아니었던 건가. (웃음) 나름대로 실제적인 캐릭터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나 보다. 어떤 캐릭터라도 그 인물의 희로애락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로 디테일한 작업을 하는 편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 착한 부분이 1%라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까지 살리려고 노력하고 싶다.
캐릭터의 희로애락은 표현하려 애쓰는 만큼 본인의 희로애락도 잘 챙기는 편인가?
글쎄. 정작 나는 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연기로나마 뭔가를 표현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7급 공무원>의 이재준은 자신의 애인에게조차 신분을 속이며 살아야 한다. 반대로 자신은 연예인으로서 신분을 노출하고 살아야 되는 처지다.
개의치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예능 출연을 하고 싶지 않은 건 일단 연기자로서 자기가 맡은 바만 잘하면 되지, 그런 곳에서 사생활까지 말해가며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을수록 인기가 올라가지만 너무 사소한 거 하나까지도 노출되고, 전혀 뜻하지 않은 구설수까지 생기니까. 어떤 분들은 그런 게 다 관심의 표현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만큼 좋은 점도 있지만 그런 덕분에 힘든 부분도 많다. 내 위치가 조금씩 올라갈수록 자유롭던 활동범위가 예전보다 점점 좁아진다는 걸 느낀다. 그러면서 이젠 밖에 노출되는 것도 최대한 자제해야 되고, 뭔가를 많이 해보거나 즐겨야 할 시기에 집에 혼자 있는 내 자신을 보면서 내가 꿈을 위해서 한 걸음씩 다가서는 건 맞지만 이렇게 사는 게 내 삶이 맞긴 맞는 건지 스스로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연기를 그만 두지 않는 이상 스스로 극복해내야 할 수 밖에 없다.
말 그대로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으니까 조금이나마 더 좋은 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어쩔 수 없는 직업 특성상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하는 만큼 책임져야 할 부분들이 많이 늘었다는 건 감내해야 할 사실이니까 원치 않았다 해도 내가 하는 일을 위해선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이왕 오픈해야 되는 부분이라면 최대한 재미있게 즐겨보려고 노력하는 쪽으로 많이 바뀌는 거 같다.
그 동안 많은 여배우와 호흡을 맞춰왔다. <7급 공무원>에서 호흡을 맞춘 김하늘 씨는 예전에 미니시리즈 <90일, 사랑할 시간>를 함께 하며 이미 한차례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다. 예전에 함께 작품을 했던 상대를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확실히 편하지 않던가? 일단 상대방의 대사톤이 어떤 스타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대본을 읽는 것부터 편하다. 그리고 리액션의 연기라고도 하듯이 상대방이 연기를 잘하면 내 부족한 부분까지 채워지고 내 연기에도 시너지 효과가 난다. 일단 김하늘 씨가 캐스팅됐다고 하길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안심했다. ‘김하늘’하면 이미 연기적으로 인정받은 배우니까. 두 번째는, 연기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하는 거니 처음엔 어색함이 있다. 그만큼 교감을 위해서 친해져야 한다. 그러려면 밥도 먹어야 되고,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잘 안되면 연기할 때, 이 사람이 어떤 톤으로 준비해왔을까 궁금해도 물어보기조차 어렵게 된다. 그런데 하늘 씨와는 워낙 잘 아는 사이다 보니까 그런 과정을 몽땅 다 들어낼 수 있었다. 처음 만나자 마자, “내일 시간 돼? 대사 한번 맞춰보자.” 이런 말이 바로 나오는 거지. 그런 시간들이 축소되면서 조금 더 빨리 연기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신과 김하늘 씨가 영화의 에이스라면 류승룡 씨와 장영남 씨는 조커와 같다. 조연배우들의 뒷받침이 그만큼 효과적이고, 안정적이었다.
류승룡 선배님과는 함께 붙어서 연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전기로 대화하는 장면 같은 경우는 내 분량을 먼저 다 찍은 걸 선배님이 보고 거기에 맞춰서 연기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서로 연기를 맞춰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래서 본인이 준비해온 것들이 있더라도 그것들을 정해진 상황에 맞춰서 어쩔 수 없이 바꿔야 하는 경우도 많았을 텐데, 그럼에도 내 연기에 맞춰서 그 상황을 너무나 맛깔스럽게 살려주셨다. 주인공이 나오지 않는 씬에서 재미있는 톤이 이어진 건 다 선배들 덕분이었던 거 같다.
이재준은 상당히 고집이 센 캐릭터다. 상관에게 노트북 비밀번호도 절대 안 알려준다. (웃음) 그리고 <영화는 영화다>의 수타는 상당히 자존심이 센 캐릭터다. 재준과 수타는 그만큼 자기 욕심이 강한 캐릭터다. 당신도 어떤 욕심을 갖고 사는 사람인가?
욕심이라기 보단 목표를 위해 가는 사람이라고 하고 싶다. 쉽게 얘기해서 지금 내 위치는 주연배우를 맡고 있긴 하지만 톱스타도 아니고, 톱스타와 주연 사이에 있는 애매한 위치라고 생각한다. 연기나 스타성을 모두 지닌, 말 그대로 정상의 톱배우를 목표로 두고 있는 건 맞다. 이왕 연기자로 사는 거 당연히 정상에 서고 싶지. 정상을 판단하는 척도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나는 아직 내가 생각하는 수준에 못 다다랐기 때문에 그만큼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25살에 데뷔했으니 요즘 연기자들에 비해서 빠른 데뷔는 아니다. 어떤 불안함은 없었나? 있었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당시에 이미 계획이 있었는데, 서른 되기 전에 자리를 못 잡으면 연기를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대신 인생을 걸고 한번 해보는 것이니만큼 내 20대를 다 바쳐서 내 꿈을 펼쳐보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까 서른이란 나이는 가까이 오는데 돈 한 푼도 벌지 못하고, 친구들은 다 하나씩 자리잡아가는데 난 앞날에 빛이 없고, 정답을 가르쳐주거나 어떤 얘기도 해주는 사람 없이 모든 걸 다 혼자 해야 된다는 걸 느껴서 정말 힘들었다. 다행히도 스물 아홉에 했던 <굳세어라 금순아>가 잘돼서 연기를 계속 할 수 있게 됐지만 그 당시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를 앞두고 얼마나 많이 불안했겠나. 결과적으로 지금에 와서 잘 됐지만 중간에 정말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다. 막상 서른이 되면 어떻게 할까 고민도 됐고. 20대를 다 바쳐서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계획대로 버리고 가자니 20대가 아깝지 않을까 싶은 거지.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직 연기를 하고 있으니 일단 성공한 셈이다.
일단 그런 셈이지. 하지만 지금부터 또 잘해야 된다. 꿈을 갖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이.
스스로 긍정적인 편인가?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그건 아닌 거 같다.
근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예전에 회사에 입사해서 쓰레기통을 비웠다는 일화가 등장하던데, 그런 걸 보면 조금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면이 있는 거 같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단지 뭔가 해야 될 목적이 정해지면 거기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려고 조금 노력하는 편인 거 같다. 그리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모르면 용감해진다. 회사 들어갈 때도 아무 것도 모르니까 제대로 내밀 학력도 없이 일단 날 써보라고 했던 거고, 심지어 뮤지컬 오디션 볼 때도 그랬다. 말 그대로 모르면 용감하다. 대신 또 하라면 절대 못하지. (웃음)
이제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으니까. (웃음) 사실 요즘은 연기를 전공하는 배우도 많은데 본인은 연기를 전공한 것도 아니었다.
연기학원도 다니긴 다녔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아무리 강의를 듣고 뭘 하는 것보단 현장에서 단역으로라도 대사 한마디 해보는 게 더 낫다는 거다. 이건 내가 나름대로 일궈낸 진리다.
지금까지 당신을 연기자로 키운 건 팔 할이 생활력이었나 보다. (웃음)
그러니까 못하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지. 일일드라마하던 당시에도 잘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던 것처럼, 못하니까 열심히 해야 하는 것 같고, 모르면 용감한 거 같다. 만약에 내가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거나 얼굴이 정말 꽃미남이라면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내 생각엔 내가 뭔가 어정쩡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걸 다 완벽하게 메우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하는 거고, 이런 성격이 장점으로 작용이 되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