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마라톤 출전 선발전에서 1등을 한 조선인 준식(장동건)이 일본의 마라톤 유망주로 촉망 받던 하세가와(오다기리 조)를 제치고 결승 테이프를 끊는다. 하지만 1등으로 호명되는 건 하세가와였다. 분노한 조선인 관중들은 일본인과 뒤엉켜 싸우고 그 결과, 준식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으로 징용된다. 그곳에서 전쟁을 수행하던 준식은 새로운 부대장으로 임명된 하세가와를 마주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마라톤 금메달을 꿈꾸며 경쟁하던 준식과 하세가와의 인연이 전장에서 새로운 악연으로 거듭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독일군 포로들을 검사하던 연합군은 동양인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느꼈다. 독일군 군복을 입은 동양인은 자신을 ‘꼬레아’라고 소개했다. <마이웨이>는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일제 치하 한국인에 관한 사진 한 장이 모티프가 된 소설을 각색한 결과물이다.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프랑스 노르망디까지 오게 된 한국인의 감춰진 사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호기심을 당기고 상상력을 부추긴다. 결국 <마이웨이>는 사진 한 장, 즉 파편과 같은 소재를 뼈대 삼아 그려낸 작품이란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로 전쟁신 촬영의 테크닉을 뽐낸 바 있는 강제규 감독은 <마이웨이>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한다. 빠른 속도로 컷과 컷을 쪼개며 스피디하게 다각도의 이미지 정보량을 소나기처럼 쏟아 넣고 핸드헬드로 현장감을 주입한다. 결과적으로 <마이웨이>의 주인공은 어떤 인물이라기 보단 그 전쟁신 자체의 이미지인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마이웨이>는 강제규 감독의 전쟁신 촬영의 테크닉을 전시하기 위해 마련된 그릇 같다. 일제 치하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꿈꾸며 경쟁하고 반목하던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쟁터에 서게 되고, 핏덩어리가 되어 뒹굴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도 끝내 서로 살아남아 노르망디 해안에서 해후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사실상 네 차례 정도 전시되는 전쟁 시퀀스를 조성하기 위한 연결고리처럼 보인다.
저마다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전쟁신이지만 반복적으로 비슷한 것을 보고 있다는 감상 안에서 그 위력이 무마된다. 그 간극을 차지하는 건 야만적인 시대성 안에서 탈이데올로기적 경험을 차례로 경험하는 두 남자의 여정이다. 조선에서 몽골로, 러시아로, 독일로, 그리고 노르망디 해변으로, <마이웨이>는 영화의 감정적 체온으로 보자면 악연에서 인연으로, 지독한 갈등에서 극적인 화해로 나아가는 멜로적인 로드무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로드무비적인 여정도, 이 모든 사연을 비극적인 멜로로 봉합하는 스토리텔링의 감정도, 전쟁신을 끼워 넣기 위한 액자처럼 보인다. 페이소스를 자극하는 여정이 분명 효과적으로 감정을 툭툭 치는 찰나가 있지만 그 감정적인 총합이 끝내 클라이맥스의 파고로 넘치는 느낌을 얻을 수 없다.
스펙터클의 눈요기가 익숙해질 무렵, 예상 범위 안에서 딱 떨어지는 서사에 대한 흥미도 반감된다. 결국 거대한 스펙터클의 전시를 위해서 페이소스가 소모되는 양상이다. 특히 스펙터클의 풍경 안에 선 중심 캐릭터의 감정선이 지나치게 작위적인 합에서 구르는 탓에 이입하기가 어렵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투어를 하는 기분이랄까. 150여분에 다다르는 러닝타임을 이런 식으로 견디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노릇이다.
해운대 앞바다에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온다. 한낮의 망중한을 즐기던 피서객들의 즐거운 비명이 아비규환의 절규로 뒤바뀐다. 2009년, 대한민국 여름 극장가엔 쓰나미처럼 몰려든 관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해운대>는 국내 최초 재난 블록버스터란 타이틀 아래 천만 관객을 수장시켰다. 그 반대편에선 밑바닥 청춘들의 스키점프 도전기가 한창이었다. 제대로 된 시설 하나 없는 강원도 무주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구슬땀을 흘리는 다섯 청년들은 8백만 관객 앞에서 스키점프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해운대>와 <국가대표>를 보기 위해 상영관을 찾은 관객은 대략 2천만 명에 다다른다. 지난 해 극장을 찾은 국내 관객은 총 1억 5천 6백만 명을 웃돌았다. 불과 두 작품이 지난 해 국내 관객의 10분의 1이상을 책임진 셈이다. 무엇보다도 두 작품의 공통점은 국내VFX기술, 그 중에서도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란 점에서도 이례적이었다.
<해운대>와 <국가대표>의 흥행 이전에도 한국영화에서의 CG활용 사례는 즐비했다. 전장의 참혹한 현장감을 스크린에 재현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스크린에 판타지의 세계관을 입힌 <중천>과 같은 대작들에서 CG는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한 몫을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2007년, 국내영화 사상 유례없는 CG활용도를 보여준 <디 워>는 그 첨예했던 논란과 무관하게 하나의 선례가 됐다. 국내에 상영된 역대 개봉작 가운데 최고의 흥행 스코어를 기록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 역시 CG를 적극 활용한 크리처 무비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처럼 오늘날 영화에서 CG는 스크린 너머에 허구의 이미지를 전시하기 위해 장착되는 특별한 비기로서 유용하다.
CG가 스크린에 무엇이든 불러낼 수 있는 마법의 램프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CG는 VFX(Virtual Effect)의 한 분야이며 영화 안에서 VFX기술의 역할이란 카메라에 포착될 수 없는 비현실적 광경을 인위적으로 연출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덕분에 요즘 제작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속 배우들은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 로봇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아예 블루매트로 둘러싸인 주변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믿으며 감정을 조율해야 한다. 영화의 결과적 이미지가 CG의 손에 달린 것이다. 이런 경향은 대작 블록버스터에서 더더욱 심화되고 있다.
점차 CG의 활용빈도가 높아지는 국내영화계에서도 VFX슈퍼바이저의 능력이 대두되고 있다. “<국가대표>에서 후반 30분을 위해 CG팀과 감독, 촬영팀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폭발적인 연출로 대미를 장식하면서도 관객에게 리얼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속도감을 살리면서도 악천후 상황에서 점프를 감행하는 드라마틱한 정서를 뒷받침하기 위한 CG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국가대표>의 VFX슈퍼바이저를 담당한 EON디지털필름스의 정성진 실장의 말은 CG가 단순히 영화의 기술적 보강을 위한 장치 수준에 지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오늘날 영화에서 CG는 극적 흐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효과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촉매로서 기능한다.
<해운대>는 ILM출신의 VFX슈퍼바이저 한스 울릭을 믿고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백주대낮에 해운대를 덮치는 거대한 쓰나미를 구현해야 할 <해운대>는 한국영화에서 전례 없는 기획이었고 그만큼 도박에 가까웠다. 국내에서 제작비 120억여 원을 들인 대작으로 손꼽히지만 방대한 스케일의 CG컷을 구현할만한 디지털 데이터량을 보장하기엔 터무니없는 예산이었다. 무엇보다도 CG작업 가운데 난이도가 가장 높다는 물을, 그것도 거대한 쓰나미를 만들어야 했다. 경험치가 없는 국내업체를 마냥 믿고 맡기기엔 무리수가 컸다. 심지어 제작사가 접촉한 유수의 해외업체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제작단가로 기대치만큼의 영상적 퀄리티를 보장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퍼펙트 스톰>과 <투모로우>의 물 시뮬레이션 작업에 탁월한 결과물을 보여준 한스 울릭은 그 예산으로도 원하는 퀄리티를 보장하겠다고 장담했다. 결국 한스 울릭은 <해운대>에서 물 소스 작업에 집중된 전반적인 VFX슈퍼바이징을 전담했고, 국내 업체 가운데 모팩 스튜디오가 나머지 VFX샷을 만들고 합성하는 파트너로 선정됐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엔 호흡이 잘 맞았는데 뒤로 갈수록 일정 문제가 생겼다. 우리의 경험 부족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 변동성이 강한 우리 현장의 요구에 대해 한스 쪽에선 원칙적인 논리로만 대응하다 보니 감정적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해운대>를 제작한 JK필름의 길영민 이사의 말이다. 외국 슈퍼바이저의 작업 능력과 무관하게 문화나 환경 차이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이 발견됐다.
실제적인 결과물에서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드러났다. 한스 울릭은 ‘레벨 셋 시뮬레이션(Level-set Simulation)’이라는 고난도 기술을 <해운대>에 적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레벨 셋 시뮬레이션은 물입자의 상호관계를 물리적으로 계산해 연산반응을 만드는 방식으로서 실제 물의 연쇄적 반응까지도 구현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투자되는 작업이라 할리우드에서도 활용빈도가 낮다. 실제로 <해운대>에 적용된 건 ‘서페이스 디포밍(Surface Deforming)’이다. 서페이스 디포밍은 출렁거리는 유사 이미지를 섬세하게 쪼개서 물표면과 비슷하게 그려내는 방식이다. 전자에 비해 유체의 움직임이 완벽하진 않지만 비용 대비 효과 안에서 탁월한 결과물이 출력된다. 미국에서 보내온 파이널 데이터는 기대를 온전히 실망으로 변환시킬만큼 심각한 상태였다.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작업을 체크한 제작자와 투자자는 작업 과정 자체에 애초에 무리가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개봉을 2개월 앞둔 시점에서 작업의 공정 과정을 완전히 뒤집는 무리수를 감행한다. 애초에 미국의 하청을 위한 파트너로 고용됐던 모팩 스튜디오의 장성호 대표에게 <해운대> VFX를 지휘하는 전권을 위임했다. 결국 장성호 대표는 미국에서 기본 작업이 된 데이터 소스를 다시 받아서 전부 재작업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질감도 바꾸고, 조명도 바꾸고, 렌더링도 다시 하고, 디테일도 다시 추가했다. 결국 640컷이 넘는 최종합성 작업에 두 달여 동안 매진했다.
장성호 대표는 말한다. “애초에 우리에게 우리 기술 내에서 한번 방법을 찾아보라고 했다면 가능한 방식 안에서 지금보다 나은 퀄리티를 얻어낼 수 있었을 거다. 그것도 미국에서 사용한 예산의 절반 이하로도 가능했을 거라 본다. 다행히 결과물을 관객들이 받아들일만한 최소한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는 건 위안이 되지만 완성도에 있어서 결코 만족스럽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해운대>를 제작한 JK필름과 윤제균 감독은 심해를 배경으로 한 크리처 무비 <제7광구>를 기획 중이다. 현재 모팩 스튜디오는 JK필름과 함께 <제7광구>의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하고 있다. “기술보단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기술을 적용했을 때 예상치 못한 효과가 날 수 있다는 발견도 있었다. 국내 CG기술이 떨어지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길영민 이사의 말이다.
과거 <괴물>의 크리처는 미국의 VFX업체 오퍼니지(Orphanage)가 구현한 것이다. 당시 크리처 무비는 한국영화에서 역시나 전례 없는 도전이었다. 한국에서 대작으로 꼽히는 100억 규모의 작품들은 투자 자본의 너비만큼이나 손실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신중한 선택을 고려할 수 밖에 없다. <괴물>에서 미국의 오퍼니지가 선택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 기인한 바다. 하지만 오퍼니지는 본래 ‘하드 서피스(hard surface)’라는 기계적 질감의 CG작업으로 유명했던 업체였다. 오퍼니지는 <괴물>을 통해 크리쳐 작업의 데이터를 획득했고 그 결과적 경험치는 온전히 오퍼니지의 자산이 됐다. 그런 점에서 <해운대>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JK필름은 한스 울릭과 계약을 체결하며 모팩 스튜디오에 기술 이전 조건을 명시했다. 결국 <해운대>의 결과적 데이터는 모팩 스튜디오의 자산이 됐고, 이는 곧 국내VFX기술의 질적 향상을 의미한다. 최근 전세계적인 화제작 <아바타>를 작업한 뉴질랜드의 웨타 디지털은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을 통해 성장했다. 피터 잭슨은 영화시장조차 없는 자국의 VFX업체를 자신의 블록버스터에 참여시키며 세계 최고의 업체로 성장시켰다. 경험만큼 확실한 자산도 없다. 한국이 참고할만한 확실한 선례다.
단순한 신뢰만으로 대자본의 결과물을 맡긴다는 건 무모한 도전이다. 하지만 도전적 시도가 결국 보다 발전적인 여건을 이루기 위한 직접적인 통로가 된다는 건 진리다. 과거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에 참여한 인사이트 비주얼은 현재 강제규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알려진 <마이 웨이>(가제)에 참여하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 당시엔 CG팀에 대한 강제규 감독의 신뢰가 낮았다. 그러나 그 후로 CG파트에 대한 신뢰가 생긴 것 같다. 이번 작품에선 보다 적극적으로 CG를 활용하려 한다.” 인사이트 비주얼 손승현 제작이사의 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하는 <마이 웨이>의 관건은 로케이션이다. 현재 중국과 독일, 헝가리, 한국 등지의 로케이션을 계획 중인 제작부는 현지 촬영의 필요성을 논의 중이다. 현지 로케이션의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도 적절한 효과를 얻어낼 대안적 방안을 강구 중이다. 300억 짜리 대작이라지만 전쟁영화의 스케일을 구현하기 위해선 최대한 허리끈을 졸라매야 할 예산이다. 그만큼 CG의 역할이 중요하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덕을 본 ‘매트 페인팅(Matt Painting)’도 적극적으로 쓰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수많은 엑스트라를 동원하지 않고도 현장에 동원된 인원들의 움직임을 데이터로 입력한 뒤 복사해서 편집해 넣는 기술로서 탁월한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모던보이>처럼 세트를 짓는 소모적인 비용들을 매트 페인팅 작업으로 대체함으로써 생생한 시대상을 구현하고 제작비를 절감한 <모던보이>의 사례도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CG기술의 발전이 보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능케 한다는 점을 주목할만하다. <해운대>나 <국가대표>를 비롯해 최근작인 <전우치>까지, 근래 몇 년 사이 한국영화는 보다 풍부해진 장르적 시도나 소재적 접근을 꾀하는 중이다. CG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인해 장르적 도전이 탄력을 얻고 있다. 이는 드라마에서도 유효하다. 2008년 제작된 <태왕사신기>나 지난해 제작된 <아이리스>와 같은 드라마는 대작이라는 공통점과 함께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장르물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결과적으로 CG기술의 발전과 함께 한국영상 콘텐츠의 보폭이 넓어지고 동선이 자유로워졌다. 그만큼 CG의 효율적인 활용에 대한 고민이 중요해졌다. DTI픽쳐스의 양석일 실장은 말한다. “체질적으로 CG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차가 뒤집히는 카체이싱을 찍을 때, 액션 팀이 직접 연출할 것인지, CG팀이 그려낼 것인지, 그 상황에 어울리는 방법을 고민하고 제작비 여건 안에서 보다 안정적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비용을 더 들여서 CG를 하자는 게 아니라 어느 부분에서 CG가 정말 필요한지 선별하는 게 중요하다.” 무엇을 포장할 것인가보단 무엇을 담아내고 있느냐에 집중해야 하는 셈이다.
<해운대>나 <국가대표>의 흥행은 고무적이다.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작의 성공으로 또 다른 작품이 기획된다면 이에 참여한 업체는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선례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물론 경계해야 할 사안도 존재한다. “과거에 CG를 전문적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면 그때마다 작업 요구량이 확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할리우드 수준에 따라 국내 관객의 눈높이는 높아지는 반면 제작 여건은 여전히 낙후됐다. 결국 그런 악조건 속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이 외면당하면 시장이 흔들릴 정도로 타격을 받게 된다.” 단지 기술적 성과만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대변할 순 없다. 열악한 시장의 조건 안에서 쥐어짜듯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국내업체들의 여건은 항상 최선의 결과를 바라는 시장의 기대치에 대한 발목을 잡는 셈이다. 그만큼 업체들의 목을 조이는 열악한 국내 환경의 개선도 급선무다. 할리우드와 비교했을 때, 저예산에 가까운 한국영화 제작비 안에서 VFX업체에게 돌아가는 몫은 언제나 열악하다. 정당한 요구를 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과거 <집결호>를 연출한 중국의 펑 샤오강 감독이 <태극기 휘날리며>에 참여한 국내 스태프들과 일하길 원했다. VFX를 담당한 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CG팀을 제외한 VFX팀이 <집결호>에 참여했다. “그 당시 우리가 너무 많은 작업에 매달려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상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인사이트 비주얼 손승현 제작 이사의 설명이다. 국내 VFX업체들은 대부분 동시다발적인 작업을 진행한다. 3~4편에 가까운 국내 작품의 작업을 함께 진행한다. 예산이 빠듯한 한국영화의 현실에서 최대한 많은 작품의 작업을 진행해야 회사를 유지할 수 있는 기본금이라도 마련되기 때문이다.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만큼 업무량은 늘어난다. 할리우드나 해외의 유망한 VFX회사들은 전문화된 인력들의 철저한 분업 시스템을 선호한다. 그에 반해 국내 아티스트들은 멀티 플레이어로서 기능하지 않고선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덕분에 전반적인 작품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을 얻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양화가 악화를 구축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분각을 다투는 작업 안에서 한 사람이 두 공정에 관여한다는 건 분명 비효율적이다.
현재 국내VFX업체들은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성장의 한계가 분명한 국내 영화 시장에서 국내 업체들끼리의 과다한 경쟁은 공멸을 자초하는 길이다. 결국 공존을 위한 방안으로 해외 시장 개척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최근 문화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주최로 한국을 대표하는 VFX업체 7곳이 AFM(American Film Market)에 공동부스를 차리고 한국VFX산업을 홍보하는 자리를 가졌다. “AFM에서 미국 클라이언트나 프로듀서를 만나서 <국가대표>를 보여주면 항상 제작비를 물었다. 그리고 항상 답변에 놀라곤 했다. 할리우드의 기준으로 보자면 <국가대표>가 수 백억을 가지고도 찍을 수 없는 영화다. 한국의 시스템을 놀라워한다.” EON디지털 필름스 정성진 실장의 변이다. 이에 앞서 해외 영화의 후반작업을 수주한 사례도 있었다. DTI픽쳐스, 매크로그래프, 풋티지는 <포비든 킹덤>의 후반작업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DTI픽쳐스의 양석일 실장은 말한다. “<포비든 킹덤>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경우였다. 우리뿐만 아니라 캐나다나 유럽 쪽 프로덕션 업체가 그 수주에 참여했고 우리가 생각하는 가격 경쟁력 차이도 크지 않았다. 무조건 할리우드 시장에 진출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된 건 아니다. 전략적으로 잘 대응할 필요가 있다.” 하루 아침에 할리우드의 대작에 국내업체가 참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국 국내업체가 해외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다. 개봉을 앞둔 <워리어스 웨이>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모팩 스튜디오의 장성호 대표도 이와 같이 말한다. “시장에 조금씩 스며들듯이 참여하면서 좋은 평판을 얻어내기 시작하면 기회가 조금씩 열릴 수 있다고 본다. 너무 성급하게 치고 들어갔다가 되레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오고 평판이 떨어지면 오히려 되돌리기가 힘들어진다.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앞선 두 사람의 말처럼 해외시장 개척은 국내VFX산업의 향방을 결정할만한 대안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보다 착실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정부의 협조도 중요하다. 자생적인 발판을 마련하기 이전에 산업적인 구조의 불합리를 개선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지난해 CG산업협의회를 설립한 업계는 이를 통해 정부 측과의 소통 창구를 마련하고 현실적인 개선에 대한 목소리를 전했다. 그 결과 국내외 프로젝트에 참여한 업체 가운데 제작비용을 지원하는 정책이 마련됐고, <국가대표>를 비롯한 몇몇 작품이 혜택을 받았다. AFM의 부스 참여도 이런 움직임이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협의회가 업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통로이자 보다 현장을 배려하는 정책 반영을 가능케 하는 자문 기구로서 역할을 해내고 있는 셈이다. 캐나다와 호주, 영국, 싱가폴 등 해외에서는 벌써 우리보다 먼저 자국의 CG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한국의 VFX업체는 정부 혜택을 받은 적 없다. 다른 국외 업체와 비교했을 때 20미터 뒤에서 뛰기 시작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부의 변화는 고무적이다.” 정성진 실장의 의견이다. 지금까지 한국CG산업은 열악한 토양 속에서도 열정과 노력으로 싹을 틔운 인재들의 피땀을 먹고 자라왔다. 이젠 그 희생으로 일군 토양에 물과 비료가 필요한 시점이다. “제 아무리 보검이라 해도 그냥 식칼 용도로 사용되면 보검으로서 의미가 없다. 사용자가 그 가치를 가장 많이 깨닫고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의미 있게 쓰이는 거다.” 장성호 대표의 말처럼, 국내CG기술의 발전적 성과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 된다. 그리고 그 기회는 단지 개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발전을 이뤄온 개개인의 노력에 대한 산업적 이해가 절실한 시점이다. 대한민국 영상산업의 새로운 밑그림을 CG로 그려나가겠다는 야심도 그때부터 선명해질 것이다.
상상력에 표현의 날개를 달다. 무기와 로봇으로 변신해서 관객을 현혹시키는 CG도 있지만 보호색을 띠고 배경으로 은둔해서 관객을 속이는 CG도 있다. 한국영화에서 CG가 눈에 띠지 않았던 건 주로 후자 쪽이었기 때문이다. 촬영이 이뤄지는 현장조건이 모든 걸 좌우하거나 카메라에 보여지는 것만이 영상의 모든 것이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CG는 카메라에 걸리는 불필요한 배경들을 지우개처럼 지워버리거나 원하는 풍경을 능청스럽게 조합해버린다. 작년에 개봉된 <M>이 최소한의 세트 안에서 촬영됐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상에서 다양한 공간을 구현할 수 있었던 건 모두 CG의 힘이다. 하나의 공간은 CG를 통해 다른 거리로 탈바꿈했고, 블루스크린이 덩그러니 놓여있던 창 밖은 산홋빛 해변으로 환골탈태했다.
표현력의 확대는 다양한 컨텐츠를 활용할 수 있는 창작의 기반이 됐다. CG기술의 발전으로 영화가 제시할 수 있는 카드가 늘어난 셈이다. “CG기술발전은 과거와 달리 이제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가 가능해졌다는 걸 제작자와 투자자들에게 깨우쳤다. CG기술이 컨텐츠의 다양성에 기여한 바가 있다.” ‘DTI픽쳐스’ 이수영 기획실장의 말대로 만약 CG가 없었다면 DTI픽쳐스가 <중천>을 통해 대종상과 청룡영화제 기술상을 탈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태풍>의 스펙타클한 해상장면도 같은 맥락이다. 세트장에서 블루스크린을 배경으로 촬영된 모형배는 CG작업을 거쳐 거대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위를 항해했다. 만약 CG가 없었다면 직접 바다로 나가 배를 침몰시켜야 했을 <태풍>은 투자자로부터 비웃음이나 살만한 과대망상이었을 것이다.
1. 이명세 감독 <M> 미장원 골목 촬영 원본 2. 배경합성을 위한 마스킹 작업
3. 매트 페인팅 작업 4. 결과물
실제로 영화가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다양한 장르가 개척됐고 더욱 효과적인 연출이 용이해졌다. 2007년 말, 사극에 판타지를 가미하며 새로운 장르적 시도를 하며 관심을 모았던 <태왕사신기>는 기존의 드라마들이 꾀하지 못했던 장르 개척이라는 성과를 올렸다. 이는 분명 국내CG기술의 기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시도였으며 동시에 기술영역의 확보가 창작범위의 확장으로 연결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DTI픽쳐스'의 현장 슈퍼바이저로 활약하는 류재환 감독은 이렇게 전한다. “영화인들이 CG를 공부해야 하듯 우리도 영화를 공부해야 한다. 실사촬영과 CG작업 중 어느 것이 비용과 노력 면에서 더 나은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전반적으로 계산하고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장의 협조도 중요하다. 카메라 무빙을 비롯해 소스 촬영까지 CG작업을 위한 현장 스태프와 전반적인 협의가 필요하지만 CG작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던 초창기 현장은 이런 요구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물론 요즘은 과거와 달리 CG의 필요성이 인식되는 만큼 협조적으로 변해가는 추세다.
예전에는 난이도가 높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액션 연출에도 CG는 힘을 발휘한다. 정면으로 달려오는 자동차들을 피해가며 도로를 역주행하는 오토바이 씬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야수>의 초반 카체이싱은 순수 스턴트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CG에 빚진 결과다. CG가 그려 넣은 승용차 덕분에 오토바이에 탄 스턴트맨은 느리게 달려오는 자동차 몇 대를 유유히 피해 다니며 노고를 줄일 수 있었다. <무영검>의 수중격투씬과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빌딩경공술씬 역시 블루스크린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CG는 와이어에 매달린 배우들의 액션 장면을 각각 물 속으로 잠수시키거나 공중으로 부양시켰다. 또한 잔인한 신체훼손 장면에서도 CG는 몸은 사리지 않는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육중한 폭발장면에 신체가 찢겨지는 인간을 겹쳐내는 CG로 전장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편, <오래된 정원>에 출연한 배우 염정아도 CG덕을 봤다. CG가 머리카락을 가려준 덕분에 삭발투혼을 면한 것. CG는 배우의 사적인 인권마저 보호한다.
1. <아라한 장풍 대작전> Before 2. After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CG가 가진 최고의 미덕은 제작비에 비해 비용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대규모 군중이 운집하는 장면의 어려움은 통솔이 어렵고 실제 그 인원을 모두 모으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에서 CG의 활용도는 꽤나 유용하다. 최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덴마크 결승전의 관중석을 가득 채우지 못한 엑스트라의 공백은 CG가 메웠다. 또한 <태극기 휘날리며>의 1.4후퇴 씬에서 등장했던 수만 명의 중공군 중 실제 엑스트라는 3백 명 남짓이었다. 남은 공백을 채울 1인 다역은 모두 CG가 맡았다. 이런 상황에서 CG는 복사와 편집의 기능을 한다. 현장에 동원된 인원을 촬영한 뒤 그것을 재배열해서 이어 붙이면 이는 결국 스크린을 가득 채운 인파로 완성된다. 실제 현자에 있던 인물은 대규모 인파의 일부이며 동시에 전부가 되는 것이다. 이는 제작비에 큰 영향을 주는 인건비 절감으로 이어진다.
CG작업이 단지 영화의 크랭크업 이후, 후반작업에만 관여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영화의 제작팀을 제외하고 작품의 기획부터 개봉 직전까지 영화제작 전반에 참여하는 건 오로지 CG팀뿐이다. 요즘은 영화의 기획 단계에서 카메라의 구도를 대략적으로 그려 넣은 콘티를 3D영상으로 제작하는 ‘프리 비쥬얼(Pre-Visualization)’ 시스템이 적극 활용되고 있다. 덕분에 카메라와 캐릭터의 동선을 체크하고 그에 따른 구도를 미리 모니터하고, 이를 직접 테스트함으로서 실제 촬영시 나타날 수 있는 혼선을 줄이는 것이 가능해졌다. 실제로 이 시스템을 적용한 <청연>의 공중 비행씬은 당초 예상했던 3개월의 촬영기간을 단 11일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오늘날 CG는 영화의 후방을 견인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전방까지 사수하고 있다.
블루스크린에 그리는 미래 영상의 청사진 미국 현지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한국인 CG디렉터들의 활약은 국내CG기술에 대한 대외적 신뢰 구축에 이바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인기를 모았던 <트랜스포머>는 할리우드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VFX회사인 ILM과 디지털 도메인에서 각각 ‘크리쳐 기술 전문가(Creature Technical Director)’로 활약하는 홍재철과 ‘디지털 아티스트(Lead Digital Artist)’로 활약하는 서명철, 표영일이 참여해 화제가 됐다. 그 밖에도 최근 <베오울프>에 참여한 소니픽쳐스이미지웍스의 정유진을 비롯해 적지 않은 인원들이 할리우드 현지에서 한국인력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다.
근래에 몇몇 국내업체의 해외진출이 성사됐다는 고무적인 성과도 있었다. 현재 국내CG업체인 ‘DTI픽쳐스’, ‘매크로그래피’, ’풋티지’가 공동으로 이연걸과 성룡의 동반출연작인 <포비든 킹덤> 후반작업을 진행 중이며 <태왕사신기>의 CG를 맡았던 ‘모팩 스튜디오’는 장동건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알려진 <런드리 워리어>에 참여한다. 하지만 이것이 회사의 운명뿐만 아니라 국내산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책임감을 가질 필요성도 있다. 수요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공급은 반대로 시장의 출입을 막는 법이다. 국내의 주먹구구식 관행과 달리 할리우드의 현장시스템은 계약서 두께부터 차이가 난다. 작업을 위한 스케줄을 보장하는 만큼 확실한 단계적 성과를 증명하길 요구하며 그것이 가능해야 장기적인 파트너쉽을 기대할만한 신뢰감을 구축할 수 있다. 파이가 적은 국내시장의 한계를 생각한다면 해외시장은 필요조건에 가깝다. “<런드리 워리어>는 기존의 국내작업에 비해 세배 이상의 이윤과 네 배 이상의 작업기간이 확보된 만큼 예전 국내작업보다 좋은 퀄리티로 완성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다. 또한 잉여자금을 R&D(연구개발비)에 재투자할 수 있어서 더욱 발전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모팩 스튜디오’ 장성호 대표의 말처럼 국내회사의 해외진출은 시장성의 확보와 함께 작업 환경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에 매력적이다. 특히 최근 할리우드가 자국보다 비용대비효과가 큰 유럽과 아시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에 국내업체들의 충분한 대비가 더욱 요구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우. 생. 순> Before After
Before After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는 작년에 유체 시뮬레이션 기술 연구를 통해 난이도가 높은 맥주 거품을 구현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CG분야에서 국제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시그라프(SIGGRAGH) 2007’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으며 관련 논문의 채택도 이뤄졌다. 외국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에 의지하면서도 고급기술에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국내현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상당히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국가 정책으로 주도한 소프트웨어의 개발 실적을 국내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상용화 방안의 실질적인 모색도 필요하다. 기술적 성과를 산업적 이익으로 연결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에 대한 산업적 논의가 좀 더 구체화될 필요성이 있다.
피터 잭슨 감독이 <반지의 제왕>을 통해 자국회사인 ‘웨타 워크샵(WETA Workshop)’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는 건 투자의 기회비용이 창출할 수 있는 산업적 효과를 증명한다. 단기적인 작품의 성과도 중요하겠지만 기회 비용을 지불하는 투자가 산업의 근간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국내영상산업의 밑거름이 될 CG산업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을 갖춘 시도가 요구된다. ‘하드 서피스(hard surface)’라는 기계적 질감의 CG작업으로 유명했던 ‘오퍼니지(Orphanage)’는 <괴물>을 통해 캐릭터CG의 경험치를 습득했다. 만약 그 노하우가 국내에 흡수될 수 있었다면 국내CG산업의 성장을 위한 양질의 밑거름이 됐을지도 모른다. <괴물>은 작품의 개별적인 성과를 남겼지만 영화에서 시도된 특수효과 기술이 국내산업의 노하우로 흡수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다. 경험을 통한 노하우만큼 좋은 자산은 없다. 산업적인 보호도 여전히 미비하다. 국가적 지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공해 벤처 산업을 굴뚝 달린 제조업에 엮어 넣는 시대착오적 정책의 변화는 한번쯤 재고할 필요가 있다. 또한 CG를 단순히 영상의 기술적 소품으로 생각하며 창의적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몰지각한 태도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use) 시대에서 CG기술의 발전은 영화뿐만 아니라 CF, 뮤직비디오, 게임을 포함한 영상분야의 파급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다양한 파트에 기술적 역량을 공급할 수 있는 영향력을 확보해서 다양한 수익 모델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 10년 넘게 한국영화와 파트너쉽을 유지하고 있는 ‘인사이트 비쥬얼’의 강종익 대표가 그리는 CG산업의 청사진이다. 결국 CG산업은 국내영상산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촉매로서 비전을 지닌다. 열악한 국내여건 속에서도 우직하게 토양을 일군 인력들의 땀을 먹고 국내CG기술은 오늘날까지 자라왔다. ‘단지 기술자가 아니라 창작에 참여하는 일원’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의 열정이야말로 영상산업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좋은 밑그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