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하디의 경력은 전쟁터에서 시작됐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TV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연기를 시작한 뒤,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2001)을 통해서 영화에 데뷔한 것. 하지만 그에게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2010)은 좋은 기회였다. 터프한 성격으로 꿈 속을 종횡무진하는 임스는 대중에게 하디의 매력을 ‘인셉션’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고독한 내면을 지닌 저돌적인 인파이터로 열연한 <워리어>(2011)의 하디는 강력한 훅처럼 자신을 내던졌다. <렛 미 인>(2008)을 연출한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할리우드 데뷔작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보다 강력한 한 방이 예정돼 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에서 배트맨의 새로운 숙적 베인으로 등장하는 것. “사내라면 이 정도 포부는 돼야지.” <인셉션>의 인상적인 그 대사처럼, 이 남자, 거침 없다.
14년 동안 소식을 모른 채 살아왔던 아들이 돌아왔다. 놀라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술병을 내민다. 하지만 아버지는 술을 끊었다. 아들이 되레 놀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버지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고, 덕분에 집안은 파탄이 났다. 부부는 이혼했고, 형제는 헤어졌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온 건 격투기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유능한 트레이너였던 아버지의 도움을 받겠다는 것.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형의 소식을 듣는다. 형은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형은 현재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있다. 그러던 중, 거액의 상금이 걸린 격투기 대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워리어>는 그 단도직입적인 제목만큼이나 단순한 영화다. 가정의 붕괴로 본의 아니게 헤어지게 된 형제는 그로 인해서 서로를 오해하게 되고, 그렇게 반목하게 된 형제가 링에서 해후해서 주먹을 맞대다가 결국 화해하게 된다. 현란한 스텝을 밟으며 관객을 교란시키기 보다 묵직한 주먹과 같이 직설적인 감정으로 감상을 두들긴다, 물론 시종일관 난타전만 벌이는 건 아니다. 가족과 형제의 관계를 둘러싼 인과가 천천히 드러나는 과정에서 탐색전의 묘미가 발견된다. 하지만 인과는 단명하고, 서사는 직선적이다. 그만큼 인과의 말판 위에 놓인 말의 역할이 중해진다. 그 인과 위의 캐릭터를 대신하는 배우들의 기량이 중요하다는 것.
영화의 양 팔이나 다름없는 톰 하디와 조엘 에저튼은 자신들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저돌적이고 파괴적인 공격력을 지닌 토미(톰 하디)와 인내와 끈기로 결코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 브렌든(조엘 에저튼)은 그 판이한 경기 운영 방식만큼이나 뚜렷한 갈등과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각자 나름의 책임감을 안고 링에 오른 형제가 맞붙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서서히 달궈지는 불판 위에 열기처럼 점차 달아오른다. <워리어>는 형제와 가족의 갈등과 해후를 그린 단순 명료한 내러티브의 영화이지만 미군 해외 파병과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미국 내 사회의 문제적 화두들을 건드린다. 단순한 주제에 현실적인 설정을 더함으로써 극적인 상황에 사실적인 흥미를 자아낸다.
여느 스포츠 영화, 그 중에서도 잘 만들어진 격투기나 복싱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워리어>의 경기 장면들이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특별한 수준을 자랑한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적절하게 제 역할을 해낸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사실 <워리어>에서 거듭되는 경기 장면은 링에서 맞붙는 두 형제의 경기, 그 피니쉬 블로우를 위해 거치는 라운드일 뿐이다. 개인적인 명예를 걸고, 혹은 가족의 평화를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링 위에 선 두 남자가 형제라는 이름으로 마주설 때, 그 공간은 가혹한 생존의 터전이 됨과 동시에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오해의 장벽을 깨부술 수 있는 화해의 장이 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형제애와 가족애라는 명료한 감정이 곁가지를 최대한 쳐내고 몸통을 드러내듯 우직하고 단단하게 전해진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며 인스텝으로 서서히 걸어나가는 인파이터가 상대 선수의 사정권 안에서 주저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듯 단도직입적이다. 그 한 방이 제대로 먹힌다.
미쉘 공드리와 팀 버튼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비현실을 꿈꾸는 감독이다. 하지만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몽상의 이미지를 채색하는 공드리나 자아의 내면에 깊게 잠재된 트라우마를 악몽처럼 소환하는 버튼과 달리 놀란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보다 구체화시키는데 주력해왔다. 놀란에게 잠재된 꿈의 영역은 환상적인 비주얼에 함몰되거나 몽상처럼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는 꿈에 매혹당할 뿐, 그 꿈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불확실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정의를 명확하게 짚고 체계화시킨다. 자신의 꿈을 꾸는데서 멈추지 않고 그 꿈을 주시하고 목격해나가며 잠재된 세계관의 설계도를 작성한다.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세계관이 집약된 총아나 다름없다. 자신들이 설계한 꿈으로 표적을 유인한 뒤, 표적의 꿈에 침투해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 생각을 추출하는 자들. <인셉션>은 마치 의식 속에 잠재된 거대한 무의식의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실험적 영상처럼 보인다. 타인의 꿈-비록 그것이 자신들이 설계한 도면을 통해 완성된 꿈이라 할지라도-에 잠입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침투한 타인의 꿈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주시하는 상대의 무의식을 경계하고 자신들이 훔쳐내고자 하는 표적의 생각에 접근해낼 수 있는 최단의 루트를 궁리해 나간다.
이는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머리 속에 응축된 상상력을 펼쳐놓은 창작적 도면과도 같다. <메멘토>, <인썸니아> 그리고 <프레스티지>는 인간의 의식 속에 웅크린 잠재태의 비사실적인 형상을 사실적인 현실태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구체화시킨다. 놀란은 언제나 시공간의 명확한 경계를 자신의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키는 장치적 요소로서 활용한다. 망각과 기억, 수면과 각성, 환상과 트릭이라는 대립적 요소가 등을 맞댄 분리면을 뚜렷하게 각인시킨 뒤, 두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지어 정의함으로써 상반되는 대립적 관념의 공존이 가능한 비선형의 질서를 명료하게 설득시킨다. 비현실적인 관념들을 현실적인 상 위에 올려놓을 뿐, 그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음으로써 보다 입체적인 구조적 감상을 유도해낸다.
<인셉션>은 이 모든 자질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인셉션> 자체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뇌구조를 펼쳐 보인 도면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세계관의 구조를 설명하는 이론서처럼 시작되던 영화는 점차 내밀한 설계도의 거대한 단면들을 펼쳐 보이듯 스케일을 키우지만 서사적 속도감은 유지한 채 정보의 밀도를 팽창시키며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간다. 겹겹이 쌓일 뿐 결코 뒤엉키지 않는 입체적 구조 안에서 경제적인 동선을 미리 확보해둔 것처럼 내러티브는 매끈하게 진행되고 경이적인 인테리어와 같이 발견적인 영상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인셉션>에서 묘사되는 꿈과 현실은 영화와 현실이며 동시에 허구와 현실이다. 놀란은 <인셉션>을 통해 영화를 통해 가능한 꿈의 영역을 끊임없이 파고 드는 동시에 그 거대한 허구의 연속에 짓눌리지 않도록, 즉 ‘림보’에 빠지지 않도록 이야기의 맹점을 경계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 좀처럼 ‘죽이기 힘든’ ‘생각’들을 펼쳐 보이는 동시에 이에 잠식당하지 않고자 재생되는 생각의 진전이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 출구를 확보해낸다. 입체적인 액자 구조 형태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체험처럼 펼쳐질 때,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얻게 되는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적 욕망을 입체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무대를 얻게 된다. 비선형적인 이미지를 통해 구축되는 명확한 논리 속에서도 깊게 응축되어 발현되고 마는 페이소스는 <인셉션>의 스토리텔링에서 가히 비기에 가깝다.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이 싸워 만들어낸 거대한 세계관과 같다. 현실을 인지하는 의식이 끊임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부수는 무의식의 세계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낸 듯한 세계관이 스크린 위에 구현된다. <인셉션>은 분명 하나의 전형으로 남을 만한 작품이다. 이는 단순히 그 세계관의 외형이나 구조 혹은 비범한 이미지의 출현과 같이 명확하게 확인되는 결과물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완성된 작가적 세계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투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겹겹이 싸인 그 꿈의 세계 속에서 저마다 분투를 벌이는 구성원들의 활약에 매혹 당하고 헤어날 수 없게 몰입하다 끝내 의미심장한 탄식을 내뱉고야 말 당신들의 감상은 이미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