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457,768 vs. $39,722,689. 메이저리그의 최고팀과 그 아래에 있는 팀보다도 더 밑바닥에 있는 팀의 간극은 저 수치로 정리된다. 선수 몸값의 총액이 곧 팀의 실력을 대변한다. 수치만으로도 명백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프로스포츠의 세계에서 이는 흔한 일이다. 이는 메이저리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세계 모든 종목의 프로스포츠 대부분은 구단의 빈부격차를 통해서 순위의 계층화가 손쉽게 이뤄진다. 뉴욕 양키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통점은 실력 있는 부자 구단이라는 것. 부자 구단들은 한 시즌이 마감되면 자본을 투여해서 스타들을 영입하고, 새로운 유망주를 발굴하거나 스타를 길러낸 가난한 구단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부자 구단의 선수 수집을 넋 놓고 지켜볼 수 밖에 없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지금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고 있는 중이다. 2001년, 뉴욕 양키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디비전시리즈. 3점 차로 앞서고 있던 오클랜드가 양키스에게 역전당하자 남자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그리고 끝내 패배. 그해 오클랜드는 양키스에게 리버스 스윕, 즉 시리즈 역전패를 당했다. 남자의 손에 쥐어졌던 라디오가 멀리 날아간다. 그의 이름은 빌리 빈(브래드 피트), 오클랜드의 단장이다. <머니볼>은 빌리 빈에 관한, 그 빌리 빈이 이뤄낸 메이저리그의 개혁에 관한 이야기다. 세이버매트릭스라는 야구기록 통계 시스템에 빠삭한, 야구 경력이 없는 경제학 전공의 직원을 고용하고 기성 야구계의 편견과 한계에 맞서서 자신의 시스템으로 팀의 성공을 이끌어낸 단장 빌리 빈에 관한 전기적 실화가 담긴 경제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은 아론 소킨의 각본으로 옮겨졌고, 베넷 밀러의 지휘 아래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다.
<머니볼>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몇몇 인물의 형태가 영화를 통해서 변형됐고, 연출적 감각으로 채워 넣은 영화적 찰나들이 예감되지만, <머니볼>은 드라마틱한 현실에서 길어낸 현실적인 드라마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영화, 그것도 현실과의 불협화음을 이겨내고 자신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남자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 도식적인 예감을 부른다. 주목할 것은 일찍이 <카포티>로 할리우드 감독상을 거머쥔 베넷 밀러 이전에 <소셜 네트워크>의 각본가인 아론 소킨이다. 그는 마크 주커버그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또 하나의 화신을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그리고 <머니볼>은 <소셜 네트워크>가 마크 주커버그에 관한 전기가 아니었듯이, 오클랜드의 단장 빌리 빈에 관한 전기로 완성되지 않았다. <머니볼>에서 빌리 빈이라는 인물보다도 흥미로운 건 그의 행위적 근간이 되는 경험과 심리의 탐색, 그리고 그 주변을 이루는 풍경의 관찰에 있다.
상실의 에너지를 페이스북의 동력으로 끌어올린 마크 주커버그처럼, 빌리 빈 또한 실패의 에너지를 파격적인 구단 운영의 동력으로 끌어올린다. <머니볼>은 야구 영화라기 보단, 야구가 등장하는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이는 과거의 경험에 기인해서 직접 경기를 관람하지 않는 빌리 빈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관객이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데 이처럼 <머니볼>은 빌리 빈이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서사 속에 내재된 심리를 관객의 감상에 투영해내는데 여념이 없는 작품이다. 탁월한 임기응변과 제스처로 자신의 공기를 만들어내는데 능한 빌리 빈이 텅빈 그라운드가 바라보이는 객석에 홀로 앉아 고독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 그 단적인 풍경 만으로도 인물의 심리적 간극과 고충이 오롯이 와닿는다. <머니볼>은 리드미컬한 서사적 운용과 탁월한 공간감의 활용을 통해서 인물의 심리를 역동적으로 추적하고, 광활하게 펼쳐놓는다. 아론 소킨의 스토리텔링을 베넷 밀러가 유연하게 세우고 맞춘다.
배우들의 공헌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머니볼>에서 브래드 피트는 지휘자와 같다. 마치 더 이상 근사한 외모로서 언급되길 거부하듯이 유려한 연기력과 압도적인 장악력을 드러낸다. 또한 빌리 빈을 보좌하는 경제학도 세이버메트릭스 전문가 피터 브랜드 역의 요나 힐과 오클랜드의 감독 아트 하우 역을 맡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극적인 흐름에 긴장과 흥분을 불어넣는 스페셜리스트의 위치를 점한다. 또한 모든 배우들은 훌륭한 화음을 자랑하는 관현악단과 같이 자신의 파트를 군더더기 없이 연주해낸다. <머니볼>은 팀워크가 뛰어난 영화다. 그랜드슬램 한방보다도 팀 배팅을 통해서 끊임없이 진루타를 치고 나가며 출루율을 높여나간다.
<머니볼>은 개혁과 진보에 관한 영화지만 결국 그 과정을 이겨내는 한 인간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실패를 경험적 밑천으로 삼아서 새로운 사고를 실행으로 작동시킨 남자는 결국 그 신의 변화를 주도해내고 갈등과 불화를 견디며 새로운 답안을 정착시킨다. 물론 그 방안이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다. 빌리 빈의 정책에 따라서 오클랜드는 5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결국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또한 빌리 빈의 방식을 응용한 다른 팀이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빌리 빈의 방식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이지 않은 듯한 영화적 시선은 어쩌면 공정한 것이다. 의외성의 플레이를 인정하지 않고 통계에 기대는 기계적인 운영을 통해서 시즌 운영의 성공을 거둘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의 승리를 얻어낼 수 없다는 건 결국 아이러니다. <머니볼>은 결국 그 거대한 아이러니에 관한 영화다. 자신의 성취로 환호했던 그라운드의 적막을 홀로 차지한 채 드러누운 빌리 빈의 모습이, 독보적인 스카우팅으로 게임을 지배한 덕분에 거액의 스카우팅 제의를 받게 된 빌리 빈의 선택은, 어떤 통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의외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이 영화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나는 가수다>는 실력의 오차범위가 불명확한 프로가수들의 무대에 우열의 가치를 도입한다는 것만으로도 불합리한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그 불합리함을 넘어서는 포맷의 시도가 이 프로그램에 대단한 합리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정체성을 세워냈다. 신선해서가 아니다. 절박했기 때문이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던 베테랑 가수들의 공연을 매주마다 한 차례씩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예측불가능의 결과로 인해서 새로운 무대가 마련된다는 것, <나는 가수다>가 흥미를 자아낸 건 출중한 실력을 선보일 길이 없는 베테랑들의 절벽 위에 비합리적인 투표 제도를 빌미로 슈퍼쇼를 기획해냈다는 측면이었다. 구린 연출과 편집을 견디게 만든 건, 표면적으로강호의 고수들이 등장하는 진짜 무대 덕분이었고, 궁극적으로탈락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진검승부를 펼치는 그들의 긴장감이 날것처럼 전해져 오는 순간들이 존재했던 까닭이었다.
그 서스펜스가 증발됐다. 그 화려한 무대 이후의 긴장감은 이 리얼리티 쇼의 핵심이었다. 원칙이 무너졌다. 진짜 실력의 등위를 떠나서, 그 투표의 공정성과 기준의 오차범위를 떠나서, 오로지 수치로서 파악되는 불투명한 결과로 무대의 자격을 잇겠다는 야심은 일단 대단한 것이었고 그만큼 기대를 모았던 것이다. 그 야심을 스스로 박살냈다는 건, 이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를 함께 지워내 버린 것과 같았다. 김건모가 7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그 무대에서 함께 노래했던 이들이나, 그 무대 밖 어느 브라운관 앞에서 이를 지켜봤을 수많은 시청자들에게나, 굉장한 파고이자 울림이었다. 그걸 단박에 깨는 프로그램의 태도는 실로 기네스북감이다. 김건모도, 프로그램도, 함께 공멸했다. 차후에 대단한 무대를 펼친다 해도, 그는, <나는 가수다>는 쉽게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들의 기준을 파기해버린, <나는 가수다>는 <나는 가수다>가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위대한 탄생>의 아마추어에게는 냉정한 프로의 논리를 어찌 설득할 수 있겠나. 아마추어에게는 가차없고, 프로는 우대하는, <나는 가수다>가 <가요무대>냐. 모세가 또 한번 홍해를 가르길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나는 가수다>의 진정성을 인정할 날은 오지 못할 것 같다. 존폐의 기로에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쩔 것인가. 궁금하다. 단 3회 분량 만에 스스로 자해를 자행해버린 프로그램이라니, 이것도 대단한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노이즈 마케팅이 목표였다면, 욕먹을 때 떠나라. 다 떠나서 쌀집 아저씨는진짜 쌀집을 차려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몰래 카메라> 찍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면 타임머신이라도 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