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명예를 축적한 남성의 어긋난 욕망이 하녀의 표독스런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 평온한 중산층 가정에 불길한 전조가 감돈다. 치부처럼 드러난 욕망이 또 다른 욕망의 포로가 되어 불순한 관계의 늪을 허우적거린다. 자본주의가 걸음마를 시작할 1960년대 무렵을 배경으로 어느 중산층 가정의 파괴적인 몰락을 그려나가는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하녀>는 시대적 리얼리즘을 광기의 에너지로 승화시킨, 독보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다. 자본의 유무가 권력의 우열로서 확장되기 시작하던 자본주의의 요람적인 징후는 <하녀>를 이루는 무시무시한 광기의 원천이자 소스나 다름없다. 하녀의 얼굴은 곧 시대의 숨은 욕망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육체를 담보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하녀의 욕망은 부유한 중산층의 빈곤한 정서와 밀착하고 질환적인 병폐에 가까운 욕망이 괴물처럼 자라나 삶을 집어삼킨다.
걸작을 리메이크한다는 발상은 사실 위험하다. 원작의 아우라에 눌려 빛을 잃는 경우가 태반이거나 원작의 성과에 매몰되어 제 빛을 내기조차 어렵다. 김기영의 <하녀>를 리메이크한다는 건 히치콕의 그것들을 리메이크하고자 하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다. 일찍이 <싸이코>를 숏 바이 숏의 모작으로 재가공한 구스 반 산트의 그것이 증명했던 것처럼 애초에 원작의 형태를 고스란히 따라잡겠다는 야심 자체가 무리수에 가깝다. 새로운 시대의 <하녀>는 과거의 <하녀>와 조금 다른 판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단 지난 <하녀>에 출연했던 아역배우 안성기를 중년이 넘은 국민배우로 만든 50년의 세월이 두 작품 사이에 필연적인 간격을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시대적 공기의 변화가 반영될 때, 원작과 리메이크작에서 드러나는 차이가 묘한 이질감을 동반할 것임에도 틀림없다.
스크린의 입자 하나까지 시대적 공기를 채워넣는 임상수가 새로운 <하녀>의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1960년을 대체하는 2010년의 풍경은 새로운 시대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위해 마련된 미장센의 의상이다. 주요 배경이 되는 2층 집의 풍경은 보다 현대적인 감각의 인테리어로 채워졌고, 보다 젊은 세대로 구성된 인물들의 이름이 변한 것처럼 개개인의 성격과 성향도 과거와 다른 생활 양식 안에서 인물의 관계 구도도 온전히 새로운 것으로 재편된다. 보다 노골적인 물질주의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 세태에서 <하녀>는 보다 농밀하게 시대적 공기를 흡입하는 영화로 거듭날 가능성이 크다.
김기영의 <하녀>가 그러하듯이, 임상수의 <하녀>에서도 배우들의 역량은 절대적인 밑천이자 자질이다. 어쩌면 임상수의 <하녀>보다도 전도연의 <하녀>를 기대하는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원작에 비해 캐릭터의 연령층이 낮아졌다는 점도 관건이다. 최근 <파주>를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서우가 아내로 등장하고, 욕망의 근거지이자 주둔지나 다름없는 남편 역의 이정재,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늙은 하녀 역의 윤여정까지, 혈기와 관록이 뒤엉킨 캐스팅은 새로운 <하녀>에 짙은 의문을 새겨넣는다.
중요한 건 욕망이다. 임상수의 <하녀>와 김기영의 <하녀>가 서로 다른 시대적 텍스트를 품고 있음에도 하나의 본질로서 수렴될 수 있는 건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욕망 덕분일 것이다. 21세기에서도 인간은 욕망한다. 고로 <하녀>는 유효하다.
김수현vs 임상수
당초 <하녀>의 시나리오는 ‘드라마 히트 제조기’라 불리는 김수현 작가가 집필했다. 임상수는 김수현의 추천으로 <하녀>를 연출하게 됐다. 그러나 임상수의 손을 거친 시나리오를 되돌려 받은 김수현은 격분했다. 자신의 흔적이란 “초입의 한 장면 반토막과 나오는 사람들 이름 뿐”이라며 제작자에게 전화로 하차를 통보했다. 임상수의 사과가 담긴 이메일은 “용서할 수 없다”는 답변으로 일축됐다. 크랭크인 전부터 두 작가의 대립이 <하녀>를 뜨겁게 달궜다.
(PREMIERE Seasonbook 'KOREAN MOVIE PREVIEW' 4월호 No.66)
그 사내는 절박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걸어온 뒷길에는 좌절의 발자국들이 길게 늘어섰고, 온 몸은 실패로 얼룩졌으며, 인생은 누더기처럼 해진 지 오래다. 한때 축구선수로서 기대를 얻던 몸이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실패의 꼬리를 달고 다니는 인생에 불과하다. 발 딛고 선 땅에서조차 밀려나듯 길을 떠나다 보니 다다른 곳은 끔찍한 내전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가난한 영혼들의 땅, 동티모르. 인저리 타임밖에 남지 않은 듯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여전히 절망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그라운드 복판에서, 회심의 만회골을 노린다.
5년 전, 김태균 감독은 어느 TV프로그램에서 동티모르를 봤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맨발로 공을 차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친다는 한국인 김신환 코치를 만났다. “이상했지만 마음이 끌렸다”는 김태균 감독은 주변의 지인을 모아 후원회를 조직하려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동티모르 축구소년들의 히로시마 국제유소년축구대회 우승은 “제대로 된 운동장도 없이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 울퉁불퉁한 땅에서 공을 차던”아이들이 직접 일군 ‘레알’드라마였다. 결성 1년 만에 6전 전승으로 우승한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의 내막을 아는 김태균 감독은 이를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말한다. <맨발의 꿈>은 그 기적에서 시작됐다.
영화 제작 여건에 있어서 불모지나 다름없는 동티모르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컨테이너 5박스 분량의 장비를 공수했다. 한국과 일본 대사관의 전폭적인 지원을 믿고 대사관 주소로 장비들을 실어 날랐다. 대사관에서 무대포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현지 소통도 문제였다. 제대로 된 통역사도 없이, 현지 스태프를 섭외하고, 배우 오디션까지 치러야 했다. 덕분에 김태균 감독은 현지 UN경찰로부터 아동 납치 의심까지 얻으며 조사를 당했다. 불안한 치안 상황과 열악한 제반 시설 문제도 만만찮았다. 제일 큰 난관은 현지인과의 정서적 괴리였다. “일을 하지 않는”현지인들의 느릿한 행동과 일처리는 급박한 촬영스케줄의 발목을 잡았다. 현지 한국인이나 대사관에서는 하나같이 “스케줄 안에 영화를 찍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돈을 더 줘서라도 한국식으로 일하게 만든”결과, 현지 스탭들도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는 한국인”이 다 됐고, 촬영 일정을 예정대로 마칠 수 있었다.
북한의 가학적인 체제로부터 달아나고자 했던 부자의 파국적 상봉을 그린 <크로싱>에 이어 또 다시 열악한 동티모르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과 한국인 코치의 꿈을 다룬 <맨발의 꿈>은 실화가 바탕이 된 작품들이다. 다만 절망적인 실화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크로싱>과 달리 <맨발의 꿈>은 희망적인 사연을 품었다. “가난하면 꿈도 가난해야 돼?”영화 속 대사처럼 가난은 꿈을 움츠리게 만든다. 가난 아래 목 졸린 꿈 옆으로 용기와 믿음, 의지가 밟혀 눌린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격한다. 모든 어려움을 딛고 꿈을 이룬 이들의 현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다. <맨발의 꿈>은 그 현실을 드라마로 옮긴 작품이다. 꿈이 이뤄낸 현실의 드라마, 그리고 꿈은 여전히 희망을 향해 달리고 있다.
피와 눈물의 땅, 동티모르
1999년 10월 20일, 동티모르의 독립은 5세기 만에 이뤄졌다. 16세기 포르투갈의 긴 점령과 철수 직후인 1975년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입으로 식민지 지배는 계속됐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인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앞세운 끔찍한 학살로서 동티모르에 심각한 민족분열을 야기시켰다. 결국 인도네시아 정권교체와 함께 동티모르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고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이 결정됐다. 피와 눈물의 땅은 비로소 새 역사를 살고 있다.
김태균 감독 인터뷰
<맨발의 꿈>도 <크로싱>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다.
그 사연들이 내게 감동을 주는 바가 있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좀 더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다.
전작과 반대로 해피엔딩이다. 개인적으로 위안이 되지 않았나?
<크로싱>은 작은 부분이라도 해피엔딩을 해주고 싶은 유혹이 강했다. 그래야 흥행될 것도 같고. (웃음) 하지만 양심상 못하겠더라. 힘들어도 그렇게 가야 했지. 그래서 이번엔 다행이고.
영화는 히로시마 대회에서 끝났지만 현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마 그 아이들이 히로시마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축구를 하고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을 거다. 김신환 감독도 좌절했겠지. 하지만 우승 이후로 그 꿈이 계속 가고 있다. 그때 우승 주역들이 작년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아시아 16강에 올랐다. 대단한 성적이지.
<맨발의 꿈>이란 제목은 아이들의 꿈이기도 하지만 김신환 감독의 것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꿈꾸지 못했던 아이들과 꿈이 완전히 꺾인 사람이 만나서 같은 꿈을 향해 뛰어가는 이야기다. 꿈이 이뤄졌다기 보단 꿈을 진짜 꿀수 있게 된 거지.
김신환 감독이란 사람이 궁금하다.
언뜻 보면 사기꾼처럼 보인다. 원래 꿈꾸는 사람은 사기꾼이잖아.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워질 거라던 축구학교를 아직도 못 세웠거든. 동티모르 정부로부터 3만 평의 땅을 받았지만 도내이션을 받지 못했다. 10억이 넘게 필요하다는데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인생의 좌절을 거듭했지만 이제 남을 일으켜 세워주는데 기쁨을 느낀 거다. 그리고 사실 아이들이 그 사람을 살게 해준 거지.
<맨발의 꿈>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뭔가?
진부하고 보편적일지 몰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좌절하지 않는 용기를 주고 싶다. 이 세상에 꿈꿀 수 있는 게 너무도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특히 우리나라 40대 아버지랑 아들이, 가족이 같이 봤으면 좋겠다. 요즘 다들 인생에 지쳐있잖아. 못 먹고 못 살아도 하루 종일 노는 애들을 보면 우리 애들이 너무 불쌍해.
(PREMIERE Seasonbook 'KOREAN MOVIE PREVIEW' 4월호 No.66)
<해운대>는 국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수식어를 차지한 영화다. 백주대낮에 거대한 쓰나미 장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모험이었고, 한스 울릭이라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VFX슈퍼바이저가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이색적이었다. 모팩 스튜디오에서 최종작업이 된 것으로 아는데 일단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고 난관도 많았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모든 공정에 직접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나진 않았나.
방금 말한 대로 <해운대>는 한국 최초의 재난 영화다. 대낮에 대규모 쓰나미를 묘사해야 하는데 난이도가 높고, 우리가 기술적으로 처리해본 적 없는 부분이라 제작자나 투자자 입장에서 경험치가 없는 국내 업체들에게 도박성을 가지고 시도해보라고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닌 게 사실이다. 경험치 없는 작업을 하려면 그만큼의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고, 시행착오에 대한 기회비용을 제공해줘야 한다. 하지만 제작비 한계가 뻔한 마당에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다. 게다가 CG작업 가운데 가장 어려운 분야로 꼽히는 게 물CG다. 데이터양도 워낙 크고, 제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웬만한 기술력이나 인프라가 뒷받침돼 있지 않으면 무리한 작업이다.
제작비가 빠듯하니까 신뢰가 가는 외국 슈퍼바이저를 고용한 셈이다. 그 과정에 대해서 관여한 바가 있나. 그리고 모팩이 <해운대>에 참여하게 된 과정도 궁금하다.
해외업체들을 여기저기 많이 접촉했었지만 그 제작비로 원하는 퀄리티는 보장해줄 수 없다는 답변만 한결같이 돌아왔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스 울릭은 자신이 참여했던 <퍼펙트 스톰>과 <투모로우>의 2배 퀄리티를 그 예산에서 보장하겠다고 장담했다.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두 작품을 책임졌던 사람이 그렇게 대답을 하니 신뢰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스한테 작업을 맡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한스가 예산이 빡빡하니 자기네 팀은 전반적인 슈퍼바이징을 맡되 물 소스의 퀄리티를 높이는 작업에 집중하고 쓰나미를 제외한 VFX샷을 처리하고 나머지 합성 작업을 맡아줄 업체를 파트너로 찾아야겠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국내 업체들의 포트폴리오를 확인하고 체크해본 뒤, 모팩을 선택했다. 그 때 제작사에서 조건을 걸었다. 어차피 모팩에 예산을 많이 배정해주지 못하니까, 대신 모팩에 기술 이전을 해달라는 조건이었다. 그걸 흔쾌히 허락했다.
메인 작업을 한스 울릭이 꾸린 팀이 맡고 서브 작업을 모팩에서 하는 형태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후에 개봉 직전까지 모팩에서 거의 모든 작업을 다시 했다는 말도 들었고.
처음에 작업을 시작하고 한스 울릭 측에서 R&D(연구개발)를 한다, 소스가 나오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그 시간에 쓰나미와 관련 없는 샷들을 미리 진행하면서 한스 울릭이 처리한 이미지 소스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그쪽에서 파이널 데이터가 넘어오기 시작했는데 너무 황당한 퀄리티였다. 그 전에 소스를 몇 개 보여주긴 했지만 3~40% 작업 단계라니까 점차 좋아지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결과를 보니 투자사나 제작사도 발칵 뒤집힐 정도였다. 그때부터 <해운대>CG가 개판이라니, 재난영화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재난이니, (웃음)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거다. 안에서도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이 상태로 끝장이라 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개봉날짜도 결정된 상황이었으니까. 결국 투자사 측, 제작사 측, 그리고 나까지 미국으로 다 몰려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상황을 체크해본 결과 누가 봐도 폴리건 엔터테인먼트가 작업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게 ‘명약관화(明確觀火)’였다.
물CG의 제작방식에 대해서 설명해줄 수 있나?
물CG를 만드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기술적인 부분이라 일반인들이 이해하긴 조금 힘들겠지만 쉽게 설명해보자면, 아까 말한 것처럼 물CG는 데이터 양이 크고 제어하기 힘들기 때문에 구현하기가 어렵다. 한스가 제안한 건 물을 제대로 시뮬레이션하는 ‘레벨셋 시뮬레이션(Level-set Simulation)'인데 입자 하나하나가 진짜 물처럼 움직이는 거다. 그만큼 비용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물을 제대로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의 작업방식을 응용해서 물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그게 '서페이스 디포밍(Surface Deforming)'이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면 종이 한 장을 펄럭거리면 물이 출렁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물의 질감을 부여해서 좀 더 디테일하게 출렁거리게 만들어서 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다. 물론 그것도 보다 정교하고 과격한 움직임을 만들려면 꽤 까다로운 작업이 된다. 하지만 기존에 상용화된 툴 안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국내 업체들조차도 어느 정도 스킬이 있는 아티스트들에게 미리 준비 작업을 시켜서 시도하면 꽤 괜찮은 결과물을 획득할 수 있는 수준까진 왔다.
아무래도 좋은 퀄리티도 중요하지만 <해운대>에 책정된 예산으로 고비용의 작업에 예산을 투자하는 건 부담이었을 텐데, 레벨셋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는 한스 울릭 측의 근거가 궁금했을 텐데.
<해운대>의 스케일이 이 예산으로 레벨셋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제대로 묘사하기 쉽지 않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하겠다는 건지, 내가 질문했을 때, 한스 울릭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미 우리는 ILM시스템을 지원받아서 활용할 수 있도록 계약이 돼 있다.” 그렇다면 답이 된다. 왜냐면 ILM이 그 당시 가장 훌륭한 시뮬레이션 파이프라인과 시스템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거든. 그럼 당연히 그럴 듯하지. 게다가 한스가 ILM출신이기도 하고.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렇게 계약된 적이 없더라. 그리고 미국에 가서 보니까 레벨셋 시뮬레이션을 약속해놓고 그렇게 하고 있지도 않았고. 물론 한스가 고용한 많은 아티스트들은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는 능력을 갖추고 있고, 경력도 있는 작업자들이었던 건 맞다. 그런데 그들이 몇 명 정도 모인다고 해서 갑자기 어마어마한 게 가능한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사실 그 당시 내 느낌으론 이건 속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결국 모팩에서 모든 것을 다 떠맡게 된 것으로 아는데,
투자사와 제작사가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작업하던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나한테 슈퍼바이저 역할을 주고 내가 작업의 총책임자가 되면서 미국에 소스를 요구하게 된 거다. 소스만 받아서 나머지 작업을 우리가 다 하는 걸로 결정했지. 그런데 그쪽에서 작업을 진행했던 소스들로는 도저히 퀄리티를 맞출 수가 없어서 그 과정에서 극심한 반발이 있긴 했지만 아예 방법을 바꿔버렸다.
쓰나미 이미지가 사실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우리가 작업하기 전에 자료들을 굉장히 많이 찾아봤는데 실제로 쓰나미는 배불뚝이처럼 부풀어서 쑥하고 밀려온다. 보기에 위압감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물이라는 게 사람 무릎 높이로만 밀려들어와도 사람이 그 힘을 제어할 수 없다. 쓰나미가 위험한 건 그 때문이다. 그 힘에 쓸려가게 돼있다. 그렇게 쓸려나가기 시작하면서 각종 쓰레기나 기물들과 엉키고 레미콘 안에서 시멘트가 돌과 자갈에 섞여 들어가는 것처럼 끔찍하고 잔인하게 죽는 거다. 그 안에 엉켜 들어가면 시체가 거의 갈갈이 찢어진다. 정말 지저분하면서도 무시무시하지.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렇게 묘사할 순 없는 거였다. 그래서 ‘에어포일(airfoil)’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서핑 파도 같은 이미지로 아예 형태를 바꿔버렸다. 과학적인 이미지는 아니지만 시각적으로 훨씬 위압감을 주는 방식으로 작업 방향을 잡고 다시 시작한 거다.
그 시점이 언제였나?
그때가 4월 초였다. 불과 개봉을 두 달여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내가 직접 지시해서 미국에서 받아온 소스들은 그대로 쓸 수 없어서 기본 작업만 된 데이터를 받아서 우리가 전부 다시 재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질감도 바꾸고, 조명도 바꾸고, 렌더링도 다시 하고, 디테일도 다시 추가하고, 최종합성을 한 뒤, 결국 640컷이 넘는 작업을 두 달여 만에 완전히 다시 하다시피 했다.
넉넉한 시간이 확보되지 못한 시점에서 재작업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그런 지점에서 아쉬움이 남지 않나?
사실 완성도에 있어서 절대 만족스러울 수가 없지. 그리고 결국 이렇게 레벨셋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서페이스 디포밍을 메인으로 가는 방식이 될 거였다면 애초에 우리에게 우리 기술 내에서 가능한 방법을 찾아보라고 주문하는 게 훨씬 나았을 거란 생각에 답답하고 화나는 것도 없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좀 더 나은 방법을 강구하고 지금보다 더 높은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확보됐을 거다. 그리고 미국에서 사용된 예산의 절반 이하로 비용을 절감할 수도 있었을 거고. 예고편 나가고 악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히 관객들이 받아들일만한 수준으로 마무리시켰다는 점에서는 위안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굉장히 아쉽고 불만족스러운 결과다.
올해 개봉 예정인 <워리어스 웨이>의 VFX작업에 참여했다. 당시엔 <런드리 워리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영화였는데 해외에서의 작업조건의 차이를 느낄만한 기회였을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 계약서는 갑을이 공정하지 않다. 무조건 갑에 유리한 조항들 투성인데 할리우드 계약서는 두께부터 책 한 권 분량인데다가 을에 대한 보장이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더라. 문제가 생겨도 우리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명시한 조건들이 많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만 제대로 해내면 그 외의 문제가 발생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항들이다. 최소한의 작업기간을 보장하고, 기본적인 소스를 언제까지 제공해주며, 난이도에 따라서 작업시간의 차별적인 보장을 책임진다는 조항까지 있다. 할리우드의 방식은 분명 굉장히 합리적이고 퀄리티를 보장해주는 방식이다. 물론 그 방식이 무조건 훌륭한 건 아니다.
어떤 점에서 말인가?
권리를 주장하고 보호받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더 적은 비용과 더 빠른 시간 안에서 훨씬 더 효율적으로 퀄리티를 생산해낼 수 있는 방법들이 있음에도 그것들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게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모든 면에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취하는 방식이 상당 부분 할리우드보다 유리하고 효과적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생기더라. 할리우드가 무조건 답이라고 볼 순 없는 거다.
물론 여전히 기술적으로 취약한 지점도 존재하고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지점이 있지만 국내 VFX산업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빠른 성장을 이뤘다고 자평해도 좋을 것 같다.
짧은 시간 안에 굉장히 많은 발전을 이뤘다는 건 맞다. 그만큼 우리가 내부적으로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노력한 지점이 분명히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실 국내에서 콘텐츠가 활발하게 제작됐고, 우리에게 그 콘텐츠를 제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끊임없이 제공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닥치는 프로젝트를 당장 해내려다 보니 경험치가 쌓이고, 좀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구르다 보니 여기까지 굴러오게 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웃음) 다만 워낙 조건이 열악하다 보니까 스스로 발전할만한 동력을 갖기 어렵다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가 ‘구르던’ 이란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더라도 스스로 발전적인 도약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었다. 그나마 콘텐츠의 활발한 제작으로 기회가 제공됐다는 게 유일한 기회였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한 평가가 온당하지 않다는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나?
사실 우리나라 소비자, 관객들은 까다롭지 않나. 쉽게 만족하지 않는다. 제작비가 얼마였던지, 제작기간이 얼마였던지, 이런 거 안 따지거든. 사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다. 극장가서 한국영화나 할리우드 영화나 동일한 티켓값을 지불하는 마당에 그런 걸 봐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완성도를 추구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가 된 거다. 조건이 열악해도 욕먹지 않으려면 완성도를 추구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발전한 거지.
CG를 활용하면 제작비가 상승한다는 오해도 많다. 물론 요즘 블록버스터의 예산은 CG에 할당되는 비율이 높은 게 사실이지만 CG가 제작비를 경감하는데 활용되는 경우도 많다.
제작비가 커지는 요인으로 CG를 지목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내가 볼 땐 일정 부분 오해가 있다. 오히려 제작비가 열악하고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CG에 의존하게 됐고 더 높은 완성도와 더 큰 스케일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거다. 우리나라처럼 제작비 상황이 열악하면서도 관객들의 요구가 높은 환경일수록 CG의존도는 점점 더 커질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활용가치가 그만큼 크다고 예측된다. 내 생각에 우리가 작업한 7~80%의 작품에서 CG는 제작비를 절감하는 동시에 완성도를 추구하는 쪽에 활용됐다고 본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국가대표>의 마지막 스키점프 장면 같은 경우, 만약 세팅해서 찍었다면 상당히 많은 돈이 깨졌을 거다.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아주 훌륭한 사례가 아닐까? 사실 기술적 난이도가 높은 작업은 아니지만 효과적으로 잘 활용된 케이스라고 보인다. 영화에서 크게 기여한 셈이지. <해운대>는 너무나 당연한 케이스고.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중공군이 밀려오는 장면 처리도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효율적인 사례지.
사실 국내에서 할애되는 CG작업의 비용은 할리우드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미비한 수준에 가깝다.
우리나라는 할리우드에 비해서 VFX제작비용이 싸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에게 놀라운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건 영화가 잘 만들어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제작비 대비 완성도가 기겁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윤제균 감독님은 JK필름을 할리우드에 진출시켜야 한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 (웃음) 그래서 미국 쪽하고 접촉하고 계시는데 다들 하나같이 <해운대> 제작비만 들으면 깜짝 놀란다더라. 물론 <해운대>가 할리우드 스탠다드 퀄리티라고 볼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제작비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판단했을 때 어떻게 이런 이미지를 획득해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거다. 그런 면에선 경쟁력이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건 국내 산업적 단가가 낮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작업자들에 대한 충분한 대가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불합리한 상황이 오히려 가격경쟁력으로 와전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사실 제작비가 절감됐다는 측면은 희생을 밑바탕에 깔고 우리가 스스로 감내하면서 더 요구해야 할 비용을 우리 스스로 감내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는 상황이 변화돼야 할 지점이 있긴 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단지 싸다는 것으로 경쟁력을 유지한다는 건 산업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거다. 비싸다고 할지라도 퀄리티로 승부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지난해 11월에 AFM(American Film Market)에서 국내업체들과 공동으로 부스를 차리고 해외 프로모션을 했다. 당장 눈에 띄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현장에서 보고 들었다는 점만으로도 특별한 성과가 아니었을까.
우리를 포함해서 모든 업체가 여러 가지 상담을 했다. 사실 계약 직전까지 가니 마니, 이런 건 언론용 멘트에 가깝다.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었던 건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애초에 관심도 정보도 없었던 해외 영화사나 제작사들이 한국에 이런 VFX업체들이 의외로 많고 생각보다 퀄리티가 괜찮다는 인식을 조금씩 만들어냈다는 거다. 일단 알릴 수 있어야 그 다음 기회도 발생한다. 국내 VFX업체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던 상황에서 해외 홍보효과란 측면만으로도 분명 의미 있는 행사였다.
AFM진출을 보도하는 뉴스나 기사 가운데 해외진출이 가시화된 것처럼 말하는 보도가 많았다. 사실상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당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나라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라서 그런지 어느 날 우리가 갑자기 할리우드의 유명 작품에 깃발 꼽기를 기대하는 측면이 있더라. 그게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입장을 바꾸고 생각하면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작품들도 그들 나름대로 목숨 걸고 하는 작품일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아시아 변방 국가에 메인 작업을 맡길 리가 없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모든 것이 확 이뤄질 것처럼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는 하는 면이 있다. 우리가 처음에 어필할 수 있는 건 가격 경쟁력일 수 있지만 시장에 조금씩 스며들듯이 참여해서 좋은 평판을 얻어내기 시작하면 기회가 열릴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너무 성급하게 치고 들어갔다가 결과가 좋지 않아서 평판이 떨어지면 다시 되돌리기도 힘들어진다. 해외진출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겠지만 그래서 너무 성급하게 질러나가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신중해야 하는 입장이다.
<괴물>당시 작업한 오퍼니지의 데이터는 오퍼니지의 소유였기 때문에 결국 국내에 남겨진 것이 없는 것으로 안다.
뒷맛이 씁쓸한 지점이 없지 않았다. (웃음)
그런 의미에서 <해운대>는 결과적인 데이터를 모팩에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노하우가 우리에게 남겨졌으니까. 비슷한 작업을 다시 한다면 훨씬 효율적인 방식으로 더 높은 완성도를 끌어낼 자신이 생겼다.
JK필름에서 제작하는 <제7광구>에도 참여하나?
지금 프리 프로덕션을 2달 가까이 진행 중이다. 컨셉트 디자인까지 우리가 다 맡아서 진행하고 있다.
심해괴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알고 있는데 역시나 국내에선 블록버스터 규모의 예산이 투자된다고 들었다. 일단 크리쳐 무비라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일종의 모험이 될 수도 있겠다.
아까 <해운대>의 노하우가 우리에게 자산이 됐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렇다고 그 자산이 <해운대>같은 영화만을 위한 자산이 되는 건 아니다. <해운대>를 해봤기 때문에 큰 데이터를 컨트롤해야 할 수 있는 노하우가 우리에게 생겼다. 성향이 다른 작품이라 해도 그 스케일을 효과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거다. 예를 들자면 계속 1~2층짜리, 아니면 높아 봐야 3~4층 건물 짓던 사람이 갑자기 3~40층 건물을 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건물의 성격이 달라지는 건 다른 문제다. 큰 호텔을 지어봤던 사람이라면 규모가 큰 공장을 짓는 것도 가능할 수 있는 거다. 스타일이 달라질지언정 스케일이 큰 건축물을 지어봤던 노하우는 고스란히 활용된다.
현재 한국에서의 VFX작업에 대한 활용도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보나?
의외로 기존의 감독이나 제작자들이 VFX에 대한 이해도가 심각하게 낮다. 그래서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고, 이런 식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봤을 땐 국내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반도 써먹지 못하고 있다. VFX기술을 활용할 때 가능한 확장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거다. 그러면서 자꾸 할리우드만큼 그림이 안 나오네, 이런 자조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자기 주머니의 쌈짓돈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계속 남의 방만 쳐다보고 부러워하는 꼴이다.
그래도 과거보단 많이 나아진 수준이 아닌가?
과거엔 심각한 수준이었지. 그래 놓고 책임만 우리한테 묻는 이상한 형국이었는데 지금은 그것보단 협조적이긴 하다. 이젠 영화에서 VFX가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는 메인 스텝이라는 걸 인정하고 우리 의견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다루진 않는 수준까진 왔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게 야기시키는 문제가 있다. 준비상황에서 작업 중인 현장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가르키는 방향을 봐야 하는데 자꾸 손가락 끝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하지만 자꾸 자기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거다. 결국 제대로 된 소스가 획득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렇지만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 않았냐고 말하게 되고, 결국 그런 면에서 답답해지는 거지.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가 지휘를 하는데 연주자가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자기 악보만 보고 연주해버리는 거다. 개개인의 연주가 나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결국 오케스트라가 파워를 발휘하는 건 지휘자가 곡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향으로 곡의 느낌을 끌고 가느냐에 달렸다. 그런 면에서 조합이 잘 이뤄지지 않는 면이 발생하는 거다.
CG를 이용한 프리 프로덕션도 활용되고 있다. 사실 프리 프로덕션은 촬영 단계에서의 낭비를 줄이고 보다 효율적인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업이다.
그렇다. 프리 프로덕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선 프리 프로덕션이 무엇을 해야 하는 단계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프리 프로덕션이 중요하다고 다들 말로는 떠들지만 실질적인 방법은 모르고 있다. 할리우드가 무서운 건, 표면적으로 그들이 확보한 기술적 시스템을 활용하기 때문이라고 보일지 모르지만 그보다도 프리 단계에서의 충분한 검증을 통해서 완성도를 보장할만한 프로세스를 확보하고 작업을 시작한다는 점에 있다. 결국 프로덕션과 포스트는 그걸 실행하는 단계지. 애초에 프리 프로덕션을 통해 깨지고 부딪히며 시행착오를 겪는 난장판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는 거다. 게다가 숙련된 스태프들이 많은 덕분에 계획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그렇게 사전에 계획을 미리 세우고 출발하니까 예측대로 훌륭한 답이 나온다. 사실 비용이 지불되지 않는 프리 프로덕션은 진짜 프리 프로덕션이 아니다. 우리는 배우 캐스팅 시기와 투자 계약 시점이 맞물리기 때문에 대부분 크랭크 인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제작이 가시화된다. 그러니까 국내에서 대부분의 프리 프로덕션이라는 건 기존에 작품을 같이 해왔던 스태프들과의 친분이 있어서 이번 작품도 같이 해보자며 사전미팅을 준비하는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자기들이 해왔던 경험치 내에서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서로 의논하는 단계랄까. 사실 프리 프로덕션은 이미 실행하는 단계여야 한다. 그게 안되고 있다.
여전히 CG에 대한 거부감을 지닌 사람도 있을 테고, 반대로 CG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리란 막연한 믿음을 지닌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지나치게 터부시해서 소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우도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냥 다 CG에 의존해버리려고 억지를 부리거든. 사실 CG가 모든 걸 해결해주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고, 다른 VFX효과를 이용했을 때 더 효과적인 부분이 있고, 절대 CG를 활용해선 안될 만한 부분도 있다. 그런데 그걸 구별하지 못하고 함부로 사용하니까 결과물이 난잡해지고 퀄리티가 엉망이 되는 거다. 얼마 전에 박철수 감독님이 인터뷰를 하나 했던데 답변을 보니까 참 답답해지더라.
어떤 내용이었나?
우리나라 영화에 CG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한국영화가 망가졌다고 하시고 <그랜 토리노>를 예로 들었더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CG를 전혀 쓰지 않고도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나. 그건 몰라서 하는 말씀이다. <그랜 토리노>가 CG를 적극적으로 쓴 영화는 아니지만 구석구석 CG를 꽤 쓴 작품이다. 다만 효과적으로 필요한 곳에 활용했기 때문에 CG라는 게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전에 <아버지의 깃발>이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CG투성의 영화 아닌가. <스페이스 카우보이>도 CG없이는 불가능한 영화였다. CG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모르고 난잡하게 사용된 결과물만 보고 그 자체를 터부시한 셈이다. 만약 어떤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지 않았다면 연기를 못한 그 배우와 그 배우에게 제대로 된 디렉션을 주지 못한 연출자에게 문제가 있는 거지, 연기자 전체가 의미 없다고 싸잡아 판단하는 건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다. 그런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거다. 물론 박철수 감독님은 극단적인 케이스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충무로를 좌지우지하는 많은 제작자나 감독들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는 태생 자체가 기술로부터 비롯된 예술이다. 기술과 함께 하는 예술인 셈이다. 그 자체를 부정해버리면 답답해지는 거다. 훌륭한 감독들은 언제나 훌륭한 기술을 활용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지 모르겠다. 그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 아닌가.
어쩌면 그런 개인들의 이해도가 높아지는 게 기술적인 발전이나 시스템의 해결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다.
훌륭한 연기자는 캐스팅 리스트에서 우선 순위에 올라갈 수 밖에 없고, 연기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도태돼야 당연한 거다. 마찬가지로 VFX를 훌륭하게 수행해내는 업체들이 기회를 더 많이 갖고 그렇지 않은 업체들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면서 옥석이 갈려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작품을 끝내고 나서 제대로 된 검증이 이뤄지지 않는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예산 대비 퀄리티를 끌어냈는지에 대한 검증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품마다 조건이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비교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까 비용에 비해서 작업 결과가 엉망이었다 해도 그냥 분위기 타서 대충 넘어가고,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 하에서 엄청난 기여도를 남겼음에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내가 봤을 땐 그걸 판단하는 안목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조금 억울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느낀다.
많은 개선점이 필요하다 느끼겠지만 개선이 시급한 사안이라고 느끼는 부분이 있나?
장기적으로 많은 부분들에 대한 계획이 필요하겠지. 그렇지만 일단 지금 당장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프리 프로덕션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제대로 준비하는 게 무엇인지를 인식시키고 그렇게 준비하는 과정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적극적으로 활용됐을 때 값어치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증명해서 기존 방식대로 영화를 제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한계를 깨닫게 만들고 프리 프로덕션의 의미를 갖게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그걸 설득하기가 쉽진 않지.
일단 그런 설득이 가능한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그나마 <해운대>를 하고 나서 윤제균 감독님과 어느 정도 신뢰가 생겼고 상당한 이해를 얻고 있다. 그리고 감독님도 우리한테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계신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반응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다. 사실 투자자도 따라서 반응해줘야 되고 산업 전체가 이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들어줘야 되니까 쉽지 않다. 결국 좋은 선례를 제시해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했더니 이런 결과를 얻었다, 라는 선례를 보여줌으로써 앞으로는 그것이 당연해지는 풍토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상당한 숙제다.
결국은 키를 쥐고 있는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다.
내 학부 전공이 시각디자인이다. 대학 시절, 강사 한 분이 우리나라 디자인이 발전하지 않는 이유는 클라이언트의 안목이 수준 이하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디자이너가 아무리 훌륭한 시안을 들고 가도, 그 시안 몇 개 가운데 가장 후진 시안을 선택한다는 거다. 결국은 사주는 사람의 안목이 발전하기 전에는 디자인이 발전할 수 없다는 거지. 디자이너들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이 제시하는 디자인을 받아주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다. 잔인하게 얘기하면 돈 쥔 자들이 깨어나지 않는 이상 쉽지 않은 문제다. 제 아무리 보검이라 해도 그걸 그냥 식칼로 사용하면 어떤 의미가 있겠나. 결국 사용자가 그 가치를 깨닫고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의미 있게 쓰이는 거다. 우리가 해야 할 노력도 있지만 그 노력만으론 부딪혀야 할 한계도 크다.
VFX에 대한 무지를 타파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VFX를 작업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공부하는 반면, 영화를 작업하는 사람들은 VFX에 대해 무지하다는 게 결국 작업적 결과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뮤지컬을 연출하는 사람이 음악을 공부하지 않고 이해도도 없다면 말도 안 되겠지. 당연히 VFX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충분한 공부를 하고 이해도를 지녀야 한다. 감독이 연기 지도를 하면서 연기에 대해서 아무런 기준도 관점도 없다면 한심할 거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네오이마주 편집장인 백건영 평론가님의 부탁으로 리스트를 작성하긴 했으나 순위를 뽑는다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여하간 올해 개봉했던 한국영화 리스트를 쫙 펼쳐놓고 작품을 걸러냈다. 인상적이라 생각했던 한국영화의 목록은 이렇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추격자> <밤과 낮> <님은 먼 곳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멋진 하루> <비몽> <영화는 영화다> <미쓰 홍당무>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과속 스캔들>까지, 순서는 대략 개봉 순이다. <우린 액션배우다><경축! 우리 사랑>은 보지 못했고, 장률 감독의 <경계> <중경> <이리>를 비롯해서 <어느 날 그 길에서><작별>도 놓친 관계로 결과에 반영될 수 없었다. 여하간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 중에 5편을 선정했다. 지극히 사적이고 순간적인 선택으로 좌우된 리스트일지도 모르니 지나친 간섭은 자제를 요망한다. 이런 개인적인 리스트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니까, 누가 최고라고 부추겨주지 않아도 고유의 가치는 보존되는 법이다. 순위는 그저 사족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여하간 내년에도 좋은 한국영화를 여러 편 만나길 고대한다.
1. <밤과 낮> 홍상수 감독
홍상수의 남자들은 언제나 비루하게 흔들리고 홍상수의 여자들은 그 흔들리는 남자에게 마음을 잘도 열었다 닫곤 한다. 밤과 낮이라는 차별적 서사 안에서 파리와 서울이라는 이질적 공간이 반대편에서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동시간에 놓인 반대의 영역적 공간이 물리적 시간을 반대편으로 밀어내며 서로의 차이를 동일하게 보존하고 있음이 체감될 때 이 영화는 온전히 신비롭다. 무덤덤하면서도 일상적인 언어로 되풀이 되는 순간들이 경이롭게 발견된다. 여성의 음부를 세상의 기원이라 말하는 쿠르베의 그림처럼 일상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영화적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밤과 낮>은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실로 경이로운 영화적 체험이 아닐까. 현실에서 곧잘 보지 못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들이 영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2. <미쓰 홍당무> 이경미 감독
<미쓰 홍당무>는 올해의 발견이다. 물론 <추격자>도 발견이라 말해야겠지만 <추격자>는 그보단 성과라고 말하고 싶다. <추격자>가 문법적 응용이라면 <미쓰 홍당무>는 문법의 창작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제작자 박찬욱 감독의 영향력이 종종 엿보이긴 했지만 <미쓰 홍당무>는 분명 이경미 감독의 신선한 재능이 앙칼지게 드러난 수작이다. 전혀 가늠할 수 없는 태도로 보편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동시에 생경한 드라마로 호응을 이끌어내고 종래엔 동감하게 만든다.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인다. 이경미 감독만큼이나 공효진과 서우도 발견이라 할만한 재능을 드러냈다. 여성 감독이 빈곤한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스토리가 먹혔다는 사실도 고무적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이한 창의력으로 말이다.
3. <멋진 하루> 이윤기 감독
오래 전 헤어졌던 전처가 찾아왔다. 350만원을 받기 위해서. 이상한 만남에 이어 이상한 동행이 시작된다. <멋진 하루>는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이상한 로맨스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동선과 감정의 궁극적 종착지는 낭만을 통한 치유에 있다. 서울 곳곳의 풍경이 생경하면서도 드넓다. 카메라의 탁월한 구도 감각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행하는 두 사람의 심리 변화가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에 적용되는 인상이다. 단 하루 동안 지속되는 동행엔 지난 로맨스의 낭만이 깃들기도 하고, 삭막한 현실의 암담함이 그늘지기도 한다. 그 만남은 결국 도피적 일탈이 아닌 치유적 여행이 된다. 350만원이라는 적지도 많지도 않은 액수의 금액은 희수의 태도를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넘치는 병운의 낙관적 태도는 그 예측불가능한 동선을 그린다. 삭막해서 무료한 삶에 생기가 돈다. 지난 로맨스에서 비롯된 채무관계가 추억을 복원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따뜻하다. 해프닝 같은 사연으로 깊은 드라마를 만들었다. 두 배우의 연기만큼이나 깊고 투명한 울림이 인상적이다. 지극히 사소한 방식으로 특별한 감수성을 선사한다.
4.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신동일 감독
골목을 빽빽하게 메운 차량들로 가득한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퇴근하고 나서도 상사의 복귀 명령에 다시 회사로 달려가야 할지 모를 불안감에 떨어야 하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이 영화는 정말 대한민국이라는 연옥을 실감하게 한다. 물론 그런 비극 같은 상황을 엮어내는 타이밍이 절묘하다. 극적인 재미가 충분하다. 관계가 뒤엉키는 찰나가 파국으로 빚어지는 여정들이 흥미롭게 이어지고 펼쳐진다. 정치적인 메타포들이 하나같이 극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때떄로 시치미 뚝 떼고 제 얘기를 한다. 가볍게 유희적이지만 한편으로 진지하게 엄숙하다. 소심한 척은 다하면서 극단적인 세기를 보여준다. 2년 만에 개봉했다는 게, 그리고 고작 4개관에서 개봉됐다는 게 아이러니할 정도의 수작이다.
5. <추격자> 나홍진 감독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건 지루한 일이 됐다. 하지만 <추격자>는 분명 중요한 영화다. 날것의 기운이 곳곳에 배어있다. 그 기운이 장르적으로 밀착해서 완전한 몰입을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적인 영역을 넘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비범한 재능을 지닌 신인 감독의 성공이, 탄탄한 내공을 지닌 연기파 배우들의 성공이, 그리고 그런 영화를 지지한 관객들의 움직임이, <추격자>의 진면목이다. 정서적으로 암울하고 지독하게 잔인한 이 영화의 악랄함이 끌어낸 호응의 수치야말로 현재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솔직한 정서에 가깝다. 수많은 시상식이 이미 이 영화의 가치를 지겹게 설명하고 있지만 현재 한국영화에서 부족한 어떤 요소가 분명 <추격자>에 존재한다. 물론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분명 잘 만든 영화에 속한다. 우린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 이 영화가 이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배경에 대해서 유념할 필요가 있다. <추격자>가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